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이든 애매하든 아무튼 하지마라!

표절(剽竊)
남의 창작물(創作物)(문학(文學)ㆍ음악(音樂)ㆍ미술(美術)ㆍ논문(論文) 등)을 그 내용(內容)의 일부(一部)를 취(取)하여 자기(自己) 창작물(創作物)에 제 것으로 삼아 이용(利用)하는 것  [다음 한자사전에서 인용]

표절의 정의는 확실하다. 그래서 이는 해서는 안되는 일이고 대부분의 경우에 범죄가 되는 것이다. 물론 모방이나 오마쥬 또는 패로디 등 여러 형태의 유사행위가 있지만 표절과는 달리 이런 행위는 직간접적으로 원작자를 인정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권리를 함께 하기도 한다.

어찌된 일인지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는 이 놈의 표절이 일상다반사가 되었다. 소위 지도층입네 대표자입네 학자입네 하는 이들이 앞다퉈 다른 이의 글과 말과 아이디어를 베끼거나 살짝 변형하여 원래 제 것이라 하고 있고, 설령 들통이 나도 그렇지 않다는 궤변을 지나 뭐 어쩌라는 말이냐며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우리의 대중음악계에서도 이런 사정은 다를 바가 없어서, 표절에 관한 논란은 쉬지 않고 터져나오고 그러다가는 이내 사그라든다. 물론 유독 거기만 그러는 게 아니라 사회 전반이 그 모양이나 자꾸 얘기해서 뭐하겠냐만 그래도 한 번 씩 짚어는 봐야 할 터이다.

1. 아가씨

90년대 후반에 유럽에서 커다란 인기를 얻은 노래 ‘엘렝의 춤 (La danse d’Hélène by Méli-Mélo feat. Miss Hélène)’ … 일단 들어보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노래일텐데, 요즘도 노래방 등에서 흥겹게 불리고는 하는 ’97년도에 나온 ‘아가씨’의 원곡이다. 노래를 들어보나 악보를 보나 두 노래는 같은 노래다.

헌데 이것도 처음에는 국내 작곡자의 작사, 작곡으로 등록이 되어 출시되었다. 그리고 이내 표절 논란이 벌어졌고 우여곡절 끝에 작사는 장본인이 작곡은 외국곡, 즉 번안곡으로 수정을 하였다. 그랬음에도 웹을 뒤져보면 여전히 이 곡의 작곡자는 지금도 활발히 활동 중인 그 분의 이름으로 명기되어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경우는 표절을 넘어서서 아예 통째로 베꼈는데도 그냥 버젓이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사실 냉정히 말해 원곡이 희대의 명곡도 아니고, 잘 알려지지 않은 곡도 아니었는데 왜 그랬을까.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냥 처음부터 번안곡, 요즘 말로 리메이크라고 했으면 누구 하나 뭐라 안 하고 즐겨 들었을 터인데.

2. 조영남

Tom Jones의 대표곡 ‘Delilah’ [작사곡: Barry Mason, Les Reed] (딜라일라, 삼손과 데릴라의 그 데릴라) … 로 당시 그야말로 충격적인 데뷰를 한 가수 조영남.

그가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기 이전에 대표곡으로는 ‘제비’와 ‘고향의 푸른 잔디’ 그리고 좀 지나서 ‘내 고향 충청도’가 있다. 그는 이 곡들로 장장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버텼다. 헌데 ‘제비’는 멕시코 민요 ‘La Golondrina’가 원곡이고 ‘고향의 푸른 잔디’는 ‘Green Green Grass Of Home’, 그리고 ‘내 고향 충청도’는 미국 민요 ‘Banks Of The Ohio’가 원곡이다.

그는 처음부터 모두 번안곡이라 밝혔고 이에 누구도 그걸 문제 삼지 않았으며 모두 즐겨 그 노래를 듣고 따라 불렀다. 만약 그가 이 중 한 곡이라도 자기 작품이라고 했다면 안 그래도 곡절 많고 안티 많은 그의 가수생활은 진작에 끝났을 것이다.

3. 슬퍼지려 하기 전에 …

노래 한 곡 더 들어보자.


 
  
굳이 설명 할 필요가 없겠지만, 이 노래는 쿨의 ‘슬퍼지려 하기 전에’의 원곡이다.

