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놈놈놈”, 채 완성되지도 않은 영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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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놈놈> 어처구니가 없어여.

씬과 씬 사이에 있어야 하는 그림이 없는 경우가 수두룩이에여.

마지막 대추격전 바로 다음 장면. 송강호만 혼자 사막을 달리고 있죠. 대추격전 상황에서 송강호가 어떻게 벗어났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어여. 액숑 영화 원투번 보나? 뻔한 거, 그냥 관객이 알아서 생각하라는 건가요?

그런가 했더니 또 그 다음 씬에서 이병헌이 갑자기 누군가를 죽이면서
“붙었으면 끝까지 해얄 거 아냐? 어쩌구 저쩌구 불라불라”거려요.

아. 이건 뭥미? 대체 누구랑 왜 싸우는 겅미? 거기 보니깐 처음 보는 가방이 등장하던데 그거 때문에 싸운 겅미? 글고 병헌이는 어떻게 이긴 겅미? 이 역시 ‘아 거참 액숑무비 원투번 보나? 나쁜 놈들이랑 싸웠겠지’하고 관객이 알아서 유추해야 하는 겅미?

아니요. 전 오히려 편집자의 고뇌가 느껴지더군요.

붙지도 않은 그림, 도저히 살릴 수 없는 그림들만 잔뜩 있는데 그것 갖고 어떻게든 편집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 편집자의 담배 세 갑 스트레이트 끽연 고뇌.

그러니 칸 공개 버전과 국내 버전 편집이 달라졌겠죠. 국내 버전이 더 높은 퀄리티라고 제작사 측에서 얘기한 것 같은데, 칸은 영화제 일정에 맞춰 시간에 쫓기며 편집했을 테고 국내 버전은 그보다 시간 여유가 있었을 테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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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처럼 버전이 다르다는 사실은, 시나리오대로 혹은 최초 콘티대로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그럼 왜 콘티대로 영화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대규모 인원과 가축이 나오는 각종 폭파 액션씬을 해외에서 찍어야 했으니 생각만큼 그림을 얻질 못했을 거예요. 대충 짐작은 갑니다. 그리고 모든 영화가 꼭 콘티대로 가야 한다는 법칙도 없구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야기는 붙어야죠. 이 꺼끌하고 엉성한 편집은 대체 뭐란 말입니까. 오토바이에 애들 태우고 달리던 송강호가 별 설명 장면 없이 혼자 달리고 있는가 하면, A급 가죽 케이스에 보관돼 품에 잘 있을 거라고 생각됐던 지도가 마지막엔 너덜 세트가 돼있고, 송강호랑 병헌이네 패거리들이랑 싸우고 있는데 어느새 병춘이네 패거리가 끼어 들어 싸우고 있고. 기타등등등등등.

흔히 영화를 평할 때 완성도를 놓고 그걸 기준삼는 경우가 많은데, 그에 따르자면 이 영화는 정말 ‘완성도가 없는 영화’예요. 당연하죠. 아직 덜 만들어졌는데 완성도가 있을 리가 있나요? 물론 마음이야 부족한 그림 다시 가서 찍고 싶었겠지만 여건상 그렇게는 안됐을 테고 말이죠. 그래도 결론은 그거예요. 이건 덜 만들어진 영화다.

그럭저럭 졸지 않고 영화는 무난하게 봤어요. 하지만 이건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기본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중국집 가서 짱게를 시켰는데 바쁘다고 짜장에 양파 안 넣고 볶아내오는 경우란 말이죠.

요즘 영화 관람 생활을 많이 안해서 모르겠지만 예전 광시곡 이후로 그림 안 붙는 영화는 처음이네요. 물론 광시곡 만큼은 아닙니다. 광시곡은 전위영화였으니까요.

하지만 언니들 지갑 자동개봉 국내 최고 초호화 캐스팅으로 떡하니 내놓은 영화가 광시곡을 떠올리게 하다니.

솔직히 김지운 감독님 요즘 조낸 쪽팔려 하고 계시죠?


