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들의 행진” OST 다시 듣기 (2)



 바보들의 행진
영화음악 『바보들의 행진』에 실린 송창식의 곡은 이후 그의 행보를 모두 점쳐볼 수 있게한다. 특히 그가 작곡한 두 곡, “왜 불러”와 “고래사냥”은 이미 트로트와 포크의 만남에 싸이키델릭-록의 반주까지 고려한 모습이다. 싸이키델릭으로 만든 고래 소리가 들어있어 콜렉터들의 표적이 되었다는 영화음악 버전 “고래사냥”이 실려있는데, 막상 들어보니 그 고래 소리가 나에겐 별반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대신 행진곡 풍의 곡에서 하몬드 올갠과 슬라이드 기타가 역동적인 자리(중심은 물론 아니지만)로 위치지웠다는 것은 신선하고 중요한 지점으로 들린다.

“고래사냥”은 기본적으로 마칭 드럼(꽹과리 소리를 흉내냈다고 해도 좋다)-행진곡 풍의 작곡에 촛점이 있다. 그러나 그는 추임새를 넣는 것처럼 슬라이드 기타로 흥을 돋군다. 흥 돋구기는 트로트를 대놓고 차용한 “왜 불러”의 가창법에서 더 절정이다. 후에 그의 트레이드 마크의 하나가 되는 트로트이면서도 송창식의 것으로 귀결되는 이 ‘흥'(을 돋구는 창법)과 기발함이 이미 이때부터 충분히 실험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놓쳐서는 안되는 점이 있다. 송창식의 이러한 시도들이 1970년대 초반에 들어 앞서 나간다는 가수들이라면 한번씩 머리 속에 그려보거나 (거칠게)시도했다는 데 있다.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한 바 있는 신화 – 신중현은 논외로 치더라도 키브라더스(윤항기)는 산타나의 음악을 리메이크하면서, 한대수(두 번째 음반)는 자작곡에 농악과 타령을 집어넣었다. 포크와 록의 만남은 1974,5년 봇물터지듯 여기 저기서 시도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르면 젊은 음악인들 사이에 장르를 넘어선 다양한 실험이 여기저기서 마구 시도될 만큼 무르익었었다는 얘기다.

또한 『바보들의 행진』음반에는 임희숙, He5, 김세환, 이장희, 투 코리언스의 노래가 더해진다. 조합만 봐도1970년대 초반 새로운 음악으로 등장한 쏘울, 록, 포크가 하나로 모인 느낌이지 않은가? 특히 주목할 이는 포크 계열이라고 하나, 특유의 반항적 이미지와 록을 대담하게 수용했던 이장희(그리고 그의 곡 “한잔의 추억(음반에는 ‘한장’으로 오기되어 있다)”을 부른 더욱 위악스런 목소리로 부른 김도향과 손창철 – 투 코리언스)의 가세이다.

포크 음악인에서 막 새로운 음악으로 전진하는 송창식과 그 보다 앞서 록을 받아들였던 이장희가 한 음반에서 만나는 장면은 1970년대 중반 청년 문화/대중음악이 하나의 모습을 완성해가는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음반 전체를 넘실대는 음악은 (이미 단속과 규제의 대상이 된 저항적 포크는 많이 탈색되었지만) 록, 소울, 포크가 휘감겨 들어와 판을 차리고 아예 그 이전 대중음악 판 자체를 뒤집어 버릴 듯 기세를 올리고 있다. 미국 음악의 여러 요소가 파편적이지만 직접적으로 젊은 세대를 자극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기존의 주류였던 트로트마저 품어서 새롭게 주물럭 거릴 수 있을 만큼 자기 것으로 소화해내고 또 다른 색깔마저 찾은 것이다.

3. 그래서 더 답답한
『별들의 고향』에 이어, 『바보들의 행진』은 단순히 잘 나가던 음악인들의 편집 음반이 아니다. 젊은이들의 새로운 시도들이 하나의 움직임으로 모이고 마무리 단계로 나가고 있음을 슬금슬금 드러낸 것이었다. 물론 그 덕분에 정권은 더욱 미친듯이 이들을 찍어누르고 마침내 질식사 시키긴 하지만.

