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결결이 아름다운 첫사랑 이야기


박민규의 책을 재미있게 읽기는 하지만, 썩 박민규의 팬인 것은 아닌지라 사실 살까 말까 몇번 망설였던 책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다. 결론부터 말하지면, 나는 이 책이 박민규 특유의 ‘판타지’책이 아닐까 싶어 사기를 망설였는데, 누군가 ‘연애소설’이라고 알려주어 사게 되었다. 그리고 주말 내내 몇번을 여기 저기 발췌해 읽을 만큼 나는 이 책이 좋았다.

박민규 소설은 약간 나는 선호를 두게 되는게 “카스테라”같이 상징이 강하고 판타지가 가미된 것보다는 “삼미슈퍼스타즈의 (방금 수퍼스타스. 라고 표기했다가 고쳤다) 마지막 팬클럽”같이 땅에 발 붙이고 있는 배경과, 땅에 발 붙이고 있는 상징이 있는 소설이 더 마음에 든다. ‘우주적 농담’은 한 두번은 웃을만 한데, 장편소설의 처음 부터 끝까지 가기에는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암튼, 표지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제목만 보고, 나는 또 ‘우주적이면서 고딕적인’배경의 거대한 농담을 하는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 내용은 그저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에 있는 그 배경, 제대로 묘사되었다고 믿겨지는 그 시절에 대한 묘사. 그리고 결결이 아름다운 첫사랑 얘기에 그만 확 빠지고 말았다.

사람마다 감상은 아마 다 다를 것이다. 연애담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자기 연애랑 비슷하면 더 감동받기 마련이고, 더 감정이입 하기 마련이고, 또 그렇게 얼마나 자기의 연애를 소환해 내느냐가 소설의 재미의 대부분을 차지 하니까. 게다가 … 내가 남자들이 쓴 첫사랑이나 연애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의 남자작가들의 연애담은 소영웅의식이나, 자기연민이나, 모성결핍을 지나치게 벌리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처음 도입부에서 주인공 남녀의 선배인 ‘요한’의 현학적인 잘난척이 장광설로 늘어질때는 아 … 이거 데미안 류의 지루한 성장동화인가.(난 데미안 싫어한다) 하고 의심도 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개똥철학을 엄청 읊어대지만 사랑에 대한 추상적이고 자위적인 성찰에 그치지 않는다. 화자의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고, 또 그것이 화자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부여하고는 있지만 그 연애가 다시 부모에 대한 원망이나, 자기연민이나, 본능에의 천착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담담하게 주변의 상황을 다 설명하면서도 결국은 사람하는 그 사람들끼리의 얘기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이 문단을 다 쓰고 보니, 내가 참 쉬운 얘기를 어렵게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난 대부분 스토리를 즐겨보고, 어떤 묘사나 글귀를 특별히 좋아한다거나, 그 글귀를 옮겨적거나 하지는 않는 편인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는 기억하고 싶은 문구들이 너무 많다. 책을 늘 들고 다닐 수는 없으므로, 좋아하는 글귀들을 여기 블로그에 옮겨놓고 생각날때마다 온라인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실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번도 모리스 라벨과 밥 딜런을 좋아하고, 미셸을 좋아하고, 선인장 꽃과 더스틴 호프만을 좋아하는 여자애들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오빠. 나 오늘 이뻐? 그래 이뻐. 토요일날 행사장에 와 줄거지? 아니 안가. 흥 나 삐진다. 일이 있단 말이야. 그래도 그날 안 오면 절교야. 한번만 봐줘. 정말 집에 일이 있다니까. 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 이를 테면. 그녀를 만나기 전의 세계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아는 여자애들의 전부였던 것이었다. (p171)

신의 선물이란

아마도 그런 것일 거라,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서서히 회전을 멈추던 두 마리 목마와, 땅으로 돌아와 서로의 손을 잡던 두 사람을 잊을 수 없다. 돌아서 한참을 걸을 때까지 서로의 등에 묻어 있던 색색의 불빛도 잊지 못한다. 어두운 세계를 달려갈 버스를 기다리던 순간까지도… 그때의 불빛들이 숨 쉬듯 깜박이며 우리의 몸에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차가운 벤치에 앉아 우리는 한 짝씩 이어폰을 나눠 꽂았다. 딸기밭이여. 영원하리. (p202)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p228)

