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워즈 에피소드 3: 시스의 복수”, 아들의 발목을 잡은 애비의 한계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의 태생적 한계란 참 거시기 하다.

하다못해 신약의 첫 구절부터 마태복음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는 것으로 해서 줄줄이도 낳아 44번째 가서야 예수의 족보를 이야기 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무려 1절에서 25절 까지다.

광산 김씨였던 내 친구 용준이는 자신이 사귀던 여자친구가 3종백숙부의 외3종질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자와 헤어지는 (여자로서는 참 다행스러운)결과를 도출하며 핏줄의 상관관계가 무에 그리 집착의 대상인지를 궁금케 하기도 했다. (이유가 참 자질구레스럽기도 하다) 요컨대 어디서 태어나고 누구의 핏줄이냐는 우리나라뿐만이 아닌 인류가 짱돌을 들기 시작한 이래로 전지구적인 관심사인 것이라 하겠다.

흔히 현대를 정보의 유목민(유비쿼터스) 시대라 한다. 모든 인간의 창조물들이 디지털 컨버전스 되면서 정보는 곧 돈이 되었다. 뉴스를 만들 수만 있다면 돌팔매질만 잘해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방대하고 다각적인 정보의 수용은 예기치 못한 정보의 생산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 부작용으로 ‘탤런트 김모양이 지난주부터 테니스를 배운다’는 둥, ‘최근 결혼한 톱가수 A양의 아들이 두 돌이 되기도 전에 걷는다’는 둥 하는 약에 쓰이는 쥐똥만큼도 값어치 없는 기사가 당당히 신문의 한 면을 큼지막하게 장식하는 지금이다.

따라서 나는 요즘은 정보제공자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마태복음과 3종백숙부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으로 믿고 있었다. 정보는 위에 나열했듯 ‘누가’ 만드는 게 아니라 정보 자신의 자가발전에서 만들어지는 세상임을 철썩 같이 믿었다. 인간이 정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정보를 만드는 세상! 그런데, 대관절 이런 마당에 핏줄에 집착할 이유가 무엇이 더냔 말이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혈연과 지연의 관계를 다시금 소 막창에 짱박혀 있던 여물을 다시 씹듯 곱씹게 된 건 다름 아닌 20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SF 서사극의 대표이자, 현대 종합 엔터테인먼트의 총아이며, 미래를 예언하는 환타지의 교과서인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 때문이었으니, 세상은 참으로 생뚱맞다.

“뉘신지?”
“내가 니 애비”

다스베이더의 마지막 고백은 스타워즈 시리즈 전체를 갈무리하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개봉 당시에 운위된 ‘방대하며 유려하고 놀라운 3D’는 솔직히 30여년의 맥락에 따른 디자인 한계에 의해 별로 감탄사를 자극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애비와 자식의 갈등구조를 제공해야 하는 중간자적인 입장의 성격은 마지막편이라는 장엄한 타이틀만큼의 스케일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하고야 만다. “조지 루카스”가 언제부터 한시를 즐겨 읽으며 수미쌍관에 심취하셨는지 “니 애비의 갈등도 꼭 독고다이 맞짱으로 정점에 서리라”를 엔딩으로 가야만 했는지는 무척 궁금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인트로 부분의 거함들이 격돌하는 장면에서 우리가 생각한 스케일은 ‘본 것 이상’을 갈구함이 자명하다. 우리는 말 그대로 『스타워즈』의 스펙터클을 기대한 것이지 『다찌마와리』의 합을 갈구한 것은 아니다.

문제의 요인은 또 있다.

우리는 이미 『인디펜던스 데이』의 1대 다수의 맞짱 스케일을 경험한 바, 대통령도 미지의 절대세력을 응징할 수 있다는 플롯을 감상한 적이 있다. 뿐만 아니라 외계인도 MS 기반의 윈도우를 쓴다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을 알려주고야 만 『인디펜던스 데이』의 충격은 이미 한번 겪은 터, 그러기에 한 『다찌마와리』 하시는 아나킨 스카이워커옹께옵서 ‘다스 시디어스’의 명에 따라 몇 타스는 족이 넘어 보이는 포스 기사단을 독고다이로 정리 하시는 거나 충직한 시디어스의 늙다리 부하들을 정리해대시는 모습은 어제 본 코미디 오늘 또 보는 것 수준의 심심함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렇다. 아나킨옹이 무슨 잘못이랴? 몇 년 먼저 나와 설친 『인디펜던스 데이』가 나쁜 놈이지.

