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쉬 타임즈(하쉬 타임)”,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다.

[허쉬 타임즈(Harsh Times)]는 국내에서 정식으로 개봉한 영화는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극장주라고 해도 이 영화를 국내에서 정식으로 개봉할 것
같지는 않군요.(수정: 2009년 9월 17일에 국내에서 “하쉬 타임”이라는 제목으로 정식 개봉하였습니다.)

이 영화는 크리스찬 베일이 주인공이라는 것 외에 국내 관객들에게 어필할 거리가 단 한가지도 없는 영화입니다. 스케일이 작고, 우리로서는 별로 공감할만한 소재를 다루고 있지도 않으며, 결정적으로 국내 관객들이 가장 싫어하는 ‘찝찝씁쓸한 여운이
남는’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엄청난 걸작도 아니지요.  국내에선 이상할 정도로 인지도가 낮고 인기가 없는 크리스찬 베일의
위치를 생각해봐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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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들은 밝고 낙천적이고 예의바른 사람을 좋아하지요. 잘생겼지만 커튼을 친 듯 어두운 얼굴
속에 광기와 해결되지 않은 욕망을 날선 칼처럼 숨기고 있는 베일은 국내 관객들에게 별로 좋은 이미지가 아닐 듯 합니다. 아직까지
우리에겐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매력을 느낄만한 여유가 없나봅니다. 뭐, 어쨌건 …

[허쉬타임즈]에서도 베일은 그의
이미지에 딱 맞아 떨어지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시한폭탄같은 인간이지요. 영화 속에선 그가 6년간 이라크전에 참전했다는 것 외엔 아무런 정보를 주고 있진 않지만, 우리는 그가
대~에충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람보]에서부터 꾸준히 반복되어 온 상처입은 참전군인, 근육질
몸에 군번줄을 걸고 다니지만 머릿속은 끔찍한 기억과 정신착란적인 파편으로 가득한 모습을 떠올리면 정확히 맞아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가지 다른점이 있다면 그는 더 젊고, 더욱 강력한 자기파괴적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는 불안한 정도가 아니라 왜 이자식이
진작에 미쳐버려서 검은식 줄무늬옷을 입지 않고 멀쩡하게 정장을 입고 돌아다니는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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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멀쩡해 보임? … 훼이크라능 …


하나 흥미로운 점은, 그의 이런 폭력적이고 반사회적인 성향이 단지 전쟁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다소 힘들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은 그와 붙어 다니는 친구인 ‘알론조’와 그들이 만나고 다니는 패거리들을 보면 더욱 명확해지는데, 전쟁을 겪어서 정신적으로
황폐해진 그와 별로 차이점을 느끼기 힘들 정도로 막 나가는 친구들입니다. 도찐개찐이에요. 주인공과 그의 친구는 LA의 험한
바닥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당연히 어둠의 자식들과 어울렸기 때문이겠지요. 즉, 원래 깡패같이 자란 애를 데려다가 전쟁통에
살인기술을 알려주고 실전경험까지 선물한 결과물이 바로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전쟁을 거치면서 원래 있던 폭력성향에서 한끗발
더 나아갈 수 있는 베짱과 기술을 익혔습니다. 이 정도면 만랩의 괴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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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촤식 … 만랩인데?

더더욱 기가 막힌 것은 이런 주인공이 직업을 갖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는 경찰이 되려다가 실패하고 정부기관에서 일자리를 갖게
되는데, 거기서 일할 사람을 뽑는 인간들은 주인공의 과거 행적과 그가 마약을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이라크에서 포로들을
잔인하게 으깨서 과실음료로 만들어 버린 전적이 있다는 사실까지 모조리 알면서 그를 채용하려고 합니다. 오히려 너같은 놈이
필요해, 이런 뉘앙스를 풍기면서 말이죠.

