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구의 제왕”, 진부하되 웃기는데 성공한 개그의 제왕


코미디 영화는 웃기면 된다.

좀처럼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 『에어플레인』, 『폴리스 아카데미』, 『총알 탄 사나이』, 『덤앤더머』의 슬랩스틱 개그는 심상의 복잡한 광경을 제로베이스로 만들어주는 일등 공신감이다.

최근에는 우울할때면 찾아보는게 『러브 액츄얼리』로 바뀌었으나 그 전에는 단연 『총알 탄 사나이』와 『에어플레인』이 톱랭크 되어 있었다.

슬랩스틱. 우리나라에서는 슬랩스틱=저질=심형래=(나아가서는)영구 시리즈의 이상한 공식으로 이해되는 부분이 없지 않다. 웃긴걸 어쩌라구? 웃긴게 죄야? 넘어지는게 유치해?

늘상 코미디를 영화의 하위분류가 아닌 저질의 하위분류로 놓고 이야기하는 몇몇 지인들의 머리통을 캔뚜껑으로 따주고 싶을 때 나는 또 우울해진다. 도대체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편가르는 의도가 궁금하거니와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어떻게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건지도 웃기다.

코미디를 사랑한다고 모두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건강한 정신을 갖고 있는 자는 모두 코미디를 사랑한다! (역시 ‘안믿으면 말구’투 대사다.)


『피구의제왕』(원제: Dodgeball, 2004)은 “빈스 본”과 “벤 스틸러”가 대립하는 영화다. 하나는 가난하고 하나는 부자이나 둘다 갑남을녀의 보편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전문용어로 “쪼다”에 속하는 인물들 … –;;;

피터(“빈스 본” 분)는 5만달러를 벌기 위해 피구시합에 얼떨결에 나가게 되고 특별한 플롯없이 우승한다. 미국 전역에서 모인 쟁쟁한 팀들과의 피튀기는 대결 따위는 애초에 없다. 그냥 이긴다. 이 허망하고 진부한 내용은 다시 곱씹어 보면 미치도록 웃긴 설정이다.

저 『소림축구』에서 봤던 마지막 시합의 비장감 따위조차 웃음의 방해요소라면 그냥 무시해버리는 내공. 영화에서 나오는 그 어떠한 장치(예를 들자면 “밴스틸러 사타구니”에 들어있는 뽕빤쓰, 중간중간 까메오로 등장하는 “데이빗 핫셀호프”, 심판장인 “척노리스”, “랜스 암스트롱”의 깜짝출연, 피터 관원들의 쪼다행각)도 그저 들러리 웃음 뿐이다.

그렇다고 출연자들의 캐릭터가 죽어 있느냐? 절대 아니다. 캐릭터 하나하나의 개그는 내 정신세계 수준에서 개그의 절대치를 보여주게 웃기다.

어쨌든, 뭣이 됐든 ……

이 영화. 웃겨 죽는줄 알았다.

영진공 그럴껄

“주성치”, 비관과 낙관 사이의 아슬아슬한 곡예




한 손에는 비정함을, 다른 손에는 로맨스를 ...



배트맨은 부르스 웨인이 변장한 캐릭터고, 스파이더맨은 피터 파커가 변장한 캐릭터야. 하지만 수퍼맨은 달라. 수퍼맨이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어 변장한 캐릭터가 클라크 켄트지. 그런 면에서 수퍼맨은 아주 독특하지.
– 영화 “킬빌” 중에서

주성치 대인의 영화 “쿵푸 허슬”. 영화 … 끝내준다. 그는 이야기의 완급조절, 액션의 밀도와 상상력에 있어서 진정 본좌다. 근데 영화만큼 재미있었던 건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영화 초반부에 도끼파가 쏘아 올린 폭죽이 도끼모양으로 하늘을 수놓는 것 같은 아기자기한 연출들을 보며 지나치게 낄낄거리던 내 주변 관객들은 오히려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조용해졌다. 영화가 끝난 후, 그 초반에 즐거워하던 관객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이게 뭐야, 너무 잔인하고 무서워서 재미없어…”

