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와 삼성증권, 니들이 사람이냐?

 

동아일보 2008년 10월 23일자 인터넷판 경제면 “주가 바닥 알리는 조짐 곳곳서 등장 “이라는 제목의 기사이다.

“삼성증권은 23일 발표한 증시분석 보고서에서 “경험과 직관에 비춰보면 주가가 바닥에 다가서는 정황적 증거가 속속 나타나고 있다”고 밝혔다.”

(중략)

“애널리스트들이 하루아침에 적정주가를 50% 이상 하향 조정한 리포트를 발표하는 등 공격적인 하향 조정 행태를 보이고 “빅 사이클이 끝났다”는 등의 뒷북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데 이는 증시 하락 사이클의 막판에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증권사 영업직원과 투자자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 점도 하락장의 끝을 알리는 징후로 제시됐다.

오 파트장은 금융기관 부도 리스크, 유동성 고갈과 신용축소, 실물위기 전염과 리세션 등에 대한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의 대책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폭락장세가 멈추지 않는 것은 공포심리가 팽배했기 때문이라며 증시의 바닥은 내년 1분기에 형성될 것으로 전망했다.”

<전문은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10230355&top20=1 >


이게 소위 정론지라는 동아일보와 세계 일류라는 삼성의 의식구조냐?

사람이 죽으니까 증시 하락이 끝난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니들도 인간이냐?


영진공 이규훈

“미쓰 홍당무”는 인간소외에 관한 고찰이다.



    


1. 미쓰 … 홍당무???

어린이 전집류나 학교 도서실에서 책 좀 빌려 본 사람은 아마 읽어봤을 것이다. 쥘 르나르(Jules Renard)의 홍당무. 신경질적인 엄마와 가부장적인 아버지, 약자를 괴롭히는 못된 심성으로 막내를 대하는 형제자매들 사이의 막내. 그가 홍당무다. 미스 홍당무의 홍당무는 그 홍당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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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스포일러가 무지하니 출물하니 요주의!!!!!

2. 캐릭터 뒤비기

양미숙씨
집이 없어 고시원도 아닌 심지어 교무실에서 몰래 살고 있다. 학교에 귀신이 산다는 소문이 있다면 아마 양미숙 선생일터. 양미숙의 팍팍한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러시아어가 인기가 없어져 중학교 영어선생으로 내려간 양미숙선생. 영어선생이 영어학원 다닌다고 엄청 욕을 먹는다.  나는 영문과 출신이고, 고로 학교 영어선생하는 친구들이 쫌 있다. 얘네 요새 다 엄청 스트레스 받는다. 시험문제 하나 내는데도 오류 있을까봐 바들바들 떨린다고 한다.  근데 양미숙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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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나고 괴로울 땐 닭발이 쵝오 >.<

완전히 쫒겨난 노동자는 아니지만, 원치않는 비숙련 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로써의 삶과, 자본 제로의 상황에 눈이 많이 간다. 그런데 심지어 생긴 것도 별루다. 자본도 없고 생긴 것도 없는 이에게 호감을 갖는 이는 없다. 양미숙의 원피스 패션을 보라. 과연 소외당한 자 답고, 소외 당할만한 자 답다. ‘고아’라는 거짓말. 소외를 많이 겪는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호감을 얻기 위해 잘 하는 거짓말이다. (양미숙의 현실로 봐서 실제 고아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고아에 가까운 듯 하다) 아무도 호감을 주는 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10년 전 담임선생님이었던 서선생의 호의를 호감으로 받아들인다. 그녀의 삶이 너무도 바쁘고, 그녀는 하루종일 너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도 참 가슴 짠하다. 상징적으로 자기 노력이 삽질인지 아닌지 알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왜?’ 그런 노력을 하는 지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양미숙은 ‘참 살기 팍팍한 세상에서 되도 않는 노력을 왜인지도 모르고 하는 우리’모습이다.