그 말인즉슨, 그런 선발과정을 통해 선발된 인간들이 미국 정부 어딘가에서 비스무리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뒤통수가 선뜻해지는군요. 콜롬비아에서 마약을 팔다 걸리면 저런 인간들을 무더기로 만날 수
있단 말이죠.. 콜롬비아로는 여행도 가지 말아야겠어요.

영화는 이런 주인공과 그의 친구가 이틀동안 LA와 멕시코를
누비면서 겪는 일들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틀동안 술과 마약을 잔뜩 처먹고 구라를 치고, 깡패들을 삥뜯고,
삥뜯어낸 무기를 팔아먹고, 결국은 시한폭탄처럼 폭발해 버릴때까지 F**k 이라는 단어들을 무려 260번 내뱉으며 거리를
누빕니다. (제가 세 본것은 물론 아닙니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목적따윈 없습니다. 이 친구들의 모험은 다분히 현실도피적이기
때문이지요. 그냥 그러는 겁니다. “왜 그러고 다녀요?”라고 물어보면 “그럼 노냐, ㅆㅅ야.”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군요.

우리는 이런 영화들을 적어도 10번 이상은 보아 왔습니다. 이런 류의 주인공들은 사실 “나 이 영화 끝나기 전에 죽을꺼임”이라는
말을 이마에 붙이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영화 끝에 그들이 파멸할 것이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스포일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정된 불운과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파멸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막연하게나마 꿈꾸어왔던 희망이(사실 희망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죠. 주인공이 파멸하지 않았더라면 연방요원의 탈을 쓰고 더더욱 끔찍한 인간으로 변했을 겁니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시점에서 말이죠.

당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미국사회는 지금 이런 괴물같은 인간들을 찍어내는 공장
비스무리하게 돌아간다는 말이죠. 이는 다분히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어린시절에 저를 LA 복판에 던져놓고 자라게 한 후에
이라크전을 경험하게 만들어준다면? 저도 저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장담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한국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비슷하게 성장한 인간도 몇 알고 있구요. 인간은, 환경의 동물입니다. 좋은 인간을 기대한다면 면저 좋은 환경을 제공해야죠.
그렇지 않습니까?

덧) [플레닛 테러]에서 진지하게 미니바이크를 타면서 저를 포복절도하게 만들었던 프레디 로드리게스가 주인공의 친구인 ‘알론조’역할을 합니다. 이 친구 목소리가 섹시하군요.

덧2) 국내에서는 괄약케이라는 선구자에 의해 실시되었던 “똥구녕 조이기”기술을 크리스찬 베일이 실시합니다.
괄약케이는 국방의 의무따위 쿨하게 벗어던지기 위해 실시한 기술이지만 주인공은 국방부에서 일하기 위해 실시하는군요. 전 왜 이리 쓸데없는 데에서 웃음이 터지죠?

영진공 거의없다

“이퀼리브리엄”, B급 영화는 비디오로 봐야 제 맛

내 돈으로 표를 사주면서까지 꼭 보고 오라고 적극 권하고 싶은 영화는 있지만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절대 보지 말라고 뜯어
말리고 싶은 영화란 없다는게 내 생각이다. 오랫동안 상영관을 들낙날락 하다보니 나름대로 영화 고르는 안목이 생겨서 그런 정도의
심각한 재난은 미리 피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아무리 형편 없는 영화라도 나름대로 한번쯤 봐줄만한 가치는
어디엔가 갖추고 있다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무지 이쁜 구석이라고는 단 한 군데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형편 없이 만들어진 영화를 보게 되었을 때에도, 그런 ‘한번쯤 봐줄만한 가치’는 존재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다라고 말한다. 그 가치란 정말 잘 만들어진 영화가 얼마나 잘 만들어진 것인지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상대적 비교의 대상이 되어준다는 점에 있다. 극장이라고는 올해의 전국민 참여 영화 한 두 편에 한해서만 출입하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영화도 음식 처럼 맛 없는 요리를 먹어봐야 정말 잘 만든 일품 요리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나는 말하고 싶은 거다.

