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희의 영화”, 그리고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옥희의 영화>는 제목에 ‘영화’라는 단어가 들어가서만이 아니라 정말 영화와 영화 만들기에 관한 이야기다. 물론 영화 일반론이 아니라 홍상수 감독 영화에 관한 영화다. 말하자면 홍상수 영화에 관해 홍상수 감독이 직접 써내려간 해설판 같은 작품이랄까. 홍상수 감독이 생각하는 삶의 반복성과 그것을 담는 영화라는 매체에 관한 유난히도 직접적인 설명서로 받아들여진다.

<옥희의 영화>는 4편의 에피소드로 –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지는 않지만 분명히 동일한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이므로 단편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한 듯 – 구성되었다. 주인공 중에 한 명인 진구(이선균)가 결혼을 하고 영화과 선생이 되어있는 가장 최근 시점의 <주문을 외울 날>이 가장 먼저 배치되었고 진구(이선균)와 옥희(정유미)가 학생 시절이었을 때의 이야기인 <키스왕>, <폭설 후>가 이어진다. 그리고 옥희가 자신이 사귀었던 두 남자와 – 송 선생(문성근)과 진구 – 2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장소에 갔던 기억을 영화로 만든 영화 속 영화가 마지막 <옥희의 영화>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에서 자주 비슷한 사건이나 만남이 반복됨을 통해 제시되곤 했던 ‘댓구의 미학’을 <옥희의 영화>에서는 영화를 만든 이의 목소리를 통해 그 제작 동기를 직접 들을 수가 있다. 물론 홍상수 영화 속 반복의 패턴은 이 보다 훨씬 다양하게 선보였던 바, 이것 하나 만으로 그 반복과 댓구의 미학에 관한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 <옥희의 영화>에 기승전결이란 없다. 그러나 영화를 만드는 이로서,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이로서의 자의식은 이전의 어느 작품보다 훨씬 더 풍부한 편이다. 첫번째 에피소드 <주문을 외울 날>은 <극장전>에서 동수(김상경)가 스스로에게 되뇌이던 어떤 주문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 주문이라도 외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는 어떤 날의 이야기다.

<주문을 외울 날>의 하이라이트는 진구가 예전에 자신이 만든 영화의 GV에 참석했다가 4년 전에 만나고 헤어진 여자에 관한 관객 질문을 받는 장면이다. 이런 장면이 홍상수 감독 영화에 언젠가는 나오리라 예상은 했지만 이번 <옥희의 영화>에서 보게될 줄은 생각을 못했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건 아니건 간에 이보다 민망한 순간이 또 어디 있을까. <옥희의 영화>가 그런 질문에 대한 진술서인 것은 아니지만 몇 년 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홍상수 감독에게 던져졌다는 뜬금 없는 질문의 영향권 아래에 놓여있다는 건 분명하다.

최근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갈수록 해학적이 되어간다는 느낌이었고 특히 최근작 <하하하>(2010) 에서는 조문경(김상경)의 꿈 속에 이순신 장군(김영호)이 등장해 선문답 같은 계시를 내려주는 장면이나 어머니(윤여정)에게 종아리를 맞고 조문경이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장면에서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 그렇게 좀 더 많은 관객들과 만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라고 – 생각했었는데 그로부터 고작 5개월 만에 나온 신작 <옥희의 영화>를 보니 그런 식의 단일한 경향성으로 홍상수 영화의 변화를 정의해보려 했던 일 자체가 어리석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렇게 변해가는 와중에 잠시 메타 영화를 한 편 만든 것인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여전히 변함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끊임없이 변화를 선택하고 있는 중이다.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그램 <어떤 방문>에서 홍상수 감독의 단편 <첩첩산중>을 보았는데 – 주요 출연진이 <옥희의 영화>와 동일해서 혹시나 어떤 연관성이 있지나 않을까 해서 – 내용 상으로는 완전히 다른 영화라는 것을 확인했다. <첩첩산중>의 인물들은 글 쓰는 사람들이고 <옥희의 영화>는 전부 영화를 만들거나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문성근이 연기한 인물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다르다.

<첩첩산중>에서 상옥(문성근)은 거의 위악적인 묘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뻔뻔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그려지는 반면 <옥희의 영화>에서의 송 선생은 그의 진심이나 인물 전체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긴 하지만’ 적어도 옥희와의 약속을 지킨 작은 행동 하나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비춰진 송 선생의 일면은 첫번째 에피소드인 <주문을 외울 날>에서 몹시 의심쩍인 인물로 그려졌던 그의 모습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게 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가 만든 영화나 누군가에게서 들은 뒷말만 갖고 섣불리 판단해버리는 건 역시 삼가하는 편이 현명하다.