사실 이 음반은 폭발하지 않는다. 영화 만큼이나 넘치는 음악을 자신 안에서 고사시킨다. 이 기운은 그렇게 그 해(1975년)를 다 넘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청년문화로 칭송되던 음악은 대마 연기와 함께 그렇게 금지곡으로, 활동 금지로, 미국행(추방에 가까운 이민)으로 사라진다. 새로운 기운에 찔끔해서 부랴부랴 눌러 죽이기 바빴던 박정희와 그 밑의 똘마니 새끼들은 자기 색을 찾기 시작한 젊은 음악밭을 락스로 싹 행구고 그래도 남은 애들은 뿌리까지 파 내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박정희가 좋아했던 그 5음계(요나누끼 음계)로 작곡된 “새마을 운동가”와 트로트로 채워놨다. 젊은 음악이 피어오리기 전, 딱 10년 전 음악으로 타임머신을 돌려버린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TV 속에는 트로트 가수만 나왔다. 그 때 난 그게 한국 대중음악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날 즈음엔 그와 전혀 다른 그리고 완성되어가던 다른 음악이 있었음을 전혀 알수 없었다. 그저 외삼촌이 들려주는 음악들이 신기하고 좋아 보였을 뿐.

『바보들의 행진』 O.S.T.나 1970년대 초반의 한국 가요를 들으면서 느끼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유입인)힙합을 제외한 한국 대중음악은 이 때 이미 다 시도되었다는 것이다. 록 밴드 중에는 라틴 록이나 레게를 지향하는 밴드들이 있었고, 포크 진영에도 고급스런 발라드를 지향하던 이들이 있었다. 아마 이들이 모두 박정희 덕분에 압사 당했기에 1980년대 조용필 신화는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조용필 자신도 대마초의 피해자였지만 꾸준히 살아남았던 반면, 대부분은 정권의 짓밟힘에 트로트로 근근히 유지하거나 아예 음악을 꺽었다. 말도 안되는 상상이지만 이들이 모두 계속 음악을 했다면 ……? 조용필급 뮤지션, 혹은 그 이상으로 대중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음악인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을까? 재즈나 록이 한국 대중음악의 영원한 음지식물로 남지 않았을런지도.

상상은 상상일 뿐, 현실은 여전히 지랄맞고 짜증난다. 차라리 이런 음반들이 남아있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답답함이 생기지나 않았을텐데.

4. 지금은 뭐 다르나
임희숙이 부른 “저 꽃 속에 찬란한 빛이”를 듣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쏘울과 스탠다드 팝이 섞인 듯한 저 멋진 노래를 거미에게 부르라고 하면 밑도 끝도 없는 한국식 알앤비 아닌가하는. 물론 30년 전 연주이니 악기 소리는 꽤 낡았지만, 그것도 사운드만 지금 가요 세션 악기 소리로 바꿔주면(연주 패턴은 그대로 놔둬도) 그냥 알앤비(R`n B 얘기하는게 아니다 그냥 알앤비!!!)다.

그 뿐인가. 김세환이나 He5의 곡도 사운드와 목소리만 바꾸면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빛이 될 듯 떠들던 인디 씬의 록/포크 성향의 누구 누구가 떠오른다.

오히려 송창식이나 이장희의 통속적이고 실험적인 곡들은 지금도 신기할 만큼 신선하지 않은가? “한잔의 추억”을 봄여름가을겨울이 다시 불렀을 때 원곡에서 무엇이 그리 바뀌었던가? 김종진도 어디선가 얘기한 것처럼, 그저 그 기억으로 그렇게 부르자 음악이 되더라.

그렇다. 이게 한국 가요의 현실이다. 뭐 외국은 다르냐고? 다를 거 하나도 없다. 블루스는 비비킹에서 에릭 클랩튼으로 존 메이어로 자니 랭 손을 통해 지금도 꾸준히 그렇게 연주된다. 메탈리카가 롤링스톤즈를 서포트하고 AC/DC가 여전히 무대에서 그 음악을 짱짱거린다. 걔들도 늘 그렇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것은 걔들은 30년 전 음악도 여전히 듣고 있고 가치를 찾는다는 데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자고 나면 새로운 음악이, 어제 음악을 유치하다고 비웃으며 나타난다. 근데 그 새로운 음악도 어제 음악도 실은 똑같은 놈들이다. 어디서 미국, 영국, 일본 노래의 화려한 효과들만 베껴다가 똑같은 곡에 덮어 씌운다.

