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도시, 그리고 나는 혼자 ……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서는 내 귀에는 음악이 걸려있다. 이 도시는 누군가와의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난 그들의 얼굴을 보지 않고 그들 역시 내게 관심이 없다. 나 역시 그들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며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가끔 내 얼굴과 옷차림을 쳐다보고 지나가는 사람들 역시 내게 관심이 있어서는 아니다. 단지 방어의 눈빛.

군중은 물처럼 촘촘히 거리를 메우며 흘러가지만 그들 중 해프닝을 원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그들의 어깨를 치는 정도의 사소한 해프닝조차도.

그들은 단지 갈 길을 갈 뿐이며 어떤 중요한 일로 가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그 계획에 예상치 못한 일이 끼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난 그들 사이를 조심히, 천천히 걷는다. 사람들은 바삐 걸어간다. 나도 걸음을 빨리 한다. 무엇에 지지 않기 위해서인지는 알지 못한다. 아마 걸음을 빨리 하는 그들도 모르긴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내려간다. 에스컬레이터. 계단. 개찰구. 플랫폼. 지하철. 회색과 직선의 갤러리.
이따금씩 보여지는 컬러는 어디까지나 표식. 마크. 편의. 광고.


풍경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창문. 앞 사람의 신발이나 맞은편 창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뚫어지게, 혹은 멍하게 보는 힘없는 사람들.

자는 사람. 구걸하는 사람. 잡상인은 그 정적을 깨지만 그것을 반가워하는 이는 없다. 잡상인이 옆 칸으로 이동하는 순간, 그가 떠난 기차안에는 그가 들어오기 전보다 더한 정적이 흐른다.

지하철에서 내린 난 어느 커피숍으로 들어간다. 녹차, 재떨이. 단 두 마디만 하면 이 넓고 큰 커피숍에 내 자리 하나를 가질 수 있다. 트레이를 들고 맨 꼭대기층인 4층으로 올라간다. 낯선이의 출현에 기다릴 사람 없는 사람들까지 내게로 시선을 보낸다. 난 누구와도 시선을 맞추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하며 빈 자리를 찾는다.

창가 자리에 가방과 트레이를 내려놓고 앉는다. 시끄럽던 커피숍은 내 자리를 찾는 것만으로도 조용해져 나 혼자있는 공간처럼 되어버린다.

내가 앉은 자리 밑으로는 횡단보도가 보인다. 담배 한 대에 불을 붙힌 나는 그들을 내려다본다.

사람들이 건너편에서 건너편으로 이동한다.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도 누구 하나 부딪히는 일 없이, 우연히 친구를 만나는 일 조차도 없이 빨간 불이 되기 전에 건너간다.
그 중 몇몇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는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며, 누군가는 내 시야에서 사라져 어디론가 또 걸음을 바삐 옮기고 있을 것이다.

이 회색빛 도시는 넓고 크지만, 난 혼자다.

거리에 널린 숱한 사람들 역시, 혼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집단일 뿐이다.

영진공 담패설

 

“환상의 그대”, 홍상수 영화와 닮은 우디 앨런 영화





우디 앨런 감독의 신작 <환상의 그대>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참 많이 닮았다는 느낌을 준다. 이제껏 오랫동안 두 감독의 영화를 봐왔지만 이번처럼 비슷하게 느껴졌던 경우는 처음인지라 내심 놀랍다는 생각도 들고, 이게 이번 작품에서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예전부터 두 감독의 영화가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있었던 것인데 지금까지 눈에 띄게 드러나지를 않았던 것인지를 판가름해보게 된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와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처음부터 닮아있었다고 보는 건 아무래도 어렵다는 결론이다. 특히 우디 앨런 감독의 작품들이 내용과 스타일 면에서 훨씬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되며 – 단순히 더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 그런 와중에 이번 <환상의 그대>를 통해서 우연찮게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와 무척 닮아있는 모습들을 보여주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환상의 그대>가 유난히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생각나게 만드는 이유는 등장 인물 가운데 어느 누구도 기분 좋은 결말을 – 영화가 끝난 이후의 더 나은 미래를 – 맞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가 언제부터 이토록 삶에 대해 시니컬한 입장을 취했었던가 싶기도 하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라고 해서 항상 암담한 결말만을 그렸던 것도 아닐진데, 이를 통해 두 감독의 영화가 접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 그렇게 느껴졌다는 사실이 – 무척 흥미롭게만 느껴진다.

