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우”(2009), 즐길 수 있는 사람만 즐겨라!

아마도 근간 가장 ‘괴작’을 뽑으라면 작년 하반기에 개봉한 <모던 보이>와 함께 <차우>가 꼽히지
않을까 싶다. <모던 보이>가 괴작인 건 너무 훌륭한 면과 너무 후진 면이 어이없이 섞여서인데, <차우>의
경우는 좀더 ‘괴작’의 원래 의미에 가깝다. 즉, 괴상한 영화라는 뜻이다. 언론시사로 처음 <차우>를 봤을 때 워낙
당황했는데, 후반으로 가면서 나름 이 영화의 유머를 꽤 즐기게 됐다. 시사 나와서는 모 평론가님과 인사를 하다가 “영화 보느라
고생하셨습니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는데, 나는 대체로 이 영화의 지지자 쪽에 가깝다. 사실 <차우>는 개봉 직전까지도
<괴물> 이후 가능성이 보였으나 그만큼 위험도 여전히 큰, 그래서 더욱 매력적인 ‘대괴수가 출현하는 재난영화’로,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서 포장돼왔다. 그런 만큼 관객의 입장에선 <괴물>의 완성도에 필적하진 못하더라도 그 2/3
정도는 되기를 기대하고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뚜껑을 열고 확인한 <차우>는 완전히 다른 영화다.

뒤늦게야 공개된, '제대로 된' 포스터

대체로 괴수물이란 언제나 우리 세상 너머에 우리 힘으로 알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괴수의 존재, 우리가 평소 상상은
할지언정 현실에 존재한다 인정하려 하지 않는 존재가 봉인을 뚫고 나와 현실 세계를 위협할 때의 충격과 공포를 다루기 마련이다.
그 괴수를 상대로 싸우는 자가 고독한 전투를 벌이는 과정으로 나아가면서 미지와 미래와의 대면을 은유를 읽어내고 격려를 받기도
하고, 괴수의 등장으로 인해 벌어지는 우리 세계의 파괴를 쾌감의 코드로 목격하게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쾌감을 두 가지
층위로 즐길 수 있다. 우리 세계가 파괴를 당하는 걸 간접적으로 느끼며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마조히즘적 쾌감, 혹은 괴수에게
은밀한 감정이입을 느끼면서 얻는 사디즘적 쾌감. 그리고 그 사이, 순수하게 거대하고 육중한 생명체가 우리 세계를 때려부술 때에
오는 ‘타격감’. 그러므로 괴수물의 당연한 공식에서 시선의 방향이란 안에서 밖을 향하는 것이 된다.

<차우>가 그런 괴수물이 아닌 것은, 이 영화의 시선은 오히려 반대방향이기 때문이다. <차우>는
외부에서 거대한 충격과 습격이 가해졌을 때 그 시선을 괴물이 있는 저 너머 바깥 어디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안의
내부로 돌린다. 거대한 공포 앞에서 그 공포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갖가지 양상들을 양식화시켜 보여주고, 여기에 약간의 과장과
비틀기를 덧붙임으로써 오히려 코미디에 열중한다. 그 ‘외부의 충격’이 <차우>의 경우 식인 멧돼지의 습격인 것이지만,
이쯤 되면 사실 ‘차우’가 얼마나 이상한 변종이고 세고 크고 무섭고 포악한지 기타 등등은 별로 중요치 않게 된다. 사실 멧돼지가
아니라 운석을 타고 떨어진 외계의 괴생명체라 한들 이 영화가 그리 많이 바뀌었을 것 같진 않다. 멧돼지는 앞에 딱 한 번 나오고
그 뒤로 계속 안 나와도 상관 없었을 것이다. 아니면 <에일리언>을 모범적으로 베껴서 앞에 계속 나올 듯 말 듯
그림자로만 비추다가 맨 마지막에만 한 번 제대로 나오던가.

