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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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터가 더 어울립니다.
가진 것은 몸뚱이뿐인 인생이 바로 저같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인데, 그 몸뚱이마저, 건강조차 갖지 못한 사람 둘이 만나 사랑을 합니다. 아무것도 없었던 사람 둘이 만나 사랑을 갖고 집도 갖고 행복도 갖게 되었기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을 텐데, 거참 그런 행복이 오래 가질 못합니다. 인간의 마음이 원래 간사한 거긴 하지만 또 인간 중엔 행복을 도저히 못 견뎌하는 사람들이 또 있습니다. 남자가 기적적으로 낫고 보니 슬슬 허파에 바람이 듭니다.


세상에 신파도 이런 신파가 없지만, 허진호 감독은 언제나 멜러를 찍으면서도 언제나 그 멜러는 대단히 드라이했습니다. 그의 신파는 눈물을 최대한 말려버리는 신파였습니다. <행복>에선, 조금 달라진 것 같습니다. <봄날은 간다>에서 냉정한 한두 마디로 유지태를 떠나보냈던 이영애인데, 여기서의 황정민은 술먹고 주정하며 울면서 감정을 토해내고, 임수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임수정은 길을 달리며 울음을 터뜨리다가 목놓아 통곡까지 합니다. 어머나. 허진호가, ‘내놓는 감정’에 조금은 덜 쪽팔려할 줄 알게 됐나 봅니다. ‘길을 달리며’ 우는 건 다른 영화에서라면 유치했겠지만, 폐가 40%밖에 안 남은 임수정이 달리는 건 마음이 아픕니다.


섹스도 할 수 있는 엄마 대용으로 여자에게 어리광 부리다가, 지가 마음이 변해 헤어지고 싶은데 ‘나쁜 놈’ 되는 건 또 싫어서 그 책임을 여자에게 미루는 그런 개찌질이 같은 남자들이, 좀 있습니다. 먼저 이별을 통고하면서 나쁜 놈 역할조차 상대에게 떠넘기려 하는 무개념 무책임 남자놈들은 연애할 자격이 없는 놈들입니다. 어디 가서 또 어떤 여자들 등쳐먹고 가슴을 찢어놓으려고요. 그래서 세상엔 ‘착한 척’하는 남자들이 제일 재수없고 나쁜 놈들인 겁니다. 남자가 갸르랑거리는 가늘고 높은 고양이 목소리를 내면서 간이고 쓸개고 내줄 것처럼 애교떨며 착한 ‘척’을 할 때일수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는 다른 여자한테 작업멘트가 담긴 이메일이나 쪽지를 보내거나 다른 여자의 머리와 손을 쓰다듬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헤어지는 순간에도 당신 뒷통수를 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찌질이들은 헤어지고 한참 지나서까지도 뒷통수를 치기도 한답니다. 이런 찌질이들의 단골멘트가 “너에겐 내가 너무 부족한 사람이어서”입니다. 너무 부족한 사람이면 노력을 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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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붙이지 않고 그냥 이미지와 컷으로만 가서 다행인 씬.


하지만요, 이건 워낙 황정민이 그런 놈이어서 그랬던 거고, 사실 그 황정민이 이해가 안 되는 건 또 아닙니다. 저도 별로 고고하고 착한 사람이 아닌지라, 내가 상처를 받은 만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줬고, 거기엔 제가 인식하고 있는 것도, 제가 지금까지도 깨닫지 못한 채 부지불식간 준 것도 있습니다. 모나게도 모질게도 못나게도 찌질하게도 굴어봤고, 지금도 종종 그러합니다. 내가 모질게 굴었던 사람, 내가 상처를 주었던 사람이, 내게 상처를 주었던 사람과 완전히 다른 사람만은 아닐 겁니다. 원래 관계라는 게 그렇게 만들어지는 거니까요. 이것은 연인관계에서만 통용되는 법칙도 아닙니다. 어떤 친구와, 혹은 어떤 선배와, 어떤 후배와, 우리는 날마다 새로이 관계를 갱신하고 서로에게 조금씩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가 그제껏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의 흔적(물론 전 연인 내지 배우자의 흔적을 포함해)이 남아있습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과거를 교훈삼아 더욱 열심히 사랑할 수 있게 됐을 때 우리도 한뼘쯤 다시 자라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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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예감. 웃고 있지만 눈물이 납니다. 여자의 예감은 원래 무서운 겁니다(…)


