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스카이폴”, 비정규직은 뭘해도 고달프다

 

 


 


 


 



 


 


007, 더블오세븐, 이름은 제임스 본드. 다 아시겠지만 이 친구 비정규직이다.


 


영국 해군 소속으로 국방성에 파견나갔다가 MI-6 비밀정보원(실은 살인청부업자)으로 근무 중인 일종의 별정직(실은 계약직) 공무원이다. 사실 이 친구 본업인 살인청부업으로써 보다는, MI6 공식 홍보대사로 더 혁혁한 공을 세우고있다.



이 친구의 근무기관에 대해 좀 더 설명하자면, MI6는 경량 공냉식 반자동/자동 소총으로 1960년대에 처음 도입되어 여전히 미군의 주력 소총으로 사용되고 있는 … 아 참, 이건 M16이구나.


 


MI-6는 Military Intelligence, section 6의 줄임말로 원래 명칭은 SIS(Secret Intelligence Service), 즉 비밀정보국으로서 미국의 CIA와 같다고 보면 되겠다. 이 기관의 역사는 만 102년이 될 정도로 길고도 긴데, 더 이상 군조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 MI-6라 불리는 건 2차대전때의 활약(?)에 대한 상징성이 워낙 커서이다. 그리고 MI-5라는 기관이 있는데, 이는 내국관련정보 업무를 하며 그냥 미국의 FBI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아무튼 MI-5와 MI-6가 저지른, 그리고 저지르고 있는 온갖 악행과 정치공작들은 영국 드라마 “Spooks”(10시즌 드라마, 2002~2011)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 속살을 엿볼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닥터 하우스는 실은 MI-6 공작요원으로서 조직의 명령에 따라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액센트마저 바꿔 미국으로 잠입해 8년여동안 의사라는 신분으로 스파이 생활을 해오다가 최근에 다시 종적을 감춰 분쟁지역 어디 쯤에 잠입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제임스 본드는 이런 정치공작, 테러, 살인을 주업무로 하는 조직을 마치 세계정복을 꾀하는 악당들로부터 “자유세계”를 구해내는 정의로운 집단으로 묘사하는 선무공작에 동원되어 약 50년의 세월동안 참으로 효과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그 공적이 돈이나 지위로 환산하기 힘들 정도로 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여전히 현장근무자이다. 엔간하면 이제 MI-6 위원장 자리나 하다못해 차장이라도 시켜줄만 한데, 그는 여전히 계급마저도 중령, 아니 대령인가?



게다가 지난 50년의 세월동안 007이 조직내에서 자리를 좀 잡을라치면 여지없이 기존 인력은 해고되고 지체없이 대체인력이 투입되어왔다. 그러니까 이번이 벌써 일곱번째 대체인력 투입인 셈이다.


 


 


차기 007??? 차기 M???




 


역시나 스파이 세계에서도 비정규직은 미래에 대한 비전도 없고 고달프기 그지 없다는 걸 007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할터인데,


 


이번의 스카이폴(Skyfall) 작전은 제임스 본드가 비정규직을 벗어 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인 셈이었지만, 그마저도 허무하게 끝이 나고 조직은 계약직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한채 그를 다시 현장으로 내보내고야 만다.


 


한 가지 이번 작전이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자유세계”를 위협하는 악당의 정체인데, 이전의 악당들은 “세계정복”을 모토로 막대한 자금력과 어마무시한 신무기를 동원하여 들이댔던 것에 반해, 이번의 악당은 …… 실은 前 MI-6 요원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는 스포로 안쳐도 되겠죠?!)


 


이 악당은 이전에 MI-6의 열악한 재정과 예산부족을 타개하고자 미국내에서 마약자금을 탈취하는 공작에 투입되었지만 어설픈 일처리로 인해 텍사스에서 연쇄살인사건을 일으키게 되었고, 조직의 외면으로 숨을 곳을 찾지 못해 헤매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처리되었던 인물이다.


 


 


미국 공작시의 자료 사진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전의 악당들에 대해서는 그 많은 돈과 무기를 가지고 그냥 세계를 정복하면 될 걸 왜 그리도 007을 잡기 위해 그나마 잘 잡지도 못하면서 온갖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는데, 이번의 악당은 그 좋은 머리와 충성스런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왜 그리도 쓰잘데기 없는 개고생을 하는 건지 이해가 잘 되었다. 그런데 함정은 그 개고생이 구경거리로는 영 별로라는 거 ……


 


여하튼 비정규직 007이 당하는 설움은 이번 공작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데, 이전의 악당들에 맞설 때는 세계경제가 호황이었던 시절인지라, 오징어먹물 자동차라든가 라이터총이라든가 압정발사기라든가 등의 “최신”무기들을 지급받아서 싸울 수 있었지만, 이번 미션에서는 달랑 송신기(라디오) 하나 제공받는데 그친다.