영진공 철구

패스트푸드 네이션, “일상의 작은 것 하나하나가 정치의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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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버거 하나가 가진 정치학만 이해해도 ...
몇 년 전 영국에서 커피 농가를 착취하는 초국적 거대 커피기업들에 대한 보이콧 운동이 벌어지며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참가했을 때,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콜린 퍼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가 매일 마시는 커피 한 잔, 그 안에 담긴 만큼만의 정치에 관심을 가져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의 일상 하나하나가 복잡다단한 정치와 경제, 무역과 직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탈정치’란 하나의 거대한 허상의 거짓말이다.) 우리가 흔하게 마시는 커피 한 잔은 물론이고, 하루 세 끼 먹는 밥과 매일 갈아입는 속옷도 마찬가지다. 오늘 끼니 중 하나로 먹은 햄버거 하나도 예외가 아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패스트푸드 네이션>은 우리가 어쩌면 오늘 낮에 점심으로 먹었을지도 모를 햄버거에 담긴 거대한 사회정치적 의미를 추적해 들어간다.

2006년에 일찌감치 수입되었지만 촛불정국을 타고서야 겨우 개봉될 수 있었던 <패스트푸드 네이션>은, 지금 쇠고기 문제가 터지면서 극적으로 개봉할 수 있었지만 그 쇠고기 정국과 미묘하게 핀트가 어긋나 있는 게 사실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패스트푸드 네이션>을 보고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고, 어떤 이들은 지금의 쇠고기 정국의 어떤 한계와 새로운 방향성에 대한 힌트를 받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 영화는 쇠고기의 위생문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고기 과소비’의 시대에서 식량, 그것도 고기를 ‘공장제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만들어내는 탐욕스러운 근대 대량생산 체제와 더불어 소위 ‘불법사람’의 노동착취 문제까지 다루니까. 사실 이 영화가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은 오히려 저 이민자들에 대한 비인간적 노동착취에 대한 고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루 먹고 살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사회에서 목숨을 내걸고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향하는 곳은 값싼 고기가 넘쳐나는 소위 ‘풍요의 땅’ 미국이다. 그 값싼 고기는 규격에 맞춘 공장제 대량생산에 의해 가능한데, 이를 위해 동물들은 옆으로 한걸음 움직이기조차 좁은 공간에서 마치 물건들이 창고에 쟁여지듯 갇혀 얼른 살을 찌우고 마블링을 만들기 위해 동종의 동물을 섞은 사료를 먹고 살이 찐 뒤 도축장으로 옮겨져 햄버거 패티로 거듭난다. 동물만이 억압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근대적 대량생산 공장체제에도 인간의 노동력은 필요하기 마련. 이를 위해 동원되는 것은 불법이민자 신세라는 이유로 온갖 위험과 불공평을 감수해야 하는, 불법으로 국경선을 넘은 사람들이다. 고된 노동을 견디기 위해 심지어 마약의 힘을 빌어야 하는 이들이 사고로 무참히 팔다리가 짤린들, 그는 해고되고 (고된 노동을 견디기 위해 마약을 먹었다는 이유로) 보상금도 받지 못한다. 여성들은 자신의 성을 대가로 일자리를 구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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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걸고 불법이주한 이주노동자들이 처한 가혹한 조건에서의 노동이 우리의 삶을 지탱한다.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이른바 ‘노동소외’가 바로, 영화의 처음 시작에서 제기되는 이른바 “음식에 소똥이 들어간” 이유이다. 결국 우리가 값싸게 먹고 즐기는 모든 생산품들은, 우리보다 더 가난한 누군가의 노동을 (말 그대로) 착취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값싼 햄버거 하나에 들어가는 쇠고기 패티 한 장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말그대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게 한 대가인지, 이 영화만큼 생생하게 보여주는 영화도 드물 것이다. 문제는, 우리는 이런 대량생산 체제가 우리에게 주는 안락함과 풍요를 거부할 용기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대량생산 체제를 통해 생산된 ‘값싼 물품’을 주로 소비하는 사람들은 결코 상류층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디자이너의 값비싼 옷을 걸치는 사람과, 제3세계에 세워진 공장에서 만들어진 값싼 티셔츠를 입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리고 그 옷을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결국 이 자본주의가 동작하는 모습이란 거대한 먹이사슬, 더욱이 약한 자가 더 약한 자를 뜯어먹으며, 혹은 약한 자가 더 약한 자의 피눈물에 기생하며 생존하면서도 그에 대한 인간적인 죄책감 같은 것을 전혀 느낄 필요가 없이 ‘안전하게 차단’ 해주는 – 소비자 개인은 구체적인 생산자 개인을 알지 못한다 – 거대한 톱니의 모습이다. 이 영화는 그 톱니를 폭로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대중예술이 해야 할 의무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영화가 그런 의무에 너무 사명감을 많이 가진 탓인지 전반적으로 너무 산만하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이야기를 다 다루려다 보니, 실비아(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를 중심으로 한 멕시코 불법이민자의 이야기와 돈 앤더슨(그렉 키니어)을 중심으로 한 자본의 속성에 대한 이야기, 앰버(애쉴리 존슨)를 중심으로 한 또다른 판매 고용 노동자(즉, 알바) 및 환경운동가들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엮이지 못한 채 따로 논다. 사실 이 영화는 돈 앤더슨에서 시작해 앰버의 주변 이야기로 갔다가, 실비아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돈 앤더슨의 회사네 풍경은 ‘에필로그’ 정도에 해당한다.) 이렇게 진행돼 가면서도 중간중간 교차하는 방식이 별로 다소 거칠고, 영화를 지루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한국의 아주 일반적인 관객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을 이슈인 ‘이주노동자’ 문제를 전면에 놓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면에서 분명 링클레이터의 용기는 박수를 쳐줄 만하지만, 이것을 만드는 방식에 조금만 더 재치와 유머를 섞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실비아가 소 내장제거반 작업실로 따라가며 더도 덜도 아닌 딱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참 보는 사람 가슴 미어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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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몰랐는데, 보면 볼수록 이쁘더란… 이쁘기론 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도 만만치 않다만 사진이 없다.


