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더위를 잊어보자!, “계간 판타스틱 여름호- 호러 특급”


완전 소박한 문예지로 변신한 판타스틱. 화려했던 과거의 잡지포맷이 그립구나~

계간지로 바뀐 뒤 두 번째 판타스틱이 나왔다. 여름호답게 호러 익스프레스라는 특집을 마련해 뇌에 구멍이라도 난 것 마냥 머릿속에
한기가 느껴지게 만드는 호러블한 단편들과 나의 공포체험이라 하여 몇몇 유명인사(?)들의 체험기가 실렸다.


로버트 하워드의 ‘비둘기들은 지옥에서 온다’ 는 허름한 흉가에 얽힌 비극과 저주에 관한 이야기로 ‘코난’의 작가가 호러 작품을 썼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놀라웠다. 제목 센스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물론 이야기도 재밌다.


그렉 이건의 ‘야경꾼’은 부기맨을 이용해 마을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름 재밌게 읽었다.


김종일의 ‘개들의 묘지’는 자신이 기르던 개을 죽이고 사체를 묻기 위해 야밤에 산에 올라갔다가 살인범들과 마주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는데 긴장감 있는 이야기와 깜짝 반전에서 김종일씨의 관록을 느낄 수 있다.


마츠다 신조의 ‘괴기사진작가’는 괴기스런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와 관련한 이야기로 나름 등골 서늘한 느낌을 준 작품. 


한유의 ‘버스정류장 소녀’ 는 버스정류장에 얽힌 괴담과 두 소녀의 이야기로 신인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더라도 작품자체가
인상적이지 못했다. 특히 여고생의 동성애 소재는 이미 여고괴담에서 지겹도록 써먹어 닳고닳아 넝마가 되지 않았던가. 작가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이야기가 너무 진부했다.


공포단편들도 좋았지만 이번 판타스틱의 대박은 테드 창의 신작이 실렸다는 것이다. 2008년도에 발표한 ‘숨결’이란 작품으로 이미
여러 상을 수상했고 2009년 휴고상 단편부분 후보작에도 이름을 올렸다. 작품을 읽어보면 정말 그의 내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앞서 발표했던 시간 여행에 관한 이야기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이 잘쓰긴 했지만 그래도 테드창 이라면 조금 부족한게
아닌가 싶다면 이번 작품은 역시 테드창이구나란 말이 나온다. 어떻게 기압과 뇌란 소재를 엮어서 이렇게 기발한 스토리를 만들었는지
기가 막히고 마치 눈앞에 놓여있는 듯 치밀한 기계공학적 묘사에선 탄식마저 나온다.


테드창은 지난 번 부천환타스틱 영화제에서 주최한 SF강의를 위해 한국에 들렀다고 한다. 난 미리 예약하지 못해서 거기 다녀온
다른 블로거들의 포스팅을 보며 입맛만 다시고 있었는데 조금 기뻤던 것은 테드창이 그가 인상깊었던 작품으로 아이작 아시모프의
‘죽은 미래’를 언급했다고 한다. 예전 포스팅(테드창과 아시모프. 시간여행)에서 나도 테드창의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을 소개하며 아시모프의 ‘죽은 미래’를 소개했었는데 그와 내가 같은 생각을 했었다니 가슴이 뿌듯해져 온다.


마지막으로 판타스틱이 계간으로 바뀌면서 새로 마련된 코너인 기획 에세이에서 유럽의 장르문학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강윤영씨란 분이
있는데 매우 고리타분하고 재미없었을 소재를 가지고 배꼽 빠지도록 재밌게 써준 덕에 좋은 공부를 하고 있다. 솔직히 이번
판타스틱을 손꼽아 기다렸던 이유 중의 하나가 강윤영씨의 글이었다. 나 강윤영씨의 팬이 되버릴테다!

영진공 self_fish

“차우”(2009), 즐길 수 있는 사람만 즐겨라!

