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금자씨 또는 속죄는 나의 것

박찬욱 감독의 복수 연작 세번째 작품(복수 3부작은 잘못된 표현이고 어디까지나 마케팅을 위해 동원된 수사일 뿐이다. 애초부터 3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가 아니다)인 “친절한 금자씨”.  요즘 영화 속 금자라는 인물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영화를 보았을 때 스크린을 가득 메우던 이영애의 얼굴 뒤에 가려졌던 실제 금자의 모습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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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금자는, 많은 관객이 기대했던, 복수의 화신이라기 보다는 속죄의 강박에 사로잡힌 단죄의 화신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멀리 돌아갈 필요도 없이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에 등장한 ‘진정한’ 복수의 화신들과 금자의 차이를 비교해보면 이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두 개의 대립각을 이루는 류(신하균)과 동진(송강호)는 모두 자신의 피붙이, 하나는 하나 밖에 없는 누나를, 또 하나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잃는다. 자신의 생명이나 다름 없는 절대적 가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빼앗겼을 때, 류는 장기매매단의 콩팥을 소금에 찍어먹을 수 있었고 동진은 집요한 추적 끝에 류의 혈맥을 끊어놓을 수 있었다.

“올드 보이”도 마찬가지다. “올드 보이”에서 복수의 화신은 오대수(최민식)이 아니라 오대수의 세치 혀 놀림에 누나를 잃어야 했던 이우진(유지태)이다. 물론 15년간 사설 감방에 갇혀 그 만큼의 인생과 가족을 잃어야 했던 오대수에게도 복수의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마침내 풀려난 데에서 오는 해방감과 더불어 자신이 왜 갇혀야만 했었는지에 대한 의문의 답을 찾는 일이 우선이다. 반면 이우진은, 그러니까 영화의 말미에야 밝혀지는 이우진의 지독한 복수의 이유는 “복수는 나의 것”의 인물들의 사연에 비하면 약간은 신화화된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역시나 다시 한번, 자신의 생명이나 다름 없는 절대적 가치의 상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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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라는 게 무엇인가. 아니, 복수라는 행위가 갖춰야 할 감정적 상태의 가장 순도 높은 형태는 어떤 것인가. 어느 정도의 원한과 증오가 가슴 속에 터지고 피멍이 들었을 때 복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로까지 내몰리게 되는가.

그러나, “올드 보이”에 이은 “올드 레이디”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었어야 했을 금자는(쉽게 바꿔 말하자면, “올드 보이”에서 이우진의 여자 버전인 이금자로서 그녀의 깊은 상처와 치밀한 복수의 과정을 풀 스토리로 보여주는 영화가 되기를 많은 이들이 바랬던, 그리하여 “올드 보이”의 변주곡이 되어야 했을 “친절한 금자씨”는) 대부분 관객들의 바램과 달리 순도 높은 원한과 증오의 여건부터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복수의 화신이라기 보다는 속죄의 강박에 휩싸인 단죄의 대리인으로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오대수의 15년 만큼은 아니지만, 금자에게도 13년의 잃어버린 인생이 있었고 무엇보다 행방을 알 수 없는 딸과의 잃어버린 시간이 있었으므로 충분한 복수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딸은 살아있었고 자신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금자의 사연은 류나 동진이나, 이우진의 경우라기 보다는 오대수에 가깝다. 그럼에도 금자는 백 선생에 대한 응징을 실천한다. 더군다나, 13년만에 되찾은 딸에게서 스스로 엄마라고 불리우기 조차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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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자는 남들 보다 죄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딸을 죽이겠다고 백 선생이 협박을 했다지만 그녀가 유괴 살인의 죄를 뒤집어 쓴 데에는 어찌하든 딸을 살리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자기 스스로가 유괴 살인의 공범 노릇을 했다는 자괴감도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백 선생에 대한 복수심이 13년의 감방 생활 동안 철저한 이중 인격으로 살게 했지만 13년 동안 그녀가 동료 복역수들에게 그토록 친절할 수 있었던 이유도 유괴 살인에 동조한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감방에서 나오자 마자 유가족 앞으로 달려가 자신의 손가락부터 끊는 행위는 백 선생에 대한 복수 보다 스스로에 대한 속죄의 심정과 노력이 훨씬 더 앞서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관객 앞에 전시되는 금자의 복수 퍼포먼스는 관객들이 가슴으로 동참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적 폭발이라기 보다는, 마치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심판자의 모습을 띄게 된다. 복수라기 보다는 정의의 심판에 가까운, 백 선생에 대한 금자의 단죄는 그리하여 결국 관객들에게 아무런 감정 이입이나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상당히 부담스러운, 또 다른 그 무엇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싶다.

