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과 “군도”에 대한 단상

영화 <명량>은 역사 매니아도 아니고 밀덕후도 아닌 일반인 입장에서 봐도 고증의 문제가 툭툭 걸립니다. 게다가 메이크업을 잔뜩 한 조총 스나이퍼 따위를 쓸 데 없이 만들어 넣는 등 영화의 매무새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충무공이 장계를 쓰는 장면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글을 쓰는 이순신의 상반신 샷으로 시작하면서 다음은 글을 쓰는 손을 클로즈업하고 그 다음은 손까지 포함한 전체 샷이 나옵니다.

하지만 전체샷으로 넘어올 때 꼿꼿했던 충무공의 허리가 숙여져 있습니다. 첫 샷에서는 손이 안 잡히니 글은 쓰는 척만 하면서 허리를 꼿꼿하게 폈을 테고 마지막 샷에서는 손까지 잡히니 신경써서 글을 써야 하는 터라 허리를 숙였겠지요. 허나 샷의 연결이 껄끄러울 정도로 튑니다.

그리고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에서 충무공이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올려 베는 모습을 정면에서 잡고 다음 샷에서 카메라는 적장의 등 뒤에 가 있는데, 이순신의 칼이 왼쪽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오른쪽 아래에 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뭔가 깔끔하지 않다는 것을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다 느끼게 되고 이 정도면 NG컷이라 할 만 합니다. 문제는 이런 컷들이 꽤나 많아서 매무새가 조악합니다. 아무리 쌈마이 헐리웃 영화라고 하더라도 이런 컷들은 보기 힘듭니다.

정작 문제는 배우 최민식의 존재입니다. 자신없는 감독은 최민식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될듯 보입니다. 최민식은 연기 잘하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하지만 최민식 연기가 정말 잘 나올 때는 극 안 캐릭터의 개성이 매우 강할 때입니다. <파이란>에서의 강재,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장경철처럼 말입니다.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취화선 동행취재기를 씨네21에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최민식과의 인터뷰를 인용하겠습니다.

– 임권택 감독님과의 해석상의 차이가 있습니까.

=근본적인 차이는 없죠. 그러면 큰일나게요. (웃음) 다만 지금 초상화냐, 풍경화냐, 라는 점은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전 굵은 붓으로 죽죽 그리고 싶은데, 그럴 때 감독님이 아니다, 굵은 붓으로 그리다가 가는 붓으로 바꿔라, 하시면 내가 성이 안 차는 부분이 생깁니다. (웃음) 자꾸만 내것이 나오니까 괴롭죠. 내 것을 버리고 감독님 것을 취해야 하는데, 나를 죽여야 하는데, 자꾸만 내 분석대로, 내 방식대로 몸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목표를 가는 거니까요.

다음은 임권택 감독 인터뷰 중에서 발췌입니다.

=장승업이 김병문 집에 담 넘어가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서 최민식씨가 눈물을 흘려서 NG를 내셨다면서요.

– 그것도 기품과 관련될지도 몰라요. 물론 울 수도 있는 거요. 그러나 사소한 감정을 드러내는 쪽으로 장승업이를 찍어오지 않았다고. 거기서 느닷없이 그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안에는 깊은 사랑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살아내는 놈인데, 여기 와서 울고 있으면 그게 맞겠냐고. 삐끗삐끗 감정이 튀어나오면 수렁을 밟는 거죠.

최민식은 이런 배우입니다. 영화는 여러 파트가 한 데 어우러져야 하는 장르인데 그는 연기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자신의 캐릭터만 살아나고 나머지는 죽어버린다는 것이죠. 저는 이 절정이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최민식은 과거처럼 자신의 연기로만 영화를 다 뒤덮진 않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이나 <신세계>에서는 많이 절제하는 연기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최민식은 최민식이죠. <명량>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은 모든 대사, 모든 표정에 감정이 뚝뚝 묻어납니다. 아들과 밥을 먹으면서 하는 간단한 대사 “같이 먹으니까 좋구나” 이 아홉 글자에도 목소리의 톤과 인토네이션을 써서 감정을 묻혀내죠. 그로써 최민식의 이순신은 끊임없이 얘기합니다. 나는 힘들어, 나는 괴로워, 나는 어려워 ……