오해의 시작, 소림축구


그의 전작 『소림축구』를 통해서만 주성치를 아는 사람들이 그의 영화에 대해 갖는 큰 오해 중에 하나는 그가 코미디 배우이고 그의 영화가 코미디라는 생각이다. 그건 사실 채플린의 영화를 코미디로 착각하는 것만큼이나 하기 쉬운 오해지만, 그 오해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댓가의 크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채플린의 영화는 코미디로 봐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주성치의 영화를 코미디로 오해하면 뜻밖의 충격을 받게 된다. 앞서의 그 관객들도 이런 오해의 희생자다. 이 댓가는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를 “금발미녀 공금횡령 도주사건 이야기”로 착각하고 보던 관객들이 샤워실 살인 장면에서 받았던 충격만큼이나 크고, 놀러 갔다가 매맞고 돌아온 아이들의 심정만큼이나 억울하다.

하지만 그가 이전에 만든 영화 『희극지왕』이 전혀 희극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오해는 진작에 접었어야 할 일이다.
 

희극은 커녕, 비극이더구만 ...


그는 『도신』을 패러디한 『도성』에서 인간슬로모션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의 황당한 상상력은 단순히 웃기는 쪽으로만 뻗어나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구품지마관』 같은 영화에서는 고관대작에 잘못 걸려 누명을 뒤집쓴 임신부가 항의하다가 입에 곤장을 맞고, 배를 짓밟혀서 유산(!)을 하고 질질 끌려가는데 이건 결코 코미디가 아니다. 물론 그 뒤에 말발로 폭포를 이겨내는 장면으로 이 비장/애통이 커버되긴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앞서의 비장/애통이나 폭포수와 싸워 이기는 말발은 모두 같은 황당함이다.

『홍콩 레옹』에 나오는 귀신들의 사연도, 그 귀신들에 엮여서 목이 잘리고 배가 갈라지는 인물들의 모습도 역시 코미디가 아니다. 그보다는 하드고어 호러에 가깝다. 그는 사람들이 짓밟히고, 마구 죽어나가는 장면을 의외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식신』에서 잘나가다 배신당해 비참한 처지에 몰린 주성치가 비루하게 굴다가 더 심하게 짓밟히는 장면도, 『서유기 – 월광보합』에서 도적들이 여자주인공 언니의 칼에 맞아 순식간에 황천가는 장면들도 모두 당연한 일인 듯, 무덤덤하게 연출된다.

『소림 축구』에서는 수위를 아주 낮췄지만, 여전히 그 잔인 무도함은 남아있다. 라이벌의 계략에 말려 무릎이 박살나서 절름발이가 되고, 그렇게 당하고 나서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 때문에 끝없이 비굴하게 굽신대야 하는 오맹달의 처지는 결코 코미디용 설정이 아니다.

이러니 『쿵푸허슬』에서도 천연덕스럽게 뽑은 칼을 다시 그 상처에 꽂아 넣고, 그 칼을 사이드 미러로 쓰며, 어린아이가 오줌 세례를 맞고, 일가족이 휘발유를 뒤집어쓰며, 아무렇지도 않게 죄 없는 새끼고양이를 반동강이 낼 수 있는 것이다.

웃기되, 그냥 웃을 수 만은 없는 그의 영화들 ...


평범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 평범함을 뛰어넘고 남의 눈에 띄기 위해서 기발해지고 창의적이 되어보려 노력을 한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기발함을 감추고 평범한 척, 상식적인 척해야 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 마치 클라크 켄트라는 변장으로 자신의 본질을 감춰야 하는 수퍼맨처럼 말이다.

창의성에 대한 연구들에 의하면, 창의성이란 훈련이나 노력을 통해서 키워질 수 있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애초부터 갖고 태어나는 독특성의 문제다. 어떤 생각이 창의적이라는 말은 그 생각이 그만큼 비정상적이라는 뜻이며, 기발한 상상력은 규범을 벗어난 일탈적인 생각을 뜻한다.

