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이.조”, 감독 너 좀 맞자!


감독: 스티븐 소머즈
출연: 이병헌 + 외국인들


영화 이미 짐작했겠지만 딱 깡통머리 금발 아가씨 되시겠다. 21세기 기술력으로 떡칠된 화려한 특수효과와 3D가 화면을 알알이
수놓고 있지만 알맹이는 없다. 3D화장을 지우고 나면 한민관 하체보다 더 부실한 스토리와 유치찬란한 전우애니 애국심 따위의
민망한 연출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영화가 한 두 번 보나. 어차피 눈이 즐거우라고 보러간 영화. 화끈한 장면으로 스트레스를
해소시켜주었다면 그걸로 이 영화의 본분은 다 한 거다.


문제는 허접 스토리가 아니다. 바로 이슈가 되었던 일본인지 중국인지 한국인지, 영어를 쓰는 것을 보니 베트남이나 말레이시아인지 … 아무튼 정체모를 국적불명의 ‘아시아 국가’의 묘사이다.


만약 우리가 만든 영화에서 파리 백악관에 베를루스코니가 앉아 이탈리아 공영방송인 MBC의 민영화를 위해 이사진 장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감독은 매장에 가까운 모멸을 당했을 것이며 영화는 극장에
걸리기는 커녕 국가 위신에 똥칠을 한다며 보안기관에서 필름을 회수해 갔을 것이다.




책을 만들 때도, 아니 블로그에 포스팅 하나 올릴 때도 오탈자가 없나 기를 쓰고 찾아보는 게 인지상정인데 전세계에 배급할 목적으로
만드는 영화에서 고증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상식적인 사실조차 확인해보지 않고 저따위로 아시아를 묘사했다는 것은 상식의 문제요 대뇌피질의
문제이다. 욕을 먹어야 할 것은 이병헌이 아니라 스티븐 소머즈 감독이다.


무식한건 죄가 아니지만 무례한 것은 좀 맞아야 한다.

감독은 무식한 게 아니라 무례했다.


너 좀 맞자!

영진공 self_fish



아들이 나를 믿지 않는다 …

작년까지만 해도 믿었다.

아들은….

아빠 지금 뭐해?

응, 지금 아빠는 파워포스레인저 레드와 지구를 지키기 위한 회의를 하고 있다.

거짓말.

아니야, 잠시만 기다려봐.

(광주씨, 아들, 설명좀 해줘.)

안녕 수겸아, 아저씨는 파워포스레인저 레드야!

으아아아아아아~ 엄마, 레드가 나한테 전화했어!!!!!

아빠는 영웅이 된다.

지구를 구하는 우주전사들과 연석회의라니.

하루는 그렌라간의 시몬을 만나고

하루는 사오정과 함께 손오공의 만행에 대한 토론을 하고

하루는 원피스의 크로커다일과 함께 해양한국, 빛나는 조국의 미래를 이야기 하고

그리고 또 어느날은 격동 50년, 역사스페셜의 주인공과 인사를 한다.

아들이 특히 감격하는 건 여자 주인공들과 조우할 때다.

물론 목소리만으로 조우해야지.

하지만 만나면 끝나는 그 환상이란 …

… 우울한건 이야기 하지 말자.

얼마 전, 트랜스포머를 보고 나오는 아들이 말한다.

아빠, 저건 그러니까 거짓말이지?

아들, 거짓말이 아니라 영화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꾸며주는 동화 같은거야.

그러니까 가짜잖아.

응.

후… 그럼 만화도 다 가짜잖아.

으…응…

싸늘하게 표정이 굳은 아들은 바람처럼 라페스타를 가로질러 간다.

8살의 속력을 넘는다.

세상은 항상 정의가 승리하는 만화같은 세상이 아니다. 아들.

50 미터는 넘게 앞서고 있는 아들에게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모기만하게 이야기 할 뿐이다.

