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링(Sampling)이라고???

얼마 전에야 <원더걸즈>라는 소녀그룹의 “텔미”라는 노래를 우연히 들은 적이 있다.
전 국민 계층에 걸쳐 엄청나게 히트를 한 노래라는데, 이제야 일청한 난 뭐냐능 -_-;;;

그런데 이 노래가, 80년대에 반짝 히트했던 어느 디스코곡을 강하게 연상시키는지라 주변의 지인들에게 물어보았다.
“이 노래 혹시 그 노래 번안곡 아냐???”라고 …

역시나 이 곡의 작곡자가 그 곡을 샘플링했다고 그랬다는 대답이었다.
흐음 … 글쿤 …

아니, 가만 … 샘플링이라고???
어머, 그럴리가 … 이건 샘플링이 아닌데 …

일단 두 노래를 직접 들어보자.


원더걸즈 테,테,테,테,테, 텔미히~


Stacy Q “Two Of Hearts” (1986)

음악, 특히 대중음악에서 샘플링이란 어느 곡의 몇 소절을 따오거나 연주기법을 차용하거나 또는 특정하게 반복되는 패턴(리프, Riff)을 모사하는 기법으로 알고있다.

그런데 위의 두 곡에서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샘플링인가.
이건 샘플링이 아니라 원곡의 창조적 재구성이라 해야 한다.

원곡의 분위기를 전혀 해치지 않으면서, 2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들어도 신나는 작품을 만들어 놓으시고선,
작곡자 그 분은 왜 굳이 샘플링이라고 겸양의 덕을 발휘하신 걸까???

그럼 여기서 샘플링이 뭔지 알아 보기 위해 예를 하나 들어보도록 하겠다.
아래의 두 노래를 들어보자.

첫 곡은 <America>의 “Ventura Highway”라는 1972년 발표작이고,
두 번째 곡은 <Janet Jackson>의 “Someone To Call My Lover” (2001) 이다.



America “Ventura Highway”



Janet Jackson “Someone To Call My Lover”

America의 노래에서 계속 반복되는 기타 리프를 모사하여 Janet Jackson의 노래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한 걸 확인하셨을 것이다.
이처럼 샘플링이란 원곡의 특징적인 일부분을 제한적으로 따올 때 그 효과가 크다 할 것이다.

실례와 비교해 보니, 원더걸즈의 노래에 Stacy Q의 노래가 “샘플링” 된 게 없다는 나의 주장에 한껏 힘이 실리는 듯한 느낌은 혹시 나만 …

암튼 샘플링은 아니고 그럼 혹시 리믹스???

리믹스란 말 그대로 노래의 믹싱을 다시 하는 걸 일컫는다.
믹싱이란 따로 녹음된 노래의 요소들을 함께 엮어서 완성된 노래를 만드는 작업인데,
리믹스는 원곡의 분위기나 템포 등을 바꿔 새롭게 하려는 의도에서 시도된다.

그래서 리믹스를 할 때는 새로운 악기파트를 추가하거나 기존의 악기파트를 뺀다든지, 특정부분을 늘리거나 줄이든지, 빠르기나 비트를 바꾼다든지 하게 된다.
그리고 아예 서로 다른 곡들을 함께 섞어서 하나의 노래로 만들기도 한다.  

그럼 이번에도 역시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첫 곡은 Mariah Carey의 “Fantasy”(1995)이다.
이 곡의 중간 쯤에 Tom Tom Club의 노래를 샘플링한 부분이 있는데,
그 곡이 두 번째 동영상인 “Genius Of Love”(1981)이다.
그리고 이 두 곡은 합쳐져서 리믹스 버젼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곡이 세 번째 동영상인 “Fantasy (ODB Remix)”이다.

확인해 보자.



Mariah Carey   “Fantasy”


Tom Tom Club   “Genius Of Love”


Mariah Carey   “Fantasy (Ol’ Dirty Bastard Remix)”


들었는가, 보았는가,
리믹스도 그렇고 샘플링도 그렇고 잘 만들어진 작품은 원곡과 대상곡이 잘 어우러져 하나의 노래를 구성하면서도 각자의 특징이 잘 구분된다.