그리고 감사합니다. 당신이 제게 준 빛이 있는 한… 이제 어떤 삶을 살아도 저는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매일 아침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여자에게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실은 이 길을 택함으로써 끝끝내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그러니까 저… 정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얘기를 꼭 전하고 싶었어요. (p289)

여름이었을 것이다. 샤워를 하다 문득, 이별이 인간을 힘들게 하는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고통보다도, 잠시나마 느껴본 삶의 느낌… 생활이 아닌 그 느낌… 비로소 살아있다는 그 느낌과 헤어진 사실이 실은 괴로운게 아닐까… 생각이 든 것이었다.
생활
생활
생활 (p301)

곳곳에 배경음악에 대한 설명이 있다는 것으로 ‘하루키적’이라는 평도 많이 올라와 있다. 그렇게 배경음악을 지정하기 시작한게 하루키라 하더라도 난 박민규쪽의 선곡이 훨씬 맘에 든다. 마치 내가 이응준의 단편들을 좋아하는 것 처럼. 이응준 소설을 읽으면, 그 소설의 장소묘사와 배경음악묘사가. 가끔은. “이 남자 내가 사귀었던 남자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정도로(소설가 이응준님 용서하세요. 그럴리가) 내 취향과 비슷하고 눈과 귀에 착 감긴다.

스토리 자체보다도 배경과 음악이 익숙해서도 소설을 좋아할 수 있다는 면을 생각해 보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나에게 참 좋은 소설이다.

영진공 라이

영화로 수다떨기 (2), 잔인성에 대하여



Q. 지난 주에는 영화로 보는 ‘사랑’에 대한 심리, 다각도로 알아보면서 재미있는 시간 가졌는데요, 이번 주 주제는 ‘연쇄살인범의 초상’입니다. 그냥 살인범이 아니라 연쇄 살인범, 꼭 하나씩 하나씩 죽이는 게 더 잔인한데요?

– 많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에는 크게 대량살인과 연쇄살인이 있습니다.
대량살인은 미국에서 종종 벌어지는 총기난사 같은 경우입니다. 단 한 번에 많이 죽이는 거죠. 이런 대량살인은 극단적인 좌절과 분노가 폭발한 결과입니다. 자기감정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살인이라서 미리 예고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변 사람들이 그 감정을 알아주지 않으면 결국 터지는 거죠. 대량살인은 대개 한번으로 끝납니다. 사건과 함께 범인도 자살하는 경우가 많고요. 이건 비록 끔찍한 살인 범죄지만 어느 정도는 인지상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죠. 우리도 가끔 확 다 뒤집어엎고 싶을 때가 있쟎아요.

근데 연쇄살인은 대량살인과는 전혀 달라요. 연쇄살인자에게는 살인이 일종의 라이프 스타일이예요. 흡연자가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처럼 살인을 끊지 못하는 거죠. 살인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고, 초기에 잡지 못하면 은폐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지능적인 연쇄살인자로 발전하죠. 물론 절대 자살하지 않지만, 누군가 자기를 붙잡아주기를 바라는 듯 단서를 남겨두거나 자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와는 아예 다른 종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간단히 말해 사람처럼 보이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예요.

Q. 참 끊임없이 매력적인 영화 소재에요. 언제 어디서 어떤 이웃이 그 그물망에 들어올지 모른다는 점에서 공포감과 함께 스릴도 있는, 그리고 주로 실화여서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는, 그런 이야기라 영화의 소재가 되지 않나..하는데요, 끊임없이 영화의 소재가 되는 이유, 뭐라고 보시나요?

–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 함께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연쇄살인자들이 포악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겁도 많고 차분하고 조심스러운데 사람 죽일 때만 무자비하거나, 명랑하고 쾌활한데 바로 그런 쾌활함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 왜 <추격자>에서도 살인자가 피해자에게 정과 망치를 들이대면서도 “괜찮아 괜찮아 …” 이러면서 달래잖아요. 전혀 살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인거죠.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도 그래요. 그는 무자비한 식인 살인마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교양있는 사람이라는 양면성 때문에 인기를 얻었죠. 실제로 테드번디라는 미국의 어떤 유명한 연쇄살인자는 팬클럽까지 있었고 결혼하겠다는 여자들도 몇 명 있었어요.

