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 … 와우!!!

영화 <차우>는 CG의 세밀성이나 연출의 디테일 같은 것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은 영화다.

영화 속의 멧돼지는 상당히 어설프다.
나 CG야! 혹은 나 애니매트론이야! 라고 거의 뻔뻔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멧돼지가 사람들에게 들이닥칠때 충분한 짜릿함이 몰려온다.

왜냐면, 그 멧돼지에게 깔려죽을 위기에 처한 인간들
그 인간 캐릭터들이 정말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생생하니까 그 인간에게 달려드는 멧돼지도 생생해지는 묘기가 벌어지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재주를 부렸냐고?
아주 단순하고도 기초적인 기법을 썼을 뿐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캐릭터의 실재감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한 도구는 딱 하나.
뜬금없음. 혹은 기괴함 이다.
나도 예전에 이에 관해 쓴 적이 있다.
실재감은 뜻밖의 어떤 것을 통해 발현된다는…
http://kr.blog.yahoo.com/psy_jjanga/468859

이 영화는 거의 순수하게 바로 그 기법만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 쯤은 가지고 있는 뜬금없고 괴상한 측면을 각각의 캐릭터에게 하나씩 부여하는 것 만으로 그 각각의 캐릭터에게 생명력을 부여하는데 성공했다.

* 이 지점부터 스포일러 비스무리한게 출몰합니다.  주의 요망! *

여기 나오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괴상하다.
이장에서부터 말단 순경까지, 심지어 천포수 할배까지 …
도무지 제대로 멀쩡한 인간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게 전혀 얼토당토않은 것이 아니라 다 그만한 개연성이 있다.

형사라고 손버릇 나쁘지 말란 법 있나?
행사가서 거기 나온 음료수나 과자 몇개 꼬불치기 …
나도 가끔 하는 짓이라 좀 뜨끔하더라.

은근히 꼰대스럽고 거만한,
근데 내실은 하나 없는 말단 순경도 그렇다.
정말 어디서 진짜 만났던 놈 같더라.

동네 광녀도 마찬가지.
시골 마을엔 종종 그런 사람들 있다.
예전 농촌봉사활동가서 스쳐간 동네바보가 생각나더라.
보통 동네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그냥 당연한 존재로 대한다.
사람취급을 안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다고 피하거나 심각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주말 가족농장의 첫번째 희생자.
짧은 등장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예사롭지 않은 사연과 행태로
깊은 인상을 남기고 멧돼지에게 물려가신다.

여기 나오는 인간들이 죄다 그렇다.
각자의 독특한 결함을 가진 평범한 인간들…
그 결함을 통해 생명력을 얻는 캐릭터들이다.
따지고 보면 이 영화 전체가 그렇다.
결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 결함들이 무지하게 독특하기 때문에
영화는 참으로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영화는 또한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묘사를 뜬금없이 툭툭 던진다.
개가 (핀란드)말을 하고, 순경의 소망 혹은 악몽이 현실과 뒤섞인다.
그러나 이것들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
이들은 모두 제정신으로 살기 힘든 세상을 간신히 살아가는 결함있는 인간들이거든.
따지고 보면 우리들도 그렇지 않던가….

이 영화,
한마디로 말해서 온갖 빈틈이 널려있다.
그러나 중요한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캐릭터의 생동감이 그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핵심이다.
핵심만 놓치지 않으면 관객은 그 상황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거기다 감독의 개성이 철철넘친다.
신정원 감독은 봉준호 70%에 홍상수 30% 정도를 섞어놓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영화를 보는 종종 웃음이 터지는데, 그게 진땀을 동반하는 웃음이다.
이게 웃을 일인가? 근데 웃기긴 한데… 뭐 이런 느낌.

<미쓰 홍당무>를 볼때 그렇게 진땀을 흘리며 웃었고 미국영화에서는 <미트페어런츠>가 그런 면이 있었다. 이 영화도 조금 다른 각도에서 그런 느낌을 준다.

여튼 참으로 특이하고 재미있는 영화였다.
물론 보고 황당하거나 불쾌하거나 혹은 실망할 관객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인간은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분들은 불쾌할 것이고,
합리적인 추론이나 전개 등을 기대한다면 황당할 것이고,
생생한 멧돼지 괴수 CG를 기대했다면 참 실망하겠다.

