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그 노래] I Knew I Loved You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Once Upon A Time In America),


누군가는 희대의 걸작이라 하고, 누군가는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고 하는 그 영화.


 


“마카로니 웨스턴의 거장”이라 불리우는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1929. 1. 3. ~ 1989. 4. 30.) 작품으로 1984년 개봉 영화이다.


 


이 영화는 뭐랄까 … 영화 “친구”의 원형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대부”의 평민버전이라고나 할까 … 뭐라 한두마디로 딱 떨어지게 비유하기 어려운 영화다.


 


어쨌거나 30년 전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이 영화에는,


로버트 드 니로, 제임스 우즈, 조 페시, 대니 아이엘로, 윌리엄 포사이스, 버트 영 등 갱스터 무비하면 떠오르는 배우들이 다 나와 열연을 보여준다.


그리고 제니퍼 코넬리가 어린 데보라 역으로 영화에 데뷰한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이 영화를 보면서 제니퍼 코넬리에게 안 반한 사내녀석들 없었다.


 


암튼 이 장면에 흐르는 음악은,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그 분,


엔니오 모리꼬네의 “Deborah’s Theme”이다.


 


사실 이 영화에 흐르는 음악 중에 가장 유명한 곡은 “Cockeye’s Song”이고,


이 곡 도입부의 팬플륫 소리만으로 누구나 익히 기억해 내는 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곡이 흐르는 장면은 “무한도전”에서 사진으로 오마쥬한 적도 있다.


 


 


 



요게 원본,


 


 



요건 무도,


 


 


그건 그렇고 오늘 소개할 곡은 위의 동영상에 나오는 “데보라의 테마”에 가사를 붙인 그 노래이다.


 


2007년에 나온 엔니오 모리코네 헌정 앨범 “We all love Ennio Morricone”에 수록되어 있는 이 노래의 제목은 “I Knew I Loved You”. (Savage Garden의 동명 노래와는 다른 곡이다.)


 


 


 




 


 


 


원곡에 알란 버그만과 마릴린 버그만이 노랫말을 붙이고 셀린느 디온이 불렀다.


그 노래를 들어보자.


 




 


 


I knew I loved you, before I knew you,
The hands of time would lead me to you,


그대를 알기도 전에 난 그댈 사랑했어요,


시간의 흐름이 이렇게 날 당신 곁으로 이끌고 온거죠,




An evening star was from afar,
It guided me here,


It knew you’d be here,


저 멀리 보이는 저녁 별이,


나를 이리로 안내했어요,


별은 당신이 여기 있는 걸 알고 있었죠,


 


Now wrapped in moonlight,
At last together,
Here in the incandescent glow,


달빛에 감싸여,


마침내 함께 한 우리,


희고 강한 빛이 함께 하고 있어요,



We are all we need to know,
As we softly please each other,
‘Til the stars and shadow glow
And we sleep,
With our dreams around us.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알아야 할 건 당신과 나뿐,


별과 밤의 그림자가 반짝일때,


부드럽게 서로를 쓰다듬다가,


우린 잠이 들어요,


우리의 꿈들로 둘러싸인채,


 


It guided me,
It knew you’d be here,


별이 나를 안내했어요,


별은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있었죠,



I knew I loved you, before I found you,
I knew I’d built my world around you,
그대를 만나기 전부터 나는 그대를 사랑했어요,


내 세상은 당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죠.


 


Now all my days, And all my nights,
And my tomorrows,


Will all begin and end,
With you … With you …


이제 나의 모든 낮과 밤,


그리고 나의 모든 내일이,


당신으로부터,


시작하고 끝이 나죠,


당신과 함께 …


 


 


그리고 뽀나스로,


엔니오 모리코네 작곡은 아니지만 이 영화에 삽입되어있는 곡 중에 “Amapola”라는 꽤나 오래된 노래가 있다.


 


즐감~ ^.^


 



 


 


 


영진공 이규훈


 


 


 


 


 


 


 


 


 


 


 


 


 


 


 


 


 


 


 


 


 


 


 


 


 


 


 


 


 

“성난 황소”, 외부자의 눈으로 마티의 영화를 즐기는 방법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제이크 라모타라는 인간을 도저히 좋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단순포악한 성질은 그렇다 치고 의처증에 아내와 동생을 두들겨패는 그 대책없는 인생, 도대체 자기 실패를 누구 탓을 하는 거야?