그런데 Stacy Q와 원더걸즈의 경우는 그런게 아니다.
원곡의 요소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각각 잘 분리하여 새로운 해석으로 터치한 작품인 것이다.

이처럼 원곡의 느낌은 그대로 살리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섬세하게 입히고 특히 우리 정서에 맞게 제대로 향토화한 걸작을 두고,
그저 샘플링만 했다고 스스로 깎아내리다니 …

지나친 겸양은 하지 않으니만 못하다 하였거늘 어찌 그리하였단 말인가, 에혀 …

영진공 이규훈

삶의 의미라 … [The Meaning Of Life] 中 Pt. 6

대운하, 뉴타운, 삼성, 광우병, 물가, 유가, 아마츄어리즘, 패거리정치 …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도대체 뭐가 경제살리기고 뭐가 국정안정인거냐.

문득 생각나는 영화가 하나 있다.
Monty Python의 걸작 <The Meaning Of Life>(1983).
그 중에서 Part 6을 준비 해 보았으니 감상해 보시라.

단, 식사 직전이나 직후에는 감상을 자제해 주시고 … 한글자막은 없지만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으니 안심하시라 ^.^


판도라의 상자 – 20대는 죄가 없다.

 

일본에서 2008년도 2분기에 시작된 드라마 중에 ‘판도라’라는 것이 있다.

한 국립대 의대 연구원이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을 개발해버리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루는 듯 – 아직 1회까지 밖에 안 나왔지만 이미 1회에 약을 개발했다 – 하다.

감히 건방지게 말하지만, 왜 제목이 ‘판도라’인지 벌써 깨달은 분들은 그나마 세상 돌아가는 꼴을 어느 정도 보시는 분들이고, 도무지 ‘왜’ 제목이 판도라인지 아직도 감이 안 오시는 분들은 순진하게 세상 사시는 분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우리가 ‘사회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면, 아니 적어도 영국이나 유럽의 일부 국가처럼 무상 의료가 진작부터 지원되는 나라였다면 위의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의 개발이 그토록 무서운 ‘판도라의 상자’가 되진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 대한민국과 일본은 그 빌어먹을 ‘자본주의’ 사회에 충실하다 못 해 사람 목숨을 돈으로 따져야 하는 – 일본도 우리도, 암 치료비 때문에 집의 재정이 풍비박산 나며, 이로 인해 돈이냐 목숨이냐를 따져야 하는 더러운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 슬픈 나라가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TV시리즈에서처럼 ‘모든 종류의 암’을 치료하는 약이 실제로 개발되어버리면 일본은 절대절명절체절명의 위협을 받게된다. 일본의 생명 또는 질병 관련 보험 중 ‘암’과 관련된 상품은 무너져 버리고 보험의 기능이 무너짐과 동시에 금융권의 악재가 온다. 이와 더불어 ‘암’으로 인해 죽어나가야 할 예상치의 인구가 급작스레 ‘살아가기’ 시작하고 이 인구는 고스란히 최고령 인구가 즐비한 일본사회에 더더욱 무거운 짐으로 나타나 버리며, 이는 사회의 공멸로 이어지게 된다. 더군다나 이런 일이 일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암’으로 돈을 벌어먹고 있는 모든 산업에 위해가 가해진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그 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기득권’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가 올 수 있을까?

자본주의 국가에서 대의 민주주의라는 형식을 빌어 기득권이 해낼 수 있는 만행은 인간이 얼마나 ‘금권’에 타락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약’이 개발되면 손해를 보게 되는 제약사와 병원, 금융권은 연합을 해서라도 후생성을 비롯한 관료들에게 로비를 하여 약이 ‘절대’로 출시되지 못하도록, 혹은 ‘출시하더라도 전 재산을 털지 않으면 안되도록’ 가격을 조정하게 된다. 이로 인해 ‘충격’은 완화되고 결국엔 가진 자들의 배를 불릴 지언정, 진정한 ‘암의 정복’은 결국 ‘한 과학자의 인간승리’가 아닌 ‘금권의 승리’로 둔갑할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는 신약 개발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엄청나고도 급격한 변화는 언제나 ‘기득권’을 위협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변화는 새로운 ‘기득권’을 낳게 된다. 그리고 인간이 언제나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기 때문에 ‘욕심’은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버리기 어렵다. 그리고 그 중심은 언제나 기득권의 회유와 협박, 달콤한 유혹에 시달릴 것이다.