영진공 신어지

 

“차우”(2009), 즐길 수 있는 사람만 즐겨라!

아마도 근간 가장 ‘괴작’을 뽑으라면 작년 하반기에 개봉한 <모던 보이>와 함께 <차우>가 꼽히지
않을까 싶다. <모던 보이>가 괴작인 건 너무 훌륭한 면과 너무 후진 면이 어이없이 섞여서인데, <차우>의
경우는 좀더 ‘괴작’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 즉, 괴상한 영화라는 뜻이다. 언론시사로 처음 <차우>를 봤을 때 워낙
당황했는데, 후반으로 가면서 나름 이 영화의 유머를 꽤 즐기게 됐다. 시사 나와서는 모 평론가님과 인사를 하다가 “영화 보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나는 대체로 이 영화의 지지자 쪽에 가깝다. 사실 <차우>는 개봉 직전까지도
<괴물> 이후 가능성이 보였으나 그만큼 위험도 여전히 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대괴수가 출현하는 재난영화’로,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서 포장돼왔다. 그런 만큼 관객의 입장에선 <괴물>의 완성도에 필적하진 못하더라도 그 2/3
정도는 되기를 기대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확인한 <차우>는 완전히 다른 영화다.

뒤늦게야 공개된, '제대로 된' 포스터

대체로 괴수물이란 언제나 우리 세상 너머에 우리 힘으로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괴수의 존재, 우리가 평소 상상은
할지언정 현실에 존재한다 인정하려 하지 않는 존재가 봉인을 뚫고 나와 현실 세계를 위협할 때의 충격과 공포를 다루기 마련이다.
그 괴수를 상대로 싸우는 자가 고독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미지와 미래와의 대면을 은유를 읽어내고 격려를 받기도
하고, 괴수의 등장으로 인해 벌어지는 우리 세계의 파괴를 쾌감의 코드로 목격하게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쾌감을 두 가지
층위로 즐길 수 있다. 우리 세계가 파괴를 당하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며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마조히즘적 쾌감, 혹은 괴수에게
은밀한 감정이입을 느끼면서 얻는 사디즘적 쾌감. 그리고 그 사이, 순수하게 거대하고 육중한 생명체가 우리 세계를 때려부술 때에
오는 ‘타격감’. 그러므로 괴수물의 당연한 공식에서 시선의 방향이란 안에서 밖을 향하는 것이 된다.

<차우>가 그런 괴수물이 아닌 것은, 이 영화의 시선은 오히려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차우>는
외부에서 거대한 충격과 습격이 가해졌을 때 그 시선을 괴물이 있는 저 너머 바깥 어디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의
내부로 돌린다. 거대한 공포 앞에서 그 공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양상들을 양식화시켜 보여주고, 여기에 약간의 과장과
비틀기를 덧붙임으로써 오히려 코미디에 열중한다. 그 ‘외부의 충격’이 <차우>의 경우 식인 멧돼지의 습격인 것이지만,
이쯤 되면 사실 ‘차우’가 얼마나 이상한 변종이고 세고 크고 무섭고 포악한지 기타 등등은 별로 중요치 않게 된다. 사실 멧돼지가
아니라 운석을 타고 떨어진 외계의 괴생명체라 한들 이 영화가 그리 많이 바뀌었을 것 같진 않다. 멧돼지는 앞에 딱 한 번 나오고
그 뒤로 계속 안 나와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에일리언>을 모범적으로 베껴서 앞에 계속 나올 듯 말 듯
그림자로만 비추다가 맨 마지막에만 한 번 제대로 나오던가.

어쨌든 뭔가 무시무시한 놈이 잊을 만하면 마을사람을 호시탐탐 노리며 패닉을 가져온다. 절박함은 강도가 심할수록
우스꽝스러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절박한 놈만 절박하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또 멧돼지가 공격을 해오거나 말거나, 마치
그 순간이 지나면 기억상실 약이라도 단체로 먹는 듯 허허실실 천하태평이다. 자기만 안 당하면 된다 이거다. 그러므로 대체로의
괴수물이 절박함에 방점을 찍고 그로 인한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괴수가 화면에 전면 등장하면서 다 때려부술 때의 타격감을
강조한다면, 이 영화는 우스꽝스러움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움은 멧돼지를 잡겠다며 차우와 대면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들의 비장함을 (자기가 당하지 않았다고) 별 거 아닌 것 취급하며 태평한 마을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에서도 튀어나온다.
멧돼지가 습격하거나 말거나 검은 옷을 입고 마을을 활개치는 소위 ‘꽃 꽂은 분’이나 도시인들에게 장사를 해먹는 마을농장 관계자가
대표적인 예다. 특히나 꽃 꽂은 분은 애초에 맷돼지의 위험성과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핏 드러나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히려, 내 맘대로 장르명을 작명한다면, ‘괴수물’보다는 오히려 ‘농촌소동극’ 정도가 될 듯하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신정원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크고 무서운 맷돼지’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 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간다. 이
영화의 스타일대로라면, 차우가 화면에 제대로 나오는 장면은 수가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차우