 


물론 이렇게 된데에는 007의 책임도 크다.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여 하다못해 스마트폰도 잘 활용 못하는 능력미달자로 남아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예산부족으로 인한 IT 교육미비, 체력단련활동 미지원으로 인한 저질체력 유발 등 조직의 책임이 무엇보다 크다고 하겠다.


 


하긴 경제불황이라는 핑계로 변변한 무기도 확보하지 못하고, 현장 지원 인력도 부족하여 사무실 근무자가 필드에 나가고, 전체 보안시스템을 달랑 해커 한 명이 책임지고 있는 실정이니 뭐라 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조직을 이런 지경에까지 몰아넣은 무능부실 CEO, M


 


 


그런데 이번 미션에서 여실히 볼 수 있듯이, 이제는 “비밀무기”라든가 비밀공작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너무 보잘것 없어졌다. 워낙 세상의 가치관과 이해관계가 매우 다양하게 얽혀져 버린데다가 정보화시대가 고강도로 진행되어 누가 친구인지, 누가 적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시스템이 온통 IT화 되어있어서 그 잘난 비밀무기라고 해봤자 해킹 한 번이면 무력화되는 판이니.


 


그러다보니 결국 이번 나쁜 놈과 우리 편의 대결은 쌩 아날로그로 벌어지게 된 것인데, 이게 그나마 우리의 늙다리 제임스 본드가 잘 할 수 있는 분야인지라 다행히(?) 미션을 클리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어언 50년 묵은 비정규직 스파이 007.


 


이 친구가 이전의 선무공작에서처럼 혁혁한 공을 다시 세우려면 이제는 우주로 나가서 프로메테우스를 처치하든지, 아니면 그 “수 많았던 추억 속에서 흠뻑 젖은” 본드 걸과의 지고지순한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 내든지,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지 않고서는 좀체로 그는 비정규직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뒤의 악당 꼬봉은 웃고 있는 걸 보니 정규직임이 분명하다!


 


 


 


영진공 이규훈


 


 


 


 


 


   


 


 


  


 


 


 


 


 


 


 


 


 


 


 


 


 


 


 


 


 


 


 


 


 


 


 


 


 

그렇다면 나는 영화를 보는 영화 관객이다

이동진 기자의 이명세 감독 인터뷰를 읽다가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습니다.

“소설가 김연수가 ‘나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다’라고 수상 소감을 쓴 걸 본 적이 있어. 무척 인상적이었지. ‘나는 영화를 찍는 영화감독이다’라고 나도 말하고 싶어. 사실 최근에 어느 자리에서 약간 농담 삼아 그렇게 말했는데, 아무도 안 웃더라고. 진짜 머쓱해졌지.(웃음)” – 이명세 감독

그래서 저도 머쓱한 말 한마디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나는 영화를 보는 영화 관객이다.”

조금 더 풀어쓰자면, 저는 영화를 고르고 보고 이야기하는 영화 관객입니다. Select, See, Share. 세상의 모든 건 과연 세 가지로 이루어졌군요. 더군다나 S만 세 개 씩이나 되시겠습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주창하며 개인의 누드 사진까지 끄집어내 까발리던 언론 매체들이 요즘 덮어주느라 바쁜 모 기업집단을 연상시켜서 ‘기분이 나쁩니다’,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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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관람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생각도 들지만 사실 순수한 영화 관객, 즉 유료 관객(Paying Moviegoer)만이 순수한 자기 의지에 따라 자유롭게 영화를 고르고 보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업계에 젖줄을 대고 있는 기자나 평론가, 그외 관계자분들은 보고 싶지 않은 영화도 봐야만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영화와 무관한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오직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만 골라 볼 수 있는 ‘영화 선택의 자유’가 있는 이들입니다. (영화 선택의 자유를 가진 관객들이 영화를 어떻게 선택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써보겠습니다)

특정 영화를 보고 싶은 이유는 사람마다 천차 만별이겠죠. 저도 때로는 그다지 땡기는 영화가 아닌 데도 ‘봐둬야 할 영화’, ‘봐줘야 할 영화’라는 판단 때문에 영화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영화 관람에 할애할 수 있는 극히 제한된 시간적 여유를 감안하여 제 과거의 경험과 볼 수 있는 영화들에 관한 정보들을 취합해 그 중 가장 보고 싶은 영화만을 골라 봅니다. 여기서 영화 선택의 절대 기준은 영화를 보는 동안 내가 얼마나 즐거울 수 있느냐가 되겠습니다.