영화가 정말 실망스러운 경우의 진짜 원인은 실제 영화의 완성도에 비해 너무 큰 기대를 하고 찾았다가 겪게 되는 낭패감에 있다. 같은 영화라 하더라도 보는 사람의 기대치나 다른 조건들에 의해 관람 중에 느끼는 바가 많이 틀려지게 되긴 하지만 아무튼 이런 식으로 실망감에 젖게 되면 그 영화의 장점이고 뭐고 다 싫어지게 되는게 인지상정이란 생각이다.

“이퀼리브리엄”에 대해서는 사실 반신반의했었다. “매트릭스 리로디드”에서 느꼈던 허전함을 부분적으로나마 충족시켜줄 수 있으리란 기대도 있었지만 그럴만한 수준이 못된다는 경계의 소리도 들었다. 그래서 내 스스로 B급 영화는 B급 영화 나름대로 보는 방법이 있다며 일단 처음 가졌던 호감을 그대로 지켜나갔다.

전에 “이퀼리브리엄”을 B급 영화라고 했더니 누가 봵!하는 답글을 달았던데, “이퀼리브리엄”은 굉장히 B급 영화인 것이 맞다. 그럼 크리스챤 베일은 뭐냐고? 솔직히 난 크리스챤 베일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당시 그가 B급 영화의 주연과 메이저 스튜디오 영화의 조연 자리를 오고가는 그런 수준의 배우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이퀼리브리엄”을 보고나서 영화를 아직 못본 다른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런 거다. ‘이 역시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보지 말라고 뜯어 말리고 싶은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극장에서 꼭 볼 필요까지는 없던 영화다. B급 영화는 … 역시 비디오로 보아야 제 맛이다.

영진공 신어지

존 코너의 정치조작극을 폭로한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미래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정치공작에 대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 무얼 어떻게 해 볼 힘도 이유도 없을 따름이다.  허나 멀디 먼 미래에서도 여전히 권력욕이 인간을 사로잡고 세상을 파괴해서라도 권력을 유지하려는 군상들이 온존한다는 사실을 알려 현재를 사는 우리 중 일부라도 함께 교훈을 얻기를 바라는 심정에서 이 글을 적는다.

1. 존 코너는 우리가 알고있는 그가 아니다.

미래 인류의 운명을 홀로 양 어깨에 짊어진 선지자.  냉혹한 기계군단에 맞서 탁월한 전략과 전투력을 발휘하는 타고난 지도자.  이 모습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존 코너이다.

허나 이 모든 건 철저히 날조된 이미지조작일 뿐이며 우리가 알고있는 존 코너는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다.  왜냐고?  존 코너는 1984 년에 어머니인 사라 코너가 미래에서 온 사나이 카일 리스를 만나서 둘의 사랑의 결실로 태어났다고 알려져있다.  그런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우리가 알고 있는 존 코너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아버지가 미래에서 와줘야 한다.  그런데 그럴러면 어찌됐든간에 일단 카일 리스라는 인물이 존재할 미래까지 시간이 한 번은 흘러가줘야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선행의 시공에서는 인류를 구원할 리더인 존 코너가 존재할 수가 없고, 그를 보호하기 위해 카일 리스가 과거로 파견돼야할 이유는 더더욱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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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비슷하기는 하다 ...

이 사실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가 알고있는 그는, 존 코너라 불리우는 미래의 야심가가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이루기 위해 탄생설화를 조작하여 만들어 낸 인물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이렇게 조작된 탄생설화를 미래에서 유포하는데 만족하였다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터이나, 존 코너는 그걸 그대로 믿으라고 우기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는지 조작된 설화를 더욱 그럴듯하게 뒷받침하기 위해 카일 리스라는 인물을 실제로 우리가 살고있는 시공으로 보내고야만다.