나는 이 영화가 단순히 “미국 쇠고기 더럽대요”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는 그 모든 상품들이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내 손에 들어온 것인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피가 섞여들어간 것인지, 우리의 일상의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어떻게 모두 정치와 자본주의의 작동의 결과물인지, 다시 한번 깨우쳐주는 그런 영화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단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는 이유로 미행, 감시, 도청당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살해협박까지 받은 사람들의 피눈물이 섞인 핸드폰과, 어린아이가 눈이 멀어가면서까지 만든 축구공, 역시 어린아이가 아침부터 밤까지 공장에서 일하며 만든 운동화와 커피와 면옷과… 그들이 그저 남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는 사실까지도,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 각자 통찰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영진공 노바리

ps1. 영화가 원래 2006년에 수입돼 그해 부산영화제에서 공개됐는데, 영화사로서는 늦게 개봉하게 된 게 한편으로 도움을 받은 면도 없진 않다. 예컨대 그 사이에 폴 다노가 확 떠줬다던가… 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가 주연을 맡은 영화가 소규모나마 개봉이 됐다던가… 물론 폴 다노나 카탈리나 산디노 모레노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알아보는 사람은 아직 그렇게까지 많진 않다. 게다가 어쨌건 영화가 창고에서 묶이게 되면 그만큼 비용이 올라가고 가치는 떨어지기 마련이다.

ps2. 강기갑 의원이 영화를 함께 봤다. 끝나고 기자간담회도 했는데, 열심히 취재를 해놓고 결국 기사를 못 썼다. 그나저나 가까이서 본 강기갑 의원은 초큼… 무서워 보이더란… 실은 이 날, ‘한국의 도축 및 검수 시스템 역시 엉망 아닌가’ 뭐 이런 질문을 하려다가 간이 떨려서 말았다는.

Don’t It Make My Brown Eyes Blue, 크리스탈 게일 (Crystal Gayle)

 



Don’t It Make My Brown Eyes Blue [Crystal Gayle]


Don’t know when I’ve been so blue
Don’t know what’s come over you
You’ve found someone new
And don’t it make my brown eyes blue
이렇게 슬퍼본 적이 없었어요,
그대에게 뭐가 씌운 건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다니,
내 갈색 눈동자를 슬프게 만들지 말아요,


I’ll be fine when you’re gone
I’ll just cry all night long
Say it isn’t true
And don’t it make my brown eyes blue
그대가 떠나도 난 괜찮을 거예요,
그저 매일 밤 눈물만 흘리겠지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줘요,
내 갈색 눈동자를 슬프게 만들지 말아요,