하지만 박장대소하며 좋아할 관객들도 분명히 많겠다.

바로 나처럼…

영진공 짱가

“미쓰 홍당무”는 인간소외에 관한 고찰이다.



    


1. 미쓰 … 홍당무???

어린이 전집류나 학교 도서실에서 책 좀 빌려 본 사람은 아마 읽어봤을 것이다. 쥘 르나르(Jules Renard)의 홍당무. 신경질적인 엄마와 가부장적인 아버지, 약자를 괴롭히는 못된 심성으로 막내를 대하는 형제자매들 사이의 막내. 그가 홍당무다. 미스 홍당무의 홍당무는 그 홍당무겠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금부터 스포일러가 무지하니 출물하니 요주의!!!!!

2. 캐릭터 뒤비기

양미숙씨
집이 없어 고시원도 아닌 심지어 교무실에서 몰래 살고 있다. 학교에 귀신이 산다는 소문이 있다면 아마 양미숙 선생일터. 양미숙의 팍팍한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러시아어가 인기가 없어져 중학교 영어선생으로 내려간 양미숙선생. 영어선생이 영어학원 다닌다고 엄청 욕을 먹는다.  나는 영문과 출신이고, 고로 학교 영어선생하는 친구들이 쫌 있다. 얘네 요새 다 엄청 스트레스 받는다. 시험문제 하나 내는데도 오류 있을까봐 바들바들 떨린다고 한다.  근데 양미숙은 오죽할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짜증나고 괴로울 땐 닭발이 쵝오 >.<

완전히 쫒겨난 노동자는 아니지만, 원치않는 비숙련 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로써의 삶과, 자본 제로의 상황에 눈이 많이 간다. 그런데 심지어 생긴 것도 별루다. 자본도 없고 생긴 것도 없는 이에게 호감을 갖는 이는 없다. 양미숙의 원피스 패션을 보라. 과연 소외당한 자 답고, 소외 당할만한 자 답다. ‘고아’라는 거짓말. 소외를 많이 겪는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호감을 얻기 위해 잘 하는 거짓말이다. (양미숙의 현실로 봐서 실제 고아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고아에 가까운 듯 하다) 아무도 호감을 주는 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10년 전 담임선생님이었던 서선생의 호의를 호감으로 받아들인다. 그녀의 삶이 너무도 바쁘고, 그녀는 하루종일 너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도 참 가슴 짠하다. 상징적으로 자기 노력이 삽질인지 아닌지 알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왜?’ 그런 노력을 하는 지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양미숙은 ‘참 살기 팍팍한 세상에서 되도 않는 노력을 왜인지도 모르고 하는 우리’모습이다.

이유리양

이유리도 양미숙만큼 짠하다. 모순덩어리 이유리선생을 나는 이해한다. 사람에 따라 시차는 있겠지만 대한민국여성에게 20대 초반은 성과 사랑, 연애에 대해서 참 아무것도 모르고, 그 스스로도 모순에 둘러싸여있다. 나는 이유리선생을 내숭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변태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스스로 성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욕이라 인정하지 못하고, 섹스를 해보고 싶지만 섹스를 할 수는 없는거라고 생각하는 20대 초반 여느 여성들의 모습과 꼭 닮아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쒸~

검정T팬티를 입고 성적 공상에 골몰해 있지만 ‘어머! 저는 결혼전 까지 참지 못하는 남자와는 끝낼거에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내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메신저로 변태적인 메세지를 받았을 때 이유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너무 튕겨서 남자와 헤어지는 걸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순진한 그녀는 그런 고민 때문에 카마수트라에 줄쳐가면서 신음소리를 연습한 것일테고, 그런 고민 때문에 ‘자쥐 깔꽈?’ 퍼포먼스까지 해 버린 것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남자의 마음을 잡는 지 모르는 무지상태. 무슨 짓이라도 불사하려는 그녀의 삽질또한 참 공감이 간다. 예쁜 그녀에게도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은 것.
Another version of 왕따. (그녀의 결론은 꽤 괜찮아서 다행. 앞으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르지만)

종희
소설 ‘홍당무’를 생각해 보면, 종희야 말로 진짜 홍당무. 부모는 둘다 서종희를 사랑하긴한다.  일상에 찌든, 너무 일찍 결혼한 삼십대 중반의 가장 서종철은 즐기지 못한 20대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 인터넷 방송에 힘쓰고, 멀끔한 외모를 밑천 삼아 젊은 여선생과 히히덕거리고 있고, 너무 어린 남편을 둔 성은교는 몸매를 가꾸며 (커리어에 몰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쪽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전교 왕따지만, 엄마아빠는 그런 고민은 전혀 모른 채 자기들의 고민에만 빠져있다. 그 사이에서 참 엉뚱한 방향으로 영악해 지는 아가씨.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옥메와까!!!!!