아마도 근간 가장 ‘괴작’을 뽑으라면 작년 하반기에 개봉한 <모던 보이>와 함께 <차우>가 꼽히지
않을까 싶다. <모던 보이>가 괴작인 건 너무 훌륭한 면과 너무 후진 면이 어이없이 섞여서인데, <차우>의
경우는 좀더 ‘괴작’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 즉, 괴상한 영화라는 뜻이다. 언론시사로 처음 <차우>를 봤을 때 워낙
당황했는데, 후반으로 가면서 나름 이 영화의 유머를 꽤 즐기게 됐다. 시사 나와서는 모 평론가님과 인사를 하다가 “영화 보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나는 대체로 이 영화의 지지자 쪽에 가깝다. 사실 <차우>는 개봉 직전까지도
<괴물> 이후 가능성이 보였으나 그만큼 위험도 여전히 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대괴수가 출현하는 재난영화’로,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서 포장돼왔다. 그런 만큼 관객의 입장에선 <괴물>의 완성도에 필적하진 못하더라도 그 2/3
정도는 되기를 기대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확인한 <차우>는 완전히 다른 영화다.

뒤늦게야 공개된, '제대로 된' 포스터

대체로 괴수물이란 언제나 우리 세상 너머에 우리 힘으로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괴수의 존재, 우리가 평소 상상은
할지언정 현실에 존재한다 인정하려 하지 않는 존재가 봉인을 뚫고 나와 현실 세계를 위협할 때의 충격과 공포를 다루기 마련이다.
그 괴수를 상대로 싸우는 자가 고독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미지와 미래와의 대면을 은유를 읽어내고 격려를 받기도
하고, 괴수의 등장으로 인해 벌어지는 우리 세계의 파괴를 쾌감의 코드로 목격하게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쾌감을 두 가지
층위로 즐길 수 있다. 우리 세계가 파괴를 당하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며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마조히즘적 쾌감, 혹은 괴수에게
은밀한 감정이입을 느끼면서 얻는 사디즘적 쾌감. 그리고 그 사이, 순수하게 거대하고 육중한 생명체가 우리 세계를 때려부술 때에
오는 ‘타격감’. 그러므로 괴수물의 당연한 공식에서 시선의 방향이란 안에서 밖을 향하는 것이 된다.

<차우>가 그런 괴수물이 아닌 것은, 이 영화의 시선은 오히려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차우>는
외부에서 거대한 충격과 습격이 가해졌을 때 그 시선을 괴물이 있는 저 너머 바깥 어디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의
내부로 돌린다. 거대한 공포 앞에서 그 공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양상들을 양식화시켜 보여주고, 여기에 약간의 과장과
비틀기를 덧붙임으로써 오히려 코미디에 열중한다. 그 ‘외부의 충격’이 <차우>의 경우 식인 멧돼지의 습격인 것이지만,
이쯤 되면 사실 ‘차우’가 얼마나 이상한 변종이고 세고 크고 무섭고 포악한지 기타 등등은 별로 중요치 않게 된다. 사실 멧돼지가
아니라 운석을 타고 떨어진 외계의 괴생명체라 한들 이 영화가 그리 많이 바뀌었을 것 같진 않다. 멧돼지는 앞에 딱 한 번 나오고
그 뒤로 계속 안 나와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에일리언>을 모범적으로 베껴서 앞에 계속 나올 듯 말 듯
그림자로만 비추다가 맨 마지막에만 한 번 제대로 나오던가.

어쨌든 뭔가 무시무시한 놈이 잊을 만하면 마을사람을 호시탐탐 노리며 패닉을 가져온다. 절박함은 강도가 심할수록
우스꽝스러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절박한 놈만 절박하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또 멧돼지가 공격을 해오거나 말거나, 마치
그 순간이 지나면 기억상실 약이라도 단체로 먹는 듯 허허실실 천하태평이다. 자기만 안 당하면 된다 이거다. 그러므로 대체로의
괴수물이 절박함에 방점을 찍고 그로 인한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괴수가 화면에 전면 등장하면서 다 때려부술 때의 타격감을
강조한다면, 이 영화는 우스꽝스러움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움은 멧돼지를 잡겠다며 차우와 대면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들의 비장함을 (자기가 당하지 않았다고) 별 거 아닌 것 취급하며 태평한 마을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에서도 튀어나온다.
멧돼지가 습격하거나 말거나 검은 옷을 입고 마을을 활개치는 소위 ‘꽃 꽂은 분’이나 도시인들에게 장사를 해먹는 마을농장 관계자가
대표적인 예다. 특히나 꽃 꽂은 분은 애초에 맷돼지의 위험성과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핏 드러나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히려, 내 맘대로 장르명을 작명한다면, ‘괴수물’보다는 오히려 ‘농촌소동극’ 정도가 될 듯하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신정원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크고 무서운 맷돼지’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 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간다. 이
영화의 스타일대로라면, 차우가 화면에 제대로 나오는 장면은 수가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차우

