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량”과 “군도”에 대한 단상

영화 <명량>은 역사 매니아도 아니고 밀덕후도 아닌 일반인 입장에서 봐도 고증의 문제가 툭툭 걸립니다. 게다가 메이크업을 잔뜩 한 조총 스나이퍼 따위를 쓸 데 없이 만들어 넣는 등 영화의 매무새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충무공이 장계를 쓰는 장면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글을 쓰는 이순신의 상반신 샷으로 시작하면서 다음은 글을 쓰는 손을 클로즈업하고 그 다음은 손까지 포함한 전체 샷이 나옵니다.

하지만 전체샷으로 넘어올 때 꼿꼿했던 충무공의 허리가 숙여져 있습니다. 첫 샷에서는 손이 안 잡히니 글은 쓰는 척만 하면서 허리를 꼿꼿하게 폈을 테고 마지막 샷에서는 손까지 잡히니 신경써서 글을 써야 하는 터라 허리를 숙였겠지요. 허나 샷의 연결이 껄끄러울 정도로 튑니다.

그리고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에서 충무공이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로 올려 베는 모습을 정면에서 잡고 다음 샷에서 카메라는 적장의 등 뒤에 가 있는데, 이순신의 칼이 왼쪽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오른쪽 아래에 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뭔가 깔끔하지 않다는 것을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다 느끼게 되고 이 정도면 NG컷이라 할 만 합니다. 문제는 이런 컷들이 꽤나 많아서 매무새가 조악합니다. 아무리 쌈마이 헐리웃 영화라고 하더라도 이런 컷들은 보기 힘듭니다.

정작 문제는 배우 최민식의 존재입니다. 자신없는 감독은 최민식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될듯 보입니다. 최민식은 연기 잘하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하지만 최민식 연기가 정말 잘 나올 때는 극 안 캐릭터의 개성이 매우 강할 때입니다. <파이란>에서의 강재, <악마를 보았다>에서의 장경철처럼 말입니다.

정성일 영화평론가가 취화선 동행취재기를 씨네21에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최민식과의 인터뷰를 인용하겠습니다.

– 임권택 감독님과의 해석상의 차이가 있습니까.

=근본적인 차이는 없죠. 그러면 큰일나게요. (웃음) 다만 지금 초상화냐, 풍경화냐, 라는 점은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전 굵은 붓으로 죽죽 그리고 싶은데, 그럴 때 감독님이 아니다, 굵은 붓으로 그리다가 가는 붓으로 바꿔라, 하시면 내가 성이 안 차는 부분이 생깁니다. (웃음) 자꾸만 내것이 나오니까 괴롭죠. 내 것을 버리고 감독님 것을 취해야 하는데, 나를 죽여야 하는데, 자꾸만 내 분석대로, 내 방식대로 몸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목표를 가는 거니까요.

다음은 임권택 감독 인터뷰 중에서 발췌입니다.

=장승업이 김병문 집에 담 넘어가서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서 최민식씨가 눈물을 흘려서 NG를 내셨다면서요.

– 그것도 기품과 관련될지도 몰라요. 물론 울 수도 있는 거요. 그러나 사소한 감정을 드러내는 쪽으로 장승업이를 찍어오지 않았다고. 거기서 느닷없이 그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안에는 깊은 사랑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살아내는 놈인데, 여기 와서 울고 있으면 그게 맞겠냐고. 삐끗삐끗 감정이 튀어나오면 수렁을 밟는 거죠.

최민식은 이런 배우입니다. 영화는 여러 파트가 한 데 어우러져야 하는 장르인데 그는 연기의 개성이 너무 강해서 자신의 캐릭터만 살아나고 나머지는 죽어버린다는 것이죠. 저는 이 절정이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근의 최민식은 과거처럼 자신의 연기로만 영화를 다 뒤덮진 않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이나 <신세계>에서는 많이 절제하는 연기가 보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최민식은 최민식이죠. <명량>에서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은 모든 대사, 모든 표정에 감정이 뚝뚝 묻어납니다. 아들과 밥을 먹으면서 하는 간단한 대사 “같이 먹으니까 좋구나” 이 아홉 글자에도 목소리의 톤과 인토네이션을 써서 감정을 묻혀내죠. 그로써 최민식의 이순신은 끊임없이 얘기합니다. 나는 힘들어, 나는 괴로워, 나는 어려워 ……

