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를 보았다”, 다소 싱거운 도가니탕???


무척 잔인하다는 소문이 무성했음에도 잔인은 커녕, 결말까지도 충분히 예상할 Plot에 평범한 복수극이었다. 유혈이 낭자할 거라 생각했지만 우리가 너무 많은 유혈에 노출되어서인지 그리 혐오스럽진 않았다. 게다가 포스터나 제목에서 주는 뉘앙스가 두 사람의 대립이라는 점과 결부되면서 결말은 예상대로 싱거웠다.


하지만 결말이 중요한 영화가 아니었기에. 재미난 Scene 몇 개가 기억에 남는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택시 연쇄 강도살인범과 격투 Scene

내게는 가장 재미나고 Speedy한 격투 장면이었는데, 첫째로 惡과 惡의 싸움이라는 게 흥미로웠고, 둘째로 어수룩한 2인조와 산전수전 다 굴러본 듯한 놈의 뻔한 싸움이라는 게 익살맞았으며, 셋째로 그 좁아터진 택시 안에서 둘이 하나를 못 잡아 헤매는 게 즐거웠다. 각본을 쓴 감독이 이 장면을 왜 넣었을까 고민해봤지만 딱히 재미 외에는 뭘 찾을 수가 없다. 어쨌거나 살집에 연거푸 꽂아 넣는, 쉭쉭하는 칼소리와 좁은 공간에서 이리 저리 몸을 움직여대는 모습을 잘 잡아냈기에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쳐줄만 하다.

병원에서 아킬레스 건을 끊어버리는 Scene

이병헌이 다리를 부여잡고 침착하게 간호사에게 귀도 막고 눈도 막으라고 친절히 권유해 주었음에도 간호사는 눈을 감지 않고 귀만 막은 채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능욕한 남자의 아킬레스 건이 끊어지는 것을 똑똑히 본다. 아! 역시 복수란 두 눈 부릅뜨고 봐야 하는 것. 좋은 장면이다.

복수를 마무리한 이병헌의 표정 Scene

엔딩크레딧 직전의 이 클로징은 이병헌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비추되 소리를 차단해버버리는 배경음악으로 인해 과연 이병헌의 기분은 어떨까 궁금하게 만들어버렸다.

어릴 때 보던 ‘O양의 스토리’라는 세미 포르노에서 나왔던 장면이기도 한데, 여성이 섹스로 인해 쾌락을 느낄 때의 표정을 ‘소리’를 배제하고 얼굴 표정만 볼 경우 이 여성이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인지 쾌락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병헌의 표정은 정말 적절하게도, 배경음악으로 완전히 차단된 울음소리 – 또는 웃음소리 – 덕분에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아리송하게 만들어버리는, 복수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할지 갈피를 못 잡게 만드는 그런 매력의 Last Scene을 만들어버렸다. 어쩌면 이병헌의 캐스팅 이유가 이런 묘한 표정 때문은 아닌가란 생각이 들 정도로, 꽤 흥미로운 마지막이었다.

근육의 파열음이나 뼈가 부러지고 피가 튀기고 살점이 나도는 것에서 ‘잔혹함’을 느끼기 위해서는 ‘소리’가 진정 중요하다. 영화 ‘우주전쟁’에서 레이저 빔 소리가 얼마나 공포심을 조장하는지, 그저 비현실적으로 가루가 되어버리는 사람의 형체가 그 ‘소리’로 인해서 얼마나 무섭고도 잔혹하게 변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악마를 보았다’의 잔인함은 글쎄, 기대를 너무 했던가?


영진공 함장


 

영화로 수다떨기 (2), 잔인성에 대하여



Q. 지난 주에는 영화로 보는 ‘사랑’에 대한 심리, 다각도로 알아보면서 재미있는 시간 가졌는데요, 이번 주 주제는 ‘연쇄살인범의 초상’입니다. 그냥 살인범이 아니라 연쇄 살인범, 꼭 하나씩 하나씩 죽이는 게 더 잔인한데요?