겉보기는 이렇게 멀쩡하고 폼나는데… 사실은 허당이다. 죄다.

농촌소동극으로서, 코미디로서 <차우>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신정원 감독의 유머감각이 소위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굉장히 웃기고 유쾌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도 무지 웃었다. 멧돼지와
싸우겠다고 나선 인물들은 하나하나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덜떨어진 면이 있고 이들이 빚어내는 에피소드도 상황도 참 어이없이
웃기거나 배꼽빠지게 웃기는 부분이 많다. 멀쩡하게 생긴 형사가 사람들이 안 볼 때면 음료수고 담배고 몰래 챙기고 밤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잘 때조차 선글라스를 벗지 않으려 든다거나. 최고의 포수라는 이가 잘난 척 양키 포수들을 대동했지만 그들의 말을 실제론
알아듣지 못하고 선머슴같은 여자에게 가슴을 두근대며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거나. 나름 비장한 얼굴로 생의 고난과 무거운 짐을
감당하듯 보이던 서울내기 순경이 실제로 집안에서 벌어진 난장판에 신경질로 반응한다거나. 맷돼지에 대해 학구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무대포로 수색대를 따라나선 대학원생이 느닷없이 카메라를 꺼내들며 수색대에 ‘연출’을 하려들고 이들 수색대 역시 이에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쳐준다거나. 마을이 처한 대위기에 맞서 그 누구 하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위대한 영웅이나 지도자의 아우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다들 폼은 그럴싸하나 알고보면 모조리 허당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편이, 실제 현실과 더 가까울
것이다. 그토록 위대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란 영화 속 세상뿐일 테니. 게다가 씨네21에서 남다은 평론가가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차우의 수색에 나서는 건 죄 외지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작 뒷짐지고 가만히 있는데 이들 외지인들이 차우를
잡겠다며 나서서 벌이는 소동들이,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든다.

문제는 예산이다. 식인 멧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에서의 공포와 고난과 분투를 그리는 영화로 선전되며 그 정도의 CG와 예산이
들어간 영화라는 건, 마치 연인이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길래 스테이크를 먹게 될 줄 알고 기대했더니 맛은 꽤 별미이나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는 좀 비싼 떡볶이가 나온 형국이라 해야 할까.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새 창으로 열기)
<차우>는 순제작비만 70억에 이른다. P&A 비용까지 합치면 총제작비는 100억원에 육박한다. 너무 비싼
떡볶이가 아닌가. (물론 나는 떡볶이를 무지 좋아하긴 한다.) 난 차라리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처럼
예산을 적게 들이되 멧돼지의 모습을 그림자나 정황으로만 제시하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차우> 식의 코드라면 멧돼지가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의도적으로 조잡하거나 했어도 재미있었을 텐데, 이 영화의
유머가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블록버스터 만들려다 안 될 게 너무 뻔해지니까 중간에 차라리 망치려면 제대로
망치자며 막 가는’ 코미디로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엄태웅의 엉덩이가 노출되는 게 무슨 찐한 멜러 영화도 아닌
<차우>라는 게 우습기도, 재밌기도 하지만.

 

차우

큰 웃음 주신 신형사 역의 박혁권.