또 다시 실망 뿐인 – 이재오를 무너뜨린 문국현 케이스 제외 – 선거가 끝났다. 기득권은 밤낮 안 가리고 국민을 농락했고 국민은 또 다시 무장해제 당하고 멍청히 투표를 하지 않았다. 정치 혐오감이든 나발이든 중요치 않다. 지금의 20대를 만든 것은 지금의 4~50대 부모와 그들이 즐겨보던 조중동이며, 대입 외에 다른 꿈을 꾸지 못하게 한, 기득권이 만들어 둔 시스템일 뿐이다.

20대는 벌 받을 일이 없다.

기득권이 만든 기본적인 교육 시스템조차 파괴시키지 못한 이 사회의 중년들이 이 사태를 고스란히 책임져야 할 것이다.

20대는 분명 책임이 없다.

열 아홉부터 종이 쪼가리 도장 찍을 권한 준다고, 대가리에 똥이 들었는지 글로벌하게 원대한 꿈이 들었는지 따지면 뭐 할 것인가? 그 속에 뭔가 채울만한 그런 기반조차 주지 않은 채 바라는 게 너무 많다. 이들은 그저 이제부터 당신들의 ‘개발독재’ 때처럼, 그렇게 허리 졸라 살면 그만이다. 서로 시기하고 경쟁하고 물어 뜯고 살면 된다. 30대들, 자신들도 그런 기반 없이 이 사회를 버텨왔다고 이들에게 ‘우리는 그랬어’라면서 저항의 삶을 강요할 텐가? 자신들이 읽어오던 ‘빨간 책’이, 맑시즘이 사회에서 퇴출되고 있는 동안, 당신들이 ‘밥벌이’에 바빠 신경쓸 겨를이 없던 동안, 이들이 권력에 의해 ‘취업에만’ 힘쓰는 불쌍한 자본주의의 기계가 되어가는 동안.

20대를 비난하지 말자. 이들은 그런 사춘기를 보내고, 남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비극에 놓였다.

이제 고민은 오히려 중년, 당신들의 것이다. 애새끼들은 서른이 넘어도 취업하지 ‘않은’ 채로 집에서 돈 달라 보챌 거고, 의료보험 민영화되어 늙어가는 몸이 아파도 병원은 커녕 약도 못 사고, 연금이고 나발이고 수급액은 줄어들어 결국 피폐한 노년이 될 테니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기득권’이 원하는 방향대로 흐른다. 가끔 변수가 생겨봤자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기득권은 ‘돈’을 가지고 ‘사람’을 농락한다.

그에 대항할 수 있는, 현실의 유일한 방법인 ‘대의 민주주의’조차도 결국 ‘돈’과 ‘권력’에 농락당하면 끝이다.

슬슬 땅값 오르던 노원구에 노회찬이 아닌 ‘한나라당 홍정욱’이 됐다.

유시민을 두 번이나 당선시킨 덕양구 갑에 재개발 시기로 슬슬 땅값이 오르더니 심상정이 아닌 ‘한나라당 손범규’가 됐다.

판도라의 상자에 ‘희망’이 남았다고 하던가?

그 희망이 의지로 발현되어 결국 우리는 나설 것이다.

투표고 나발이고 언제나 물러나 무임승차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내 아버지 세대의 무지렁이처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

결국 금권에 타락한 정권에 맞서고 격렬히 저항하는 사람들이 없는 한 신의 ‘약’은 일반 국민의 손에 오지 않는다.