Soul 뮤지션이 R`n B 뮤지션(그/그녀는 또한 Rock`n Roll 뮤지션이며 Blues 뮤지션이다)이고 그가 Hip-Hop 뮤지션과 연결되어 있음을 걔들은 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하나 하나가 다 잘나서 지 혼자 깨달은 부처들이다. New Wave와 Synth Pop이 클럽에서 House로 또 그 MC와 DJ 손을 통해 Acid로 Electonica로 이어지는 것을 걔들은 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애시드로 핌프록으로 재림하신 예수들이다.

30년이 훨씬 넘어가는 동안 우리는 하나도 다르지 않은 음악을 마치 새로운 무엇이 계속 나오는 냥 그렇게 살았다. 정권이 찍어 누르지 않으면 자본이 이어가면서 …… 오히려 우리의 음악은 겉 모양새만 화려해졌지 알맹이는 과거만도 못해지는 거 아니었을까? 돈도 안되는데 힘들게 음악하는 사라들에게 왜 더 음악 잘하지 못하냐고 욕하지 말라고들 한다. 그러나 난 묻고 싶다. 비틀즈에 꾸준히 감동하는 당신들, 귀 비우고 찬찬히 당신과 우리가 해온 것들을 다시 살펴 보라고. 도대체 뭐가 얼마 만큼 진보했는지. 아니, 최소한 솔직하긴 했는지.


영진공 헤비죠



 

“바보들의 행진” OST 다시 듣기 (1)




2006년 쯤에 CD로 복각 된 1975년 작
『바보들의 행진』과 1974년 작인 『별들의 고향』O.S.T.  송창식, 이장희 1970년대 초반 포크 계열이면서도 이단아적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이 각각 영화 주제가를 불렀고,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던 음반들이다.

1. 가물가물한 기억
사실 내가 태어나던 때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겠다. TV를 통해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전편을 본 것인지 아니면 편집된 장면만을 본 것인지 가물가물하다. 대놓고는 못해도 1970년대의 억눌린 상황을 잘 묘사했던 것 같다. 장발 단속, 군 입대, 그리고 마침내 동해 바다로 자전거 타고 뛰어드는(이렇게 짓눌려서는 죽는게 낫다!!!)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음악만은 또렷이 기억난다.

75학번으로 우리집에서 대학을 다니시던 외삼촌 덕분에 ‘엄마 – 아빠’하기 전부터 오디오를 통해 최신곡(비틀즈, 사이먼 앤 가펑클에서 김도향, 산울림까지)을 들었기 때문인 듯 싶다. 외삼촌이 인정하는 몇 안되는 한국 가수 중 하나가 바로 송창식이었고, 당근 이 “왜 불러”도 그렇게 들었다. 여튼, 『바보들의 행진』을 다시 들으면서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 놀라운 음악들이라는 것이다.

2. 왜 놀라나
귀에 익은 친숙한 멜로디들이기에 때문만은 아니다. 멜로디만 기억날 뿐 악기 소리에 관심없던 어린애 귀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에 놀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중현, 김추자, He6, 키브라더스 등의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반 음반의 복각판에서 느끼는 것의 연장이기도 하고, 그와는 또 다른 경험이기도 하다.

◎  1960년대 말부터 이어지는 신화
몇 명되지 않는 한국 대중음악 연구자들에 의하면 1950년대부터 주한 미군을 상대로 한 클럽 무대(미 8군이 무대로 통칭되는)가 생겨났다고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 8군 무대 쑈를 담당하는 전문 연예 회사들이 생기고 이 무대에 서고자 전국에서 음악 좀 한다는 친구들이 몰려들었단다. 이들이 연주하는 음악은 미군들의 향수를 달래주는 컨트리에서 화려한 무희들과 어우러지는 신나는 재즈까지 다양한 장르였다고 한다. 특히 1960년대가 되면서 전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록큰롤이 중요한 레파토리의 하나가 되었다.

