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스카이폴”, 비정규직은 뭘해도 고달프다

 

 


 


 


 



 


 


007, 더블오세븐, 이름은 제임스 본드. 다 아시겠지만 이 친구 비정규직이다.


 


영국 해군 소속으로 국방성에 파견나갔다가 MI-6 비밀정보원(실은 살인청부업자)으로 근무 중인 일종의 별정직(실은 계약직) 공무원이다. 사실 이 친구 본업인 살인청부업으로써 보다는, MI6 공식 홍보대사로 더 혁혁한 공을 세우고있다.



이 친구의 근무기관에 대해 좀 더 설명하자면, MI6는 경량 공냉식 반자동/자동 소총으로 1960년대에 처음 도입되어 여전히 미군의 주력 소총으로 사용되고 있는 … 아 참, 이건 M16이구나.


 


MI-6는 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6의 줄임말로 원래 명칭은 SIS(Secret Intelligence Service), 즉 비밀정보국으로서 미국의 CIA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이 기관의 역사는 만 102년이 될 정도로 길고도 긴데, 더 이상 군조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 MI-6라 불리는 건 2차대전때의 활약(?)에 대한 상징성이 워낙 커서이다. 그리고 MI-5라는 기관이 있는데, 이는 내국관련정보 업무를 하며 그냥 미국의 FBI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아무튼 MI-5와 MI-6가 저지른, 그리고 저지르고 있는 온갖 악행과 정치공작들은 영국 드라마 “Spooks”(10시즌 드라마, 2002~2011)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 속살을 엿볼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닥터 하우스는 실은 MI-6 공작요원으로서 조직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액센트마저 바꿔 미국으로 잠입해 8년여동안 의사라는 신분으로 스파이 생활을 해오다가 최근에 다시 종적을 감춰 분쟁지역 어디 쯤에 잠입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제임스 본드는 이런 정치공작, 테러, 살인을 주업무로 하는 조직을 마치 세계정복을 꾀하는 악당들로부터 “자유세계”를 구해내는 정의로운 집단으로 묘사하는 선무공작에 동원되어 약 50년의 세월동안 참으로 효과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그 공적이 돈이나 지위로 환산하기 힘들 정도로 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여전히 현장근무자이다. 엔간하면 이제 MI-6 위원장 자리나 하다못해 차장이라도 시켜줄만 한데, 그는 여전히 계급마저도 중령, 아니 대령인가?



게다가 지난 50년의 세월동안 007이 조직내에서 자리를 좀 잡을라치면 여지없이 기존 인력은 해고되고 지체없이 대체인력이 투입되어왔다. 그러니까 이번이 벌써 일곱번째 대체인력 투입인 셈이다.


 


 


차기 007??? 차기 M???




 


역시나 스파이 세계에서도 비정규직은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고 고달프기 그지 없다는 걸 007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할터인데,


 


이번의 스카이폴(Skyfall) 작전은 제임스 본드가 비정규직을 벗어 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인 셈이었지만, 그마저도 허무하게 끝이 나고 조직은 계약직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채 그를 다시 현장으로 내보내고야 만다.


 


한 가지 이번 작전이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유세계”를 위협하는 악당의 정체인데, 이전의 악당들은 “세계정복”을 모토로 막대한 자금력과 어마무시한 신무기를 동원하여 들이댔던 것에 반해, 이번의 악당은 …… 실은 前 MI-6 요원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는 스포로 안쳐도 되겠죠?!)


 


이 악당은 이전에 MI-6의 열악한 재정과 예산부족을 타개하고자 미국내에서 마약자금을 탈취하는 공작에 투입되었지만 어설픈 일처리로 인해 텍사스에서 연쇄살인사건을 일으키게 되었고, 조직의 외면으로 숨을 곳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처리되었던 인물이다.


 


 


미국 공작시의 자료 사진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전의 악당들에 대해서는 그 많은 돈과 무기를 가지고 그냥 세계를 정복하면 될 걸 왜 그리도 007을 잡기 위해 그나마 잘 잡지도 못하면서 온갖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이번의 악당은 그 좋은 머리와 충성스런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왜 그리도 쓰잘데기 없는 개고생을 하는 건지 이해가 잘 되었다. 그런데 함정은 그 개고생이 구경거리로는 영 별로라는 거 ……


 


여하튼 비정규직 007이 당하는 설움은 이번 공작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이전의 악당들에 맞설 때는 세계경제가 호황이었던 시절인지라, 오징어먹물 자동차라든가 라이터총이라든가 압정발사기라든가 등의 “최신”무기들을 지급받아서 싸울 수 있었지만, 이번 미션에서는 달랑 송신기(라디오) 하나 제공받는데 그친다.


 


물론 이렇게 된데에는 007의 책임도 크다.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여 하다못해 스마트폰도 잘 활용 못하는 능력미달자로 남아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예산부족으로 인한 IT 교육미비, 체력단련활동 미지원으로 인한 저질체력 유발 등 조직의 책임이 무엇보다 크다고 하겠다.