Q. 연쇄 살인범에 관한 이야기, 저는 지금 떠오르는 건 <살인의 추억>과, <양들의 침묵>, <공공의 적> 등이 떠오르는데, 장박사님은 어떤 영화들 기억나나요?

저는 <행복했던 여자> 라는 영화가 기억납니다. 91년도 영화인데 코미디 배우로 유명한 골디 혼과 <나홀로 집에>의 자상한 아버지로 익숙한 존 허드라는 배우가 주연인데, 처음에는 이 남자가 정말 흠잡을데 없이 좋은 남편으로 나와요. 그러다가 갑자기 사고로 죽죠. 그래서 전 이 영화를 행복했던 여자가 남편을 잃고 고생하는 이야기인줄 알았거든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죽은줄 알았던 그 자상하던 남편이 사실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사회병질자였던거예요. 그런 줄 모르고 봐서 더 무서웠어요.


골디혼만 보고 방심하고 들어갔다가 벌벌 떨며 봤던 영화, “행복했던 여자”

Q. 연쇄살인범, 악취미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심리학적 관점에서 연쇄살인자의 심리,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 그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존재라고 생각해요. 존 더글라스 라고 프로파일링 기법을 창시한 FBI의 심리분석관이 쓴 <마인드 헌터>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연쇄살인자들은 공통적으로 어릴 적에 야뇨증, 동물학대, 방화 중 한 가지를 꼭 저질렀다고 하더라구요. 물론 이런 경험이 있다고 전부 연쇄살인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이나 감정이 상식을 벗어나는 것은 분명해요.

<텍사스 전기톱 살인>의 모티브가 되었던 실제 연쇄살인자 에디 게인은 자기가 살해한 시신들을 마치 짐승 사냥한 것 처럼 해체해서 집안에 여기저기 걸어두었대요. 마치 사냥한 사슴이나 호랑이 머리를 벽에 걸어두는 것처럼 사람 얼굴을 걸어둔 거죠. 근데 또 그 사람이 붙잡혀서 감옥에 있을 때는 아주 착한 모범수였다고 하더라구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존재인거죠.


더글러스의 책을 기초로 만들어진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

Q. 생각만해도 정말 끔찍한데요, 이미 그들에겐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이는 것이겠죠? 연쇄살인자의 동기도 그러고보면 딱히 원한이나 복수가 아닐 때가 많아요?

대부분의 상식적인 살인은 동기가 있죠. 원한이나 치정 같은 거요. 그래서 살인범죄의 7-80프로는 면식범의 소행이라고 해요. 이런 살인범은 정황증거나 원한관계를 뒤지다 보면 결국 잡혀요.. <살인의 추억>에서도 송강호가 그러쟎아요. 대한민국은 땅이 좁아서 열심히 발로 뛰어다니다 보면 결국 잡힌다고. 근데 연쇄살인범은 달라요. 이 작자들은 상식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거든요. 원한 같은 게 원인도 아니고요.

Q.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것에 비롯된 난국 영화 <추격자>에서도 잘 나타나죠. 이미, 범인은 밝혀졌는데, 여러 가지 정치적인 타이밍과 정확한 물증 확보 지연으로 피해자가 더 생겨요. 아주 안타까운 경우였어요.

관객들도 손에 땀을 쥐고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설정이죠. 따지고 보면 그런 설정이니까 영화가 성공한 거 아니겠어요? 초반에 딱 잡혀버리면 단편영화 되고 말쟎아요. 재미도 없고.

Q. 이런 류의 영화를 보다보면요, 물론 끝까지 살아남아야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영화 속 범인들, 머리가 아주 비상하거나 운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쇄살인범의 기질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초기에 잡힐 겁니다. 덕분에 그들은 연쇄살인자가 되지 못하는 거죠. 잡혔으니까.

근데 가끔 초기에 안 잡히는 인간들이 나와요. 머리가 좋거나, 운이 좋거나, 너무 외모가 멀끔해서 의심을 안 받거나… 등등의 이유 때문이죠. 이렇게 수사망을 빠져나간 인간들이 범죄를 반복할수록 기술이 늘고, 그러다 보면 갈수록 더 잡기 어려운 존재가 되는 거죠. 소질도 있고 기술도 늘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게다가 이들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존재들이라 상식에 의존한 수사로는 오히려 잡기가 힘들어요.