여기서 “친절한 금자씨”가 대부분 관객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려고 했다면 그건 아마도, 악독한 백 선생과 그의 청부업자들의 손에 의해 금자의 딸이 죽고 짧았던 금자와 딸의 불완전한 행복은 그나마도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과거의 것이 되면서 백 선생의 생살을 전부 씹어먹어도 충분치 않을 금자의 ‘마녀로의 변신’ 정도가 이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처음엔 몰랐던 백 선생의 더 많은 죄가 밝혀지면서 어느 관객도 기대했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튀어가 버린다.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는 관객의 만족 보다는 박찬욱 감독의 작가적 명성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작품, 또는 관객들에게는 불친절하고도 매우 모호한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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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금자는 왜 이미 죽어버린 백 선생의 얼굴에 총질을 했을까?

이것 역시 금자가 가진 속죄와 단죄의 강박으로 해명할 수 밖에 없다. 백 선생에 대한 금자의 단죄는 무려 13년 동안 한순간도 꺼지지 않았던 불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백 선생에 대한 순도 높은 복수의 감정이라기 보다는 단죄의 사명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금자는 스스로가 그랬던 것 이상으로 백 선생 자신도 스스로의 죄를 우선 깨닫기를 원했고 그래서 피해 아동의 부모들이 백 선생에 대한 살해 모의를 하는 내용을 전부 경청할 수 있도록까지 한다. (백 선생이 죽기 전에 공포감을 느끼도록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어디 그런 인물이던가? 소 귀에 경 읽기라 하더라도 죄인을 죽이기 전에 죄목부터 낱낱이 열거하는 것이 심판의 대리인들이 취하는 습관이다.)

금자의 총질은 죄인에 대한 심판이 완료된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금자의 총질에는 아무런 감정적 폭발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죄의식 강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일종의 자기 계획에 대한 완벽주의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13년 동안 고이 품어왔고 사제 총에 은장식까지 해넣기까지 준비해온 그 일의 마지막을, 때로는 본래의 목적이 더이상 의미 없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에 조차 고집하곤 하는 그런 습성. 또는 강박.

“친절한 금자씨”가 세번째 복수의 드라마가 아닌, 속죄와 구원에 대한 아리송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이유가 결국 금자씨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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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미쓰 홍당무”는 인간소외에 관한 고찰이다.



    


1. 미쓰 … 홍당무???

어린이 전집류나 학교 도서실에서 책 좀 빌려 본 사람은 아마 읽어봤을 것이다. 쥘 르나르(Jules Renard)의 홍당무. 신경질적인 엄마와 가부장적인 아버지, 약자를 괴롭히는 못된 심성으로 막내를 대하는 형제자매들 사이의 막내. 그가 홍당무다. 미스 홍당무의 홍당무는 그 홍당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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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스포일러가 무지하니 출물하니 요주의!!!!!