그런데 과연 이순신이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마구 쏟아내는 인물이었을까요?
“난중일기”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병신년 이월 열 나흘 – 밤에 바다 위에 떠오른 달은 대낮처럼 밝고 물결 위에 비친 빛은 비단결 같은데, 혼자서 수루 위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수선하여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을미년 칠월 초 하루 –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갑오년 이월 열 엿새 – 홍양 현감이 암행어사 밀계 초본을 가지고 왔다.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의 수령을 파면하고 순천 부사는 탐관오리의 으뜸으로 거론하고 기타 담양, 진원, 나주목, 장성 창평 등의 수령은 나쁜 짓을 덮어두고 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나 나라가 평정될 리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물론 아들이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격정적으로 비통함을 드러내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힘들고, 괴롭고, 어렵고, 외로울 때에도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뒤척거리고, 천장만 올려다보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

이런 이순신의 모습과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의 모습은 격차가 큽니다. 아마 연출자가 이를 알고 최민식의 연기를 더 죽이려 해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둘 사이의 “짬밥” 차이가 얼만데 ……

오히려 류승룡이 이순신을 맡고 최민식이 구르지마를 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외에도 소위 과도한 ‘국뽕’이나 텔레파시와 치마 시그널 등 무리한 설정이 있는데도 “명량”은 흥행가도를 힘차게 내달리고 있습니다. 리얼리즘을 정말 사랑하는 한국의 관객들, 그리고 문단 독자들의 성원 덕분에 말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묘사하는 게 리얼리즘이라 한다면 한국의 대부분 흥행 영화는 모두 리얼리즘이 베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설국열차>가 좀 예외랄까? 실은 <괴물>도 리얼리즘이지요.

우리 관객이나 독자들이 왜 리얼리즘을 좋아하는지는 다른 차원의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영화 <군도>를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영화의 매무새, 그러니깐 만들어 놓은 모양은 <군도>가 <명량>보다 낫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군도>는 현실의 이야기를 현실이 아닌 것처럼 묘사했고, 이는 관객에게 매우 불편한 접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현실의 이야기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면 모르겠는데,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이며 그 과거의 현실은 지금의 현실과 별로 다를 게 없죠. 그런데 그 현실이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촬영하고 음악을 깔고 편집을 해 놓으니 관객은 혼란스럽지요.

김구 선생이 절정 무술을 사용하며 일본인을 때려 잡는데 거기다가 무협 스타일 자막으로 “흑심패룡장의 고수 백범 김구”라고 깔고, 고속 촬영에다 웨스턴 음악 넣고 영화 “300”처럼 편집하면서 재해석하면 관객들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김구 선생이 몸 담았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이기에 이처럼 재해석하려는 사람은 없겠지만, 허나 <군도>가 보여주는  현실도 어쩌면 해결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 백성은 현재와 흡사한 채권추심도 당합니다.

영화 속 현실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얘기하면서도 묘사는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누리끼리한 서부 영화 스타일 색보정, 음악과 무협 영화와 같은 캐릭터 구축과 샘 페킨파 같은 급격한 줌인 줌아웃 등을 써대니 당연히 언발란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군도>의 흥행이 주춤하는 것은 여타의 요인이 많겠지만 제 생각에는 <명량>과는 다르게 리얼리즘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어바웃 타임”, 내가 당신을 얼마나 오래 사랑할까요?

<어바웃 타임 (About Time)>, 개인적으로 아이가 생긴 이후 아내와 처음으로 함께 본 영화여서 데이트 하던 시절로 돌아간 느낌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로맨틱 코미디라고 하지만 <어바웃 타임>은 단순히 알콩달콩한 사랑 얘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타임 슬립물도 사실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어바웃 타임>을 보면서 저런 과거라면 한 번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분명, 나도 우리 아버지가 그려주던 그림을 보며 즐거워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돌아가실 때는 뭔가 틀어진 채였거든요. 간을 드리긴 했지만, 그것과 감정의 골은 좀 달랐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 내내 흐르던 음악들은 말 그대로 환상궁합이었습니다. 하긴 리차드 커티스 감독의 전작들, <노팅힐> <러브 액츄얼리>를 떠올려봐도 영상의 내용과 찰떡 궁합의 노래들이 적절한 타이밍에 흘러나왔었음을 기억합니다. 특히 주제가의 파워는 엄청났죠. 엘비스 코스텔로의 ‘She’가 <노팅힐>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들렸는지, “All you need is Love”가 <러브 액추얼리>의 그 많은 사연들을 어떻게 한 방에 정리했지는지 다들 잊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래 … 이걸로 됐어 …”