그런데 과연 이순신이 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마구 쏟아내는 인물이었을까요?
“난중일기”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병신년 이월 열 나흘 – 밤에 바다 위에 떠오른 달은 대낮처럼 밝고 물결 위에 비친 빛은 비단결 같은데, 혼자서 수루 위에 기대어 있노라니 마음이 몹시 어수선하여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을미년 칠월 초 하루 – 혼자 수루에 기대어서 나라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 이슬과 같았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재목이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기둥이 없으니 이 나라가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다. 마음이 어지러워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갑오년 이월 열 엿새 – 홍양 현감이 암행어사 밀계 초본을 가지고 왔다. 임실, 무장, 영암, 낙안의 수령을 파면하고 순천 부사는 탐관오리의 으뜸으로 거론하고 기타 담양, 진원, 나주목, 장성 창평 등의 수령은 나쁜 짓을 덮어두고 상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임금을 속이는 것이 이렇게 갈 데까지 갔다. 나랏일이 이 모양이나 나라가 평정될 리 없다. 천장만 올려다볼 뿐이다.

물론 아들이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격정적으로 비통함을 드러내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의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힘들고, 괴롭고, 어렵고, 외로울 때에도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뒤척거리고, 천장만 올려다보는 것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

이런 이순신의 모습과 최민식이 연기한 이순신의 모습은 격차가 큽니다. 아마 연출자가 이를 알고 최민식의 연기를 더 죽이려 해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둘 사이의 “짬밥” 차이가 얼만데 ……

오히려 류승룡이 이순신을 맡고 최민식이 구르지마를 맡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외에도 소위 과도한 ‘국뽕’이나 텔레파시와 치마 시그널 등 무리한 설정이 있는데도 “명량”은 흥행가도를 힘차게 내달리고 있습니다. 리얼리즘을 정말 사랑하는 한국의 관객들, 그리고 문단 독자들의 성원 덕분에 말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묘사하는 게 리얼리즘이라 한다면 한국의 대부분 흥행 영화는 모두 리얼리즘이 베이스라 할 수 있습니다. <설국열차>가 좀 예외랄까? 실은 <괴물>도 리얼리즘이지요.

우리 관객이나 독자들이 왜 리얼리즘을 좋아하는지는 다른 차원의 분석이 있어야겠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시기에 개봉한 영화 <군도>를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영화의 매무새, 그러니깐 만들어 놓은 모양은 <군도>가 <명량>보다 낫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하지만 <군도>는 현실의 이야기를 현실이 아닌 것처럼 묘사했고, 이는 관객에게 매우 불편한 접근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현실의 이야기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면 모르겠는데, 그다지 멀지 않은 과거이며 그 과거의 현실은 지금의 현실과 별로 다를 게 없죠. 그런데 그 현실이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촬영하고 음악을 깔고 편집을 해 놓으니 관객은 혼란스럽지요.

김구 선생이 절정 무술을 사용하며 일본인을 때려 잡는데 거기다가 무협 스타일 자막으로 “흑심패룡장의 고수 백범 김구”라고 깔고, 고속 촬영에다 웨스턴 음악 넣고 영화 “300”처럼 편집하면서 재해석하면 관객들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김구 선생이 몸 담았던 역사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역사이기에 이처럼 재해석하려는 사람은 없겠지만, 허나 <군도>가 보여주는  현실도 어쩌면 해결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 백성은 현재와 흡사한 채권추심도 당합니다.

영화 속 현실이 지금의 현실이라고 얘기하면서도 묘사는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누리끼리한 서부 영화 스타일 색보정, 음악과 무협 영화와 같은 캐릭터 구축과 샘 페킨파 같은 급격한 줌인 줌아웃 등을 써대니 당연히 언발란스할 수 밖에 없습니다.

