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를 좋아한 화가의 생물학적 발견, [2부]



 

 


 


 


* 1부에서 이어집니다. *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수컷 공작의 과시 쩌는 꼬리깃은 마치 3류 로맨스 영화 속 사나이의 순정과도 같다. 오로지 암컷을 꼬셔서 대업(?)을 이루겠다는 마음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화려해서 눈에도 잘 띄고, 무겁고 거추장스러운데다 ‘공기역학이란 먹는건가요 우걱우걱’한 듯한 꼬리깃은 천적을 피해서 날기는 고사하고 뛰어서 도망가기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초창기 진화론자들에게 이런 수컷 공작의 미련 곰탱이 같은 모습은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래서는 암컷을 꼬시기도 전에 천적의 한 끼 식사가 될 것은 뻔해 보이는데 대체 왜 수컷 공작은 이렇게 위험천만한 방식을 택한 것일까? 그리고 화려한 깃털을 택한 초창기의 수컷들은 대부분 쉽게 천적들에게 잡아 먹혔을텐데 어떻게 이런 비실용적인 부분들이 진화한 것일까?


 


현재의 진화론은 ‘생존’이란 것도 결국 번식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에 따라 수컷 공작의 꼬리깃은 생존보다는 번식에 더 치중한 결과이다. 최근엔 꼬리깃의 화려하고 대칭적인 무늬는 암컷에게 보다 건강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공작새 수컷의 진짜 속사정이야 어찌됐건 이러한 논의들의 당연한 전제는 수컷의 꼬리는 암컷을 꼬시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누구도 이 점에 관해서는 의심치 않았으며 관찰을 통해서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세이어 형님에게 그건 개풀 뜯어 먹는 소리였다. 세이어의 눈에는 수컷 공작의 꼬리란 위장을 위한 것이었다! 열 번 떠드는 것 보다 한번 jpg파일을 보여주는 게 낫다고 했던가. 세이어는 자신의 주장을 알아먹지 못하는 우매한 이들에게 직접 그림을 그려 눈앞에 펼쳐 보였다.


 


 


 




Abbott Handerson Thayer, Peacock in the Woods, 1907


 


 


 


그런데 공작 수컷이 그토록 위장이 잘 되어 있다면, 칙칙한 암컷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일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세이어를 영구히 조롱거리로 만든 작품은 공작이 아니라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위장한” 채 호수에서 먹이를 찾는 홍학들을 그린 것이었다.


 


 


 




Abbott Handerson Thayer,

White Flamingos, Red Flamingos: The Skies They Simulate, 1909


 


 


 


“전통적으로 ‘눈에 확 띄는’ 이 새는 가장 중요한 순간에 체색을 통해서 완벽하게 자신을 지운다. 그들은 사람이 으레 그들을 보는 위치인 위에서 보았을 때는 대부분 눈에 잘 띄지만, 그들의 체색은 이른 아침과 저녁의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소실되는’데에 경이로울 만큼 적합하다.” (Thayer)


 



 


 

도대체 홍학들은 왜 붉은 하늘을 배경으로 사라져야 하는걸까? 그저 머릿속이 아득해져 온다.



세이어는 독단이라는 우물에 빠져 그 안에서 보이는 하늘이 세상의 전부인 냥 자기 이론만이 유일한 법칙이라는 착각에 빠져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물들의 모든 무늬들이 위장과 은폐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이어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그린 또다른 작품들.

그림은 정말 잘그렸는데 …..



 


 


아마존에는 헬리코니드Heliconidae라는 화려한 나비 종이 있다. 이 나비들은 마치 포식자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화려한 색깔로 치장한 날개를 펄럭이며 유유자적 날아다닌다.

 

실제로 헤리코니드 종은 아주 강한 냄새를 풍기며, 몸이 잘리면 강한 냄새의 체액이 나온다. 이 체액은 피부에 닿으면 염증을 일으킨다. 헬리코니드는 시계꽃passiflora종의 꽃만을 먹는데 이 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시안화물을 포함한 독소를 만들어낸다.

 


헬리코니드는 이 꽃을 먹음으로써 유독한 성질을 획득한 것이다. 이렇게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비들이 포식자들에게 잡혀 비명횡사하는 순간에도 헬리코니드 종 나비들은 자유롭게 꽃밭을 노닐 수 있었다.


 


 


 




시계꽃 종인 Bluecrown Passionflower


 


 


 


그런데 아마존에는 헬리코니드와 비슷한 무늬를 가진 레프탈리스Leptalis 나비가 있다. 이 나비는 상대적으로 맛이 좋기 때문에 포식자들이 환영하는 나비였다. 본의 아니게 맛있게 태어난 이 나비들은 난처해졌다. 힘이 센 것도 아니요 독이나, 침이 있는 것도 아니니 뭐든 하지 않으면 종의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질 판이었다.


 


그래서 이 나비들이 택한 것은 의태였다. 맛대가리 없는 헬리코니드의 무늬를 따라함으로서 포식자가 자신들을 맛대가리 없는 헬리코니드라고 착각을 하게 만든 것이다. 오늘날 이 이론은 당시 연구했던 과학자인 베이츠의 이름을 따 ‘베이츠 의태Batesian mimicry’라고 부른다.


 


즉, 맛이 없거나 독이나 침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는 거친 녀석들의 무늬와 색깔을 흉내내어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의태의 예, 꿀벌과 꽃등에.

