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황소”, 외부자의 눈으로 마티의 영화를 즐기는 방법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제이크 라모타라는 인간을 도저히 좋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단순포악한 성질은 그렇다 치고 의처증에 아내와 동생을 두들겨패는 그 대책없는 인생, 도대체 자기 실패를 누구 탓을 하는 거야?


 


남자들의 세계는 전혀 몰랐고 여자들의 세계에도 속해있지 못했던 나는 마틴 스콜시지의 세계의 그 누구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다만 그가 만드는 영화의 형식미에 대해, 평론가들의 권위에 기대어 감탄했을 뿐이다.

그리고 10년 뒤에 이 영화를 필름으로 다시 보고 난 후, 나는 누군가에게 “It was another movie!”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랬다. 나는 경기 중 제이크의 얼굴에서 피가 솟구치는 장면이랄지, 오프닝에서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인터메조)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제이크가 쉐도우 복싱을 하는 장면을 처음 본 이래로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제이크라는 한 인간, 위대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던 그 인간의 그 추락의 면면을 목격하고, 그에 감정이입하고, 그를 이해하는 되는 경험이 일어난 것은, 나 자신에게도 낯선 일이었다.

몸이 비대해진 것은 그의 정신 추락이 외적으로 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절정에 올라 챔피언 타이틀을 따기 전부터 이미 추락하고 있었고, 그의 파괴되어 가는 정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조를 드러내고 있었다. 최고가 되려는 그의 목적은 챔피언 벨트가 상징하는 무엇이 아니라, 물적인 챔피언 벨트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그것의 획득은 그에게는 복싱이건 인생 그 자체건, 목표의 상실을 뜻하며, 그가 챔피언쉽 시합 전 다른 시합에서 지는 것(그의 무의식은 목표의 상실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그 패배 때문에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로 순진하게 코치의 품에 머리를 박고 울 수 있는 것(영화를 통털어 그가 우는 매우 드문 장면 중 하나)은 당연한 것이다.


 


 




 


 


챔피언쉽 방어전에서 그가 딱 한 번 성공하는 것은 그 싸움의 이유를 억지로 외부에서 찾았기 때문이지만(아내가 그를 잘 생겼다고 했다!), 그런 식의 이유는 투지를 지속시킬 수 없다. 그리고 싸움을 멈춘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인생은, 이미 전조를 드러냈던 추락이 가시화되며 가속도를 맞는다.


 


한창 추락 중인 인간은 자신의 추락을 감지할 수 없다. 어느 정도의 추락이 경과된 후라야, 자기가 원래 있던 곳과 지금 있는 곳의 처지를 그 까마득한 갭을 비교하며 그제서야 알아차린다. 하지만 그땐 이미 늦다. 몸은 비대해졌고, 아내는 떠날 준비를 한지 오래이며, 돈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없다. 감옥벽을 쳐대며 “도대체 이 바보! 멍청이!”를 외칠 수밖에.


 


극도로 명암이 대비된 조명으로 찍힌 이 장면에서 나는 심장이 터지는 걸 느끼며 그와 함께 울먹였다. 이 바보! 멍청이! 내 삶은 이미 오래 전에 부서져 내리고 추락을 시작했음을, 꿈꾸었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내가 있던 그곳, 내가 떠나온 그곳이 찬란하진 않아도 은은하게 빛을 내던 아름다운 곳이었음을, 나는 얼마 전부터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깨달음은 너무 늦어버렸고, 다른 희망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른 채, 캄캄하고 좁은 감옥 안에서 그저 벽을 치면서 자학할 수밖에 없고, 그 자학의 상처에 또 고통을 느끼는 것. 언젠간 그 감옥을 나갈 거고, 그리고 다시 삶은 계속되겠지만, 상처는 남는 법이다. 그리고 비가 올 때마다 그 상처는 쿡쿡 쑤셔댈 것이다.

이제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떠났고, 과거의 영광은 과거의 것이 되었으며, 그는 초라한 클럽의 분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리허설을 하고, 스스로 격려하기 위해 I’m the boss, boss, boss를 나지막히 외친다.