<군도>의 흥행이 주춤하는 것은 여타의 요인이 많겠지만 제 생각에는 <명량>과는 다르게 리얼리즘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세계 4대 해전? 한국이라서 꼬인 이순신 이야기

‘이순신 제독의 한산대첩’이 4대 해전에 들어가느냐? 라는 의문이 많나 봅니다.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건 ‘전 세계 해군사관학교에서 과연 저런 것을 배우는가?’하는 것이죠. 우리가 사는 곳이 한국이라는 곳이라서, 한국의 전신인 ‘조선’의 장수에 대한 승전이야기라서, 부풀려지고 곡해된 것은 아니냐? 라는 의문인 것이죠.

더군다나 ‘도고 제독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그저 ‘일본’에게 우월감을 나타내기 위한 민족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유언비어’가 아닌가? 에 대한 의문이기도 합니다.

이는 이승만 정권 때, 경무대에서 벌인 ‘가라테’시연이 무식한 관리의 어이없는 발언. 즉, 미국관리에게 ‘저것이 우리 고유의 무술인 태권도입니다’라고 소개해버리는 바람에, 가라테의 변용에 발기술 몇개 추가해 만들어진 지금의 태권도를, ‘쪽팔리니까’ 애써 ‘예부터 전해내려오는 고유의 무술 태권도’라고 퍼뜨렸던 전례도 있기에 더욱더 의심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총독부 경시청 소속으로 유도와 가라테만 배우던, 순사짓 하던 사람들이 그대로 경찰이 되었고, ‘택견’을 구사할 줄 알던 사람들은 독립운동 하거나 저자거리 사람들이었기에(김구 선생도 택견의 기술로 일본 순사들을 질러차대셨죠) 이런 어처구니 없는 ‘태권도의 뿌리’가 생겨났지만 뭐 어쩔 수 있습니까?

각설하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를 설명키 위해서는 ‘사관학교’의 교육시스템에 대해서 설명이 필요하겠죠.

참고로 우리나라의 사관학교는 ‘교육’에 관해서는 ‘대학’과 같은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146점의 ‘학점’을 이수해야 학사학위를 받는 것이죠. 그리고 ‘전공’도 세분화 되어있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 합니다만 저는 ‘군사전략학과’였습지요. 찾아보니 전기, 정보통신공학, 기계조선, 경영과학, 해양학, 전산과학, 국제관계학, 군사전략학, 외국어학이 전공으로 존재합니다.

허나 전공이 다르더라도 ‘해전사’는 공통필수 과목입니다.

‘해전사’에서 흔히들 얘기하는 ‘세계 3대 해전’이 바로 살라미스, 칼레, 트라팔가 해전입니다.

네, 이는 ‘서양사’의 시각에서만 다루어지는 3대 해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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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팔가 해전 설명도

여기서 3대라 함을 3가지 큰 해전이라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수많은 해전이 있었으나, 해전의 ‘역사적’흐름, 즉 ‘변환점’에 속하는 해전의 ‘축’을 의미합니다.

살라미스 해전은 함선끼리 가까이 다가가 선원들의 육박전을 이끌어내던 기존 해전에서 함선의 앞 부분을 강하고 뾰족하게 만들어 상대의 함선에 충격을 가하여 전복시키거나 선원들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는 전술을 펼쳤고, 칼레 해전은 함포를 사용하여 ‘집중포화’를 쓰는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해전사의 또 다른 변혁점을 보여주었고, 트라팔가 해전은 넬슨 제독의 함대 운용술의 극치를 보여준 해전이었습니다.

커다란 해전이 아닌, ‘역사적 해전 패러다임 변환 사건’들을 뽑아낸 것이 흔히 얘기하는 ‘세계 3대 해전’입니다.

그런데 여기 슬그머니 ‘한산대첩’이 4대 해전으로 들어간 이유는 뭘까요?

학익진을 사용한 것도 모자라 상대의 ‘사령선(명령을 내리는 선박)’에게 선공일점사를 하며 상대의 예봉을 꺾고, 무척이나 변화 무쌍한 함대 운용을 벌이며 ‘집중포화’를 사용한 화려한 전술이었기 때문입니다.

최무선 함대가 1300년대 이미 우리의 선박에 자신이 개발한 함포를 설치했고, 그리하여 우리 수군은 서양보다 200년 앞선 선박함포운용기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칼레 해전 보다 200년이나 이전에 말입니다.