어린 시절 종종 꿀벌이 꽃등에 인 줄 알고 잡았다가 쏘였던 적이 있다.

 






 

당연히 세이어는 의태 개념에 아예 관심이 없었다. 그는 헬리코니우스 무늬도 경고색이 아니라 앉아 있을 때 잎으로 위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비 따위가 어디서 건방지게 경고색 따위를 가지고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게다가 맛이 있는지 없는지 누가 판단을 한단 말인가. 발끈한 세이어는 1903년, 베이츠의 의태 이론을 논박하겠다는 목적으로 가족을 데리고 헬리코니우스가 있는 섬으로 탐사를 갔다. 그의 딸 글래디스는 이렇게 적었다.



 


 



“아버지의 특수 임무는 나비를 맛보는 것이었다! …

(중략) … 아버지는 실제로 나비들을 맛보았는데, 맛에서 아무런 차이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행동거지가 얄미워도 분명한 점은 세이어는 입만 싼 멍청이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건방을 떠는 와중에도 그는 위장의 또하나의 메커니즘인 분단색disruptive coloration 이론을 발견하였다.


 


 


 




 


 



 

사물마다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윤곽은 그 사물을 알아차리는데 쉽고 간단하면서도 매우 큰 정보를 준다. 만약 원시인이 길을 가다 사자를 마주쳤는데 이게 내가 기억하는 사자인가 싶어서 그 생김새를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간 단숨에 뼈와 살이 분리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멀리서도 이놈이 사자인지 아님 내가 사냥해야 할 사슴인지 빠르게 알아채야만 했다.

 


이때  사물의 고유한 윤곽은 멀리서도 그 사물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래서 많은 동물들이 본능적으로 사물의 윤곽을 기억하고, 자신이 아는 사물의 윤곽과 끊임없이 비교한다. 은폐색의 메커니즘은 바로 이 윤곽을 없애는 것이다. 배경과 비슷한 색깔과 무늬를 이용해 자신의 윤곽을 배경과 섞어 버림으로써 눈 앞에서 사라지는 착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큰 동물과 작은 동물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작은 동물일수록 윤곽을 없애는 것은 쉽다. 게다가 그들은 종종 오랜시간을 꼼짝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큰 동물은 다르다. 커다란 형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윤곽들은 왠만해선 은폐하기 힘들다. 그들이 제아무리 노력해도 대부분은 바로 들키고 말 것이다. 그래서 큰 동물들은 작은 동물과는 다른 메커니즘이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분단색이다. 분단색은 어떤 의미에서 방어피음이나 위장색과는 정반대이다. 분단색이란 커다란 윤곽을 없앨 수 없다면 상대가 인식하기 어렵게 윤곽을 임의적인 덩어리로 쪼개는 것이다.


 


 


  




가봉살무사Bitis gabonica를 보면,

납작한 머리가 들쑥날쑥한 두 덩어리로 쪼개지고


굵은 밧줄이 등을 따라서 뚜렷이 뻗어 있는 것 같다. 


낙엽이 깔린 땅에서는 이 뱀의 윤곽이 사라지기 쉽다.


 





세이어는 분단색을 “동물의 몸에 아무렇게나 나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엄격한 변장 법칙에 따라서 배치된, 대비되는 그늘과 색깔 덩어리들이 이루는 뚜렷한 무늬”라고 정의했다.



세이어는 이처럼 동물들의 무늬를 위장과 은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이어의 법칙은 자연의 위장 중 한 측면만을 가리킬 뿐이다. 세이어의 문제점은 자연의 어떤 타당하고 진정한 원리가 반드시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가정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사실 꼭 그렇지는 않은데, 생물학은 예외의 사례로 가득한 과학이다. 생물들의 무늬 역시 위장의 기능 뿐만 아니라 경고색이나 의태(다른 동물의 무늬를 모방하는 것) 기능을 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세이어는 위장을 제외한 다른 주장들을 돌파리 의사의 처방전으로 보았다. 스컹크나 말벌과 같은 동물들의 무늬들도 경고색이 아닌 위장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말벌은 햇빛과 그늘에 잠긴 녹색 식생과 노란 꽃이라는 평균 배경에 놓일 때 근원적으로 그리고 아주 철저히 지워진다.
” (Thayer, 1909)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여야 하지만 세이어는 숙이기는 커녕 고개를 바싹들고 끊임없이 떠들며 상대를 무시하고 자기 과시를 하는 밥맛 중에도 ‘상밥맛’이었다.


 


당연히 이런 행동거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법이다. 세이어는 세계적으로 자신의 적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기어코 그는 미국 전직 대통령의 혐오 대상이 되고야 말았다.   



 


발췌 및 편집:

    피터 포브스 저, 이한음 역, [현혹과 기만], 까치, 2012


 


영진공 self_fish


 


 


 


 


 


 


 


 


 


 


 


 


 


 


 


 


 


 


 


 


 


 


 


 



 

혹파리의 패륜적 인생플랜 (1/2)

 

 


 


 


 




나? 혹파리!!


 


 

파리 중에는 혹파리라는 녀석이 있다. 똥이 아닌 균류(fungi), 그중에서도 버섯을 집이자 음식삼아 살아가는 녀석이다. 녀석을 언급하는 이유는 버섯이라는 유별난 음식 취향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관점으로 보자면 오줌 지릴 정도로 살벌한 번식방법 때문이다.