 


아무렴,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떠받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만이 다시 계속되는 삶을 견딜 유일한 길이다. 『베니스에서 죽다』의 구스타프는 차라리 죽어버리지만, 그는 죽지도 못한다. 비통함은 계속되며, 아름다움은 비스콘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앞서 『베니스에서 죽다』에서 ‘추락하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의 비통한 아름다움’에 대해 썼지만, 사실 그건 반쯤 진심이기도 하고 반쯤 거짓말이기도 하다. 나는 가부장 사회가 남자들에게 얹어주는 코딱지만한 권리와, 그 권리의 이면이랍시고 몇 배로 얹어주는 어깨 위의 짐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그것과 긴밀히 연결될) 남자의 추락의 본질에 대해 내가 감정이입을 하는 구석은, 영화를 만든 이들이 기대하는 면과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이고, 상당부분은 논리적 이해와 상상의 기반을 통해서다.


 


그럼에도 이해가 많은 부분 가능한 것은, 이 세상에 남자들의 짐과 남자들의 추락에 대해 토로하는 영화와 책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며, 남자들은 모두 그것이 ‘인간의 짐’이고 ‘인간의 추락’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소수자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한,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언어 외에 메이저의 언어도 자연스레 습득한다.


 


개중에는, 다른 소수자보다 훨씬 더 잘 습득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언제나 분열된 자아 내부에서 끝없는 투쟁과 충돌을 경험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 언제나 마티 영감님의 영화들은 내게 외부의 존재였다. 이제는, 외부자의 눈으로 그의 영화를 즐기는 방법을 찾아냈다.


 


영진공 노바리

 


 


 


 


 


 


 


 


 


 


 


 


 


 


 


 


 


 


 


 


 


 


 


 


 


 


 


 


 


 


 

굿 나잇, 굿 럭



 


 


 


2006년 국내 개봉한 영화 중에,


“Good Night, and Good Luck.”이 있다.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 6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고 평론가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은 영화, 조지 클루니가 감독, 각본에 직접 출연까지 한 영화, 흑백의 차분한 영상미에 다이안 리브즈(Dianne Reeves)의 멋드러진 Jazz가 찰랑대는 영화,

그런데 이 영화,


사실 국내에서는 개봉관도 제대로 못 잡았고 한 달도 못 돼 간판을 내렸다.


 


 



 


 


 


우선 이 영화가 다루는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자면,


 


 



 


먼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에드워드 머로우(EDWARD R. MURROW).
1908년에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출생하여 1965년 뉴욕에서 숨을 거뒀다.
영화에 나오는 대로 미국 언론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으며 CBS 본사 로비에는 그의 동상이 놓여져있다 한다.


 


라디오 프로그램 “Hear It Now”를 TV로 옮긴 “See It Now”를 진행하며 소위 “PD 저널리즘”의 전형을 만들어 냈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1961년에는 케네디 대통령의 지명으로 미국 해외공보처(USIA) 처장으로 임명되어 1964년까지 재직하였다.

* USIA는 1999년에 미 국무부에 편입되었는데, VOA 방송 담당부서이고 미국 F 비자 발급기준을 정하는 부서이기도 했다.



 



 


 


그리고 에드워드 머로와 함께 “See It Now”를 제작했던 프레드 프렌들리(Fred W. Friendly).
CBS 뉴스국장을 지냈고 미국 내 공영방송인 PBS 설립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
1966년에 그는 CBS가 미국의 베트남 개입과 관련한 상원 청문회 대신에 “내 사랑 루시”를 방영하자 이에 항의하여 회사를 그만 둔다.



 


또 한 사람, 그의 동료로 나오는 뉴스 앵커 돈 할란벡(Don Hollenbeck).
2차 세계 대전 시 이탈리아 전선 종군 방송으로 명성을 얻었던 그는,
매카시 상원의원의 잘못을 지적하는 에드워드 머로의 방송 직후에 뉴스를 진행하면서 공개적으로 머로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로 인해 할란벡은 잭 오브라이언(Jack O’brian) 등 매카시를 지지하는 우익 칼럼니스트들에 의해 공개적이고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 비난이 계속되던 와중에 그는 1954년 자신의 집에서 자살을 한다.


