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드라이버>, 마틴 스코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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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포스터 중 하나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1976년작인 <택시 드라이버>는 한국에서도 오랫동안 수입금지 영화로 분류되었다가 90년대 초반인가에 첫 극장개봉을 했던 작품인지라 이 영화의 그 전설적 명성에 비하면 극장에서 필름으로 본 사람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택시 드라이버>는 호러영화로 시작해 기이한 멜러영화로 끝나면서, 전혀 영웅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영웅이 되는 고약한(?) 영화다. 버나드 허먼의 불길한 음악이 깔리는 가운데 연기 속에서 택시가 화면 전면에 등장하는 오프닝도 그렇지만, 이 택시를 모는 사람이 밤거리를 휘저으며 다니다 막판에 대학살을 벌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전형적인 호러영화의 틀거리를 가져온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영화의 택시, 그리고 이 택시 운전사가 바로 우리의 주인공이라는 것. 불면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에서 일단 우리의 주인공 트래비스(로버트 드니로)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영위하는 보통의 일반적인 삶을 살 수 없는 인물로 표상이 되는데, 그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제대한 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채 일종의 ‘생존자 증후군(혹은 서바이버 신드롬)’을 앓고 있는 사회 부적응자다. 택시기사로 일하면서 그는 택시 안에 갖가지 손님들을 태우게 되는데,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흑인들을 태우기를 마다하지 않고 할렘에 가자는 요구에도 승차거부를 하지 않는다.


영화의 전반은 일견 평범해 보이는 그가 택시운전을 하며 만나게 된 사람들의 에피소드, 그리고 그가 아름다운 여인 베씨(시빌 셰퍼드)에게 반해 그녀와 데이트를 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하지만 우리는 수줍게 웃으며 흑인들을 태우는 것도 굳이 마다하지 않는 이 남자가 오히려 도시의 가장 밑바닥층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쓰레기’라 여기며 모두 쓸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 역시 처음에는 보통의 남자들이 술을 마시면, 혹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과장적으로 말하는 그런 멘트로 여기기 마련이다. ‘얌전했던’ 그가 전면적으로 공격성을 드러내게 되는 건 베씨에게 거절을 당하고 난 후부터다. 유난히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이 강조된 베씨와 수수한 (그리고 다소 촌스러운 옷차림의) 택시 운전사 트래비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둘러쳐져 있는데, 이것은 곧 ‘모든 이는 평등하다’는 미국의 가치 아래 숨겨진, 실제로 존재하는 계급의 차이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 베씨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의 투명한 유리창이다. 거리로 향한 벽 전면이 투명한 유리창으로 돼있는 사무실에서 선거 캠페인을 위해 일하는 베씨는 트래비스가 얼마든지 그 모습을 훔쳐볼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결코 베씨(혹은 팔렌타인 후보) 무리의 일원이 될 수 없다. 멋지게 차려입은 대통령 후보는 때로 트래비스의 택시를 탈 수도 있기는 하지만, 밑바닥에서 거리를 쓸며 다니는 사람과, 고상한 언어로 미국의 변화를 부르짖는 정치권 인사 및 그를 둘러싼 부르주아 혹은 엘리트 계급의 사람들 사이에는 저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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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당시 14살이었던 조디 포스터(가운데).
일부 성적인 장면들은 그녀의 언니가 대역을 해줬다고.