영진공 그럴껄

“이퀼리브리엄”, B급 영화는 비디오로 봐야 제 맛

내 돈으로 표를 사주면서까지 꼭 보고 오라고 적극 권하고 싶은 영화는 있지만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절대 보지 말라고 뜯어
말리고 싶은 영화란 없다는게 내 생각이다. 오랫동안 상영관을 들낙날락 하다보니 나름대로 영화 고르는 안목이 생겨서 그런 정도의
심각한 재난은 미리 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아무리 형편 없는 영화라도 나름대로 한번쯤 봐줄만한 가치는
어디엔가 갖추고 있다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무지 이쁜 구석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형편 없이 만들어진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에도, 그런 ‘한번쯤 봐줄만한 가치’는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 가치란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가 얼마나 잘 만들어진 것인지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상대적 비교의 대상이 되어준다는 점에 있다. 극장이라고는 올해의 전국민 참여 영화 한 두 편에 한해서만 출입하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영화도 음식 처럼 맛 없는 요리를 먹어봐야 정말 잘 만든 일품 요리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나는 말하고 싶은 거다.

영화가 정말 실망스러운 경우의 진짜 원인은 실제 영화의 완성도에 비해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찾았다가 겪게 되는 낭패감에 있다. 같은 영화라 하더라도 보는 사람의 기대치나 다른 조건들에 의해 관람 중에 느끼는 바가 많이 틀려지게 되긴 하지만 아무튼 이런 식으로 실망감에 젖게 되면 그 영화의 장점이고 뭐고 다 싫어지게 되는게 인지상정이란 생각이다.

“이퀼리브리엄”에 대해서는 사실 반신반의했었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 느꼈던 허전함을 부분적으로나마 충족시켜줄 수 있으리란 기대도 있었지만 그럴만한 수준이 못된다는 경계의 소리도 들었다. 그래서 내 스스로 B급 영화는 B급 영화 나름대로 보는 방법이 있다며 일단 처음 가졌던 호감을 그대로 지켜나갔다.

전에 “이퀼리브리엄”을 B급 영화라고 했더니 누가 봵!하는 답글을 달았던데, “이퀼리브리엄”은 굉장히 B급 영화인 것이 맞다. 그럼 크리스챤 베일은 뭐냐고? 솔직히 난 크리스챤 베일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당시 그가 B급 영화의 주연과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의 조연 자리를 오고가는 그런 수준의 배우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이퀼리브리엄”을 보고나서 영화를 아직 못본 다른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런 거다. ‘이 역시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보지 말라고 뜯어 말리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극장에서 꼭 볼 필요까지는 없던 영화다. B급 영화는 … 역시 비디오로 보아야 제 맛이다.

영진공 신어지

늦더위를 잊어보자!, “계간 판타스틱 여름호- 호러 특급”


완전 소박한 문예지로 변신한 판타스틱. 화려했던 과거의 잡지포맷이 그립구나~

계간지로 바뀐 뒤 두 번째 판타스틱이 나왔다. 여름호답게 호러 익스프레스라는 특집을 마련해 뇌에 구멍이라도 난 것 마냥 머릿속에
한기가 느껴지게 만드는 호러블한 단편들과 나의 공포체험이라 하여 몇몇 유명인사(?)들의 체험기가 실렸다.


로버트 하워드의 ‘비둘기들은 지옥에서 온다’ 는 허름한 흉가에 얽힌 비극과 저주에 관한 이야기로 ‘코난’의 작가가 호러 작품을 썼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놀라웠다. 제목 센스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물론 이야기도 재밌다.


그렉 이건의 ‘야경꾼’은 부기맨을 이용해 마을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나름 재밌게 읽었다.


김종일의 ‘개들의 묘지’는 자신이 기르던 개을 죽이고 사체를 묻기 위해 야밤에 산에 올라갔다가 살인범들과 마주치며 벌어지는 일을 그리고 있는데 긴장감 있는 이야기와 깜짝 반전에서 김종일씨의 관록을 느낄 수 있다.


마츠다 신조의 ‘괴기사진작가’는 괴기스런 사진을 찍는 사진작가와 관련한 이야기로 나름 등골 서늘한 느낌을 준 작품. 