 


 


이 영화는 위 인물들이,


1950년대에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사실을 왜곡/과장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서 미국 사회를 극도의 우경화로 몰고갔던,


 


후에 매카시즘이라 불리는 狂風을 주도했던 죠셉 매카시 상원의원을 TV 프로그램을 통해 비판하면서 벌어졌던 에피소드를 허풍이나 과장 없이 차분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사실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2006년 개봉 당시 대한민국의 관객들에게 어떤 공감도, 분노도, 긴장도 전해주지 못했다. 그저 먼 옛날 남의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이 영화가 80~90년대의 우리 관객, 아니 개봉 이후 겨우 6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 관객들에게 보여진다면 과연 어떤 반응이나 반향이 나올까.


그리고 지금의 우리 젊은 관객들에게 매카시즘이란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자신의 생각과 신념 때문에 인권이 침해되고 인신이 구속된다는 것.
자신의 생각과 신념이 단지 일부 기득권 층의 그것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공권력에 의해 위해를 당하고 그것이 당연시 되는 것.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권력의 이익에 반한다하여 감시당하고 견디기 힘든 불이익이 닥쳐드는 것.


정도의 차이는 있다고 해도, 과연 지금 그게 먼 옛날 남의 일이라 할 수 있을까.


 


80, 90년대에 우리들은 이런 얘기를 하곤 했었다.
미국은 그나마 기본적인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미국의 언론인들은 하고자 하는 말은 하고야 마는 언론인의 자세를 가지고 있다,
우리도 이러한 언론의 자유, 언론인의 자세를 원한다,



허나 그게 가능하기 위해 수많은 평범하고 성실한 미국인들이 당해야했던 희생과 눈물이 있었음을, 그런 고통 속에서 얻어낸 교훈이 있었기에 더욱 치열하고 소중한 기본권이라는 건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러던 그들이 2005년 즈음에 다시 그걸 꺼내 되돌아보며 탄식했었다. 조지 클루니는 당시 미국 사회에 당면한 문제와 이에 대응하는 언론의 자세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자고, 함께 메시지를 만들어 보자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


 


그때 우리들은 이런 영화에 좀체로 감정이입이 되질 않아 애써 졸음을 참으려 애쓰다가 기어이 잠이 들거나 끝까지 보더라도 누가 이런 영화를 보자고 그랬는지 일행과 다투거나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행운을 빌어본다.


 


Good Night, adn Good Luck.


 


 


 


영진공 이규훈


 


 


 


 


 


 


 


 


 


 


 


 


 


 


 


 


 


 


 


 


 


 


 


 


 


 


 


 


 


 


 


 

영화의 세계 …… 그리고 내러티브



음악과 영화의 차이는 뭘까?
난 무엇보다 내러티브가 있고 없음이 가장 큰 차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음악을 좋아하고 계속 그 세계를 벗어나지 않는 이유는 음악에는 내러티브가 없기 때문이다.


음악에도 코드 진행이 있고 리듬 패턴이 있으며 역시나 기승전결의 구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청각의 세계다. 느낌의 무엇인 것이다. 그 세계의 구조와 미세한 변화는 숙련된 귀를 가져야 제대로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숙련된 귀를 가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나는 음악을 막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기에 음악이 좋고 들으면 행복해진다.







영화를 참 좋아한다. 음악 못지 않게 좋아했다. 한 때는 영상 만드는 데 관심도 많았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좌절점은 글 만큼이나 영상 역시 내러티브가 있고, 그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음악처럼 끝없는 상상을 자극하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그것이 영화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


그리고 영화는 음악도 글도 미술도 애니매이션도 다 먹어삼키는 괴물이었다. 음악이 절대 가질 수 없는 크기의 깊고 넓은 구덩이이기도 하고. 너무 자유로워서 (더더욱 감당할 수 없을만큼) 옭아오는 세계였다.

