<데드걸>, 이해와 공감을 넘어 새로운 연대와 실천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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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가 끝난 캘리포니아의 어느 포도밭에서 젊은 여자의 시신 하나가 발견됩니다. 영화는 시체를 처음으로 발견한 여자(The Stranger), 시체를 부검하는 여자(The Sister), 그 젊은 여자를 죽게 만든 연쇄살인범의 부인(The Wife), 죽은 여자의 엄마(The Mother), 그리고 죽은 그 여자(The Dead Girl)의 이야기를 차례로 보여줍니다. 다섯 개의 에피소드가 진행 중에 교차하지는 않고 단순 배열되는 구성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 혼란을 느끼거나 할 일은 없습니다. 연쇄살인에 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범인을 밝혀내고 응징하는 과정을 그린 스릴러물이 아니라 그 주변 인물들의 삶과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석의 여지에 따라서는 사회성 강한 여성 영화로도 충분히 자리매김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특정 사건과 관련이 있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병렬해서 보여주는 방식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아모레스 페로스>(2000), <21그램>(2003), <바벨>(2006))의 그것과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데드걸>의 에피소드들은 죽은 여자와 관련성이 가장 적은 인물로부터 시작해 점점 가까워지다가 결국 죽은 여자 본인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며 끝맺는 나선형 플롯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관련성이 적은 인물들의 이야기에서는 빛과 어두움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인물 각자의 감정을 드러내고 전달하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는 반면 사건의 전말에 좀 더 가까운 인물과 죽은 여자 본인의 이야기를 다룰 때에는 훨씬 밝은 색감으로 전체 내러티브를 명확하게 마무리 하는 데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인상입니다.

<데드걸>을 보면서 떠올리게 되는 또 한 편의 영화는 로드리고 가르시아 감독의 <나인 라이브즈>(2005)인데요, 마찬가지로 여러 등장 인물들의 에피소드들을 병렬하는 구성 방식과 무작위로 채택된 듯한 각 에피소드들이 결국 하나의 동일한 감정과 주제로 수렴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데드걸>은 후반부로 갈수록 전체 내러티브의 완결성에 신경을 쓰면서 초반에 일궈놓은 감정의 깊이를 많이 깎아먹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바꿔 말하자면, 토니 콜레트와 로즈 번, 그리고 메리 베스 허트가 연기한 3개의 에피소드가 서로 간의 연관성을 깊게 갖고 있지 않는 대신 각자의 이야기와 감정을 좀 더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는 반면 마샤 게이 하든(죽은 여자의 어머니)과 브리트니 머피(죽은 여자)의 이야기는 전체 내러티브의 발단에 좀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면서 사건의 후일담과 경위를 밝혀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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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다섯 개의 에피소드는 모두 동일한 주제와 감정으로 수렴됩니다. <데드걸>은 미국 사회, 나아가 남성 중심 사회와 자본주의 체제 전체의 공통된 구조적 모순을 직접적으로 겨냥하는 데에까지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영화는 그런 상황 안에 놓여진 여성들의 입장과 감정을 전달하는 일에 주력합니다. 벌어지는 현상은 많은 여성들이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버림 받거나, 버림 받는 것이나 다름없이 가정 내에서 소외되거나, 그 중 일부는 납치되거나 살해되거나 때로는 매춘을 하며 온갖 위험 앞에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지만 <데드걸>이 담아내고 있는 내용들은 현상의 일부이거나 그로 인한 결과들일 뿐이지 근원적인 해결책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회와 가정 내에서 소외되고 상처받는 이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 그 감정을 전달받고 공감하는 일은 결코 가벼이 생각될 부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각자가 무엇인가를 해나갈 수 있게 만드는 진정한 출발점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데드걸>은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거대 담론을 꺼내놓기 보다는 이해와 공감, 그리고 여성들 스스로의 각성과 연대를 이야기하는 영화입니다. 죽은 여자의 팔뚝에 새겨진 12:13이라는 문신은 창세기 12장 13절의 앞부분인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The Sister)라 하라”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죽은 여자의 어린 딸이 태어난 12월 13일을 의미하는 숫자였습니다. 여성의 탄생과 자매애를 연결시키는 이 영화는 죽은 여자의 어머니가 버려진 손녀를 찾아 거둬들이는 후일담을 보여줌으로써 비극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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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드걸>의 등장 인물들은 죽은 여자를 중심으로 연관되어 있긴 하지만 처해진 상황과 해결 방식이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처참하게 살해된 시체를 보고 그런 모습으로 죽어서라도 발견되어지길 원했던 여인(토니 콜레트)이나 과거의 것들을 모두 불태워버림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려는 여인들(로즈 번, 메리 베스 허트)은 자기 삶의 주체로서의 각성과 새로운 출발을 보여주거나 암시합니다.(out of being “Taken”) 그리고 자동차 앞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 조차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던, 그래야 한다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그녀(브리트니 머피)는 비록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지만 그녀가 낳은 새로운 생명은 누군가 나서기만 한다면 급한 대로 방치된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고 여건이 되는 대로 좀 더 안전한 카시트에 태워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데드걸>의 시도는 문제의 근원을 해결하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수준의 ‘재발 방지’ 내지는 ‘비극적 결과의 최소화’라고 평가 절하될 필요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작더라도 바로 실천하는 것이 올바른 접근 방식일테니까요.