 


혹파리의 위장에 대면 버섯은 한 두 끼 만에 먹어치울 수 있는 양이 아니다. 버섯 한 개는 한동안 놀고 먹으며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는 양이다. 이렇게 일확천금을 얻은 혹파리는 풍족한 삶 속에서 베짱이 마냥 실컷 춤추고 노래 부르며 풍족한 삶을 살다 갈 것 같지만 현실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진다.

 

혹파리들은 새로운 버섯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갑자기 번식에 미친 듯이 열을 올린다.

 

 



 


 

혹파리는 먼저 알을 낳는데 여기서 모두 암컷인 새끼들이 태어난다. 근데 이 새끼들은 성충으로 자라지 않고 애벌레나 번데기 상태로 머무른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몸 속에서 새끼들을 기르기 시작한다.

 

근데 경악스럽게도 요넘들이 얌전히 몸 밖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미를 내부에서부터 먹어치우면서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나온 새끼들의 몸속에서는 이틀 내에 새로운 새끼들이 태어나 또다시 어미를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이런 끔찍한 패륜의 사슬은 식량이 떨어져야 끊어지게 된다.

 

버섯이 줄어들면 혹파리는 모두가 수컷이거나 암수가 혼합된 새끼를 낳기 시작하고 결국 굶주리게 되면 정상적인 파리로 성장하여 다시 다른 버섯을 찾으러 날아간다.

 


 




 


 


근데 자연에는 이런 패륜 곤충이 또 있다. 미크로말투스 데빌리스(micromalthus debilis)라는 딱정벌레 역시 혹파리와 똑같은 패륜적인 인생 플랜을 가지고 있다.


 


이 벌레는 축축하고 썩은 나무를 먹고 사는데 이들도 먹을 것이 지천에 널려 있을 때는 무성 생식을 하며 암컷만을 낳는다. 요놈의 새끼들도 몸 안에서 성장하고 결국 속에서 엄마를 먹어 치우며 나온다. 새끼들은 미성숙한 상태에서 또다시 번식을 하고 그 새끼들은 다시 그들의 몸을 안에서부터 먹어치운다. 그러다 먹을게 떨어지면 다시 수컷과 암컷을 낳고 정상적으로 성숙한 개채로 성장한다.




도대체 왜 요놈들은 이렇게 한 여름밤의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살벌한 방식으로 번식하는 것일까? 왜 풍족한 식량을 앞에 두고 즐기진 못할 망정 죽음을 감수하면서 까지 번식에 목을 메는 걸까? 이러한 궁금증에 관한 올바른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들이 호로자식이란 오명을 뒤집에 쓰면서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번식함으로써 얻는 이점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어익후! 뉘신지??


 


 



다윈 할아버지가 진화론을 들고 나왔을 당시에는 생물들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선 그에 맞게 형태를 개선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진화론도 발전을 거듭하면서 버전업을 하게 된다.



 

그 중에는 이론 개체군 생태학(theoretical population ecology)이란 학문도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진화론자들은 생물들이 크기와 모양을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 시기와 각각의 활동, 예를 들면 먹이 섭취, 성장, 번식 등에 들이는 에너지량을 조절해서도 환경에 훌륭히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부리의 형태를 개선한 핀치의 부리


 



 


이러한 조절 작용을 ‘생활사 전략(life history strategy)’이라고 부른다.


이에 관한 유명한 이론으로는 로버트 헬머 맥아더(Robert Helmer MacArthur, 1930~1972)와 에드워드 윌슨이 1960년대에 개발한 R선택(r-selection)과 K선택(k-selection)이론이 있다.



 


 


 



 


 


 


영진공 self_fish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4부]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1부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2부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3부

앞서 얘기했지만 진화의 개념은 혜성처럼 등장한 다윈이 안쪽 호주머니에서 불쑥 꺼내놓은 이론이 아니다.

다윈 이전에도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생물의 발생에 대한 논의들이 있어왔다. 하지만 당시의 유럽은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공구리 치던 시절이었다. 그 세계관은 신이 식물과 동물의 종들을 각각 별개로 창조하였으며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낳는다는, 즉 종은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또 노아의 홍수와 같은 대재앙이 우리가 관찰하는 지질학적, 생물학적 환경을 설명해 준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신의 경이로운 솜씨를 기리고자 그의 피조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생물오덕질이 하나의 유행이 된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다. 생물의 표본들이 한곳에 모이면서 생물 전반의 큰 그림을 그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이렇게 소심하고 쪼잔할 정도로 다양한 생물들을 신이 일일이 창조했다는 생각에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커다란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깨뜨려야 될 또 하나의 벽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지구의 나이에 관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생물들이 진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지구의 나이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다



제임스 어셔James Ussher(1581-1656)

지구의 나이에 대해 처음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한 이는 제임스 어셔(James Ussher)대주교였다. 그는 1581년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에서 태어났으며 26살 약관의 나이에 더블린 신학대학의 신학과 학과장이 되었고 1925년에 아일랜드 영국국교회의 최고 고위직인 아르마 대주교(Archbishop of Armagh)가 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학창시절 반장 한번 못해본 우리들로서는 처세술에 능했던 얍샵한 인물일거야 하며 자위하고 싶지만 학생 때부터 역사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받았으며 수많은 역사책을 탐독했고 방대하고 권위있는 여러 권의 책들을 저술하는 등 학자의 면모도 가진 똑똑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영문판으로 나와 인터넷에서 팔리고 있는 Annals of the World