맘의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영화를 참 안봤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얘기를 주워 듣는 사람으로 참 창피한 얘기다. 그러나 음악처럼 내 머리 속을 마구마구 자극하는 무엇을 어느 순간부터 찾기 힘들어 영화 앞에서 주저했다.

기타 소리 하나에서 기타줄-픽업-바디-암-스프링-앰프-리턴-이펙터의 매커니즘을 상상할 수도, 담배 연기와 독한 술을 생각할 수도, 무대에 섰을 때 관객의 호응을 떠올리기도, 음악의 인상이 주는 인생의 좌절과 환희를 맛볼 수도, 혹은 지구 밖의 괴상한 꿈나라 속을 걸을 수도 있는, …… 그런 별의 별 생각을 다 떠올릴 수 있는 음악.


 





 


음악을 들으며 나는 답답하고 뾰족한 수 없는 그저 그런 인생 속에서 도저히 그려볼 수 없는 우주를 꿈꿀 수 있었다. 음악은 그랬다.


그러던 어느 연휴, TV 채널 여기저기서 나오는 영화들. 참 오랫만에 영화를 첨부터 끝까지 봤다. 꾸준히 보는 DVD영화 몇 편이 있지만, 그와 다른 느낌으로, 다른 자세로, 정말 영화에 빠져서, 조명이 어떻고, 화면 구성이 어떻고 표정이 어떻고 그런 거 다 잊고, 그냥 영화의 얘기에 빠졌다. (사실 짜증나서 채널을 돌려버린 영화도 몇 편 있다.)

잊고 있었던, 아니 피하고 싶던 내러티브의 세계에서 놀았다. 예전에 갖지 못했던 기분이 온 몸을 적셔왔다. 영화 속 음악이 때론 거슬리기도, 과도하기도, 답답하기도 했지만 꿋꿋이 영화의 얘기에만 빠졌다. 이상하게 보는 영화의 수가 늘어날수록, 그리고 한 편, 한 편 끝날 때마다 더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아주 오래 전, 하루에 영화 한 편 이상 보지 못하던 옛 기억도 났다. 한 편을 흡수하고 나면, 영화는 커녕 음악도 듣지 못하고 술만 겨우 마실 수 있던 정말 오래 전의 나의 모습 말이다.


물론 기억만 났다. 그 다음 날 저녁에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피아노 트리오 음악이, 더블 베이스의 도약하는 연주가 땡겼던 것을 보면 과거의 내가 또 다시 반복되는 것은 분명히 아닌 것 같다. 과거와 달리 내러티브가 전하는 떨림에 짓눌리지 않고 (그저)즐기는 내 모습이 싫지 않다.



만화책을 본다. 영화를 본다. …… 내러티브의 세계.


왠지 그 세계가 다시 맛있어 질 것 같다.


영진공 헤비죠


 


 


 


 


 


 


 


 


 


 


 


 


 


 


 

“귀가 트이는 턱 이야기” 쉽게 풀어보기


육상 척추동물의 역사는 수중에서 시작되었다. 물에서 노니는 것에 만족하지 않은 일부 불만쟁이들이 기어이 육지로 올라오면서 지금의 다양한 육상 척추동물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물에서 땅으로 나와바리를 바꾸기까지 요녀석들은 물 속 하고는 영판 다른 육지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그 중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듣는 문제까지 새로운 환경에 맞춰 바꿔줘야 했다.


물고기는 내이는 있지만 고막이나 중이 뼈는 없다. 왜냐하면 물의 높은 밀도로 인해 음파의 파동을 옆줄을 통해 직접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육상에서는 물에 비해 턱없이 밀도가 낮은 공기 때문에 소리를 듣기 위해선 다른 것이 필요했다. 특히 압력이 낮은 공기 중의 음파를 고압으로 바꿔야만 했는데 내이의 달팽이관 속에 있는 액체(림프액)가 고압의 파동만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육상 척추동물들이 내놓은 해법은 고막으로 소리를 수집한 뒤 여러 개의 뼈들을 거쳐 소리를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포유류의 경우 이렇게 소리를 전달해주는 뼈들을 망치뼈, 모루뼈, 등자뼈라고 한다.