– 많은 사람을 죽이는 살인에는 크게 대량살인과 연쇄살인이 있습니다.
대량살인은 미국에서 종종 벌어지는 총기난사 같은 경우입니다. 단 한 번에 많이 죽이는 거죠. 이런 대량살인은 극단적인 좌절과 분노가 폭발한 결과입니다. 자기감정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살인이라서 미리 예고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변 사람들이 그 감정을 알아주지 않으면 결국 터지는 거죠. 대량살인은 대개 한번으로 끝납니다. 사건과 함께 범인도 자살하는 경우가 많고요. 이건 비록 끔찍한 살인 범죄지만 어느 정도는 인지상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죠. 우리도 가끔 확 다 뒤집어엎고 싶을 때가 있쟎아요.

근데 연쇄살인은 대량살인과는 전혀 달라요. 연쇄살인자에게는 살인이 일종의 라이프 스타일이예요. 흡연자가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처럼 살인을 끊지 못하는 거죠. 살인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지고, 초기에 잡지 못하면 은폐 기술이 점점 발전하면서 지능적인 연쇄살인자로 발전하죠. 물론 절대 자살하지 않지만, 누군가 자기를 붙잡아주기를 바라는 듯 단서를 남겨두거나 자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와는 아예 다른 종족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간단히 말해 사람처럼 보이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아니예요.

Q. 참 끊임없이 매력적인 영화 소재에요. 언제 어디서 어떤 이웃이 그 그물망에 들어올지 모른다는 점에서 공포감과 함께 스릴도 있는, 그리고 주로 실화여서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는, 그런 이야기라 영화의 소재가 되지 않나..하는데요, 끊임없이 영화의 소재가 되는 이유, 뭐라고 보시나요?

–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 함께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연쇄살인자들이 포악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겁도 많고 차분하고 조심스러운데 사람 죽일 때만 무자비하거나, 명랑하고 쾌활한데 바로 그런 쾌활함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 왜 <추격자>에서도 살인자가 피해자에게 정과 망치를 들이대면서도 “괜찮아 괜찮아 …” 이러면서 달래잖아요. 전혀 살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인거죠.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도 그래요. 그는 무자비한 식인 살인마이면서도 동시에 아주 교양있는 사람이라는 양면성 때문에 인기를 얻었죠. 실제로 테드번디라는 미국의 어떤 유명한 연쇄살인자는 팬클럽까지 있었고 결혼하겠다는 여자들도 몇 명 있었어요.

Q. 연쇄 살인범에 관한 이야기, 저는 지금 떠오르는 건 <살인의 추억>과, <양들의 침묵>, <공공의 적> 등이 떠오르는데, 장박사님은 어떤 영화들 기억나나요?

저는 <행복했던 여자> 라는 영화가 기억납니다. 91년도 영화인데 코미디 배우로 유명한 골디 혼과 <나홀로 집에>의 자상한 아버지로 익숙한 존 허드라는 배우가 주연인데, 처음에는 이 남자가 정말 흠잡을데 없이 좋은 남편으로 나와요. 그러다가 갑자기 사고로 죽죠. 그래서 전 이 영화를 행복했던 여자가 남편을 잃고 고생하는 이야기인줄 알았거든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죽은줄 알았던 그 자상하던 남편이 사실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사회병질자였던거예요. 그런 줄 모르고 봐서 더 무서웠어요.


골디혼만 보고 방심하고 들어갔다가 벌벌 떨며 봤던 영화, “행복했던 여자”

Q. 연쇄살인범, 악취미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심리학적 관점에서 연쇄살인자의 심리,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 그저 태어날 때부터 다른 존재라고 생각해요. 존 더글라스 라고 프로파일링 기법을 창시한 FBI의 심리분석관이 쓴 <마인드 헌터>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연쇄살인자들은 공통적으로 어릴 적에 야뇨증, 동물학대, 방화 중 한 가지를 꼭 저질렀다고 하더라구요. 물론 이런 경험이 있다고 전부 연쇄살인마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의 생각이나 감정이 상식을 벗어나는 것은 분명해요.