겉보기는 이렇게 멀쩡하고 폼나는데… 사실은 허당이다. 죄다.

농촌소동극으로서, 코미디로서 <차우>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신정원 감독의 유머감각이 소위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굉장히 웃기고 유쾌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도 무지 웃었다. 멧돼지와
싸우겠다고 나선 인물들은 하나하나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덜떨어진 면이 있고 이들이 빚어내는 에피소드도 상황도 참 어이없이
웃기거나 배꼽빠지게 웃기는 부분이 많다. 멀쩡하게 생긴 형사가 사람들이 안 볼 때면 음료수고 담배고 몰래 챙기고 밤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잘 때조차 선글라스를 벗지 않으려 든다거나. 최고의 포수라는 이가 잘난 척 양키 포수들을 대동했지만 그들의 말을 실제론
알아듣지 못하고 선머슴같은 여자에게 가슴을 두근대며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거나. 나름 비장한 얼굴로 생의 고난과 무거운 짐을
감당하듯 보이던 서울내기 순경이 실제로 집안에서 벌어진 난장판에 신경질로 반응한다거나. 맷돼지에 대해 학구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무대포로 수색대를 따라나선 대학원생이 느닷없이 카메라를 꺼내들며 수색대에 ‘연출’을 하려들고 이들 수색대 역시 이에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쳐준다거나. 마을이 처한 대위기에 맞서 그 누구 하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위대한 영웅이나 지도자의 아우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다들 폼은 그럴싸하나 알고보면 모조리 허당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편이, 실제 현실과 더 가까울
것이다. 그토록 위대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란 영화 속 세상뿐일 테니. 게다가 씨네21에서 남다은 평론가가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차우의 수색에 나서는 건 죄 외지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작 뒷짐지고 가만히 있는데 이들 외지인들이 차우를
잡겠다며 나서서 벌이는 소동들이,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든다.

문제는 예산이다. 식인 멧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에서의 공포와 고난과 분투를 그리는 영화로 선전되며 그 정도의 CG와 예산이
들어간 영화라는 건, 마치 연인이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길래 스테이크를 먹게 될 줄 알고 기대했더니 맛은 꽤 별미이나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는 좀 비싼 떡볶이가 나온 형국이라 해야 할까.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새 창으로 열기)
<차우>는 순제작비만 70억에 이른다. P&A 비용까지 합치면 총제작비는 100억원에 육박한다. 너무 비싼
떡볶이가 아닌가. (물론 나는 떡볶이를 무지 좋아하긴 한다.) 난 차라리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처럼
예산을 적게 들이되 멧돼지의 모습을 그림자나 정황으로만 제시하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차우> 식의 코드라면 멧돼지가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의도적으로 조잡하거나 했어도 재미있었을 텐데, 이 영화의
유머가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블록버스터 만들려다 안 될 게 너무 뻔해지니까 중간에 차라리 망치려면 제대로
망치자며 막 가는’ 코미디로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엄태웅의 엉덩이가 노출되는 게 무슨 찐한 멜러 영화도 아닌
<차우>라는 게 우습기도, 재밌기도 하지만.

 

차우

큰 웃음 주신 신형사 역의 박혁권.