어쨌든 뭔가 무시무시한 놈이 잊을 만하면 마을사람을 호시탐탐 노리며 패닉을 가져온다. 절박함은 강도가 심할수록
우스꽝스러움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절박한 놈만 절박하고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또 멧돼지가 공격을 해오거나 말거나, 마치
그 순간이 지나면 기억상실 약이라도 단체로 먹는 듯 허허실실 천하태평이다. 자기만 안 당하면 된다 이거다. 그러므로 대체로의
괴수물이 절박함에 방점을 찍고 그로 인한 긴장감, 그리고 마침내 괴수가 화면에 전면 등장하면서 다 때려부술 때의 타격감을
강조한다면, 이 영화는 우스꽝스러움을 극대화해서 보여주는 것이다. 이 우스꽝스러움은 멧돼지를 잡겠다며 차우와 대면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들의 비장함을 (자기가 당하지 않았다고) 별 거 아닌 것 취급하며 태평한 마을사람들의 이기적인 모습에서도 튀어나온다.
멧돼지가 습격하거나 말거나 검은 옷을 입고 마을을 활개치는 소위 ‘꽃 꽂은 분’이나 도시인들에게 장사를 해먹는 마을농장 관계자가
대표적인 예다. 특히나 꽃 꽂은 분은 애초에 맷돼지의 위험성과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얼핏 드러나는 장면까지 나온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오히려, 내 맘대로 장르명을 작명한다면, ‘괴수물’보다는 오히려 ‘농촌소동극’ 정도가 될 듯하다. 또한 바로
그런 이유로, 신정원 감독이 여러 인터뷰에서 “크고 무서운 맷돼지’를 최대한 많이 보여주려 했다”는 말이 이해가 안 간다. 이
영화의 스타일대로라면, 차우가 화면에 제대로 나오는 장면은 수가 적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차우

겉보기는 이렇게 멀쩡하고 폼나는데… 사실은 허당이다. 죄다.

농촌소동극으로서, 코미디로서 <차우>는 그리 나쁘지 않다. 신정원 감독의 유머감각이 소위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코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엉뚱한 방향으로 굉장히 웃기고 유쾌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나도 무지 웃었다. 멧돼지와
싸우겠다고 나선 인물들은 하나하나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 덜떨어진 면이 있고 이들이 빚어내는 에피소드도 상황도 참 어이없이
웃기거나 배꼽빠지게 웃기는 부분이 많다. 멀쩡하게 생긴 형사가 사람들이 안 볼 때면 음료수고 담배고 몰래 챙기고 밤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잘 때조차 선글라스를 벗지 않으려 든다거나. 최고의 포수라는 이가 잘난 척 양키 포수들을 대동했지만 그들의 말을 실제론
알아듣지 못하고 선머슴같은 여자에게 가슴을 두근대며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한다거나. 나름 비장한 얼굴로 생의 고난과 무거운 짐을
감당하듯 보이던 서울내기 순경이 실제로 집안에서 벌어진 난장판에 신경질로 반응한다거나. 맷돼지에 대해 학구적인 설명을 제공하며
무대포로 수색대를 따라나선 대학원생이 느닷없이 카메라를 꺼내들며 수색대에 ‘연출’을 하려들고 이들 수색대 역시 이에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맞장구를 쳐준다거나. 마을이 처한 대위기에 맞서 그 누구 하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위대한 영웅이나 지도자의 아우라를
갖고 있는 사람이 없다. 다들 폼은 그럴싸하나 알고보면 모조리 허당이다. 그리고 오히려 이 편이, 실제 현실과 더 가까울
것이다. 그토록 위대하고 탁월한 지도자가 넘쳐나는 세상이란 영화 속 세상뿐일 테니. 게다가 씨네21에서 남다은 평론가가 지적했듯
이 영화에서 차우의 수색에 나서는 건 죄 외지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정작 뒷짐지고 가만히 있는데 이들 외지인들이 차우를
잡겠다며 나서서 벌이는 소동들이, 어쩐지 강한 기시감이 든다.