중이 뼈라고 불리는 이들 뼈는 음파의 압력을 증폭하여 뇌로 전달한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분명 물고기 조상님들은 중이 뼈가 없었는데 그들 후손인 육상 척추동물들은 어디서 갑자기 중이 뼈를 가져온 걸까? 흥미롭게도 중이 뼈들의 기원은 쉽게 연결짓기 어려운 턱뼈가 변환된 것이었다. 이것은 척추동물 최후의 주요 혁신에 해당하는 전이이다.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선 먼저 괴상하게 생긴 칠성장어를 살펴보아야 한다. 현재 턱이 없는 물고기(무악류)인 칠성장어와 먹장어류는 최초의 척추동물이 방산 진화하여 남긴 유물이다.


이 녀석들을 살펴보면 뼈 없는 입 뒤쪽으로 일련의 아가미구멍들이 나있는데 이것은 턱의 진화 과정을 암시해주는 배치다. 최초로 턱이 생긴 어류를 보면, 아가미 뒤에 아가미를 지탱해주는 뼈들이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척추동물의 위아래 턱뼈와 닮아있다.


아쉽게도 아가미궁이 앞쪽으로 이동해서 입을 둘러싸는 위치가 된 뒤에 턱뼈로 바뀌었는지, 아니면 턱뼈와 아가미궁은 동일한 발생 체계에서 생겨나기는 해도 서로 무관한 별개의 전문화 현상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아가미 지지대와 턱이 상동구조(같은 원천에서 진화했으므로 형태가 달라도 같은 기관이라는 뜻. 팔과 다리, 손가락과 발가락이 그런 사례)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며 이를 지지하는 증거는 풍부하다.


 



 


목아래턱뼈는 한때 아가미 지지대였던 것이 턱과 두개를 엮어주는 뼈로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이것이 하필 내이의 귀연골주머니 바로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뼈라는 구조는 원래의 진화 이유와는 무관하게, 밀도로 인해 소리를 꽤 효율적으로 전달한다. 그래서 목아래턱뼈는 본업으로 턱과 두개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한편으로 부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개부가 애초의 유동성을 잃고 두개 뼈들이 굳게 봉합되어 하나의 두개골로 뭉치자 더는 고정 기능을 수행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제 장점을 살려서 전에는 부차적 역할이었던 청각을 본업으로 확장했다. 이것이 현재 포유류의 중이 뼈 중 등자뼈가 된 것이다.



망치뼈와 모루뼈도 목아래턱뼈 앞의 아가미궁 요소들로서, 초기 척추동물에게서는 턱의 일부가 되었다. 이들은 위턱과 아래턱을 관절로 이어주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현생 양서류와 파충류와 조류에서는 아직도 그 일을 한다. 파충류 위턱의 직사각형 뼈는 포유류에서 모루뼈가 되었고 아래턱의 관절뼈는 망치뼈가 되었다.


어떻게 동물이 제대로 기능하는 생물체로서의 온전함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 기관들의 위치와 기능을 바꿔냈을까? 중간 단계의 형태에서는 관절이 맞물리지 않아 턱으로 먹지 못하지 않았을까?


선조 포유류를 생각해보자. 인상뼈-이빨뼈 관절이 벌써 발달했지만 오래된 방형뼈-관절뼈 연결도 여전히 기능한다고 하자. 턱관절이 이중으로 있는 중간 형태인 셈이다. 그러면 이제 방형뼈-관절뼈 관절을 버려도 되니까 그 요소들이 귀로 이동한다. 턱은 새로운 연결 고리가 이미 잘 자리를 잡았으므로 완벽하게 기능하는 것이다.


 

이런 예는 우리의 선조 집단인 수궁류(獸弓類) 즉 포유상 파충류에 속하는 치노돈트cynodont화석을 보면 오래된 파충류 턱관절에서 방형뼈와 관절뼈가 점차 작아지고 결합이 느슨해지는 경향을 띤다. 한편 아래턱의 이빨뼈는 뒤쪽으로 확장되어 위턱과 맞닿아 있다. 어떤 치노돈트들은 이빨뼈 뒤에 있는 요소인 각하뼈가 방형뼈와 만나서 추가 관절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고등 치노돈트들 중에서 두세 속은 정말로 포유류와 비슷한 이빨뼈-방형뼈 추가 관절이 있다.