한유의 ‘버스정류장 소녀’ 는 버스정류장에 얽힌 괴담과 두 소녀의 이야기로 신인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더라도 작품자체가
인상적이지 못했다. 특히 여고생의 동성애 소재는 이미 여고괴담에서 지겹도록 써먹어 닳고닳아 넝마가 되지 않았던가. 작가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이야기가 너무 진부했다.


공포단편들도 좋았지만 이번 판타스틱의 대박은 테드 창의 신작이 실렸다는 것이다. 2008년도에 발표한 ‘숨결’이란 작품으로 이미
여러 상을 수상했고 2009년 휴고상 단편부분 후보작에도 이름을 올렸다. 작품을 읽어보면 정말 그의 내공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앞서 발표했던 시간 여행에 관한 이야기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이 잘쓰긴 했지만 그래도 테드창 이라면 조금 부족한게
아닌가 싶다면 이번 작품은 역시 테드창이구나란 말이 나온다. 어떻게 기압과 뇌란 소재를 엮어서 이렇게 기발한 스토리를 만들었는지
기가 막히고 마치 눈앞에 놓여있는 듯 치밀한 기계공학적 묘사에선 탄식마저 나온다.


테드창은 지난 번 부천환타스틱 영화제에서 주최한 SF강의를 위해 한국에 들렀다고 한다. 난 미리 예약하지 못해서 거기 다녀온
다른 블로거들의 포스팅을 보며 입맛만 다시고 있었는데 조금 기뻤던 것은 테드창이 그가 인상깊었던 작품으로 아이작 아시모프의
‘죽은 미래’를 언급했다고 한다. 예전 포스팅(테드창과 아시모프. 시간여행)에서 나도 테드창의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을 소개하며 아시모프의 ‘죽은 미래’를 소개했었는데 그와 내가 같은 생각을 했었다니 가슴이 뿌듯해져 온다.


마지막으로 판타스틱이 계간으로 바뀌면서 새로 마련된 코너인 기획 에세이에서 유럽의 장르문학 역사를 소개하고 있는 강윤영씨란 분이
있는데 매우 고리타분하고 재미없었을 소재를 가지고 배꼽 빠지도록 재밌게 써준 덕에 좋은 공부를 하고 있다. 솔직히 이번
판타스틱을 손꼽아 기다렸던 이유 중의 하나가 강윤영씨의 글이었다. 나 강윤영씨의 팬이 되버릴테다!

영진공 self_fish

“차우”(2009), 즐길 수 있는 사람만 즐겨라!

아마도 근간 가장 ‘괴작’을 뽑으라면 작년 하반기에 개봉한 <모던 보이>와 함께 <차우>가 꼽히지
않을까 싶다. <모던 보이>가 괴작인 건 너무 훌륭한 면과 너무 후진 면이 어이없이 섞여서인데, <차우>의
경우는 좀더 ‘괴작’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 즉, 괴상한 영화라는 뜻이다. 언론시사로 처음 <차우>를 봤을 때 워낙
당황했는데, 후반으로 가면서 나름 이 영화의 유머를 꽤 즐기게 됐다. 시사 나와서는 모 평론가님과 인사를 하다가 “영화 보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나는 대체로 이 영화의 지지자 쪽에 가깝다. 사실 <차우>는 개봉 직전까지도
<괴물> 이후 가능성이 보였으나 그만큼 위험도 여전히 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대괴수가 출현하는 재난영화’로,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서 포장돼왔다. 그런 만큼 관객의 입장에선 <괴물>의 완성도에 필적하진 못하더라도 그 2/3
정도는 되기를 기대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확인한 <차우>는 완전히 다른 영화다.