그가 집필했던 책 중 주목할 것은 1650년에 출간한 Annals of the World라는 라틴어로 쓴 책으로 에덴동산에서부터 AD 70년까지의 모든 주요한 사건들을 망라한 세계 역사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에 실려 있는 아담의 후손 나이를 차례로 더하는 계산을 통해 지구는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정오에 탄생했다고 발표했다. 지금을 기준으로 약 6014년 전인 것이다. 당시로서는 성경이 곧 진리였던 시대였기 때문에 매우 그럴 듯한 이야기로 들렸겠지만 지금 우리들로서는 신을 향한 열망과 지식을 향한 열망을 잘못 비벼놓으면 얼마나 어이없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벌써 날 잊은건 아니겠지?!

생물학자 진영 쪽에서는 재벌2세 뷔퐁형님이 뉴턴의 프린키피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지구의 나이를 계산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지름이 약 4천만 피트인 우리 지구와 똑같은 크기의 빨갛게 달궈진 쇳덩이는 6천 년과 같은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거의 식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5만 년 이상이 흐른 다음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라고 말만 번지르하게 해놓고는 지구가 식는 데 필요한 시간을 계산하지는 않았다.

뷔퐁형님은 태양에 혜성이 충돌 하면서 떨어져 나온 물질이 지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기의 지구는 태양과 같이 뜨겁게 용융된 상태였고 생명이 존재할 수 있을 때까지 서서히 냉각된 것이며, 이 때 냉각에 걸린 시간은 6,000년 가지고는 턱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뷔퐁형님은 철구슬을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가열한 다음,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식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는 실험을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지구와 크기와 비슷한 구가 식는데 걸리는 시간을 외삽하는 방식으로 측정했다. 그 결과 뷔퐁형님은 지구의 나이가 최소한 7만 5천 년은 되어야 한다고 [자연사 Historire Naturelle]에서 언급했다. 지금보자면 실험이 매우 5학년 3반 과학실험스럽고 현재 최고 측정치인 45억년에도 훨씬 못미치지만 성경의 굴레를 벗어나 과학만으로 지구의 나이를 측정한 시도에 의의가 있으며 또한 제임스 어셔가 추정했던 지구의 나이보다 훨씬 많았다.

물론 이런 뷔퐁의 도전을 하나님의 행동대장을 자쳐하는 기독교에서 미소로 화답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뷔퐁은 ‘철학적 추론’이라는 멋들어진 현학적 핑계를 대며 기독교의 철퇴를 피해 간다. 뷔퐁의 다음 세대에는 수학자이자 푸리에 해석으로 유명한 조세프 푸리에가 등장해서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는데 뷔퐁의 측정치는 명함도 못내밀 정도의 어마어마한 수치가 나오게 된다.
 


조세프 푸리에Jean Bapiste Joseph Fourier(1768~1830)



푸리에는 1768년 프랑스 오세르(Auxerre)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역학에 관심이 많았고 이에 관한 수식들을 통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뷔퐁보다 더 정확하게 지구가 식는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수치에 너무 놀랐는지 푸리에는 지구의 나이를 계산할 수 있는 수식만을 남겼다.

이 수식에 따라 계산을 하면 지구의 나이는 약 1억년이 나오게 된다!  기독교에선 6,000년이요 고작 7만 5천년이라고 발표한 뷔퐁도 해꼬지 당할 까봐 ‘철학적 추론’이라며 핑계를 대는 마당에 1억년 이라니. 푸리에가 놀랄만도 했다. 푸리에는 이외에도 뷔퐁이 지나쳤던 요소도 제대로 포착한다. 지구의 단단한 껍질은 그 속의 융해된 물질들을 둘러싸고 있어 단열작용을 하는 담요처럼 열의 흐름을 가로 막으며, 따라서 지구의 표면은 식었지만 그 속은 여전히 녹아 있는 상태라는 사실이었다. 


지구의 나이를 얘기하다
– 격변론(catastrophism)과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 –


이 두 용어는 상대편의 개념을 부정하기 위해 쓰인 단어이기 때문에 ‘~론’이니 ‘~설’이니 따위에 지레 놀라서 겁먹을 필요가 없다.

핵심은 단지 지구의 나이가 많느냐 적느냐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수명이 24시간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오늘 밤 클럽을 가서 헌팅을 성공하느냐는 일생의 가장 큰 사건일 것이다. 왜냐면 자칫 어설프게 뻐꾸기 날렸다가 망치면 마법사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명이 1000년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꼭 오늘 헌팅에 성공 못해도 내일 다시 시도해도 되고 한 달 뒤에 시도해도 되는 등 천천히 시도해보면 된다. 즉 오늘 클럽가서 헌팅하는 것은 내 인생에 있어 큰 사건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지구의 나이가 6,000년 이라고 가정한다면 대홍수나 운석의 충돌, 빙하기 등은 지구에게 있어 ‘격변’일 것이다. 하지만 지구의 나이가 46억년이라면 대홍수나 빙하기, 대지진 따위는 늘상 있어왔던 ‘동일’한 일들의 반복일 것이다.