영화 <추격자>에서도 설마 집 마당에 시체를 파묻으랴 했지만, 정말로 집 마당에다 파 묻었잖아요. 머리가 대단히 좋아서가 아니라 상식을 벗어나니까 의도하지 않게 허를 찌르는 셈이죠.

Q. 영화 <추격자>의 독특함! 아마, 살인마 영민에게 관객의 연민을 부추길 만한 어떠한 살해동기도 부여하지 않는 데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해요. 보통은 살인범에게도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어서 동기부여가 되잖아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편들지 않더라구요?

그렇죠. 영화를 보면 이 영화 감독이 연쇄살인범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게 드러나요. 영화에서 보면 경찰 조서에 범행동기가 없으니까 서장이 채워넣으라고 하잖아요. 근데 아까 말씀드렸듯 연쇄살인자들은 특별히 동기랄 게 없거든요. 동기 없는 범죄에 동기를 묻는 불합리를 지적한 거죠.

이렇게 억지로 동기가 뭐냐고 묻다 보면 “컴퓨터 게임 때문 이예요 … 호환마마처럼 나쁜 영화를 봐서요 … 어린 시절의 심리적인 충격 어쩌고 하는 식의 변명들이 나오는 거죠. 그럼 괜히 게임회사 폭탄 맞고 … 사람 죽인 걸로도 모자라 두루두루 폐를 끼치죠.


프라이멀 피어 …

Q. 그리고 보통, 형사들이 더 험악하고, 이들은 참 꽃미남인 경우가 많아요. <살인의 추억>의 박해일 씨나, <추격자>의 하정우 씨, <프라이멀 피어>의 에드워드 노튼, 모두 전혀 험악한 인상이 아니죠?

영화에서야 대비효과나 관객을 헷갈리게 하려는 의도로 그런 캐스팅을 할테지만, 실제 세상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면, 얼굴 험악한 사람들이 의외로 순하고 착해요. 그 사람들은 얼굴만으로 이미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니까 성격까지 험해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연쇄살인자들은 정 반대죠. 실제로도 연쇄살인자들이 순하고 연약해보이거나 잘생긴 경우가 많아요. 피해자가 경계할 만큼 무서운 인상이면 오히려 연쇄살인을 저지르기 힘들쟎아요. 게다가 이 사람들은 양심이 없어서 죄책감도 없고, 그러니까 표정에 구김살이 없어요. 그래서 모르고 보면 좋은 집에서 고생 없이 자란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요.


그러니 꽃미남을 조심하라 …

Q. 그러면 이런 연쇄살인자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봐야 할까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뇌의 작동방식 부터 조금 다르죠.

하지만 그들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냐 하면,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인류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념이나 국가나 종족, 혹은 신의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대량살인이 저질러져왔거든요. 즉, 우리의 마음 속에는 살인자의 본능이 있는 셈입니다. 그 본능은 언제 눈을 뜨냐 하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할 때입니다. 따지고 보면 연쇄살인자도 그렇잖아요. 연쇄살인자들은 공감능력이 없습니다. 남들과 자신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보는 거예요. 사람도 짐승취급 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도 공감능력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연쇄살인자와 크게 차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반대로 공감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의 인간성 역시 확장될 겁니다.

불교를 아시는 분이라면 이걸 충분히 이해하실 거예요. 부처님은 세상 만물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귀중하게 여겼죠. 즉 그분이 위대한 것은 날벌레 한마리와도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종종 그런 마음을 가지곤 해요. 집에서 키우는 개와도 공감하고, 고양이나 새와도 공감할 수 있죠. TV나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도 공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인간인 겁니다.


이때 이야기를 기초로 쓴 추격자 평 -> http://kr.blog.yahoo.com/psy_jjanga/1460810

Q. 네, 오늘 이런저런 영화 속 심리학, 연쇄살인범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되었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구요, 다음에는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기다려볼까요?

초능력이 어떨까요? 최근에 개봉한 <점퍼> 라는 영화나 <데스 노트> 시리즈도 모두 초능력에 대한 것들인데, 이것도 우리의 심리를 드러내는 재미있는 주제거든요.