만약 내가 지금 사랑을 잘 하고 있다면, 처음부터 잘했을 가능성보다 찌질하고 못났던 과거를 교훈삼은 결과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 다만 그렇게 사람 가슴 찢어놓고 갔으면 잘 살 것이지, 왜 그렇게 다시 폐인이 됐나, 싶습니다. 하긴, 나는 여전히 아프고 사막을 헤매는데 나 버리고 간 놈이 잘 먹고 잘 살고 연애도 잘 하고 있다고 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약오르고 열받는 일이 되겠지요. 사람 마음이란 왜 이리 좁고 간사하고 못돼먹었을까요? 아, 저만 그런 거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진정 사랑했다면, 그가 잘 살아도, 못 살아도 한동안은 신경이 쓰일 겁니다. 이것은 꼭 그에게 마음과 미련이 남아서는 아닐 겁니다. 누군가와 함께 한 시간의 나도, 지금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하는 나도, 같은 사람이니까요.


허진호 감독이 말하기를, 황정민이 영수 캐릭터를 조금 더 이해갈 만하게, 결을 불어넣어 줬다고 합니다. 그렇더라고요. 저도 황정민이 무척 미우면서도, 근데 또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짠하기도 하더라고요. 마냥 미워하지만은 못 하겠더라고요. 임수정도 황정민도, 둘 다 나의 모습을, 혹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코 화해하지 못하는 한 사람 안의 두 개의 자아일 수도 있겠지요. 누군가에게 특별한 증오와 혐오를 품는 건, 그가 나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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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것처럼 아파서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여겨지는 순간들. 누구나 가슴에 삼천원 있는 겁니다아~


그냥, 사랑은,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생각을 합니다. 다만 사랑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사랑 자체가 현실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현실엔 가끔 이벤트가 필요하지만, 이벤트로만 이루어진 현실은 불안하고 연속성이 없습니다. 임수정과의 시골생활은 임수정에겐 현실이었지만 도시남자 황정민에게 결국 ‘현실’, 내지 ‘새로 선택한 현실’이 아니라 ‘이벤트’였고 ‘가상세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 관계가 오래갈 수 없는 건 당연합니다. 결국 사랑이 진정한 행복으로 결실을 맺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에 대한 답을 하나 얻은 것 같습니다. 원래 가장 상투적인 이야기가 가장 고질적인 고민과 물음에 대한 답을 품고 있는 법입니다.


ps. 그간 자꾸 “못생기지만 정감 가는 아가씨”로만 나오던 공효진이 세련되고 시크한 역으로 우정출연합니다. 최근 <M>에서도 그런 역으로 나오던데, 슬슬 그런 쪽으로 이미지를 바꾸려는 듯. 사실 공효진은 굉장히 우아하고 세련된 옷발을 소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좋은 몸매와 감각의 소유자이기도 하죠.


영진공 노바리

[가사 검열] , Connie Talbot

올 여름과 가을에는 유난히 비가 자주 왔다.
그때의 비는 마치 아열대 지방의 우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러다보면 동남아로 여행 갈 필요가 없어질지도 모를듯 …

그런데 생각해 보니,
아주 자주 또 많이 비가 오긴 했는데,
무지개를 본 기억이 나질 않는다.

비 오고 난 맑은 하늘 어느 한 곳에,
예쁘게 피어나는 무지개,
눅눅하고 텁텁한 기분을 잠깐이라도 가시게 해줄
무지개가 문득 그리워진다.

준비 한 동영상은 아마츄어 오페라 가수 Paul Potts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2007년 영국 TV 쇼 “Britains Got Talent”에서,
Paul Potts와 결승전에서 경쟁한 여섯 살 꼬마 Connie Talbot의 노래이다.
첫 동영상은 결승 실황이고, 두 번째는 예선에서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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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모두들 즐감~ ^.^

Somewhere Over The Rainbow
By Connie Talbot (2007)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

무지개 건너 저 너머에,
아주 높은 거기에,
나 어릴 적 자장가에서 듣던,
그 곳이 있다네,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무지개 건너 저 너머,
하늘이 푸른 그 곳에선,
그 어떤 꿈일지라도,
정말로 이루어진다네,

Some day I’ll wish upon a star
And wake up where the clouds are far behind me
Where troubles melt like lemondrops
Away above the chimney tops
That’s where you’ll find me

언젠가 난 저 별에 빌 거야,
그리고 잠에서 깨면 구름들은 내 발 밑에 있겠지,
세상 모든 걱정은 굴뚝 위에서 떨어지는,
레몬사탕처럼 녹아내리는,
그 곳에서 나는 살 거야,

Somewhere over the rainbow
Bluebirds fly
Birds fly over the rainbow
Why then, oh why can’t I?