이처럼 누군가의 곡이 좋으면 원작자에게 곡을 받아서 당당하게 불러라.
요새는 친분이 없다고 해도 원작자에게 양해를 구하고 저작권협회에 일정 비용만 지불하면 거의 모든 곡을 사용할 수 있다.

얼마나 좋은가.
이렇게 같은 곡으로도 얼마든지 색다르고 좋은 느낌을 전해 줄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하니까 대박나고 좋잖냐 …

4. Creep

’90년대 팝계를 대표하는 명곡 중의 명곡, Radiohead의 ‘Creep’.
이 노래도 ‘The Air That I
Breathe’와 코드 전개와 멜로디가 유사한 부분이 일부 있어서 처음에는 표절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런데 실은 Radiohead가 앨범 노트에 이 곡의 작사곡자인 Albert Hammond와 Mike Hazlewood에 대해 언급을 해 놓았었다. 그리고 표절 논란이 나온 이후에는 위 두 사람이 공동 작곡자로 등록이 되었다.

처음부터 저작권에 등록을 안 한게 그냥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약간 비슷하다고 느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후에라도 그걸 바로 잡았기에 이 노래는 명곡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이다.

5. 찜찜하기만 해도 하지마라! 

표절 논란이 있을 때마다 대부분의 해당 작곡자는 변명하기에 바쁘다.

‘그런 노래가 있는 줄도 몰랐다’
‘우연의 일치다’
‘스타일이 비슷할 뿐 전혀 다른 노래다’
‘요즘 트렌드를 반영한 거다’
‘일부 소절이 닮았지만 표절은 아니다’ 등등 …

그러나 대중음악은 어떤 경우에는 스타일이나 느낌이 전부일 경우가 있다. 그럴때 몰랐다느니, 반음이 낮고 높다느니, 전개가 차이가 난다느니 등의 과학적(?) 해명은 별로 납득이 되질 않는다.

혹시라도 정말 우연의 일치로 매우 닮은 곡이 이전에 있었다는 게 밝혀진다면 그냥 쿨하게 인정해라. 몰랐지만 이제 알았으니 원작자의 양해를 구하겠다고. 영감을 얻은 거라면 그랬다고 표시하고 오마쥬라면 오마쥬라고 얘기하고 패로디라면 확실히 비틀고 그랬게 해라. 그래도 원작자는 언제나 밝히고 인정하고 말이다.

어떤 경우든 남의 곡에서 몇 구절을 슬쩍 가져오거나 아예 통째로 베낀 거는 사실 그냥 범죄다. 그러나 이 범죄는 고개 숙여 사과하고 권리를 포기하면 그닥 큰 처벌 없이 용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걸리기 전에 애초부터 하지를 말고 어리석은 마음에 일을 저질렀다가 걸렸으면 머리 조아려 사과해라.

대중은 느낌으로 음악을 듣는다. 그런 대중들을 향해 자신의 치부를 가리려 작곡기법을 강의하려들고, 당신들이 음악을 잘 몰라서 그런다고 따져드는 이들은 이제 좀 그만 보았으면 하는게 작은 소망이다.

영진공 이규훈

미디액트가 사라진다


미디액트가 사라진다.

그곳에 처음 발 들여놓은
날, 이토록 완전한 영화 교육의 장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내심 크게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영원히 곁에
있어 줄 것 같은 친절함 때문이었을까. 이후 겨우 두어 개의 수업을 들었을 뿐인데 어쩌면 이렇게 허망하게 미디액트가 사라진단다.

그랬다. 작년 여름, 미디액트에서 나의 첫 영화를 위해 고민하고 촬영한 1주일동안 고되고 힘들었지만,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당시에도, 지금 돌이켜 보아도 그 터질 것 같은 흥분은 아직도 그대로 심장을 꿈틀인다. 나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정식 영화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저 영화가 좋고 함께 하고픈 예비 영화인에게 두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장비를
대여해주고 유용한 교육 프로그램과 세미나에 참여 가능케 한 곳이 바로 미디액트였다.




이제, 영진위가 선정한 새 사업주체인 (사)시민영상문화기구가 그 곳을 대신 꾸려나갈 것이다. 한오라기의 희망을 저버리긴
싫지만, 그간 미디액트 식구들이 개인의 안위 따위 접어두고 이뤄낸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갖출 것이란 기대가 들지 않는다.