칼레 해전이 적과의 조우 이후, 무차별적 개별함선 포격전이었다면 한산대첩은 완벽하게 조직되고 통솔이 기가막힌 최고의 해전이라는 것이죠.

이미 오래전부터 서양학에서나 내려온 3대 해전에 우리 한산대첩이 뒤늦게 4대 해전으로 들어서게 된 이유는 순전히 일본덕입니다.

우리나라는 오랑캐가 쳐들어와서 벌인 ‘난’이라고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라고, 당시 일본은 ‘국가’도 이루지 못한 섬이라고 능멸하는 역사관이었지만 이건 그저 우리의 민족적인 ‘쪽팔림’을 가리기 위한 변명일 뿐입니다. 도대체 어느 나라 왕이 오랑캐 때문에 국경까지 피난을 갑니까? 중국처럼 오랑캐가 점령한 왕조가 있으면 중국의 변방민족으로 다 한틀의 역사로 집어넣는 방법을 취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일본이 우리의 변방민족입니까? 우리도 일본역사를 우리 역사로 편입시킬까요? 그건 아니거든요.

조일전쟁이라 명확히 선을 긋는 것은 전 세계 사관(史觀)에 순응하는 명칭이라 보는 것이 옳거든요.

중국이 우리를 속국이라 보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매우 잘못된 일이듯, 우리가 일본이 국가가 아니었다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각설하고,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해군력은 막강했고(항공모함이 꽤나 있었지요 –;), 이순신 제독의 학익진을 개량한 T형 진으로 러시아 함대를 박살내 버렸습니다.

물론 그 후에 미국에게 깨지고, 결국 미 군정에 놓여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만.

일본이 미국의 통치하에 놓이면서 미국은 늘 하듯 일본을 통해 일본과 주변국의 정보(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모두 습득합니다. 그러면서 러시아와 미국의 해군을 괴롭혔던 일본의 해군사에 대한 연구중에 ‘이순신’이 발견 된것이죠. 그리고 그의 전쟁성과가 ‘불패신화’라는 어처구니 없는(에스파냐 무적함대도 결국은 박살났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이유는 그의 함대는 무너진 적이 없다는 얘기지요) 기록에 놀라고, 그의 전술과 16세기에 그런 ‘함포술’과 함대운용술을 갖춘 해군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에 치를 떱니다.

우리는 역사시간에 ‘세계 4대 문명’이라 배워왔습니다. 이 사관이 요즘은 세계엔 스무개가 넘는 문명이 존재했었다라고 바뀌어 가고 있지요.

마찬가지로 ‘세계 4대 해전’이라는 것은 ‘해전사’를 연구하는 교수들의 주장 중에 하나입니다.

아직도 ‘세계 3대 해전’을 배우는 국가도 있고, 영국과 독일, 미국, 우리나라 같은 경우엔 ‘세계 4대 해전’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엔 제가 알기론 가르치는 교수마다 ‘다르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들의 경우 저렇게 ‘3대’니, ‘4대’니 그런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터닝포인트’를 짚을 때, 3군데를 짚는가 4군데를 짚는가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심지어 위에서 밝힌 일본이 러시아 함대를 쓰러뜨린 ‘쓰시마 해전’, 혹은 ‘일본해 해전'(아쉽게도 아직도 전 세계 전쟁관련 학술서적에는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문물을 더 빨리 받아들였기에 ‘Sea of Japan’이 많습니다)이라 불리는 해전을 넣어 ‘세계 5대 해전’이라 짚는 교수도 있습니다.

네, 3대고, 4대고, 5대고 중요한게 아닙니다.

말그대로 세계 ‘해전사’에 ‘한산대첩’은 그야말로 ‘백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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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이라고, 한국인 교수라고, 저 ‘한산대첩’을 목숨걸고 홍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양의 ‘전사(戰史)’를 모두 꿰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비교해 볼때, ‘한산대첩’의 가치가 훨씬 드높기에, 잘 알지 못하는 서양인들에게 알리려 하는 것입니다.