Tell me no secrets, tell me some lies
Give me no reasons, give me alibis
Tell me you love me and don’t make me cry
Say anything but don’t say goodbye
그대의 비밀을 말하지마요, 거짓말을 속삭여줘요,
왜 그랬는지 말하지 마요, 그냥 변명을 해줘요,
날 사랑한다 말해주세요, 날 울리지 마요,
무슨 말을 해도 좋아요, 작별의 말만 빼고,

I didn’t mean to treat you bad
Didn’t know just what I had
But, honey, now I do
And don’t it make my brown eyes
Don’t it make my brown eyes
Don’t it make my brown eyes blue
그대에게 못하려 한 게 아녜요,
그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던 거예요,
하지만, 그대, 나 이제 알아요,
내 갈색 눈동자를 슬프게 하지 말아요,
내 갈색 눈동자를 슬프게 하지 말아요 …


이 노래 참 좋아한다. 동영상은 1977년 무대라고.
저 찰랑이는 긴 머릿결을 보라!  노래하는 Crystal Gayle이란 아줌마는 미스 미시시피 출신인데,

예전에 홈페이지에 가면 간단한 html로 만든 홈에 되도록 많은 자료(주로 자기 사진)를 채워 넣으려 노력한 것도 재밌었고. ‘미인대회 출신답다’는 말이 뭔지 팍 와닿기도 해서 구경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몇 년만에 다시 가보니 그새 좀 현대적(?)으로 리뉴얼해서 예전의 묘한 감칠맛은 떨어지지만, 이젠 또 뭐 현대적으로 재밌네.

젊은 날 그 모습처럼 여전히 긴 머릴 늘어뜨리고 아직도 열심히 활동하고 계시다. 긴 머리를 여성성의 상징이자 자존심이라 생각하여 절대 짧게 자를 일은 없을 거 같어.

홈페이지는 여기 http://www.crystalgayle.com/ . 자기 눈을 그린 가방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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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거. 아줌마 좀 짱.


영진공 도대체

“님은 먼곳에”, 가까이 가도 왜 그리 멀기만 한지 …

 


이준익 감독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영화를 만들어내지는 않습니다.
왕의 남자도, 라디오스타도, 즐거운인생도 모두 제목과 포스터에서(사실, “왕의남자”라는 이름은 뭐랄까, 영화가 가지고 있는 “왕”과 “남자”의 속내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조금은 천박한 떡밥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제목을 결정한 사람이 강우석 감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전부터 말입니다.) 알수있는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수도없이 보아온 엄청나게 많은 서사구조 가운데, 마치 제목을 고르면 거기에 딱 맞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주크박스처럼 그 제목에 합당해 마지않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었구요.
제목은 좀더 은근하게, 좀더 당황스럽고 알쏭달쏭하게 지었다면 관객이 조금 더 들지 않았을까요?
제목만 보아도 알만한 영화는 아무래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덜 들지 않습니까.

-먼저 알면 영화감상에 방해가 될만한 내용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영화, “님은 먼곳에”는 놀랍게도 제목과는 영판 다른 시작과 끝을 보여줍니다.
님을 찾아 삼만리하는 주인공 순이(수애)에게 님(엉태웅)은, 형식적으로나 님일 뿐 사실상 님이라고 불러주기엔 모자란 점이 많습니다. 그 점은 남편이 월남에 뛰쳐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이의 행동이나(시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야 이실직고를 합니다. 그 전에는 ‘그딴 놈, 뒤지든지 말든지’하는 심정까지는 아니었더라도 그닥 그립고 걱정되는 심정 또한 아니었다는 뜻이겠지요) 마침내 먼 곳까지 가서 만난 님에게 날리는 분노의 싸닥션 7단 콤보만 보더라도 분명합니다. 한두대 철썩 때리고 덥석 안기는 것도 아니고, 품에 안겨 팔을 동동 구르며 앙탈을 부리는 것도 아니요, “너이새퀴 좀 쳐맞고 시작하자.”라는 식의 싸닥션 7연타는 아무리 보아도 짙은 애정을 담은 행위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당 영화를 보고나서 드는 본 영화 제목에 대한 생각은,
“아아 내 님아 님은 먼곳에 있고 나는 갈 수가 없으니 답답하네 이사람아.”라기보단
“니뮈… 졸라 멀리 있네 그 새끼.”에 가깝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당 영화, “사랑하는 님을 찾아 전쟁터 한 복판을 크로스하는 여인네의 애 끓는 사연” 따위를 담고 있다기보단 주인공 순이의 자아발견 여행에 동참하는 로드무비에 가깝습니다. 어찌보면 [반지의 제왕]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간계를 구할 막중한 임무를 띄고 세상에서 젤 뜨거운 용암(반지가 거기서만 녹으니까…)을 찾아 가는 프로도나, 라이언 일병을 구해야 하는 지들끼리만 막중한 임무를 띄고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드는 밀러 대위와는 달리 순이에게는 명확한 미션이 없습니다. 멀고 먼 월남까지 남편을 찾아가서 순이는 대체 뭘 할 작정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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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긴 가는데… 나 왜 가는거야?”