무지개 건너 저 너머,
파랑새들이 나르네,
무지개 위에서 새들이 나르네,
그럼 나도, 나도 그렇게 날 거야,
 
Some day I’ll wish upon a star
And wake up where the clouds are far behind me
Where troubles melt like lemondrops
Away above the chimney tops
That’s where you’ll find me

언젠가 난 저 별에 빌 거야,
그리고 잠에서 깨면 구름들은 내 발 밑에 있겠지,
세상 모든 걱정은 굴뚝 위에서 떨어지는,
레몬사탕처럼 녹아내리는,
그 곳에서 나는 살 거야,

Somewhere over the rainbow
Bluebirds fly
Birds fly over the rainbow
Why then, oh why can’t I?

무지개 건너 저 너머,
파랑새들이 나르네,
무지개 위에서 새들이 나르네,
그럼 나도, 나도 그렇게 날 거야,

If happy little bluebirds fly
Beyond the rainbow
Why, oh why can’t I?

작고 행복한 저 새들이,
무지개 너머에서 날고 있는데,
나도 그럴 수 있을 거야, 그렇지?


영진공 이규훈

, 동시대 관객들과의 소통을 포기한 명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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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이 ‘말이 통한다’라고 하는 건 사용하는 언어가 같을 뿐만 아니라 전달하려는 내용이 서로의 이해관계에 부합된다는 뜻입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더라도 사투리가 너무 심하다거나 전문 용어를 많이 사용해서 전달하려는 뜻을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면 서로 간에 말이 통한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반대로 전혀 다른 언어권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눈빛과 표정을 통해, 그리고 필요하다면 손짓 발짓을 동원하다보면 왠만한 의사 전달이 가능하다는 것이 의사소통에 관해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바입니다. 서로의 뜻이 맞고 대화에 임하는 태도가 적절하다면 언어가 다를지라도 말이 통할 수가 있는 반면 똑같은 서울말을 쓰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이야기만 늘어놓거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화법을 구사한다면 소통이 전혀 안될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말이 잘 통하기 위해서는 사용하는 언어의 구사 능력 보다, 사실은 내 말을 듣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우선입니다. 기왕이면 상대방이 알아듣기 쉬운 표현으로 고쳐서 말하는 것이 효과적인 의사소통의 출발점이고 설득의 기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이 듣는 내 입장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듣는 사람도 앉았던 자세를 고쳐잡고 조금이라도 정확히 그 뜻을 이해하려고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법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듣는 이의 입장은 아랑곳 하지 않고 지나치게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며 속사포 같이 말을 쏟아내는 사람의 말은 아무리 중요한 내용을 얘기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다지 알아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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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 감독의 새 영화 <M>의 첫 인상은 지나치게 현란하다는 겁니다. 비주얼 뿐만 아니라 배경음악과 음향효과, 배우들의 연기에 이르기까지 너무 수다스럽다 못해 스크린 밖으로 침이 튀긴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이게 혹시나 ‘나태한 관객들의 의식을 각성시키겠다’는 의도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슬슬 부아가 치밀어오르기까지 합니다. 한 컷 한 컷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M>의 비주얼입니다만 문제는 그것을 쓸 때와 자제할 때를 가리지 않고 너무 많이 쏟아낸다는 점에 있습니다. 각 장면은 최고일지 모르나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세련되지 못한 방식입니다. 한마디로 촌스럽습니다. <M>의 외연에서 촌티가 흐른다는 건 음향 효과와 배경 음악의 사용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훈희 씨의 옛 노래가 촌스럽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비주얼과 마찬가지로 그 사용에 있어서 너무 지나치다는 얘기입니다.