요컨대 콩심은 데 콩 나야하는 “조지 루카스”의 수미상관 식 영화구조는 심히 용두사미스러운 클라이막스로 봉착한 바 ‘자식이기는 애비 없다’는 끈적한 혈연의 정을 다시 확인하는 영화로 갈무리 되었다. 이야기의 처음부터 중간까지를 마무리해야 하는 태생적 한계를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웅장한 전편의 아우라의 끝을 보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소구욕은 충족시키지 못한 한계를 가진 『스타워즈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는 아무래도 아쉽고 종결의 맛이 나지 않는다.

문득 생각하건대, 스타워즈의 자랑스러운 마무리는 좀 더 일찍 나왔어야 했다. 우주적 『다찌마와리』는 이미 『인디펜던스데이’에서 확인했고, 지난 영화사 연작 시리즈의 점층적 스케일 상승감의 극한은 『반지의 제왕』에서 경험했으며, 무엇보다 무술의 합은 “쇼브라더스”가 이미 30년 전에 보여줄 건 다 보여주지 않았냐는 말이다. 하물며 그 후세대인 “성룡”, “이연걸”, “홍금보”, “원화평” 형님들이 그만큼의 것들을 할리우드에서 소비하지 않았는가?

영진공 그럴껄

조지 루카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래가 여기 있다."
조지 루카스의 전설적인 데뷔작 <THX 1138>은 루카스 자신이 밝혀놓고 있듯,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영화에 ‘스튜디오’가 돈줄을 대줬던 거의 마지막 시대의 거의 마지막 영화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것은 1971년. 아무도 성공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영화들이 줄줄이 성공했던 때였다. 일단의 젊은 감독들이 기존의 체제에, 기존의 시스템에 도전하며 기존 영화에 비하면 굉장히 적은 돈으로 자기들 멋대로 찍어온 영화가 대박을 치고, 이들이 ‘이지 라이더 세대’라고 불리었던 이른바 ‘아메리칸 뉴 시네마’의 아이들이 대거 등장한 시대 말이다. 아메리칸 조에트로프를 설립한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가 이 영화의 총괄 제작자가 되어 워너브라더스의 간부들을 구워삶은 것도 바로 그런 말들이었다. “<이지 라이더> 같은 대박작이 될 수 있다니까요!” (완성된 영화를 본 워너브라더스 간부들에게 코폴라는 ‘사기꾼’ 소리를 들어야 했다. “돈 되는 영화 만들어온다며!!”) <스타워즈>의 세계가 워낙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치고 조지 루카스가 미국 헐리웃 내에서 손꼽히는 억만장자가 돼버린 모습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영화청년’  조지 루카스(뿐만 아니라 ‘영화청년’ 코폴라)의 모습을 고스란히 확인할 수 있는 영화가 <THX 1138>이다. <스타워즈>로 하룻밤 사이에 억만장자가 된 조지 루카스는 자기 돈을 들여 ILM을 설립했고, 이 ILM의 역사가 바로 헐리웃 CG 역사의 기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특수효과를 발전시켰는다. 조지 루카스는 작년에 자신의 모교(USC) 영화과에 억대의 돈을 기부했다고 한다. (저 억대는 원화 기준이 아니라 달러 기준이다.) 툭하면 조지 루카스와 스필버그 이름을 팔아먹는 누구와 참 대조되는 행보가 되겠다. 하여간에.


감독이 구축해 놓은 이 세계가, 참 재미있다. 억압과 통제와 감시의 사회가 등장하니까 사람들이 그냥 쉽게 ‘오웰적 세계’란 말을 많이 하지만, 이 세계는 모니터로 모든 것이 서로 감시/통제된다는 점을 빼면 그닥 오웰스럽지 않다. . ‘중앙’의 절대 권력인 Big Brother가 없을 뿐 아니라, 소위 ‘상부’ 내지 ‘권력층’이라는 것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약물로 통제되는 사회여서만이 아니라, 결국 이 세계는, 오히려 인간의 철저한 이성과 정확함을 추구하며 공공의, 공동체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이 평등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서로를 통제하고 감시하며, 스스로 억압에 동참하고 이를 재생산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의무적으로 복용하는 약은 진정제이며, 이를 통해 이들은 극단의 침착함과 이성적 사고를 유지하고 작업에서의 정확성을 높인다. 이는 근대적 특성을 극단으로 밀어부친 결과일 터. 이들의 감옥은 심지어 철창도 없고 감시하는 자도 없다. 오히려 넓게 활짝 열린 공간. 다만, 아무것도 노동할 것이 없다는 점, ‘사회’에 공헌할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인물들을 미칠 듯한 상태로 몰고 간다. (SEN은 “우리를 일할 수 있는 조직(working unit)으로 바꿀 아이디어를 찾아오겠다”고 외치지 않는가.) 친구가 지적해준 바에 의하면 <THX 1138>의 세계는 오웰보다 오히려 헉슬리적 세계에 더 가깝다. (그러나 [훌륭한 신세계]를 읽은지 워낙 오래 돼서,  헉슬리의 세계가 이토록 이성 중심적인 세계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긴 주인공이 탈출해서 만나는 게 소위 원시적 종교제례였지, 아마.)