그렇기에 그를 실제로 움직인 동력이 되는 것이 아이리스(조디 포스터)가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아마도 한적한 미국 남부의 시골 어드메에서 자랐음직한 아이리스는 어린 여자이고 돈이 없는 상태로 도시에서 최하의 밑바닥 생활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녀의 존재는 곧 트래비스 그 자신이 구원을 받기 위해 구해야 할 어떤 목적이 된다. 아름다운 저 위의 부르주아 여성 베씨를 연모하다 좌절한 트래비스는 이번에는 도시의 가장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여성, 그러나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성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는 여성을 향한 플라토닉 러브를 몸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평범하게 관계를 맺고 사는 평범한 생활을 향한 트래비스의 욕망은 이렇듯 굴절돼 있고, 좌절돼 있다. 가장 소중한 최소의 것은 자신이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는 기존의 남성 가치는 아이리스를 착취하는 자들을 향한 총구에서 불을 뿜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 그러니까 트래비스에게 있어 아이리스는, 자신보다도 더욱 밑바닥에 위치해 있는 사회의 가장 큰 피해자로, 트래비스의 대학살(?)은 자신보다 더 밑바닥에 있는 이를 구원함으로서 자신이 그보다 사회 위계질서에서 더 위쪽에 있음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사회에 확인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일련의 영화들에서 남자주인공들이 자신보다 더 밑바닥에 있는 이를 짓밟음으로써 자신이 최하가 아니라는 확인을 시도하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 (같은 베이스를 공유하지만 정반대의 결과로 나아간다.) 마틴 스코시즈 감독에 대해 서슴없이 마초 감독이라 딱지를 붙일 수 있는 것도 이런 근거 때문이다. (‘마초’라는 말을 비하적으로만 해석하지는 말 것.)


그런데 트래비스가 총구를 향했던 것이 처음부터 아이리스를 착취하던 남자들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가 애초에 암살하려던 것은 팔렌타인 후보였는데, 사전 답사차 유세장에 갔을 때 그가 경호원과 대화를 나누는 씬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비롯해 사회 하류층을 억압하는 저 상부의 정치 토대에 대한 증오와 함께 실은 동경과 열망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명시적으로 드러난 것은 베씨에게 했던 구애가 거절당하는 것이었지만, 그가 열망했던 것은 상류층의 자리까지도 아니고 그 상류층 옆에 서 있는 경호원 정도의 자리였고, 말하자면 그에겐 그 정도의 자리조차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 거기에, 그가 암살하려던 팔렌타인 후보는 아마도 민주당 내 전당대회를 거치던 후보로 짐작되는데, 영화에선 명시되지 않으나 베트남에 다녀온 트래비스로서는 민주당의 후보에 막연한 적개심을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이 시기가 흑인 민권운동이 들끓던 시기 직후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영화에서 간간이 드러나는 반-흑인 정서는 마틴 스코시즈의 것이라기보다는 당시 대도시의 뒷골목에 만연하고 있던, 혹은 온화하게 웃는 사람들의 밑바닥에 숨어있던 어떤 분위기를 스코시즈가 묘사해낸 것이라 보는 게 타당할 터이다. 마치 소심하고 건실한 모습 뒤로 도시의 뒷골목(그 자신도 속해 있는)을 향한 적대감과 증오를 숨기고 있는 트래비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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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로 오빠의 팔 선… 하악하악


영웅이 된 뒤에도 트래비스는 여전히 밤거리의 택시기사로 살아간다. 동료들과 농담을 하고 내기를 하고, 택시를 모는 그에게는, 동료가 충고했던 ‘더 나은 미래’라는 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는 아이리스의 부모의 편지로 맺음을 하고 있지만, 이 편지 속에서 두려움을 읽은 것은 나의 과민함 때문일까? “거리가 너무 멀어 인사드리러 가지는 못하겠다”는 편지의 구절은, 정말 거리가 멀어서 여의치가 않다기보다는, 별로 보러 오고 싶지 않은데 마침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핑계로 드는 것처럼 보인다. 나의 과민함이 정말 감독의 의도에 맞다면, 아이리스의 부모는 무례하거나 염치가 없는 게 아니라 현명한 것이다. 냉정하게, 그리고 조금 싸가지없게 말하자면, 우리의 주인공 트래비스는 얼결에 주인공이 된 ‘사이코’가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진공 노바리



ps. 너무 유명한 사실이지만, 젊은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영화에 직접 카메오로 출연한다. 흑인과 바람난 아내를 미행하는 남편 역. 영화 보다가 딱 이 장면에서 베실베실 웃음이 나왔는데 주위가 너무 적막하여 머쓱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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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오로 출연한 마틴 스코시즈 감독(왼쪽)과 로버트 드니로.


