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금자씨 또는 속죄는 나의 것

박찬욱 감독의 복수 연작 세번째 작품(복수 3부작은 잘못된 표현이고 어디까지나 마케팅을 위해 동원된 수사일 뿐이다. 애초부터 3부작으로 기획된 시리즈가 아니다)인 “친절한 금자씨”.  요즘 영화 속 금자라는 인물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영화를 보았을 때 스크린을 가득 메우던 이영애의 얼굴 뒤에 가려졌던 실제 금자의 모습을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금자는, 많은 관객이 기대했던, 복수의 화신이라기 보다는 속죄의 강박에 사로잡힌 단죄의 화신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멀리 돌아갈 필요도 없이 박찬욱 감독의 전작들에 등장한 ‘진정한’ 복수의 화신들과 금자의 차이를 비교해보면 이 점을 쉽게 알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두 개의 대립각을 이루는 류(신하균)과 동진(송강호)는 모두 자신의 피붙이, 하나는 하나 밖에 없는 누나를, 또 하나는 하나 밖에 없는 딸을 잃는다. 자신의 생명이나 다름 없는 절대적 가치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방식으로 빼앗겼을 때, 류는 장기매매단의 콩팥을 소금에 찍어먹을 수 있었고 동진은 집요한 추적 끝에 류의 혈맥을 끊어놓을 수 있었다.

“올드 보이”도 마찬가지다. “올드 보이”에서 복수의 화신은 오대수(최민식)이 아니라 오대수의 세치 혀 놀림에 누나를 잃어야 했던 이우진(유지태)이다. 물론 15년간 사설 감방에 갇혀 그 만큼의 인생과 가족을 잃어야 했던 오대수에게도 복수의 이유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마침내 풀려난 데에서 오는 해방감과 더불어 자신이 왜 갇혀야만 했었는지에 대한 의문의 답을 찾는 일이 우선이다. 반면 이우진은, 그러니까 영화의 말미에야 밝혀지는 이우진의 지독한 복수의 이유는 “복수는 나의 것”의 인물들의 사연에 비하면 약간은 신화화된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역시나 다시 한번, 자신의 생명이나 다름 없는 절대적 가치의 상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복수라는 게 무엇인가. 아니, 복수라는 행위가 갖춰야 할 감정적 상태의 가장 순도 높은 형태는 어떤 것인가. 어느 정도의 원한과 증오가 가슴 속에 터지고 피멍이 들었을 때 복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로까지 내몰리게 되는가.

그러나, “올드 보이”에 이은 “올드 레이디”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었어야 했을 금자는(쉽게 바꿔 말하자면, “올드 보이”에서 이우진의 여자 버전인 이금자로서 그녀의 깊은 상처와 치밀한 복수의 과정을 풀 스토리로 보여주는 영화가 되기를 많은 이들이 바랬던, 그리하여 “올드 보이”의 변주곡이 되어야 했을 “친절한 금자씨”는) 대부분 관객들의 바램과 달리 순도 높은 원한과 증오의 여건부터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복수의 화신이라기 보다는 속죄의 강박에 휩싸인 단죄의 대리인으로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오대수의 15년 만큼은 아니지만, 금자에게도 13년의 잃어버린 인생이 있었고 무엇보다 행방을 알 수 없는 딸과의 잃어버린 시간이 있었으므로 충분한 복수의 이유가 된다. 그러나 딸은 살아있었고 자신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금자의 사연은 류나 동진이나, 이우진의 경우라기 보다는 오대수에 가깝다. 그럼에도 금자는 백 선생에 대한 응징을 실천한다. 더군다나, 13년만에 되찾은 딸에게서 스스로 엄마라고 불리우기 조차 거부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금자는 남들 보다 죄의식이 강한 사람이다. 딸을 죽이겠다고 백 선생이 협박을 했다지만 그녀가 유괴 살인의 죄를 뒤집어 쓴 데에는 어찌하든 딸을 살리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자기 스스로가 유괴 살인의 공범 노릇을 했다는 자괴감도 작용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된다. 백 선생에 대한 복수심이 13년의 감방 생활 동안 철저한 이중 인격으로 살게 했지만 13년 동안 그녀가 동료 복역수들에게 그토록 친절할 수 있었던 이유도 유괴 살인에 동조한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감방에서 나오자 마자 유가족 앞으로 달려가 자신의 손가락부터 끊는 행위는 백 선생에 대한 복수 보다 스스로에 대한 속죄의 심정과 노력이 훨씬 더 앞서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관객 앞에 전시되는 금자의 복수 퍼포먼스는 관객들이 가슴으로 동참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적 폭발이라기 보다는, 마치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심판자의 모습을 띄게 된다. 복수라기 보다는 정의의 심판에 가까운, 백 선생에 대한 금자의 단죄는 그리하여 결국 관객들에게 아무런 감정 이입이나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하고 오히려 상당히 부담스러운, 또 다른 그 무엇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싶다.