『쿵푸허슬』에 보면 정신병원이 등장하는데 이 병원의 제목은 ‘정신병원’이 아니라 ‘비정상자 수용소’ 비슷한 이름이었다. 사실 정신병은 상식을 심하게 벗어난 사람들, 정상범위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붙이는 의학적 죄명인데 그런 면에서 주성치 역시 바로 그 병원에 수감되어야 하는 존재에 가깝다.

주성치는 『킬빌』에서 얘기한 수퍼맨처럼 세상이 자신의 본색을 이해해주기는 포기하고, 세상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다. 그렇게 변장을 하고 자신의 본질을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애초부터 비정상적이던 그의 본색은 영화의 곳곳에 드러난다. 그것이 그의 영화들 전체를 아우르는 개성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그의 관점, 그의 본색은?

그가 보는 세상은 무자비하다. 『소림축구』에서 양아치들과 축구를 하려다가 집단 린치를 당하던 주성치가 오맹달에게 항의한다. “이게 무슨 축구예요! 싸움이죠.” 그러자 오맹달이 화를 내며 대답한다. “축구는 원래 전쟁이야!!” 이건 그가 축구 이전에 인생 자체에 대해 하고싶었던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함부로 노닥거릴 수 있는 동네가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눈뜨고 코 베어가고, 그런 꼴을 당해도 동정은커녕 코가 잘려진 병신이라고 더 짓밟아버리는 무자비한 생존경쟁의 지옥도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가 패배자들의 비루함에 대해서 그렇게 절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들 모두가 잠재적인 패배자이기 때문이다. 지옥에서는 어느 누구도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 단지 패배를 미루어 둘 뿐이다.
 

『서유기 - 선리기연』의 이 장면, 주성치식 로맨스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가 우리를 감동하게 만드는 건, 그 지옥을 지옥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 삐딱함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구라와 로맨스는 바로 거기서 나온다. 세상이 그렇게 무자비한 지옥일지라도,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지라도, 그 와중에 로맨스를 꿈꾼다는 것이 그의 영화가 가진 미학이고 그의 영화가 주는 긴장감의 근원이다.

역시 『쿵푸허슬』에서도 재연되는 주성치식 로맨스 ...


한 손에는 비정함을 다른 손에는 로맨스를 들고,
비관과 낙관 사이에서 벌이는 아슬아슬한 곡예가 그의 본색이며 그의 영화는 점점 이 본색을 드러낸다. 관객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



영진공 짱가


“슈퍼 사이즈 미”, 햄버거가 뭔 죄냐, 자본이 죄지!


‘한 달간 김치찌게와 밥만 먹을 때에도 우리 몸의 염분농도는 엄청나게 올라갈 것이다. 골고루 먹지 않는 음식이야말로 최대의 독약인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라는 생각을 보호막으로 삼고 하루 한갑의 거북선과 반통의 하루방(국내산 파이프 담배)을 피워대시던 할아버님이 82세까지 사셨던 사실을 상기하며, 마지막으로 마라톤 연습을 하시던 중 돌아가신 막내 사촌형님에 대한 사망원인을 “결국 우리 유전자는 운동을 하면 안돼….더군다나 조선일보 기자였으니 우리 유전자에서는 조선일보와 운동은 극약이야”라는 말도 안되는 유권해석으로 얼버무린 희대의 자기몸 사기꾼 나의 관람 전 마음가짐은 저토록 장황했었다.

요컨대 나는 일주일에 3회 이상을 삼겹살+소주(2~3병)로 마시며 2회 이상을 집에서 소주(1~2병)+(골뱅이, 참치, 꽁치찌게 등)을 마시며 1주에 1회 이상 기타주류(맥주, 양주, 막걸리, 와인)로 소화해대니 나의 편협한 식습관은 벌써 10여년이 훌쩍 넘어간 상태였다. (내가 저 다큐의 주연이었다면 산송장 취급받지 않을 재간이 있겠는가?)

일주일에 6회 이상의 음주 습관을 가진 이 땅의 수많은 샐러리맨, 학생, 백수, 자영업자를 대표해서 난 『슈퍼 사이즈 미』의 비판꺼리를 찾을 양으로 눈알 뒤집어가며 보고 있었더랬다.