 


하긴 경제불황이라는 핑계로 변변한 무기도 확보하지 못하고, 현장 지원 인력도 부족하여 사무실 근무자가 필드에 나가고, 전체 보안시스템을 달랑 해커 한 명이 책임지고 있는 실정이니 뭐라 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조직을 이런 지경에까지 몰아넣은 무능부실 CEO, M


 


 


그런데 이번 미션에서 여실히 볼 수 있듯이, 이제는 “비밀무기”라든가 비밀공작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너무 보잘것 없어졌다. 워낙 세상의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매우 다양하게 얽혀져 버린데다가 정보화시대가 고강도로 진행되어 누가 친구인지, 누가 적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시스템이 온통 IT화 되어있어서 그 잘난 비밀무기라고 해봤자 해킹 한 번이면 무력화되는 판이니.


 


그러다보니 결국 이번 나쁜 놈과 우리 편의 대결은 쌩 아날로그로 벌어지게 된 것인데, 이게 그나마 우리의 늙다리 제임스 본드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인지라 다행히(?) 미션을 클리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어언 50년 묵은 비정규직 스파이 007.


 


이 친구가 이전의 선무공작에서처럼 혁혁한 공을 다시 세우려면 이제는 우주로 나가서 프로메테우스를 처치하든지, 아니면 그 “수 많았던 추억 속에서 흠뻑 젖은” 본드 걸과의 지고지순한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 내든지,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지 않고서는 좀체로 그는 비정규직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뒤의 악당 꼬봉은 웃고 있는 걸 보니 정규직임이 분명하다!


 


 


 


영진공 이규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코엔 형제를 위한 변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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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의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도 무척 좋아합니다. 흥행 성적은 그리 대단한 편이 못되지만 일단 좋아하게 되면 무진장 좋아하게 됩니다. 간혹 코엔 형제의 영화이기에 갖게 되는 한없이 높은 수준의 기대치를 충분하게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작품이 나오는 일도 있습니다만 그 기본값은 언제나 수준 이상입니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그저 ‘코엔 형제의 영화’로만 따로 분류될 뿐 다른 작가들의 작품들과 뒤섞이지 않습니다. 어느새 10 여 편이 넘고 있는 필모그래피 안에서 코엔 형제의 영화들은 이제 서로에게 비교되고 인용될 뿐입니다. 어느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도 않고 익숙한 기존의 영화 문법을 따라가는 일도 없어 당황스러울 때가 자주 있습니다만 결국 관객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그 만큼의 신선함과 즐거움을 안겨주곤 합니다.

텍사스의 연쇄살인범 이야기라는 간단한 정보. 그리고 하비에르 바뎀의 싸이코 킬러 연기가 돋보이던 무시무시한 예고편. 기다릴 것도 없이 개봉 첫 날 보러 갔습니다. 그러나 뒷덜미가 뻣뻣했습니다. 이틀 전에 먼저 본 <추격자>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영화지만 <추격자>는 잘 만든 것은 알겠는데 그리 만족스럽지가 않았고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잘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만족스러운 영화 감상이 되었습니다. <추격자>에 100% 동의하지 못하는 그 무엇인가가 하필이면 유사한 소재의 외국 영화를 볼 때에도 계속 걸림돌이 되더라는 겁니다. 단순히 한국영화와 외국영화의 차이 때문인지(그렇다면 나는 한국영화는 경시하고 외국영화를 사대하는 관객인가) 아니면 좀 더 설득력있는 어떤 이유 때문인 것인지 계속 생각을 해야만 했고 그래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마음 편히 빠져들어 얼씨구나 하지를 못했습니다.

비슷한 내용과 분위기의 영화를 놓고서 한쪽 영화는 좋고 다른 한쪽은 그렇지 못하다고 할 때에는 특히 다른 한쪽이 그렇지 못한 분명한 이유를 분명히 해둬야 하는 게 맞는 일이죠. 기술적인 부분에 서 어느 쪽이 더 잘 만들었다는 걸 증명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따로 쓸 예정입니다. 그것은 곧 <추격자>가 꽤 잘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저에게 충분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해보는 글인 동시에 어쩌면 <추격자>에 대해 결국 반대표를 던지는 글이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누가 따로 물어봐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를 위해 정리해둘 필요가 있어서입니다.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기 전 <추격자>에 관해 다른 분들과 댓글을 주고 받으며, 그리고 감독 인터뷰를 읽으며 한번 더 써두어야겠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두 영화를 연달아 보는 바람에 좀 피곤한 일이 될지라도 꼭 정리를 해두어야 할 판입니다. 이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관한 이야기나 마저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추격자>와 비교하는 일을 완전하게 피할 수는 없습니다.