 


남자들의 세계는 전혀 몰랐고 여자들의 세계에도 속해있지 못했던 나는 마틴 스콜시지의 세계의 그 누구도 이해할 수가 없었고, 다만 그가 만드는 영화의 형식미에 대해, 평론가들의 권위에 기대어 감탄했을 뿐이다.

그리고 10년 뒤에 이 영화를 필름으로 다시 보고 난 후, 나는 누군가에게 “It was another movie!”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랬다. 나는 경기 중 제이크의 얼굴에서 피가 솟구치는 장면이랄지, 오프닝에서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인터메조)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제이크가 쉐도우 복싱을 하는 장면을 처음 본 이래로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제이크라는 한 인간, 위대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던 그 인간의 그 추락의 면면을 목격하고, 그에 감정이입하고, 그를 이해하는 되는 경험이 일어난 것은, 나 자신에게도 낯선 일이었다.

몸이 비대해진 것은 그의 정신 추락이 외적으로 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절정에 올라 챔피언 타이틀을 따기 전부터 이미 추락하고 있었고, 그의 파괴되어 가는 정신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조를 드러내고 있었다. 최고가 되려는 그의 목적은 챔피언 벨트가 상징하는 무엇이 아니라, 물적인 챔피언 벨트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그것의 획득은 그에게는 복싱이건 인생 그 자체건, 목표의 상실을 뜻하며, 그가 챔피언쉽 시합 전 다른 시합에서 지는 것(그의 무의식은 목표의 상실을 두려워 한다), 그리고 그 패배 때문에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로 순진하게 코치의 품에 머리를 박고 울 수 있는 것(영화를 통털어 그가 우는 매우 드문 장면 중 하나)은 당연한 것이다.


 


 




 


 


챔피언쉽 방어전에서 그가 딱 한 번 성공하는 것은 그 싸움의 이유를 억지로 외부에서 찾았기 때문이지만(아내가 그를 잘 생겼다고 했다!), 그런 식의 이유는 투지를 지속시킬 수 없다. 그리고 싸움을 멈춘 바로 그 지점에서 그의 인생은, 이미 전조를 드러냈던 추락이 가시화되며 가속도를 맞는다.


 


한창 추락 중인 인간은 자신의 추락을 감지할 수 없다. 어느 정도의 추락이 경과된 후라야, 자기가 원래 있던 곳과 지금 있는 곳의 처지를 그 까마득한 갭을 비교하며 그제서야 알아차린다. 하지만 그땐 이미 늦다. 몸은 비대해졌고, 아내는 떠날 준비를 한지 오래이며, 돈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없다. 감옥벽을 쳐대며 “도대체 이 바보! 멍청이!”를 외칠 수밖에.


 


극도로 명암이 대비된 조명으로 찍힌 이 장면에서 나는 심장이 터지는 걸 느끼며 그와 함께 울먹였다. 이 바보! 멍청이! 내 삶은 이미 오래 전에 부서져 내리고 추락을 시작했음을, 꿈꾸었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내가 있던 그곳, 내가 떠나온 그곳이 찬란하진 않아도 은은하게 빛을 내던 아름다운 곳이었음을, 나는 얼마 전부터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깨달음은 너무 늦어버렸고, 다른 희망을 어떻게 찾아야 할지도 모른 채, 캄캄하고 좁은 감옥 안에서 그저 벽을 치면서 자학할 수밖에 없고, 그 자학의 상처에 또 고통을 느끼는 것. 언젠간 그 감옥을 나갈 거고, 그리고 다시 삶은 계속되겠지만, 상처는 남는 법이다. 그리고 비가 올 때마다 그 상처는 쿡쿡 쑤셔댈 것이다.

이제 아내는 아이들과 함께 떠났고, 과거의 영광은 과거의 것이 되었으며, 그는 초라한 클럽의 분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리허설을 하고, 스스로 격려하기 위해 I’m the boss, boss, boss를 나지막히 외친다.