모두에 언급한 ‘영화 초반의 감정적 깊이가 후반으로 가면서 점차 희석되고 내러티브의 구체화에 비중을 둔다’는 인상은 어쩌면 <데드걸>의 여성 감독 카렌 몬크리프가 처음부터 의도했던 바였다고 생각됩니다. 관객에게 전달해놓은 감정의 골을 지속시키기 보다는, 그리하여 눈물을 글썽이며 카타르시스만 경험하고 끝내기 보다는 영화가 끝난 이후에 좀 더 이성적인 해석과 판단을 해주기를 바랬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안 감독 영화의 제목을 빌려 다시 표현해보자면 관객의 색을 건드린 이후에 새로운 계를 얻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데드걸>이 선택한 플롯 상의 전략이라는 생각입니다. <데드걸>이 전달해준 색과 계를 제대로 받아들인 관객이 극장 밖에서 기시감을 일으키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그런 이슈들을 접했을 때에 어떤 판단과 행동을 하게 될 것인지를 예상해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데드걸>이 사건의 전말이나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응징하는 과정을 제쳐놓고 여러 주변 인물들의 감정과 후일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이유입니다.


영진공 신어지

이번 대선, 누구냐? 왜냐?

대통령 선거가 20여일 앞으로 다가온 이 시점에도 나를 비롯한 많은 유권자들이 12명이나 되는 수적으로 풍부한 후보들 중에서 누구를, 왜 선택해야 하는 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개인적으로는 다섯 번째 맞는 대선인데, 이번처럼 누구를 왜 찍어야 하는지 고민되는 선거가 없었다. 오히려 누구를 왜 안 찍어야 하는지는 확실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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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라는 거냐???


영화와 문화를 이야기하고 서로 소통하여 보다 즐거운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고자 하는 우리 영진공인데, 이런 답답한 상황에 대고 한 마디 안 할 수 없는 터이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문화일보에서 11월 28일자로 보도한 대선후보 지지도에 대해 인용하도록 한다.