<환상의 그대>는 전지적 나레이션을 활용해서 – 홍상수 감독 역시 종종 나레이션을 즐겨 사용하지 않았던가 – 씨퀀스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설하고 있는 편인데, 그 중 영화의 시작과 함께 인용되는 셰익스피어의 경구, “인생은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차 있지만 결국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대주제가 되고 만다.




등장 인물들이 자기 삶의 현주소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언가 다른 곳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다는 점에서 – 그리고 그런 허영과 욕망의 추구가 하나 같이 낭패를 불러오고 만다는 점에서 – <환상의 그대>는 기존의 우디 앨런 영화와는 상당히 차별되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극중에서 유일하게 해피엔딩을 맞는 인물은 남편 알피(안소니 홉킨스)에게서 버림을 받은 후 사이비 심령술사에게 푹 빠져 주변 사람들을 전부 열 받게 만들어버리던 헬레나(젬마 존스)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혼자서 외롭게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모면하게 되었으니 이것을 과연 잘 된 일이라고 해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문이다.

이토록 헛소리와 분노로 가득차 있으면서 결국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에서 그나마 답이 되어줄 수 있는 건 헬레나가 의존했던 바와 같은 맹목적인 믿음 밖에 없는 것이 아니냐 식의 결론은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다.




영화의 원제목 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는 우리가 삶에 대해 확실하게 예견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란 “(누구나 언젠가는) 저승사자를 만나게 된다”는 사실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 로이(조쉬 브롤린)의 대사였지만, 이 말의 의미가 영화 초반에 언급된 셰익스피어의 냉소적인 경구와 맞물리면서 결국엔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적인 기조를 이루게 된다. 노년의 알피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젊은 창녀(루시 펀치)와 재혼까지 하지만 물질적인 능력에 의해 유지되던 알피의 허영은 결국 좌초를 하게 된다.

알피의 딸 샐리(나오미 왓츠)의 남편인 작가 로이는 건너편 아파트의 창문을 통해 흠모하던 “환상의 그대” 디아(프리다 핀토)의 마음을 얻는 데에 성공은 하지만 작가로서 자신의 무덤을 파는 짓을 하게 되면서 그 역시 인생의 바닥으로 완전히 침몰을 하고 만다. 큐레이터인 샐리 역시 갤러리의 사장 그렉(안토리오 반데라스)과의 연애에 헛물을 켠 데다가 어머니 헬레나가 예언을 핑계로 창업 자금 제공을 거부하자 몹시 분노를 하게 된다.



<환상의 그대>는 분명 우디 앨런의 최고작이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이 솜씨 좋고 지칠 줄도 모르는 시네아스트의 현재를 확인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세태 풍자까지는 아닐지라도 분명 우스꽝스러운 해학의 드라마라고 할 수 있을텐데,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혹시나 자신의 삶에도 그와 같이 허탈하고도 몹시 짜증스러운 일이 실제로 닥치지나 않을까 싶어 맘 놓고 웃지도 못하는 애매한 감정에 휩쌓이게 될런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희비극을 넘나드는 거장의 행보는 이처럼 현재진행형이다.



영진공 신어지








 

“바보들의 행진” OST 다시 듣기 (1)




2006년 쯤에 CD로 복각 된 1975년 작
『바보들의 행진』과 1974년 작인 『별들의 고향』O.S.T.  송창식, 이장희 1970년대 초반 포크 계열이면서도 이단아적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이 각각 영화 주제가를 불렀고,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던 음반들이다.

1. 가물가물한 기억
사실 내가 태어나던 때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겠다. TV를 통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전편을 본 것인지 아니면 편집된 장면만을 본 것인지 가물가물하다. 대놓고는 못해도 1970년대의 억눌린 상황을 잘 묘사했던 것 같다. 장발 단속, 군 입대, 그리고 마침내 동해 바다로 자전거 타고 뛰어드는(이렇게 짓눌려서는 죽는게 낫다!!!)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음악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75학번으로 우리집에서 대학을 다니시던 외삼촌 덕분에 ‘엄마 – 아빠’하기 전부터 오디오를 통해 최신곡(비틀즈, 사이먼 앤 가펑클에서 김도향, 산울림까지)을 들었기 때문인 듯 싶다. 외삼촌이 인정하는 몇 안되는 한국 가수 중 하나가 바로 송창식이었고, 당근 이 “왜 불러”도 그렇게 들었다. 여튼, 『바보들의 행진』을 다시 들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 놀라운 음악들이라는 것이다.