30일간의 맥도날드 다이어트는 25파운드의 체중증가, 간경화 조짐, 간조직 손상, 동맥경화증 조짐 등의 화려한 병력 예상 증후군을 남발하며 끝났다. 역시 문제는 자본주의의 최대 관건인 이익이며 곧 돈이다.

“모건스퍼록”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결국 자본주의의 폐해였다만 솔직히 그 방법은 적절하지 못했다. 기업은 이익을 목적으로 하고 이익을 위해선 로비스트가 있어야 하며 로비스트는 구축된 막강한 자금력으로 정책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고 간다. 이익의 수혜자인 서민은 동시에 이익의 희생자이며 소수의 자본권력의 배는 서민의 늘어나는 뱃살만큼이나 급격하게 늘어날 뿐이다. “모건 스퍼록”은 이 이야기를 자기희생을 통해 풀어나가지만 이는 또다른 ‘희생제의’에 다름 아니다.

나의 짧은 소견으로도 한 식품의 편중된 섭취는 불가결하게 신체의 이상증후를 나타낼 것이며 그것은 아침점심저녁으로 산삼만 쳐먹어도 당연히 나타나는 결과일 것 아닌가? 고로, 난 감독의 『슈퍼 사이즈 미』프로젝트가 사회의 이슈를 만들어내고 시선을 잡으며 희생제의의 어린양이 되는 아픔을 감수한 것에 박수를 보내지만 자본주의가 서민을 제압하는 악순환의 방식을 고발하는 측면에서는 좀 비겁한 방법이었다고 말하겠다.


끝이냐고?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영화를 지지한다. 굳이 함무라비 법전까지는 안가더라도 자본의 저열한 속성을 조금 비겁한 방법으로 약올렸다고 해서 『슈퍼 사이즈 미』가 비난 받아서는 안된다. 설사 그 방법이 조금 비겁했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의 각성을 깨워주는 영화를 만든 “모건 스퍼록”에 무척 감사하는 바다.

영진공 그럴껄

“차우”(2009), 즐길 수 있는 사람만 즐겨라!

아마도 근간 가장 ‘괴작’을 뽑으라면 작년 하반기에 개봉한 <모던 보이>와 함께 <차우>가 꼽히지
않을까 싶다. <모던 보이>가 괴작인 건 너무 훌륭한 면과 너무 후진 면이 어이없이 섞여서인데, <차우>의
경우는 좀더 ‘괴작’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 즉, 괴상한 영화라는 뜻이다. 언론시사로 처음 <차우>를 봤을 때 워낙
당황했는데, 후반으로 가면서 나름 이 영화의 유머를 꽤 즐기게 됐다. 시사 나와서는 모 평론가님과 인사를 하다가 “영화 보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나는 대체로 이 영화의 지지자 쪽에 가깝다. 사실 <차우>는 개봉 직전까지도
<괴물> 이후 가능성이 보였으나 그만큼 위험도 여전히 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대괴수가 출현하는 재난영화’로,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서 포장돼왔다. 그런 만큼 관객의 입장에선 <괴물>의 완성도에 필적하진 못하더라도 그 2/3
정도는 되기를 기대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확인한 <차우>는 완전히 다른 영화다.

뒤늦게야 공개된, '제대로 된' 포스터

대체로 괴수물이란 언제나 우리 세상 너머에 우리 힘으로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괴수의 존재, 우리가 평소 상상은
할지언정 현실에 존재한다 인정하려 하지 않는 존재가 봉인을 뚫고 나와 현실 세계를 위협할 때의 충격과 공포를 다루기 마련이다.
그 괴수를 상대로 싸우는 자가 고독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미지와 미래와의 대면을 은유를 읽어내고 격려를 받기도
하고, 괴수의 등장으로 인해 벌어지는 우리 세계의 파괴를 쾌감의 코드로 목격하게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쾌감을 두 가지
층위로 즐길 수 있다. 우리 세계가 파괴를 당하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며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마조히즘적 쾌감, 혹은 괴수에게
은밀한 감정이입을 느끼면서 얻는 사디즘적 쾌감. 그리고 그 사이, 순수하게 거대하고 육중한 생명체가 우리 세계를 때려부술 때에
오는 ‘타격감’. 그러므로 괴수물의 당연한 공식에서 시선의 방향이란 안에서 밖을 향하는 것이 된다.