문제는 예산이다. 식인 멧돼지가 출몰하는 지역에서의 공포와 고난과 분투를 그리는 영화로 선전되며 그 정도의 CG와 예산이
들어간 영화라는 건, 마치 연인이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가길래 스테이크를 먹게 될 줄 알고 기대했더니 맛은 꽤 별미이나 시장에서
파는 것보다는 좀 비싼 떡볶이가 나온 형국이라 해야 할까.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새 창으로 열기)
<차우>는 순제작비만 70억에 이른다. P&A 비용까지 합치면 총제작비는 100억원에 육박한다. 너무 비싼
떡볶이가 아닌가. (물론 나는 떡볶이를 무지 좋아하긴 한다.) 난 차라리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콧의 <에일리언>처럼
예산을 적게 들이되 멧돼지의 모습을 그림자나 정황으로만 제시하고 마지막이 되어서야 거대한 실체를 드러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차우> 식의 코드라면 멧돼지가 아예 처음부터 대놓고 의도적으로 조잡하거나 했어도 재미있었을 텐데, 이 영화의
유머가 한편으로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라기보다 ‘블록버스터 만들려다 안 될 게 너무 뻔해지니까 중간에 차라리 망치려면 제대로
망치자며 막 가는’ 코미디로 느껴지기도 하니 말이다. 엄태웅의 엉덩이가 노출되는 게 무슨 찐한 멜러 영화도 아닌
<차우>라는 게 우습기도, 재밌기도 하지만.

 

차우

큰 웃음 주신 신형사 역의 박혁권.

<차우>를 보는데 <살인의 추억>과 <괴물>이 계속 생각났다. 처음 멧돼지의 흔적이
발견되는 곳, 묘지 위 언덕에서 경관들이 차례로 관 앞으로 미끄러지는 장면을 보자. <살인의 추억>에서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롱테이크 씬 역시, 시체가 발견된 곳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풀숏으로 먼 거리에서 찍으면서 롱테이크로 가는데 둑방
위에서 누군가 밑으로 미끄러져 떨어진다. 두 영화의 그 장면들 모두 사건이 벌어지는 곳이 어수룩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시골 마을이라는 게 단번에 보이는 씬으로, <차우>에서의 그 씬을 단순한 개그씬으로만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 역시 외부에서 가해지는 거대한 충격과 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주되,
절박함 이면의 우스꽝스러움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영화다. (그리고 그것이 봉준호 식 낯선 유머 코드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모두 안에서 밖을, 밖에서 안을 보는 두 개의 시선이 능란하게 교차된다. 그렇기에
<차우>의 오히려 안으로 향하는 시선과 묘하게 상통하믄 부분이 있다. 이후 <마더>에서도 드러나듯 너무나
생생한, 한편으로 너무 생생하게 느껴져 오히려 실은 판타지의 공간이라 여겨지는  ‘한국적인 시골스러움’에 대한 묘사가 신정원
감독의 <차우>에서도 나타난다. 사실 이건 신감독의 전작 <시실리 2km>의 특징이라고도 한다. (난 아직
<시실리 2km>를 보지 못했다.) 다만 <차우>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마다 시도하지만 적절히 통제하는 어떤
코드의 유머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이 있다. <차우>를 보며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리다 그 실소를 진심으로 즐기게 되는
것도, 그 ‘끝까지 밀어부치는’ 면 때문일 것이다.

영진공 노바리

잠시 정신줄을 놓고 봐야 하는 영화, ‘뮤턴트:다크 에이지 (Mutant Chronicles)’



감독: 사이몬 헌터

출연: 토마스 제인, 론 펄만, 데본 아오키


때는 바야흐로 서기 2707년. 하지만 화면에 펼쳐지는 것은 2차 세계대전 다큐멘터리에서 봤음직한 참호전이다. 전투 중 포격에 맞아 땅 밑에 공구리 쳐놓은 고대봉인이 깨지고 잠들었던 뮤턴트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어지는 피와 살의 향연.


스팀펑크를 표방한 듯 굴뚝에서 검은 연기를 토해내는 비행기와 증기를 뿜어내는 기계들. 똥꼬가 움찔거릴 정도로 무서운 뮤턴트를 잠재우기 위해 어느새(!) 전 세계에서 선발된 8명의 용사들. 그들에게 주어진 무기는 중세 영화를 촬영 중인 옆 셋트장에서 빌려 온 듯한 대검! 아아. 영화의 아스트랄함에 정신마저 혼미해져 온다.


금방이라도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들이닥칠 것 같지만

믿거나 말거나 여긴 서기 2707년!

