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갈”, 최악이자 최고의 영화.

<식스 센스> 같은 공포 영화를 떠올리며 완벽한 반전 운운해야 하는데, 나에게 완전하고도 완벽하게 반전을 안긴 영화는 바로 <고갈>이다.


<고갈>을 보고서 나는 나에게 부끄러웠다. 그러지 말자고 해놓고 또 어린애처럼 해피엔딩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품은
깊은 의도를 완전히 놓치고 비껴가 버렸다. 결국 극도의 공포를 경험하고 말았다. 영화를 생각하느라 밤잠마저 설쳤다. 

 

 

그러니까, 처음 극장 안에서 공황장애(특별한 이유 없이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극단적인 불안 증상)를 경험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이야기 상, 아니 이미지 상 순전히 구세주라고밖엔 예상하지 못한 인물(자장면 배달부)이 드디어 안쓰러워 죽겠는 ‘여자'(주인공)를 구해주기 위해 도착했구나, 휴 … 안도의 숨을 내쉰 순간 …
 
그(자장면 배달부)가 갑자기 돌변하며 칼로 자신의 배를 사정없이 긁어댔다. 이어 배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꾹 눌러 짜  짬뽕
그릇에 담았다. 괴음과 함께 헐떡거리 시작하더니 눈을 뒤집는 데 …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두 눈을 질끈 감아도 거친 숨소리와
괴상한 신음소리 때문에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뛰었다.


당장 하늘이 보이는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옆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사람들의 양해를 구해야 했다. 그럴 순 없지.!
허둥지둥 가방에서 ipod를 꺼냈고 아무렇게나 마구 플레이를 눌렀더니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흘러 나왔던 거 같다. 눈을 감고 노래에만 집중하려고 했지만 잘 안됐다. 밀폐된 공간, 멈추지 않는 이미지(영상/영화)가 날
때리는 것만 같았다. 


남자에게 잡혀 사는 여자. 여자를 팔아먹고 사는 남자. 언뜻 보면 몹쓸 놈이 남자 같지만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건 여자의
선택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여자는 자신을 다스리려고 하는 남자로부터 줄곧 저항하지만 그것은 남자의 밥그릇에 오줌을 싸거나,
트림을 하는 잔 몸부림이 전부다. 잡히고 때리고 맞고 도망가고 돌아오는 순환의 반복. 공허의 한 가운데에서.


<고갈>은 보는 내내 심장에 강펀치를 가한 영화다. Stop버튼을 누르지도 못하고 때리면 꼼짝 없이 맞아야 했다. 그럼에도
<고갈>은 벗기고 또 벗겨도 궁금한 게 샘솟고 재해석이 가능하다. 절대 악이 모호하고 가진 자와 못 가진자가 흑과
백처럼 나뉜 세상. 누구든 약자를 지배하려드는 욕망 같은 지금의 시대상을 불편하지만 동의할 수있도록  담았다. 이 영화가 날
고갈시킬 것 같았지만 진짜는 가득 채워 넘치게 만들었다.



곡 감독의 영화 수업을 한 차례 들은 적이 있다. 그의 폭넓은 철학적 사유에 놀랐던 기억이 난다. 복잡해서 차마 들여다 볼 수
없던 ‘정념’을 몇 줄의 선으로 그린 도형 하나로 설명하는 명쾌함 앞에 발가벗겨진 기분도 들었었다. 역시 영화 ‘고갈’은 감독
‘김곡’을 닮은 듯하다.


<고갈>은 영등위로부터 제한상영가를 받았다가, 몇 장면을 삭제하고는 청소년관람불가로 개봉하게 됐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9월 3일 단독 개봉하였다.

영진공 애플

행복한 추석 지내세요!

힘든 시절이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과

마음의 풍요는 항상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행복하고 화목한 중추가절


흐뭇함이 함께하는

모두의 한가위가 되기를 빕니다.

v(^.^)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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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일동

“독 (the spot, 2008)”, 욕망의 독 안에 갇힌 사람들

‘불신지옥’이 적은 관객들에게나마 박수를 받는 동안 슬그머니 영화관에 걸렸다가 역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있는 또 하나의 잘 만든
공포영화가 있다. 명동 중앙시네마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된 독립영화 ‘독’은 ‘불신지옥’이 보여주지 못한 또다른 맛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처음에 포스터만 보고선 일본 공포영환인줄 알았다.


부모의 유산을 가지고 고향을 떠나 서울의 한 아파트에 자리잡은 형국의 가족. 형국은 공장도 인수하며 나름 성공한 삶이라 여겨질
만도 하지만 이사 첫날부터 그들 가족 사이에서는 왠지 모를 불편함이 베어나온다. 어둡고 허름한 아파트,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는
딸, 종교에 심취해있는 윗층 사장 부부등 형국의 가족 주위로 하나 둘 불길함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들 가족의 숨겨진 진실에 촛점을 맞춘다.