<차우>를 보는데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계속 생각났다. 처음 멧돼지의 흔적이
발견되는 곳, 묘지 위 언덕에서 경관들이 차례로 관 앞으로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자. <살인의 추억>에서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롱테이크 씬 역시,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풀숏으로 먼 거리에서 찍으면서 롱테이크로 가는데 둑방
위에서 누군가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두 영화의 그 장면들 모두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시골 마을이라는 게 단번에 보이는 씬으로, <차우>에서의 그 씬을 단순한 개그씬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 역시 외부에서 가해지는 거대한 충격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되,
절박함 이면의 우스꽝스러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 봉준호 식 낯선 유머 코드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모두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이 능란하게 교차된다. 그렇기에
<차우>의 오히려 안으로 향하는 시선과 묘하게 상통하믄 부분이 있다. 이후 <마더>에서도 드러나듯 너무나
생생한, 한편으로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오히려 실은 판타지의 공간이라 여겨지는  ‘한국적인 시골스러움’에 대한 묘사가 신정원
감독의 <차우>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이건 신감독의 전작 <시실리 2km>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난 아직
<시실리 2km>를 보지 못했다.) 다만 <차우>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마다 시도하지만 적절히 통제하는 어떤
코드의 유머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이 있다. <차우>를 보며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다 그 실소를 진심으로 즐기게 되는
것도, 그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 때문일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관객의 10분을 빼앗지 마라!!!

벌써 세 번째다. 10분씩 세 번이니까 총 30분이나 된다. 30분이면, 회사 출근시간으로 3,000원의 지각 벌금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집에서 빈둥거릴 때조차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자두로 입가심 하고도 곤히 낮잠에 들 수 있는 소중한 1,800초란 말이다.

거창하지만 진심으로 윤리적인 영화 보기의 실천을 위해서라도 멀티플렉스에 가지 않으려고 한다. (CGV는 입장 수익의 60% 이상을, 2주 이상 장기 상영 시 그 이상을 가진다.) 하지만 어제처럼 엄마를 모시고 극장에 가는 날이면, 가장 근거리에 위치한 멀티플렉스를 선택하게 된다.  이 땅에 사는 불행 중 하나다.

CGV 일산에 5시 50분 영화를 예매 했다. CGV에 도착한 시간이 45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언제나처럼 상품 광고가 쉼 없이 이어졌다. 좀 있자니 개봉 예정 영화의 예고편이 나왔다. ‘아, 이제 시작하는구나.’ 싶어 시계를 보니 50분. 관람 티켓에 버젓이 찍힌 영화 시작 시간이다. 광고는 다시 나왔다. 손목시계를 탁탁 쳤다. ‘이건 아니잖아! ‘.

곧이어 비상시 탈출 방법과 영화관람 에티켓이 길게 이어졌다. 더는 안된다며 이를 앙, 물었다. 다시 광고다. 시계는 6시를 가리켰다. 애니*과 S*텔레콤 광고가 마지막을 요란하게 장식했다. (아마 가장 비싼 값에 수주한 광고들일 거다.) 엎친 데 덮치게 디지털 파일 사고로 1-2분이 더 지체된 후 영화는 시작됐다.




 

CGV 홈페이지http://www.cgv.co.kr/ 에 문제를 제기해논 상태다.


교활하게 머리를 굴려 이룬 10분+ 다. 광고와 예고편 그리고 관람 시 주의사항을 비상하게 뒤섞은 건 지루해 할 지 모를 관람객의 심리를 움쳐 잡고자  했음이리라. 극장에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노출시키는 굉음에 가까운 광고는 폭력에 다름 아니다. 더구나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않고 자체 수주한 광고에 순진한 관객의 시간을 잡아먹는 건 사기라고 느껴진다.

 

대개는 이렇지 않나. 영화 시작 최소 10분 전에는 좌석에 앉아 예고편도 감상하고 리플렛도 읽으며 마음을 정돈하고, 어쩌다 오픈 크레딧 후 입장했다면 뒤쪽 빈자리에 겨우 앉거나 스크린이 밝아지기를 기다려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자리를 찾는. 이건 약속한 시간을 엄수하는 극장의 원칙에 대한 관객의 예의이면서 나 외의 관객을 위한 보통의 배려다.

이렇게 극장과 관객의 의무가 조화를 이룰 때 극장 나들이는 감탄의 느낌표로 마칠 수 있다. 지금의 멀티플렉스 업체들은 절대 다수의 스크린을 앞세운 권력으로 애꿎은 관객에게 행패를 부리고 있다.