개봉 당시 나름 화려한 배우진과 얼핏 씬시티를 연상시키는 빛바랜 듯한 비주얼로 인해 큰 기대를 갖고 영화관에 들어갔던 관객들이 피를 토하며 극장 문을 나왔다는 이 ‘괴작 B급 좀비 호러 SF 영화’는 1993년 만들어진 ‘뮤턴트 클로니클’이라는 TRPG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미 여러 스핀오프로 제작되었던 ‘뮤턴트 클로니클’은 2007년 영화화 되어 모습을 드러냈지만 제대로된 투자자를 잡지 못했는지 원작의 세계관이었던 4개의 거대 기업이 지구를 지배한다는 설정말고는 SF적인 요소들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였다. 나름 스팀펑크까지는 좋았지만 좀비스런 뮤턴트들은 너무도 소박했다.


뮤턴트 클로니클은 카드 게임, 비디오 게임, 소설, 만화책 등으로도 만들어진
인기있는 소스였다.

지금은 CMG(피규어 인형으로 하는 보드게임)로도 만들어져 판매되고 있다.

처음 존 카펜터 감독에게 제작의뢰를 하였다가 거절당했는데 만약 그가 맡았다면  좀 더 제대로 된 SF좀비물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벤트 호라이즌’의 각본을 맏았던 필립 에이스너가 가세했음에도 좀비의 몰골마냥 참담한 작품성은 B급 영화의 숙명인 듯도 싶다.  하지만 사실 B급 영화의 재미는 이런 허무맹랑함이 아니겠는가!!!


“이런 영화를 감상 할 땐 잠시 정신줄을 놓으면 더욱 재밌게 볼 수 있다.”

영진공 self_fish

김기영,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1978)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말로 이런 ‘추상적인’ 포스터가 붙었었다고?


여행지에서 낯선 여인에게 독이 섞인 음료수를 받아마셨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영걸(김정철)은 이후 삶에 대한 의지를 잃고 자살충동에 시달린다. 그런 그에게 연달아 이상한 일이 생긴다. ‘삶의 의지’를 외치며 죽여도 죽지 않는 노인, 뼈에서 살아난 천 년 전 신라 때의 여인(이화시), 그리고 죽음에의 의지로 충만한 까칠한 미대생(김자옥)과 차례로 만나며 영걸은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자살충동에 시달리며 계속해서 자살을 시도하지만, 영걸은 누군가 자신을 죽여준다 했을 때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정작 남의 손에 (혹은 운명에) 수동적으로 죽음을 맞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죽음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욕망일 수도 있고, 죽음을 향한 탐닉으로 포장된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일 수도 있다.  실제로 영걸은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천 년 전 여인이 환생을 위한 마지막 단도리 절차로 그에게 생간을 요구할 때 상당히 망설인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에서 재밌는 것은 이 에피소드의 주도권은 철저하게 신라 여인에게 있다는 것. 싫은 남자와 결혼하기 싫어 천 년 뒤 부활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던 이 여자는 삶, 그러니까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못할 것이 없는 듯 말하고 행동한다. 실제로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미 한 번 죽음을 선택했고. 그러나 그녀는 다시 죽음을 선택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녀가 선택한 것은 죽음이라기보다는 죽음도 불사하는 ‘사랑’이다.


소극적인 것으로 치자면야 그는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열심히 자살시도를 하긴 해도 번번이 노인에게 방해를 받고 결국 죽지를 못하는데, 따지고 보면 영걸은 이 영화 내내 에피소드 셋을 거치는 동안 계속 상황에 따른 소극적인 선택으로 일관한다. ‘선택’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는, 일련의 언행들. 그건 아마도 그가 죽다 살아난 뒤 목에 나비 목걸이를 걸쳐서일 테다. 이 영화에서 나비는 죽음을 뜻하니까.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까칠한 공주 미대생의 버릇을 고쳐주네 마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이교수(남궁원)의 권력 하에 존재한다. 그가 이교수를 의심하며 대항하는 것 역시 다른 권위, 즉 형사를 찾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세번째 에피소드로 가면 후반부로 가면서 점점 주인공이 영걸이 아니라 한참 새파란 시절의 김자옥이 주연을 맡은 미대생 여인이 된다. 그녀는 삶에 대한 별다른 의지를 보이지 않는, 죽음에 단단히 매혹된 여성이다. (그녀의 주된 작업 주제가 ‘나비’라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부분.) 그런데 정작 암에 걸리고 삶의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삶에 대한 강한 집착과 미련을 보인다. 이건 영걸이 계속해서 보여줬던 어떤 입장들, 그러니까 죽음을 동경하지만 정작 그 죽음이 찾아왔을 때 이를 거부하는 어떤 양태와 통한다. 쉽게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을 이런 점을 들며 죽음에 대한 매혹을 그저 ‘겉멋’이라며 싸잡기 쉽지만, 사실 죽음을 탐하면서도 정작 죽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심리란 지금의 삶보단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 그럼에도 더 나은 삶이란 존재할 수 없거나 죽음으로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윤회든 사후의 삶이든)을 인식하며 절망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세번째 에피소드, 왼쪽부터 영걸의 친구, 형사, 영걸, 전경엔 남궁원이 열연한 이박사.



