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3부



 

*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1부


*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2부

2. 생물의 진화를 생각하다



 



뷔퐁 Count de Buffon(1707~1788)



프랑스의 자연학자이며 파리 왕립 식물원의 총책임자였던 뷔퐁백작은 귀티가 좔좔흐르는 사진에서 느껴지듯 벼락부자 아버지를 두었던 재벌 2세 출신이었다. 부잣집 가정사가 늘 그렇듯 이 집안도 재산문제로 시끄러웠다. 재혼하려는 아버지와 뷔퐁과의 재산싸움이 있었고 이 싸움에서 뷔퐁이 승리하며 많은 재산을 차지한다. 게다가 뷔퐁은 헐랭이 재벌 2세가 아니었다. 사업수완을 발휘하며 여러 사업에 투자를 하여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도 한다.




이렇게 돈이 차고 넘치는 뷔퐁형님이었지만 유별나게도 자연사 공부에 열중 했다. 뭐 느긋하게 자연사 책이나 뒤적이며 지적인 모양새나 풍길 요량인가 싶었지만 그는 정말 부지런하고 열정적으로 자연사를 파고들었다. 형님은 1749년부터 1804년에 걸쳐 무려 44권에 달하는 책을 집필하며 다산(?)의 제왕스런 면모를 보여준다. 이 중 [자연사 Historire Naturelle]는 그의 가장 기념비적 작품이자 과학사에 있어서도 의미있는 작품이다. 이해하기 쉽게 쓰인 덕분에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된다.



[자연사 Historire Naturelle]


독창적인 이론은 없지만 풍부한 자료들을 끌어모아 체계적인 형태로 정리함으로써 


여러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연구의 시발점을 제공했고, 사람들에게 박물학자 붐을 


일으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뷔퐁형님은 과학 행정가이자 대중적인 활동가로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아쉽게도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형님은 종들은 진화한다고 주장했던 초기 진화론자 중 한 분이었다. 형님은 진화를 과거의 튼튼한 조상으로부터 점점 퇴화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명의 창조에 개입하는 것은 오로지 열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거의 지구는 온도가 높았기 때문에 생물의 창조가 더 쉬웠고, 고대의 뼈에서 보듯 당시의 생물 역시 그렇게 컸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연사] 4권에서 당나귀는 말이라는 종에서 진화한(그러니까 퇴보한) 후손이며 


원숭이도 인간의 종에서 진화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뷔퐁형님은 돼지의 발가락뼈나 꼬리처럼 쓸모없는 부분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연은 창조할 때 
궁극적인 목적 따위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며
지적 설계론에 맞불을 놓는다.



방향이 잘못되긴 했지만 뷔퐁형님은 생물의 진화를 인정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진화를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진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다윈이 진화라는 개념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듯 진화의 개념은 휠씬 전에 등장했다. 다윈이 본좌에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진화의 매커니즘을 훌륭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다윈보다 앞서 진화의 매커니즘을 설명하였던 분이 계셨다. 바로 비극의 주인공 라마르크 형님이시다! 두둥~


장 밥티스트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 (1744~1829)

드디어 생물학계 최고의 비극의 주인공인 라마르크 형님이 등장하셨다. 다윈보다 먼저 진화의 메커니즘에 눈을 뜬 훌륭한 형님이지만 ‘기린’이라는 포유동물 하나로 인해 그의 업적과 이론들은 모두 버로우 되고 말았다. 그러나 형님은 결코 기린이란 단어 하나로 평가되어서는 안될 인물이다. 라마르크 형님의 진화이론은 비록 틀리긴 했지만 후배 진화론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다윈 역시 라마르크 형님의 이론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형님의 이론을 받아들여 자신의 진화이론을 전개해 나간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학계는 진화 메커니즘을 둘러싸고 다윈주의와 라마르크주의로 나뉘어 박터지게 싸우게 된다. 이 싸움에서 다윈주의가 승리하면서 라마르트 형님의 이론은 찬밥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아아~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라마르크 형님은 ‘장-밥티스트 피에르 앙투안 드 모네 드 라마르크’라는 길고 긴 이름을 가진 프랑스의 별 볼일 없는 군소귀족 출신이었다. 군인, 은행원 등 초반 직업은 과학과는 멀어 보였지만 마음속엔 과학을 향한 알콜 램프를 태우고 있던 분이었다. 은행 일을 하는 틈틈이 의학, 생물학, 기상학을 공부했고 결국 책까지 집필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1776년에는 [대기의 주요 현상에 대하여]를,
1778년에는 [프랑스의 식물 flore-francaise]을 출판한다.
이 중 [프랑스의 식물]은 프랑스 식물의 분류에 관한 표준 교재가 되면서
식물학자로서 명성을 날리며 학술회 회원으로 선출되는데 큰 역할을 한다.