덧붙여 … 멀티플렉스 업체들의 상영 지연도 문제지만 시작 시간 한참이 지나서야 팝콘과 콜라를 잔뜩 안고 떳떳이 입장하거나 상영중에 들락 날락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우리의 잃어버린 10분을 당당히 요구하기 위해서라도,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라도 극장에서 보이는 스스로의 태도에 대해 한번쯤 돌아보는게 어떨까 한다.


영진공 애플


























“퍼니셔 2”, 뼈와 살이 저미는 밤!!!

내가 돌프 룬드그렌의 [퍼니셔]를 봤던 것이 아마도 고등학교 때였을 거다.
뭐랄까, 어린 마음에 보기에도 참 엉성한 영화였다.  그리고 [퍼니셔]가 미국 만화의 슈퍼 히어로란 사실을 알고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놈의 슈퍼 히어로가 총질을 하고 다닌담?”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퍼니셔가 나오는 스파이더맨 만화를 구해 읽고, 쓸데없는 배경 지식을 전해들은 뒤로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뭐가 어쨌건 양키는 칼질이나 주먹질보단 총질이 더 잘 어울려.  그리고 총질을 해대는 슈퍼 히어로야말로 진정한 양키들의 슈퍼 히어로 아니겠어?
그러나, 돌프 룬드그렌 형님께서 첫 빠따를 워낙 졸렬하게 말아잡수신 탓에, 퍼니셔가 또다시 영상화되긴 어려울 것 같았다.  기껏해야 TV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에서 조연으로 나와 아둥바둥대는 꼴을 선보이며 보는 이들의 측은지심을 자극할 따름이었다.  역시, 한 번 말아먹으면 별 볼 일 없어지는 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별 차이 없네?

21세기 들어와 마블 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 [스파이더맨], [엑스맨] 등이 빅히트를 치면서 [퍼니셔]도 다시 한 차례 영화화가 되었다. 그러나 이건… 돌프 형님판보다도 더 형편없이 졸렬한 영화였다. 가족을 죽인 웬수 색희들에게 복수를 하려면 화끈하게 총질을 해야지! 넌 왜 몰래 숨어서 삽질만 하는 거냐? 너 퍼니셔 맞아? 혹시 2메바 아냐?

<돌+프 퍼니셔, 1989>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렀다.
[퍼니셔]는 영화계에선 완전히 잊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퍼니셔: 교전지대, Punisher: War Zone]이란 영화가 새롭게 나온 것이다!
이 영화, 작년 12월에 개봉했는데 쫄딱 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관심 밖, 아웃오브안중의 영화였다. 어쨌건 [퍼니셔]를 벌써 두 편이나 봐 줬으면 됐잖아. 내가 더 봐줘야겠어?
그런데 어쩌다 보니 저번 주말에 이 영화를 보고야 말았다. 인간, 너무너무 심심하고 할 일이 없으면 가끔 엉뚱한 일을 하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 나는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젠장….. 내가 왜 이 영화를 이제야 본 거람?!”
  청소년 열람 불가  


[#M_成人은 봐도 됨|별 것도 아니구만 … |
…. 오늘 밤도 퍼니셔, 프랭크 캐슬은 씨밤바 마피아들의 모가지를 접수하러
훼밀리 마트…. 아니, 훼밀리의 호화 저택에 잠입하셨답니다. 그리고 세상에나, 순식간에 설흔 명이 넘는 악당 색희들을
벌집으로 만들고, 목을 따고, 대가리를 부셔서 저세상으로 보내버리셨죠. 근데 도망친 색희들이 있네요? 퍼니셔 아저씨는 그
씨밤바들을 잡으러 가셨죠. 근데 악당 색희인줄 알고 골통을 날려버린 녀석이 알고 보니 잠입수사중인 FBI네요? 짜증 만빵이 된
퍼니셔 아저씨는 엄한 악당 색희를 분쇄기에 넣고 갈아버렸어요. 쿄쿄쿄.