(스포일러가 아주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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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도 대책 없이 무자비한 연쇄살인범이 하나 나오는 건 맞습니다. 경찰이고 뭐고 간에 걸리면 다 죽습니다. 고압가스를 이용해 쇠뭉치를 발사하는 그 장비는 원래 소 잡을 때 쓰는 건데 그걸로 사람을 죽이고 다닙니다. 커다란 소음기가 부착된 산탄총도 그의 주무기입니다. 고압가스 장비는 자물통을 날려버릴 때 주로 씁니다. 그러고 다니는게 살인마가 왔다 간 흔적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런 가공할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놓고 영화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냐,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어떤 경험을 제공하느냐라고 생각합니다. 코멕 맥카시 원작의 이 이야기는 만약 다른 감독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완전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작품입니다. 그러나 코엔 형제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도 자신들만의 통찰을 전달합니다. 그런 점에서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추격자>는 이미 다른 영화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는 엄청난 서스펜스가 시종일관 넘쳐 흐릅니다. 하비에르 바뎀이 연기한 살인마 안톤 쉬거는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넘쳐 흐르는 인물인데 관객들은 그가 영화 초반에 선보인 무자비한 2연타를 이미 보았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간이 오그라들 지경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 르롤린 모스(조쉬 브롤린)는 베트남전 참전군인 출신으로 용접 일을 하다가 지금은 사냥이나 하면서 소일하는 인물입니다. 거친 외모나 말투와 달리 속은 따뜻한 ‘인간적인’ 캐릭터입니다. 그런데 그가 사냥을 하는 모습이 쉬거의 인간 사냥과 겹칩니다. 쉬거는 절대악에 가까운 ‘비인간적인’ 캐릭터이지만 결국 쉬거가 하는 일은 르롤린의 사냥과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의 즐거움과 욕망을 위해 상대방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시작부터 극단적인 상황을 보여주면서도 관객들이 갖고 있는 선악의 판별법에 의문을 던집니다.

멕시코와 미국의 갱단이 마약 거래를 하다가 서로 총질을 하고 다 죽어버린 현장을 찾은 르롤린은 그들이 남긴 거액의 돈 가방을 얻게 됩니다. 침착하게 현장을 빠져나온 르롤린은 그러나 마지막 인간적인 양심 때문에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되고 멕시코와 미국 갱단 양측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그렇게 르롤린과 쉬거의 목숨을 건 숨바꼭질이 시작되면서 영화는 여느 웰메이드 액션 영화 못지 않은 본격적인 추격전의 양상으로 전개됩니다. 이 과정에 끼어드는 제 3의 인물은 은퇴를 앞둔 보안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입니다. 영화는 르롤린과 쉬거의 추격전으로 전개되다가 쉬거와 에드의 대결로 끝을 맺는 것이 일반적인 내러티브입니다. 그러나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관객의 기대를 크게 꺾어버리는 두 번의 칼질을 해버렸습니다. 하나는 쉬거의 추격을 따돌리며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스릴러 액션을 선보이던 주인공 르롤린이 멕시코 갱들에 의해 허무하게 죽는 것이고(총 맞는 장면도 안나오고 에드가 현장에 가보니 이미 죽어있습니다) 두번째는 최근 몇 년 간 보았던 중에 가장 충격적인 마지막 컷, 에드가 식탁에서 자기 아내에게 꿈 얘기를 하던 중에 영화를 끝내버리는 겁니다. 배급사가 아카데미상 최다 부문 후보에 오른 이 영화를 소규모 개봉으로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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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엔 형제는 자신들의 전작에서도 좀처럼 잘 하지 않던 ‘신나게 썰을 풀다 말고 갑자기 획 돌아서 버리는 결말’을 통해 두 가지 성과를 얻었습니다. 하나는 다른 왠만한 상업영화 보다 훨씬 강력한 긴장과 흥분을 제공했으면서도 끝내 자신들의 영화가 상업적인 영화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만드는 비타협적인 근성을 과시한 점이고, 그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또 하나는 앞에서 언급한 ‘영화를 통해 정말 말하고자 했던 바’에 집중하도록 관객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기승전결에서 갑작스럽게 ‘결’을 제공받지 못한 관객은 영화의 내용 전체를 다시 되새김질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이게 대체 뭐냐, 역정만 낼 수도 있겠지만요. 하지만 사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결말은 영화에서 본 그 결말 그대로입니다. 르롤린은 허망하게 죽었지만 쉬거와 에드가 마지막 대결을 펼쳐서 권선징악과 영웅주의를 완성하거나, 에드가 죽어나 둘 다 죽어서 슬픔과 허무의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주어진 명대로 “아무도 앞 일을 알 수 없는”, 그리고 “확실한 건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것 하나 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래도 충분치 않은 분들을 위해 한 가지 더 언급해봅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지역적 배경은 텍사스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해 너도 나도 안톤 쉬거처럼 변해버린 냉혹한 세상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안톤 쉬거는 뭔지 모르지만 자신만의 원칙을 가진 인간 사냥꾼이었습니다. 그 원칙에 따라 동전 던지기를 해서 맞추면 살려주기도 하고 못맞추면 죄 없는 여인(죽은 르롤린의 아내)도 끝까지 쫓아가 목숨을 빼앗습니다. 그런 쉬거도 교차로에서 갑자기 달려들어온 교통사고는 피할 길이 없었고 팔이 부러진 채로 조용히 사라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쉬거에게 티셔츠를 제공한 댓가로 돈을 받은 아이는 그 돈을 탐내는 이기적인 친구와 말다툼을 합니다.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단 탐욕의 게임에 발을 들여놓은 자는 그 게임으로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을 풍경처럼, 그리고 인물들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영화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입니다. 새로운 게임의 법칙에 초대받지 못한 노인은 저 세상으로 갈 날만을 기다리는 무력한 존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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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ps. <추격자>에서도 여자가 죽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도 여자가 죽습니다. 모두 중심 인물은 아니지만 꽤 비중 있는 조역입니다. <추격자>는 여자가 죽는 장면을 매우 극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며 최대한 활용합니다. 그러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죽는 장면도 죽은 모습도 나오지 않습니다. 앞뒤 정황 상 죽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 결과가 불분명하게 표현되기 때문에 관객에 따라서는 ‘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한쪽은 죽음을 활용하고 다른 한쪽은 지나칩니다. 이런 부분 역시 <추격자>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중요한 차이점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냐.