[프랑스의 식물]의 대박이후 은행일에서 손을 떼고 본격적으로 생물학계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런 라마르크 형님 뒤를 봐준 이가 바로 재벌 2세 생물학자 뷔퐁이었다. 뷔퐁의 달콤한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라마르크 형님은 1790년 프랑스 자연사 박물관에 입성하여 곤충과 벌레 분야의 연구 책임을 맡게 된다. 형님은 이 연구에서 무척추동물invertebrates이라는 이름을 창안하여 이들을 분류한다.

 

척추가 없는 친구들을 분류하고 무척추동물이란 이름을
붙여준 것은 다름아닌 라마르크 형님이었다.

지식에 대한 욕구가 많았던 형님은 생물학, 기상학, 물리학, 화학 등에 까지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참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써냈다. 그 중에는 라부아지에 본좌님의 이론에 반대되는 물리화학적 이야기를 논하는 책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형님의 글솜씨가 안드로메다스러웠기 때문에 대부분의 책들이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형님이 택했던 직업들은 대개가 돈 안되는 명예직들이어서 일생동안 돈 걱정을 하며 살아가야 했고 말년에는 눈이 머는 등 순탄한 일생은 아니었다.


화학계의 본좌 라부아지에가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혁명사상에 동조적이었던 라마르크 형님은 다행히 화를 면하게 된다.

무척추동물을 분류했고 고생물학을 창시하였으며, 현대적 의미의 화석 용어를 고안하는 등 후덜덜한 업적을 이루어냈지만 역시 가장 손꼽히는 업적은 다윈보다 앞서 진화의 메커니즘을 제시한 점과 생물학이라는 학문의 체계를 세운 점일 것이다.

형님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연구하는 과학으로서 생리학이나 해부학 등의 단편적으로 이루어지던 연구들을 독립된 분과학문으로 체계화하고 여기에 생물학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그리고 동물, 식물, 광물의 3개로 나뉘어있던 것을 동식물을 합친 생물계와 무기계로 재편성했다. 이후 생물계는 일관된 물리화학적 체계를 근거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는 생기론이라 하여 생물체를 이루는 구성 물질과 무기체를
이루는 물질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물론 라마르크 형님도 생명체와 무기체는
엄격히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생기론자는 아니었다.
형님은 생명체든 무기체든
그 구성물질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법칙은 동일하며 단지
이 구성물질들이 어떻게 조직화되어 있느냐에 따라 생명체와 무기체로 나뉜다고 주장했다.

라마르크 형님은 평생 동안 개체가 형질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과, 그것이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진화의 방식에 대한 모델을 개발했다. 이런 생각이 처음 드러난 것이 1809년 발표한 [동물철학philosophie zoologique]에서인데 바로 책이 라마르크 형님을 지금까지도 기린의 아버지(?)로 기억되게 만든 악몽의 출발점이 된다.

그럼 어째서 [동물철학]은 논란의 장작더미가 되었을까?

라마르크 형님은 [동물철학]에서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2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환경의 상호 관계 속에서 필요성에 의해 기관을 창조하고, 그 기관은 사용할수록 강해지며, 사용하지 않을수록 퇴화된다는 용불용설이론과 둘째는 이렇게 획득한 것은 세대를 거쳐 자손에게 전달된다고 하는 획득형질의 유전설이다.