“‘오늘 투표한다면 누구를 찍겠는가’라는 지지도 질문에 이명박 한나라당(39.6%), 이회창 무소속(21.0%),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17.8%), 문국현 창조한국당(7.1%), 권영길 민주노동당(2.5%), 이인제 민주당(0.7%), 심대평 국민중심당(0.4%) 후보 등이다. 이수성•정근모•허경영•전관•금민 후보 등 군소후보들은 통계상 유의미한 지지율이 잡히지 않았고, 5명을 모두 합해 0.4%에 불과했으며, ‘지지후보없음•무응답’은 10.5%이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1128010301230290021


여러 가지 위장 사실이 드러나고 그보다 더 많은 의혹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이명박 후보는 여전히 선두에 나서있다. 그리고 이회창 후보와 정동영 후보가 뒤를 따르고 있는 형세이니, 이변이 없는 한 이 세 후보 중 하나가 차기 대통령이 될 듯싶다. 그런데 이 중 이명박과 정동영 후보는 그들의 소속 정당이 표방하는 바나 이미지와는 달리 참으로 어정쩡하게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참고로 이번에 나온 12명의 후보 중에서 정치지향점과 이념을 확실히 밝히고 있는 후보는 이회창, 권영길, 금민 후보 정도라 할 수 있겠다. 이회창 후보는 한국 보수우익의 대표임을 자임하며 나섰고 권영길 후보는 진보대통령을 표방하고 있으며 금민 후보는 사회당의 후보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스스로 한국 우익의 본산임을 자랑스러이 내세우는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는 지난번 버시바워 美 대사와의 면담에서 “이번 대선은 친북좌파와 보수우익의 대결”이라는 발언 이후 짐짓 우익이나 보수라는 표현을 삼가며 “중도실용”을 강조하고 있고, 통상 진보로 분류되면서 민주화 세력의 적자 임을 내세우는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도 스스로를 진보라 하지 않고 “중도개혁”을 외치고 있다.


*우리만큼 “좌파”, “우파”, “보수”, “진보”의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채 편의에 따라 혼용되는 사회도 드문 편인데, 이 글은 그 개념을 정리해 보자는 글이 아니니 좀 거슬리는 분들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한나라당은 줄곧 무능한 좌파정권을 갈아치우자고 주장하고 있고, 대통합민주신당은 부패한 보수우익세력의 재집권만은 막아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는데, 왜 그 당의 후보들은 애써 “중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는 것은 현재까지의 대선 경주에서 이명박 후보가 줄곧 선두로 나서고 있는 이유와도 연결된다 할 것이다.


사실 이명박 후보 지지자들이 내세우는 지지의 이유는 한 마디로 가름된다. 경제를 살릴 적임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지금 시기 한국 경제가 정말로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상태인가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교수, 연구원, 기업인, 금융전문가 등 26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의견조사에 따르면, “이번 조사에서 전체의 81%에 달하는 전문가들은 우리 경제가 외환위기 이전보다 좋아졌다고 평가했고 ‘나빠졌다’는 의견은 7.5%에 그쳤다”고 하는 반면 (http://economy.hankooki.com/lpage/economy/200711/e2007112618112170060.htm)
, 한나라당 등 보수 세력에서는 한국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러 언론 매체는 ‘서민’들이 “IMF 위기 때보다 경기가 더 안 좋다”고 느끼더라고 반복해서 전하고 있다.


현상을 너무 단순화하는 위험을 감수한다면, 현재 한국 경제는 지표 상으로는 나름 잘 굴러가고 있으나 그 과실이 통칭 ‘서민’들이라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제대로 나눠지고 있지 않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주요 해법은 양극화 문제와 분배의 왜곡 현상에 대해 시급히 조치하는 것에서 찾아질 것이다. 이 대목에서 “무능한 좌파 정권이 경제를 망쳤다”는 한나라당을 포함한 보수우익의 주장을 수긍한다 하여도, 오히려 작금의 문제는 분배를 통해 해결을 모색하는 전통 좌파의 방식을 택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경기침체에 대응하는 전통 우파의 방식은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택했던 정책이 대표적인데, 기업에 대한 규제철폐와 노동시장의 유연화 그리고 감세 등의 기업지원을 통해 자본투자의 증가와 경기의 활성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장에 돈이 더 돌고 상품이 더 팔리며 고용이 증가한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지금 시기의 우리 유권자들에게 경제를 살리기 위해 이런 방식을 택하겠다고, 즉 ‘나는 열심히 기업 활동을 지원할 터이니, 국민 여러분들은 더욱 노력하고 자녀들도 인재로 육성하여 기업가들이 늘려놓은 일자리에서 더 많은 몫을 챙길 수 있도록 하시오’라고 말한다면 과연 먹히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이명박 후보 지지자들 중 상당수는 후보가 후자의 방식을 이야기하여도 정작 스스로는 “강한 지도자”가 “강력한 지도력”으로 “서민”들에게 더 많은 몫을 나눠주리라 믿고 있는 형편인데.