이유리양

이유리도 양미숙만큼 짠하다. 모순덩어리 이유리선생을 나는 이해한다. 사람에 따라 시차는 있겠지만 대한민국여성에게 20대 초반은 성과 사랑, 연애에 대해서 참 아무것도 모르고, 그 스스로도 모순에 둘러싸여있다. 나는 이유리선생을 내숭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변태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스스로 성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욕이라 인정하지 못하고, 섹스를 해보고 싶지만 섹스를 할 수는 없는거라고 생각하는 20대 초반 여느 여성들의 모습과 꼭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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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쒸~

검정T팬티를 입고 성적 공상에 골몰해 있지만 ‘어머! 저는 결혼전 까지 참지 못하는 남자와는 끝낼거에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내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메신저로 변태적인 메세지를 받았을 때 이유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너무 튕겨서 남자와 헤어지는 걸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순진한 그녀는 그런 고민 때문에 카마수트라에 줄쳐가면서 신음소리를 연습한 것일테고, 그런 고민 때문에 ‘자쥐 깔꽈?’ 퍼포먼스까지 해 버린 것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남자의 마음을 잡는 지 모르는 무지상태. 무슨 짓이라도 불사하려는 그녀의 삽질또한 참 공감이 간다. 예쁜 그녀에게도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은 것.
Another version of 왕따. (그녀의 결론은 꽤 괜찮아서 다행. 앞으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르지만)

종희
소설 ‘홍당무’를 생각해 보면, 종희야 말로 진짜 홍당무. 부모는 둘다 서종희를 사랑하긴한다.  일상에 찌든, 너무 일찍 결혼한 삼십대 중반의 가장 서종철은 즐기지 못한 20대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 인터넷 방송에 힘쓰고, 멀끔한 외모를 밑천 삼아 젊은 여선생과 히히덕거리고 있고, 너무 어린 남편을 둔 성은교는 몸매를 가꾸며 (커리어에 몰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쪽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전교 왕따지만, 엄마아빠는 그런 고민은 전혀 모른 채 자기들의 고민에만 빠져있다. 그 사이에서 참 엉뚱한 방향으로 영악해 지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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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메와까!!!!!

서은교님
다른 사람보다 분량이 적긴 하지만. 참… 뭐 말할필요없이 공감 많이 가는 캐릭터다. 어학실에서 차분하게 판사인 듯 대단한 침착성과 노련함을 보이더니 어학실을 나와 남편과 함께 걸어가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서종철군
그닥 나쁜 놈도 아니고, 전체적인 사실관계를 영화가 보여주는대로만 봤을 때는, 이쁘장한 나이어린 여후배와 몇번 데이트 하며 시시덕거렸는데, 걔가 너무 순진해서 목숨걸고 나오니까 좀 당황하고. 선생으로써 기본이 된 놈이라 왕따 당하는 양미숙을 좀 챙겨준 것 뿐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이상하게 짝사랑과 스토킹의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딸과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마는. 이 놈도 인생의 무게 무거울 그런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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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뜨기라능 ...

그려서 캐릭터 뒤비기의 결론은, 다 이상한 캐릭터들인데 … 거기에 다 내 모습이 있고, 공감이 간다는 얘기다.

3. 이 영화 법정물이었던 거냐???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일까. 어학실 장면이 꼭 법정장면 같아서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가를 생각해봤다.

가만보면 서종철(가해자) vs. 이유리, 성은교, 서종희(피해자) 양미숙(가해자) vs. 서종철(피해자) 이런 구도로 보인다.  서종철은 이유리에겐 ‘심심풀이 데이트상대’라는 상처를, 성은교와 서종희에게는 ‘가장의 부정’이라는 가해를 했으나 실상 양미숙에게는 ‘왕따학생에 대한 수학여행에서의 배려’, ‘한때 제자였던 동료에 대한 친절(교무회의시간에 졸지말라는)’, 혹은 사회가 금지하는 ‘왕따에게 친절 베풀기’라는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다.

영화 보면서 ‘다 저 놈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곱씹어 생각할 수록 서종철이라는 놈이 참… 나쁜 놈의 범주를 은근슬쩍 잘 비켜간다. (얄미운 놈) 그래서 저 위에서 말한 가해자 피해자 구도도 사실은 모호하다. 다들 상처를 받았는데 막상 왜 상처를 받았는지, 왜 상처를 줬는지는 모르는 상태다.