 


아무렴,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떠받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만이 다시 계속되는 삶을 견딜 유일한 길이다. 『베니스에서 죽다』의 구스타프는 차라리 죽어버리지만, 그는 죽지도 못한다. 비통함은 계속되며, 아름다움은 비스콘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앞서 『베니스에서 죽다』에서 ‘추락하는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의 비통한 아름다움’에 대해 썼지만, 사실 그건 반쯤 진심이기도 하고 반쯤 거짓말이기도 하다. 나는 가부장 사회가 남자들에게 얹어주는 코딱지만한 권리와, 그 권리의 이면이랍시고 몇 배로 얹어주는 어깨 위의 짐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렇기에 (그것과 긴밀히 연결될) 남자의 추락의 본질에 대해 내가 감정이입을 하는 구석은, 영화를 만든 이들이 기대하는 면과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이고, 상당부분은 논리적 이해와 상상의 기반을 통해서다.


 


그럼에도 이해가 많은 부분 가능한 것은, 이 세상에 남자들의 짐과 남자들의 추락에 대해 토로하는 영화와 책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며, 남자들은 모두 그것이 ‘인간의 짐’이고 ‘인간의 추락’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소수자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한, 사람마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신의 언어 외에 메이저의 언어도 자연스레 습득한다.


 


개중에는, 다른 소수자보다 훨씬 더 잘 습득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언제나 분열된 자아 내부에서 끝없는 투쟁과 충돌을 경험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 언제나 마티 영감님의 영화들은 내게 외부의 존재였다. 이제는, 외부자의 눈으로 그의 영화를 즐기는 방법을 찾아냈다.


 


영진공 노바리

 


 


 


 


 


 


 


 


 


 


 


 


 


 


 


 


 


 


 


 


 


 


 


 


 


 


 


 


 


 


 

폭력과 비폭력 그리고 지금의 우리

—–

1986년 영화 <미션 (The Mission)>입니다.


역사적 실례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롤랑 조페가 감독하였고 제레미 아이언스와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을 맡았다.  그리고 1987년도 오스카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700년대 중반 브라질과 파라과이 국경이 만나는 이구아수 폭포의 밀림 속에서 원주민들을 교화하는 가브리엘 신부(제레미 아이언스 분)와 그에 이끌려 함께 밀림으로 오게 된 로드리고 멘도자 (로버트 드 니로 분).  둘은 원주민과 함께 생활하며 선교와 봉사를 행하게 되고, 전직 노예 사냥꾼인 로드리고는 자신도 목자의 길을 가겠노라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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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남미의 식민정복자들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교황청의 묵인하에 이 지역을 정치적으로 거래하고, 예수교회는 포르투갈령으로 넘어가게 된 이 지역의 신부들에게 철수를 명한다.

그들이 떠나고나면 함께했던 원주민들은 노예 사냥꾼들에게 포획되어 비참하게 팔려 나가거나 죽게 될 게 뻔한 상황에서, 둘은 교회의 명령을 거부하고 그 곳에 남아 원주민을 지킬 것을 결심한다.

허나, 둘이 선택한 방법은 서로 달랐다.  로드리고는 무기를 들고 정복자의 무리들과 싸웠고, 가브리엘 신부는 폭력이 아닌 사랑의 힘을 믿으며 기도로 저항하였다.

그리고 …
 

여기에서 비폭력과 폭력을 구별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요, 어느 쪽이 더 옳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뒤에 숨어있는 갈등의 원인이자 시작이며 가장 험악한 폭력이,
권력이라는 이름의 탈을 쓰고 커다란 어금니를 애써 숨기지도 않은 채 도덕을 설파하고 있는 모습을 잊지말자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그러하듯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Kyrie Eleison …