2. 왜 놀라나
귀에 익은 친숙한 멜로디들이기에 때문만은 아니다. 멜로디만 기억날 뿐 악기 소리에 관심없던 어린애 귀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에 놀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중현, 김추자, He6, 키브라더스 등의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반 음반의 복각판에서 느끼는 것의 연장이기도 하고, 그와는 또 다른 경험이기도 하다.

◎  1960년대 말부터 이어지는 신화
몇 명되지 않는 한국 대중음악 연구자들에 의하면 1950년대부터 주한 미군을 상대로 한 클럽 무대(미 8군이 무대로 통칭되는)가 생겨났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 8군 무대 쑈를 담당하는 전문 연예 회사들이 생기고 이 무대에 서고자 전국에서 음악 좀 한다는 친구들이 몰려들었단다. 이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미군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컨트리에서 화려한 무희들과 어우러지는 신나는 재즈까지 다양한 장르였다고 한다. 특히 1960년대가 되면서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록큰롤이 중요한 레파토리의 하나가 되었다.

정식 악보보다 귀로 듣고 하나 하나 따서 연주하던 이들의 음악성은 본토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정교했단다. 라이브 클럽의 현장성을 변수로 고려하더라도 한국인들이 연주하는 팝 음악을 미군들이 큰 위화감 없이 즐길 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미 8군 무대의 한국인들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지금처럼 좋은 악기를 구할 수 있던 것도 아니고 보면 …..

여튼, 미 8군 무대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쌓인 자신감은 그 무대에 서던 뮤지션 일부로 하여금 (한국의) 일반 대중 앞으로 나설 용기를 갖게 만들었다. 트로트가 엘리트의 음악에서 일반 대중 모두에게 사랑받는 장르로,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의 전부로 자리매김하던 1960년대 초, 미 8군 무대에서 스텐다드 팝과 재즈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반 대중음악 무대로) 정식 데뷔하기 시작했다. 손석우, 이봉조, 길옥윤, 등의 곡과 반주(그들의 악단) 위에 한명숙, 이금희, 패티 김, 현미 등이 트로트와는 전혀 다른 곡 스타일, 창법, 목소리 톤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이 되면 미 8군 무대에서 비틀즈의 록큰롤을 흉내내던 친구들도 하나, 둘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바로 키보이스, 에드 포, 샤우터스, 등이다. 이들은 이미 대중음악계에 자리 잡고 있던 미 8군 선배들과는 또 다른 모습과 음악을 들고 나타났다. 록큰롤에서 시작 점차 쏘울, 싸이키델릭, 하드 록으로 발전한 이 젊은 음악인들은 스텐다드 팝을 추구하던 선배들과 달리 전자 악기로 무장했다는 것부터 달랐다. 또한 굉음(당시로선)에 가까운 파격적인 사운드를 내새운 채 클럽(살롱, 고고장, 등) 무대를 통해 젊은 팬들과 직접 만났다는 점도 새로웠다. 당시 일반 청중이 음악을 만날 수 있던 두 경로, 즉 방송을 통해서 혹은 코메디(촌근, 원맨쑈), 무용 등과 음악이 섞여있는 악단 무대 이외의 방식으로 대중과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음악을 듣는 청자가 아닌 음악을 즐기러 (단단히 맘 먹고) 클럽을 찾은 대중과 직접 교감하는 뮤지션이 한국 시장에 처음 생겨난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뒷골목 살롱이나 떼로 몰려다니는 양아치로 취급되었지만 …..

미국 음악에 대한 무비판적인 반영일 뿐이라는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이때 처음 시작된 록 음악의 파격성은 두고 두고 한국 대중음악 전반(놀랍게도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가 바로 트로트이다)에 영향을 끼친다.