독립영화, 독립영화전용관과 기타 영화제들이 정권이 바뀐 뒤 영진위의 진두지휘 하에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있는 지금, 이
모든 게 시대착오적인 정치 탄압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지난 주 금요일 미디액트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이송희일 감독이 한 말이 두고두고 가슴을 치는 건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철거당한 사람들의 심정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다. 예술영화전용관, 독립영화, 시네마테크, 미디액트처럼 시민과 교감해온 영상운동 등 돈이 안 되는 독립영화들이 하나같이 영화판에서 철거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진공 애플

소녀시대 성희롱? 누가??

TV에 안티를 몰고다니는 쩌리짱이 있다면,
인터넷에는 안티를 몰고다니는 윤서인의 조이라이드가 있다.

이 양반 만화는 종종 논란을 일으키고, 그 논란만큼 주목을 받는다.

조이라이드가 까이는 이유는 여러가지지만 그 근저의 원인은 하나다.

이 양반이 아무 생각이 없다는 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검열을 별로 하지 않는다.

-= IMAGE 1 =-

검열이 없으니 아무 생각없이 삼성 찬양도 하고,
땅박이 찬양도 하고, 그러다가도 주식 떨어지면 또 삐지기도 하고,
생각없이 일본 좋다고 했다고 돌맞고,
생각없이 기독교에 문제제기 했다가 돌 맞고 …
계속 그런 식이다.

일반적으로 초딩은 자기 생각이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니까 그만큼 솔직하지 않던가.

당사자에겐 미안한 말일지 몰라도, 이 양반 만화를 볼때면 딱 그런 기분이다.
그림 세련되게 그리는 초딩의 만화를 보는 느낌 …

사실 이 양반의 진짜 장점은 그림이 깔끔하고 섹시하다는 점이다.
그 덕분에 그 생각들이 상당히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그렇게 걸러지지 않은 생각이 사람들에게 매우 잘 전달되니, 그만큼 그 반향도 크다.

이번에 소녀시대 만화도 딱 그런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은 초딩스러운 농담의 결과물이다.
http://kr.news.yahoo.com/service/news/shellview.htm?articleid=20100118190517291h9&linkid=4&newssetid=1352

문제는 그게 왜 문제냐는 거다.
<소녀시대>를 포함한 걸그룹이 대중에게 소비되는 방식에는 분명히 윤서인이 지적한 면이 있거든. 소녀시대를 순수하게 귀여운 아이들로만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남자가 있으면 나는 피식 웃을거다.
 
거기에 선정적인 요소가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지.

윤서인의 만화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조금씩은 들어있는,
하지만 별로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끄집어내서 신경쓰이고 거슬리게 만드는 만화다.

나는 그래서 이 양반의 만화가 재미있다.
그리고 이 양반이 좋다고 하는 것들은 정말 (그 양반식으로 보기엔) 좋을 거라고 믿는다. 전에 칭찬한 치약 같은 거는 정말 사보고 싶더라는.

어쨌든, 나는 윤서인의 조이라이드를 지지한다.

이 양반이 대단한 인격자여서도 아니고,
이 양반의 만화가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그저 이 양반이 정치가도 아니고, 공직자도 아니고 그냥 만화가이기 때문이다.

만화든 글이든 우리 문화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고 생각대로 쓰고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만화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은 할 수 있지만,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고 비판하는 건 좀 그렇다.
저 만화를 보고 “소녀시대 능욕”이라고 이름붙이는 거야말로 정말 오바 아닐까?
저 제목의 기사 찾으려 보니까 그런 제목의 야소설만 잔뜩 뜨더만 …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요즘 대중문화계를 보면 저런 식으로 찔러보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던가? 적어도 그건 이해되지 않느냔 말이다.

벌거벗은 임금님도 자기 부끄러운 줄은 알았는데,
왜 사람들은 화만 내는 걸까?

영진공 짱가

한국비하발언 연예인은 퇴출되어야하나???

유명인이든 그냥 무명인이든 구분없이

우리나라에 온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 사람들이 꼭 물어보는 질문이 하나 있다.

“한국이 어때요?”


질문 받은 외국인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한국의 모습은 바로 그거였을거다.

“자기들이 어떠냐고 묻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


도대체 왜 남에게 자신들에 대한 평가를 바라는 것일까?


왜냐하면, 스스로는 자기들이 어떤지 잘 모르겠으니까.