<M>이 관객들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외연 뿐만이 아닙니다. 이명세 감독이 <M>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그러나 그 얘기는 영화과 전공 학생들에게나 들려줄만한 이야기입니다. 아니면 영화 창작론이라는 제목으로 책으로 남겼어야 할 얘기입니다. 관객들에게 들려줘야 할 이야기는 그 과정이 아니라 최종 결과물입니다. 결과물만 남겼어야 할 영화의 내용을 고민의 과정으로 대체해버리니 관객 입장에서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데? 라며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습니다. <디 워>가 에필로그 부분에서 심형래 감독이 나레이션으로 제작 동기와 과정을 부연 설명한 것 만큼이나 <M>을 통해 이명세 감독이 피력한 영화 예술가의 고민과 그 과정은 저와 같은 관객 입장에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생뚱맞은 얘기로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낯익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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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세 감독이 영화 자체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고 그 결과물을 내놓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 결과물이 관객들과 소통하는 데에 실패하고 있는 ‘천상의 피조물’이라는 점입니다. 후대의 영화 작가들에게는, 특히 촬영과 조명 부분에 일익을 담당하실 분들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작품이 <M>입니다. 하지만 <M>에서 다루는 내용은 일반 관객들이 알고 싶어하는 내용이 아니고 그 화법 또한 지나치게 일방적이어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수준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형사 Duelist>도 ‘모자람을 용납하지 못하고 오로지 과하기만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때는 그나마 내러티브라도 살아있었습니다. 하지만 <M>은 영화가 아니라 영화 창작론 강의가 되어버렸습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내용을 알아듣기 힘든 언어로 소리지르고 있으니 광장 한복판에서 하루종일 떠드는 광인의 소리에 다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일에 경험이 많은 정신분석학자나 의사들이야 그의 말을 받아줄 수 있겠지만 지나가던 행인들에게는 그 많은 말들이 다 무슨 소용입니까.

이명세 감독은 혹시 영화계의 제임스 조이스로 기억되기를 원했던 겁니까? 하지만 영화는 문학이 아닙니다. M은 모짜르트이기도 하고 모딜리아니이기도 하며, 미스테리인 동시에 메모리이기도 하겠지만, <M>에서 말하고 있는 M이란 결국 ‘명세’의 M일 뿐이니 이거 참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에 남는 의미있는 작업을 해냈다고 평가 받을 수도 있겠지만 동시대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은 완전히 포기한 영화가 이명세 감독의 2007년 영화 <M>입니다.


영진공 신어지

조지 루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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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여기 있다."
조지 루카스의 전설적인 데뷔작 <THX 1138>은 루카스 자신이 밝혀놓고 있듯,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영화에 ‘스튜디오’가 돈줄을 대줬던 거의 마지막 시대의 거의 마지막 영화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1971년. 아무도 성공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영화들이 줄줄이 성공했던 때였다. 일단의 젊은 감독들이 기존의 체제에, 기존의 시스템에 도전하며 기존 영화에 비하면 굉장히 적은 돈으로 자기들 멋대로 찍어온 영화가 대박을 치고, 이들이 ‘이지 라이더 세대’라고 불리었던 이른바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아이들이 대거 등장한 시대 말이다. 아메리칸 조에트로프를 설립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이 영화의 총괄 제작자가 되어 워너브라더스의 간부들을 구워삶은 것도 바로 그런 말들이었다. “<이지 라이더> 같은 대박작이 될 수 있다니까요!” (완성된 영화를 본 워너브라더스 간부들에게 코폴라는 ‘사기꾼’ 소리를 들어야 했다. “돈 되는 영화 만들어온다며!!”) <스타워즈>의 세계가 워낙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치고 조지 루카스가 미국 헐리웃 내에서 손꼽히는 억만장자가 돼버린 모습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영화청년’  조지 루카스(뿐만 아니라 ‘영화청년’ 코폴라)의 모습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는 영화가 <THX 1138>이다. <스타워즈>로 하룻밤 사이에 억만장자가 된 조지 루카스는 자기 돈을 들여 ILM을 설립했고, 이 ILM의 역사가 바로 헐리웃 CG 역사의 기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특수효과를 발전시켰는다. 조지 루카스는 작년에 자신의 모교(USC) 영화과에 억대의 돈을 기부했다고 한다. (저 억대는 원화 기준이 아니라 달러 기준이다.) 툭하면 조지 루카스와 스필버그 이름을 팔아먹는 누구와 참 대조되는 행보가 되겠다. 하여간에.