 

온오프라인 평론가들의 성찬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했다.
영화의 절반에 해당하는 살인마 쉬거(하비에르 바르뎀)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쉬거는 그 존재만으로도 영화 속 세계의 중력장이 일그러지는 느낌을 줄 만큼 생생했다. 그 앞에서는 심지어 초코바 포장지까지도 덜덜덜 떤다. 그는 사실 인간이라기보다는 운명 혹은 죽음의 상징에 가깝다. 그의 행동은 인간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컴퓨터 프로그램의 결과물이다. 그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방식, 동전던지기만 봐도 그렇다. 동전을 던져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앞면과 뒷면이다. 0과 1, 그는 디지털 코드인 이진법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지금까지 나온 가장 참신한 <터미네이터>의 재해석” 이라고 평한 한동원에게 100% 동의한다. 쉬거가 있었기에 이 낡은 시절의 이야기는 21세기에 어울리는 새로운 영화가 될 수 있었다.



그대로 잠시 서 계시겠습니까?


아… 이 똘끼 제대로 뿜어주시는 포스…

내가 공감하지 못한 것은 영화의 나머지 절반인 에드(토미 리 존스)의 부분이다. 늙은 보안관 에드의 감정은 한 마디로 무력감이다. 쉬거가 휩쓸고 지나간 살인 현장을 돌아보며 그는 이번 상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임을 감지하고 무력감을 느낀다. 그가 수사를 위해 미국 서부의 다른 지역을 찾아갈 때마다 해당 지역 담당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이들은 모두 근심이 가득한 어두운 얼굴로 술집에 앉아 읖조린다. “세상이 우찌될라꼬..”

세상이 어찌되긴 뭘 어찌되는가.

그들이 그렇게 근심하던 1980년대 이후 27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에드의 젊은 시대 역시 그의 회상만큼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의 모티브가 되었던 에디 게인의 행각이 발각된 것이 1957년이다. 1964년에 제노비스는 뉴욕 주택가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1969년에 찰스 맨슨 패거리는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인 샤론 데이트와 친구들을 난자해 죽였다. 1960년대까지 미국은 마치 지금 이라크에서 그러는 것처럼 베트남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댔고 그 여파는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 흉악한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마약을 퍼트렸고, 미국의 공업생산성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통계를 살펴보면 강력범죄사건의 비율은 지금보다 오히려 그때가 더 심각했다. 간단히 말하자. 문제는 언제나 있었으며, 과거가 지금이나 미래보다 더 나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것은 세상의 이치다. 세상은 젊은이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의 세상이 옛날 잣대로 보자면 황당하고 위험해보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봐도 황당하고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몇 개월간, 나는 이 나라가 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품목별 가격통제(도대체 만원짜리 바지와 수십만 원짜리 바지가 공존하는 요즘 세상에서 ‘바지’의 가격은 어떻게 정하려는가?), 휴일 없이 일하라 다그치는 공직사회, 경부고속도로의 신화를 운하로 재현하겠다는 토건 정책, 온갖 곳에 끼어들어 전문성을 무시하고 시시콜콜이 참견하는 대통령에서 나는 1980년대 혹은 그 이전을 느낀다. 얼마나 혀를 꼬는지를 가지고 영어실력의 우열을 가릴 수 있다는 주장은 막 아메리칸 드림이 피어오르던 1970년대에 어울린다. 딱 자기들 존재의 급수에 어울리는 어색한 영어이름을 가진 단체가 내놓은 자칭 교과서는 일제시대를 떠올리게 하며, 심지어 신에게 뭔가를 봉헌하기를 좋아하는 전직시장의 행보는 제정일치시대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정서는 이 나라가 북한과 총탄을 교환하던 1950년대에 매몰된 노인네들의 정서다. 도대체 지금 좌우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24번의 ‘바지’ 를 보며 나는 “엄마바지~ 아빠바지~ 꾸에꾸에” 를 흥얼거렸다…

‘노인들을 위한 나라’에서 살아본 몇 개월은 이 영화에 대한 내 태도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에드가 정확히 무엇을 걱정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에드의 세상이 가고 낯선 세상이 오는 것이 무서운게 아니라, 그런 세상이 오지 않는 것이 더 무섭다는 점이다.