<차우>가 그런 괴수물이 아닌 것은, 이 영화의 시선은 오히려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차우>는
외부에서 거대한 충격과 습격이 가해졌을 때 그 시선을 괴물이 있는 저 너머 바깥 어디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의
내부로 돌린다. 거대한 공포 앞에서 그 공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양상들을 양식화시켜 보여주고, 여기에 약간의 과장과
비틀기를 덧붙임으로써 오히려 코미디에 열중한다. 그 ‘외부의 충격’이 <차우>의 경우 식인 멧돼지의 습격인 것이지만,
이쯤 되면 사실 ‘차우’가 얼마나 이상한 변종이고 세고 크고 무섭고 포악한지 기타 등등은 별로 중요치 않게 된다. 사실 멧돼지가
아니라 운석을 타고 떨어진 외계의 괴생명체라 한들 이 영화가 그리 많이 바뀌었을 것 같진 않다. 멧돼지는 앞에 딱 한 번 나오고
그 뒤로 계속 안 나와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에일리언>을 모범적으로 베껴서 앞에 계속 나올 듯 말 듯
그림자로만 비추다가 맨 마지막에만 한 번 제대로 나오던가.

어쨌든 뭔가 무시무시한 놈이 잊을 만하면 마을사람을 호시탐탐 노리며 패닉을 가져온다. 절박함은 강도가 심할수록
우스꽝스러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절박한 놈만 절박하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또 멧돼지가 공격을 해오거나 말거나, 마치
그 순간이 지나면 기억상실 약이라도 단체로 먹는 듯 허허실실 천하태평이다. 자기만 안 당하면 된다 이거다. 그러므로 대체로의
괴수물이 절박함에 방점을 찍고 그로 인한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괴수가 화면에 전면 등장하면서 다 때려부술 때의 타격감을
강조한다면, 이 영화는 우스꽝스러움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움은 멧돼지를 잡겠다며 차우와 대면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들의 비장함을 (자기가 당하지 않았다고) 별 거 아닌 것 취급하며 태평한 마을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에서도 튀어나온다.
멧돼지가 습격하거나 말거나 검은 옷을 입고 마을을 활개치는 소위 ‘꽃 꽂은 분’이나 도시인들에게 장사를 해먹는 마을농장 관계자가
대표적인 예다. 특히나 꽃 꽂은 분은 애초에 맷돼지의 위험성과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핏 드러나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히려, 내 맘대로 장르명을 작명한다면, ‘괴수물’보다는 오히려 ‘농촌소동극’ 정도가 될 듯하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신정원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크고 무서운 맷돼지’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 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간다. 이
영화의 스타일대로라면, 차우가 화면에 제대로 나오는 장면은 수가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차우

겉보기는 이렇게 멀쩡하고 폼나는데… 사실은 허당이다. 죄다.