4. 이 영화는 비극이다???

그리스비극(오이디푸스, 아가멤논 같은거)과 셰익스피어비극은 비극의 원인이 본인의 캐릭터에게 있다(Personality is destiny).

그리고 현실주의, 자연주의 연극으로 오면 개인에게 비극의 원인이 있지 않고 사회에 비극의 원인이 있다. (Riders to the Sea같은 작품)

그러다가 40년대 중반으로 와서 Arther Miller나 Tenesse Williams의 ‘세일즈맨의 죽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유리동물원’ 같은 작품을 보면 경제공황같은 사회적 원인과 캐릭터 본인이 가진 성격적 결함이 복합적으로 비극의 원인이 된다.

미스홍당무는 그런 점에서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과 비슷한 점이 있다. 양미숙, 이유리, 서종희의 비극에는 인간소외라는 사회적 측면 이외에 ‘모자란 개인’이라는 원인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과 다른 점이 있다.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은 ‘가족의 붕괴’로 끝나고, 그것이 비극 그 자체라는 것. 그러나 미스홍당무의 비극은 ‘붕괴된 가족’위에서 시작되고, 그것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5. 결론

그리하여 이 영화는 왕따들에 대한 각각의 고찰을 통해 인간의 소외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사람이 비 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거에요.  설마.  그 사람도 사람인데 …”

양미숙의 말에 공감과 조소를 동시에 날리며 집에 돌아오니 … 묻지마 범죄, 고시원 방화사건 뉴스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 미숙아 … 힘들더라도 꿋꿋이 살아보자꾸나 …

끗.


영진공® 라이

토니 타키타니 (トニー滝谷, 2004),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어떤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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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힛트 소설’들은 왜 영화화되지 않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정확한 속사정이야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조금이라도 흥행에 도움이 된다면 물불을 안가리는 영화 장사치들이 하루키에게 영화 판권을 사겠다는 제안을 안했을리는 없고, 결국 하루키의 작품들이 이제껏 영상으로 옮겨지지 않았던 결정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하루키가 그것을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만 했다. 그럼 하루키가 자기 작품들의 영화화를 원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 많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소설이나 영화는 대부분 서사의 틀 안에 내용물을 담아 제공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많은 소설들이 영화로 옮겨졌고 이 가운데 일부는 크게 성공해서 책도 더 팔아주기도 하고 또 다른 일부는 ‘역시 소설과 영화는 문법에서부터 차이가 많다’는 소리만 듣고 말았다. 소설이 쉽게 영화로 옮겨지기 어려운 이유는, 사실 별로 없다. 소설을 미리 읽지 않은 관객에게는 영화가 소설을 원작으로 했건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들었건 아무런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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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원작이 되는 소설을 먼저 읽고 달려온 관객은 만족시키기가 거의 힘들다. 영화로 구현된 시청각적 경험은 책을 읽을 때 동원했던 독자 개개인들의 상상의 감각을 따라잡지 못한다. 그리고 문자로 제공되는 ‘글 읽는 맛’이라는 것은 다른 장르의 예술이 영원히 침범하지 못할 문학 고유의 영역이고 역할이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의 외로움을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보여주고 들려주는 일과 ‘외로움’이라는 단어 하나를 적절한 위치에 박아 넣음으로써 독자의 심연을 흔들어 놓는 일은, 어느 쪽이 더 우세하느냐의 문제를 떠나, 무척 다른 일이다.

어쨌든 <토니 타키타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처음으로 영화화한 작품이고 나는 이것을 원작은 읽지 않은 채 보았다. 그럼에도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서 가장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는 연출자도 배우들도, 촬영 감독이나 음악가도 아닌,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여러분은 지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극장 안에서 보고 계신다’는 네온사인이 러닝타임 내내 깜빡깜빡거리는 것을 보고 온 듯한 기분이다. 분명 의도된 연출임에 분명하지만, 어떤 관객들은 하루키의 문학과는 상관없이, ‘영화’ 토니 타키타니 속으로 좀 더 들어가보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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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ps. <토니 타키타니> 이전에도 81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비롯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여러 차례 제작된 바 있었음을 밝힙니다. 이전 작품들이 일본 국내에서만 소개되고 해외에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보해주신 영진공 방문자 여러분들께 감사 말씀드립니다.