하루살이에게 저녁노을은 커다란 격변이지만 인간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일 뿐이다

단지 성경의 연대기만을 토대로 지구의 나이가 6,000살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은 화석과 지층들로부터 발견되는 증거들 앞에서 똥꼬가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해양생물 화석이 고지대에서 발견되면서 땅이 오랜 시간 융기했음을 암시하였고 현재는 볼 수 없는 기괴한 생물들의 화석은 생물이 멸종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처럼 새로운 증거들이 쌓여갔지만 그래도 기독교적 세계관의 그늘은 짙었다.

신앙심이 깊은 자연학자들은 이 증거들과 성경이 얼추 말이 맞도록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지구가 짧은 기간 동안에 대격변을 겪으면서 지금과 같은 세계가 만들어 졌다는 격변론이었다. 그리고 이 격변론에 힘을 실어준 것은 바로 리마르크를 왕따 놓았던 퀴비에 형님이었다.


끝판왕 퀴비에.
이번에도 퀴비에 형님은 다음 편으로.


 


*** 다음 편에서 계속 ***



 


영진공 self_fish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3부



 

*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1부


*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2부

2. 생물의 진화를 생각하다



 



뷔퐁 Count de Buffon(1707~1788)



프랑스의 자연학자이며 파리 왕립 식물원의 총책임자였던 뷔퐁백작은 귀티가 좔좔흐르는 사진에서 느껴지듯 벼락부자 아버지를 두었던 재벌 2세 출신이었다. 부잣집 가정사가 늘 그렇듯 이 집안도 재산문제로 시끄러웠다. 재혼하려는 아버지와 뷔퐁과의 재산싸움이 있었고 이 싸움에서 뷔퐁이 승리하며 많은 재산을 차지한다. 게다가 뷔퐁은 헐랭이 재벌 2세가 아니었다. 사업수완을 발휘하며 여러 사업에 투자를 하여 많은 돈을 벌어들이기도 한다.




이렇게 돈이 차고 넘치는 뷔퐁형님이었지만 유별나게도 자연사 공부에 열중 했다. 뭐 느긋하게 자연사 책이나 뒤적이며 지적인 모양새나 풍길 요량인가 싶었지만 그는 정말 부지런하고 열정적으로 자연사를 파고들었다. 형님은 1749년부터 1804년에 걸쳐 무려 44권에 달하는 책을 집필하며 다산(?)의 제왕스런 면모를 보여준다. 이 중 [자연사 Historire Naturelle]는 그의 가장 기념비적 작품이자 과학사에 있어서도 의미있는 작품이다. 이해하기 쉽게 쓰인 덕분에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끌며 베스트셀러가 된다.



[자연사 Historire Naturelle]


독창적인 이론은 없지만 풍부한 자료들을 끌어모아 체계적인 형태로 정리함으로써 


여러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연구의 시발점을 제공했고, 사람들에게 박물학자 붐을 


일으키는 자극제가 되었다.



뷔퐁형님은 과학 행정가이자 대중적인 활동가로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지만 아쉽게도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형님은 종들은 진화한다고 주장했던 초기 진화론자 중 한 분이었다. 형님은 진화를 과거의 튼튼한 조상으로부터 점점 퇴화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생명의 창조에 개입하는 것은 오로지 열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거의 지구는 온도가 높았기 때문에 생물의 창조가 더 쉬웠고, 고대의 뼈에서 보듯 당시의 생물 역시 그렇게 컸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연사] 4권에서 당나귀는 말이라는 종에서 진화한(그러니까 퇴보한) 후손이며 


원숭이도 인간의 종에서 진화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뷔퐁형님은 돼지의 발가락뼈나 꼬리처럼 쓸모없는 부분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연은 창조할 때 
궁극적인 목적 따위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며
지적 설계론에 맞불을 놓는다.



방향이 잘못되긴 했지만 뷔퐁형님은 생물의 진화를 인정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런 진화를 가능케 하는 메커니즘을 설명하진 못했다. 많은 사람들은 다윈이 진화라는 개념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듯 진화의 개념은 휠씬 전에 등장했다. 다윈이 본좌에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진화의 매커니즘을 훌륭하게 설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다윈보다 앞서 진화의 매커니즘을 설명하였던 분이 계셨다. 바로 비극의 주인공 라마르크 형님이시다! 두둥~


장 밥티스트 라마르크Jean-baptiste Lamarck (1744~1829)

드디어 생물학계 최고의 비극의 주인공인 라마르크 형님이 등장하셨다. 다윈보다 먼저 진화의 메커니즘에 눈을 뜬 훌륭한 형님이지만 ‘기린’이라는 포유동물 하나로 인해 그의 업적과 이론들은 모두 버로우 되고 말았다. 그러나 형님은 결코 기린이란 단어 하나로 평가되어서는 안될 인물이다. 라마르크 형님의 진화이론은 비록 틀리긴 했지만 후배 진화론자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다윈 역시 라마르크 형님의 이론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형님의 이론을 받아들여 자신의 진화이론을 전개해 나간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학계는 진화 메커니즘을 둘러싸고 다윈주의와 라마르크주의로 나뉘어 박터지게 싸우게 된다. 이 싸움에서 다윈주의가 승리하면서 라마르트 형님의 이론은 찬밥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아아~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라마르크 형님은 ‘장-밥티스트 피에르 앙투안 드 모네 드 라마르크’라는 길고 긴 이름을 가진 프랑스의 별 볼일 없는 군소귀족 출신이었다. 군인, 은행원 등 초반 직업은 과학과는 멀어 보였지만 마음속엔 과학을 향한 알콜 램프를 태우고 있던 분이었다. 은행 일을 하는 틈틈이 의학, 생물학, 기상학을 공부했고 결국 책까지 집필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1776년에는 [대기의 주요 현상에 대하여]를,
1778년에는 [프랑스의 식물 flore-francaise]을 출판한다.
이 중 [프랑스의 식물]은 프랑스 식물의 분류에 관한 표준 교재가 되면서
식물학자로서 명성을 날리며 학술회 회원으로 선출되는데 큰 역할을 한다.