용불용설과 획득형질의 유전을 설명하기 위해 라마르크는 기린의 목을 예로 든다.
높이 있는 나뭇잎을 먹기위해 목을 길게 빼 용을 쓰다보니 목이 점점 늘어났으며
이렇게 획득한 형질은 유전이 되어 지금의 기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진화이론은 단지 1부의 내용일 뿐이다. 2부는 생명체와 무기물의 차이를 설명하는 일반 생물학, 3부는 심리 생리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듯 [동물 철학]은 진화론에 국한된 것이 아닌 생물학이라는 학문의 기초를 명확히 세우고 이를 연장으로 심리학적 토대까지 세우려고 했던 거창하고 값진 기획 의도를 가지고 있는 저서였다. 


하지만 당시 이 책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이 책이 제대로 읽히기 시작한 것은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고 사람들이 진화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러나 라마르크 형님의 글솜씨는 훌륭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형이상학적 단어들이 너울거렸고 지독한 문어체를 구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읽고 나서도 머릿속에 내용이 접수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생물을 분석하는 데 사용된 물리화학적 이론들은 구닥다리였다. 이미 세상은 화학계의 본좌인 라부아지에의 화학이론들로 갈아탔는데 [동물철학]에는 18세기 화학이론이 적용되어 있었다. 게다가 [동물철학]에서 진화와 관련된 제1부만 발췌하여 번역되고 출판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결국 그의 책은 왜곡되어 단편적으로 수용되면서 알멩이는 없어지고 이해를 돕기 위해 등장했던 기린만이 살아남아 구천을 떠돌게 된다. 



라마르크와 다윈의 진화이론의 차이.
즉 기린의 목은 목적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일어난 변이가 아니라
우연히 발생한 목이 긴 돌연변이가 환경에 더 적합하였고 
그럼으로서 목이 짧은 기린은 도태되고 목이 긴 기린만 살아 남은 것이다.

 


 어쩌면 다윈과 라마르크는 참 비슷한 구석이 많다.
둘은 진화의 메커니즘을 제시하였고 그 예로 든 동물로 인해 놀림을 당해야만 했다.
  



라마르크 형님은 멸종되는 종은 없고 다만 다른 형태로 발전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단순한 단세포 생물에서 점점 복잡한 생물로 진화되었으며 이런 메커니즘으로 용불용설과 획득형질의 유전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진화의 과정에는 무척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한 인물이 발끈하고 튀어나오게 된다. 라마르크 형님은 사후에 다윈주의자들에게 시달렸지만 살아생전에도 만만찮은 상대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그를 괴롭힌 인물은 형님보다 늦게 파리 자연사 박물관에 들어온 후배였다. 그는 종은 변하지 않으며 단지 대격변으로 모든 종이 멸종하고 다시 생겨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명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생물학자였다. 

그는 퀴비에였다.



영진공 self_fish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2부







과학혁명으로 체면을 구긴 종교계가 짱돌을 굴려 내놓은 것이 자연신학이었다. 자연신학이란 쉽게 말해 자연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며 인간들은 자연의 법칙을 연구함으로써 고귀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털끝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이론이다. 즉 과학은 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라는 말이다.




자연신학은 과학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종교는 계속해서 어깨에 힘주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과학혁명 이후에도 과학은 여전히 종교의 앞마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과학을 신을 이해하는 도구로 본 덕분에 기독교는 과학을 장려했다. 수도원 같은 곳에서는 과학에 몰두하는 성직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것도 신의 존재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였다. 특히 성경을 장르문학으로 분류시킬 수 있는 지구의 나이와 생물의 발생, 진화에 관한 문제에서 종교는 과학의 발목을 꽈악 붙잡고 있었다. 다른 과학 분야보다 생물학의 발전이 늦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다윈 이전의 생물학 논란들




다윈 이전의 보수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생물의 기원을 대략 6000년 전에 하나님이 모든 생물들을 각각 별개로 창조하였다고 보았다. 즉 ‘강쥐는 태초에도 개새끼였으며 고냥이는 태초에도 고양이였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산이나 들판, 바다 등과 같은 지질학적, 생물학적 환경은 노아의 홍수와 같은 대재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현재 하마와 고래는 같은 조상에서 진화하였다고 밝혀져 있다.