여기서 “친절한 금자씨”가 대부분 관객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려고 했다면 그건 아마도, 악독한 백 선생과 그의 청부업자들의 손에 의해 금자의 딸이 죽고 짧았던 금자와 딸의 불완전한 행복은 그나마도 더 이상 이어질 수 없는 과거의 것이 되면서 백 선생의 생살을 전부 씹어먹어도 충분치 않을 금자의 ‘마녀로의 변신’ 정도가 이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처음엔 몰랐던 백 선생의 더 많은 죄가 밝혀지면서 어느 관객도 기대했거나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튀어가 버린다. 그리고 “친절한 금자씨”는 관객의 만족 보다는 박찬욱 감독의 작가적 명성에 기여하는 또 하나의 작품, 또는 관객들에게는 불친절하고도 매우 모호한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런데 금자는 왜 이미 죽어버린 백 선생의 얼굴에 총질을 했을까?

이것 역시 금자가 가진 속죄와 단죄의 강박으로 해명할 수 밖에 없다. 백 선생에 대한 금자의 단죄는 무려 13년 동안 한순간도 꺼지지 않았던 불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백 선생에 대한 순도 높은 복수의 감정이라기 보다는 단죄의 사명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금자는 스스로가 그랬던 것 이상으로 백 선생 자신도 스스로의 죄를 우선 깨닫기를 원했고 그래서 피해 아동의 부모들이 백 선생에 대한 살해 모의를 하는 내용을 전부 경청할 수 있도록까지 한다. (백 선생이 죽기 전에 공포감을 느끼도록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가 어디 그런 인물이던가? 소 귀에 경 읽기라 하더라도 죄인을 죽이기 전에 죄목부터 낱낱이 열거하는 것이 심판의 대리인들이 취하는 습관이다.)

금자의 총질은 죄인에 대한 심판이 완료된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금자의 총질에는 아무런 감정적 폭발음이 들리지 않는다. 그건 아마도 죄의식 강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일종의 자기 계획에 대한 완벽주의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13년 동안 고이 품어왔고 사제 총에 은장식까지 해넣기까지 준비해온 그 일의 마지막을, 때로는 본래의 목적이 더이상 의미 없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에 조차 고집하곤 하는 그런 습성. 또는 강박.

“친절한 금자씨”가 세번째 복수의 드라마가 아닌, 속죄와 구원에 대한 아리송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이유가 결국 금자씨에게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진공 신어지

영화 <추격자>가 남긴 것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추격자>가 장안의 화제다.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 한 편이 높은 완성도의 한국영화를 갈망해온 국내 객석의 환호를 받고 있다. 완성도 높은 한국영화에 대한 갈망은 곧 자국 영화에 대한 자부심을 갈망함에서 비롯된다. 자기 나라와 자기 민족에 대한 자부심은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사람들은 자기 소속 집단, 선택이 아닌 운명적으로 그 소속이 결정되어버린 공동체에 대해 자부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국의 영화 뿐만 아니라 스포츠 행사나 기타 문화적 우위를 과시할 수 있는 일들에 열광한다. 반면에 국보 1호를 불태워 먹는다거나 하는 일에는 무한한 쪽팔림을 경험한다. 그러나 안심하라. 우리나라만 유난스러운 건 결코 아니다. 애국주의 마케팅으로 한 두 건 올리는 경우는 여기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쪽팔림과 자부심에 대한 갈망은 동전의 양면이요 같은 배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나 다름이 없다. 쪽팔린 일이 아직 많다보니 자부심에 대한 갈망이 약간 강할 뿐이다. 쪽을 팔 일이 적어지고 지난 일들을 상기할 일이 없어질 때 즈음 과도한 갈망 역시 고개를 숙이게 될 일이다.