그러나 그 결정이 오히려 자신이 조작한 설화를 부정하게 만드는 결정적 실책이 된 것이다.

2. 왜 그래야 했을까 …

그렇다면 존 코너는 무슨 이유로 자신의 탄생설화를 조작해야만 했을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요번에 새로 발견된 미래의 문서 [분류명: Salvation]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존 코너는 2018 년 당시 이미 저항군내에서 지휘부와 갈등관계에 있었다.

척 봐도 사이가 안 좋은 두 사람 ...

독불장군 행세를 하며 명령체계를 잘 따르지 않는 존 코너, 게다가 단독으로 라디오방송을 하며 마치 선지자인양 행동하는 그를 지휘부는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있다고 하여도 언젠가는 지휘부에 의해 실권 또는 제거가 될 수 있는 상황에서 존 코너는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도박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녹음테이프를 하나 하나 내놓으며 자신의 출생을 신비롭게 각색하였고 인류의 운명은 자신에게 달려있다고 설파하기 시작한 것이다.

혼돈의 시대에 이러한 신화는 의외로 사람들에게 잘 먹히는 법.  허나 하나의 거짓은 언제나 더 큰 거짓을 낳게 마련이고 그 거짓은 항상 그럴듯한 증거로 뒷받침이 되어야 하기에 존 코너는 말로만 그치지 않고 무리한 액션을 취해야 했던 것이다.

3. 존 코너는 스카이넷과 내통하고 있다?

이 부분을 언급하는 것은 무척이나 조심스럽지만, 존 코너가 자신의 탄생설화 조작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는 음모의 이면에 스카이넷과의 뒷거래가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바이다. 

그렇게나 냉혹하고 철저한 스카이넷이 유독 존 코너의 사전제거작전에 있어서는 황당할 정도로 어설프게 대처하고 있음을 우리 모두 인지하고있다.  최초 T-800(Model 101)의 투입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이미 알고있는 스카이넷은 이후 개발된 T-1000과 T-X를 굳이 옛 모델들의 투입이 실패로 끝난 이후의 시점으로만 투입하고있다.  더 우수한 후속기종이 개발되었을 때 옛 모델의 투입시점보다 이전으로 보냈다면 존 코너 사전제거작전은 성공리에 마무리 하고도 남았을 터인데 말이다.

뒷다마???

그리고 역시 요번에 발견된 Salvation 문서에 의하면 스카이넷은 2018 년에 이미 카일 리스를 제거리스트 1번에 올려놓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그들은 카일 리스가 지구로 파견될 것이라는 걸 알았다는 것인데, 정말로 그가 존 코너의 아버지라면 스카이넷은 카일 리스의 투입 이전에 털미네이러를 보냈으면 상황종료일 것이다.

이런 정황을 보았을 때 스카이넷은 애초에 카일 리스의 파견을 막거나 존 코너를 사전제거할 의사가 없음을 알 수 있고, 오히려 카일 리스를 제거리스트에 올림으로써 존 코너의 탄생설화에 대한 신빙성을 높여주는 효과를 노린 것이라고까지 유추해 볼 수 있다.

또한 존 코너는 대규모 전투에서 유일한 생존자일 경우가 너무 많으며, 스카이넷이 일방적으로 우세한 여러 상황에서도 번번히 그는 혼자만의 승리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이를 보았을 때 존 코너와 스카이넷은 각자의 영역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기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실제 뒷전에서 협력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해 매우 합리적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만약에 이런 의혹이 사실이라면, 바라노니 존 코너와 스카이넷은 자신들의 나와바리를 장악하기 위한 더러운 야합을 당장 중단하고 Autobot과 힘을 합쳐 호시탐탐 지구를 노리는 Decepticon을 물리치는데 전력을 다하라.