<텍사스 전기톱 살인>의 모티브가 되었던 실제 연쇄살인자 에디 게인은 자기가 살해한 시신들을 마치 짐승 사냥한 것 처럼 해체해서 집안에 여기저기 걸어두었대요. 마치 사냥한 사슴이나 호랑이 머리를 벽에 걸어두는 것처럼 사람 얼굴을 걸어둔 거죠. 근데 또 그 사람이 붙잡혀서 감옥에 있을 때는 아주 착한 모범수였다고 하더라구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존재인거죠.


더글러스의 책을 기초로 만들어진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

Q. 생각만해도 정말 끔찍한데요, 이미 그들에겐 사람이 사람으로 안 보이는 것이겠죠? 연쇄살인자의 동기도 그러고보면 딱히 원한이나 복수가 아닐 때가 많아요?

대부분의 상식적인 살인은 동기가 있죠. 원한이나 치정 같은 거요. 그래서 살인범죄의 7-80프로는 면식범의 소행이라고 해요. 이런 살인범은 정황증거나 원한관계를 뒤지다 보면 결국 잡혀요.. <살인의 추억>에서도 송강호가 그러쟎아요. 대한민국은 땅이 좁아서 열심히 발로 뛰어다니다 보면 결국 잡힌다고. 근데 연쇄살인범은 달라요. 이 작자들은 상식적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거든요. 원한 같은 게 원인도 아니고요.

Q.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는 것에 비롯된 난국 영화 <추격자>에서도 잘 나타나죠. 이미, 범인은 밝혀졌는데, 여러 가지 정치적인 타이밍과 정확한 물증 확보 지연으로 피해자가 더 생겨요. 아주 안타까운 경우였어요.

관객들도 손에 땀을 쥐고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설정이죠. 따지고 보면 그런 설정이니까 영화가 성공한 거 아니겠어요? 초반에 딱 잡혀버리면 단편영화 되고 말쟎아요. 재미도 없고.

Q. 이런 류의 영화를 보다보면요, 물론 끝까지 살아남아야 이야기가 이어지지만, 영화 속 범인들, 머리가 아주 비상하거나 운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쇄살인범의 기질이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초기에 잡힐 겁니다. 덕분에 그들은 연쇄살인자가 되지 못하는 거죠. 잡혔으니까.

근데 가끔 초기에 안 잡히는 인간들이 나와요. 머리가 좋거나, 운이 좋거나, 너무 외모가 멀끔해서 의심을 안 받거나… 등등의 이유 때문이죠. 이렇게 수사망을 빠져나간 인간들이 범죄를 반복할수록 기술이 늘고, 그러다 보면 갈수록 더 잡기 어려운 존재가 되는 거죠. 소질도 있고 기술도 늘었으니 당연한 일이죠. 게다가 이들은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나는 존재들이라 상식에 의존한 수사로는 오히려 잡기가 힘들어요.

영화 <추격자>에서도 설마 집 마당에 시체를 파묻으랴 했지만, 정말로 집 마당에다 파 묻었잖아요. 머리가 대단히 좋아서가 아니라 상식을 벗어나니까 의도하지 않게 허를 찌르는 셈이죠.

Q. 영화 <추격자>의 독특함! 아마, 살인마 영민에게 관객의 연민을 부추길 만한 어떠한 살해동기도 부여하지 않는 데에서 찾을 수 있지 않나…해요. 보통은 살인범에게도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어서 동기부여가 되잖아요.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편들지 않더라구요?

그렇죠. 영화를 보면 이 영화 감독이 연쇄살인범에 대해 아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게 드러나요. 영화에서 보면 경찰 조서에 범행동기가 없으니까 서장이 채워넣으라고 하잖아요. 근데 아까 말씀드렸듯 연쇄살인자들은 특별히 동기랄 게 없거든요. 동기 없는 범죄에 동기를 묻는 불합리를 지적한 거죠.