영진공 짱가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4부]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1부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2부
다윈, 진화론이라는 세기의 떡밥을 던지다 – 3부

앞서 얘기했지만 진화의 개념은 혜성처럼 등장한 다윈이 안쪽 호주머니에서 불쑥 꺼내놓은 이론이 아니다.

다윈 이전에도 생물학자들 사이에서는 생물의 발생에 대한 논의들이 있어왔다. 하지만 당시의 유럽은 전통적인 기독교 세계관으로 사람들의 머리를 공구리 치던 시절이었다. 그 세계관은 신이 식물과 동물의 종들을 각각 별개로 창조하였으며 같은 것이 같은 것을 낳는다는, 즉 종은 고정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또 노아의 홍수와 같은 대재앙이 우리가 관찰하는 지질학적, 생물학적 환경을 설명해 준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충실했던 사람들은 신의 경이로운 솜씨를 기리고자 그의 피조물들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생물오덕질이 하나의 유행이 된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긴다. 생물의 표본들이 한곳에 모이면서 생물 전반의 큰 그림을 그려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생물학자들은 이렇게 소심하고 쪼잔할 정도로 다양한 생물들을 신이 일일이 창조했다는 생각에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커다란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깨뜨려야 될 또 하나의 벽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지구의 나이에 관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생물들이 진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지구의 나이가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다



제임스 어셔James Ussher(1581-1656)

지구의 나이에 대해 처음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한 이는 제임스 어셔(James Ussher)대주교였다. 그는 1581년 아일랜드 더블린(Dublin)에서 태어났으며 26살 약관의 나이에 더블린 신학대학의 신학과 학과장이 되었고 1925년에 아일랜드 영국국교회의 최고 고위직인 아르마 대주교(Archbishop of Armagh)가 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다.

학창시절 반장 한번 못해본 우리들로서는 처세술에 능했던 얍샵한 인물일거야 하며 자위하고 싶지만 학생 때부터 역사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받았으며 수많은 역사책을 탐독했고 방대하고 권위있는 여러 권의 책들을 저술하는 등 학자의 면모도 가진 똑똑한 사람이었다.


지금도 영문판으로 나와 인터넷에서 팔리고 있는 Annals of the World

그가 집필했던 책 중 주목할 것은 1650년에 출간한 Annals of the World라는 라틴어로 쓴 책으로 에덴동산에서부터 AD 70년까지의 모든 주요한 사건들을 망라한 세계 역사에 관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에 실려 있는 아담의 후손 나이를 차례로 더하는 계산을 통해 지구는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정오에 탄생했다고 발표했다. 지금을 기준으로 약 6014년 전인 것이다. 당시로서는 성경이 곧 진리였던 시대였기 때문에 매우 그럴 듯한 이야기로 들렸겠지만 지금 우리들로서는 신을 향한 열망과 지식을 향한 열망을 잘못 비벼놓으면 얼마나 어이없는 결론이 나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벌써 날 잊은건 아니겠지?!

생물학자 진영 쪽에서는 재벌2세 뷔퐁형님이 뉴턴의 프린키피아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지구의 나이를 계산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에서 ‘지름이 약 4천만 피트인 우리 지구와 똑같은 크기의 빨갛게 달궈진 쇳덩이는 6천 년과 같은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거의 식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5만 년 이상이 흐른 다음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라고 말만 번지르하게 해놓고는 지구가 식는 데 필요한 시간을 계산하지는 않았다.

뷔퐁형님은 태양에 혜성이 충돌 하면서 떨어져 나온 물질이 지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기의 지구는 태양과 같이 뜨겁게 용융된 상태였고 생명이 존재할 수 있을 때까지 서서히 냉각된 것이며, 이 때 냉각에 걸린 시간은 6,000년 가지고는 턱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뷔퐁형님은 철구슬을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가열한 다음, 손으로 만질 수 있을 정도로 식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측정하는 실험을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지구와 크기와 비슷한 구가 식는데 걸리는 시간을 외삽하는 방식으로 측정했다. 그 결과 뷔퐁형님은 지구의 나이가 최소한 7만 5천 년은 되어야 한다고 [자연사 Historire Naturelle]에서 언급했다. 지금보자면 실험이 매우 5학년 3반 과학실험스럽고 현재 최고 측정치인 45억년에도 훨씬 못미치지만 성경의 굴레를 벗어나 과학만으로 지구의 나이를 측정한 시도에 의의가 있으며 또한 제임스 어셔가 추정했던 지구의 나이보다 훨씬 많았다.