여튼 고고장에서 놀던 양아치와 시대의 유행으로만 치부되던 1960년대 한국 록의 시조들을 재조명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 시작되었다. 서구 대중음악의 역사 속에서 록 음악의 의미와 가치를 받아들인 일군의 대중음악 연구자/평론가들은 196,7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 공간 속에서 신중현을 찾아냈다. 그는 1964년 4인조 록큰롤(이라 부를 수 있는) 밴드 애드 포의 순수 창작음반을 발매한 것을 시작으로 (잠시 미 8군 무대로 돌아갔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싸이키델릭 성향과 대중성을 잘 머무린 한국적 록-쏘울 음악을 쏟아내었다. 특히 그가 발굴한 실력있는 여가수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사에 빛나는 명곡들이 발표되었다. 마침내 1960년대의 한국 록(꼭 록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은 신화가 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도 키보이스 출신의 He6(후엔 He5), 키브라더스, 신중현 사단 가수들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미국 음악을 그대로 재현하는 시대를 지나 대중의 구미를 기막히게 파악하는 능력을 갖춘 록(쏘울-싸이키델릭)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일런지도 모르겠다)으로 주류 장르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송창식이라는 (영원한) 미완의 작가
미 8군 무대 출신의 음악인들의 세련되고 빤딱빤딱한 연주가 서서히 주류로 진출하던 시점에, 이러한 전문성에 반기를 든 음악들이 하나 둘 대학가를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들은 밥 딜런, 존 바에즈, (저 멀리) 우디 거스리까지 짚어가며 통기타의 자유로움과 저항성을 칭송하기 시작한다. 김민기, (본인도 이 정도로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양희은, 한대수로 대표되는 포크 음악인들은 저항 가요로 이어지는 한국 대중 음악의 한 맥이다.

서유석, 양병집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본다면 한국 포크는 해학과 풍자의 정신이 살아있다. 그러나 한국에 이식된 포크는 저항성만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었다. 밥 딜런과 함께 한국에서 포크의 중요한 축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게 바로 사이먼 앤 가펑클이었고, 가사보다 그들의 아름다운 화음이 중요했다. 1960년대 록 진영이 도어스를 카피해도 기성 세대에 대한 전복을 꿈꾸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포크도 저항성 보다 통기타 소리와 화음으로 인식되었다.

‘튄(트윈) 폴리오’로 데뷔한 송창식은 한국 포크 후자의 경향으로 시작했으나 시대는 그에게(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자와 후자 모두에 걸치며 동시에 걸치지 않는 인물로 만들었다. 본인은 음악에 저항성을 입히는 것을 반대한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김민기(물론 윤형주, 김세환도)와 어울려 노래 짓고 부르는 청년의 하나였다. 아마 전자의 혐의가 씌워지는 것은 이 음반 『바보들의 행진』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후자로 인식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데뷔 모습보다는 1975년 대마초 파동 후 살아남은 유일한 가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찜찜함으로 얼룩진 대마초 파동을 거치면서 록에서 포크에 이르는 젊은 음악인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던 것과 대조적으로 송창식은 이후 더욱 커다란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물론 인기만 얻은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깊이 파내려가는데도 성공했지만.

송창식의 1970년대 후반, 1980년대 초반 음악은 트로트, 포크, 록, 국악(적)의 요소들을 이리 섞고 저리 뭉친 후 송창식 표 발성으로 감싸 안은 독특하지만 매력 넘치는 세계이다. “왜 불러”에서 “토함산”을 거쳐 “마의 태자”에 이르기까지 송창식은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완성했고, “참새의 하루”, “가나다라”, “사랑이야”, “우리는” 등과 같은 소탈함과 대중성을 모두 아울렀다. 하지만 그는 1986년 이후 더 이상의 음반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물론 엄청 많은 편집 음반이 나오긴 했다).

송창식 음악의 흠은 솔로로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음반까지 자신의 모든 것이 담겼다고 생각되는 필사의 무엇이 없었다는 데 있다. 예술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대중이 보지 못하는 색채와 질감으로 표현해야 한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작품을 통해 시대의 소리와 올바름에 대한 방향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 (송창식이 존경한다는)모짜르트도 베토벤도 그 음악 속에 시대의 모습과 정신이 담겨있지 않은가…..! 하지만 송창식의 음악에는 시대와 유리된 듯한 미학만이 담겨있다. 그래서 너무 훌륭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허무하다. 그래서 송창식은 (영원한) 미완의 대가일 수 밖에 없다. 사실 이 문제는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대가라 불리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다. 대곡, 명곡은 있지만 진정한 명반은 찾기 힘든 현실이라고나 할까 ……