2. 캐릭터 뒤비기

양미숙씨
집이 없어 고시원도 아닌 심지어 교무실에서 몰래 살고 있다. 학교에 귀신이 산다는 소문이 있다면 아마 양미숙 선생일터. 양미숙의 팍팍한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러시아어가 인기가 없어져 중학교 영어선생으로 내려간 양미숙선생. 영어선생이 영어학원 다닌다고 엄청 욕을 먹는다.  나는 영문과 출신이고, 고로 학교 영어선생하는 친구들이 쫌 있다. 얘네 요새 다 엄청 스트레스 받는다. 시험문제 하나 내는데도 오류 있을까봐 바들바들 떨린다고 한다.  근데 양미숙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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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나고 괴로울 땐 닭발이 쵝오 >.<

완전히 쫒겨난 노동자는 아니지만, 원치않는 비숙련 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로써의 삶과, 자본 제로의 상황에 눈이 많이 간다. 그런데 심지어 생긴 것도 별루다. 자본도 없고 생긴 것도 없는 이에게 호감을 갖는 이는 없다. 양미숙의 원피스 패션을 보라. 과연 소외당한 자 답고, 소외 당할만한 자 답다. ‘고아’라는 거짓말. 소외를 많이 겪는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호감을 얻기 위해 잘 하는 거짓말이다. (양미숙의 현실로 봐서 실제 고아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고아에 가까운 듯 하다) 아무도 호감을 주는 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10년 전 담임선생님이었던 서선생의 호의를 호감으로 받아들인다. 그녀의 삶이 너무도 바쁘고, 그녀는 하루종일 너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도 참 가슴 짠하다. 상징적으로 자기 노력이 삽질인지 아닌지 알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왜?’ 그런 노력을 하는 지 아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양미숙은 ‘참 살기 팍팍한 세상에서 되도 않는 노력을 왜인지도 모르고 하는 우리’모습이다.

이유리양

이유리도 양미숙만큼 짠하다. 모순덩어리 이유리선생을 나는 이해한다. 사람에 따라 시차는 있겠지만 대한민국여성에게 20대 초반은 성과 사랑, 연애에 대해서 참 아무것도 모르고, 그 스스로도 모순에 둘러싸여있다. 나는 이유리선생을 내숭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변태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저 스스로 성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성욕이라 인정하지 못하고, 섹스를 해보고 싶지만 섹스를 할 수는 없는거라고 생각하는 20대 초반 여느 여성들의 모습과 꼭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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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쒸~

검정T팬티를 입고 성적 공상에 골몰해 있지만 ‘어머! 저는 결혼전 까지 참지 못하는 남자와는 끝낼거에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내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메신저로 변태적인 메세지를 받았을 때 이유리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내가 너무 튕겨서 남자와 헤어지는 걸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순진한 그녀는 그런 고민 때문에 카마수트라에 줄쳐가면서 신음소리를 연습한 것일테고, 그런 고민 때문에 ‘자쥐 깔꽈?’ 퍼포먼스까지 해 버린 것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남자의 마음을 잡는 지 모르는 무지상태. 무슨 짓이라도 불사하려는 그녀의 삽질또한 참 공감이 간다. 예쁜 그녀에게도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은 것.
Another version of 왕따. (그녀의 결론은 꽤 괜찮아서 다행. 앞으로 무슨 일을 겪을지 모르지만)

종희
소설 ‘홍당무’를 생각해 보면, 종희야 말로 진짜 홍당무. 부모는 둘다 서종희를 사랑하긴한다.  일상에 찌든, 너무 일찍 결혼한 삼십대 중반의 가장 서종철은 즐기지 못한 20대에 대한 보상이라도 받듯 인터넷 방송에 힘쓰고, 멀끔한 외모를 밑천 삼아 젊은 여선생과 히히덕거리고 있고, 너무 어린 남편을 둔 성은교는 몸매를 가꾸며 (커리어에 몰두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쪽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전교 왕따지만, 엄마아빠는 그런 고민은 전혀 모른 채 자기들의 고민에만 빠져있다. 그 사이에서 참 엉뚱한 방향으로 영악해 지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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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메와까!!!!!