이번에도 마찬가집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식적인 주제가 이외에도 잊을 수 없는 노래가 너무 많습니다. Ben Folds, Paul Buchanan(The Blue Nile이라는 쫙 깔리는 분위기 만점 밴드의 보컬이시죠), The Cure, Amy Winehouse, 심지어 섹시하기 이를 데 없는 러시안 미녀 댄싱 듀오 t.A.T.u., 그리고 Nick Cave & the Bad Seeds까지. 특히 닉 케이브의 목소리로 ‘Into My Arms’가 아버지 역할의 빌 나이와 함께 흘러나올 때는 나도 모르게 따라부르고 있었죠.

대체로 잘 만들어진, 혹은 히트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에는 Harry Connick Jr.의 나는 토마토, 너는 포테오토를 외친다는 ‘Let’s Call the Whole Thin Off’가 떠오르고, <씨애틀의 잠 못이루는 밤>에는 Celine Dion과 Clive Griffine의 ‘When I Fall in Love’처럼 영화를 떠올림과 동시에 떠오르는 주제가가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공식이 된 모양이에요. 그것도 창작곡보다는 기존의 곡, 그래서 영화의 내용과 노래를 단박에 연결시켜주면서 시너지를 뿜어내곤 하죠. <어바웃 타임>도 공식에서 많이 벗어나진 않습니다. 심지어 수많은 명곡의 고향으로 기청감, 가사의 내용과 영화의 장면을 엮어내는 것도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에겐 ‘Into My Arms’였지만, 영화에서 주제가로 내세운 곡은 따로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이 노래를 기억하시고 있을 겁니다. 바로 두 가지 버전이 등장하는 ‘How Long Will I Love You’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할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요 라고 묻는 이 노래는 영화의 내용과도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죠.

닉 케이브, Into My Arms

‘How Long Will I Love You’는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곡은 아닙니다. 1990년 스코틀랜드 출신 포크록 밴드 The Waterboys가 자신들의 4번째 앨범 “Room to Roam”에 수록한 바 있습니다. 이 노래의 소박하지만 귀에 남는 멜로디는 당시에도 주목을 받았죠. 그래서 앨범의 첫 싱글로 발매되었고, 영국,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 등에서 히트한 바 있습니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 등장하는 버전은 원곡이 아닙니다. 2012년 영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배우이기도 한 엘리 굴딩Ellie Goulding의 두 번째 앨범 [Halcyon]에 수록된 이 곡의 리메이크한 버전이 등장합니다. 차분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목소리가 돋보이는 트랙이죠. 영화 후반부에 등장합니다. 하지만 더 많은 분들이 기억하는 건,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무르익어가며 지하철 장면이 계속될 때 흘러나오는 길거리 악사들의 버전일 겁니다.

길거리 악사로 등장한 이는 존 보든Jon Boden으로 배우가 아니라 노래를 부른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기타, 만돌린, 피들(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세 명의 길거리 악사는 Jon Boden, Sam Sweeney, Ben Coleman입니다. 존 보든은 1977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영국 윈체스터로 이주해 영국인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영국 포크 특유의 서정성이 깃들어 있죠. 미국의 포크가 우디 거스리의 음악이 그러하듯 백인 음악이라도 남부에서 자연스럽게 블루스와 엮이며 읊조리고 있음에도 어딘가 왁자지껄한 느낌이 자주 보인다면, 영국 포크는 음계나 분위기가 다소 다르죠.

여하튼 존 보든은 2010년부터 2011년까지 1년간, “A Folk Song A Day”라는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해서 유명세를 얻기도 했죠. 하루에 포크 노래 한 곡씩을 녹음하여 한 달에 한 장, 일 년에 12장의 CD를 발표하는 놀라운 스케줄이었죠. 물론 영국의 전통적인 포크 넘버들이긴 했습니다만, 300곡 넘게, 그것도 전 곡을 새롭게 편곡하여 녹음했다는 것은, 시도 자체로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록을 보유한 포크 싱어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2010년 BBC의 올해의 포크 가수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곤 하지만, 존 보든은 세계적인 유명세를 얻고 있는 슈퍼스타는 아닙니다. 홈페이지에 가봐도 칙칙한 분위기 팍팍 풍기는 개인 블로그 업그레이드 버전처럼 느껴지니까요.