그러니 현재 많은 유권자들이 현 상황에 대해 느끼는 분노와 불만은 보수우익이 외치는 “경제를 망친 무능한 좌파 정권” 이라는 주장에 대한 액면 그대로의 공감이 아니라 “무능한 여당”이 “나와 내 이웃”의 삶을 힘들게 했다는 정서로 요약될 수 있겠다.


비슷한 맥락에서 현재 유권자들은 “부패한 보수의 재집권만은 막아야 한다”는 소위 개혁세력이라는 쪽의 주장에도 좀처럼 동감하지 않고 있다. “나를 비롯한 내 이웃”의 삶이 경제적으로 나아진다면 웬만한(?) 부패는 참아줄 수 있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왜 유권자들이 진보대통령을 자임하며 공평한 분배를 외치는 권영길 후보에게 쏠리질 않고 이명박 후보가 더 높은 지지율을 보이냐고 따지고 들 수도 있겠다. 그 이유를 현재의 지지율이 나타내는 모습에서 유추하자면, 우리 유권자들이 지금 원하는 것은 공평한 분배라는 거대한 과제에 앞서 우선 “나와 내 가족”부터 더 윤택해지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번 대선의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이명박 후보는 기존 보수세력이 만족하고 인정할만한 오른쪽 정책이나 소신을 시원스럽게 내놓지 않고 정동영 후보는 집권 여당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거부하면서도 그 쪽 성향 유권자들의 지지를 구해야 하는 형편이다. 어정쩡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이회창 후보가 “이명박은 우익의 대표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출마를 하였고, 소위 범여권도 각자의 길로 나선 것이다.


자, 이런 시금털털한 상황에 나를 비롯한 많은 유권자들의 고민이 놓여진다. 우리 사회의 두 주요 정치세력의 후보를 바라보면서, 개혁과 진보 성향의 유권자는 혹시 저 후보가 ‘한나라당’스러워지지 않을까 고민할 터이고 보수 우익 성향의 유권자는 저 후보가 ‘열린 우리당’ 비슷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지지율이 상위에 있는 한 후보는 아예 무소속이고 말이다.


“누구”인지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왜 지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유권자들은 “왜?”를 생략한 채 그저 “누구”나 그 “누구”의 이미지를 선택해야 하는 요샛말로 ‘대략 난감’한 상황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선택은 해야 하는 것이고, 그 선택이 난감하드라도 기왕이면 잘 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록 남은 기간이 짧긴 하지만 홧김에 욱하지 말고 차분히 살펴서 선택하길 부탁 드리는 바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후보들이 “왜 지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면 스스로 원하는 답을 작성하여 거기에 가장 근접하는 후보를 골라내는 것도 한 방법일 테고.


잘 뽑자. 그저 ‘감’이나 ‘이미지’로 결정하지 말고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내 이웃’을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누구”를 고르도록 하자.


2007. 11. 30.