순이는 자기 뜻대로 자기 삶을 결정해 볼 기회를 몽창 박탈당한 우리 어머니, 혹은 그 윗 세대의 여성입니다.
원치않는 곳에 시집가서, 원치않는 남편의 씨를 얻기 위해 싫은 걸음을 어기적대며 부대를 찾아가는 동안 순이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하며 얼굴에 떠올리던 그 평온한 미소를 단 한번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원치 않는 일이니까요.
순이는 자신에게 억지로 주어진 삶을 거부할 만한 용기도 없지만, 그렇다고 피할수 없으면 즐기겠다는 식의 해병대 마인드도 결코 없습니다. 대신 모든 소통을 거부하지요. 재수없는 시어머니가 주는 핀잔에 변명을 하지도 않고, 대학물 먹은 애인에게 눈깔이 뒤집혀 남의 얼굴에 삽질하고 자기는 돌 보듯 하는(감히 수애를!!) 남편에게 애정을 구하지도, 돌아누운 등에 노크 한번 해보지 않습니다. 그것이 순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의사표현이며, 반항이었을 터입니다. 나도 너 싫어 임마.

월남으로 찾아가는 길 역시 그녀의 의지가 아닙니다. 어중띄게 자신의 책임이 되어버린 일에 다시한번 그녀는 그냥 그렇게 순응도 아니고 반항도 아닌 그런 선택이겠지요. 하긴 하는데.. 나 진짜 내가 원해서 가는 거 아냐. 알겠냐? 뭐 이렇게 말입니다.

수애가 연기하는 순이는 처음부터 전형적인 순응형 여성도 아니고, 적극적인 개혁형 여성도 아닙니다.
아직 어떤 색깔이 칠해져 딱딱하게 굳어지기 전, 색보다는 여백을 더 많이 가진 덜 자란 인간일 뿐입니다.

약간은 안 맞는 듯한 옷을 입은 것 같은 수애의 연기는, 돌이켜보니 이런 순이를 가장 잘 나타내는 모습이었습니다. 수애는 참 여러 모로 칭찬할 거리가 많은 배우입니다 그런 섬세함을 빼고도, 무대의상을 입고 수줍은 듯 그러나 과감하게 노래하는 수애는 순이라는 자칫 목적없는 캐릭터가 될 뻔한 주인공에게 훌륭하게 생명력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관객 역할을 하는 수많은 엑스트라들에게 본능적 욕구가 담긴 군인연기의 추진력을 실어 주고(공연하는 장면 보세요. 군부대 위문공연에서 핑클의 등장에 절규하다 못해 표효하던 내 전우들의 모습과 1000%의 싱크로를 보여줍니다.) 더불어 영화를 보는 남성 관객들에게까지 울끈불끈을 선사합니다.
당분간 한국영화에서 순이만큼 사랑스런 여성 캐릭터가 나올 지 의문스럽습니다.
수애만세. 수애만세. 수애만세.
(만세 삼창이 아깝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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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그녀는 이렇게 사랑스러운 그림까지 만들어줍니다…!!