그렇기에 나는 이 영화에 대해 기존 평론가의 말을 그대로 반복해 ‘디스토피아를 그렸다’고 말하며 이 영화의 세계를 손쉽게 ‘나쁜 것’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가 디스토피아라고 생각하는지 묻고싶은 충동이 인다. 바로 지금의 한국사회야말로, 정체도 불분명한 ‘국가’와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의 선과 이익과 영광을 위해, 또 한편으로는 취향과 능력까지도 하향평준화된 수준을 지향하도록 각자가 자발적으로 다른 개인을 감시하고 억압하며 이를 재생산하는 사회이자, 능력을 넘어선 소비를 부추키며 수시로 지름신을 맞고 이를 자랑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THX 1138>의 세계가 우리의 세계보다 더 합리적으로 평화롭게 보이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이들은 누군가를 처벌할 때도 철저하게 규정에 따른 처벌을 하고 재판을 하며, 대중의 이익, 공동체의 이익을 함께 구현하고자 강제와 억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노력한다. 죄인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조차 철저하게 (숫자로) 법제화된 과정을 따른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천재들이 통찰해줬듯, 유토피아가 바로 디스토피아이다. 우리의 삶의 방식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 거의 대부분의 인간이 매일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매일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며 향수를 뿌리고 액세서리로 장식을 하는 것은 그리 역사가 오래 되지 않았다. [섹스북]의 저자마저도 현대사회가 지나치게 ‘체취’에 대한 공포와 ‘청결’에 대한 강박증으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지적하는 것을 보면, 머리카락을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모두 밀어버리고 하얀 옷을 입으며 청결에 힘쓰는 THX가 사는 세계의 가치관이, 그들의 사는 모습이, 과연 우리와 얼마나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묻고 싶다. 우리가 사용하는 체크카드와 신용카드 등으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어느 경로로 언제 어디를 가서 무엇을 했는지 얼마든지 기록이 가능하다. 기록이 가능하단 얘기는 누구든 필요할 때 열람할 수 있다는 얘기기도 하다.


다소 코믹하게 그려진 SEN 5241,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인 THX 1138은 루카스가 감독 코멘터리에서 밝힌 대로 한 사회 내에서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그리고 다소 ‘자뻑’에 취해있는 사람)과 실천으로 ‘혁명’을 해버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린다. 나중에 옴에게 가서 기도하는 SEN은, “단지 조금만 조정해도 결과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고, 나는 이 사회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기도한다. 반면 어쩌다 원치않게 이 사회에서 가장 금기시하는 룰을 어기고 사회의 범법자가 돼버린 THX는(그가 약을 끊은 건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다.) 사랑하던 LUH마저 잃은 뒤 이 사회를 완전히 탈출한다. 이것은 한 개인이, 자신이 아무런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는 자신의 현실의 사회에서 벗어나 다른 현실로 탈출하는 과정인 셈이고, <THX 1138>에게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 그래서 공동체 묘사가 비슷하고 심지어 의복도 거의 흡사한 – <아일랜드>보다는 주제적인 면에서 오히려 <매트릭스>가 루카스의 세계를 더 충실히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안드로이드 경관이 경고한 대로, THX는 지하도시의 세계를 벗어나 저 바깥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지 모른다. 인간이 그렇게 지하로 숨어들어가 지하도시를 건설하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감시와 통제체제를 이룩한 것, 그리고 그토록 청결에 신경을 쓰며 사회의 주요 동력을 핵 에너지에 의존하되 그 사용에 있어 그토록 조심스러운 것도, 지상에서 핵전쟁을 겪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 ‘태양’ – 인간이 절대 볼 수 없는 ‘원지식’이자 ‘근원자’를 은유하는 – 앞에 선 THX의 존재는 장엄하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목적은 ‘장엄한 죽음’을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