에드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기 한계를 알고 물러설 줄 알았기 때문이다. 모스가 죽어나간 모텔방에 들른 에드는 이미 쉬거가 돈가방을 챙겨갔음을 발견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한번 쉬고는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난다. 혹여 그가 범죄현장을 한번 더 수색할 생각을 했더라면, 그 역시 쉬거의 희생자 명단에 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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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기다리는 방에 들어서려는 에드

노인이 현명한 것은 자신의 한계와 물러날 때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때 되었으면 제발 좀 사라져줘라.

지금은 당신들이 좌지우지할 시대가 아니다.


영진공 짱가

영화 <추격자>가 남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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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가 장안의 화제다. 잘 만들어진 스릴러 영화 한 편이 높은 완성도의 한국영화를 갈망해온 국내 객석의 환호를 받고 있다. 완성도 높은 한국영화에 대한 갈망은 곧 자국 영화에 대한 자부심을 갈망함에서 비롯된다. 자기 나라와 자기 민족에 대한 자부심은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사람들은 자기 소속 집단, 선택이 아닌 운명적으로 그 소속이 결정되어버린 공동체에 대해 자부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자국의 영화 뿐만 아니라 스포츠 행사나 기타 문화적 우위를 과시할 수 있는 일들에 열광한다. 반면에 국보 1호를 불태워 먹는다거나 하는 일에는 무한한 쪽팔림을 경험한다. 그러나 안심하라. 우리나라만 유난스러운 건 결코 아니다. 애국주의 마케팅으로 한 두 건 올리는 경우는 여기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쪽팔림과 자부심에 대한 갈망은 동전의 양면이요 같은 배에서 나온 이란성 쌍둥이나 다름이 없다. 쪽팔린 일이 아직 많다보니 자부심에 대한 갈망이 약간 강할 뿐이다. 쪽을 팔 일이 적어지고 지난 일들을 상기할 일이 없어질 때 즈음 과도한 갈망 역시 고개를 숙이게 될 일이다.

물론 <추격자>는 애국주의 마케팅(그 자체만으로는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영화다. <추격자>에 대한 지지에서 그런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그건 결과론일 뿐이다. 내용으로만 보면 오히려 그 반대다.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조롱하고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냐고 질문하는 영화다. 그럼에도 <추격자>는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는 영화이고 그래서 한국영화에 대한 자부심마저 느낄 수 있게 한다. 요즘 우리나라 영화 관객들은 한국영화 보는 걸 몹시 좋아하는데 문제는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줄 만큼 완성도를 갖춘 영화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거품 경제를 토대로 피어났던 1996년의 르네상스와 이후 2003년 황금의 해를 통과하기까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이전 보다 많이 좋아진 면모를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만들어지는 숫자에 비해 충분하게 만족할만한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그래서 <추격자>는 완성도의 가뭄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잘 자란 묘목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묘목을 잘 키워서 2008년의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목으로 키워주고 싶은 마음은 인지상정이다.

<추격자>가 남긴 가장 값진 선물은 무엇보다 한국영화의 훌륭한 성공 사례다. 엄청나게 고된 여건에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한 편의 성공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은 대규모의 투자나 얄팍한 컨셉에 스타 캐스팅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영화를 직접 만드는 이들의 치열한 근성과 재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작품이 <추격자>다. 그리고 <추격자>는 그렇게 기억되어야만 한다. 이번 기회에 작품을 선택하는 관객들의 요구 수준이 이 정도라는 점을 한국 영화계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적당한 기획으로 만들어 놓고 배급력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으로는 돈 놓고 돈을 절대 먹을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저예산 상업영화나 독립영화 쪽도 마찬가지다. <추격자>는 이러저러한 점이 잘 되었다고 조목조목 설명할 필요도 없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만든 이들의 성실함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장르나 내용, 주제가 좋고 나쁨을 떠나 관객이 영화를 통해 ‘정성들여 만든 느낌’을 얻는다는 건 작품이 관객들로부터 받아들여지는 과정에 있어 아주 기본적인 사항이고, 이는 뛰어난 재능과 용기를 앞세우기 보다는 엄청나게 길고 고된 과정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결과물이다.

<추격자>는 나홍진이라는 걸출한 신인 감독을 또 하나의 선물로 안겨주었다. 데뷔작에서부터 뛰어난 재능과 근성을 보여준 감독들은 많지만 상업적인 성공까지 거둔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영화 팬들은 <추격자> 한 편으로 한국영화계의 일약 유망주로 떠오른 나홍진 감독의 존재를 몹시 반가워한다. 그가 앞으로 선보일 완성도 높은 영화들을, 그리하여 감상 자체가 만족스러울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한국영화에 대한 자부심마저 느낄 수 있게 해줄만한 작품들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홍진 감독의 존재는(나아가 이 영화에 참여한 주요 스텝들의 존재는) 관객들 보다도 기존의 감독들이나 앞으로 영화 만드는 일을 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상당한 자극제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값지다. 앞으로 나홍진 감독과 같은 신인 감독들이 더 많이 나와주길 바라는 마음 또한 인지상정이다. 그러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관객이 알 바는 아니다. 관객이 할 일은 기성 감독이든 신인 감독이든 가리지 않고 좋은 작품에는 좋은 대로, 미흡한 작품은 미흡한 대로 직관적으로 반응해주는 일 뿐이다.