하지만 개별창조이론으로 보면 하마와 고래는 태초에도 하마와 고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식물학, 자연사, 지질학과 같은 분야는 견본 수집 말고는 딱히 연구라고 할만한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학혁명 후 물리학이나 천문학, 화학 등은 빡시게 이론을 세우고 실험을 하며 원리를 정립하는 등 학문의 체계가 잡혀갔고 당연히 그에 따라서 많은 법칙을 밝혀냈다.




하지만 생물학이나 지질학은 할게 없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저 있었기 때문에 이 분야에선 그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들을 모으는 오타쿠만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18세기에는 식물채집이 유행이었고 많은 부유한 아마추어 생물 오덕들에 의해 표본들이 수집되었다.




대항해시대를 맞이하며 역마살이 낀 유럽인들은 세계 구석구석으로 싸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동식물들을 수집했고 이러한 견본들은 런던, 파리, 스웨덴과 같은 중심지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지에는 바로바로 그 유명한 분류학의 본좌인 뷔퐁과 린네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쏟아져 들어오는 표본들을 합리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분류 체계를 개발하기 위해 피똥을 싸는 노력을 기울인다.






나는 누군가 ... 여긴 어딘가 ...




수많은 표본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뜻하지 않게 생물 전체를 거시적으로 볼 수 있는 효과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기리고자 그의 소중한 피조물들을 모았는데 이게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에 냉수를 끼얻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이러한 관찰과 증거들을 토대로 발생과 진화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자 지구의 나이에 관해서도 의구심을 품는 이들이 생기게 된다. 새로운 이론이 전제하는 진화는 아주 작고 천천히 일어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환경과 복잡한 구조의 생물종들이 완성되려면 졸라 엄청나게 긴 시간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학자들이 지구가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되었음을 서서히 확신하기 시작한다.




그럼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기 전까지 발생과 진화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던 지구 나이에 관해 당시 종교계의 눈치를 봐야 했던 생물학 본좌들의 고뇌를 간략하게 되짚어 보자.






생물의 발생과 진화에 관해 고민하다







존 레이 John Ray (1628~1705)




옆집 사는 외국인 강사 이름이 아니다. 존 형님은 17세기 가장 위대한 박물학자이자 생물 분류학의 토대를 마련한 형님이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린네는 어쩌면 편집증 환자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구를 정복이라도 할 기세로 1677년 [조류학], 1686년 [어류의 역사], 1686년 [식물의 역사], 1710년 [곤충의 역사]를 출판하며 생태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종(種)을 분류학의 기본단위로 확립했다는 점이다. 즉, 현대적 의미로 종이라는 개념을 확립한 이는 존 형님이다.







식물의 역사는  1686년, 1688년, 1704년에 걸쳐 3권을 출간한다.
여기에는1만 8천 가지 이상의 식물들을 각각의 계통, 형태학, 분포, 서식 등을
기준으로 분류했을 뿐만 아니라 약으로의 효용과 새싹의 발아 과정 등
식물의 성장과 관련된 특징들도 기술해 놓았다.






하지만 존 형님은 신앙심이 깊었다. 그는 창조에 대한 성경의 말씀과 자신의 연구에서 오는 괴리감에 힘들어했다. 개별창조이론으로 보기엔 생물은 너무도 다양했다. 예를들어 하나님은 벼룩을 창조할 때 조차 개벼룩, 사람벼룩, 고양이 벼룩 등 아주 세세하게 창조했다는 소리인데 이게 아무리 생각해도 좀 구렸다. 하지만 순정파였던 존 형님은 결국 1691년 [창조에서 신의 지혜 Wisdom of God in the Greation]를 발표하며 창조설을 받아들이고 이를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창조에서 신의 지혜]

존 형님은 신을 뿌리칠 수 없었던 로맨티스트였던 거시다! 