[프랑스의 식물]의 대박이후 은행일에서 손을 떼고 본격적으로 생물학계로 진출하게 되는데 이런 라마르크 형님 뒤를 봐준 이가 바로 재벌 2세 생물학자 뷔퐁이었다. 뷔퐁의 달콤한 사랑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 라마르크 형님은 1790년 프랑스 자연사 박물관에 입성하여 곤충과 벌레 분야의 연구 책임을 맡게 된다. 형님은 이 연구에서 무척추동물invertebrates이라는 이름을 창안하여 이들을 분류한다.

 

척추가 없는 친구들을 분류하고 무척추동물이란 이름을
붙여준 것은 다름아닌 라마르크 형님이었다.

지식에 대한 욕구가 많았던 형님은 생물학, 기상학, 물리학, 화학 등에 까지 관심이 많았고 그래서 참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써냈다. 그 중에는 라부아지에 본좌님의 이론에 반대되는 물리화학적 이야기를 논하는 책들도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형님의 글솜씨가 안드로메다스러웠기 때문에 대부분의 책들이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 형님이 택했던 직업들은 대개가 돈 안되는 명예직들이어서 일생동안 돈 걱정을 하며 살아가야 했고 말년에는 눈이 머는 등 순탄한 일생은 아니었다.


화학계의 본좌 라부아지에가 프랑스 혁명으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혁명사상에 동조적이었던 라마르크 형님은 다행히 화를 면하게 된다.

무척추동물을 분류했고 고생물학을 창시하였으며, 현대적 의미의 화석 용어를 고안하는 등 후덜덜한 업적을 이루어냈지만 역시 가장 손꼽히는 업적은 다윈보다 앞서 진화의 메커니즘을 제시한 점과 생물학이라는 학문의 체계를 세운 점일 것이다.

형님은 살아있는 생명체를 연구하는 과학으로서 생리학이나 해부학 등의 단편적으로 이루어지던 연구들을 독립된 분과학문으로 체계화하고 여기에 생물학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그리고 동물, 식물, 광물의 3개로 나뉘어있던 것을 동식물을 합친 생물계와 무기계로 재편성했다. 이후 생물계는 일관된 물리화학적 체계를 근거로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는 생기론이라 하여 생물체를 이루는 구성 물질과 무기체를
이루는 물질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물론 라마르크 형님도 생명체와 무기체는
엄격히 다르다고 주장했지만 생기론자는 아니었다.
형님은 생명체든 무기체든
그 구성물질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법칙은 동일하며 단지
이 구성물질들이 어떻게 조직화되어 있느냐에 따라 생명체와 무기체로 나뉜다고 주장했다.

라마르크 형님은 평생 동안 개체가 형질을 획득할 수 있다는 생각과, 그것이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진화의 방식에 대한 모델을 개발했다. 이런 생각이 처음 드러난 것이 1809년 발표한 [동물철학philosophie zoologique]에서인데 바로 책이 라마르크 형님을 지금까지도 기린의 아버지(?)로 기억되게 만든 악몽의 출발점이 된다.

그럼 어째서 [동물철학]은 논란의 장작더미가 되었을까?

라마르크 형님은 [동물철학]에서 진화의 메커니즘으로 2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환경의 상호 관계 속에서 필요성에 의해 기관을 창조하고, 그 기관은 사용할수록 강해지며, 사용하지 않을수록 퇴화된다는 용불용설이론과 둘째는 이렇게 획득한 것은 세대를 거쳐 자손에게 전달된다고 하는 획득형질의 유전설이다.



용불용설과 획득형질의 유전을 설명하기 위해 라마르크는 기린의 목을 예로 든다.
높이 있는 나뭇잎을 먹기위해 목을 길게 빼 용을 쓰다보니 목이 점점 늘어났으며
이렇게 획득한 형질은 유전이 되어 지금의 기린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모두 3부로 이루어져 있다. 위의 진화이론은 단지 1부의 내용일 뿐이다. 2부는 생명체와 무기물의 차이를 설명하는 일반 생물학, 3부는 심리 생리학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렇듯 [동물 철학]은 진화론에 국한된 것이 아닌 생물학이라는 학문의 기초를 명확히 세우고 이를 연장으로 심리학적 토대까지 세우려고 했던 거창하고 값진 기획 의도를 가지고 있는 저서였다. 