그러나 <추격자>가 우리에게 남겨준 건 값진 선물만이 아니다. 이제부터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추격자>가 상당히 잘 만들어진 한국영화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이 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질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양적인 면에서도 성공적인 작품으로 남게되길 바라는 마음은 한결 같지만 <추격자>는 개인적으로 마음 편히 환호해줄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모방 범죄가 걱정된다는 얘길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불편한 점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흥미롭게만 바라볼 수 없었던, 뒷덜미를 잡아끄는 무엇인가가 분명 있었는데 이후로 이 영화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또 다른’ 반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래서 감독 인터뷰 등의 관련 기사를 읽어보며 그 정체를 알고자 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경험해왔던 <추격자>와 유사한, 그러나 <추격자>와 같지 않았던 다른 영화 체험들을 기억해내고 또한 비교했다. 그리하여 <추격자>에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지극히 주관적인 경험과 논리에 근거해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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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랑스 영화감독인 가스파 노에(Gaspar Noe)의 2002년 작품이다. 장편 데뷔작 <아이 스탠드 얼론>(1998)을 통해 자신의 반사회적 성향을 거침없이 드러낸 바 있던 가스파 노에는 벵상 까셀과 모니카 벨루치를 꼬드겨 전무후무한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과 같이 시간 흐름의 역순으로 배치된 롱테이크 씨퀀스들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다룬다. 젊은 연인이 파티에 갔다가 말다툼을 하게 되고, 집으로 가려던 여자(모니카 벨루치)가 지하보도에서 괴한에게 폭행을 당한다. 애인의 처참한 몰골을 뒤늦게 발견한 남자(벨상 까셀)이 괴한을 추적하고, 마침내 지하 SM 클럽에서 발견한 괴한(이라고 생각한 남자)을 그 자리에서 죽인다는 얘기다. 살인 장면은 일반적인 극장 상영용 영화에서 허용되는 기준치를 훨씬 초과하고 원테이크로 처리되는 성폭행 장면은 상상을 초월한다. 폭행 자체만 무서운 것이 아니라 특별한 폭행의 동기가 없기 때문에 더욱 무서운 장면이었으며 그 긴 시간 동안 지하보도를 지나가려던 다른 행인이 발길을 돌리는 모습 또한 너무 사실적인 만큼 충격으로 다가왔다.

영화 촬영 후 모니카 벨루치가 병원에 입원을 해야만 했었다는 <돌이킬 수 없는>을 나는 2003년의 본 영화들 중 베스트 10의 하나로 꼽았다. 영화는 너무 힘들었지만 완벽하게 통제된 잘 만든 영화라는 사실과 이 영화를 통해 전달받은 정서적인 충격(끝까지 보면 역겨움과 두려움만 있는 영화는 아니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현 방식에서나 영화가 다룰 수 있는 내용 자체에 어떠한 제한도 있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영화의 가능/불가능과 호불호를 정하는 것은 만드는 이와 관객이지 정부 기관이나 평론 집단과 같은 제 3자가 미리 할 일은 아니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영화가 전달한 정서적 충격이 감내할만한 수준이었던 탓도 있었지만(아마도 어떤 관객들은, 특히 여성 관객들은 도저히 감내가 안될 수도 있다) 그것이 외국 영화,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장소에서 내가 어울려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연기한 영화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엔 별의별 영상물이 다 있고, 심지어는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을 찍은 스너프 필름이라는 것도 있다. 그걸 만드는 사람들도 엽기지만 그걸 구해다 보는 수요층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상업적으로 유통이 된다는 사실 자체가 엽기다. 그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영화를 보면서 끔찍한 장면을 감내하고 또한 어렵지 않게 잊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판타지로 인식되기 때문이고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 영화라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연출된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연기하는 티가 나고 영화 찍은 티가 나는 허술한 영화가 좋을 리는 없다. 가급적이면 영화를 보는 동안 만큼은 정신없이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영화가 잘 만든 영화다. <돌이킬 수 없는>은 저것이 실제인지 연기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사실적인 영화다. 하지만 충분히 객관화가 가능하다. 나와는 관련이 없는 딴 세상 이야기라고 묻어둘 수 있는 영화다.