칼 린네우스 Carl Linnaeus (1707~1778)




분류학의 본좌답게 편집증적인 성격을 지녔던 린네 형님은 오늘날도 쓰이고 있는 ‘이명식binomial’ 명명 체계를 확립한 사람이다. 그 덕분에 이후 후배 동식물학자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롭게 발견한 종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은 19세기 들어 종의 관계와 진화법칙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원천이 된다.




이명식binomial이란 생물분류의 기본단위를 종(種, species)으로 하여, 속(屬, Genus)-과(科, Family)-목(目, Order)-강(綱, Class)-문(門, Phylum) 등의 하위 단계로 생물을 분류하고 이를 토대로 생물 각 종의 이름을 그 종이 속하는 속명(屬名)과 그 종 자체의 이름(種名)을 병기하여 2단어로 구성하는 명칭이다. 예를 들면, 사람의 학명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인데, Homo는 속명이고, sapiens는 종명이다. 이 때 속명의 머리문자는 대문자로, 종명의 머리문자는 소문자로 나타낸다.








이명식이 사용되기 전에는 나라마다 지방마다 같은 생물을 지칭하는 이름은


 다양했으며 그 이름 또한 매우 복잡했다.


프랑스 생물학자이자 박물학자였던 Brisson Mathurin Jacques (1723~1806)은


사자를 Felis cauda in flocum definente(꼬리의 끝에 뭉치가 있는 고양이)로,


호랑이를 Felis flava maculis longis nigris variegata(길고 검은 무늬를 가진


황색고양이)로 명명했다. 현재 이명식에 의하면 사자는 Panther leo,


호랑이는 Panthera tigris로 명명한다.


이 얼마나 심플한가!







린네 형님의 히트작 [식물종 Species Plantarum]




린네 형님은 1735년 [자연체계 Systema Naturae]를 출판하지만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준 책은 1753년에 출판된 [식물종 Species Plantarum]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이명식을 언급한다. 그리고 1758년 이 책의 10판 1권에서 이명식을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포유류, 영장류, 호모 사피엔스 등의 용어도 정의한다.




린네 형님은 이명식 말고 또 하나 중요한 발걸음을 내딨는데 그건 당시로선 불경스럽게도 생물의 분류에 ‘인간’을 처음으로 포함시킨 것이다. 게다가 형님은 대담하게도 인간이 원숭이들과 똑같은 속(屬)에 속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현재 DNA에 따르면 사람은 침팬지로 분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린네 형님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기독교에 대들 정도의 깡은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한 속의 유일한 구성원으로 분류하였고 지금까지 호모Homo 속(屬)에는 인간 단 하나의 종만 있다.







1746년 출판한 자신의 [스베치카의 동물들Fauna Svecica]에서 그는


사람과 원숭이를 다르게 분류해야 할 과학적 특징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위에 언급했듯이 린네 형님은 기독교를 믿었고 따라서 개별창조이론을 믿고 있었다. 그는 현재 지상에 존재하는 종의 수는 태초에 신이 창조했던 종의 수와 같다고 믿었다. 그러나 린네 형님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가는 자료와 증거들을 보며 개별창조이론이 뭔가 구리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결국 말년에는 종들 사이의 구별과 종 내부의 다양성이 모두 시간에 의해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품기 시작한다.




영진공 self_fish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2009년은 다윈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는 ‘다윈의 해’다.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만든 주인공의 해답게 올해 초 영국에서는 재밌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1896년에 창립한 BHA는 현재 약 6천 5백 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주로 과학, 인문 계통의 지식인들로 구성되었으며 의회에도 


100명 이상의 의원이 지지그룹을 형성해 성공회가 국교인 


영국에서 무종교인들의 권익을 돕고 있다.