하지만 당시 이 책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이 책이 제대로 읽히기 시작한 것은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되고 사람들이 진화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부터였다. 그러나 라마르크 형님의 글솜씨는 훌륭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형이상학적 단어들이 너울거렸고 지독한 문어체를 구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읽고 나서도 머릿속에 내용이 접수가 되질 않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생물을 분석하는 데 사용된 물리화학적 이론들은 구닥다리였다. 이미 세상은 화학계의 본좌인 라부아지에의 화학이론들로 갈아탔는데 [동물철학]에는 18세기 화학이론이 적용되어 있었다. 게다가 [동물철학]에서 진화와 관련된 제1부만 발췌하여 번역되고 출판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결국 그의 책은 왜곡되어 단편적으로 수용되면서 알멩이는 없어지고 이해를 돕기 위해 등장했던 기린만이 살아남아 구천을 떠돌게 된다. 



라마르크와 다윈의 진화이론의 차이.
즉 기린의 목은 목적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일어난 변이가 아니라
우연히 발생한 목이 긴 돌연변이가 환경에 더 적합하였고 
그럼으로서 목이 짧은 기린은 도태되고 목이 긴 기린만 살아 남은 것이다.

 


 어쩌면 다윈과 라마르크는 참 비슷한 구석이 많다.
둘은 진화의 메커니즘을 제시하였고 그 예로 든 동물로 인해 놀림을 당해야만 했다.
  



라마르크 형님은 멸종되는 종은 없고 다만 다른 형태로 발전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단순한 단세포 생물에서 점점 복잡한 생물로 진화되었으며 이런 메커니즘으로 용불용설과 획득형질의 유전을 제시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진화의 과정에는 무척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한 인물이 발끈하고 튀어나오게 된다. 라마르크 형님은 사후에 다윈주의자들에게 시달렸지만 살아생전에도 만만찮은 상대에게 시달림을 당했다. 그를 괴롭힌 인물은 형님보다 늦게 파리 자연사 박물관에 들어온 후배였다. 그는 종은 변하지 않으며 단지 대격변으로 모든 종이 멸종하고 다시 생겨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유명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생물학자였다. 

그는 퀴비에였다.



영진공 self_fish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2부







과학혁명으로 체면을 구긴 종교계가 짱돌을 굴려 내놓은 것이 자연신학이었다. 자연신학이란 쉽게 말해 자연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며 인간들은 자연의 법칙을 연구함으로써 고귀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털끝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이론이다. 즉 과학은 신을 이해하는 하나의 도구라는 말이다.




자연신학은 과학자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종교는 계속해서 어깨에 힘주고 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과학혁명 이후에도 과학은 여전히 종교의 앞마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과학을 신을 이해하는 도구로 본 덕분에 기독교는 과학을 장려했다. 수도원 같은 곳에서는 과학에 몰두하는 성직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것도 신의 존재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였다. 특히 성경을 장르문학으로 분류시킬 수 있는 지구의 나이와 생물의 발생, 진화에 관한 문제에서 종교는 과학의 발목을 꽈악 붙잡고 있었다. 다른 과학 분야보다 생물학의 발전이 늦어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다윈 이전의 생물학 논란들




다윈 이전의 보수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생물의 기원을 대략 6000년 전에 하나님이 모든 생물들을 각각 별개로 창조하였다고 보았다. 즉 ‘강쥐는 태초에도 개새끼였으며 고냥이는 태초에도 고양이였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산이나 들판, 바다 등과 같은 지질학적, 생물학적 환경은 노아의 홍수와 같은 대재앙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현재 하마와 고래는 같은 조상에서 진화하였다고 밝혀져 있다.


하지만 개별창조이론으로 보면 하마와 고래는 태초에도 하마와 고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식물학, 자연사, 지질학과 같은 분야는 견본 수집 말고는 딱히 연구라고 할만한 활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과학혁명 후 물리학이나 천문학, 화학 등은 빡시게 이론을 세우고 실험을 하며 원리를 정립하는 등 학문의 체계가 잡혀갔고 당연히 그에 따라서 많은 법칙을 밝혀냈다.




하지만 생물학이나 지질학은 할게 없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저 있었기 때문에 이 분야에선 그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 들을 모으는 오타쿠만 있을 뿐이었다. 실제로 18세기에는 식물채집이 유행이었고 많은 부유한 아마추어 생물 오덕들에 의해 표본들이 수집되었다.




대항해시대를 맞이하며 역마살이 낀 유럽인들은 세계 구석구석으로 싸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동식물들을 수집했고 이러한 견본들은 런던, 파리, 스웨덴과 같은 중심지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 중심지에는 바로바로 그 유명한 분류학의 본좌인 뷔퐁과 린네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쏟아져 들어오는 표본들을 합리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분류 체계를 개발하기 위해 피똥을 싸는 노력을 기울인다.






나는 누군가 ... 여긴 어딘가 ...




수많은 표본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뜻하지 않게 생물 전체를 거시적으로 볼 수 있는 효과가 나타난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기리고자 그의 소중한 피조물들을 모았는데 이게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에 냉수를 끼얻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이다. 이러한 관찰과 증거들을 토대로 발생과 진화에 관한 새로운 이론이 등장하자 지구의 나이에 관해서도 의구심을 품는 이들이 생기게 된다. 새로운 이론이 전제하는 진화는 아주 작고 천천히 일어나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환경과 복잡한 구조의 생물종들이 완성되려면 졸라 엄청나게 긴 시간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18세기 말에 이르자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학자들이 지구가 성경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되었음을 서서히 확신하기 시작한다.