내 학창시절을 386, 486 선생들의 아래에서 보냈던 걸 감사해하며 …

영진공 함장

밥을 먹다말고 희경씨를 잠시 생각하다


최근 새로운 화상통신 서비스를 집중적으로 광고하고 있는 모 이동통신사의 CF 중에 여자 친구 어머니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녀의 언니시냐고 물으며 당사자의 지극히 아줌마스러운 웃음소리를 이끌어내는 버전이 있다. TV를 거의 안보는 사정 상 주로 영화 시작 전에 쏟아지는 여러 광고들 틈에서 이 장면을 반복해서 보곤 했는데 정윤철 감독의 영화 <좋지 아니한가>(2007)에서 심씨 집안 어머니 역으로 출연했던 문희경씨가 그 주인공이었다는 것은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87년 대학강변가요제에서 ‘그리움을 빗물처럼’이란 곡으로 데뷔한 이후 뮤지컬 무대에서 실력을 인정받다가 실명과 같은 ‘희경’이라는 이름으로 영화에 첫 나들이를 한 그녀는 이동통신 CF에서 무척 실감나는 연기를 보여준다. 다림질을 하다가 무심코 받은 딸내미의 핸드폰에서 젊은 남자로부터 ‘언니’ 소리를 듣고는 남편 와이셔츠를 태워먹으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는 주책 없는 아줌마상을 보여준다.

얼마 전 집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다가 밥 공기를 유심히 쳐다보게된 일이 있었다. 갑자기 밥 먹는 일이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좋지 아니한가>에서 밥을 하고 먹는 일이 인생의 전부였다가 어느날 문득 커피의 세계에 빠져드는 희경씨를 생각하게 됐다. <좋지 아니한가>의 흥행 실패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문희경씨가 너무 현실적으로 우울해 보였던 탓도 있으리란 생각을 한다. 한국영화의 주 관객층들이 절대 받아들이고 싶지 않는 미래의 공포가 희경씨와 같은 삶 아니겠는가. <추격자>의 지영민은 그런 놈을 만날까봐 무섭지만 <좋지 아니한가>의 희경은 내 자신이 그런 모습으로 늙어갈까봐 무섭지 아니한가. 어쨌든 그 표정 하나로 이미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희경은 황새 쫓던 잡새 마냥 독서실에 안가고 노래방에서 땡땡이를 치던 여고생 딸내미를 쫓아가다가 다리를 다쳐 갑작스런 병원 신세를 지게 되지만 변변한 병문안 한번 못받아 보던 중에 급기야 일탈을 결심하게 된다. 꽃미남 노래방 총각(이기우)의 접근에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길을 떠나지만 다시 찾아온 듯한 생의 환희는 저 멀리 춤추는 오렌지색 티셔츠와 같은 허상이었던 거다. 미숙이 그 잘난 년은 동생 약혼자까지 뺏어서 잘도 달아나더니만. 결국 집으로 돌아온 희경에게 남겨진 것은 MP3 플레이어 기능까지 탑재된 수 백 만원짜리 최첨단 커피메이커. 여전히 남편 허리띠로 뚜껑을 고정시켜줘야 하는 대따 큰 밥통으로 밥을 지어먹을 지언정 이제사 알게 된 커피향의 의미는 그냥 포기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 된다.

당장 내동댕이 치고 싶은 비루한 일상이란 영화 속에서 흔히 채용되는 생활 공감형 출발점이 되곤 한다.(생활 공감이라는 말이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미래 공포형이라고 하자) 그런데 매일 먹던 밥에서 비린내가 느껴진다면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가. 내가 성장해온 삶의 터전이고 상황에 따라서는 유일하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피난처이긴 하지만 더이상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 된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좋지 아니한가>는 비교적 너그러운 판타지를 보여준 편이다. 희경씨의 대모험은 처음 뜻했던 바와는 크게 어긋나고 말았지만 결국 일상을 다시 견디고 그런대로 살아갈 만하게 만들어주는 새로운 무언가를 남겨주었으니 말이다. 커피도 매일 마시다보면 어느덧 밥이나 마찬가지가 될 수도 있으니 무엇이 생활이고 무엇이 꽃단장인지는 곰곰히 따지고 명확하게 구분해가며 살아야 할 일이다. 밥 먹는 일 외에도 다른 즐길 만한 거리가 많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한다면 어느날 문득 찾아드는 밥 비린내도 너끈히 다스릴 수 있을런지 모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왜 우리 희경씨에게는 <문스트럭>(1987)의 로레타(셰어)와 같은
젊은 남자와의 멜러가 허락되지 않는 건가. 희경씨를 그렇게
쓸쓸하게 내동댕이 쳤으니 영화가 쫄딱 망하는 건 당연지사다.