물론 <추격자>는 애국주의 마케팅(그 자체만으로는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영화다. <추격자>에 대한 지지에서 그런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그건 결과론일 뿐이다. 내용으로만 보면 오히려 그 반대다.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조롱하고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냐고 질문하는 영화다. 그럼에도 <추격자>는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영화이고 그래서 한국영화에 대한 자부심마저 느낄 수 있게 한다. 요즘 우리나라 영화 관객들은 한국영화 보는 걸 몹시 좋아하는데 문제는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큼 완성도를 갖춘 영화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거품 경제를 토대로 피어났던 1996년의 르네상스와 이후 2003년 황금의 해를 통과하기까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이전 보다 많이 좋아진 면모를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만들어지는 숫자에 비해 충분하게 만족할만한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추격자>는 완성도의 가뭄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잘 자란 묘목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묘목을 잘 키워서 2008년의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목으로 키워주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추격자>가 남긴 가장 값진 선물은 무엇보다 한국영화의 훌륭한 성공 사례다. 엄청나게 고된 여건에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한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은 대규모의 투자나 얄팍한 컨셉에 스타 캐스팅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영화를 직접 만드는 이들의 치열한 근성과 재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작품이 <추격자>다. 그리고 <추격자>는 그렇게 기억되어야만 한다. 이번 기회에 작품을 선택하는 관객들의 요구 수준이 이 정도라는 점을 한국 영화계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적당한 기획으로 만들어 놓고 배급력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는 돈 놓고 돈을 절대 먹을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저예산 상업영화나 독립영화 쪽도 마찬가지다. <추격자>는 이러저러한 점이 잘 되었다고 조목조목 설명할 필요도 없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만든 이들의 성실함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장르나 내용, 주제가 좋고 나쁨을 떠나 관객이 영화를 통해 ‘정성들여 만든 느낌’을 얻는다는 건 작품이 관객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과정에 있어 아주 기본적인 사항이고, 이는 뛰어난 재능과 용기를 앞세우기 보다는 엄청나게 길고 고된 과정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다.

<추격자>는 나홍진이라는 걸출한 신인 감독을 또 하나의 선물로 안겨주었다. 데뷔작에서부터 뛰어난 재능과 근성을 보여준 감독들은 많지만 상업적인 성공까지 거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영화 팬들은 <추격자> 한 편으로 한국영화계의 일약 유망주로 떠오른 나홍진 감독의 존재를 몹시 반가워한다. 그가 앞으로 선보일 완성도 높은 영화들을, 그리하여 감상 자체가 만족스러울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국영화에 대한 자부심마저 느낄 수 있게 해줄만한 작품들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홍진 감독의 존재는(나아가 이 영화에 참여한 주요 스텝들의 존재는) 관객들 보다도 기존의 감독들이나 앞으로 영화 만드는 일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상당한 자극제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값지다. 앞으로 나홍진 감독과 같은 신인 감독들이 더 많이 나와주길 바라는 마음 또한 인지상정이다. 그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관객이 알 바는 아니다. 관객이 할 일은 기성 감독이든 신인 감독이든 가리지 않고 좋은 작품에는 좋은 대로, 미흡한 작품은 미흡한 대로 직관적으로 반응해주는 일 뿐이다.