ps2. 젊고 새끈한 하비 키틀 역시 하악하악이다. 다만 그놈의 배바지가…


ps3. 반드시 봐야만 하는 스코시즈의 3대 초기 걸작(<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분노의 주먹>)을 드디어 필름으로 다 봤다. 하지만 그의 초기작 중 작은 영화들, 예컨대 <코미디의 왕>이나 <특근> 같은 영화들도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이 영화들도 언젠가는 모두 필름으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울러 <좋은 친구들>도 반드시… 기왕이면 비디오로도 절대 구하기 힘든 <바바라 허쉬의 대공황시대(원제는 ‘복스카 버사’)>나 <앨리스는 더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도 언젠가 꼭 볼 수 있기를. 스코시즈의 꽝작이라는 <뉴욕 뉴욕>도 보고 싶다. (마티 영감님의 평작은 다른 감독의 걸작보다 낫다… 라는 게 나의 믿음.)

마틴 스코시즈: “디파티드”, <산업인력관리공단>, <영진공 66호>

산업인력관리공단
2006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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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방된 사람들
같은 줄거리를 공유하고 있지만 스타일도 주제도 다른 <무간도>와 <디파티드>를 비교하는 것은 공평하지
못하다. <디파티드>가 굳이 <무간도>의 존재를 의식하며 줄거리의 과감한 생략과 압축을 할 이유도 없다.
<디파티드>의 1차 타겟 관객은 유덕화와 양조위를 여전히 사랑하며 절절한 연정을 바치는 아시아 관객이 아니라
<무간도>의 존재조차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미국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무간도>를 보고 좋아했던
관객이, <무간도>를 애써 잊고 <디파티드>를 처음 보는 스토리의 영화인 양하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다.
그럴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것이, <디파티드>가 누려야 할 정당한 평가의 몫을 깎아먹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단적인
예로, 마치 <무간도>는 존재하지도 않는 듯 써내려간 [씨네21] 허문영의 <디파티드> 평을 보고 있노라면, 상당히 공감이 감에도 불구하고 불공평을 공평으로 가장하는 편향과 가식의 시선이 느껴진다. 차라리 <무간도>와 직접 비교를 해버렸다면, 편향은 느낄지언정 가식과 위선의 느낌은 없었을 것이다.

허문영은 “<디파티드>는 거장의 가장 나쁜 영화”라고 평했지만,  난 꼭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그가 꼼꼼이
지적한 대로 윌리엄 모나한의 각본에 구멍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디파티드>가 그려내는 주제에 있어 그 부분이
심각하게 문제가 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경찰과 갱조직이 서로 스파이를 침투시키고는 아슬아슬한 조직 간 대결을 펼친다는 기본
전제 하에, <무간도>가 캐릭터를 중점에 둔 영화로 나아가며 ‘존재’에 대한 인식론적 / 윤리적 고찰을
시도한다면(이는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디파티드>는 같은 이야기로 지금, 여기의 미국사회에서 목적을 위해 수단화되는
인간의 파멸을 통해, 조직과 세계를 가까스로 떠받쳐주던 규칙과 룰에 대한 전면 부정을 선언하며 사회학적 지도를 펼쳐보인다. 이
차이는 같은 스토리의 두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좀더 풍요로운 인식과 사고의 계기를 제공해 준다. 관객에 따라 선호의 차이를 낳을
수 있겠지만, 방향 자체의 우월성을 따질 문제는 아니다. (나도 <무간도>식 접근이 좀더 취향에 맞긴 하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접근의 차이를 영화가 과연 얼마나 성공적이고 효과적으로 성취하고 있는지를 따짐으로써 영화에 대해 좀더 합리적인
평가를 내려야 한다. 허문영의 평과 달리 나는 <디파티드>가 마틴 스코시즈의 세계에 충실하며, 한편으로는 나이든
거장의 한 발 더 나아간 인식의 전환을 그려낸다고 생각한다.