이렇게 억지로 동기가 뭐냐고 묻다 보면 “컴퓨터 게임 때문 이예요 … 호환마마처럼 나쁜 영화를 봐서요 … 어린 시절의 심리적인 충격 어쩌고 하는 식의 변명들이 나오는 거죠. 그럼 괜히 게임회사 폭탄 맞고 … 사람 죽인 걸로도 모자라 두루두루 폐를 끼치죠.


프라이멀 피어 …

Q. 그리고 보통, 형사들이 더 험악하고, 이들은 참 꽃미남인 경우가 많아요. <살인의 추억>의 박해일 씨나, <추격자>의 하정우 씨, <프라이멀 피어>의 에드워드 노튼, 모두 전혀 험악한 인상이 아니죠?

영화에서야 대비효과나 관객을 헷갈리게 하려는 의도로 그런 캐스팅을 할테지만, 실제 세상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면, 얼굴 험악한 사람들이 의외로 순하고 착해요. 그 사람들은 얼굴만으로 이미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니까 성격까지 험해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연쇄살인자들은 정 반대죠. 실제로도 연쇄살인자들이 순하고 연약해보이거나 잘생긴 경우가 많아요. 피해자가 경계할 만큼 무서운 인상이면 오히려 연쇄살인을 저지르기 힘들쟎아요. 게다가 이 사람들은 양심이 없어서 죄책감도 없고, 그러니까 표정에 구김살이 없어요. 그래서 모르고 보면 좋은 집에서 고생 없이 자란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요.


그러니 꽃미남을 조심하라 …

Q. 그러면 이런 연쇄살인자들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봐야 할까요?

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들은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뇌의 작동방식 부터 조금 다르죠.

하지만 그들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냐 하면, 꼭 그렇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인류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념이나 국가나 종족, 혹은 신의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대량살인이 저질러져왔거든요. 즉, 우리의 마음 속에는 살인자의 본능이 있는 셈입니다. 그 본능은 언제 눈을 뜨냐 하면 우리와 그들을 구분할 때입니다. 따지고 보면 연쇄살인자도 그렇잖아요. 연쇄살인자들은 공감능력이 없습니다. 남들과 자신을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보는 거예요. 사람도 짐승취급 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우리도 공감능력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연쇄살인자와 크게 차이 없는 존재가 됩니다. 반대로 공감능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의 인간성 역시 확장될 겁니다.

불교를 아시는 분이라면 이걸 충분히 이해하실 거예요. 부처님은 세상 만물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귀중하게 여겼죠. 즉 그분이 위대한 것은 날벌레 한마리와도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종종 그런 마음을 가지곤 해요. 집에서 키우는 개와도 공감하고, 고양이나 새와도 공감할 수 있죠. TV나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도 공감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인간인 겁니다.


이때 이야기를 기초로 쓴 추격자 평 -> http://kr.blog.yahoo.com/psy_jjanga/1460810

Q. 네, 오늘 이런저런 영화 속 심리학, 연쇄살인범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많이 되었네요.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구요, 다음에는 어떤 내용의 이야기를 기다려볼까요?

초능력이 어떨까요? 최근에 개봉한 <점퍼> 라는 영화나 <데스 노트> 시리즈도 모두 초능력에 대한 것들인데, 이것도 우리의 심리를 드러내는 재미있는 주제거든요.



영진공 짱가

무죄추정의 원칙 – 1992년 김모 순경 사건 이야기

세상을 들끓게 한 강호순 연쇄살인 사건에서 피의자 강호순의 얼굴 공개를 놓고 격론이 벌어진 적이 있다.  아주 일부 – 정말로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는 것을 찬성하는 입장이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런 짐승같은 놈에게 무슨 빌어먹을 인권!”이라면서 당장 얼굴에서 마스크를 벗겨낼 것을 주장했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피의자의 유죄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 말이다.  이건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죄 없는 사람을 벌해서는 안 된다”라는 형사소송법의 이상과도 일맥상통한다.  물론, 얼굴까지 공개하지 말자는 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너무 과하게 적용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경찰이 잘못된 수사로 멀쩡한 사람을 흉악범으로 만드는 짓을 얼마나 자주 하는지를 알게 된다면 차마 그런 말을 하진 못할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김모 순경 사건이다.