정식 악보보다 귀로 듣고 하나 하나 따서 연주하던 이들의 음악성은 본토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정교했단다. 라이브 클럽의 현장성을 변수로 고려하더라도 한국인들이 연주하는 팝 음악을 미군들이 큰 위화감 없이 즐길 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미 8군 무대의 한국인들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지금처럼 좋은 악기를 구할 수 있던 것도 아니고 보면 …..

여튼, 미 8군 무대에서 인정을 받으면서 쌓인 자신감은 그 무대에 서던 뮤지션 일부로 하여금 (한국의) 일반 대중 앞으로 나설 용기를 갖게 만들었다. 트로트가 엘리트의 음악에서 일반 대중 모두에게 사랑받는 장르로,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의 전부로 자리매김하던 1960년대 초, 미 8군 무대에서 스텐다드 팝과 재즈로 이름을 날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일반 대중음악 무대로) 정식 데뷔하기 시작했다. 손석우, 이봉조, 길옥윤, 등의 곡과 반주(그들의 악단) 위에 한명숙, 이금희, 패티 김, 현미 등이 트로트와는 전혀 다른 곡 스타일, 창법, 목소리 톤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이 되면 미 8군 무대에서 비틀즈의 록큰롤을 흉내내던 친구들도 하나, 둘 음반을 발매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바로 키보이스, 에드 포, 샤우터스, 등이다. 이들은 이미 대중음악계에 자리 잡고 있던 미 8군 선배들과는 또 다른 모습과 음악을 들고 나타났다. 록큰롤에서 시작 점차 쏘울, 싸이키델릭, 하드 록으로 발전한 이 젊은 음악인들은 스텐다드 팝을 추구하던 선배들과 달리 전자 악기로 무장했다는 것부터 달랐다. 또한 굉음(당시로선)에 가까운 파격적인 사운드를 내새운 채 클럽(살롱, 고고장, 등) 무대를 통해 젊은 팬들과 직접 만났다는 점도 새로웠다. 당시 일반 청중이 음악을 만날 수 있던 두 경로, 즉 방송을 통해서 혹은 코메디(촌근, 원맨쑈), 무용 등과 음악이 섞여있는 악단 무대 이외의 방식으로 대중과 만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방적으로 음악을 듣는 청자가 아닌 음악을 즐기러 (단단히 맘 먹고) 클럽을 찾은 대중과 직접 교감하는 뮤지션이 한국 시장에 처음 생겨난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뒷골목 살롱이나 떼로 몰려다니는 양아치로 취급되었지만 …..

미국 음악에 대한 무비판적인 반영일 뿐이라는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이때 처음 시작된 록 음악의 파격성은 두고 두고 한국 대중음악 전반(놀랍게도 가장 큰 수혜자 중 하나가 바로 트로트이다)에 영향을 끼친다.

여튼 고고장에서 놀던 양아치와 시대의 유행으로만 치부되던 1960년대 한국 록의 시조들을 재조명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 시작되었다. 서구 대중음악의 역사 속에서 록 음악의 의미와 가치를 받아들인 일군의 대중음악 연구자/평론가들은 196,70년대의 한국 대중음악 공간 속에서 신중현을 찾아냈다. 그는 1964년 4인조 록큰롤(이라 부를 수 있는) 밴드 애드 포의 순수 창작음반을 발매한 것을 시작으로 (잠시 미 8군 무대로 돌아갔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 싸이키델릭 성향과 대중성을 잘 머무린 한국적 록-쏘울 음악을 쏟아내었다. 특히 그가 발굴한 실력있는 여가수를 통해 한국 대중음악사에 빛나는 명곡들이 발표되었다. 마침내 1960년대의 한국 록(꼭 록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은 신화가 되었다.

1970년대 들어서도 키보이스 출신의 He6(후엔 He5), 키브라더스, 신중현 사단 가수들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미국 음악을 그대로 재현하는 시대를 지나 대중의 구미를 기막히게 파악하는 능력을 갖춘 록(쏘울-싸이키델릭) 음악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일런지도 모르겠다)으로 주류 장르로 자리 잡기에 이른다.