담백하고, 만돌린과 피들이 만드는 특유의 촌스러움이 되려 멋스럽게 느껴지는 이 연주는 활활 빛나는 사랑도, 초인적인 능력으로 감동스러운 사랑도 아닌, 하루하루가 소중한 삶과 사랑에 대해 설파하는 영화의 분위기와 너무나 잘 맞아떨어집니다.

“하늘에 저 별들이 다 사라질 때까지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왕좌의 게임”, 너희들은 주인공이 아니야!

<왕좌의 게임(Game of Thrones)>, 또는 “불과 얼음의 노래(A Song of Ice Fire)” 저자인 조지 쌍알(R. R.) 마틴을 소개하자면 이 할배는 1948년 미국 뉴저지주 베이욘의 빈민가 출신으로 어머니는 아일랜드인, 아버지는 이탈리아 혼혈이었답니다. 처음 만든 이야기가 자기가 기르는 거북이들이 자꾸 죽는 걸 보고 거북이들 사이에 흉흉한 음모와 모략이 펼쳐지는 이야기였다니 참으로 꾸준한 양반입니다. 마블코믹스 광팬으로 출판사에 독자투고로 시작해서 미국버전 동인지 작가로 글쓰기를 시작하여 이후 SF 단편소설로 등단했고 휴고상, 네뷸러상 후보에 올랐을 정도로 범상치 않았는데 주로 판타지와 호러를 섞은 SF를 썻고, <환상특급> <맥스 헤드룸>의 시나리오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이 <왕좌의 게임>에도 거대 장벽과 그 장벽에서 작동하는 기계들 같은 SF적 요소가 많이 나오죠.

<왕좌의 게임>을 요약하자면 “복잡한 스토리라인 속에 매력적인 캐릭터들을 만들어놓고 이들이 멋진 대사를 치게 하고는 죽여 버리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쌍알 마틴 옹이 “나한테 잘해. 안 그러면 다음은 티리온 차례가 될거야. (Be Nice To Me Or Tyrion Is Next)” 라는 팻말을 들고 찍은 사진이 화제가 되었는데, 정말 그러고도 남을 인간입니다. “나한테 다음 권이 언제 나오냐고 누가 물어볼 때마다 스타크家 애 하나씩 죽일거야”라고 협박하는 사진도 있고요.

“이번엔 내 차례인가?”

왕좌의 게임이 인기 있는 이유도 사실 그 때문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늘 긴장해야 하죠, 누가 어느 순간 갑자기 죽을지 모르니까요. 원래 주인공은 안죽고, 죽더라도 뭔가 의미있게 죽는 게 대부분의 소설들의 불문율인데 여기선 안 그럽니다. 그냥 갑자기 그냥 막 뜬금없이 죽어요. 즉, 이 소설은 판타지 소설에 대한 독자들의 기대를 처참히 박살내는데, 그럼으로써 그 어떤 판타지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현실감을 느끼게 합니다. 개x끼들이 권력을 잡고 다 질 것 같던 전쟁에서도 이기고 약자들은 죽고 배신자들이 떵떵거리고 잘 사는 장면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정치판의 현실이 떠오르기도 하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판타지물의 전형은 톨킨 옹의 <반지의 제왕> 시리즈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J.R.R. 톨킨이 북유럽의 옛 설화들을 수집하고 조립해서 새로 만들어낸 유럽설화의 집대성판인데요, 이 양반은 1892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살다가 73년에 사망했으므로 19세기부터 20세기를 산 사람입니다. 1925년부터 1959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문헌학과 언어학 교수로 재직한 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그가 만들어낸 호빗과 휴먼과 엘프와 드워프와 마법사, 그리고 드래곤과 오크와 기타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세계가 이후 모든 서양판타지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게 SF쪽으로 전환되어서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기본 틀이 되었고, 게임으로 전환되면서는 테이블 보드 게임에서 시작해서 “디아블로”나 “울티마 온라인”, “워크래프트”, 우리나라의 “리니지”의 바탕이 되었고요. <무협소설>이 중국문화권 사람들이 꿈꾸는 신화의 표현이라면, 이 반지의 제왕 속 판타지 세계는 영국미국 문화권 사람들이 공유하는 신화입니다.