 


영진공 편집인 이규훈

<라비앙 로즈>, 어느 여가수의 삶에서 건져올린 감동의 카운터 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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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영화가 자주 만들어지는 이유는 잘 알려진 인물의 삶을 영화화하는 경우가 아무래도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기에 손쉽기 때문입니다. 베스트셀러 소설이 영화화되기 쉬운 것도 마찬가지죠. 여전히 흥행 여부의 불확실성과 부담이 있음에도 일단 무슨 영화인지를 설명하기가 간편하지 않습니까. 이름만 딱 대면 “오, 그 사람 이야기라고? 멋지군요. 얼마면 되겠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위에 창작자의 열정이 얹혀지면서 한 편의 전기 영화가 탄생합니다. 영화화의 대상이 되는 인생과 업적으로부터 무엇을, 어떻게 이끌어낼 것인가는 전적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하고 연기하는 이들의 몫이겠지요. 물론 영화 제작의 실제 과정은 시나리오와 연출자, 주요 캐스팅까지 어느 정도 완료된 후에야 실질적인 펀딩이 이루어지고 있겠죠. 투자자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유명 인물의 전기 영화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흥행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 쯤은 잘 알고 있을테니까요.

<라비앙 로즈>도 무슨 영화인지를 설명하기가 무척 쉬운 유명한 인물의 전기 영화입니다. 1915년 파리에서 태어나 1963년, 불과 47세의 나이에 사망한 프랑스 여가수 에디뜨 피아프의 삶을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전기 영화를 구성하는 방법은 그 목적에 따라 세 가지 정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유명 인물의 업적을 기리고 영상물로 기록하기 위함입니다. 때로는 유명 인물의 알려지지 않은 부분들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새롭게 조망하기 위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유명인의 삶을 통해 관객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나 감동적인 요소를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프로파갠다 영화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전기 영화들은 세번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유명 인물의 삶을 재구성하는 동시에 첫번째와 두번째의 목적과 방법론을 병행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관객들에게 감동도 주고 훌륭한 영상 기록물로서의 의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흔히 접하는 전기 영화들의 목표이고 구성 방법입니다.1)

그런데 <라비앙 로즈>는 에디뜨 피아프의 삶을 좀 더 특이한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많은 영화들이 연대기 순으로 진행되거나 현재 시점에서 시작해 과거 시점으로 갔다가 다시 현재 시점으로 연결되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는 반면, <라비앙 로즈>는 에디뜨 피아프의 유년기에서 말년까지, 다양한 시점의 모습들을 뒤섞으며 진행하고 있습니다. 각 씨퀀스에서 마리옹 꼬띠아르와 아역 배우들이 연기하는 에디뜨 피아프가 누구인지는 명확하기 때문에 보는 입장에서 혼란스러움을 경험할 일은 별로 없지만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추레한 말년의 에디뜨 피아프를 비춰주거나 앞에서 다뤄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영화 말미에서야 뒤늦게 끄집어내는 바람에 이건 또 뭐하자는 경우인지 궁금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라비앙 로즈>가 이런 독특한 재구성 방식을 채택한 이유는 에디뜨 피아프의 삶에서 발견한 인생의 정수를 최대한 부각시켜 전달하기 위함입니다. 여러 시점을 뒤섞어 배치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기승전결의 구성이 되도록 하고 있습니다. 연대기적 스토리텔링을 완전히 탈피한 새로운 구성 방식에 관객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이후에, 핵심 주제를 가장 극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두 시점의 에피소드를 영화 후반부에 이어붙인 방식이 <라비앙 로즈>의 구성 방식입니다. 심지어 초년기의 어떤 에피소드들은 일부러 감추어놓고 있다가 영화 말미에 가서야 주인공의 회상 형식으로 공개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전기 영화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추면서도 관객들에게 감동의 카운터 펀치를 날려주고, 고조된 감정을 천천히 이완시키며 영화의 주제 부분을 거듭 강조하기 위해 채택한 과감한 플롯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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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후반부에 배치된 결정적 한 방을 날리기 전까지의 <라비앙 로즈>는 일반적으로 잘 만들었다 할 수 있는 전기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른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되거나 여러 차례 리메이크되어 왔던 에디뜨 피아프의 대표곡들을 실컷 들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했다고 전해지는’ 프랑스 여가수의 인생이 펼쳐집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택시> 시리즈와 <러브 미 이프 유 대어>, <빅 피쉬>와 <인게이지먼트>, <어느 멋진 순간>등을 통해 얼굴을 알려온 마리옹 꼬띠아르(Marion Cotillard)의 완벽한 변신입니다.2) 에디뜨 피아프의 꾸부정한 자세와 외양, 독특한 발성들을 그대로 모사하는 수준을 넘어 영화 전체가 드러내고자 하는 극적인 감정을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마리옹 꼬띠아르는 말 그대로 혼신의 연기를 선보입니다. 애초부터 마리옹 꼬띠아르의 캐스팅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는(이자벨 소벨만 공동 각본) 올리비에 다한 감독의 연출과 나가타 테츠오의 촬영 또한 에디뜨 피아프의 특별한 삶을 특별한 방식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집중했다는 생각입니다.