리차드 도킨스가 부회장으로 있는 영국인본주의자협회(British Humanist Association, 줄여서 BHA)에서는 2008년 12월 말 영국 각지를 운행하는 버스에 도발적인 광고를 내었다. 회원과 일반인들에게서 기부를 받아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다. 걱정 말고 인생을 즐겨라(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ying and enjoy your life)”라는 광고를 한 것이다. 재밌게 보였는지 곧이어서 스페인의 무신론 단체에서도 유사한 버스 광고를 내보냈다.







사진 속 이는 그 유명한 리차드 도킨스.


리차드 도킨스는 [눈먼 시계공],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등의 


저자며 현재 옥스퍼드 대학의 석좌교수로 있다. 대표적인 진화론의 


지지자로서 유신론자들을 향해 날카로운 단어들을 집어던지는 생물학계의 


진중권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10월 BBC와 인터뷰에서는 “종교는 세금감면, 


노력 없는 존경, 공격당하지 않을 권리, 어린이들을 세뇌할 권리 등에서 


무임승차하고 있다”라며 또한번 종교계를 향해 광속구를 내질렀다. 






그러자 발끈한 이가 나타났다. 그는 런던 소재의 러시아 전문 위성방송 ‘러시아 시간’의 사장 알렉산더 코로브코였다. 그는 BHA의 광고에 맞서 “신은 있다. 믿어라! 걱정 말고 인생을 즐겨라(There is God. Believe! Don’t Worry. Enjoy your life!)”라고 적어서 런던을 운행하는 버스에 광고를 하였다.










인간의 유전자 지도가 완성됐네, 지구는 물론 우주의 시작과 끝도 밝혀버리겠네 하는 2009년에도 신의 유무를 둘러싼 과학과 종교의 맞짱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리고 이 논란의 중심에는 다윈의 진화론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래서 다윈의 해를 맞이하여 진화론으로 촉발된 신은 ‘있다! 없다?’의 시끄러운 떡밥의 역사를 한번 훑어보기로 하자.







지동설을 처음 주장한 코페르니쿠스. 그의 걸작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출판을 주저한 것은 흔히 알고있는 종교적 핍박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당시의 과학으론 자신의 이론을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롱거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16세기가 되자 과학사에는 그 유명한 코페르니쿠스가 짠하고 나타난다. 그는 우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닌 태양이라는 지동설을 발표하면서 기독교가 그려놓은 세계관에 깽판을 놓기 시작한다. 17세기에는 과학의 본좌 갈릴레오가 다시한번 지동설로 쐐기를 박는다. 코페르니쿠스는 그저 이론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지동설을 일반인들에게 이해시킬 수 없었고 기독교 역시 심기가 불편한 정도였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달랐다. 그의 주장은 관측을 토대로 하였기 때문에 기독교는 입 닥치고 버로우 타라는 협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양립할 수 없는 과학과 종교의 대립은 이후 더욱 가열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한편에서 둘은 동맹을 맺게 된다. 과학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설계를 탐구함으로서 위대한 설계자와 그의 섭리를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과학과 종교의 허니문은 영국에서 더욱 튼튼한 기반을 확보한다. 





허니문은 19세기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1802년 설계는 설계자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을 담은 윌리엄 팰리의 [자연신학, 혹은 자연 현상에서 모은 신의 존재와 속성에 관한 증거들 (Nature Theology, or Evidence of the Existence and Attributes of the Deity Collected from the Appearances of Nature)]이 출간된다.




 







내용을 짧게 소개하자면.


“길 가다가 떨어진 시계를 보면 당연 시계공이 만들었겠구나 생각하는게 당연지사. 그렇다면 그런 시계보다 훨씬 복잡한 생물들을 보면 당연히 전능한 신이 만든 것이 분명하지 않겠느뇨~”




그렇다. 이 책은 현재 창조론의 버전업인 지적설계론의 토대로 쓰였으며 리차드 도킨스의 책 [눈먼 시계공]에서의 ‘시계공’은 바로 윌리엄 펠리의 그 시계공인 것이다.




이 책은 당시 젊은 찰스 다윈은 물론 과학자들과 일반인들에게 종교와 과학은 결국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상을 심어주었으며 현재 까지도 진화론을 공격하는 창조론자들의 대들보가 되고 있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