“마이 프레셔어스으리~“

사실 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북유럽의 옛 설화들과 언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문장력으로 장식된 1, 2차 세계대전의 판타지적 해석입니다. 그러니까 영국은 인간들과 엘프, 드워프로 구성된 반지원정대를, 사우론은 히틀러를, 사루만은 그 꼬붕인 무솔리니쯤을 상징하는 셈이고요, 인간 같지 않은 오크들은 식민지 주민들이나 일본사람들 쯤을 상징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우리에겐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선포된 계기라서 꽤 그럴듯한 전쟁 같지만, 사실 따져보면 양쪽편 다 식민지들 더 많이 차지하려는 싸움질이었고요. 이건 2차 세계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식민지를 많이 갖고 있거나 더 이상 가질 필요 없는 나라(미국과 영국, 뒤늦게 소련) vs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해서 식민지를 마구마구 필요로 했던 나라들(독일, 일본, 이태리)간의 싸움이었던 거죠. 물론 2차 세계대전에서는 그놈의 히틀러와 나치가 인종청소라는 엽기적인 짓을 저지른 덕분에 선과 악의 전쟁처럼 보이지만 사실 미국이나 영국이 히틀러가 나쁜 놈이라서 전쟁을 한 건 아니었고, 히틀러를 죽였다고 해서 악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나라가 2차 대전 덕분에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그런 것을 제외하고 나면 1차 대전은 약 1천만 명이 죽었고, 2차 대전은 약 5천 만명이 죽어나간 비극일 뿐입니다. 사실 2차 대전 정리과정에서 지금의 중동 갈등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지금 테러가 난무하는 세상이 된 거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반지의 제왕”은 신화이지만, 동시에 역사에 대한 거대한 왜곡물입니다. 그런데 사실상 모든 신화들은 다 이런 속성이 있죠. 우리는 어떤 큰 사건이 벌어지면 그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려합니다. 그 사건을 이야기 구조로 바꾸어서 기억하게되고 그 과정에서 왜곡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말하는 어떤 의미나 교훈은 그런 과정에서 추출되는데, 예를 들자면 “사필귀정”, “역사는 정의의 편이다.” 뭐 이런 거 말이죠.

허나 “왕좌의 게임”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서 말했듯 왕좌의 게임은 지금까지 판타지에 대해서 기대하던 것들을 하나씩 배반하는 이야기입니다. 드라마 속에서도 배반이 마구 벌어지지만 이야기 전체에서 의미나 교훈을 찾으려는 독자와 시청자들의 노력에 대한 배반은 그보다 더합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들: 정의, 원칙, 명예, 용기, 신의/성실, 심지어 지략이나 돈, 권력 조차도 소용이 없는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이 드라마의 모토는 “가차없는 세상”이지요.

원래 판타지 영화의 원칙대로라면 스타크 가문이 주인공일테지요. 위에 언급한 가치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들이니까요. 하지만 이들이 작살나는 건 모두 바로 그 가치들 때문입니다. 네드 스타크가 죽은 건 명예와 정의, 원칙에 충실했기 때문이죠. 케이틀린 스타크가 티리온을 체포할 때 역시 명예와 신의성실에 따라 협력했던 사람들도 다 잦되고요. “피의 결혼식”도 결국 불문율은 안 깨겠지 라는 순진한 기대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원작에서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오류 때문이었다던데 제이미 라니스터가 볼튼한테 스타크에게 안부 전해달라고 한 말을 볼튼이 오해하면서 … 그렇다면 더 황당한 전개이고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렇다고 지략과 돈과 권력까지 갖춘 라니스터 가문이 계속 떵떵거리고 잘 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더 놀라운 건 아직 본편인 얼음과 불의 전쟁은 시작도 안했는데 정작 그 본편에서는 인간이 주인공이 아닐 거 같다는 점입니다. 불의 마녀가 말했듯이 지금까지 다섯 왕의 전쟁은 그냥 몽매한 인간들이 벌이는 왕좌의 게임이었을 뿐, 진짜 전쟁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얼음괴물들과의 전쟁이고, 여기에는 남쪽에서 올라온 불뿜는 용들이 주인공이 될 듯합니다. 이 용들은 용 엄마 말도 잘 안듣는 애들인가 봐요.

