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냐.


 

온오프라인 평론가들의 성찬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에 온전히 공감하지 못했다.
영화의 절반에 해당하는 살인마 쉬거(하비에르 바르뎀)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쉬거는 그 존재만으로도 영화 속 세계의 중력장이 일그러지는 느낌을 줄 만큼 생생했다. 그 앞에서는 심지어 초코바 포장지까지도 덜덜덜 떤다. 그는 사실 인간이라기보다는 운명 혹은 죽음의 상징에 가깝다. 그의 행동은 인간의 합리적인 의사결정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컴퓨터 프로그램의 결과물이다. 그가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방식, 동전던지기만 봐도 그렇다. 동전을 던져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앞면과 뒷면이다. 0과 1, 그는 디지털 코드인 이진법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지금까지 나온 가장 참신한 <터미네이터>의 재해석” 이라고 평한 한동원에게 100% 동의한다. 쉬거가 있었기에 이 낡은 시절의 이야기는 21세기에 어울리는 새로운 영화가 될 수 있었다.



그대로 잠시 서 계시겠습니까?


아… 이 똘끼 제대로 뿜어주시는 포스…

내가 공감하지 못한 것은 영화의 나머지 절반인 에드(토미 리 존스)의 부분이다. 늙은 보안관 에드의 감정은 한 마디로 무력감이다. 쉬거가 휩쓸고 지나간 살인 현장을 돌아보며 그는 이번 상대는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임을 감지하고 무력감을 느낀다. 그가 수사를 위해 미국 서부의 다른 지역을 찾아갈 때마다 해당 지역 담당자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이들은 모두 근심이 가득한 어두운 얼굴로 술집에 앉아 읖조린다. “세상이 우찌될라꼬..”

세상이 어찌되긴 뭘 어찌되는가.

그들이 그렇게 근심하던 1980년대 이후 27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멀쩡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에드의 젊은 시대 역시 그의 회상만큼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의 모티브가 되었던 에디 게인의 행각이 발각된 것이 1957년이다. 1964년에 제노비스는 뉴욕 주택가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1969년에 찰스 맨슨 패거리는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인 샤론 데이트와 친구들을 난자해 죽였다. 1960년대까지 미국은 마치 지금 이라크에서 그러는 것처럼 베트남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댔고 그 여파는 197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그 흉악한 전쟁터에서 돌아온 군인들이 마약을 퍼트렸고, 미국의 공업생산성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통계를 살펴보면 강력범죄사건의 비율은 지금보다 오히려 그때가 더 심각했다. 간단히 말하자. 문제는 언제나 있었으며, 과거가 지금이나 미래보다 더 나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것은 세상의 이치다. 세상은 젊은이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의 세상이 옛날 잣대로 보자면 황당하고 위험해보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눈으로 과거를 봐도 황당하고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최근 몇 개월간, 나는 이 나라가 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품목별 가격통제(도대체 만원짜리 바지와 수십만 원짜리 바지가 공존하는 요즘 세상에서 ‘바지’의 가격은 어떻게 정하려는가?), 휴일 없이 일하라 다그치는 공직사회, 경부고속도로의 신화를 운하로 재현하겠다는 토건 정책, 온갖 곳에 끼어들어 전문성을 무시하고 시시콜콜이 참견하는 대통령에서 나는 1980년대 혹은 그 이전을 느낀다. 얼마나 혀를 꼬는지를 가지고 영어실력의 우열을 가릴 수 있다는 주장은 막 아메리칸 드림이 피어오르던 1970년대에 어울린다. 딱 자기들 존재의 급수에 어울리는 어색한 영어이름을 가진 단체가 내놓은 자칭 교과서는 일제시대를 떠올리게 하며, 심지어 신에게 뭔가를 봉헌하기를 좋아하는 전직시장의 행보는 제정일치시대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정서는 이 나라가 북한과 총탄을 교환하던 1950년대에 매몰된 노인네들의 정서다. 도대체 지금 좌우 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24번의 ‘바지’ 를 보며 나는 “엄마바지~ 아빠바지~ 꾸에꾸에” 를 흥얼거렸다…

‘노인들을 위한 나라’에서 살아본 몇 개월은 이 영화에 대한 내 태도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에드가 정확히 무엇을 걱정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에드의 세상이 가고 낯선 세상이 오는 것이 무서운게 아니라, 그런 세상이 오지 않는 것이 더 무섭다는 점이다.

에드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기 한계를 알고 물러설 줄 알았기 때문이다. 모스가 죽어나간 모텔방에 들른 에드는 이미 쉬거가 돈가방을 챙겨갔음을 발견하고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한번 쉬고는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떠난다. 혹여 그가 범죄현장을 한번 더 수색할 생각을 했더라면, 그 역시 쉬거의 희생자 명단에 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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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기다리는 방에 들어서려는 에드

노인이 현명한 것은 자신의 한계와 물러날 때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때 되었으면 제발 좀 사라져줘라.

지금은 당신들이 좌지우지할 시대가 아니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