에디뜨 피아프의 인생을 여러 시점에 걸쳐 두루 돌아 들어가는 <라비앙 로즈>가 전체 내러티브의 꼭지점 위에 배치하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그녀가 24세의 나이에 경험한 막셀 세르당(당시 미들급 세계 챔피언이었던 권투 선수)과의 사랑과 상실의 경험, 그리고 Non, Je Ne Regrette Rien(아니,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아요)라는 노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에디뜨 피아프의 곡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Non, Je Ne Regrette Rien를 콕 찝어내 그 곡에 담긴 메시지를 에디뜨 피아프의 삶과 연결시켜 감정의 폭풍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라비앙 로즈>의 플롯입니다. 막셀 세르당의 사망 시기는 49년이었지만 Non, Je Ne Regrette Rien이 만들어진 건 그로부터 한참 뒤인 56년이었습니다. 작곡자들로부터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에디뜨 피아프가 정말 “이 노래가 바로 내 인생”이라고 했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3) <라비앙 로즈>는 이 두 개의 시기를 과감히 이어붙임으로서 매우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사실의 정확성이나 객관성 보다 주제와 감정을 전달을 우선시한 선택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처음 <라비앙 로즈>의 개봉 소식을 접했을 때에는 그저 옛날 유명 연예인의 전기 영화 한 편이 또 나왔구나 하는 정도였습니다. 특히 음악인들의 전기 영화란 얼마나 빤합니까. ‘불꽃 같은 인생’이라는 너덜너덜한 캐치프레이즈 아래 여러 히트곡들을 나열하며 그 사람도 결국 평범한 한 인간에 불과했더라는 식의 영화는 지천에 널렸습니다. 실제 영화를 보는 동안에도 배우의 연기가 뛰어나고 흠잡을 구석 없이 잘 만들어져서 그 만듬새가 괜찮다 싶었을 뿐, 이 영화를 각별하게 만들어주는 요소는 좀처럼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에디뜨 피아프가 막셀 세르당을 잃어버리고 Non, Je Ne Regrette Rien를 처음 듣던 그 장면에서 아주 제대로 얻어맞았습니다. 주변의 다른 관객들이 없었더라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에게>(2002)를 집에서 다시 보다가 엄청 울고 하루종일 얼굴이 퉁퉁 불었던 지독한 경험을 반복할 뻔 했습니다. 완전히 무장해제된 감정을 추스리느라 영화가 끝날 때 즈음에는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 되더군요.