Margaret Mahler 라는 정신분석학자는 우리의 자아가 발달하는 과정은 결국 나와 내가 아닌 것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라고 봤습니다. 이걸 대상관계 이론이라고 하는데요, 말러에 따르면 우리는 처음에 이 세상에 태어나서는 세상과 나의 구분이 없는 상태로부터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걸 정상적 자폐단계라고 하는데, 이때는 내 마음과 현실이 구분이 안되고요, 꿈꾸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꿈에서의 모든 사건들은 결국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인 것 처럼, 이때는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이 곧 나입니다. 그러다가 나와 내가 아닌 것을 구분하면서 드디어 자아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죠.

내가 아닌 것은 뭐냐하면 결국 내 맘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움직이는 것들인데, 다시 말해서 세상이 내 맘과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사실, 즉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우리에게는 자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제서야 이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하고, 자아가 생기면 우리는 자아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게 됩니다. 자아의 영역을 넓힌다는 건 결국 내 자유를 늘리는 것인데, 3살 때쯤 이런 개념이 생기는데 그래서 그때 미운 세 살이 되는 것이랍니다. “싫어!” “안 해!”라는 말이 최초의 자유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지요. 이런 다음에야 우리에게 지능이라는 것이 발달하기 시작하는데, 지능은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상에서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구석을 찾고 조작하는 능력입니다.

이 드라마도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이런 성장과정을 경험하게 합니다. 정의가 이기고 불의가 패퇴하는 사건이 당연히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때는 우리는 소설을 진짜 세계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과 구분하지 못하는 자폐 단계인 것입니다. 이러면 소설 속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게되죠.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기대한 대로 소설이 전개되지 않을 때,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한 애가 속절없이 댕강댕강 대가리가 잘려나갈 때, 이 세계가 나와 상관없이 내 외부에 존재하는 나와 독립적인 세계라는 걸 깨닫고 그제서야 이 세상의 작동에 대해서 진심으로 알려고 합니다. 물론 이 단계에서 자기 기대대로 드라마가 전개되지 않는다고 화내는 인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발달을 거부하는 것인데요, 소설을 자기 소망충족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죠. 마치 여자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연애를 포기하고 2D에 만족하는 오덕과 같은 상태라고나 할까요.

나는야 내 의지로 발달을 거부하지

사실 이 드라마를 제대로 즐기면 그런 깨달음을 경험하는 순간을 맞이해야 합니다. 네드 스타크가 죽은 건 그가 단지 명예와 정의와 원칙을 따라서만이 아닙니다. 힘이 생존을 위해서 작동하는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요. 바리스 경이 네드에게 “도대체 어쩌자는 생각으로 당신이 알게된 사실을 세르세이에게 말한 거요?” 라고 질문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롭도 마찬가지죠. 원칙을 따르다가 비극에 처합니다.

그런데 원칙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걸 구현해냈을 때 의미가 생기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걸 통해 그 사람의 능력이 증명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원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걸 구현한 인간을 따르는 것이고요. 그러다 보면 그게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는 것인데 그러기 전까지 원칙이나 정의는 그저 누군가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정의가 이겨야 되고 그렇지 못하다면 세상이 불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 포기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정의는 언젠가 이길꺼야 따위 기대만 하며 손가락만 빨고있을 수만도 없습니다. 정의가 못이긴 건 그만큼 준비와 노력을 안했고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니 뭐가 어쨌든 일단 이겨놔야 정의든 뭐든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이 가차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비결은 그저 겸손일 뿐이었습니다. 티리온 라니스터가 오래 사는 이유도 그것인 듯 보입니다. 그는 오만할 수 없는 존재죠. 제이미 라니스터도 겸손을 배우면서 오히려 쓸만한 인물이 되는 건지, 아닌 건지 …