영화를 본다는 건 2시간의 백일몽을 꾸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본다는 건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일과도 유사합니다. 낯익은 곳에 반복해서 찾아가는 것도 좋은 여행일 수 있지만 특히 영화 관람은 이전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곳으로의 여행입니다. 나의 감각과 사고를 새롭게 해주는 시청각적 체험을 하는 것이 제가 영화 관람을 통해 얻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러니 영화 보는 일이 즐거우려면 그 영화가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 완성도’를 갖춰야 하고 내가 알지 못했던 내용이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틀에 박힌 상업 영화들을 지양하고 결과적으로 작은 영화들을 주로 골라 보게 되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건 개별 작품이나 영화 이론을 해설하거나 누구를 가르치기 위함이 아니라, 영화 관객으로서 좋은 영화 한편을 보고 난 기쁜 마음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기 위함입니다. 블로그에 영화에 관해 글을 쓰는 것도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나누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여기서 중요한 점이 ‘영화 관객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영화 관객이 특정 영화에 대해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좋다, 싫다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일입니다. 저의 영화 글쓰기는 언제나 ‘내가 그 영화를 보는 중에 좋았느냐 싫었느냐’를 명확히 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그 영화를 보는 일이 즐거웠던지 즐겁지 않았던지, 그 이유를 좀 더 찾아보는 일이 저의 영화 글쓰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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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보는 영화 관객이다. 이 말은 다른 누구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저 자신에게 당부해두는 말입니다. 지난 한 주 저는 영화 관객으로서 영화를 고르고 보고 이야기하는 데에 평소와는 다른 경우들을 경험했습니다.

– 이명세 감독의 <M> : 영화를 보는 동안 즐겁지 않았는데 비평적인 관점에서는 뛰어난 영화
– 양해훈 감독의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 : 영화를 보는 동안 즐겁지 않았는데 만든 이의 사정을 고려하면 투정부리기 힘든 영화 + 감독, 주연배우 무대인사
– 인디스토리 초청 <판타스틱 자살소동> : 내 돈 내고 보지 않고 공짜로 본 영화인데다가 영화를 만든 이들과의 대화 시간까지 참석한 영화

위 세 편의 영화를 보고 글을 쓸 때마다 저는 ‘영화를 보는 영화 관객’으로서 해당 영화를 이야기하려는 저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정리된 표현이 <M>은 ‘동시대 관객들과의 소통을 포기한 영화’,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저수지에서 끝내 빠져나오지 못한 독립영화’, 그리고 <판타스틱 자살소동>은 ‘세 작품이 각자 다른 색깔을 가진 영화'(라는 적당한 발림)이었습니다. <M>은 비교적 제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게 적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저수지에서 건친 치타>와 <판타스틱 자살소동>은 여전히 저 스스로에게 완전하게 정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남습니다. 부끄러울 일은 없게 썼지만 역시 다른 때보다 직설적이지 못했습니다.

영화 관객이 공짜로 영화를 보거나 영화를 만든 이들과 접촉을 갖는다는 건 그 영화에 대해 100% 솔직하지 이야기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이번에 재삼 확인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고 경우에 따라서는 더 많아질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내내 머리 속을 맴돌던 그 얘기를 이렇게 글로 남기게 됐습니다. 나는 영화를 보는 영화 관객이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고, 내 개인의 경험과 직관에 따라 영화를 감상하며,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었던 그대로 이야기하는 영화 관객이다. 나는 영화 관객으로서 영화를 고르고 보고 글을 쓴다. 굳게 다짐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읽어주세요. 그 얘깁니다.