근데 이 악당 색희가 살아나네요? 얼굴을 꿰매 붙이긴 했는데 이건 뭐 완전히 박수동
만화에 나오는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가 된 거에요. 근데 옥떨메라고 하면 폼이 안 나니까, “내는 오늘부터
지그소우다!”라고 하는 거예요. (니가 ‘쏘우’냐???) 그러더니 퍼니셔를 갈아버리겠다며 이를 가네요. 흥!

그러는 동안 퍼니셔 아저씨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기가 죽인 FBI 요원 가족을 찾아가 제발 자기 가슴팍에 구멍을 뚫어달라고 말해 보기도 하죠. 하지만 자식 교육에 악영향을 끼칠까 걱정한 미망인이 그 부탁은 거절하고 말았지요.

아무튼 지그소우는 죽은 FBI 요원 가족을 집적대기 시작하고, 그 사실을 알게 된
퍼니셔 아저씨는 짜증이 완존 꼭지까지 돌아서 지그소우를 작살내기로 결심한답니다. 그리고 탄창 꼭꼭 끼운 총을 들고, 씨밤바 악당
색희들을 인정사정 보지 않고 쏴 갈기기 시작하는데 …


* 공교롭게도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드라마를 통해 우리에게 낯익은 이들입니다.  퍼니셔역의 레이 스티븐슨은 영드 ‘롬”의 ‘풀로’이고, 지그소우는 미드 ‘와이어’의 형사 ‘지미’, 그리고 미망인역의 줄리 벤츠는 ‘덱스터’의 부인 ‘리타’라능 … 그러고보니 줄리 벤츠는 ‘쏘우5’에서도 (원조)지그소우에게 괴롭힘을 당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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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대충 이런 스토리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스토리는 전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퍼니셔가 유쾌상쾌통쾌하게 총질을 해대며 악당들을 장렬하게 박살낸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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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으로 안면을 분해하고, 기관총으로 벌집을 만들고, 유탄발사기로 아예 공중에서 사지분해를 시키는 등, 그야말로 “이 씨***, 다 죽여버리겠다!”라는 분노의 절규가 쉴 새 없이 울려퍼지는 악-숀 씬의 연속이다. 그래, 이거다 이거! 그동안의 퍼니셔 영화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걸 네가 유감없이 보여주는구나!

누가 뭐래도 액션 영화의 진수는 액션이다. 그리고 양키 액션의 진수는 총질이다. [퍼니셔 : 교전지대]는 [이퀄리브리엄]에 이어 그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보인 영화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건 이거다. 왜 이 영화가 망한 거지? 재밌기만 하구만. 너무 잔인해서 그런가?
별점 : 5점 만점에 5점 – 단, 이건 어디까지나 B급 악-숀 영화광의 관점에서 매긴 점수!
영진공 DJ Han

“빈얀(Vinyan)” (2008), 어머니 자연은 때로 무섭고 잔인하다.

태국 푸켓에서 6개월 전 쓰나미로 어린 아들을 잃은 벨머 부부는 푸켓을 떠나지 못한 채 그곳에서 살고 있다. 자선파티에
참석한 도중 부부는 우연히 버마의 깊은 숲 속 바닷마을을 찍어온 영상에서 자신의 아이처럼 보이는 어린아이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아들을 찾기 위한 여정에 오른다. 확신이 없는 남편 폴은 여행 내내 회의에 시달리지만, 아내의 믿음은 굳건하며, 이 여행을 계속
추동한다. 심지어는 남편을 속여 사기꾼에게 거액의 돈을 넘기면서까지 말이다. 이들의 여행길은 점차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버마의 원시림으로 향하고, 얀은 점차 집착과 광기로, 폴은 공포로 빠져든다.

엠마뉘엘 베아르 언니의 무시무시한 얼굴 ...