영진공 신어지

공수창, [GP506] – “사회적 메시지를 위해 호러의 공식을 이식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약한 아버지와 죽음의 위기에 몰린 아이들.
비무장지대 내 최전방 경계초소인 GP 506에 전 소대 몰살사건이 벌어진다. 진상을 조사할 노수사관(천호진)을 위시해 수색대가 들어가서 목격한 것은 내무반 내에 널부러진 피투성이 시체들과,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광기의 눈을 번득이며 도끼를 들고있는 강진원 상병(이영훈)의 모습. 노수사관은 곧 수사를 시작하고 총 20구여야 할 시체가 19구밖에 되지 않음을 알아채는데, 수색대원들은 뜻밖에 패닉 상태에 빠진 채 생존해있는 GP장 유중위(조현재)를 발견한다. 계속해서 초소 밖을 나가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유중위는 도무지 입을 열 생각을 안 하고, 용의자인 강상병은 의식불명 상태다. 폭우 때문에 길이 막혀 수색대원들마저 경계초소 안에 고립된 와중 이들은 괴이한 사건들이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군대 안의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미스터리 형식으로 시작해 호러영화의 문법을 차용한다는 점뿐 아니라, 영화 안에서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영화가 위치하고 있는 외적 맥락 때문에 결국 사회적, 정치적 의미로 해석되는 메시지를 담고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GP 506>은 <알포인트>보다 호러의 외양은 더 많이 내되(피와 시체들의 향연!) 호러로서의 구성은 느슨하며, 그렇다고 미스터리 스릴러로서 꽉 짜인 플롯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대신 이 영화는 ‘군대’를 둘러싼 보다 비극적인 정조를 강화한다.


대체로 평가가 높았던 <알포인트>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던 부분이 있는데, <GP 506>을 통해 조금 더 확인한 부분이 있다면 공수창 감독이 호러장르의 문법을 사용하는 방식은 호러 본연의 코드를 익숙하게 사용한다기보다 저 사회적, 정치적 메시지를 위한 비유의 차원에서 호러의 공식을 이식해서 쓰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호러영화들이 그 어떤 다른 장르의 영화들보다 당대 대중들의 무의식을 사회적인 맥락에서 통찰해볼 수 있는 텍스트를 제공하는 게 사실이지만, 장르영화 안에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사회적 의미를 담는 것과 특정한 사회적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장르의 공식을 가져가는 건 영화제작의 방향이 정반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알포인트> 역시 분명 후자였음에도 미스터리 – 호러의 측면에서 구조가 탄탄했기에 전자로 오인되었다. 그러나 <GP 506>은 명백히 후자이고, 감독은 굳이 호러의 장르문법에 그렇게 얽매여있지도 않다. 호러영화의 팬들에서 이 영화에 대해 악평이 나오는 건 당연한 것이, 감독이 ‘그 설정’을 사용하는 방식은 이야기를 위해 억지로 끌어온 듯한, 낭비되고 있는 듯한 측면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다른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데도 굳이 호러영화의 틀에서 이 영화를 형편없다고 평하는 것 역시 핀트가 살짝 어긋났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처럼 호진 님이 주인공으로 나오셨어!!!! 꺄악!!!!