물론 이런 뷔퐁의 도전을 하나님의 행동대장을 자쳐하는 기독교에서 미소로 화답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뷔퐁은 ‘철학적 추론’이라는 멋들어진 현학적 핑계를 대며 기독교의 철퇴를 피해 간다. 뷔퐁의 다음 세대에는 수학자이자 푸리에 해석으로 유명한 조세프 푸리에가 등장해서 지구의 나이를 계산하는데 뷔퐁의 측정치는 명함도 못내밀 정도의 어마어마한 수치가 나오게 된다.
 


조세프 푸리에Jean Bapiste Joseph Fourier(1768~1830)



푸리에는 1768년 프랑스 오세르(Auxerre)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역학에 관심이 많았고 이에 관한 수식들을 통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뷔퐁보다 더 정확하게 지구가 식는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수치에 너무 놀랐는지 푸리에는 지구의 나이를 계산할 수 있는 수식만을 남겼다.

이 수식에 따라 계산을 하면 지구의 나이는 약 1억년이 나오게 된다!  기독교에선 6,000년이요 고작 7만 5천년이라고 발표한 뷔퐁도 해꼬지 당할 까봐 ‘철학적 추론’이라며 핑계를 대는 마당에 1억년 이라니. 푸리에가 놀랄만도 했다. 푸리에는 이외에도 뷔퐁이 지나쳤던 요소도 제대로 포착한다. 지구의 단단한 껍질은 그 속의 융해된 물질들을 둘러싸고 있어 단열작용을 하는 담요처럼 열의 흐름을 가로 막으며, 따라서 지구의 표면은 식었지만 그 속은 여전히 녹아 있는 상태라는 사실이었다. 


지구의 나이를 얘기하다
– 격변론(catastrophism)과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 –


이 두 용어는 상대편의 개념을 부정하기 위해 쓰인 단어이기 때문에 ‘~론’이니 ‘~설’이니 따위에 지레 놀라서 겁먹을 필요가 없다.

핵심은 단지 지구의 나이가 많느냐 적느냐일 뿐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수명이 24시간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오늘 밤 클럽을 가서 헌팅을 성공하느냐는 일생의 가장 큰 사건일 것이다. 왜냐면 자칫 어설프게 뻐꾸기 날렸다가 망치면 마법사로 죽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명이 1000년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꼭 오늘 헌팅에 성공 못해도 내일 다시 시도해도 되고 한 달 뒤에 시도해도 되는 등 천천히 시도해보면 된다. 즉 오늘 클럽가서 헌팅하는 것은 내 인생에 있어 큰 사건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지구의 나이가 6,000년 이라고 가정한다면 대홍수나 운석의 충돌, 빙하기 등은 지구에게 있어 ‘격변’일 것이다. 하지만 지구의 나이가 46억년이라면 대홍수나 빙하기, 대지진 따위는 늘상 있어왔던 ‘동일’한 일들의 반복일 것이다.


하루살이에게 저녁노을은 커다란 격변이지만 인간에게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일 뿐이다

단지 성경의 연대기만을 토대로 지구의 나이가 6,000살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은 화석과 지층들로부터 발견되는 증거들 앞에서 똥꼬가 타들어가기 시작한다.

해양생물 화석이 고지대에서 발견되면서 땅이 오랜 시간 융기했음을 암시하였고 현재는 볼 수 없는 기괴한 생물들의 화석은 생물이 멸종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처럼 새로운 증거들이 쌓여갔지만 그래도 기독교적 세계관의 그늘은 짙었다.

신앙심이 깊은 자연학자들은 이 증거들과 성경이 얼추 말이 맞도록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지구가 짧은 기간 동안에 대격변을 겪으면서 지금과 같은 세계가 만들어 졌다는 격변론이었다. 그리고 이 격변론에 힘을 실어준 것은 바로 리마르크를 왕따 놓았던 퀴비에 형님이었다.


끝판왕 퀴비에.
이번에도 퀴비에 형님은 다음 편으로.