뒤늦게야 공개된, '제대로 된' 포스터

대체로 괴수물이란 언제나 우리 세상 너머에 우리 힘으로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괴수의 존재, 우리가 평소 상상은
할지언정 현실에 존재한다 인정하려 하지 않는 존재가 봉인을 뚫고 나와 현실 세계를 위협할 때의 충격과 공포를 다루기 마련이다.
그 괴수를 상대로 싸우는 자가 고독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미지와 미래와의 대면을 은유를 읽어내고 격려를 받기도
하고, 괴수의 등장으로 인해 벌어지는 우리 세계의 파괴를 쾌감의 코드로 목격하게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쾌감을 두 가지
층위로 즐길 수 있다. 우리 세계가 파괴를 당하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며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마조히즘적 쾌감, 혹은 괴수에게
은밀한 감정이입을 느끼면서 얻는 사디즘적 쾌감. 그리고 그 사이, 순수하게 거대하고 육중한 생명체가 우리 세계를 때려부술 때에
오는 ‘타격감’. 그러므로 괴수물의 당연한 공식에서 시선의 방향이란 안에서 밖을 향하는 것이 된다.

<차우>가 그런 괴수물이 아닌 것은, 이 영화의 시선은 오히려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차우>는
외부에서 거대한 충격과 습격이 가해졌을 때 그 시선을 괴물이 있는 저 너머 바깥 어디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의
내부로 돌린다. 거대한 공포 앞에서 그 공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양상들을 양식화시켜 보여주고, 여기에 약간의 과장과
비틀기를 덧붙임으로써 오히려 코미디에 열중한다. 그 ‘외부의 충격’이 <차우>의 경우 식인 멧돼지의 습격인 것이지만,
이쯤 되면 사실 ‘차우’가 얼마나 이상한 변종이고 세고 크고 무섭고 포악한지 기타 등등은 별로 중요치 않게 된다. 사실 멧돼지가
아니라 운석을 타고 떨어진 외계의 괴생명체라 한들 이 영화가 그리 많이 바뀌었을 것 같진 않다. 멧돼지는 앞에 딱 한 번 나오고
그 뒤로 계속 안 나와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에일리언>을 모범적으로 베껴서 앞에 계속 나올 듯 말 듯
그림자로만 비추다가 맨 마지막에만 한 번 제대로 나오던가.

어쨌든 뭔가 무시무시한 놈이 잊을 만하면 마을사람을 호시탐탐 노리며 패닉을 가져온다. 절박함은 강도가 심할수록
우스꽝스러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절박한 놈만 절박하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또 멧돼지가 공격을 해오거나 말거나, 마치
그 순간이 지나면 기억상실 약이라도 단체로 먹는 듯 허허실실 천하태평이다. 자기만 안 당하면 된다 이거다. 그러므로 대체로의
괴수물이 절박함에 방점을 찍고 그로 인한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괴수가 화면에 전면 등장하면서 다 때려부술 때의 타격감을
강조한다면, 이 영화는 우스꽝스러움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움은 멧돼지를 잡겠다며 차우와 대면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들의 비장함을 (자기가 당하지 않았다고) 별 거 아닌 것 취급하며 태평한 마을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에서도 튀어나온다.
멧돼지가 습격하거나 말거나 검은 옷을 입고 마을을 활개치는 소위 ‘꽃 꽂은 분’이나 도시인들에게 장사를 해먹는 마을농장 관계자가
대표적인 예다. 특히나 꽃 꽂은 분은 애초에 맷돼지의 위험성과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핏 드러나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히려, 내 맘대로 장르명을 작명한다면, ‘괴수물’보다는 오히려 ‘농촌소동극’ 정도가 될 듯하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신정원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크고 무서운 맷돼지’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 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간다. 이
영화의 스타일대로라면, 차우가 화면에 제대로 나오는 장면은 수가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차우

겉보기는 이렇게 멀쩡하고 폼나는데… 사실은 허당이다. 죄다.