“아메리칸 허슬” 출연진 만큼이나 음악이 빵빵한 영화

출연진의 빠방함으로 이미 판단할 수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아도 안 되는 영화는 안 되죠. 그런 면에서 <아메리칸 허슬>은 좋은 예상이 더 좋은 결과로 나타난 영화입니다. 미국서는 2013년 개봉이지만, 한국서는 2014년 개봉이니, 개인적으로 올해의 영화 후보 0순위로 올려놓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에이미 아담스를 그냥 이쁜 여배우로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통해 최고의 여배우로 자신있게 꼽게 되었구요, 크리스천 베일의 변신과 연기도 환상이고, 정서 불안 역할에는 이제 여배우로 제니퍼 로렌스를 능가할 사람이 있을까 싶어집니다. 정서불안한 끝 간 데 없는 섹시함, 그리고 액션 히로인까지 … 안젤리나 졸리가 브란젤리카로 걍 셀러브리티가 되어 버린 지금 그 자리를 차근차근 다 차지하는 느낌입니다. 좀 측은하기도 한 또라이 역할의 끝장판입니다.

브래들리 쿠퍼, 제레미 레너, 깜짝 등장 로버트 드니로, 그 밖의 모든 배우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환상적인 연기를 펼쳐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197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만큼 1970년대의 정서가 진득하게 느껴지는 사운드트랙이 영화의 즐거움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거의 1970년대 미국 주류 팝계 총결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주류 팝, 록, 디스코 장르를 널뛰며 환상적인 노래들이 영화 내내 흘러나옵니다. 더 흥미로운 건 이 노래들이 그냥 좋아서 나온 게 아니라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이나 느낌, 복선의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음악감독은 대니 앨프먼입니다만, 대니 앨프먼이 각 등장인물들에게 부여한 테마보다 당대의 히트곡을 통해 생각하게 만드는 게 더 많습니다.

영화의 스토리를 따라가기만 해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장면, 장면 삽입된 노래를 알면 두 배는 더 재밌는 작품이 됩니다. 그리고 그 노래들의 내용이나 약간의 스토리까지 알면 세 배는 더 재밌어 질 겁니다. 그래서 영화의 스포일러를 최소화 하면서 영화에 삽입된 노래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OST로 발매된 CD에는 15곡만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는 데니 앨프먼이 작곡한 크리스천 베일이 연기한 어빙의 테마 곡도 있습니다. 즉 현재 발매된 OST에는 영화 크레딧에 명기된 29곡 중에 절반 정도밖에 확인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나 의미를 알면 훨씬 더 영화의 재미가 확대될 곡들도 꽤 있습니다. 29곡 모두를 훑어볼 순 없고, 주요한 곡들만 살펴보겠습니다. OST 수록곡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곡도 있습니다.

영화의 시작부터 노래들이 아주 진득합니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을 엮어주는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Jeep’s Blues”는 영화의 오프닝, 만남 씬, 크레딧에 모두 등장하죠. 두 남녀가 듀크 엘링턴에 극찬을 보내는데, 사실 그것도 되게 웃기는 겁니다. 듀크 엘링턴은 한국에서도 재즈 팬이라면 다 아실테고, 미국서는 스티비 원더가 “Sir Duke”로 경의를 표할만큼 1930년대 아프리칸 아메리칸 아티스트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미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재즈 아티스트 입니다.

거기에 1974년 사망과 함께 미국사회에서 재조명을 받았기에 1978년에 이미 사기업계에서 이름을 알린 두 남녀가 만난 시점 즈음에 이 둘이 듀크의 이름을 들어보고 음반 한 두 장 아는 건 당연할 겁니다.

근데, amazing을 외치며, 어떻게 듀크는 이런 사운드를!를 외쳐대는 둘의 대화 자체가 두 사람이 사기꾼이라는 걸 증명합니다. 이 곡이 분명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의 작품이지만 실은 오케스트라의 핵심 멤버였던 색소포니스트 자니 호지스의 곡이기 때문이죠. 제목부터 자니 호지스의 별명이고, 듀크와 자니의 공동 작곡이며, 자니의 플레이가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크리스천 베일이 충격의 올챙이 배를 보여준 후, 더 큰 쓰나미를 머리로 보여주시는 인트로에 흐르는 음악은 영국밴드 America의 첫 히트곡 “A Horse with No Name”. 이름 없는, 심지어 이름을 남길 수 없는, 그러나 열심히 달리는 말의 이미지는 영화 내내 반복되는 것이죠. 거기에 크리스천 베일, 에이미 아담스, 브래들리 쿠퍼가 의기양양하게 걸어가며 자막이 흐르는 장면에는 OST에 수록되지 않은 스틸리 댄의 “Dirty Work”가 등장합니다. 제목과 가사 내용도 그렇고, 심지어 이 앨범이 수록된 스틸리 댄의 데뷔 음반 제목은 『Can’t Buy a Thrill』입니다. 앨범 제목에 곡명까지 영화 도입부에 영화가 하고픈 얘기가 다 드러나죠.