감독이 구축해 놓은 이 세계가, 참 재미있다. 억압과 통제와 감시의 사회가 등장하니까 사람들이 그냥 쉽게 ‘오웰적 세계’란 말을 많이 하지만, 이 세계는 모니터로 모든 것이 서로 감시/통제된다는 점을 빼면 그닥 오웰스럽지 않다. . ‘중앙’의 절대 권력인 Big Brother가 없을 뿐 아니라, 소위 ‘상부’ 내지 ‘권력층’이라는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약물로 통제되는 사회여서만이 아니라, 결국 이 세계는, 오히려 인간의 철저한 이성과 정확함을 추구하며 공공의,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이 평등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서로를 통제하고 감시하며, 스스로 억압에 동참하고 이를 재생산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의무적으로 복용하는 약은 진정제이며, 이를 통해 이들은 극단의 침착함과 이성적 사고를 유지하고 작업에서의 정확성을 높인다. 이는 근대적 특성을 극단으로 밀어부친 결과일 터. 이들의 감옥은 심지어 철창도 없고 감시하는 자도 없다. 오히려 넓게 활짝 열린 공간. 다만, 아무것도 노동할 것이 없다는 점, ‘사회’에 공헌할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인물들을 미칠 듯한 상태로 몰고 간다. (SEN은 “우리를 일할 수 있는 조직(working unit)으로 바꿀 아이디어를 찾아오겠다”고 외치지 않는가.) 친구가 지적해준 바에 의하면 <THX 1138>의 세계는 오웰보다 오히려 헉슬리적 세계에 더 가깝다. (그러나 [훌륭한 신세계]를 읽은지 워낙 오래 돼서,  헉슬리의 세계가 이토록 이성 중심적인 세계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긴 주인공이 탈출해서 만나는 게 소위 원시적 종교제례였지, 아마.)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에 대해 기존 평론가의 말을 그대로 반복해 ‘디스토피아를 그렸다’고 말하며 이 영화의 세계를 손쉽게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가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하는지 묻고싶은 충동이 인다.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야말로, 정체도 불분명한 ‘국가’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의 선과 이익과 영광을 위해, 또 한편으로는 취향과 능력까지도 하향평준화된 수준을 지향하도록 각자가 자발적으로 다른 개인을 감시하고 억압하며 이를 재생산하는 사회이자, 능력을 넘어선 소비를 부추키며 수시로 지름신을 맞고 이를 자랑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THX 1138>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보다 더 합리적으로 평화롭게 보이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이들은 누군가를 처벌할 때도 철저하게 규정에 따른 처벌을 하고 재판을 하며, 대중의 이익, 공동체의 이익을 함께 구현하고자 강제와 억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노력한다. 죄인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조차 철저하게 (숫자로) 법제화된 과정을 따른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천재들이 통찰해줬듯, 유토피아가 바로 디스토피아이다. 우리의 삶의 방식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매일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매일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향수를 뿌리고 액세서리로 장식을 하는 것은 그리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았다. [섹스북]의 저자마저도 현대사회가 지나치게 ‘체취’에 대한 공포와 ‘청결’에 대한 강박증으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지적하는 것을 보면, 머리카락을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모두 밀어버리고 하얀 옷을 입으며 청결에 힘쓰는 THX가 사는 세계의 가치관이, 그들의 사는 모습이, 과연 우리와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묻고 싶다. 우리가 사용하는 체크카드와 신용카드 등으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어느 경로로 언제 어디를 가서 무엇을 했는지 얼마든지 기록이 가능하다. 기록이 가능하단 얘기는 누구든 필요할 때 열람할 수 있다는 얘기기도 하다.


다소 코믹하게 그려진 SEN 5241,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인 THX 1138은 루카스가 감독 코멘터리에서 밝힌 대로 한 사회 내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그리고 다소 ‘자뻑’에 취해있는 사람)과 실천으로 ‘혁명’을 해버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린다. 나중에 옴에게 가서 기도하는 SEN은, “단지 조금만 조정해도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고, 나는 이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기도한다. 반면 어쩌다 원치않게 이 사회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룰을 어기고 사회의 범법자가 돼버린 THX는(그가 약을 끊은 건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다.) 사랑하던 LUH마저 잃은 뒤 이 사회를 완전히 탈출한다. 이것은 한 개인이, 자신이 아무런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는 자신의 현실의 사회에서 벗어나 다른 현실로 탈출하는 과정인 셈이고, <THX 1138>에게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 그래서 공동체 묘사가 비슷하고 심지어 의복도 거의 흡사한 – <아일랜드>보다는 주제적인 면에서 오히려 <매트릭스>가 루카스의 세계를 더 충실히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안드로이드 경관이 경고한 대로, THX는 지하도시의 세계를 벗어나 저 바깥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지 모른다. 인간이 그렇게 지하로 숨어들어가 지하도시를 건설하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감시와 통제체제를 이룩한 것, 그리고 그토록 청결에 신경을 쓰며 사회의 주요 동력을 핵 에너지에 의존하되 그 사용에 있어 그토록 조심스러운 것도, 지상에서 핵전쟁을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 ‘태양’ – 인간이 절대 볼 수 없는 ‘원지식’이자 ‘근원자’를 은유하는 – 앞에 선 THX의 존재는 장엄하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목적은 ‘장엄한 죽음’을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영진공 노바리