서은교님
다른 사람보다 분량이 적긴 하지만. 참… 뭐 말할필요없이 공감 많이 가는 캐릭터다. 어학실에서 차분하게 판사인 듯 대단한 침착성과 노련함을 보이더니 어학실을 나와 남편과 함께 걸어가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서종철군
그닥 나쁜 놈도 아니고, 전체적인 사실관계를 영화가 보여주는대로만 봤을 때는, 이쁘장한 나이어린 여후배와 몇번 데이트 하며 시시덕거렸는데, 걔가 너무 순진해서 목숨걸고 나오니까 좀 당황하고. 선생으로써 기본이 된 놈이라 왕따 당하는 양미숙을 좀 챙겨준 것 뿐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이상하게 짝사랑과 스토킹의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딸과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마는. 이 놈도 인생의 무게 무거울 그런 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실뜨기라능 ...

그려서 캐릭터 뒤비기의 결론은, 다 이상한 캐릭터들인데 … 거기에 다 내 모습이 있고, 공감이 간다는 얘기다.

3. 이 영화 법정물이었던 거냐???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일까. 어학실 장면이 꼭 법정장면 같아서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가를 생각해봤다.

가만보면 서종철(가해자) vs. 이유리, 성은교, 서종희(피해자) 양미숙(가해자) vs. 서종철(피해자) 이런 구도로 보인다.  서종철은 이유리에겐 ‘심심풀이 데이트상대’라는 상처를, 성은교와 서종희에게는 ‘가장의 부정’이라는 가해를 했으나 실상 양미숙에게는 ‘왕따학생에 대한 수학여행에서의 배려’, ‘한때 제자였던 동료에 대한 친절(교무회의시간에 졸지말라는)’, 혹은 사회가 금지하는 ‘왕따에게 친절 베풀기’라는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다.

영화 보면서 ‘다 저 놈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곱씹어 생각할 수록 서종철이라는 놈이 참… 나쁜 놈의 범주를 은근슬쩍 잘 비켜간다. (얄미운 놈) 그래서 저 위에서 말한 가해자 피해자 구도도 사실은 모호하다. 다들 상처를 받았는데 막상 왜 상처를 받았는지, 왜 상처를 줬는지는 모르는 상태다.

4. 이 영화는 비극이다???

그리스비극(오이디푸스, 아가멤논 같은거)과 셰익스피어비극은 비극의 원인이 본인의 캐릭터에게 있다(Personality is destiny).

그리고 현실주의, 자연주의 연극으로 오면 개인에게 비극의 원인이 있지 않고 사회에 비극의 원인이 있다. (Riders to the Sea같은 작품)

그러다가 40년대 중반으로 와서 Arther Miller나 Tenesse Williams의 ‘세일즈맨의 죽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유리동물원’ 같은 작품을 보면 경제공황같은 사회적 원인과 캐릭터 본인이 가진 성격적 결함이 복합적으로 비극의 원인이 된다.

미스홍당무는 그런 점에서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과 비슷한 점이 있다. 양미숙, 이유리, 서종희의 비극에는 인간소외라는 사회적 측면 이외에 ‘모자란 개인’이라는 원인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과 다른 점이 있다.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은 ‘가족의 붕괴’로 끝나고, 그것이 비극 그 자체라는 것. 그러나 미스홍당무의 비극은 ‘붕괴된 가족’위에서 시작되고, 그것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5. 결론

그리하여 이 영화는 왕따들에 대한 각각의 고찰을 통해 인간의 소외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사람이 비 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거에요.  설마.  그 사람도 사람인데 …”

양미숙의 말에 공감과 조소를 동시에 날리며 집에 돌아오니 … 묻지마 범죄, 고시원 방화사건 뉴스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 미숙아 … 힘들더라도 꿋꿋이 살아보자꾸나 …

끗.


영진공® 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