서은교님
다른 사람보다 분량이 적긴 하지만. 참… 뭐 말할필요없이 공감 많이 가는 캐릭터다. 어학실에서 차분하게 판사인 듯 대단한 침착성과 노련함을 보이더니 어학실을 나와 남편과 함께 걸어가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서종철군
그닥 나쁜 놈도 아니고, 전체적인 사실관계를 영화가 보여주는대로만 봤을 때는, 이쁘장한 나이어린 여후배와 몇번 데이트 하며 시시덕거렸는데, 걔가 너무 순진해서 목숨걸고 나오니까 좀 당황하고. 선생으로써 기본이 된 놈이라 왕따 당하는 양미숙을 좀 챙겨준 것 뿐이었는데, 그게 오히려 이상하게 짝사랑과 스토킹의 결과를 불러일으키고, 딸과 아내에게 상처를 주고 마는. 이 놈도 인생의 무게 무거울 그런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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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뜨기라능 ...

그려서 캐릭터 뒤비기의 결론은, 다 이상한 캐릭터들인데 … 거기에 다 내 모습이 있고, 공감이 간다는 얘기다.

3. 이 영화 법정물이었던 거냐???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일까. 어학실 장면이 꼭 법정장면 같아서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가를 생각해봤다.

가만보면 서종철(가해자) vs. 이유리, 성은교, 서종희(피해자) 양미숙(가해자) vs. 서종철(피해자) 이런 구도로 보인다.  서종철은 이유리에겐 ‘심심풀이 데이트상대’라는 상처를, 성은교와 서종희에게는 ‘가장의 부정’이라는 가해를 했으나 실상 양미숙에게는 ‘왕따학생에 대한 수학여행에서의 배려’, ‘한때 제자였던 동료에 대한 친절(교무회의시간에 졸지말라는)’, 혹은 사회가 금지하는 ‘왕따에게 친절 베풀기’라는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다.

영화 보면서 ‘다 저 놈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곱씹어 생각할 수록 서종철이라는 놈이 참… 나쁜 놈의 범주를 은근슬쩍 잘 비켜간다. (얄미운 놈) 그래서 저 위에서 말한 가해자 피해자 구도도 사실은 모호하다. 다들 상처를 받았는데 막상 왜 상처를 받았는지, 왜 상처를 줬는지는 모르는 상태다.

4. 이 영화는 비극이다???

그리스비극(오이디푸스, 아가멤논 같은거)과 셰익스피어비극은 비극의 원인이 본인의 캐릭터에게 있다(Personality is destiny).

그리고 현실주의, 자연주의 연극으로 오면 개인에게 비극의 원인이 있지 않고 사회에 비극의 원인이 있다. (Riders to the Sea같은 작품)

그러다가 40년대 중반으로 와서 Arther Miller나 Tenesse Williams의 ‘세일즈맨의 죽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유리동물원’ 같은 작품을 보면 경제공황같은 사회적 원인과 캐릭터 본인이 가진 성격적 결함이 복합적으로 비극의 원인이 된다.

미스홍당무는 그런 점에서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과 비슷한 점이 있다. 양미숙, 이유리, 서종희의 비극에는 인간소외라는 사회적 측면 이외에 ‘모자란 개인’이라는 원인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과 다른 점이 있다. 밀러나 윌리암스의 비극은 ‘가족의 붕괴’로 끝나고, 그것이 비극 그 자체라는 것. 그러나 미스홍당무의 비극은 ‘붕괴된 가족’위에서 시작되고, 그것은 비극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5. 결론

그리하여 이 영화는 왕따들에 대한 각각의 고찰을 통해 인간의 소외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사람이 비 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는거에요.  설마.  그 사람도 사람인데 …”

양미숙의 말에 공감과 조소를 동시에 날리며 집에 돌아오니 … 묻지마 범죄, 고시원 방화사건 뉴스가 기다리고 있다.

그래. 미숙아 … 힘들더라도 꿋꿋이 살아보자꾸나 …

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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