이준익 감독은 순박한 시골 아낙 순이에게 “노래”라는 막강한 소통능력을 부여하여, 그녀를 세상과 크로스오버 시킵니다. 노래를 통해 순이는 자신의 감춰진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며, 본래 자신이 갖고있던 가치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확실한 사회적 권력)를 깨닫고 그것을 즐깁니다.
밴드와 함께 한판의 놀음을 만들어내는 위문공연 장면은 그녀가 세상을 항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표출시키는 유일한 수단이고, 애시당초 그녀가 마땅히 받았어야 할 박수갈채를 이끌어내는 그녀의 한풀이입니다(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요..) 이는 이준익 감독이 왕의 남자의 두 광대들을 통해 풀어내던 때부터 꾸준히 이야기하던 점입니다. 신분이라는 벽을 넘고, 한물 간 가수에 촌구석 DJ라는 현실을 넘고, 가장으로서 강요받아야 했던 육중한 책임의 짐더미를 벗어던지게 만드는 한풀이 장으로서의 음악 말입니다.
 
영화는 마침내 별로 살 의지도 없어보이는 주제에 끝까지 살아남은 그녀의 남편과 그녀를 조우시키며 끝을 맺습니다. 전쟁이라는 냉혹한 현실에 부딪혀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좁았는지 깨달은 남편과,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며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그 자리에 선 순이는(다리를 후들거리지도, 무릎을 굽히지도 않습니다. 전쟁터 한가운데에 꼿꼿이 서 있습니다) 그렇게 재회하며, 두 사람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납니다.

동화같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영화는 아닙니다만 순이가 그닥 걱정되진 않습니다.
적어도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존재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너무 낙관적인 말이군요. 현실적으로 그녀가 경험하고 알게 된 것들은 앞으로 그녀의 삶에 커다란 암초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 시대엔 말이지요.)


영진공 거의없다

사족 1) 소외된 자들이 만들어내는 한풀이 한마당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엔 무한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역시 사람은 고생을 해봐야 한다니까요(…뭔말인지…)

사족 2) 영화 리뷰가 온통 수애(가 연기한 순이)의 이야기로만 꽉 찰 정도로, 영화 전편을 통해 그녀가 발휘하는 영향력은 절대적입니다. 다른 인물들은, 좀 냉혹하게 이야기하자면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그냥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족3) 이준익 감독은 자기을 친미성향으로 오해할까봐 좀 걱정이 되었었나 봅니다. 정치적인 공정성의 획득을 위해 끼워넣은 장면들 중, 조금은 오바다 싶은 장면들이 있었습니다.

사족4) 분량이 많지는 않습니다만 베트남 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든 듯 한 전쟁 장면들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크게 살려주고 있습니다. 특히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개무시되던 전쟁신의 공간 구성이 무진장 만족스러웠습니다.

사족5) 정진영과 주진모와 정경호는 훌륭합니다. 단 드럼 연주자였던 철식(신현탁)은 영화에의 몰입을 심하게 방해합니다. “즐거운 인생”에서 허세근석의 과다 후까시 연기가 그랬던 것처럼.

사족6) 수애의 노래를 거부감없이 듣는 데에는 약간의 적응기간이 필요한 느낌입니다. 기교없이 담백하고 깔끔하게 노래하려고 노력한건 알겠는데, 그럴거면 조미령의 노래솜씨는 넣지 말았어야 했어요.

순이가 월남으로 간 까닭은?


 


<님은 먼 곳에>에서 순이가 월남에 왜 갔는지 이해 안간다는 분들이 많던데 … 아니!! 이해 하고 말 것도 없잖아요?

*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순이가 월남까지 가는 게 이해가 안 가세요? 그럼 순이가 월남 안가면 어딜 가? 하늘아래 발 디디고 서 있을 곳이라고는 아무데도 없는 상황인데? 월남 안 가면 어디가? 죽으러 가란 얘긴가? 묵묵히 시어머니의 구박과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며 미개봉 반납 처녀로 늙어가며 산송장으로 살으란 말인가? 순이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상황에 봉착해 있습니다. 그렇담 자기가 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를 한번 끝까지 캐 보고 싶을 겁니다. 그 끝에 남편이 있는거겠지요. 월남은 순이가 유일하게 ‘살아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월남은 ‘갈데가 거기밖에 없으니까’ 가는 거고 당연히 가는 거지, 그러니까 너무 Natural해서 이유를 달고 말 것도 할게 없고,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목적을 가진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월남으로 가는 겁니다.