영진공 헤비죠

 

“윈터스 본”, 미국의 우울한 현실을 드러내다





미스테리라고 하면 이것도 분명 미스테리이고 그것을 골격으로 삼고 있는 영화이긴 하다. 마약 제조/판매 혐의로 재판을 앞둔 상태에서 보석금을 내고 빠져나왔다가 종적을 감춰버린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가 죽은 것인지 어딘가에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 만약 죽었다면 어떻게 죽게된 것이며 아버지의 시체는 어디에 숨겨져 있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알아나가야만 하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실종을 둘러싼 의문들은 <윈터스 본>의 내러티브를 채워주는 소재는 되어줄지언정 연출이 의도하고 있는 핵심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미스테리 드라마라고 할 때 기대하게 되는 서스펜스나 신비감의 수위는 이 영화에서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다.




<윈터스 본>은 17살 소녀 가장이 맞부딪혀야만 하는 황폐한 현실 자체를 묘사하는 일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는 작품이다. 제목 그대로 뼈 채 드러나버린 듯한 겨울 날씨의 살풍경은 차라리 눈이라도 내려 뒤덮힌 모습이라면 나아보이련만, 시종일관 1년 전의 개봉영화 <더 로드>(2009)에서 인류 문명이 멸망해버린 이후의 지구와 별다를 것이 없어보일 지경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그러나 <윈터스 본>의 겨울 풍경 보다 더욱 황폐한 것은 주인공 리(제니퍼 로렌스)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만나게 되는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다. 물론 보통의 마을 주민들이 아닌 마약 제조와 상습 복용의 커뮤니티로 전락해버린 – 그것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아메리칸 드림의 어두운 그늘 속 마을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영화는 아버지의 실종이 결국 의문의 죽음으로 바뀌고, 그 죽음을 어떻게든 증명해야만 하는 – 그렇지 않으면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담보로 제공했던 집과 땅을 빼앗기고 넋 나간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까지 모두 길바닥으로 내쫓기게 되니까 – 상황으로 한 단계씩 바뀌어 가는 과정을 묵묵히 따라가기는 하되 섣불리 관객들의 감정을 자극하려 하지 않고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도 하지 않는 의연함을 선택한다.

덕분에 어릴 적 TV에서 <분노의 포도>(1940)를 보고 느낄 수 있었던 한 편의 영화로서 가져볼 수 있는 일종의 기품이랄까 – 상당히 고전적인 뒷맛을 남겨주는 작품이 되었다.



영화는 결국 황폐한 삶의 벼랑 끝까지 가고난 이후에야 문제가 해결되고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주기까지 하면서 – 나름 희망적인 분위기를 조성해보며 – 마무리가 되는데, 세 남매가 집 앞에 앉아 죽은 아버지의 유품인 벤조로 불협화음을 튕기고 있는 마지막 컷은 차이밍 량 감독의 <애정만세>(1994)가 그랬듯이 다시 한번 먹먹해진 가슴을 끌어안고 엔딩 크리딧을 응시하게 만든다. 살아남은 자들은 결국 다시 살아갈 수가 있게 되었건만, 이걸 잘 되었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분간조차 하기 힘들 만큼의 암담함이라니.



즐거움으로만 가득 채워도 부족할 황금 같은 두 시간을 왜 이렇게까지 극우울 모드의 영화에 허비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달리 해줄 만한 말이 없겠으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영화를 보아온 오랜 이력에 비추어 보았을 때 <윈터스 본>는 상당히 수준 높은 작가의식을 보여주는 값진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데브라 그래닉 감독이 매서운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과 스스로에 대한 자의식의 발현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황해>(2010)에서 묘사된 연변과 한국이 각자의 전부가 결코 아니듯이 <윈터스 본> 역시 미국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도 없는 불편한 진실의 일부인 것만은 틀림이 없을테니까.

<윈터스 본>은 옷을 벗고 살을 도려낸 뒤에 마지막 남겨진 누군가의 황폐한 자화상이다. 자, 이제 팔을 잘라내야 하니까 단단히 잡고 있으렴. 울어버리거나 도망쳐서는 안될 일이라는 사실을 소녀가 잘 알고 있었다는 바로 그 점이 <윈터스 본>에서 가장 희망적인 부분이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