그러나 <추격자>가 우리에게 남겨준 건 값진 선물만이 아니다. 이제부터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추격자>가 상당히 잘 만들어진 한국영화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질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양적인 면에서도 성공적인 작품으로 남게되길 바라는 마음은 한결 같지만 <추격자>는 개인적으로 마음 편히 환호해줄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모방 범죄가 걱정된다는 얘길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불편한 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흥미롭게만 바라볼 수 없었던, 뒷덜미를 잡아끄는 무엇인가가 분명 있었는데 이후로 이 영화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반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래서 감독 인터뷰 등의 관련 기사를 읽어보며 그 정체를 알고자 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추격자>와 유사한, 그러나 <추격자>와 같지 않았던 다른 영화 체험들을 기억해내고 또한 비교했다. 그리하여 <추격자>에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과 논리에 근거해 정리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돌이킬 수 없는>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랑스 영화감독인 가스파 노에(Gaspar Noe)의 2002년 작품이다. 장편 데뷔작 <아이 스탠드 얼론>(1998)을 통해 자신의 반사회적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낸 바 있던 가스파 노에는 벵상 까셀과 모니카 벨루치를 꼬드겨 전무후무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과 같이 시간 흐름의 역순으로 배치된 롱테이크 씨퀀스들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다룬다. 젊은 연인이 파티에 갔다가 말다툼을 하게 되고, 집으로 가려던 여자(모니카 벨루치)가 지하보도에서 괴한에게 폭행을 당한다. 애인의 처참한 몰골을 뒤늦게 발견한 남자(벨상 까셀)이 괴한을 추적하고, 마침내 지하 SM 클럽에서 발견한 괴한(이라고 생각한 남자)을 그 자리에서 죽인다는 얘기다. 살인 장면은 일반적인 극장 상영용 영화에서 허용되는 기준치를 훨씬 초과하고 원테이크로 처리되는 성폭행 장면은 상상을 초월한다. 폭행 자체만 무서운 것이 아니라 특별한 폭행의 동기가 없기 때문에 더욱 무서운 장면이었으며 그 긴 시간 동안 지하보도를 지나가려던 다른 행인이 발길을 돌리는 모습 또한 너무 사실적인 만큼 충격으로 다가왔다.

영화 촬영 후 모니카 벨루치가 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었다는 <돌이킬 수 없는>을 나는 2003년의 본 영화들 중 베스트 10의 하나로 꼽았다. 영화는 너무 힘들었지만 완벽하게 통제된 잘 만든 영화라는 사실과 이 영화를 통해 전달받은 정서적인 충격(끝까지 보면 역겨움과 두려움만 있는 영화는 아니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현 방식에서나 영화가 다룰 수 있는 내용 자체에 어떠한 제한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가능/불가능과 호불호를 정하는 것은 만드는 이와 관객이지 정부 기관이나 평론 집단과 같은 제 3자가 미리 할 일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가 전달한 정서적 충격이 감내할만한 수준이었던 탓도 있었지만(아마도 어떤 관객들은, 특히 여성 관객들은 도저히 감내가 안될 수도 있다) 그것이 외국 영화,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장소에서 내가 어울려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연기한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엔 별의별 영상물이 다 있고, 심지어는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찍은 스너프 필름이라는 것도 있다. 그걸 만드는 사람들도 엽기지만 그걸 구해다 보는 수요층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상업적으로 유통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엽기다.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끔찍한 장면을 감내하고 또한 어렵지 않게 잊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판타지로 인식되기 때문이고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 영화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연출된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연기하는 티가 나고 영화 찍은 티가 나는 허술한 영화가 좋을 리는 없다. 가급적이면 영화를 보는 동안 만큼은 정신없이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영화가 잘 만든 영화다. <돌이킬 수 없는>은 저것이 실제인지 연기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사실적인 영화다. 하지만 충분히 객관화가 가능하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 딴 세상 이야기라고 묻어둘 수 있는 영화다.