<차우>를 보는데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계속 생각났다. 처음 멧돼지의 흔적이
발견되는 곳, 묘지 위 언덕에서 경관들이 차례로 관 앞으로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자. <살인의 추억>에서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롱테이크 씬 역시,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풀숏으로 먼 거리에서 찍으면서 롱테이크로 가는데 둑방
위에서 누군가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두 영화의 그 장면들 모두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시골 마을이라는 게 단번에 보이는 씬으로, <차우>에서의 그 씬을 단순한 개그씬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 역시 외부에서 가해지는 거대한 충격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되,
절박함 이면의 우스꽝스러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 봉준호 식 낯선 유머 코드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모두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이 능란하게 교차된다. 그렇기에
<차우>의 오히려 안으로 향하는 시선과 묘하게 상통하믄 부분이 있다. 이후 <마더>에서도 드러나듯 너무나
생생한, 한편으로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오히려 실은 판타지의 공간이라 여겨지는  ‘한국적인 시골스러움’에 대한 묘사가 신정원
감독의 <차우>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이건 신감독의 전작 <시실리 2km>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난 아직
<시실리 2km>를 보지 못했다.) 다만 <차우>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마다 시도하지만 적절히 통제하는 어떤
코드의 유머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이 있다. <차우>를 보며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다 그 실소를 진심으로 즐기게 되는
것도, 그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 때문일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차우 … 와우!!!

영화 <차우>는 CG의 세밀성이나 연출의 디테일 같은 것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은 영화다.

영화 속의 멧돼지는 상당히 어설프다.
나 CG야! 혹은 나 애니매트론이야! 라고 거의 뻔뻔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멧돼지가 사람들에게 들이닥칠때 충분한 짜릿함이 몰려온다.

왜냐면, 그 멧돼지에게 깔려죽을 위기에 처한 인간들
그 인간 캐릭터들이 정말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생생하니까 그 인간에게 달려드는 멧돼지도 생생해지는 묘기가 벌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냐고?
아주 단순하고도 기초적인 기법을 썼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캐릭터의 실재감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는 딱 하나.
뜬금없음. 혹은 기괴함 이다.
나도 예전에 이에 관해 쓴 적이 있다.
실재감은 뜻밖의 어떤 것을 통해 발현된다는…
http://kr.blog.yahoo.com/psy_jjanga/468859

이 영화는 거의 순수하게 바로 그 기법만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뜬금없고 괴상한 측면을 각각의 캐릭터에게 하나씩 부여하는 것 만으로 그 각각의 캐릭터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다.

* 이 지점부터 스포일러 비스무리한게 출몰합니다.  주의 요망! *

여기 나오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괴상하다.
이장에서부터 말단 순경까지, 심지어 천포수 할배까지 …
도무지 제대로 멀쩡한 인간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게 전혀 얼토당토않은 것이 아니라 다 그만한 개연성이 있다.

형사라고 손버릇 나쁘지 말란 법 있나?
행사가서 거기 나온 음료수나 과자 몇개 꼬불치기 …
나도 가끔 하는 짓이라 좀 뜨끔하더라.

은근히 꼰대스럽고 거만한,
근데 내실은 하나 없는 말단 순경도 그렇다.
정말 어디서 진짜 만났던 놈 같더라.

동네 광녀도 마찬가지.
시골 마을엔 종종 그런 사람들 있다.
예전 농촌봉사활동가서 스쳐간 동네바보가 생각나더라.
보통 동네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그냥 당연한 존재로 대한다.
사람취급을 안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다고 피하거나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주말 가족농장의 첫번째 희생자.
짧은 등장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예사롭지 않은 사연과 행태로
깊은 인상을 남기고 멧돼지에게 물려가신다.

여기 나오는 인간들이 죄다 그렇다.
각자의 독특한 결함을 가진 평범한 인간들…
그 결함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 캐릭터들이다.
따지고 보면 이 영화 전체가 그렇다.
결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 결함들이 무지하게 독특하기 때문에
영화는 참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영화는 또한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묘사를 뜬금없이 툭툭 던진다.
개가 (핀란드)말을 하고, 순경의 소망 혹은 악몽이 현실과 뒤섞인다.
그러나 이것들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
이들은 모두 제정신으로 살기 힘든 세상을 간신히 살아가는 결함있는 인간들이거든.
따지고 보면 우리들도 그렇지 않던가….

이 영화,
한마디로 말해서 온갖 빈틈이 널려있다.
그러나 중요한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캐릭터의 생동감이 그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핵심이다.
핵심만 놓치지 않으면 관객은 그 상황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거기다 감독의 개성이 철철넘친다.
신정원 감독은 봉준호 70%에 홍상수 30% 정도를 섞어놓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영화를 보는 종종 웃음이 터지는데, 그게 진땀을 동반하는 웃음이다.
이게 웃을 일인가? 근데 웃기긴 한데… 뭐 이런 느낌.

<미쓰 홍당무>를 볼때 그렇게 진땀을 흘리며 웃었고 미국영화에서는 <미트페어런츠>가 그런 면이 있었다. 이 영화도 조금 다른 각도에서 그런 느낌을 준다.