농촌소동극으로서, 코미디로서 <차우>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신정원 감독의 유머감각이 소위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굉장히 웃기고 유쾌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도 무지 웃었다. 멧돼지와
싸우겠다고 나선 인물들은 하나하나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덜떨어진 면이 있고 이들이 빚어내는 에피소드도 상황도 참 어이없이
웃기거나 배꼽빠지게 웃기는 부분이 많다. 멀쩡하게 생긴 형사가 사람들이 안 볼 때면 음료수고 담배고 몰래 챙기고 밤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잘 때조차 선글라스를 벗지 않으려 든다거나. 최고의 포수라는 이가 잘난 척 양키 포수들을 대동했지만 그들의 말을 실제론
알아듣지 못하고 선머슴같은 여자에게 가슴을 두근대며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거나. 나름 비장한 얼굴로 생의 고난과 무거운 짐을
감당하듯 보이던 서울내기 순경이 실제로 집안에서 벌어진 난장판에 신경질로 반응한다거나. 맷돼지에 대해 학구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무대포로 수색대를 따라나선 대학원생이 느닷없이 카메라를 꺼내들며 수색대에 ‘연출’을 하려들고 이들 수색대 역시 이에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쳐준다거나. 마을이 처한 대위기에 맞서 그 누구 하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위대한 영웅이나 지도자의 아우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다들 폼은 그럴싸하나 알고보면 모조리 허당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편이, 실제 현실과 더 가까울
것이다. 그토록 위대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란 영화 속 세상뿐일 테니. 게다가 씨네21에서 남다은 평론가가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차우의 수색에 나서는 건 죄 외지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작 뒷짐지고 가만히 있는데 이들 외지인들이 차우를
잡겠다며 나서서 벌이는 소동들이,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든다.

문제는 예산이다. 식인 멧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에서의 공포와 고난과 분투를 그리는 영화로 선전되며 그 정도의 CG와 예산이
들어간 영화라는 건, 마치 연인이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길래 스테이크를 먹게 될 줄 알고 기대했더니 맛은 꽤 별미이나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는 좀 비싼 떡볶이가 나온 형국이라 해야 할까.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새 창으로 열기)
<차우>는 순제작비만 70억에 이른다. P&A 비용까지 합치면 총제작비는 100억원에 육박한다. 너무 비싼
떡볶이가 아닌가. (물론 나는 떡볶이를 무지 좋아하긴 한다.) 난 차라리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처럼
예산을 적게 들이되 멧돼지의 모습을 그림자나 정황으로만 제시하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차우> 식의 코드라면 멧돼지가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의도적으로 조잡하거나 했어도 재미있었을 텐데, 이 영화의
유머가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블록버스터 만들려다 안 될 게 너무 뻔해지니까 중간에 차라리 망치려면 제대로
망치자며 막 가는’ 코미디로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엄태웅의 엉덩이가 노출되는 게 무슨 찐한 멜러 영화도 아닌
<차우>라는 게 우습기도, 재밌기도 하지만.

 

차우

큰 웃음 주신 신형사 역의 박혁권.

<차우>를 보는데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계속 생각났다. 처음 멧돼지의 흔적이
발견되는 곳, 묘지 위 언덕에서 경관들이 차례로 관 앞으로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자. <살인의 추억>에서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롱테이크 씬 역시,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풀숏으로 먼 거리에서 찍으면서 롱테이크로 가는데 둑방
위에서 누군가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두 영화의 그 장면들 모두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시골 마을이라는 게 단번에 보이는 씬으로, <차우>에서의 그 씬을 단순한 개그씬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 역시 외부에서 가해지는 거대한 충격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되,
절박함 이면의 우스꽝스러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 봉준호 식 낯선 유머 코드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모두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이 능란하게 교차된다. 그렇기에
<차우>의 오히려 안으로 향하는 시선과 묘하게 상통하믄 부분이 있다. 이후 <마더>에서도 드러나듯 너무나
생생한, 한편으로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오히려 실은 판타지의 공간이라 여겨지는  ‘한국적인 시골스러움’에 대한 묘사가 신정원
감독의 <차우>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이건 신감독의 전작 <시실리 2km>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난 아직
<시실리 2km>를 보지 못했다.) 다만 <차우>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마다 시도하지만 적절히 통제하는 어떤
코드의 유머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이 있다. <차우>를 보며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다 그 실소를 진심으로 즐기게 되는
것도, 그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 때문일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과속 스캔들(2008), “이 영화는 제목이 안티다.”