영화는 에디뜨 피아프가 한 인간으로서 경험해온 중요한 과거사(영화의 앞부분에서 일부러 감춰두었던)들을 일부 회상하고 해변에 앉아 기자와 인터뷰했던 내용 등을 교차해서 보여준 후에 마지막으로 Non, Je Ne Regrette Rien을 무대에서 부르는, 다소 차분해진 광경으로 끝을 맺습니다.4) 영화 본편에서는 시종일관 노래와 음악이 흐르더니 막상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리딧이 올라갈 때에는 그 흔한 주제곡 하나 나오지 않는 것도 <라비앙 로즈>의 독특한 점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뭐 어떻습니까. 이미 에디뜨 피아프와 그녀의 노래가 가슴 속에서 새겨져서 쩌렁쩌렁 울려퍼지고 있는데. 에디뜨 피아프가 태어나는 장면과 마찬가지로 임종하는 순간마저도 과감히 생략하고 있는 전기 영화가 <라비앙 로즈>입니다. 열심히 사랑했고 또 노래하며 살았던 에디뜨 피아프의 삶과 음악은 그녀가 죽음으로써 그대로 끝나버린 것이 아니라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프랑스의 어느 옛날 여가수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나 정보가 없는 관객일지라도 영화 속에서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평범함 속에 강렬함을 품고 있는 영화가 <라비앙 로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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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존 인물의 삶을 소재로 하면서도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히 덜어내거나 약간의 왜곡을 가하기도 하는 것이 최근 영화들의 경향이라 생각됩니다. <카핑 베토벤>은 아예 픽션이었지만 베토벤의 삶과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 더 없이 좋은 텍스트라고 생각될 정도이고요, <라비앙 로즈>도 일반적인 전기 영화의 화법을 벗어나 다소 간의 왜곡이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디뜨 피아프의 오랜 팬들이나 영화를 토앻 새롭게 만나게 될 미래의 팬들 모두를 충분히 만족시키는 데에 성공하고 있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2) 마리옹 꼬띠아르가 국내에 알려진 건 위에 언급된 몇 편의 영화들을 통해서이지만 75년생으로 이미 서른의 나이를 넘긴 그녀의 출연작들은 TV 드라마를 비롯해 이미 40 여 편을 넘고 있습니다. 커다란 눈망울에 170센티의 키로 이전에 출연한 영화들에서는 그리 작지 않은 체격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라비앙 로즈>에서는 에디뜨 피아프의 왜소한 체구로 변신하기 위해 약간의 특수촬영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자벨 아자니가 <까미유 끌로델>로 기억되듯이 <라비앙 로즈>를 통해 마리옹 꼬띠아르도 드디어 배우로서의 전체 경력을 대표하는 작품 하나를 갖게 되었다 하겠습니다.

3) 실제로는 에디뜨 피아프가 작곡자의 연주를 직접 듣지 않고 악보만 받았을 수도 있는 것이죠. 어느 군인이 자기의 곡들 에디뜨 피아프에게 들려주던 장면은 두번째 장면을 위한 일종의 설득 장치였다고 생각됩니다. 이미 한번 보았던 모습이기 때문에 관객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에디뜨 피아프가 정말 저런 식으로 Non, Je Ne Regrette Rien라는 곡을 만났겠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물론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으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추정입니다.

4) 어떤 분들은 이 공연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었다고도 하시지만 저는 ‘노래도 잘 못하는’ Non, Je Ne Regrette Rien의 작곡자들이 에디뜨 피아프에게 처음으로 곡을 들려주던 장면에서 더 크게 움직였습니다. 음악이란 뛰어난 실력 보다 곡을 연주하는 사람의 열정이 더 중요하다고 평소 생각해왔고 또 이런 주장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다툰 적도 있었습니다만, <라비앙 로즈>에서도 에디뜨 피아프가 직접 노래를 부를 때 보다 그 곡이 에디뜨 피아프에게 들려졌을 때, 그 곡이 에디뜨 피아프에게 불러일으켰던 감정이 훨씬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세상은 랄랄라] “니 말은 틀려!!!!!”


“집구석 컴퓨터 인근 올로케이션 대작”

“풍자는 풍자일 뿐 오바하지 말자.”