즉, 자신의 모습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거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그런데, 좋고 나쁨은 남이 아니라 바로 내가 정하는 문제다.


나에게 좋으면 좋은 거고, 나에게 나쁘면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쁜 거다.


하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늘 남들에 의해서 내 좋고 나쁨을 평가받아왔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그리고 시험이 나를 평가해줬고

사회에서는 동료들이 나를 평가하고, 상사가, 배우자나 애인이 나를 평가한다.


그게 바로 나인 것이다.
그러니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 남들 하는 것을 열심히 따라하고
남들하는 만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이런 집단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한국인 vs 외국인 구도가 되면

그들에게 다시 묻는 거다. 우리를 평가해달라고.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남들의 평가에 일희일비 한다.


하지만 자기 확신이 있으면 그냥 덤덤하다. 물론 참고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래? 그렇게 볼 수도 있구나…” 정도가 된다.


자신의 평가를 남에게 의지하는 사람이 그럼 남들의 말을 열심히 들으려는 거냐면 그것도 아니다. 

부정적인 평가를 접하면 반성하고 바꾸기 보다는 화부터 낸다.


왜 어떤 애가 그랬잖은가.


정말 듣도 보도 못했을 뿐이라 그런 애라고 했더니 명예훼손이라고 고소 …


자기가 정말 누구에게는 듣보잡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하지 못하니까 그러는 거지.


어떤 어린 연예인이 연예인으로 데뷔하기도 전에 자기 개인 블로그에서 친구들이랑 나눈 이야기가 발단이 되어서 결국 탈퇴에 퇴출이란다.


그 이야기도 별거 없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이 종종 친구들하고 떠드는 말들이다.


아마 우리나라 아이들도, 심지어는 어른들도 비슷한 말 종종 할껄? 한국놈들은 어쩌고 저쩌고…


청소년기에는 뭐든 다 한 번씩은 싫어 하는 것이 정상이다.


자기 자신도 싫어지고, 자기 부모도 싫어지고, 자기 친구들도 싫어지고, 자기 동네나 나라도 싫어진다.
좋아졌다가 싫어졌다가… 청소년기에는 다 그런다.


그게 반항이 되고 창의도 되고 소위 말하는 “성장의 과정” 이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그 난리라니…-_-;;;


걔가 가수의 본분을 어겼다면, 예를 들어 표절을 했다면 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냥 한때 표현했던 자신의 감상을 욕하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 우리나라에서 연예인들이 이상하게 국회의원보다도 더 중요한 공인들 취급을 받거나 혹은 귀족 비슷한 대우를 받는 것 같은데, 사실 연예인들은 원래 광대다.


광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사람들 속 마음을 대신 들춰보이는 역할을 하는 존재다.


대부분의 경우 광대는 왕을 비아냥거려도 용서가 되었다. 그게 광대의 역할이니까.


물론 발끈하는 왕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사실을 지적했을 경우에 그랬다.


영화 <보랏>의 샤차 바론 코헨이 바로 그 광대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는 한 얼간이의 마스크를 쓰고 나와서 깔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깐다.


미국의 고상함과 광신과 엄숙함을,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


그게 광대이고 연예인이다.



아 … 보랏 … 님이 짱드셈 …


영화 <왕의 남자>에서 얼핏 비추었듯이.

우리나라의 탈춤도 바로 그런 역할을 했었다.


왜 양반 탈이 따로 있겠나.


그런데 과연 지금 이 나라 연예인들이 그럴 수 있을까?


재미있는 것은, 우리들은 모두 연예인들이 솔직하기를 요구한다는 거다.


그런데 솔직한 속얘기 잘못 털어놓으면 저꼴 난다.


그럼 도대체 원하는 게 뭘까? 솔직한거? 아니면 듣기 좋은 말만 하는거?


이건 마치, 어디서 “솔직하게 다 말해봐” 그래놓고 정작 솔직하게 말하면 조인트 까는 거랑 비슷하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이중구속” (관련링크: http://0jin0.com/1673)
이다.


세상에 사람들이 늘 착하고 늘 올바르고 늘 성실하기만 할 수 있나?


그런게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기계지.


제발 우리 좀 솔직해지자.

우리도 못하는 거 연예인들에게 요구하지 좀 말자.