영화는 오프닝 크레딧부터 매우 강렬하고 압도적인 비주얼과 사운드로 시작한다. 화면을 꽉 채우는 타이포그라피의 오픈 크레딧,
아마도 바닷속의, 수많은 물방울 기포 사이로 철렁대는 긴 머리카락, 점차 핏빛으로 변하는 물방울들, 그리고 처음엔 찰싹대는
잔잔한 파도소리에서 점차 소리가 커지며 불쾌하게 귀를 긁어대는 사운드까지. 마침내 도저히 이 소리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고 비명을
지르고 싶을 때가 돼서야, 영화의 스탭롤이 끝나고 소리도 멈춘 뒤 본 화면으로 전환된다. 쉰이 다 돼가는 나이에도 여전히
20대적 젊음과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엠마뉘엘 베아르의 비키니 수영복 씬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Vinayn

종종 자연과 등치되는 모성애는 원래 무섭고 잔인하고 눈 먼 것이다.

감독은 이 영화에 영감을 준 이 중 하나로 조셉 콘라드를 꼽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지옥의 묵시록>을 강하게 연상케 한다. (<지옥의 묵시록>은 조셉 콘라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에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일부 영화정보에서는 그래서 [암흑의 핵심]이 <지옥의 묵시록>의 원작이라 표기하고 있기도
하다.) 정신적 외상을 입은 인물이 모종의 임무를 띄고 다른 인물들 혹은 사회와 동떨어진 곳, 즉 정글 속으로 여행하며 점차
광기에 물들어간다는 설정은, 확실히 <지옥의 묵시록>을 꼭 빼닮은 구석이 있다. 말론 브란도의 커츠 대령이 이미
그랬던 존재고, 그 뒤를 주인공인 마틴 쉰의 윌라드 대위가 쫓는 것이다. 윌라드 대위의 임무는 커츠 대령을 제거하는 것이고
실제로 그 임무에 성공하지만, 한편으로 그 자신이 또 다른 면에서 커츠 대령을 닮아가며 광기의 중심으로 빠져드는 것 역시
사실이다. 역설적으로 커츠와 달리 그 광기를 통해 구원을 얻는다는 게 차이점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 영화, <빈얀>도
그렇다.

<지옥의 묵시록>에서처럼 <빈얀>에서도 벨머 부부가 여행을 계속하면서 정글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자연은 인간이 잘 통제하고 다듬은, 인간을 위로하고 편안한 안식처가 돼줄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인간을 압도하고 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잔혹하고 공포스러운 공간이 된다. 제멋대로 자란 무성한 나뭇가지들, 더럽고 탁한 강물과 발목까지 빠져 걸음을 어렵게
하는 진창, 거기에 쏟아지는 비까지. <지옥의 묵시록>에서처럼 <빈얀>의 공간은, 서구인들이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매혹과 공포를 함께 느끼는, 그들 입장에서 소위 ‘원시림’이라 여겨지는 동양의 깊은 밀림이다. 그런데 벨머 부부가
푸켓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빈얀>의 이런 밀림에 또 다른 의미 하나를 더 부여한다. 즉, 이들의 여행이 계속될수록
카메라에 잡히는 야생의 압도적인 자연의 풍경은, ‘여름 휴가를 온 백인들을 위해 아름답게 손질된 동양의 휴양지 해변’인 푸켓과
극명한 대비가 된다는 것이다.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는 휴양지에서 종종 마주치는, 잠시 지나는 상쾌한 스콜이 아니라, 마치 배우의
몸을 연달아 찌르기라도 하듯,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불쾌한 비다. (배우들이 정말 고생했겠더라.)
그렇다면 6개월 전 벨머 부부의 아이를 앗아간 쓰나미는, 말하자면 잘 통제된 인간의 영역과 야생의 자연이 인간을 압도하는 영역
사이의 어떤 틈새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연을 ‘발견하고 탐험하며 지배하고 정복하기를’ 꿈꾸지만, 결코 인간에게
정복되지 않는 자연은 종종 틈새를 찢고 그 사이로 인간이 정복했다고 믿는 어떤 영역을 순식간에 덮치고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것이다.

Apocalypse Now

마침내 그에게 다가간다. 그를 죽이기 위하여.