동남아 순회공연을 막 마치고 돌아온 본격 시사풍자 플래쉬 막장 애니메이션 [세상은 랄랄라]

에피소드 16 : “니 말은 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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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 자작시

-가을山行-


그대여!
단풍이 아름답다고,
너무 좋아하지 말게나.


겨울이 오면
자취를 감춰야 하네.


그대여,
힘이 생겼다고
좋아서 날 뛸 것 없네.


힘은 그렇게 오래
주머니 속에 머물지 않네.


아름다울 때,
서러울 때를 생각 하게나.


있을 때,
없을 때를 생각 하게나.


그대,
오늘 너무 너무 억울해도
그대도,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할 때가 있었음을
생각 하게나.


우리가 오늘 해야 할 것은,
이웃들의 생각을 해야되는 것일세.
이웃들의 생각은 바꾸라는 것일세.


그대가 주인공이 아니라도 좋으이.
이웃들은 그대와 함께
바꾸는 대열에 서라는 것일세.


달이지면
어두워지는 것은 당연하이.
그러나,
곧 해가 뜨는 것 일세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네.
변한다고, 잃어버리는 것은 아니네.


세월이 가는 걸 서러워 말게나.
또 세월이 오고 있네.


가는 세월은 언제나 빠르고,
오는 세월은 언제나 느린 것이네


초조하지 말게나.
서두르지 말게나.
살다보면 세월이 오지 않을 수도 있네.
그렇다고 실망하지 말게나.


지나간 것도,
앞으로 올 것도, 잊고 지내세.


세상은,
할 일이 남아 있는 자를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걸세.


잊혀진다면, 그대의 할일도 끝났다는 걸세.
그렇다고 서러워 말게나,
그것이 삶의 이치인 것을 어쩌나.


오늘
북한산에 남긴 발자국은
내일이면 또 다른 사람의
발자국으로 덮이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네 .


하늘은
언제나 아름답기만하네
온갖 구름이 갖가지 형상을 그려도
하늘은 하늘이네


가을은
많은 생각을 갖게 하네,
산행은 더욱 그러네!
가을은, 가을이네.
안녕.
<이재오 작시>



이재오 자작시다. 언론은 이 시가 박근혜 측과 갈등을 빚은 자신의 모습에 대한 자성의 뜻을 담았다고 해석하고 있다.

경향신문 기사 링크

그러나 웬걸? 내가 보기엔 오히려 박근혜 측에게 정권교체하는 데 까불지 말고 협조하라는 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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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오와 박근혜는 천하의 앙숙이었다. 김문수, 이재오 등은 딴에는 민주화 운동 물 좀 마셨다고 박근혜와 계속 트러블을 일으켰다. 수년 전부터 말이다. 그런 그가 이런 시를 썼다. 특히 이 부분.



그대,
오늘 너무 너무 억울해도
그대도,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할 때가 있었음을
생각 하게나.



그대가 주인공이 아니라도 좋으이.
이웃들은 그대와 함께
바꾸는 대열에 서라는 것일세.



과연 이게 박근혜와 트러블을 일으킨 자신에 대한 자성일까?


아무튼 재밌다. 취미가 술집 가서 주물럭거리는 것이 고작인 천박한 놈들에게 비하자면 시 쓰는 정치인은 충분히 흥미로울 만하다.


같은 당 정두언. 이 양반의 취미는 밴드 보컬이다. 아직도 그 취미 생활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양반 홈페이지에 가면 자신이 부른 노래를 들을 수 있는데, 대부분 7~80년대 밴드 노래들이다.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 양반, 성추행 논란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그 인식 수준이 술 먹고 가슴 주물럭거리는 짓 못지 않게 천박하다.


하긴. 시 쓰는 이재오의 말들과 그 말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세상 또한 하등 아름다울 게 없으니까.


영진공 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