여튼 참으로 특이하고 재미있는 영화였다.
물론 보고 황당하거나 불쾌하거나 혹은 실망할 관객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인간은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분들은 불쾌할 것이고,
합리적인 추론이나 전개 등을 기대한다면 황당할 것이고,
생생한 멧돼지 괴수 CG를 기대했다면 참 실망하겠다.

하지만 박장대소하며 좋아할 관객들도 분명히 많겠다.

바로 나처럼…

영진공 짱가

이제는 홍상수스럽지 않은 영화를 보고싶다.

홍상수의 영화에 100% 동의하진 않지만,  전부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난 주인공의 모습에서 저게 ‘인간 홍상수의 생(生)모습은 아닐까’ 하는 상상을 안고 그의 영화에 푹 빠지곤 한다.


그래서 나는 홍상수의 영화를 보면 항상 ‘홍상수’ 가 떠오른다.

다시 얘기하면 극의 주인공이 바로 홍상수의 실제 모습일 거라는 내 멋대로의 예감을 통해 영화를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이다.  


기억 하나.

올해 초 <밤과 낮>의 씨네토크 시간에 어느 관객이 과감히 질문했다.

이 모든 게 당신 이야기가 아닙니까?


홍상수는 ‘내 모습이 은연중에 표현될 순 있겠지만 주변 인물들을 관찰한 결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대답했고,

그 관객은 ‘그렇다’라는 대답을 기필코 듣고 말겠다는 태도로 재차 대답을 요구했다.


이 상황은 진행을 맡은 평론가가 홍감독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다음 질문을 받는 것으로 정리됐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이런 관객의 의심스런 눈초리에 정면으로 응수한다. 그리고 마치 관객의 그렇고 그런 시선 따윈 조롱하듯 의미심장한 장면과 대사들을 풀어 넣었다.  


이를테면, 

제주도에서 그(구경남)의 강의를 들으러 온 한 학생이 이렇게 묻는다.

왜 이런 영화를 만드세요? 왜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는 영화를 계속 만드시는 거에요?


구경남을 집으로 불러들여 한낮의 정사로 외도를 범한 고순(고현정)은 또 이렇게 말한다.

근데 왜 그렇게 자꾸 본인 얘기를 영화에 넣어요? 내 얘긴 하지 말아요. 아,, 난 싫어 진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시작으로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등 홍상수는 그의 필모가 추가될 때마다 지식인의 느글거리는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수작이라는 호평과 여자와 모텔에 가기 위해 안달 난 구질남의 뻔한 이야기라는 혹평이 엇갈렸다.


그리고 꼬리표처럼 ‘혹시 네 얘기 아니냐’는 눈총들에게 ‘아닙니다 아닙니다 ’하던 홍상수는 이번 작품을 통해 비로소 ‘의심하라지 쳇’ 하며 태연한 듯 스무스한 태도로 회전했다.


[이미지 출처: 씨네21]


그는 조금 더 유머러스해졌고 조금 더 가뿐해진 채 ‘잰체하지 않는 구질남이 어쩌면 바로 나일지도 모른다‘ 묘한 뉘앙스를 풍기며 관객들에게 장난 걸듯 ‘매번 발견하고 감상하는 것의 결과물’을 완성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음악이 멈춘 한참 후에야 흐르는 보너스 트랙처럼 비밀의 숨은 노래를 몰래 듣는 기분의 영화다. 그건 순전히 제천과 제주도를 오가는 영화감독 구경남 덕분이다. 그가 자리하는 숱한 술자리와 감독, 프로그래머, 배우들의 강약의 연결고리가 너무 진짜 같아서 그렇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더 이상 홍상수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지 않는다.

홍상수의 영화에 출연한 김태우, 정유미, 공형진, 고현정, 하정우 같은 최고의 배우들이 주어진 역할에 충분히 젖지 않은 탓도 있다.


대 배우들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캐릭터는 살아있지만 배우들의 아우라를 덮진 못했다는 느낌에 목이 마르다. 다른 누가 했더라도지금 이 배우들만큼은 해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영화 속 주인공이 진짜 홍상수라고 한들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영화감독 구경남이 너무 많은 걸 보여줬기 때문이고 지나치게 솔직했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 작품이 나온다면 여지없이 쏜살같은 걸음으로 극장을 찾을테지만,

나는 홍상수의 홍상수스럽지 않은 영화를 보고싶다.


이제는 좀 ‘가짜’같은 영화말이다 …

영진공 애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