영화 관객으로서 영화를 고르고 보고 이야기할 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영진공 신어지

, 동시대 관객들과의 소통을 포기한 명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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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이 ‘말이 통한다’라고 하는 건 사용하는 언어가 같을 뿐만 아니라 전달하려는 내용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부합된다는 뜻입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사투리가 너무 심하다거나 전문 용어를 많이 사용해서 전달하려는 뜻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면 서로 간에 말이 통한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전혀 다른 언어권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눈빛과 표정을 통해, 그리고 필요하다면 손짓 발짓을 동원하다보면 왠만한 의사 전달이 가능하다는 것이 의사소통에 관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입니다. 서로의 뜻이 맞고 대화에 임하는 태도가 적절하다면 언어가 다를지라도 말이 통할 수가 있는 반면 똑같은 서울말을 쓰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만 늘어놓거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화법을 구사한다면 소통이 전혀 안될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말이 잘 통하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언어의 구사 능력 보다, 사실은 내 말을 듣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우선입니다. 기왕이면 상대방이 알아듣기 쉬운 표현으로 고쳐서 말하는 것이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출발점이고 설득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듣는 내 입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듣는 사람도 앉았던 자세를 고쳐잡고 조금이라도 정확히 그 뜻을 이해하려고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법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듣는 이의 입장은 아랑곳 하지 않고 지나치게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며 속사포 같이 말을 쏟아내는 사람의 말은 아무리 중요한 내용을 얘기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다지 알아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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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 감독의 새 영화 <M>의 첫 인상은 지나치게 현란하다는 겁니다. 비주얼 뿐만 아니라 배경음악과 음향효과, 배우들의 연기에 이르기까지 너무 수다스럽다 못해 스크린 밖으로 침이 튀긴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게 혹시나 ‘나태한 관객들의 의식을 각성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슬슬 부아가 치밀어오르기까지 합니다. 한 컷 한 컷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M>의 비주얼입니다만 문제는 그것을 쓸 때와 자제할 때를 가리지 않고 너무 많이 쏟아낸다는 점에 있습니다. 각 장면은 최고일지 모르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세련되지 못한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촌스럽습니다. <M>의 외연에서 촌티가 흐른다는 건 음향 효과와 배경 음악의 사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훈희 씨의 옛 노래가 촌스럽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비주얼과 마찬가지로 그 사용에 있어서 너무 지나치다는 얘기입니다.

<M>이 관객들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외연 뿐만이 아닙니다. 이명세 감독이 <M>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얘기는 영화과 전공 학생들에게나 들려줄만한 이야기입니다. 아니면 영화 창작론이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남겼어야 할 얘기입니다. 관객들에게 들려줘야 할 이야기는 그 과정이 아니라 최종 결과물입니다. 결과물만 남겼어야 할 영화의 내용을 고민의 과정으로 대체해버리니 관객 입장에서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데? 라며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디 워>가 에필로그 부분에서 심형래 감독이 나레이션으로 제작 동기와 과정을 부연 설명한 것 만큼이나 <M>을 통해 이명세 감독이 피력한 영화 예술가의 고민과 그 과정은 저와 같은 관객 입장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생뚱맞은 얘기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낯익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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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 감독이 영화 자체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고 그 결과물을 내놓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결과물이 관객들과 소통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는 ‘천상의 피조물’이라는 점입니다. 후대의 영화 작가들에게는, 특히 촬영과 조명 부분에 일익을 담당하실 분들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작품이 <M>입니다. 하지만 <M>에서 다루는 내용은 일반 관객들이 알고 싶어하는 내용이 아니고 그 화법 또한 지나치게 일방적이어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형사 Duelist>도 ‘모자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오로지 과하기만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때는 그나마 내러티브라도 살아있었습니다. 하지만 <M>은 영화가 아니라 영화 창작론 강의가 되어버렸습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내용을 알아듣기 힘든 언어로 소리지르고 있으니 광장 한복판에서 하루종일 떠드는 광인의 소리에 다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경험이 많은 정신분석학자나 의사들이야 그의 말을 받아줄 수 있겠지만 지나가던 행인들에게는 그 많은 말들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이명세 감독은 혹시 영화계의 제임스 조이스로 기억되기를 원했던 겁니까? 하지만 영화는 문학이 아닙니다. M은 모짜르트이기도 하고 모딜리아니이기도 하며, 미스테리인 동시에 메모리이기도 하겠지만, <M>에서 말하고 있는 M이란 결국 ‘명세’의 M일 뿐이니 이거 참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에 남는 의미있는 작업을 해냈다고 평가 받을 수도 있겠지만 동시대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은 완전히 포기한 영화가 이명세 감독의 2007년 영화 <M>입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