최진실과 바스키아 … 예술가의 짧은 생


 

최진실의 자살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 이가 비단 나 뿐은 아닐 거다. 90년대 CF 한편으로 스타덤에 올라 대한민국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해 대중의 큰 사랑을 받았던 톱스타이자 언제나 옆집 언니 같았던 그녀. 최근 출연한 드라마의 연속 히트로 줌마렐라 신드롬을 일으켰지만, 숨기고 싶었을 폭력과 외도로 얼룩진 결혼생활과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 얽힌 사연들은 최근까지도 매스컴의 단골 메뉴였다. 대중의 대단한 사랑을 받음과 동시에 꼭 그만큼의 루머와 악의적인 덧글을 얻어야 했던 그녀는 예상처럼 수년간 신경안정제를 복용하며 우울증을 견뎠다. 그래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괴로우랴 싶었거늘.. 두 아이의 엄마로 웬만한 일은 씩씩하게 버텨내길 바랐거늘.. 그녀는 대중의 마음을 저버리고 그렇게 떠났다.

“유명해 진다는 건 분명 근사한 일이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알아보고, TV와 신문이 예사로 자신의 얼굴을 싣고, 영화배우나 가수와 연인이 되고, 쉽사리 큰 돈을 벌고…말 그대로 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사람이 되는 것, 얼마나 낭만적인가”


<짧은 영광, 그래서 더 슬픈 영혼> 중


뉴욕에서 태어나 뉴욕 거리 곳곳과 지하철역사에 그림을 그렸고, 엔디워홀의 친한 친구이자 동료로 20세기 말 미국 미술계에서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은 ‘검은 피카소’ 장 미셸 바스키아. 하지만 그는 27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세상을 등진 또 한 명의 불운한 예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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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Michel Basquiat, "The Dingoes At The Park"




이미 20대 초반에 몇 만 달러를 호가하는 작품을 그린 위풍당당한 화가. 그라피티(Graffiti)라고 불리는 스프레이 낙서화로 일약 미술계를 장악한 이 젊은 화가는 두려울 게 없었다. 미국 화단에 나타난 최초의 흑인이자, 클럽 DJ를 즐겼고, 양성애자이기도 한 그에게 80년대 초 새로운 재능의 출연을 기다리던 미국의 화랑가는 열광했다.



당시 젊은 부자들은 투자의 일종으로 미술품을 사들였다. 그들은 바스키아가 더욱 유명해지도록 힘썼다. 그의 몸값이 올라야 그림값 또한 오르기 때문이다. 바스키아는 순식간에 유명세를 타게 되고, 스타대접을 받는다. 하지만 동시에 흑인이라는 손가락질과 비평가들의 냉담한 혹평에 혼란스러워한다. 아무리 천재라고 한들.. 겨우 20살, 갓 소년 티를 벗은 청년이던 그는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코카인과 헤로인을 선택한다. 그리고 1888년 약물 과용으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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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 Portrait as a Heel

배우 최진실과 바스키아의 생은 언뜻 비슷하다. 원하는 대로 유명해졌지만, 생각만큼 낭만적이지 않은 현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무섭고 아찔한 성공의 이면들. 하늘이 내려준 재능에 힘입어 화려한 삶을 살게 되지만, 그 끝은 고통의 낭터러지였을 그들의 삶에 어떤 말로 이해를 또 설명을 할 수 있을까.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생의 시간을 어쩌면 훨씬 길고 힘겹게 느꼈을 예술가들에게 짧은 생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면 부디 하늘에서는 마음껏 꿈을 펼치고 환히 웃으며 살아가길 빈다.