영진공 이규훈

<택시 드라이버>, 마틴 스코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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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포스터 중 하나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1976년작인 <택시 드라이버>는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수입금지 영화로 분류되었다가 90년대 초반인가에 첫 극장개봉을 했던 작품인지라 이 영화의 그 전설적 명성에 비하면 극장에서 필름으로 본 사람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택시 드라이버>는 호러영화로 시작해 기이한 멜러영화로 끝나면서, 전혀 영웅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영웅이 되는 고약한(?) 영화다. 버나드 허먼의 불길한 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연기 속에서 택시가 화면 전면에 등장하는 오프닝도 그렇지만, 이 택시를 모는 사람이 밤거리를 휘저으며 다니다 막판에 대학살을 벌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전형적인 호러영화의 틀거리를 가져온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영화의 택시, 그리고 이 택시 운전사가 바로 우리의 주인공이라는 것.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에서 일단 우리의 주인공 트래비스(로버트 드니로)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영위하는 보통의 일반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인물로 표상이 되는데,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제대한 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일종의 ‘생존자 증후군(혹은 서바이버 신드롬)’을 앓고 있는 사회 부적응자다. 택시기사로 일하면서 그는 택시 안에 갖가지 손님들을 태우게 되는데,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흑인들을 태우기를 마다하지 않고 할렘에 가자는 요구에도 승차거부를 하지 않는다.


영화의 전반은 일견 평범해 보이는 그가 택시운전을 하며 만나게 된 사람들의 에피소드, 그리고 그가 아름다운 여인 베씨(시빌 셰퍼드)에게 반해 그녀와 데이트를 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하지만 우리는 수줍게 웃으며 흑인들을 태우는 것도 굳이 마다하지 않는 이 남자가 오히려 도시의 가장 밑바닥층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쓰레기’라 여기며 모두 쓸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 역시 처음에는 보통의 남자들이 술을 마시면, 혹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과장적으로 말하는 그런 멘트로 여기기 마련이다. ‘얌전했던’ 그가 전면적으로 공격성을 드러내게 되는 건 베씨에게 거절을 당하고 난 후부터다. 유난히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이 강조된 베씨와 수수한 (그리고 다소 촌스러운 옷차림의) 택시 운전사 트래비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둘러쳐져 있는데, 이것은 곧 ‘모든 이는 평등하다’는 미국의 가치 아래 숨겨진, 실제로 존재하는 계급의 차이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 베씨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의 투명한 유리창이다. 거리로 향한 벽 전면이 투명한 유리창으로 돼있는 사무실에서 선거 캠페인을 위해 일하는 베씨는 트래비스가 얼마든지 그 모습을 훔쳐볼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결코 베씨(혹은 팔렌타인 후보) 무리의 일원이 될 수 없다. 멋지게 차려입은 대통령 후보는 때로 트래비스의 택시를 탈 수도 있기는 하지만, 밑바닥에서 거리를 쓸며 다니는 사람과, 고상한 언어로 미국의 변화를 부르짖는 정치권 인사 및 그를 둘러싼 부르주아 혹은 엘리트 계급의 사람들 사이에는 저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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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당시 14살이었던 조디 포스터(가운데).
일부 성적인 장면들은 그녀의 언니가 대역을 해줬다고.


그렇기에 그를 실제로 움직인 동력이 되는 것이 아이리스(조디 포스터)가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마도 한적한 미국 남부의 시골 어드메에서 자랐음직한 아이리스는 어린 여자이고 돈이 없는 상태로 도시에서 최하의 밑바닥 생활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녀의 존재는 곧 트래비스 그 자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 구해야 할 어떤 목적이 된다. 아름다운 저 위의 부르주아 여성 베씨를 연모하다 좌절한 트래비스는 이번에는 도시의 가장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여성, 그러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성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여성을 향한 플라토닉 러브를 몸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평범하게 관계를 맺고 사는 평범한 생활을 향한 트래비스의 욕망은 이렇듯 굴절돼 있고, 좌절돼 있다. 가장 소중한 최소의 것은 자신이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기존의 남성 가치는 아이리스를 착취하는 자들을 향한 총구에서 불을 뿜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 그러니까 트래비스에게 있어 아이리스는, 자신보다도 더욱 밑바닥에 위치해 있는 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로, 트래비스의 대학살(?)은 자신보다 더 밑바닥에 있는 이를 구원함으로서 자신이 그보다 사회 위계질서에서 더 위쪽에 있음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사회에 확인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일련의 영화들에서 남자주인공들이 자신보다 더 밑바닥에 있는 이를 짓밟음으로써 자신이 최하가 아니라는 확인을 시도하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같은 베이스를 공유하지만 정반대의 결과로 나아간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에 대해 서슴없이 마초 감독이라 딱지를 붙일 수 있는 것도 이런 근거 때문이다. (‘마초’라는 말을 비하적으로만 해석하지는 말 것.)