혹자들은 이 영화를 ‘옴니버스영화’라고 표현하는데, 사실 그게 맞을 것이다. 첫 에피소드가 상당히 기괴한, 초현실주의적인 호러라 친다면, 두 번째 에피소드는 <천녀유혼> 유의 전형적인 귀신과 사람 사이의 사랑을 다룬 환상 멜러의 형식을 띄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세번째 단편으로 가면 또 미스테리 스릴러가 되고 말이다. 세 에피소드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게 당연히 주인공인 영걸과 그의 친구이다. 이 친구는 첫 에피소드에서 나비수집 여행을 같이 간 일행이고, 사람이 되는 유골을 같이 발굴하러 간 동지이자, 이박사의 조교 자리 아르바이트를 주선해 준 장본인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에피소드가 종합되는 게 바로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 “삶의 의지!”를 외치는 ‘머리통’ 장면일 테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다시, 술에 형편없이 취한 두 친구의 악몽에 가까운 꿈일지도 모른다는 장면이 삽입되는데 – 뭐 물론, 다시 살아나서 거리를 활보하는 것일 수도 – 김기영 감독은 실은 “자꾸 자살타령하지 마라, 그래도 삶은 소중한 거니 한번 살아봐라” 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듯. 사실 그런 식의 ‘설득 포스’를 워낙 강하게 느꼈다. 근거가 박약하건 충만하건 말건… 근데 뭐, 자살에 대한 욕구라는 건, 물론 개개인마다 유전적인 부분부터 해서 가치관 같은 거에 크게 달려있긴 하지만, 지금 현대사회라는 건 사실 자살을 지나치게 터부시하면서도 자살을 권장하는 사회 아닌가 싶다. 솔직히 배고파서 죽으나 총맞아 죽으나 자살하나…


하여간, 김기영 복권 바람을 타면서 이 영화가 ‘컬트영화’로 상당히 명성을 누린 게 벌써 10년인데, 흥미로운 부분들도 상당히 많았지만 여섯 편 가량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본 다음 내가 조심스럽게 내리는 ‘중간’ 판단은, 김기영 감독은 자의식이 너무 강하다는 거. 물론 김기영 감독의 경우 그 자의식과 영화의 ‘형식미’가 충돌하는 지점이 상당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건 결코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거… 네이버 어디에선가 내린 ‘아스트랄 괴작영화‘라는 평가가 딱 마음에 든다.




영진공 노바리


ps1.
이화시가 너무 조아효… 너무 섹시한 언니, 가장 매력적인 건 나탈리 우드 부럽지 않은 그 이글이글한 눈!


ps2. 어떤 소개에 의하면 김정철의 캐릭터 이름이 ‘용빈’이고 남궁원은 ‘장박사’이다. 대체 이 완전히 다른 이름체계, 이유와 곡절이 뭔지 아시는 분~~?

ps3. 에피소드 셋을 연결시켰다는 것뿐 아니라, 삶의 의지, 죄책감, 귀신과의 정사, 죽음과 삶이 뒤바뀐 미스테리 등등을 다룬다는 점에서 작년에 개봉한 정가형제의 <기담>이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와 상당한 유사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이번 전작전 때 감독 중 한 명이 GV 모더레이터로도 나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