2.순이가 남편을 때리는 게 이해가 안 가세요? 아니, 그럼 엔딩이 어떻게 되는게 나을 것 같으세요? 1. 남편 박상길이 죽어있다? 아웅.. 이건 절대 아니죠. 맘대로 죽어있다면 정말 죽이고 싶을 겁니다. 2. 순이가 상길에게 와락 안긴다? 캑캑. 상길은 그녀의 마음과 정성에 감읍하여 그녀를 받아들인다? 캑캑. 3. 상길이가 순이를 때린다? 이 독한 년, 어째 여기 까지 따라왔어!! 오홋. 1,2번 보다는 3번이 좀 낫다. 때리는 거는요. 딱 그 상황이 때릴 상황입니다. 이유는요 삼만팔천이백사십여섯가지 쯤 있습니다. 수도 없는 함의가 들어간 따귀입니다.직설법으로 얘기하자면 촌스러워지지만.


1) 전쟁터에서 정신차리라고 한대.(정신 못 차리고 눈 까뒤집고 있었잖아요) 2) 니 인생에서 정신차리라고 한대. (언제까지 도망만 갈꺼냐?) 3) 비겁함을 단죄하며 한대. 4) 생때같이 살아 있음이 고마워서 한대.(오면서 부상자, 사망자를 수도 없이 본 순이입니다.) 5) 내 인생의 단 하나의 존재의 이유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분노로 한대. 6) 술래잡기할 때 미션 클리어하면 “야도 판” 때리듯이 한대. 야도!


오히려 남편에 대한 원망이나 회한 같은 건 없어보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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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박상길은 찌질한 남자가 아니다. 아줌마가 되고 나니 이해심이 많아지나봅니다. 전 박상길도 너무너무 이해가 갔어요. 씨 받으러 온 수애 모습 보세요. 아우… 서슬이 퍼렇잖아요. 수애 무서워요. 사랑하는 애인이 있는데, 원치 않는 결혼. 그래서 군대로 도망. 한달에 한 번 씩 배란기에 맞춰 찾아오는 아내. 그 두려움 없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 그녀를 받아들인 다는 것은 그에게 곧 도망도 하지 못하고 ‘체념’한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박상길이 월남까지 가는 것과 순이가 월남까지 가는 것. 목적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내 인생 남의 뜻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고, 그 반대방향으로 한번 갈 데 까지 가보는 겁니다.

아마. 순이한테 맞고, 박상길은 시원했을 것 같아요. 안도가 되고 안심이 되었을 것 같아요. 순이 앞에 무릎 꿇은 상길의 모습은 용서를 비는 자의 모습이라기 보다 편안해 보입니다.

4.수애는 여신이 아니다. 매체에서 이준익이 ‘너는 여신이다’라는 말을 했단 말을 듣고 거부감이 심하게 일었어요. 저, 여인의 신격화를 여인의 창녀화 만큼이나 싫어하고 혐오하거든요. 여성의 이미지가 관음보살이나 마리아가 되는 순간 여성은 ‘구원자’가 되어야 하고, ‘모든 것을 감내해야 하고’ , ‘남을 원망하는 법은 없고 그저 남의 모든 허물을 다 감싸 안아주며’, ‘본인이 욕망하는 것은 전혀 없어야’합니다. 핵심은 ‘非人化”죠. 그게 처녀숭배의 핵심이에요. ‘여성은 위대하다’라는 명제에 궁극적으로 담고 싶어하는 뜻은 ‘여성은 사람이 아니다’인거죠. 그래서 전 미야자끼 하야오 만화에 나오는 “나나”나 “나우시까”같은 여성영웅들을 정말 싫어합니다. 그들은 영웅이고 여신이 됨으로써 결국 사람이 아니게 됩니다. 아아. 근데 왠걸. 수애는 그렇지 않아요. 그녀는 처음 부터 끝까지 본인의 욕망(남편 놈 찾아내고야 말겠다)에 충실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도 복무하지 않습니다. 어설픈 도덕관념이나 정조관념 같은 사회나 이데올로기의 욕망이 자신의 욕망을 방해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맞아요. 강한여자입니다. 그런데 ‘인류를 구원하고, 세계 평화를 위해서 희생하는’ 강한여자가 아니지요.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지키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끝까지 증명해 보려는 여자입니다. 인간다운 강하고 젊은 여자입니다. (예전 나의 결혼 원정기에서의 ‘라라씨’와도 비슷하지요. 여기서도 순이였나?)

암튼 재미있었어요. 좋아요. 나는 Two thumbs up!


영진공 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