 송창식이라는 (영원한) 미완의 작가
미 8군 무대 출신의 음악인들의 세련되고 빤딱빤딱한 연주가 서서히 주류로 진출하던 시점에, 이러한 전문성에 반기를 든 음악들이 하나 둘 대학가를 중심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들은 밥 딜런, 존 바에즈, (저 멀리) 우디 거스리까지 짚어가며 통기타의 자유로움과 저항성을 칭송하기 시작한다. 김민기, (본인도 이 정도로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양희은, 한대수로 대표되는 포크 음악인들은 저항 가요로 이어지는 한국 대중 음악의 한 맥이다.

서유석, 양병집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본다면 한국 포크는 해학과 풍자의 정신이 살아있다. 그러나 한국에 이식된 포크는 저항성만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었다. 밥 딜런과 함께 한국에서 포크의 중요한 축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게 바로 사이먼 앤 가펑클이었고, 가사보다 그들의 아름다운 화음이 중요했다. 1960년대 록 진영이 도어스를 카피해도 기성 세대에 대한 전복을 꿈꾸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포크도 저항성 보다 통기타 소리와 화음으로 인식되었다.

‘튄(트윈) 폴리오’로 데뷔한 송창식은 한국 포크 후자의 경향으로 시작했으나 시대는 그에게(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전자와 후자 모두에 걸치며 동시에 걸치지 않는 인물로 만들었다. 본인은 음악에 저항성을 입히는 것을 반대한다고 밝히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김민기(물론 윤형주, 김세환도)와 어울려 노래 짓고 부르는 청년의 하나였다. 아마 전자의 혐의가 씌워지는 것은 이 음반 『바보들의 행진』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후자로 인식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의 데뷔 모습보다는 1975년 대마초 파동 후 살아남은 유일한 가수였기 때문일 것이다. 찜찜함으로 얼룩진 대마초 파동을 거치면서 록에서 포크에 이르는 젊은 음악인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던 것과 대조적으로 송창식은 이후 더욱 커다란 대중적인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물론 인기만 얻은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깊이 파내려가는데도 성공했지만.

송창식의 1970년대 후반, 1980년대 초반 음악은 트로트, 포크, 록, 국악(적)의 요소들을 이리 섞고 저리 뭉친 후 송창식 표 발성으로 감싸 안은 독특하지만 매력 넘치는 세계이다. “왜 불러”에서 “토함산”을 거쳐 “마의 태자”에 이르기까지 송창식은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완성했고, “참새의 하루”, “가나다라”, “사랑이야”, “우리는” 등과 같은 소탈함과 대중성을 모두 아울렀다. 하지만 그는 1986년 이후 더 이상의 음반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물론 엄청 많은 편집 음반이 나오긴 했다).

송창식 음악의 흠은 솔로로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음반까지 자신의 모든 것이 담겼다고 생각되는 필사의 무엇이 없었다는 데 있다. 예술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대중이 보지 못하는 색채와 질감으로 표현해야 한다. 동시에 본능적으로 작품을 통해 시대의 소리와 올바름에 대한 방향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 (송창식이 존경한다는)모짜르트도 베토벤도 그 음악 속에 시대의 모습과 정신이 담겨있지 않은가…..! 하지만 송창식의 음악에는 시대와 유리된 듯한 미학만이 담겨있다. 그래서 너무 훌륭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허무하다. 그래서 송창식은 (영원한) 미완의 대가일 수 밖에 없다. 사실 이 문제는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대가라 불리는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다. 대곡, 명곡은 있지만 진정한 명반은 찾기 힘든 현실이라고나 할까 ……



영진공 헤비죠

 

“바보들의 행진”, 청춘영화 계보의 원조격인 작품

모두 바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고보면 배창호 감독의 1984년작 <고래사냥>(새 창으로 열기) 은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에 대한 오마쥬이기도 했다.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은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과 상당부분 통해있으며, 다시 이 노래는 <바보들의 행진>에 쓰였을 뿐 아니라 그 가사가 고스란히 주인공 중 하나인 영철의 대사로 뱉어진다. 게다가 <바보들의 행진>의 가장 중심적인 주인공은 <고래사냥>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병태다. (하긴, 그도 그럴 것이 두 영화 모두 원작, 각본이 최인호다.) 하지만 <바보들의 행진>이 영향을 준 것은 비단 <고래사냥>만은 아니다.