<빈얀>은 그러나, <지옥의 묵시록>과 다르다. <빈얀>의 벨머 부부는 커츠 대령이
아니라, 커츠 대령과 똑 닮은, 그러나 그런 식의 ‘절대적 아버지’가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들을 죽이는’ 무수한 어린아이들을
만난다. 옷은 모두 팽개친 채 사타구니에 두건만 두르고 얼굴에 온통 허연 회칠을 하고 눈과 입 주위를 붉게 칠한 이 아이들은
처음엔 한둘, 그 다음엔 서넛, 그 다음엔 대여섯이 벨머 부부의 눈에 띄고, 그 때까지만 해도 부부에게 어떤 위해를 가할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아이들이 수백이 한꺼번에 모여들 때, 그것은 확실히 충격과 공포가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의 충격은 마치 <지옥의 묵시록>의 엔딩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듯한 양상이 된다. 아마도 식인을 하는 듯한,
‘원시인’이라는 다소 차별적인 말이 딱 떨어지는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흉폭한 자연에 적응하고 그 일부가 돼버린 아이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쩌면 ‘산 채로 귀신이 돼버린’ 존재들인지 모른다. 사회와 상징계를 떠나 그저 실재로만 존재하는 아이들이라니,
사실 이거야말로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아닌가. 그러니 상징계에 속한 인간의 눈에는 이들이야말로 귀신이 아닌가.

아이들에게 남자 어른들이 차례로 죽음을 당할 때, 우리는 어쩐지 그 죽음에서 공포와 함께 일종의 경외감과 슬픔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나 그 아이들이 마지막 장면에서 얀을 향해서는 끝없이 손을 내밀며 그녀의 몸을, 특히 가슴을 쓰다듬기에 더욱
그러하다. 물론 이 아이들이 여자를 살려두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생존을 위해서다. (벨머 부부가 아이들과 처음 마주쳤을 때
아이들과 함께 있던 노부부는 둘 다 아이들 앞에서 몸을 잔뜩 움츠린 채 겁에 질려있었고, 아이들은 노부부 중 남자 쪽을
죽인다.) 말하자면 아이들의 살인은, 인간의 ‘사회’의 룰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자연의 법칙의 일부이면서, 아이들에게 위해를
가한 존재들에 대한 응징과 처벌의 뉘앙스를 띄고, 상대적으로 자신을 돌보아줄 모성 – 자연은 종종 모성과 등치된다 – 에 경외와
복종을 바치는 것이다. 자연을 ‘정복’하고, 아이들을 ‘착취’하며, 다른 아이들을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즉 자신의
피와 살을 이은 존재만을 중시했던 남자어른들은 (중간에 도망쳐 버린 선장을 제외하고) 이 영화에서 모두 죽음의 처단을 당한다.

 

Vinyan

이 장면에서 아이들은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그 천진난만한, 유독 사운드로 강조되는 ‘깔깔깔’ 웃는 소리는 충분히 소름끼쳤다.

다만 뭔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버마의 밀림 속 아이들이 원시림 속 야생적인 식인종 원시인으로 그려진 것, 그리고 절대적
공포의 공간이 푸켓에서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간 버마의 깊은 산골짜기라는 것, 아마도 감독이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은, 자기
생각에 ‘그저 먼 곳’이었을 뿐이 정치적 격변으로 몸살을 앓는 버마의 숲속이란 게, 차마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얄팍하고 오래된 오리엔탈리즘의 잔재를 보는 것 같다.

한 가지 더, ‘빈얀’이 정말로 태국의 귀신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말인가 싶어 인터넷을 뒤지다가, 이 영화를 어둠의
경로를 통해 보고 쓴 이들의 감상문을 대거 읽었다. 미안한데 이 영화는 그렇게 보면, 그 감상문들이 하나같이 전하는 대로 “대체
뭐하자는 영화인지 알 수 없는” 영화가 돼버린다. 이 영화에서 비주얼만큼이나 중요한 게 사운드다. 이 글 두 번째 문단에서도
묘사했지만, 종종 초현실적인 장면과 함께 귀에 거슬리며 불쾌감을 주도록 연출된 사운드가 영화의 공포와 긴장의 분위기를 쥐었다
놨다 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파일로 집에서 싸구려 컴퓨터 스피커를 통해 듣는 사운드는 이 영화의 원래 의도된
분위기, 사운드의 강약과 리듬으로 전달되는 그 공포를 결코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한다.

[부천영화제 상영작. 7/19 일요일 오후 5시, 부천시청.]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