<딕시칙스 : 셧업 앤 싱>, 나서지 않는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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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롬바인>(2002)은 제가 본 다큐멘터리 영화 가운데 가장 재미있고도 통렬했던 영화였습니다. 기왕의 프로파갠다 영화라면 이처럼 화끈하고 직설적으로 선동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합니다. 사색이 아니라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프로파갠다 영화의 목적이니까요. 최근 마이클 무어의 작품들에 일부 조작이 있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만 저는 그것마저도 괜찮다는 입장입니다. 미국 시민들과 달리 이해관계가 직접적이지 않기 때문에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들도 일종의 픽션을 보는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진위 여부 보다는 그 작품들이 겨냥하는 바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느냐, 그리고 얼마나 새로운 정보와 즐거움을 제공받을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완전히 객관적인 다큐멘터리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마이클 무어의 영화들과 비슷한 소재를 다루고는 있지만 <딕시칙스 : 셧업 앤 싱>은 많이 다른 작품이었습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직전에 딕시 칙스가 런던 공연에서 했던 발언과 그 이후 2006년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기록하고는 있지만 사태의 전말을 파헤치거나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바바라 코플과 세실리아 펙, 두 여성 감독의 관심은 마이클 무어의 영화들과 같은 선전·선동 보다는 딕시 칙스 세 멤버들의 인간적인 면모를 기록하는 데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작가의 주관적인 개입을 최대한 배제한 채 음악이 삶의 일부가 된 가수로서, 남편의 아내로서, 그리고 아이들의 어머니로서의 딕시 칙스를 묵묵히 지켜보는 영화가 <딕시칙스 : 셧업 앤 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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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시 칙스가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표지 모델로 나섰던 그 유명한 사진과 조지 부시 대통령이 모습, 그리고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의 포스터에도 사용되었던 빨간 박스 안의 제목 등은 확실히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킵니다만 그 흔한 나레이션 조차 사용하지 않는 <딕시칙스 : 셧업 앤 싱>은 상당히 밋밋한 다큐멘터리로 보이기가 쉽습니다. 영화의 시선은 건물 밖에서 일어난 일들 보다는 나탈리 마이니스, 에밀리 로빈슨, 그리고 마티 맥과이어가 스튜디오와 집 안에서 매니저나 다른 동료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대화하고 노래하며 아이를 낳고 기르는 지난 3년 간의 모습에 집중합니다. 딕시 칙스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대변하기 보다는 그런 상황 속에서 이들의 어떻게 대처해왔는지를 차분히 지켜볼 뿐입니다.

그렇다고 클라이막스 조차 없는 밋밋한 영화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멤버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마티 맥과이어가 나탈리 메인즈 (딕시 칙스의 리드 보컬로, 런던에서의 발언을 한 장본인)의 심적 부담감을 걱정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배려하는 내용의 인터뷰를 하다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은 시종일관 차분하던 영화의 분위기를 단숨에 정서적 공감대 위로 올려놓습니다. 영화는 미국 내 민주주의 이념과 현실 속의 모순된 상황을 집중 조명하거나 딕시 칙스 사건을 전후로 한 정치적 역학 관계를 예리하게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해외 단신으로만 접했었던 그 일의 좀 더 자세한 이야기들을 보여주면서 무엇보다 그런 과정을 함께 겪으며 더욱 견고해져가는 동료애와 가족애의 모습을 소리 없는 목소리로 진솔하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2007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Not Ready To Make Nice”를 부르는 Dixie Chicks
소개하는 이는 Joan Baez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