여섯 지구의 생존자들과 Cylon들이 기나긴 전쟁 끝에 비로소 화합과 평화를 이루어, 새로이 만들어 놓은 이 지구를 함께 지켜내어 모두가 잘사는 터전으로 만들어야 함이 어찌 바람직하다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May the peace and truth be with us …

영진공 이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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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시니스트 (El Maquinista, 2000), “크리스챤 베일의 모습 자체로도 충격적인 영화.”


흑백에 가까운 칙칙한 색감과 주인공의 과거를 되집어 나가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2002)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감추어진 과거의 기억이 수많은 데자뷰를 통해 단절적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머시니스트>는 좀 더 난해한 공포물의 느낌을 준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겪은 1년 간의 불면증과 결벽증, 심각한 수준의 체중 감소, 그리고 여러 정신 착란 증세들의 근본 원인이 속시원히 밝혀지지만 그것은 이제껏 보지 못한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무엇이라기 보다는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위안으로 자리 잡는다.

사실 <머시니스트>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부분은 다름 아닌 이 영화를 위해 30kg을 감량했다는 크리스챤 베일의 모습 그 자체다. 한 편의 영화를 위해서, 그리고 그 안의 인물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이쯤되면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우리의 고정 관념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예전에 <정사>(Intimacy, 2000)에서 케리 폭스의 연기를 봤을 때에도 새삼스레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었는데, 일반적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수준을 뛰어넘어 그 이상의 것들을 보여주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배우도 엄연한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인정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자연인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선 크리스챤 베일의 성취와 연기에 힘입어 <머시니스트>는 보기 드문 강한 설득력으로 무장한 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시작된 주인공의 길고 긴 내면적 고통의 깊이가 관객들에게 이토록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배우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마침내 되찾은 영혼의 안식이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체감할 수 있게 해주는 <머시니스트>의 에필로그는 바로 이러한 부분의 정점이다.

영진공 신어지

<3:10 투 유마>, 두 남자의 멋진 아빠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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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맨골드 감독의 전작들 가운데에는 안젤리나 졸리와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처음 만나는 자유>(1999), 멕 라이언과 휴 잭맨의 멜러 <케이트 & 레오폴드>(2001), 존 쿠잭의 스릴러 <아이덴티티>(2003), 호아퀸 피닉스와 리즈 위더스푼이 주연한 컨츄리 싱어 존 R. 캐쉬의 전기 영화 <앙코르>(2005)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나가는 타입이라기 보다는 대중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화법으로 탄탄하게 영화를 만들어내는 젊은 장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3:10 투 유마> 역시 특별히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것은 발견하기 어려운 작품입니다만 감상을 방해받는 일 없이 드라마를 잘 따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안정감이 돋보이는 영화입니다. <3:10 투 유마>의 안정적인 만듬새에 크게 기여하고 것은 역시 좋은 배우들입니다. 포스터를 양분하고 있는 러셀 크로우와 크리스챤 베일의 연기 대결이 볼만합니다.