<추격자>는 잘 만들어진 그 만큼의 정서적인 충격을 주는 영화다. 더군다나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그리고 실제 있었던 연쇄살인 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만든 영화다. 한국 영화가 한국적인 소재로 그렇게 끔찍한 이야기를 너무 사실적으로 보여주니 외국 영화 볼 때와는 이야기가 다르다는 얘기다. <추격자>는 다양한 부분에서 기존의 한국 영화로부터 진일보한 만듬새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끝내 미진(서영희)가 영민(하정우)의 장도리에 맞아죽는 것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주인공 중호(김윤석)가 애타게 찾으러 다녔고 또한 어린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당연히 살아남을 것으로 기대하는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도식을 벗어났다는 점 자체는 칭찬 받을만 하다. 하지만 <추격자>의 이 장면에서 받은 일부 관객들의 충격은 예상할 수 있었던 수준 이상이다. 영화 한 편을 보고 관객이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다면, 예를 들어 대인기피증과 같은 노이로제 증세라도 얻게 된다면 그건 영화가 넘지 말았어야 할 선을 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선택이 상업적인 고려에 의한 것이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작품 지상주의에 의해 의도된 것이었다면, 그러니까 일부 여성 관객들의 과도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런 장면들을 타자화해서 봐줄 수 있는 관객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계산 하에 이루어졌던 것이라면 과연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추격자>와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는 유사점이 상당히 많은 작품이다. 싸이코 패스 계열의 연쇄살인마가 등장한다는 점 외에도 영화가 남겨주는 씁쓸한 패배감과 좌절감은 거의 동일한 수준이다. 끔찍한 장면이 많기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쪽이 훨씬 심하다. 그러나 지켜야 할 선은 지킨다. 바로 굳이 안보여줘도 될 장면은 안보여주고 넘어간다는 사실이다. <추격자>는 작품의 의도와 흐름 상 미진이 영민의 손에 의해 죽는 것이 맞다. <추격자>는 미진의 머리가 영민이 휘두르는 장도리에 찍히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지만 않을 뿐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미니멀한 음악을 배경으로 영민의 클로즈업된 얼굴과 방 안의 사방 벽에 미진의 피가 튀고 마지막에는 눈을 뜬 채 의식을 잃은 미진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는데 장도리에 맞아 흔들리는 모습까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어디까지나 연출된 장면이라는 걸 감안하여 보는 사람도 있고 이 장면을 계기로 영민과 중호의 짐승 같은 싸움에 활력이 붙었다는 사실과 영화 전체가 상업영화의 울타리에서 박차고 나왔다는 사실은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이 장면에서 은근한 쾌감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와는 정반대의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르롤린(조쉬 브롤린)의 아내 칼리진(켈리 맥도날드)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은 건 다름 아닌 관객을 위한 최후의 배려다. 더군다나 우리에겐 외국 영화로서 현실감마저 덜 하다. 영화를 통해 얻는 서스펜스와 몸이 아프고 후유증이 올 만큼의 정서적 충격은 분명 다른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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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한국영화로서 끔찍하기로 이름난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2001)은 <추격자>가 또 다른 맹점을 지적하기 위한 비교 대상이다. 기술적인 완성도와 사실적인 묘사로 치면 <복수는 나의 것>이 몇 수는 위다. 그러나 <복수는 나의 것>의 인물들은 관객이 납득할만한 동기를 갖고 있다. 류(신하균)는 죽은 누나에 대한 원한과 장기매매단과의 거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이유로 살인을 한다. 동진(송강호)는 죽은 딸에 대한 원한 때문에 영미(배두나)와 류를 고문하고 살해한다. 끔찍하기로는 동진 앞에서 자신의 배를 칼로 긋는 팽 기사(기주봉)도 마찬가지지만 그 심정이야 불을 보듯 뻔하다. <복수는 나의 것>은 원한과 복수의 굴레에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관객은 각각의 분명한 동기를 지닌 등장 인물들을 타자화하며(그런 끔찍한 사연이 자신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자신도 그와 같은 방식의 복수를 고려할 일 조차 없을 것이므로) 유유히 극장을 빠져나가게 된다. 연민은 챙기고 극장에서 목격한 악몽을 잊는 것이다. 물론 <복수는 나의 것>은 국내 관객들에게 철저히 버림받은 작품이 되었다. 한국영화라서 도저히 남의 일 같지가 않은 데다가 개운하게 입가심도 시켜주지 않은 영화였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보완한 작품이 <올드보이>(2003)였고 <친절한 금자씨>(2005)도 끔찍한 건 매한가지였지만 한발 더 나아가 그런 방식의 대응이 과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해 나직하게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었다.