귀신보다 무서웠던 딸내미



어둡고 암울한 욕망으로 묘사된 오래된 아파트, 개인의 욕망을 실현해주는 도구로 전락한 종교 등 ‘독’과 ‘불신지옥’은 서로 여러 부분에서 닿아있다. 하지만 ‘불신지옥’이 현실에 기댄 초현실적인 사건을 이야기한다면 ‘독’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영화 속 그들처럼 현실의 우리 역시 욕망이라는 독 안에 갇혀있는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돈이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었고 삶의 이유가 되어버린 이 대한민국은 영화와 다름없다. 우린 매일매일 미디어를 통해 욕망의 독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들이 얼마나 끔찍한 일들을 태연히 저지를 수 있는지를 보고 있다.


게다가 우리를 독 밖으로 꺼내줘야 할 종교는 오히려 욕망을 먹고사는 거머리가 되어 독을 더 깊고 넓게 만들고 있다.


영화가 아닌 엄마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주위의 누군가가 겪었을법한 영화 ‘독’의 이야기는 그래서 끝나는 순간까지 무섭고 불쾌하고 소름끼친다.



영진공 self_fish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2009년은 다윈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는 ‘다윈의 해’다.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만든 주인공의 해답게 올해 초 영국에서는 재밌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1896년에 창립한 BHA는 현재 약 6천 5백 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주로 과학, 인문 계통의 지식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의회에도 


100명 이상의 의원이 지지그룹을 형성해 성공회가 국교인 


영국에서 무종교인들의 권익을 돕고 있다.






리차드 도킨스가 부회장으로 있는 영국인본주의자협회(British Humanist Association, 줄여서 BHA)에서는 2008년 12월 말 영국 각지를 운행하는 버스에 도발적인 광고를 내었다. 회원과 일반인들에게서 기부를 받아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걱정 말고 인생을 즐겨라(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라는 광고를 한 것이다. 재밌게 보였는지 곧이어서 스페인의 무신론 단체에서도 유사한 버스 광고를 내보냈다.







사진 속 이는 그 유명한 리차드 도킨스.


리차드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등의 


저자며 현재 옥스퍼드 대학의 석좌교수로 있다. 대표적인 진화론의 


지지자로서 유신론자들을 향해 날카로운 단어들을 집어던지는 생물학계의 


진중권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10월 BBC와 인터뷰에서는 “종교는 세금감면, 


노력 없는 존경, 공격당하지 않을 권리, 어린이들을 세뇌할 권리 등에서 


무임승차하고 있다”라며 또한번 종교계를 향해 광속구를 내질렀다. 






그러자 발끈한 이가 나타났다. 그는 런던 소재의 러시아 전문 위성방송 ‘러시아 시간’의 사장 알렉산더 코로브코였다. 그는 BHA의 광고에 맞서 “신은 있다. 믿어라! 걱정 말고 인생을 즐겨라(There is God. Believe! Don’t Worry. Enjoy your life!)”라고 적어서 런던을 운행하는 버스에 광고를 하였다.










인간의 유전자 지도가 완성됐네, 지구는 물론 우주의 시작과 끝도 밝혀버리겠네 하는 2009년에도 신의 유무를 둘러싼 과학과 종교의 맞짱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이 논란의 중심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래서 다윈의 해를 맞이하여 진화론으로 촉발된 신은 ‘있다! 없다?’의 시끄러운 떡밥의 역사를 한번 훑어보기로 하자.







지동설을 처음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그의 걸작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을 주저한 것은 흔히 알고있는 종교적 핍박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당시의 과학으론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롱거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16세기가 되자 과학사에는 그 유명한 코페르니쿠스가 짠하고 나타난다. 그는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는 지동설을 발표하면서 기독교가 그려놓은 세계관에 깽판을 놓기 시작한다. 17세기에는 과학의 본좌 갈릴레오가 다시한번 지동설로 쐐기를 박는다. 코페르니쿠스는 그저 이론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지동설을 일반인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고 기독교 역시 심기가 불편한 정도였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달랐다. 그의 주장은 관측을 토대로 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입 닥치고 버로우 타라는 협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양립할 수 없는 과학과 종교의 대립은 이후 더욱 가열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편에서 둘은 동맹을 맺게 된다. 과학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설계를 탐구함으로서 위대한 설계자와 그의 섭리를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학과 종교의 허니문은 영국에서 더욱 튼튼한 기반을 확보한다. 