<추격자>는 잘 만들어진 그 만큼의 정서적인 충격을 주는 영화다. 더군다나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그리고 실제 있었던 연쇄살인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만든 영화다. 한국 영화가 한국적인 소재로 그렇게 끔찍한 이야기를 너무 사실적으로 보여주니 외국 영화 볼 때와는 이야기가 다르다는 얘기다. <추격자>는 다양한 부분에서 기존의 한국 영화로부터 진일보한 만듬새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끝내 미진(서영희)가 영민(하정우)의 장도리에 맞아죽는 것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주인공 중호(김윤석)가 애타게 찾으러 다녔고 또한 어린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당연히 살아남을 것으로 기대하는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도식을 벗어났다는 점 자체는 칭찬 받을만 하다. 하지만 <추격자>의 이 장면에서 받은 일부 관객들의 충격은 예상할 수 있었던 수준 이상이다. 영화 한 편을 보고 관객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예를 들어 대인기피증과 같은 노이로제 증세라도 얻게 된다면 그건 영화가 넘지 말았어야 할 선을 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이 상업적인 고려에 의한 것이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작품 지상주의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다면, 그러니까 일부 여성 관객들의 과도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런 장면들을 타자화해서 봐줄 수 있는 관객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계산 하에 이루어졌던 것이라면 과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추격자>와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는 유사점이 상당히 많은 작품이다. 싸이코 패스 계열의 연쇄살인마가 등장한다는 점 외에도 영화가 남겨주는 씁쓸한 패배감과 좌절감은 거의 동일한 수준이다. 끔찍한 장면이 많기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쪽이 훨씬 심하다. 그러나 지켜야 할 선은 지킨다. 바로 굳이 안보여줘도 될 장면은 안보여주고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추격자>는 작품의 의도와 흐름 상 미진이 영민의 손에 의해 죽는 것이 맞다. <추격자>는 미진의 머리가 영민이 휘두르는 장도리에 찍히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만 않을 뿐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미니멀한 음악을 배경으로 영민의 클로즈업된 얼굴과 방 안의 사방 벽에 미진의 피가 튀고 마지막에는 눈을 뜬 채 의식을 잃은 미진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데 장도리에 맞아 흔들리는 모습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어디까지나 연출된 장면이라는 걸 감안하여 보는 사람도 있고 이 장면을 계기로 영민과 중호의 짐승 같은 싸움에 활력이 붙었다는 사실과 영화 전체가 상업영화의 울타리에서 박차고 나왔다는 사실은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이 장면에서 은근한 쾌감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는 정반대의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르롤린(조쉬 브롤린)의 아내 칼리진(켈리 맥도날드)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건 다름 아닌 관객을 위한 최후의 배려다. 더군다나 우리에겐 외국 영화로서 현실감마저 덜 하다. 영화를 통해 얻는 서스펜스와 몸이 아프고 후유증이 올 만큼의 정서적 충격은 분명 다른 얘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같은 한국영화로서 끔찍하기로 이름난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1)은 <추격자>가 또 다른 맹점을 지적하기 위한 비교 대상이다. 기술적인 완성도와 사실적인 묘사로 치면 <복수는 나의 것>이 몇 수는 위다. 그러나 <복수는 나의 것>의 인물들은 관객이 납득할만한 동기를 갖고 있다. 류(신하균)는 죽은 누나에 대한 원한과 장기매매단과의 거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이유로 살인을 한다. 동진(송강호)는 죽은 딸에 대한 원한 때문에 영미(배두나)와 류를 고문하고 살해한다. 끔찍하기로는 동진 앞에서 자신의 배를 칼로 긋는 팽 기사(기주봉)도 마찬가지지만 그 심정이야 불을 보듯 뻔하다. <복수는 나의 것>은 원한과 복수의 굴레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관객은 각각의 분명한 동기를 지닌 등장 인물들을 타자화하며(그런 끔찍한 사연이 자신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자신도 그와 같은 방식의 복수를 고려할 일 조차 없을 것이므로) 유유히 극장을 빠져나가게 된다. 연민은 챙기고 극장에서 목격한 악몽을 잊는 것이다. 물론 <복수는 나의 것>은 국내 관객들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작품이 되었다. 한국영화라서 도저히 남의 일 같지가 않은 데다가 개운하게 입가심도 시켜주지 않은 영화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보완한 작품이 <올드보이>(2003)였고 <친절한 금자씨>(2005)도 끔찍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한발 더 나아가 그런 방식의 대응이 과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해 나직하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추격자>는 복수극이 아니라 무차별적인 연쇄살인을 소재로 하는 영화다. 뚜렷한 동기가 없는 살인이니 길 가다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관객들은 그와 같은 일이 지금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심지어 사법 제도와 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잡았던 범인들조차 유유히 다시 걸어나올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감독은 그런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했고 그 분노를 영화 속에 잘 담아냈다. 그러나 여기에 공노하며 영화의 흐름을 계속 따라갈 수 있는 관객은 주로 남자 관객들이다. 다행히 여자 범죄자에 의해 남성들이 연쇄살인을 당한 사례는 적어도 국내에는 아직 없기 때문에 영화 속의 상황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여성 관객의 경우 그런 장면에 공노만 할 수가 없다. 