굳이 GP 506 초소가 아니더라도, ‘군대’라는 것이 한창 호르몬 왕성하고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야 할 청춘들을 세상과 고립시킨 채 ‘사람을 효율적으로 죽이는 기술’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군대라는 집단의 그 폐쇄성과 배타성은 굳이 GP 506 초소가 아니더라도 외박과 휴가가 자주 보장되는 부대라 해도 지워지지 않는 특성이다. 이것을 좀더 강조하고자 선택된 공간이 GP 506이라는 초소인 셈인데, 이곳에서 비록 군 장성의 아들로 어릴 적부터 군인의 정서로 자라왔다고는 하나 여전히 어린 청춘에 불과한 유중위의 손에 다른 20명의 운명이 맡겨져 있다는 것이 얼마나 지나치게 무거운 책임인지, 어른들이 지고 어른들이 해결해야 할 짐이 어린 청년의 어깨에 얼마나 과도한 무게로 억지로 지어져 있는 것인지가 영화 속에 명확히 드러난다. 아울러 이 모든 사태를 결국 자기희생이라는 방식을 통해 해결하려 한 강진원 상병의 해법 역시 아이가 지고가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자 너무나 안쓰러운 결단이다. 잘못된 역사를 끊어내기 위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기에 강진원 상병은 너무 젊고 앳되며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훨씬 더 많이 남아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사건을 수사하러 온 노수사관이 결국 그런 식의 엔딩을 내는 것을, 나는 어른 세대가 자신들 세대에서 발생한 비극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읽었다. 그가 이미 죽어 나자빠진 아이들, 지금은 살아있으나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할 아이들, 그리고 그 무거운 짐을 혼자 감당하려 한 강진원 상병에게 느꼈을 슬픔과 고통과 죄책감이 어떤 것이었을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울러 기자시사 후 간담회에서 천호진 씨가 ‘웃음소리’가 나는 객석을 향해 왜 그리 날카롭게 반응했는지도.) 지나간 역사에 대해 자기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책임을 지려는 어른이 등장하는 흔치 않은 한국영화가 또 한 편 추가된 셈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긴 하지만 어딘가 좀 뻣뻣한.


그럼에도 이 영화의 엔딩은 석연치 않은 찜찜한 뒷맛을 남긴다. 괴질은 손쉽게 전염되고 이곳은 외따로 고립된 곳이지만 과연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병의 전염만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 책임을 지려는 어른이 등장한 것은 너무나 소중하지만,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은 것도 사실이었지만, 과연 그런 ‘자폭’만이 유일한 해결방식이었는가에 대해선 의문의 소지가 있다. 내게는 이 엔딩이 한편으로는 책임을 지는 것인 반면, 또 한편으로는 지독한 자포자기와 패배주의의 방식으로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 다 죽어버리자”라는 건 오히려 가장 손쉬운 해법이기도 하지 않는가. 강진원의 입장에선 젊은 혈기에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게 어쩌면 당연했겠지만, 노수사관의 입장에서 그런 결론을 내리는 건 군당국과 고위 장성들, 나아가 그들이 속한 이 사회 시스템 전체에 대한 처절한 불신이 먼저 읽히고, 어쩌면 바깥세상에서 괴질의 연구에 뒤따른 치료의 기회가 있을 수도 있었던 다른 아이들에 대해 애초부터 기회를 차단하며 희생을 강요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읽히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그토록 필사적으로 굴었던 의무병이나 다른 수색대원들의 행동들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이기적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할 수 없고, 당해서도 안 된다.


또한 이 영화가 요구하는 ‘어른이 책임을 지고 과거의, 역사의 과오를 끊어내야 한다’는 명제의 그 ‘어른’이, 공수창 감독이 속한 세대가 아닌 그 윗세대라는 점도 찜찜한 맛을 더한다. 이 사회에서 일반적인 386 세대들이 전형적으로 보이는 태도 중 하나가 자신의 윗세대에겐 책임을 요구하고 불평하며 아랫세대에겐 희생을 강요하는 것 아니었던가. 바로 이 한계가, 영화를 보고 한편으로 젊은 아이들이 속절없이 쓰러져 가는 것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눈물의 뒷맛이 그닥 개운치 않았던 이유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하고 있는 에너지, 그리고 이 영화가 어쨌든 성공적으로 전달하고 있는, 억지로 청춘시기에 군대에 끌려가야 하는 아이들의 비극의 묘사라는 측면에서 그렇게 홀대받거나 함부로 폄훼당할 만한 영화는 분명 아니다. 전작인 <알포인트>에서보다 더 직설적이어서 재미없어진 면과 장르영화의 공식이 잘못 사용된 면이 분명 있지만, <GP 506>은 <알포인트>보다 전반적으로 세련되었으며 또 한편으로 상업영화의 틀 속에서 사람들이 입밖에 내기 꺼려하는 문제를 과감하게 지적하고 비판한 용기, 나아가 이를 ‘그림’의 측면에서 꽤 인상적으로 펼쳐놓은 미학적 성취가 분명히 존재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후회하지 않아>에 이어 메이저 영화로도 진출한 이영훈.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