 


*** 다음 편에서 계속 ***



 


영진공 self_fish


 

“그린 존”,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은폐하려는 자

제이슨 본 시리즈의 전쟁 버전처럼 보이는 겉모양과 달리 상당히 지루하고 난해한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봤는데 의외로 상당히 잘 짜여진 첩보/액션 스릴러의 구성 방식 – 선악의 구분이 분명하고 개인 영웅담으로 현실을 치환하는 – 을 따르는 작품이었다.

숨겨진 진실은 과연 무엇이며 –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없었다는 건 만인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영화는 그렇다면 미국 정부에게 거짓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로 대체했다 – 그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진실을 은혜하려는 자의 대결에서 승자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영웅은 어떤 결말을 맞게 될 것이며 전쟁의 진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밝혀질 것인가 등의 관객 몰입용 떡밥을 꾸준히 뿌려댄다.

영화 초반에 이젠 아예 생지랄을 떠는구나 생각했을 정도로 심하게 흔들어대던 핸드헬드 카메라를 어느 순간부터인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면서 영화를 감상했다.

이라크 전쟁의 빌미가 된 대량살상 무기에 관한 진실이 일개 육군 소대장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밝혀졌더라는 부분은 분명 드라마를 위해 가공된 허구일테지만 미국이 조작된 정보를 근거로 이라크를 무력 침공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린 존>은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를 선언하던 바로 그 시점의 바그다드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그리고 이미 수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은 미국의 남은 숙제를 촉구하기도 한다. 사담 후세인 독재정권이 무너진 것은 이제 됐으니 이라크 내부의 문제는 이라크인들에게 남겨두고 빨리 떠나라는 것.

하지만 애초에 수 천 년의 고도 밑에 깔려있는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일으켰던 전쟁이니 만큼 미국의 행정부가 바뀌었다 한들 그리 쉽사리 물러서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바마 대통령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이라크에 사우디 아라비아나 요르단과 같은 안정된 친미 정부를 세워놓기 전까지는 미군은 이라크 땅에서 쉽사리 물러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라크 바그다드의 실제 그린존

차라리 제대로된 다큐멘터리로 만들어 놓았어야 할 내용과 아직도 식을 줄을 모르는 뜨거운 감자 같은 이슈를 놓고 전형적인 액션 스릴러 영화 한 편을 만들어놓았으니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영화 자체가 너무 대중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작품에 호감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분들도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에 관한 모든 사실들을 이 짧은 극영화 한 편에 담아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이유를 제외하고는 <그린 존>이 특별히 어렵다거나 불편하다고 느낄만한 이유는 없다고 보여진다.

핵심적인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 구조를 통해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이라크 전쟁에 관한 문제 의식을 불러 일으켜준다는 미덕을 칭찬받을만 하지 않은가 싶다.

미국은 아직도 21세기의 벽두에 저질러놓은 자신들의 만행에 대해 공식적인 사죄와 그에 걸맞는 행동을 보여주지 않고 있으니까.

Director Paul Greengrass & Matt Damon


워킹 타이틀은 더이상 로맨틱 코미디의 명가라고만 불러서는 안될 듯 싶다. 코엔 형제의 <시리어스 맨>에 이어 <그린 존>까지, 워킹 타이틀의 오지랖에는 이제 경계가 없다. 그리고 내놓았다 하면 실속 있고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마이클 만 감독의 선구적인 노력에 힘입어 이제 제작비 규모를 불문하고 왠만한 영화들은 모두들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을 하는구나 싶은데, <그린 존>은 유난히 디지털 촬영의 티를 많이 내는 편이다. 광량이 부족한 장면에서 생기는 화면 상의 노이즈를 거리낌 없이 노출하는 것이 상황의 리얼리티를 살려준다고 보는 견해도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좀 거슬린다.



누군가에게 이라크 전쟁은 분명 해방 전쟁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 이후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발걸음은 너무 무겁고 복잡하기만 하다. <그린 존>에서 가장 값진 장면은 차기 정권 수립을 위한 협의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그린 존 안에서의 또 다른 전쟁’ 장면이다. 우리도 불과 몇 십 년 전에 겪었던 일이고 여전히 그 그늘 아래에서 살고 있는 지라 정말 남의 일 같지가 않더라.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