독도가 우리 땅인거, 동해가 우리 바다라는 거, 우리만 알고 있으면 안되듯이, 국제 사회에 인정 받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도고 제독의 발언은 ‘기자’들 사이에서 확인할 길이 없기에, 우리나라에서만 도는 낭설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허나 분명 존재하는 일제강점기의 기록들은 일본 해군들이 ‘이순신 제독’을 천황 다음으로 숭배하고, ‘軍神’의 예를 갖추며 기렸던 영웅입니다.

그러했기에 일본 군관학교를 나온 우리의 마사오 끈(다카기 끈인가? 박정희)도 100원짜리 동전에 우리 순신이 업빠를 넣고,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이순신’ 해대면서 교과서엔 별 쓸데없는 말타다가 떨어진 ‘쪽팔린’이야기만 집어넣는 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한국’이라는, 60만 대군중 40만이 넘는 ‘육군’을 가진 나라에서 사는 비운이기도 합니다. 물론 북한 때문이지요.

박정희가 아무리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 병참운용을 좋아했더라 할지라도 육군 별 개수랑, 해공군 별 개수랑 합쳐보면 게임도 안되는 군의 권력구도에서, 해군의 최고 장수가 해군력을 화려하게 다룬 것 보단 ‘군인의 의지’라는 이미지로 부각되는 것이 ‘군대의 윗분’들에게 기분이 거슬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젠 시대가 바뀌었지요, 해상왕 장보고가 TV드라마로 제작되고,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가 대작으로 방영됩니다.

심지어 기존에 잘 보여주지 못했던, ‘이순신의 함대 운영’이 아주 세밀히 묘사되는 ‘지루한’장면들이 나옵니다.

육군군부독재에 휘둘린 ‘이순신’의 모습이 이제야 제대로 구현됩니다.

병약했던 이순신, 군대의 4대 주요요소인 인정작군(인사, 정보, 작전, 군수)를 모조리 커버해내던 그 뛰어난 지략이 지금까지 가려져 왔던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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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KBS의 ‘불멸의 이순신’에 대한 고증은 주로 해군사관학교에서 해주었습니다. 임원빈 중령(지금은 대령 진급하셨을라나?, 전 이 분에게 철학의 이해 들었는데 무척이나 졸려 죽을 뻔했죠 –;)님을 중심으로 교수진들이 지금까지 연구해온 것들을 제작진이 원하는 정보마다 세밀히 가르쳐주는 모양입니다.

물론 중간 중간 있었던, 이순신이 선조를 알현한다던가, 거북선이 침몰 된다던가 하는 것은 ‘고증’이 된것이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순신의 이미지가 ‘육군에 의해 왜곡된’것이었음을 부숴주고 있는 드라마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뛰어넘어.

이순신의 해전들이 전 세계 그 어떤 해전 보다도 뛰어난 해전이었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은 ‘사료’가 말해줍니다.

반만년 역사위에 제대로 ‘사료’가 없어서 떳떳하게, 중국과 신경전 할 필요없이 세계에 내세울 민족의 영웅이 된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이 세운 전공들의 ‘사료’가 무척이나 적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이 말하는 배후의 ‘논리적 추론 가능한 사건들’은 우리가 떳떳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우리의 영웅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도고 제독의 비교평가 따위도, 혹여나 의심갖는 ‘민족주의로 인한 선입견’도 필요없습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지배한 것은 ‘유연한 포술’이었습니다. ‘대포’의 운용이 기가막혔던 것이지요.

허나 그 나폴레옹 보다 200년전에. 그것도 육지가 아닌 바다 위에서, 함대의 포술을 자유자재로 구사케 하고, 7년 조일전쟁 기간동안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역사적 진실.

그것만으로도 우리 민족의 ‘해전사’에 대한 자부심은 충분합니다.

‘도고’의 이야기가 유언비어든 아니든.

우리의 이순신은 그런 유언비어론 자체가 필요없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제독’입니다.