당장의 두려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진을 살려둘 수는 없었는지, 그게 아니라면 영민이 구멍가게에서 나오고 이후에 경찰들과 동네 사람들이 몰려든 장면만으로 미진이 죽었음을 알리는 것만으로는 정말 부족했던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미진은 영민이 불러 살해해온 창녀들 가운데 하나였다. 유영철 사건 이후 희생자들에 대한 직업적 편견을 접한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를 보고 출장 마사지 여인이 죽지 않기를 바라도록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미진은 어린 딸 하나를 부양하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그나마 몸이 아파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중호의 협박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나갔다가 변을 당한다. 감독의 의도대로 관객은 미진을 특이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내 누이, 내 가족의 하나와 마찬가지인 현실적인 여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미진이 살아남기를 바라게 되고 마침내 죽었을 때에 고통스러움을 느낀다. <추격자>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모든 요소가 감독의 의도대로 잘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너무 잘 되어서 탈이다. 유영철의 희생자들에 대해 ‘그럴만 한 부류’라고 생각하거나 김선일씨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너도나도 달려들었던 세간에는 이 영화를 통해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해 달리 바라보게 해주는 계기를 제공해줄 수 있을테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은 김선일씨의 소식만 전해듣기만 했을 때에도 이미 고통스러워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추격자>는 성취를 담보로 넘지 말았어야 하는 선을 넘어가버린 영화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통해 직접 느낀 부분은 아니었으나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 읽던 중에 의외라고 생각되었던 부분을 언급하고자 한다. 나홍진 감독은 극중 영민과 같은 연쇄살인범들에 대해 “원래 그런 놈들이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극이 진행되면서 점차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중호까지도 영민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 말종들을 키우고 방치하는 시스템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이고 또 그것을 전달하고자 했다는 얘기는 이런 류의 영화를 숱하게 봐온 관객의 입장에서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부분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의 학대로 인해 성격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대목은 이제 지겹다. 차라리 <추격자>의 영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 <친절한 금자씨>의 백 선생(최민식)과 같이 굳이 설명하지 않는 편이 낫다. 어차피 유전적인 요소도 있다지 않는가. 굳이 두둔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뭔가를 설명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런 캐릭터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는가라고 본다. 안톤 쉬거는 그 자체로 피도 눈물도 없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형상화한 캐릭터이고 백 선생 역시 재미삼아 유아들을 살해하는, 그리하여 살려둘 가치가 전혀 없는 말종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런 말종에 대한 복수에 대한 복수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한 장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영민은 너무 현실적인 악몽이다. 그 역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부분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겐 영화 속 캐릭터로만 끝나지를 않는다. 더군다나 김윤석의 카리스마를 압도하는 하정우의 연기로 인해 더 강한 잔상을 남겨주기까지 한다. <추격자>에서 시스템의 불완전함은 누구도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는 주변 환경으로만 남게 되고 결국 강조되는 건 하정우가 연기한 영민의 극악한 캐릭터다. 나는 적어도 나홍진 감독이 이런 캐릭터를 사용할 때에는 나름의 대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균형있는 시각을 갖고 있기를 바랬다. 최소한 “원래 그렇다”는 식은 아니길 기대했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작품 의도상 접을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해주길 바랬다. 경찰 조직과 사법 제도의 결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경각심을 일으키고 공론화를 하고자 했던 의도가 전혀 없다. 단지 분노할 뿐이다. 그 분노의 힘으로 완성도 높은 한국영화 한 편이 나오게 된 것이지만, 그리고 이런 정로의 완성도로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굳이 고민을 할 필요조차 없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된 것과 그걸 얻는 과정에서 무시된 ‘지켜주었으면 했던 어떤 것들’을 맞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진공 신어지

ps. 예전에 알던 어떤 분이 윤제균 감독의 <낭만자객>(2003)을 호되게 비판하는 걸 들었던 기억이 이제사 난다. 그 양반 얘기가 “영화에는 넘어서는 안될 선이 있다고 믿는데 <낭만자객>은 그 선을 넘어버렸다. 악당이 어린 아이를 활로 쏘아서 맞추고 아이는 공중을 붕 날아 뒷쪽의 나무에 박혀 죽더라”는 거였다. 나와는 영화 취향이 많이 다른 분이었고 <낭만자객>은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화가 전혀 아니었지만 아무튼 꽤 인상 깊은 이야기였다. 영화의 표현 방식에 아무런 제약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내 생각과는 부합되지 않았음에도 영화의 흐름상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게 관객에게 보여졌을 때에는 극장에서는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을 건드릴 수가 있겠구나 했다. 그러고 잊었었는데 같은 이야기를 내가 하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