 


진짜 포유류 중에서도 초기의 녀석들은 망치뼈와 모루뼈가 온전하게 독립한 형태가 아니다. 이 뼈들이 여전히 턱에 붙어 있었고 관절 기능에도 계속 참여했다. 잘 알려진 초기 포유류인 모르가누코돈Morganucodon과 쿠에네오테리움Kuehneotherium이 둘다 그렇다. 쥐라기 후기, 공룡이 세상을 지배하고 포유류의 생은 걸음마 단계였던 시대에 들어서야 이 뼈들이 귀로 들어갔고 이빨뼈-방형뼈 관절 하나만 남았다.


 



 


그럼 왜 등자뼈 하나만 있는 귀도 훌륭하게 기능을 수행하는데 나머지 모루뼈와 망치뼈도 생긴 걸까?

반룡dimetrodon은 사실 공룡이 아니라 우리의 먼 선조로서 나중에 포유류로 진화하는 파충류인 수궁류의 조상이다. 반룡의 등자뼈는 위턱과 방형뼈와 가깝게 닿아 있다. 이 연결은 계속 전해졌고, 후대 수궁류에서 때로 강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수궁류는 포유류의 직접 선조다. 이 해부학적 연결을 볼 때, 포유류 선조의 방형뼈는 주로 턱관절로 기능하면서도 보조적으로나마 소리 전달에 관여했던 게 틀림없다.


이것은 파충류의 방형뼈가 턱관절의 일부로 기능하면서 소리 전달에 참여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현대 파충류 중에서도 소리가 방형뼈를 통해 내이로 가는 녀석들이 더러 있기 때문이다. 가령 뱀은 외이나 고막이 없다. 과학자들은 뱀이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다고 생각해왔는데, 최근의 연구를 통해 녀석들이 몸통으로 소리를 감지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몸통 대부분이 민감하고, 특히 커다란 폐 주변은 진동을 내이로 전달한다. 그런데 땅에 착 붙어 살게 되므로서 유리한 경로가 하나 더 있다. 뱀은 머리를 땅에 대어 진동을 느낌으로써 소리를 듣는다. 진동은 아래턱으로 들어와서 방형뼈로 갔다가 등자뼈로 들어간다. 포유류의 경로와 비슷하다. 게다가 여러 종류의 도마뱀과 뉴질랜드의 투아타라를 대상으로 실험해본 결과, 방형뼈에 직접 진동을 가할 때도 소리가 등자뼈로 잘 전달되어 뇌에 기록되었다.

기관들이 각자 하나의 기능에만 완벽에 가깝게 기능한다면 진화는 정교한 구조를 생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박테리아는 대단한 효율 덩어리다. 절정의 기량을 지닌 단순한 세포로서, 그들 내부에는 프로그램들이 있고 쓰레기나 찌꺼기 따위는 말끔히 내다버렸으며 필수 유전자들은 하나씩만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박테리아는 생명이 첫 화석 기록을 남긴 35억 년 전 이래 지금까지 죽 박테리아였다. 아마 태양이 폭발하는 날까지 그럴 것이다.


그런 최적성은 경탄을 자아내긴 해도 묵직한 변화의 씨앗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모든 유전자가 저마나 필수적인 작업을 훌륭하게 해낸다면, 어떻게 새 기능이나 추가 기능이 생기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창조성에는 엉성함과 중복이 필요하다.   


 


* 이 글은 올해 현암사에서 출간한 스티븐 제이 굴드의 에세이집 ‘여덟 마리 새끼 돼지’에 실린 ‘귀가 트이는 턱 이야기’를 발췌 편집한 것으로, 흥미로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배경지식이 미천해 그 재미를 느낄 수 없던 것에 분기탱천하여 개인적으로 공부한 것을 정리한 것입니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