엘모어 레오나드의 단편을 57년에 이어 두번째로 영화화한 <3:10 투 유마>는 삶의 터전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댄 에반스(크리스챤 베일)과 법이고 뭐고 나 하고 싶은 대로 산다는 냉혈한 벤 웨이드(러셀 크로우)의 짧은 대결과 우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철도회사의 현금 수송 마차를 털고 난 뒤에 벤 웨이드가 체포되고 그를 유마행 3시 10분 열차를 태워보내 법정에 세우려는 호송대에 당장의 200달러가 아쉬운 댄 에반스가 자원합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산적 두목 벤 웨이드와 몇 명의 호송대의 모습은 마치 강아지 몇 마리가 덩치 큰 사자를 끌고 가는 듯 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유로운 몸이 될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벤 웨이드는 처음 체포될 때처럼 여유를 부리다가, 때로는 그의 목을 노리는 다른 이들 때문에 번번히 발목을 잡히곤 합니다. 그리고 하이에나 같이 영악하고 잔인한 벤 웨이드의 부하들이 이들을 뒤쫓습니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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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 무비의 총 싸움 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것은 벤 웨이드와 댄 에반스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들이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힘겨움과 남자들 간의 유대입니다. 영화는 급기야 메타 픽션의 단계로까지 진화하며 댄 에반스의 무모한 도전극에 벤 웨이드가 그래, 기분 좋게 한번 도와준다는 식이 되어갑니다. 이들의 목표는 한 가지. 댄 에반스가 의로운 방법으로 돈을 벌어 가족의 행복을 지키고 아들들에게 모범이 되는 훌륭한 아버지로 남을 수 있도록 해주는 일입니다. 벤 웨이드는 법 질서를 무시하고 사람 목숨 귀한 줄을 모르는 살인자이지만 그렇다고 죄없는 약자까지 못살게 굴지는 않는, 한 마디로 강한 남성상입니다. 그림도 그리고 성경 구절도 외우는 독특한 면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반면 댄 에반스는 돈 많고 힘 있는 자들에게 시달리고 급기야 자기 땅을 빼앗길 처지이면서도 정직한 삶을 고집하는 두 아이의 아빠입니다. <3:10 투 유마>는 결국 댄 웨이드가 훌륭한 아버지로 남고 싶어 하는 소망의 가치를 벤 웨이드가 지지해주기로 하면서 극적인 결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부시 대통령과 공화당이 집권한 지난 8년간의 헐리웃 영화들은 9.11 사태의 후유증에 시달려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존경 받아야 할 아버지상을 자주 강조해왔습니다. 샘 멘데스 감독, 톰 행크스 주연의 <로드 투 퍼디션>(2002)에서의 낯간지러운 마지막 나레이션이 그렇고 심지어 클린스 이스트우드 감독, 숀 펜 주연의 <미스틱 리버>(2003)는 실수와 불법을 저지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버지를 지지해줘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바 있습니다. <3:10 투 유마>는 이제 내년 초가 되면 민주당에게 정권을 내놓아야 할 처지에 놓인 미국 공화당과 보수층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마지막 호소문처럼 보입니다. 험악한 세상에서 후대를 위해 최선을 다한 당신의 아버지를 기억해달라고, 그런 아버지상을 계속 지킬 수 있게 지지해달라는 소리 같습니다. 단순히 두 주연급 배우의 연기 대결과 남자들 간의 우정을 그린 이색적인 서부극이라고만 보는 건 좀 재미가 없는 듯 합니다. 어쩌면 시종일관 세련된 화법으로 극을 잘 이끌고 가다가 충직한 부하들을 자기 손으로 몰살시키는 두목님의 마지막 모습이 다소 황당하게 느껴져서 이렇게 고까운 눈으로 다시 보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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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

ps. 최후의 결전을 앞둔 댄 에반스가 아들을 붙들고 상당히 오바하는 장면이 상당히 오바스럽게 찍혔는데요 그 뒤에 이들을 지켜보던 벤 웨이드의 모습이 잡힙니다. 댄 에반스의 ‘멋진 아빠 만들기’에 벤 웨이드가 동참해주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이었던 거죠. 기차역까지 가는 험난한 과정 중에 이건 정말 아니구나 싶었던 벤 웨이드가 메타 픽션에 해당하는 대사를 날리는 것이 참 좋았습니다. “아들에게 좋은 모습 보이는 것도 충분히 했으니 이제 그만 하자”는 거였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맡은 댄 에반스와 악당/죄수의 역할을 맡은 벤 웨이드 간의 무대 뒤 이야기였던 겁니다. 착한 일 하는 거 버릇될까봐 싫어한다더니, 풋. 멋진 놈입니다. 각자의 역할과 입장을 잠시 떠나 같은 인간으로서 소통할 수 있다는 건 역시 보기 좋습니다. 이런 까뮈스러운 기회와 희망에 대한 믿음이 인생을 살만한 것으로 남겨주는 것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