그런데 트래비스가 총구를 향했던 것이 처음부터 아이리스를 착취하던 남자들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가 애초에 암살하려던 것은 팔렌타인 후보였는데, 사전 답사차 유세장에 갔을 때 그가 경호원과 대화를 나누는 씬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비롯해 사회 하류층을 억압하는 저 상부의 정치 토대에 대한 증오와 함께 실은 동경과 열망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베씨에게 했던 구애가 거절당하는 것이었지만, 그가 열망했던 것은 상류층의 자리까지도 아니고 그 상류층 옆에 서 있는 경호원 정도의 자리였고, 말하자면 그에겐 그 정도의 자리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 거기에, 그가 암살하려던 팔렌타인 후보는 아마도 민주당 내 전당대회를 거치던 후보로 짐작되는데, 영화에선 명시되지 않으나 베트남에 다녀온 트래비스로서는 민주당의 후보에 막연한 적개심을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이 시기가 흑인 민권운동이 들끓던 시기 직후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영화에서 간간이 드러나는 반-흑인 정서는 마틴 스코시즈의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대도시의 뒷골목에 만연하고 있던, 혹은 온화하게 웃는 사람들의 밑바닥에 숨어있던 어떤 분위기를 스코시즈가 묘사해낸 것이라 보는 게 타당할 터이다. 마치 소심하고 건실한 모습 뒤로 도시의 뒷골목(그 자신도 속해 있는)을 향한 적대감과 증오를 숨기고 있는 트래비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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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로 오빠의 팔 선… 하악하악


영웅이 된 뒤에도 트래비스는 여전히 밤거리의 택시기사로 살아간다. 동료들과 농담을 하고 내기를 하고, 택시를 모는 그에게는, 동료가 충고했던 ‘더 나은 미래’라는 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아이리스의 부모의 편지로 맺음을 하고 있지만, 이 편지 속에서 두려움을 읽은 것은 나의 과민함 때문일까? “거리가 너무 멀어 인사드리러 가지는 못하겠다”는 편지의 구절은, 정말 거리가 멀어서 여의치가 않다기보다는, 별로 보러 오고 싶지 않은데 마침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핑계로 드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과민함이 정말 감독의 의도에 맞다면, 아이리스의 부모는 무례하거나 염치가 없는 게 아니라 현명한 것이다. 냉정하게, 그리고 조금 싸가지없게 말하자면, 우리의 주인공 트래비스는 얼결에 주인공이 된 ‘사이코’가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진공 노바리



ps. 너무 유명한 사실이지만, 젊은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영화에 직접 카메오로 출연한다. 흑인과 바람난 아내를 미행하는 남편 역. 영화 보다가 딱 이 장면에서 베실베실 웃음이 나왔는데 주위가 너무 적막하여 머쓱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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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오로 출연한 마틴 스코시즈 감독(왼쪽)과 로버트 드니로.


ps2. 젊고 새끈한 하비 키틀 역시 하악하악이다. 다만 그놈의 배바지가…


ps3. 반드시 봐야만 하는 스코시즈의 3대 초기 걸작(<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분노의 주먹>)을 드디어 필름으로 다 봤다. 하지만 그의 초기작 중 작은 영화들, 예컨대 <코미디의 왕>이나 <특근> 같은 영화들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이 영화들도 언젠가는 모두 필름으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좋은 친구들>도 반드시… 기왕이면 비디오로도 절대 구하기 힘든 <바바라 허쉬의 대공황시대(원제는 ‘복스카 버사’)>나 <앨리스는 더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도 언젠가 꼭 볼 수 있기를. 스코시즈의 꽝작이라는 <뉴욕 뉴욕>도 보고 싶다. (마티 영감님의 평작은 다른 감독의 걸작보다 낫다… 라는 게 나의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