영진공 애플

파리, 텍사스 (Paris Texas, 1984),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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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부터 <파리, 텍사스>는 <테스>, <캣 피플>, <마리아스 러버>와 비슷한 이미지(어른들만 볼 수 있는)의 나타샤 킨스키 주연 영화였었는데, 언제부턴가는 빔 벤더스의 전설적인 예술 영화인데 나타샤 킨스키도 나온 영화로 그 이미지가 수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직접 보지 않으면 끝까지 ‘아마 그럴 것이다’ 하는 이미지만 갖게 될 뿐, 결코 내 것이 되지는 못하고 만다. 사실 세계 영화사에 오래 남을 거장들의 작품이나 누구나 칭송해 마지 않는 걸작들에 대해 요즘 뜨는 영화들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 수준 이상의 각별한 열의를 발휘하지 못하는 편인 나로서는 이번 필름포럼의 기획전에 포함된 <파리, 텍사스>의 상영도 그저 시간이 맞으면이나 볼까 말까 했던 수준이었다. 남들이 다 좋다고들 하는 <베를린 천사의 시>도 비디오로 한번 보다가 지루해서 말았고 역시 남들이 다 좋다고들 하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또한 내겐 그저 그랬던 터라 빔 벤더스의 걸작이 왔다고 해서 특별히 들떠야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가 이 영화를 놓치지 말자고 마음을 먹게 된 것은 베네딕도미디어의 임인덕 신부가 꼽은 ‘내 인생의 영화 10편’ 가운데 1등을 <파리, 텍사스>가 먹고 있는 걸 보았던 탓이다. 베네딕도미디어 하면 키에슬롭스키의 <십계>를 비디오로 출시한 거기 아닌가. 뭐 음악이나 영화나, 대개 이런 식이다. 많고 많은 작품들 중에서 ‘하필 그것’이 되게 만드는 부가적인 정보가 접수되면 더이상 많고 많은 작품들 가운데 ‘그 작품’으로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다 결국 그 음악을 듣거나 그 영화를 보게 되면 ‘내 것’이 되는 과정을 밟게 된다. 이제 직접 보았고 천천히 ‘내 것’이 되는 과정을 밟게 된 “파리, 텍사스”는 그러나 내 인생의 영화가 될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임인덕 신부가 왜 자기 인생의 영화 1등으로 <파리, 텍사스>를 꼽았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파리, 텍사스>는 다름아닌 인간의 구원, 관계의 회복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런 점이 임인덕 신부에게는 크게 어필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여기에는 그 영화를 보았을 때의 각별한 기억이나 그런 경험이 함께 작용했을 때 비로소 ‘내 인생의 영화’라고까지 할 수 있게 된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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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오프닝에서 유일하게 눈에 띈 것은 샘 셰퍼드가 각색을 했다는 사실이었는데, 여기서 나는 폴커 슐렌도르프가 감독하고 샘 셰퍼드와 쥴리 델피가 공연한 <사랑과 슬픔의 여로>를 떠올리면서 독일 감독들과 샘 셰퍼드의 관계가 잠시 궁금했었다. 영화 중간에는 나타샤 킨스키의 기둥 서방 같은 인물로 <천국 보다 낯선>에 출연했던 배우가 잠깐 나오는데, 그러고 보니 짐 자무쉬가 빔 벤더스 감독이 사용했던 영화 세트들을 재활용해서 <천국 보다 낯선>을 찍었다는 얘기를 언젠가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영화가 시작되면 평생 단역 전문인줄로만 알았던 해리 딘 스탠튼이 40일간 사막에서 금식을 하고 돌아온 예수처럼 심각하게 꾀죄죄한 몰골로 텍사스의 뙤약볕 아래 등장한다. 그리고 얼마 전에 사망한 딘 스톡웰이 그의 동생으로 등장하고, 나타샤 킨스키는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나서야 뒤늦게 나타난다. 요즘의 감각으로는 다소 느린 호흡으로, <파리, 텍사스>는 희망을 얘기한다. 비슷한 주제를 다뤘지만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간 구원의 가능성을 <파리, 텍사스>는 마침내 찾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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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