한국에서 한동안 양산됐던 청춘영화는 이승현의 얄개 시리즈(어린 이승현이 <바보들의 행진>에 신문팔이 소년으로 잠깐 출연한다.)나 그 유사의 여학생 버전으로 임예진이 출연한 ‘좋아해’ 시리즈 외에도, 순진한 남자주인공과 되바라진 여자주인공이 대학생 신분으로 공부는 않고 맨날 놀러다니며 술과 미팅과 (특히 여학생의 경우) 결혼에 열을 올리며 좌충우돌하다가 난데없이 어디론가 떠나거나 하는 식의 계보에 속한 영화들이 꽤 있다. 심지어 박중훈, 강수연 주연의 <철수와 미미의 청춘스케치>도 말하자면 그 계보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맨날 술만 마시고 공부는 않는 것은, 실은 그 시대가 뻑하면 휴교령이 내려졌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이를 영화에 담았을 때엔 얄짤없이 검열의 칼날이 휘둘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보들의 행진>의 이 계보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영화로 보인다.

동해바다에 고래를 잡으러 가겠다는 꿈은, 앞뒤옆위아래 꽉꽉 막힌 한국현실에서 젊음이 가질 수 있는 맨 마지막의 선택, 즉 ‘현실도피’를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낙관주의자인 배창호 감독은 <바보들의 행진>과 달리 <고래사냥>의 끝을 더없는 해피엔딩으로 수놓았지만, <바보들의 행진>은 신검 장면으로 시작해 결국 주인공 병태가 입영열차를 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맨날 콧대만 세우던 영자가 달려와 결국 울면서 이별의 키스까지 하는 이 장면이 결국 비극의 엔딩인 것은, 언제나 과도하게 깔깔깔 웃어제끼며 명랑하기 짝이 없었던, 도대체 병태에게 속을 보여주지 않았던 우리의 영자가 기어코 눈물을 흘리는 유일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치기와 장난, 미팅과 술먹기 내기 등의 유희들이, 영화의 끝까지 이르고 나면, 비극의 끝을 이미 예정해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벌이는 처절한 유희처럼 보인다.

비록 데모하는 장면은 ‘체육전’을 하거나 축구를 하는 장면으로, 주인공이 교실 안에서 데모에 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는 장면이 그저 ‘인간의 신뢰’에 관한 한 에피소드를 떠올리며 갈등하는 것으로, 감독의 뜻과 무관하게 교체되고야 말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70년대 청춘들의 갈곳없는 막막함과 절망, 그 안에서의 무력감을 드러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다. 정말로 원래 그 장면들이 원래 시대와 시위에 대해 고민하는 장면들이었다면, 영철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시대는 그토록 순수한 영혼은 결국 견딜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의 순수는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대학교도 떨어졌는데 심지어 군대까지 떨어진’ 무능함으로만 치부될 뿐이다. 누구도 가고 싶지 않은 그곳, 군대에서조차 받아주지 않는 무능함을, 본래 그 이름대로 ‘순수’라 부를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흥청망청 노는 것이, 그리고 그깟 머리카락 안 자르겠다고 도망치다가 목숨을 걸고 육교에 매달리는 것이 ‘저항’이었던, 그런 시대였던 거다, 그때가. 그렇다면 결국 병태가 입영열차를 타는 것은 이 사회에 어쨌든 순응하겠다는 패배 선언으로도 읽힌다.

바보들의 행진

목욕하는 남자들.