영진공 함장

이순신의 리더쉽과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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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인간 일반에 해당되는 것이든, 아니면 민족주의적 사고든 간에 한국인 혹은 한국문화 고유의 특성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국인의 장단점을 가장 잘 이해하고 활용한 인물, 이순신 장군에게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순신 장군은 한국인을 움직여서 불멸의 업적을 남긴 최고의 리더라 할 수 있다. 그는 17번의 주요 해전에서 단 한번도 지지 않았다. 그 해전 중에는 12척 대 300여척의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명랑대첩도 포함된다. 그가 이끄는 조선 수군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무적이었고, 동시대의 그 어떤 해군조직보다도 강력했다. 그런 그가 한국인을 어떻게 파악했는지는 한국인의 전통적 특성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인은 원거리 대면을 선호한다.

이순신은 절대로 부하들이 직접 적과 마주치치 않게 했다. 실제로 당시 전투기록을 보면 조선군은 성안에서 활을 쏠때는 강했으나 직접 적과 마주치는 전투에서는 거의 언제나 졌다. 조선군의 무기체제에는 활만 있을뿐 창이 아예 없는 경우도 많았다. 즉, 조선군은 먼거리에서 쏘기에 능했고, 적과 마주보고 육박전을 펼칠 각오는 절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이순신 역시 거의 모든 해전을 원거리 포격전으로 해결했다. 일본의 해전은 육박전을 지향하는데, 그들의 장기인 육박전을 할 기회를 아예 주지 않은 것이다.

둘째, 한국인은 카리스마에 약하다.

임진왜란때 전사를 보면 앞서 말했듯 전면 격투전을 벌이면 조선군은 대부분 졌으나, 신기하게도 사상자는 별로 없다. 말 그대로 그저 사라져버렸다. 즉, 조선군은 직접 적과 대면하면 싸우기 보다는 그냥 도망쳤다. 예외는 곽재우나 권율같은 강한 카리스마를 가진 지휘관이 있을때 뿐이다. 이런 명장의 지휘하에서 조선군은 그 누구보다도 악착같이 싸워 이겼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만약 지휘관이 죽으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모두 도망쳤다. 원균이 죽었다는 칠천량 전투에서도 사실 주요 장수들은 모두 죽지 않고 도망쳤다가 이순신이 부임하자 다시 기어나왔다. 이순신은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노량해전에서도 자신의 전사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가 사라지는 순간, 천하무적 조선수군이 순식간에 종이호랑이로 전락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히딩크가 사라진 한국축구의 무기력 처럼 말이다.

셋째, 한국인은 이기적이고 실리적이다.

앞서 조선군이 질 것 같으면 다 도망가버리곤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랬을까? 그들은 어쩌면 전쟁의 목적 같은 것을 공유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에서처럼) 그들은 자기들이 내세우는 깃발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체면은 중시했으나 명분은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명분이고 명예고 내가 죽으면 다 무슨 소용인가?” 이것이 그들의 모토였다. 한국인은 애초부터 이기주의자이자 실리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 이순신은 자기 부하들이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가족의 안전을 자기 군의 안전이나 승리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부하를 믿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부하들을 늘 닦달했다. 그는 부하를 엄하게 처벌하고, 확실하게 포상했다. 훈련만큼이나 이 상벌체계의 유지에 최선을 다했다. 이 시스템을 통해서 이기적이고 실리적인 부하들을 움직일 수 있었다.

덧붙여, 이 시스템을 거꾸로 이용한 이들도 많다. 선조가 대표적인 인물. 그가 임진왜란 내내 저지른 일이라고는 몰래 도망가기와 전공을 세운 이들 역적으로 몰아 죽이기 뿐이었다. 그 덕분에 단 한번도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는 원균이 수군통제사까지 되는 말도 안되는 일도 벌어지고, 그 원균이 당대 최강 조선수군을 단 한큐에 말아먹어버리는 블랙코미디가 벌어졌다. 어쩌면 이런 인간들이 위에서 오래 오래 군림한 탓에 한국인이 더 실리적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 유성룡이 선조의 미친 짓을 어느 정도라도 제어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그때 끝장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한국인의 성격이 디지털 매체로 인해서 변화했을까?
그렇지 않은 듯 하다.

1. 한국인은 원거리 대면을 선호한다:
디지털 매체는 원거리/간접 대면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리고 한국인은 그걸 매우 좋아한다.