제목이 안티라능~
<과속스캔들>을 보며 내 눈을 잡아끌었던 부분이 있다. 차태현이 분한 남현수가 자신의 딸인 정남(황정남)과 함께 집안일을 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넓디넓고 먼지 한 톨 없는 데다 완벽하게 정리가 된 집안에서 현수가 스스로 아침밥을 해먹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요일별로 라벨이 붙어있는 락앤락에 식재료가 정리돼 있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정리된 냉장고에서 요일에 해당하는 락앤락 통을 꺼내 샐러드를 만들어 먹는다. 솔직히 그 장면을 보며 저 넓은 집을 어떻게 저렇게 관리하누, 부터 냉장고는 누가 정리해줬나, 했다. 그러다 라디오의 청취자 사연을 빌어 정남이 아버지한테 뭘 해줄까, 하는 장면에서 “밥 한 끼 해드리라” 조언할 땐 역시 한국남자구나, 했었다. 아침밥을 차려놓은 정남에게 툴툴대며 반찬투정을 할 때, 그리고 집안 청소를 하는 정남을 옆에 두고 소파에 누워 빈둥거리는 현수를 보면서는 “그럼 그렇지” 했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고 현수와 정남과 정남의 아들 기동이 다 함께 사는 게 익숙해지면서, 현수는 정남과 함께 아침밥을 차리고, 함께 집안 청소를 한다. 놀랐다. 정말로 놀랐다. 그러니까 현수는 특유의 깔끔한 성격으로 그 넓디넓은 집안을 이제껏 스스로 열심히 청소하고 관리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뭐 가끔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기도 했겠지만.) 그리고 22살이 되어 찾아온 딸과 그녀의 6살난 아들, 즉 현수의 손자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 그는 집안일을 딸에게만 미루는 것이 아니라 딸과 분담을 한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대형TV를 열심히 닦는 차태현의 모습처럼 멋진 모습이 없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 나오는 여자들이 모두 성숙한 반면 남자들은 현수의 친구 창훈(성지루)만 빼면 모두 무책임하고 어리석고 찌질하다는 데에 있다. 물론 36살 화려한 싱글생활에 갑자기 찾아온 딸과 무려 손자의 존재는 심하게 당황스러운 게 사실이다. 심지어 유전자 검사까지 강행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아빠되기라는 것도 부단한 노력과 학습의 결과인데, 이 집의 딸은 창훈의 적절한 지적대로 “길러주지도 않았는데 지들이 알아서 커서” 찾아왔다. 그러니 그의 아빠 노릇이, 할아버지 노릇이 영 신통치 않을 수 있다는 것도, 무조건 그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어하는 것도, 아빠 노릇이라는 걸 ‘비싼 옷 안겨서 신데렐라로 변신시켜주기’ 같은 자기과시용으로 착각하는 것도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그의 뺀질함은 역시나 심하다. 자기가 위기에 몰렸다고, 화가 난다고 정남에게 해대는 소리들도 너무 심했고, 그걸 “화나니까 그냥 해본 소리”로 슬쩍 넘어가려 드는 것도 참 뻔뻔하다. 정남과 다시 재회한 그녀의 첫사랑 상윤(임지규)은 어떠한가. 처음엔 왕자님처럼 나타났다. 어리버리해서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는 거야 귀엽다고 해줄 수 있고 정남 앞에서 쭈뼛거리고 수줍어하는 것도 그렇게 멋진 외모를 가진 사람치곤 꽤 순박한지라 호감도 팍팍 간다. 현수와 함께 있는 정남을 보고 오해한 것까지도 그럴 수 있다 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하는 그의 행동이 중요한 것 아닌가. 어쩜 그렇게 찌질한 남자의 전형적인 못난 짓은 다 골라가면서 할 수 있는지. 게다가 새롭게 밝혀지는 사실까지 더 하면, 아이고야, 찌질해도 이렇게 찌질할 수 있나, 못나도 이렇게 못날 수가 있나.