암흑의 세계에는 저 오버그라운드의 법과 제도의 규칙이 함부로 개입할 수 없는 암흑의 세계만의 질서가 존재한다. 게다가
미국처럼 애초에 그 암흑의 세계의 건설 역사가 곧바로 미국의 건국 역사의 커다란 일부를 차지하는 경우, 오버그라운드와 암흑의
세계는 상호 견제하면서도 위험한 공생의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공식 역사가 아무리 자기들의 탄생을 “유럽의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근대적 ‘혁명'(‘미국 독립전쟁’의 공식 영어 표기는 ‘American Revolution’이다)을 통해
건설된 나라”라고 거창하게 미화한들, 스코시즈가 <갱즈 오브 뉴욕>에서 적절하게 그려냈듯, 실제 미국 건국의 역사는
“선주민은 제거하고 후-이주민은 견제하려는 단결된 커뮤니티, 즉 갱조직들 간의 학살전쟁과 휴전의 반복을 통한 세력다툼으로 형성된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갱들간 전쟁 이후 가까스로 암묵적 합의 하에 성립된 상호 불편한 공존 상황에서, 아무리
오버그라운드의 법이 암흑의 세계를 겨냥해 범죄 소탕 작전을 벌인다 한들 두 세계가 전면전을 벌이는 경우는 극히 적다.
오버그라운드의 법과 제도가 암흑의 세계에 개입하는 때에는, 암흑의 세계가 오버그라운드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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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티 영감님의 포오스... "장풍을 받아랏!"

마틴 스코시즈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러한 존재적 특성을 아주 잘 꿰뚫고 있다. 스코시즈의 전작들 중 많은 숫자는 대체로
이러한 전제 위에서, 암흑의 세계에 속해있는 조직이 어떻게 형성-유지-붕괴되는가를 묘사해왔다. 때로는 환경적 특성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혹은 철모르고 암흑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오버그라운드로 발돋움하는 캐릭터를 그리기도 한다. 대체로 그의 영화들은 암흑의
세계를 움직이는 질서에 대해 의심을 던지면서도 전면적 부정은 하지 않으며, 오버그라운드의 법과 제도의 불완전성을 응시할지언정 그
권위를 부정하지는 않아왔다. 그런데, <디파티드>는 이제껏 마틴 스코시즈가 그려왔던 그 익숙한 세계를 그리면서도 한발
더 나아간다. 그는, 말하자면, 갑자기 허무주의적 아나키스트가 돼버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그가 야심차게 연출했으나 부분적 실패를 보여주기도 한 <갱즈 오브 뉴욕>에서 일정 부분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는 <갱즈 오브 뉴욕>을 통하여 이제까지 그가 그려온 도시의 뒷골목, 특히 이태리
이주민 공동체의 풍경 묘사가 미국 사회를 미시적 관점으로 들여다보는 사회학적 연구였음을 선언하고, 그 미시적 관점들로 묘사된
부분과 부분을 통합해 거시적인 관점으로 미국의 역사를 재구성한 영화가 <갱즈 오브 뉴욕>임을 보여준 것이다. 위에서
말햇듯, <갱즈 오브 뉴욕>을 통해 드러난 마틴 스코시지의 역사관은, 결국 숭고한 근대적 혁명의 인공국가 건설이
아니라, 인종과 혈통을 중심으로 한 커뮤니티와 커뮤니티 간에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거해 벌이는 살벌한 생존 전쟁과 배타의 역사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미국을 그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오버그라운드고 암흑세계고 할것없이 이제는 ‘쥐새끼’들을 풀어놓는다.
신분상승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탐욕스러운 개인들을 끌어들여서. 공존의 시대는 끝났다. 다이다이로 혹은 도끼를
들고 정면에서 집단 패싸움을 벌이던 시대도 끝났다. 물론 공식적인 사법적 절차를 거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개인이고
집단이고, 이제 윤리니 룰이니, 최소한의 명분이니 하는 것도 없다. 무조건 상대를 밟아죽인다 – 그러기 위해 정보원을 심는다.
달콤한 출세의 보상을 약속하면서. 때로는 무시무시한 피의 보복으로 협박하면서. 그러한 집단은 숭고한 혈맹으로 맺어졌든(개뿔!)
합법적 테두리 안에 있는 공적인 권력이든(그래봤자 깡패랑 다를바 없는!), 이미 자신의 존재 명분을 잃어버린 것이다.
(<대부> 시절의 마피아는 지역 커뮤니티의 힘없는 이들을 보호하는 역할이라도 했지.) 한 집단 내에 불신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다. 이젠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믿을 것은 나 자신뿐, 살아남기 위해서는 유사-아버지건 뭐건 죽일 수 있을 때
죽인다. 쥐새끼가 퍼뜨리는 것은 불신이다. 그간 마틴 스코시즈의 인물들을 붙잡아주었던 최소한의 바운더리, 즉 (카톨릭) 신앙은
<디파티드>의 세계에서는 완전히 부정되고, 조롱의 대상이 되는 건, 이 불신이 판치는 세계에선 너무나 당연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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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나를 제일 이뻐해!"