농촌소동극으로서, 코미디로서 <차우>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신정원 감독의 유머감각이 소위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굉장히 웃기고 유쾌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도 무지 웃었다. 멧돼지와
싸우겠다고 나선 인물들은 하나하나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덜떨어진 면이 있고 이들이 빚어내는 에피소드도 상황도 참 어이없이
웃기거나 배꼽빠지게 웃기는 부분이 많다. 멀쩡하게 생긴 형사가 사람들이 안 볼 때면 음료수고 담배고 몰래 챙기고 밤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잘 때조차 선글라스를 벗지 않으려 든다거나. 최고의 포수라는 이가 잘난 척 양키 포수들을 대동했지만 그들의 말을 실제론
알아듣지 못하고 선머슴같은 여자에게 가슴을 두근대며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거나. 나름 비장한 얼굴로 생의 고난과 무거운 짐을
감당하듯 보이던 서울내기 순경이 실제로 집안에서 벌어진 난장판에 신경질로 반응한다거나. 맷돼지에 대해 학구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무대포로 수색대를 따라나선 대학원생이 느닷없이 카메라를 꺼내들며 수색대에 ‘연출’을 하려들고 이들 수색대 역시 이에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쳐준다거나. 마을이 처한 대위기에 맞서 그 누구 하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위대한 영웅이나 지도자의 아우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다들 폼은 그럴싸하나 알고보면 모조리 허당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편이, 실제 현실과 더 가까울
것이다. 그토록 위대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란 영화 속 세상뿐일 테니. 게다가 씨네21에서 남다은 평론가가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차우의 수색에 나서는 건 죄 외지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작 뒷짐지고 가만히 있는데 이들 외지인들이 차우를
잡겠다며 나서서 벌이는 소동들이,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든다.

문제는 예산이다. 식인 멧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에서의 공포와 고난과 분투를 그리는 영화로 선전되며 그 정도의 CG와 예산이
들어간 영화라는 건, 마치 연인이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길래 스테이크를 먹게 될 줄 알고 기대했더니 맛은 꽤 별미이나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는 좀 비싼 떡볶이가 나온 형국이라 해야 할까.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새 창으로 열기)
<차우>는 순제작비만 70억에 이른다. P&A 비용까지 합치면 총제작비는 100억원에 육박한다. 너무 비싼
떡볶이가 아닌가. (물론 나는 떡볶이를 무지 좋아하긴 한다.) 난 차라리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처럼
예산을 적게 들이되 멧돼지의 모습을 그림자나 정황으로만 제시하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차우> 식의 코드라면 멧돼지가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의도적으로 조잡하거나 했어도 재미있었을 텐데, 이 영화의
유머가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블록버스터 만들려다 안 될 게 너무 뻔해지니까 중간에 차라리 망치려면 제대로
망치자며 막 가는’ 코미디로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엄태웅의 엉덩이가 노출되는 게 무슨 찐한 멜러 영화도 아닌
<차우>라는 게 우습기도, 재밌기도 하지만.

 

차우

큰 웃음 주신 신형사 역의 박혁권.

<차우>를 보는데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계속 생각났다. 처음 멧돼지의 흔적이
발견되는 곳, 묘지 위 언덕에서 경관들이 차례로 관 앞으로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자. <살인의 추억>에서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롱테이크 씬 역시,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풀숏으로 먼 거리에서 찍으면서 롱테이크로 가는데 둑방
위에서 누군가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두 영화의 그 장면들 모두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시골 마을이라는 게 단번에 보이는 씬으로, <차우>에서의 그 씬을 단순한 개그씬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 역시 외부에서 가해지는 거대한 충격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되,
절박함 이면의 우스꽝스러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 봉준호 식 낯선 유머 코드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모두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이 능란하게 교차된다. 그렇기에
<차우>의 오히려 안으로 향하는 시선과 묘하게 상통하믄 부분이 있다. 이후 <마더>에서도 드러나듯 너무나
생생한, 한편으로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오히려 실은 판타지의 공간이라 여겨지는  ‘한국적인 시골스러움’에 대한 묘사가 신정원
감독의 <차우>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이건 신감독의 전작 <시실리 2km>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난 아직
<시실리 2km>를 보지 못했다.) 다만 <차우>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마다 시도하지만 적절히 통제하는 어떤
코드의 유머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이 있다. <차우>를 보며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다 그 실소를 진심으로 즐기게 되는
것도, 그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 때문일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