이 영화에서 영자 역을 맡은 이영옥을 보고 상당히 놀란 게, 굉장히 현대적이다. 75년작인데도 이 배우는 90년대 말적인 미모라 해야 하나. 기본적인 이목구비가 일단 최정윤과 상당히 비슷하다. 거기에 옷을 쫄티에 나팔바지, 통굽구두를 신으니 도저히 75년 영화라곤 보이지 않더라. 다만 버스비가 25원, 짬뽕이 한 그릇에 100원이었다고 한다. 지금보다 약 1/40 수준의 물가였던 셈이다. 또한… 이 영화의 인물들은 대체로 집이 부유하고, 그래서 돈을 많이 쓴다. 미팅 참가비가 당시 돈으로 2천원일 걸 보고 조금 아찔… 했다. 물론 그때 2천원이 꼭 지금의 8만원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 초반 미팅을 하기로 하고 목욕탕에 가서 때빼고 광내는 장면을 보면서도 헉, 했는데, 남체를 그렇게 ‘탐스럽게 훑는 카메라’는 당시 한국영화로서는 거의 파격이었다고 할 만하겠다. 그리고 이 영화의 그 키스씬은… 아마 한국영화 역사상 길이 남는 키스씬이 될 듯. 어쩌다 보니 <소문난 칠공주> 같은 드라마에서조차 한번 베낀 적이 있다고 하더란 얘기까지 알게 됐다. 그런데 이 영화는, 심지어 남녀가 반투명 유리문 하나를 두고 나란히 샤워를 하며 비누를 주고받고 하는데도 이상하게 성적인 느낌이 없다. 키쓰신도 마찬가지인데, 오히려 유일하게 에로틱한 맛이 느껴지는 게 저 목욕탕에서 두 남자가 미팅 전 목욕하는 씬이다. 하길종 감독의 영화 중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으로 동성애를 묘사한 영화가 있다던데 …

바보들의 행진

무기력한 젊음, 과도한 명랑의 의지. 영철(맨 왼쪽)-순자, 병태-영자(맨 오른쪽) 커플.

영진공 노바리

ps1. 영상자료원 조선희 원장의 말에 따르면, 이번 하길종 30주기 추모전에서 상영한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 당시 삭제됐던 부분을 다시 삽입한 버전이라 한다. 일례로 저 목욕하는 장면, 영자의 룸메이트 순자가 담배 피우는 장면 등이 해당된다. 연고전/고연전을 연상시키는 듯한 체육전 장면과 축구경기 장면은 모두 원래 데모 장면이었던 것을 교체한 것. 고 하길종 감독의 부인인 전채린 교수(그 전채린이다, 전혜린 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교실에 남은 병태가 고민하다가 떠올리는 ‘신문팔이 소년 에피소드’는 응원전에 나가냐 안 나가냐의 고민이 아니라, 데모에 나가냐 안 나가냐의 갈등 장면이었다고. 여기저기 편집이 튀고 결정적으로 막판에 가면 멀쩡하던 얼굴에 갑자기 핏자국 등의 싸운 티가 나는 것도 그 사이 씬이 통째로 검열돼 버렸기 때문이라 한다. 부산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들과 시비가 붙어 싸우는 장면이었다고.

ps2. 개막식에서 하명중 감독이 말하기를, “형이 그 젊은 나이로 간 건, 그 시대가 작가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에이 이놈의 세상 그냥 미련없이 가자,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영원히 청년으로 봉인된 천재감독 하길종은 한국영화사에 있어 하나의 ‘섬’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그가 살아있었다면 한국의 영화풍경이 지금과 많이 바뀌었겠지 싶다. 단순히 그가 천재여서가 아니라, 그가 살았다면 펼쳤을 영화의 풍이 그의 제자나 후배에게 전수됐을 때, 특히 80년대의 영화풍경이 꽤 달라졌겠구나 싶어서다. 하길종은 당시의 ‘한국영화의 혁명’을 부르짖는 일종의 ‘신세대’였다. 그와 영화집단을 함께 했던 이가 대충 김호선, 이원세, 홍파 등의 감독과 평론가 변인식이라 한다. 이들 역시 지금의 감독들에겐 일찌감치부터 ‘극복해야 할 구세대’가 돼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 독재정권에 분노하며 절망했던 하길종과 다른 길을 갔다. 불과 30년 사이에 한국영화 역사 역시 사회 전반 만큼이나 급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