우리나라를 사랑하고 좋아해야 우리나라에서 연예인 할 수 있다고?


무슨 소리를 … 사랑이나 관심이 있어야 욕도 하고 비난도 하는 거다.


(사실 이번 연예인의 경우는 욕이라고 할 것도 없다. 그건 일종의 자기비하에 불과했을 뿐이다. “아 씨바 내가 지금 뭐하는 거냐 …” 이런 류의 넋두리. )


나는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를 까는 노래를 부르는 그룹이 음반판매 1위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쯤 되어야 이 나라가 그 괴상한 질문 “우리나라 어때요?” 를 그칠 수 있을테니까.




어떤 그룹 애들은 지네 팬들에게 이러고도 잘 산다.



우리도 좀 이럴 수 없을까?

영진공 짱가

관객의 10분을 빼앗지 마라!!!

벌써 세 번째다. 10분씩 세 번이니까 총 30분이나 된다. 30분이면, 회사 출근시간으로 3,000원의 지각 벌금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집에서 빈둥거릴 때조차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자두로 입가심 하고도 곤히 낮잠에 들 수 있는 소중한 1,800초란 말이다.

거창하지만 진심으로 윤리적인 영화 보기의 실천을 위해서라도 멀티플렉스에 가지 않으려고 한다. (CGV는 입장 수익의 60% 이상을, 2주 이상 장기 상영 시 그 이상을 가진다.) 하지만 어제처럼 엄마를 모시고 극장에 가는 날이면, 가장 근거리에 위치한 멀티플렉스를 선택하게 된다.  이 땅에 사는 불행 중 하나다.

CGV 일산에 5시 50분 영화를 예매 했다. CGV에 도착한 시간이 45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언제나처럼 상품 광고가 쉼 없이 이어졌다. 좀 있자니 개봉 예정 영화의 예고편이 나왔다. ‘아, 이제 시작하는구나.’ 싶어 시계를 보니 50분. 관람 티켓에 버젓이 찍힌 영화 시작 시간이다. 광고는 다시 나왔다. 손목시계를 탁탁 쳤다. ‘이건 아니잖아! ‘.

곧이어 비상시 탈출 방법과 영화관람 에티켓이 길게 이어졌다. 더는 안된다며 이를 앙, 물었다. 다시 광고다. 시계는 6시를 가리켰다. 애니*과 S*텔레콤 광고가 마지막을 요란하게 장식했다. (아마 가장 비싼 값에 수주한 광고들일 거다.) 엎친 데 덮치게 디지털 파일 사고로 1-2분이 더 지체된 후 영화는 시작됐다.




 

CGV 홈페이지http://www.cgv.co.kr/ 에 문제를 제기해논 상태다.


교활하게 머리를 굴려 이룬 10분+ 다. 광고와 예고편 그리고 관람 시 주의사항을 비상하게 뒤섞은 건 지루해 할 지 모를 관람객의 심리를 움쳐 잡고자  했음이리라. 극장에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노출시키는 굉음에 가까운 광고는 폭력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않고 자체 수주한 광고에 순진한 관객의 시간을 잡아먹는 건 사기라고 느껴진다.

 

대개는 이렇지 않나. 영화 시작 최소 10분 전에는 좌석에 앉아 예고편도 감상하고 리플렛도 읽으며 마음을 정돈하고, 어쩌다 오픈 크레딧 후 입장했다면 뒤쪽 빈자리에 겨우 앉거나 스크린이 밝아지기를 기다려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자리를 찾는. 이건 약속한 시간을 엄수하는 극장의 원칙에 대한 관객의 예의이면서 나 외의 관객을 위한 보통의 배려다.

이렇게 극장과 관객의 의무가 조화를 이룰 때 극장 나들이는 감탄의 느낌표로 마칠 수 있다. 지금의 멀티플렉스 업체들은 절대 다수의 스크린을 앞세운 권력으로 애꿎은 관객에게 행패를 부리고 있다.


덧붙여 … 멀티플렉스 업체들의 상영 지연도 문제지만 시작 시간 한참이 지나서야 팝콘과 콜라를 잔뜩 안고 떳떳이 입장하거나 상영중에 들락 날락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우리의 잃어버린 10분을 당당히 요구하기 위해서라도,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라도 극장에서 보이는 스스로의 태도에 대해 한번쯤 돌아보는게 어떨까 한다.


영진공 애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