<추격자>는 복수극이 아니라 무차별적인 연쇄살인을 소재로 하는 영화다. 뚜렷한 동기가 없는 살인이니 길 가다가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관객들은 그와 같은 일이 지금도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심지어 사법 제도와 시스템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잡았던 범인들조차 유유히 다시 걸어나올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감독은 그런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했고 그 분노를 영화 속에 잘 담아냈다. 그러나 여기에 공노하며 영화의 흐름을 계속 따라갈 수 있는 관객은 주로 남자 관객들이다. 다행히 여자 범죄자에 의해 남성들이 연쇄살인을 당한 사례는 적어도 국내에는 아직 없기 때문에 영화 속의 상황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히 여성 관객의 경우 그런 장면에 공노만 할 수가 없다. 당장의 두려운 현실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미진을 살려둘 수는 없었는지, 그게 아니라면 영민이 구멍가게에서 나오고 이후에 경찰들과 동네 사람들이 몰려든 장면만으로 미진이 죽었음을 알리는 것만으로는 정말 부족했던 것인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미진은 영민이 불러 살해해온 창녀들 가운데 하나였다. 유영철 사건 이후 희생자들에 대한 직업적 편견을 접한 나홍진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를 보고 출장 마사지 여인이 죽지 않기를 바라도록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미진은 어린 딸 하나를 부양하는 여성으로 등장한다. 그나마 몸이 아파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중호의 협박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나갔다가 변을 당한다. 감독의 의도대로 관객은 미진을 특이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 내 누이, 내 가족의 하나와 마찬가지인 현실적인 여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미진이 살아남기를 바라게 되고 마침내 죽었을 때에 고통스러움을 느낀다. <추격자>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모든 요소가 감독의 의도대로 잘 만들어진 영화다. 그러나 너무 잘 되어서 탈이다. 유영철의 희생자들에 대해 ‘그럴만 한 부류’라고 생각하거나 김선일씨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너도나도 달려들었던 세간에는 이 영화를 통해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해 달리 바라보게 해주는 계기를 제공해줄 수 있을테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들은 김선일씨의 소식만 전해듣기만 했을 때에도 이미 고통스러워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추격자>는 성취를 담보로 넘지 말았어야 하는 선을 넘어가버린 영화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화를 통해 직접 느낀 부분은 아니었으나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 읽던 중에 의외라고 생각되었던 부분을 언급하고자 한다. 나홍진 감독은 극중 영민과 같은 연쇄살인범들에 대해 “원래 그런 놈들이다”라고 말한다. 심지어 극이 진행되면서 점차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결국 중호까지도 영민과 같은 부류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 말종들을 키우고 방치하는 시스템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이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이고 또 그것을 전달하고자 했다는 얘기는 이런 류의 영화를 숱하게 봐온 관객의 입장에서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부분이다. 나 역시 어린 시절의 학대로 인해 성격 장애를 갖게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대목은 이제 지겹다. 차라리 <추격자>의 영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 <친절한 금자씨>의 백 선생(최민식)과 같이 굳이 설명하지 않는 편이 낫다. 어차피 유전적인 요소도 있다지 않는가. 굳이 두둔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거나 뭔가를 설명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런 캐릭터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는가라고 본다. 안톤 쉬거는 그 자체로 피도 눈물도 없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형상화한 캐릭터이고 백 선생 역시 재미삼아 유아들을 살해하는, 그리하여 살려둘 가치가 전혀 없는 말종이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런 말종에 대한 복수에 대한 복수가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한 장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영민은 너무 현실적인 악몽이다. 그 역시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부분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우리에겐 영화 속 캐릭터로만 끝나지를 않는다. 더군다나 김윤석의 카리스마를 압도하는 하정우의 연기로 인해 더 강한 잔상을 남겨주기까지 한다. <추격자>에서 시스템의 불완전함은 누구도 쉽게 답을 찾을 수 없는 주변 환경으로만 남게 되고 결국 강조되는 건 하정우가 연기한 영민의 극악한 캐릭터다. 나는 적어도 나홍진 감독이 이런 캐릭터를 사용할 때에는 나름의 대안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균형있는 시각을 갖고 있기를 바랬다. 최소한 “원래 그렇다”는 식은 아니길 기대했다. 그리하여 인간에 대한 연민을 작품 의도상 접을 수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해주길 바랬다. 경찰 조직과 사법 제도의 결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경각심을 일으키고 공론화를 하고자 했던 의도가 전혀 없다. 단지 분노할 뿐이다. 그 분노의 힘으로 완성도 높은 한국영화 한 편이 나오게 된 것이지만, 그리고 이런 정로의 완성도로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더라면 굳이 고민을 할 필요조차 없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우리가 얻게 된 것과 그걸 얻는 과정에서 무시된 ‘지켜주었으면 했던 어떤 것들’을 맞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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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ps. 예전에 알던 어떤 분이 윤제균 감독의 <낭만자객>(2003)을 호되게 비판하는 걸 들었던 기억이 이제사 난다. 그 양반 얘기가 “영화에는 넘어서는 안될 선이 있다고 믿는데 <낭만자객>은 그 선을 넘어버렸다. 악당이 어린 아이를 활로 쏘아서 맞추고 아이는 공중을 붕 날아 뒷쪽의 나무에 박혀 죽더라”는 거였다. 나와는 영화 취향이 많이 다른 분이었고 <낭만자객>은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영화가 전혀 아니었지만 아무튼 꽤 인상 깊은 이야기였다. 영화의 표현 방식에 아무런 제약도 두지 말아야 한다는 내 생각과는 부합되지 않았음에도 영화의 흐름상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게 관객에게 보여졌을 때에는 극장에서는 절대 보고 싶지 않은 그 무엇을 건드릴 수가 있겠구나 했다. 그러고 잊었었는데 같은 이야기를 내가 하게 될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