이 영화에는 ELO의 노래가 자주 등장하기도 합니다. Electric Light Orchestra … 한때 한국의 FM에서도 이들의 음악을 자주 들을 수 있었지만 언제나 B급 냄새를 풍겼죠. 핑크 플로이드, 퀸, YES, 탐 패티 등의 밴드가 개척한 새로운 사운드의 세계를 쉬운 멜로디로 우려먹는 듯한 느낌이었달까요.

신념 있는 정치인의 현실적 한계를 표현하는 제레미 레너의 시장 역할 소개 장면에 흐르는 곡이 있습니다. OST에는 수록되지 않았는데요. Frank Sinatra의 “The Coffee Song”입니다. 그런데, 이 곡의 부제가 “They’ve Got An Awful Lot of Coffee In Brazil”입니다. 브라질은 아니지만 이 시장이 자신의 신념과 정치적 모든 것을 걸고 벌이는 도박도 역시 미국 밖 무엇이죠.

돈 많은 아랍 수장이 등장하는 파티 장면에서 저는 빵 떠질 수 밖에 없었는데요, Jefferson Airplane이 부른 사이키델릭 록의 명곡인 “White Rabbit”이 아랍어로 흘렀기 때문이지요. 최고의 킬러 출신 로버트 드 니로와 만난 힘 없는 하얀 토끼라니 … 거기에 아랍어라뇨. 물론 원작의 흰 토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토끼 얘깁니다. 그러나 아랍어로 바꿨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저 초특급 킬러 앞의 토끼만 알면 되죠. 물론 이 노래를 몰라도 그냥 아랍어로 된 긴장감 넘치는 곡이라고 넘겨도 되긴 합니다. 여튼, 레바논계 미국인 여가수 Mayssa Karaa에게 이 곡을 다시 부르게 한 건 거의 신의 한 수였습니다.

크리스천 베일의 두 여인이 만났을 때 흐르는 비지스의 “How Can You Mend A Broken Heart”도 제목이 죽이죠. 비지스가 디스코의 제왕이 되기 전, 발라드 그룹으로 날리던 시절 곡이죠. 이 노래의 주인공인 에이미 아담스와 Paul McCartney & Wings의 “Live and Let Die”가 표상하는 제니퍼 로렌스의 대비가 환상이죠.

제니퍼 로렌스의 헤드 뱅잉이 돋보이는 이 “Live and Let Die”는 폴 매카트니가 비틀즈 해산 후, ‘존 레논 너만 마누라랑 음악 하는 줄 알아?’하면서 결성하신 윙즈의 노래죠. 영화 <007 죽느냐 사느냐>의 수록곡이기도 하구요. 하드록/메탈 팬이라면 Guns & Roses의 버전으로도 유명합니다. 한 사람을 사랑하지만 한 쪽은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 한 쪽은 죽거나 살거나 내꺼만 외치는 대비도 좋고, 두 곡 제목은 두 사람의 미래이기도 하죠. 스포일러가 될테니 그 이상은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2시간 20분이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푹 빠져서 본 영화였는데, 일부에선 한 방 없이 자잘한 얘기를 주욱 늘어놔서 잔재미만 있었다고 평하는 분도 있더군요. 역시 취향은 다양한 겁니다. OST도 그렇겠죠. 1970년대인데 이 노래를 빼먹었다면 무효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이 정도면 최고의 곡들을 모아놓은 데다가 영화의 내용과 호흡이 딱이니 더 바랄게 없는 수준입니다. 연초부터 그 자체로도 좋고, 추억과 더해지면 금상첨화로 즐기실 수 있는 영화 한 편 만나서 기분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