그러므로 이들에게 남은 것은 이제 서로 죽고 죽이는 게임뿐이다. 대대적인 쥐새끼 사냥이 벌어진다. 호랑이를 가장한 쥐(퀴넌
– 마틴 쉰), 사자를 가장한 쥐(프랭크 코스텔로 – 잭 니콜슨), 자신이 쥐새끼라는 사실이 못내 괴로운 쥐(빌리 코스티건 –
리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모두가 죽는다. 그리고 최후의 승자인 줄 알았던, 자신이 쥐새끼임을 너무 잘 알고 쥐새끼로서 가장
충실했던 쥐(콜린 설리반 – 맷 데이먼)는, 고양이를 가장한 또다른 쥐(딕넴 – 마크 월버그)에게 죽는다. 이들의 죽음에는 그
어떤 인간적인 정서가 끼어들 틈도 순간도 없다. 모두 순식간에 죽어 나자빠진다. 포악한 절대악의 화신이건 외견상으로는 온화하고
마음약한 법의 집행자이건, 이들은 모두 아들에게 쥐새끼가 될 것을 강요하며 아들의 뒷골을 빼먹는 폭군 아버지이며, 이것이 바로
미국 사회의 두 얼굴이다. 이들의 죽음은 피할 수 없다. 사적으로 정의를 집행해 버림으로써, 딕넴은 경찰, 소위 공권력 – 이자
오버그러운드의 법과 제도의 상징 – 의 명분을 스스로 부정한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메사추세츠주 의사당 안에는 여전히 쥐새끼들이
득실거리고, 시스템의 최소한의 윤리와 정의를 믿었던 자(매돌린 – 베라 파미가)는, (딕넴을 제외하고) 유일한 생존자가 되어
회의와 상처를 안은 채 표표히 길을 떠난다. 이 결과는 너무나 당연하다. 이것이 <디파티드>의 엔딩이고, 이것이 마틴
스코시즈가 바라보는 미국의 현재이다. 마지막 딕넴의 사적 정의 집행을 통해 마틴 스코시즈는 이 세상을,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를
적극적인 부정하며 공식적인 사망 선고를 내린다. 모두가 죽은 곳에 남은 것은 핏자국과 그 수를 모를 쥐새끼들뿐. 이 사회가
움직이는 방식, 이 사회가 유지되는 방식, 이것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더이상 자유와 평등과 정의가 아니라, 비열한 거짓말과
불신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지옥, 모두가 강제로 추방될(Departed) 수밖에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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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월버그 다시 봤다니까... 딕넴 최고!

ps 1. 배우들에 관한 짧은 감상 :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인물은, 웃기는 헤어스타일에도 불구하고 가장 놀라운
도약을 보여준 마크 월버그의 딕넴. 지 할 몫은 다 한 맷 데이먼. 우아한 마틴 쉰, 여전한 잭 니콜슨. 닳고닳은 속물 연기가
더없이 잘 어울렸던 알렉 볼드윈(내가 알렉 볼드윈에게 감탄할 때가 다 있다니!). 그리고 놀랍게도, 이번에는 리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거슬리지 않았다, 모기의 단언대로. 제발 딴데가서 삽질해서 영화 망치지 마라.

ps 2. 영화 제작사 중 한 곳인 Plan B Entertainment는 브래드 피트와 제니퍼 애니스톤이 같이 만든
제작사다. Executive Producer로 브래드 피트의 이름이 뜨는 것은 그 때문. 괜찮은 제작자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는 듯.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