그럼 다윈의 진화론이 나오기 전까지 발생과 진화 그리고 이러한 문제들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던 지구 나이에 관해 당시 종교계의 눈치를 봐야 했던 생물학 본좌들의 고뇌를 간략하게 되짚어 보자.






생물의 발생과 진화에 관해 고민하다







존 레이 John Ray (1628~1705)




옆집 사는 외국인 강사 이름이 아니다. 존 형님은 17세기 가장 위대한 박물학자이자 생물 분류학의 토대를 마련한 형님이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린네는 어쩌면 편집증 환자로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지구를 정복이라도 할 기세로 1677년 [조류학], 1686년 [어류의 역사], 1686년 [식물의 역사], 1710년 [곤충의 역사]를 출판하며 생태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종(種)을 분류학의 기본단위로 확립했다는 점이다. 즉, 현대적 의미로 종이라는 개념을 확립한 이는 존 형님이다.







식물의 역사는  1686년, 1688년, 1704년에 걸쳐 3권을 출간한다.
여기에는1만 8천 가지 이상의 식물들을 각각의 계통, 형태학, 분포, 서식 등을
기준으로 분류했을 뿐만 아니라 약으로의 효용과 새싹의 발아 과정 등
식물의 성장과 관련된 특징들도 기술해 놓았다.






하지만 존 형님은 신앙심이 깊었다. 그는 창조에 대한 성경의 말씀과 자신의 연구에서 오는 괴리감에 힘들어했다. 개별창조이론으로 보기엔 생물은 너무도 다양했다. 예를들어 하나님은 벼룩을 창조할 때 조차 개벼룩, 사람벼룩, 고양이 벼룩 등 아주 세세하게 창조했다는 소리인데 이게 아무리 생각해도 좀 구렸다. 하지만 순정파였던 존 형님은 결국 1691년 [창조에서 신의 지혜 Wisdom of God in the Greation]를 발표하며 창조설을 받아들이고 이를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창조에서 신의 지혜]

존 형님은 신을 뿌리칠 수 없었던 로맨티스트였던 거시다! 








칼 린네우스 Carl Linnaeus (1707~1778)




분류학의 본좌답게 편집증적인 성격을 지녔던 린네 형님은 오늘날도 쓰이고 있는 ‘이명식binomial’ 명명 체계를 확립한 사람이다. 그 덕분에 이후 후배 동식물학자들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새롭게 발견한 종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자료들은 19세기 들어 종의 관계와 진화법칙을 확립하는데 중요한 원천이 된다.




이명식binomial이란 생물분류의 기본단위를 종(種, species)으로 하여, 속(屬, Genus)-과(科, Family)-목(目, Order)-강(綱, Class)-문(門, Phylum) 등의 하위 단계로 생물을 분류하고 이를 토대로 생물 각 종의 이름을 그 종이 속하는 속명(屬名)과 그 종 자체의 이름(種名)을 병기하여 2단어로 구성하는 명칭이다. 예를 들면, 사람의 학명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인데, Homo는 속명이고, sapiens는 종명이다. 이 때 속명의 머리문자는 대문자로, 종명의 머리문자는 소문자로 나타낸다.








이명식이 사용되기 전에는 나라마다 지방마다 같은 생물을 지칭하는 이름은


 다양했으며 그 이름 또한 매우 복잡했다.


프랑스 생물학자이자 박물학자였던 Brisson Mathurin Jacques (1723~1806)은


사자를 Felis cauda in flocum definente(꼬리의 끝에 뭉치가 있는 고양이)로,


호랑이를 Felis flava maculis longis nigris variegata(길고 검은 무늬를 가진


황색고양이)로 명명했다. 현재 이명식에 의하면 사자는 Panther leo,


호랑이는 Panthera tigris로 명명한다.


이 얼마나 심플한가!







린네 형님의 히트작 [식물종 Species Plantarum]




린네 형님은 1735년 [자연체계 Systema Naturae]를 출판하지만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준 책은 1753년에 출판된 [식물종 Species Plantarum]이다. 이 책에서 처음으로 이명식을 언급한다. 그리고 1758년 이 책의 10판 1권에서 이명식을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포유류, 영장류, 호모 사피엔스 등의 용어도 정의한다.




린네 형님은 이명식 말고 또 하나 중요한 발걸음을 내딨는데 그건 당시로선 불경스럽게도 생물의 분류에 ‘인간’을 처음으로 포함시킨 것이다. 게다가 형님은 대담하게도 인간이 원숭이들과 똑같은 속(屬)에 속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현재 DNA에 따르면 사람은 침팬지로 분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린네 형님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기독교에 대들 정도의 깡은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한 속의 유일한 구성원으로 분류하였고 지금까지 호모Homo 속(屬)에는 인간 단 하나의 종만 있다.







1746년 출판한 자신의 [스베치카의 동물들Fauna Svecica]에서 그는


사람과 원숭이를 다르게 분류해야 할 과학적 특징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위에 언급했듯이 린네 형님은 기독교를 믿었고 따라서 개별창조이론을 믿고 있었다. 그는 현재 지상에 존재하는 종의 수는 태초에 신이 창조했던 종의 수와 같다고 믿었다. 그러나 린네 형님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가는 자료와 증거들을 보며 개별창조이론이 뭔가 구리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결국 말년에는 종들 사이의 구별과 종 내부의 다양성이 모두 시간에 의해 변화하고 진화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품기 시작한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