한국문화는 직면해서는 대화나 토론을 하는 일과 잘 맞지 않는다. 누군가는 조선시대의 활발한 당쟁이나 상소들을 예로 들면서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그때의 논쟁도 서로 자신의 입장을 견고히하는 논쟁이었지, 관심사를 공유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토론은 아니었다. 성에 들어가서 원거리 전투를 해야 실력을 발휘하는 것이나, 어떤 집단에 소속되어서 간접적인 논쟁에 실력이 발휘되는 것이나 어쩌면 비슷하다. 그리고 이런 특성은 보다 확실한 원거리 활동을 보장하는 인터넷과 모바일 환경에서 더 잘 발휘되었을수도 있다. 한국인은 애초부터 대면 만남보다는 원거리 만남을 선호하는 것이다.

2. 한국인은 대세와 카리스마에 약하다:
한국인은 주류를 매우 중시한다. 디지털매체에서도 결국 주류만 남기를 바란다.
멱함수의 법칙은 한국에서 더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

한국의 3대일간지 점유율이 외국에 비해서 독과점수준임에도 아무도 그것을 문제시 하지 않는 이유, 이동통신이 결국 4자에서 3자로 조만간 2자 체제로 변화해가는 현상, 어떤 분야에서든 2개 이상의 강자가 남지 못하는 현상도 아마 이런 특성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한국은 하나다. 모두가 같은 것을 원한다. 그리고 이렇게 확실한 강자와 그 라이벌 체제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오히려 불안해 한다. 한국인은 선택의 여지가 많아지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선택을 해야 하면 대부분 그냥 도망치고 만다.

3. 한국인은 이기적이다:
한국인의 유일한 신념은 자기 자신이다.
대부분의 매체는 결국 사적인 연결을 위해 사용된다.
공적인 의사소통은 매체 사용의 주류가 아니다.

한국인은 집단보다는 개인을 중시한다. 개인이 조금 확산된 가족 이상을 원치 않는다.
또한 한국인은 명분을 내세울지는 몰라도 절대로 그 명분을 믿지는 않는다.
집단을 위해서 목숨을 버릴수 있을만큼 신념이 강한 사람은 한국문화에서 결코 정상이 아니다. 노사모가 완전히 수용되지 않는 것도 어쩌면 그런 지점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의 핵심은 결코 공적인 메시지나 학술적인 진리가 아니다. 그 배후에 깔린, 혹은 그 메시지의 사적인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정책이나 어떤 선언이 발표되면, 그 선언의 사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이해 공유자(가족, 친지)와 이를 공유하는 활동이 작동한다. 그것은 80대 20의 비율이상일 것이다.

4. 한국인은 이기적이되, 개인적이지는 않다:
언제나 대세를 따르기를 바라고, 대세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한다.
모든 정보기관의 촉각은 거기로 향한다.

개인주의는 신념을 필요로한다. 하지만 한국인은 신념을 믿지 않는다. 고로 이기주의자이지만 개인주의자는 아니다. 한국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옳은 신념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대세이냐이다. 왜 한국 부자들이 한국에서는 돈을 쓰지 못하고 외국에 나가서 돈을 쓸까? 튀고 싶어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제대로 튈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취향이 없다. 그리고 있다 하더라도 그 취향을 집단의 눈총속에서도 주장하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자기의 취향이 소수인 곳에서 자기를 주장하기 보다는, 그것이 대세인 곳을 찾는다. 아니 대부분은 개인취향 자체가 없으므로 그냥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하는대로 따라서 외국으로 갈 뿐이다.

5. 한국인은 실리적이다:
질 보다는 양이 우선이다. 적은 비용은 카리스마 다음으로 중요하다.

명품바람이나 고급소비성향들이 부각되면서 사람들이 착각하게 된 것이 한국인의 소비취향이 고급화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은 기본적으로 양을 우선시한다. 같은 조건이면 가장 싸게 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 짝퉁을 선호하는 것, 공짜를 선호하는 것, 불법복제가 일상화되어 있는 것이 한국문화의 기본이다. 명품을 찾고, 프리미엄 서비스를 선호하고, 저작권에 예민한 것은 한국문화가 절대로 아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중국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제품의 소구지점은 결국 카리스마와 가격 뿐임을 의미한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