허니문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802년 설계는 설계자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을 담은 윌리엄 팰리의 [자연신학, 혹은 자연 현상에서 모은 신의 존재와 속성에 관한 증거들 (Nature Theology, or Evidence of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the Deity Collected from the Appearances of Nature)]이 출간된다.




 







내용을 짧게 소개하자면.


“길 가다가 떨어진 시계를 보면 당연 시계공이 만들었겠구나 생각하는게 당연지사. 그렇다면 그런 시계보다 훨씬 복잡한 생물들을 보면 당연히 전능한 신이 만든 것이 분명하지 않겠느뇨~”




그렇다. 이 책은 현재 창조론의 버전업인 지적설계론의 토대로 쓰였으며 리차드 도킨스의 책 [눈먼 시계공]에서의 ‘시계공’은 바로 윌리엄 펠리의 그 시계공인 것이다.




이 책은 당시 젊은 찰스 다윈은 물론 과학자들과 일반인들에게 종교와 과학은 결국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상을 심어주었으며 현재 까지도 진화론을 공격하는 창조론자들의 대들보가 되고 있다. 
















영진공 self_fish













































“프리다”, 그러나 내가 알던 프리다 칼로가 아니다

어떤 영화는 기특하게도 문장을 수정하는 일도 별로 없이 짧은 시간 내에 주루룩  리뷰를 잘도 쓰게 만든다. 그리고 어떤 영화는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함에 뭔가 주절주절 쓰고 싶은 생각을 아예 거둬가 버리기도 한다. 또 어떤 영화는 너무 많은 자극을 주는 바람에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차마 짧은 끄적거림으론 감당이 안되는 경우도 있다.

“프리다”는 이도저도 아니게 영화를 본 당일은 글을 썼다가 지우고 또 썼다가 다시 지우면서 몇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엔 몇 가지 아이디어 마저 다 지워버리게 만드는 제 3의 경우, 가장 안좋은 경우다. 예전에 스티븐 달드리의 “디 아워스”를 보고도 비슷한 난처함에 빠졌었는데 결국 무리를 해서 당일에 간단한 메모만 적어놓고 본편은 시작할 생각도 못하고 지나가 버린 기억이 있다. (아… 또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려니 또 같은 증상이 반복된다. 그래서 한바퀴만 더 돌아가기로 하겠다.)

프리다 칼로의 생을 다룬 이 전기영화는 근현대 미술 작품들에 관한 본격적인 관심을 쏟았던 내 대학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까미유 끌로델”이나 “바스키아”, 그리고 최근의 “폴락”과 같은 빼어난 전기영화들을 기억하게 만든다. 또한 실존했던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들을 다룬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부가적인 만족감에 관해 다소 시니컬한 목소리로, 물론 그런 영화들을 열심히 쫓아다니는 나 자신의 속물 근성에 대한 자기 고백과 함께, 한차례 언급하고 싶도록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가뜩이나 미국내 대중문화 시장에서 차지하는 히스패닉계의 위상이 만만치가 않은데 “프리다”라는 한 편의 영화를 통해 그 상위 시장에까지 세력을 뻗쳐보려는 수많은 멕시코 출신 영화인들의 노력에 관해 비교적 너그러운 시선으로 몇마디 해주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이 모든 아이디어들 가운데 어떠한 것도 “프리다”에 관한 나의 정확한 느낌을 전달하는 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사실 영화 “프리다”를 통해 본 프리다 칼로는 이전부터 내가 알던 프리다 칼로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르다. 그녀의 작품과 일화들에서 느껴지는, 저 심연의 밑바닥에서부터 울리는 고독과 아픔을 “프리다”는 너무 밝은 색조로만 채색해 버렸다는 생각이다. 샐마 헤이액의 한계가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위대한 제 3세계 페미니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한 여인의 생을 영화화하는 데에 너무 많은 스타들이 참여한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프리다 칼로를 모르던 이들에겐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는 좋은 참고 자료로서, 그리고 멕시코의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를 전세계에 소개하는 데에 “프리다”는 매우 성공적일 수 밖에 없는 방향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적어도 처음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을 보고 받았던 그 충격적인 생경함과 두려움을 기억하는 이들에겐 상당히 불만족스러운 영화로 만들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본 프리다 칼로의 전기영화에는 프리다 칼로가 보이지 않았다고.

역설적이게도 나는 “프리다”를 두시간 동안 재미있게 보았다. 참 잘 만든 영화다. 안토니오 반데라스, 애쉴리 저드, 에드워드 노튼, 제프리 러쉬, 그리고 알프레드 몰리나까지 너무 반가웠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에 대한 내 오랜 기억이 이 영화에 대해 알듯 모를듯한 이상한 표정을 삐쭉거린다. 따라서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불평일 뿐이지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참고하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듯도 싶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