반면 박보영이 연기하는 정남/재인을 보라. 처음 그녀가 관객에게 어필하는 매력은 촌스러운 외모와 저돌적인 당돌함, 그리고 그 무표정하고 뚱한 얼굴에 있다. 다짜고짜 아버지 집에 자기 아들 손을 붙잡고 쳐들어간 거야 영화의 첫 ‘해프닝’을 만들기 위해 그런 거고, 이후 그녀가 현수에게 하는 말들을 가만 들어보면 틀린 말이 하나 없다. 그녀도 꽤 많은 고민 끝에 찾아갔고, 그녀가 내세운 뻔뻔함은 뻔뻔함 축에도 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22년간 보지 못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과 그로 인한 상처를 달래기 위한 자기방어 기제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가 자신을 딸로 인정해주기만을 바랐고, 그조차 젊디젊은 아버지에게 그리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이해한다. 그래도 자기 꿈을 향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결국 아버지 집을 나와서는 식당에서 먹고자고 일을 하는데, 그 바쁘고 힘든 점심시간 일크리에서도 그렇게 열심인 데다 친절할 수가 없다. 항상 방실방실 웃으며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총알처럼 튀어다닌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그녀가 차태현과 충돌하면서 만들어내는 유머와 개그가 거의 대부분 그 뚱하고 무표정한 얼굴과 말투에서 나왔다는 걸 상기해본다면, 식당에서 정남이 그렇게 웃으며 일하는 장면은 이 캐릭터의 건강함을 그대로 증명해주는 것이자, 보는 관객에겐 힘들어서 눈물짓는 장면보다 더 안쓰러움을 선사한다. 현수가 들이대는, 기동이가 다녔던 유치원의 원장님(황우슬혜)은 또 어떠한가. 현수가 알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기동이의 고민과 천부적인 피아노 재능을 발굴해준 게 바로 그녀다. 현수에게 먼저 저녁을 먹자고 제안하고, 현수가 할아버지란 게 다 밝혀지고 나서 그녀가 보여주는 반응도 걸작이다.

이 영화에서 세 사람의 유머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는 컷.

포스터와 소개글만 보면, <과속스캔들>은 황당한 설정으로 시작해 어이없는 억지 설정과 웃기지도 않는 엉터리 말장난으로 대충 뭉개면서 시간이나 끌다가 막판에 감동의 눈물 한 번 찍 주려고 작정한 영화처럼 보인다. 제목부터 그런 뉘앙스를 준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그렇지가 않다. 감독은 영화에 차용한 코믹한 요소들을 절대로 유통시한을 넘겨가면서까지 사용하지 않는다. 일회용은 일회용으로, 두 번 쓸 것은 두 번 쓸 것으로 깔끔하게 끝내버린다. 적어도 이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지루해 하품을 하는데 감독과 배우들만 웃기다고 우기는 코미디를 반복하는 일은 없다. 참 뻔한 설정으로 시작해 뻔한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데도, 그 과정들은 믿음직한 사건들과 디테일에 충분히 웃기는 유머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다. 연출의 리듬감도 아주 좋다. 씬마다, 씨퀀스마다 마무리가 아주 깔끔하고 다음 장면으로 부드럽게 넘어갈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가 적절한 타이밍에 제대로 리듬감을 탄다. 액션과 리액션의 감각이 상당히 좋다. 게다가 정남이가 얼굴에 마스카라 범벅이 된 채 무대에 있는 현수에게 올라가 통곡하는 장면이 주는 파워가 대단하다. 어찌 저 어린 배우가 저런 감정을 토해낼 수 있나, 참 놀랐다. ‘애를 잃어버리고 정신줄을 놔버린 엄마’의 모습을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내다니, 고백하자면 나도 이 장면에서 펑펑 울었다. 후반에 가서 ‘훈훈한 가족간 감동’이 강조되면서 살짝 늘어지는 감이 있지만, 영화가 내내 주었던 웃음과 재미에 비하면 그 정도 흠결이야.


“나도 몰랐는데 아빠가 돼 있었다네” 설정의 코미디의 거의 끝물에 나온 <과속스캔들>은, 이 부류의 영화 중 가장 웃기고, 재미있고, 감동적이다. 비록 장르영화로서 틀에 딱 맞춘 일정한 공식 때문에 다소 식상한 감은 있더라도, 어차피 우리가 장르영화를 보는 이유도 바로 그 이유 아닌가. 그 한도 내에서 이 영화는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오랜만에 차기작이 매우 기대되는 신인감독이 다시 나왔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