1992년, 김모 순경은 애인 모양과 함께 여관에 투숙한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7시경에 애인을 남겨놓고 먼저 방에서 나왔다. 그런데 애인이 일하던 직장에서 그녀가 아직 출근하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고 여관방에 돌아가 본 김순경은 살해당한 애인의 시체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때 법의학자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즉, 사망 시각을 오전 3시에서 5시경으로 추정한 것이다.

그리고 경찰들 또한 결정적인 실수를 한다. 그것은,
1) 현장의 휴지에서 김모 순경 외에 다른 사람의 정액이 발견됐는데도 불구하고 이걸 무시해 버리고,
2) 애인의 지갑에서 상당액의 수표가 사라졌는데 이를 김모 순경의 소행이라고 추정했다.
그리고 김모 순경을 다그치고 협박하여 자백을 받아낸다.

물론 재판정에서 김모 순경은 자신의 자백을 번복한다. 하지만 뒤이은 검사와 판사들의 삽질도 장난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 1)번의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증거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김모 순경이 구치소에 구류된 사이에 신림동 일대에서 애인이 가지고 있던 수표가 사용됐다는 증거가 발견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역시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 결과, 김모 순경은 1심과 2심에서 유죄를 인정받아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다음해 열린 3심에서도 김모 순경에서 불리한 판결이 나올 공산이 높았다.

그런데 웃기게도 3심이 한참 진행되던 도중에 진범이 잡힌 것이다!

강도짓을 하다가 붙잡힌 서모군(당시 18세)이 취조를 받던 도중, 자신이 작년에 있었던 경찰관 애인 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자백한 것이었다. 실제 사건은 사망 추정시각인 오전 3시에서 5시 사이가 아니라 오전 7시에 김모 순경이 여관을 나간 직후에 저질러졌다. 그 때, 서모군이 여관방에 침입해 혼자 자고 있던 애인을 강간하고 살해한 뒤 금품을 빼앗아 도주한 것이다.
 

10년전 경찰관에게 애인을 죽였다는 누명을 씌웠던 살인범이 최근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고도 친구에게 어머니를 죽였다는 누명을 뒤집어 씌운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서울 노원경찰서는 지난달초 노원구 공릉동에서 발생한 70대 노파 손모(76.여)씨 살해사건의 진범이 용의자로 지목돼 구속된 손씨의 아들 강모(36)씨가 아니라 강씨의 친구 서모(28)씨인 사실을 밝혀내고 서씨를 살인혐의로 구속했다고 29일 밝혔다.

<한겨레신문, 2002년 7월 29일, 경찰관에게 살인누명, 이번에는 친구 차례”>

요컨대 사망 시각을 잘못 추정한 게 이 사건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나간 결정적인 실수였다.  하지만 현장에 남아 있던 휴지에 남아 있던 정액의 DNA를 분석하고(당시 이미 DNA 분석기법이 도입되어 있었다), 신림동 일대에서 사용된 수표의 흔적을 추적했더라면 어렵잖게 진범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 못해 재판정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에 입각해서 판결을 내렸더라면 이런 식으로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범인이라고 추정되는 사람의 자백’에만 의존하여 무죄추정의 원칙 따윈 어딘가 멀리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탓에, 이 사건은 두고두고 경찰과 검찰의 무능함과 법정의 게으름에 대한 비웃음 꺼리로 남게 되었다.

이 사건은 내가 잘 알고있는 분에게는 무척 기억에 남는 건이다.  왜냐하면 그 분이 바로 1심과 2심에서 김모 순경의 변호사를 맡으셨기 때문이다.  그 분은 상당한 추리소설 팬이기도 한데, 이 사건에선 도난당한 수표의 자취를 뒤쫓아 실제 수표가 사용된 건 김순경이 체포된 뒤란 사실을 알아내고, 그 수표를 사용한 게 누군지도 알아내서 그 증거를 법정에 제출하는 등 다방면으로 많은 노력을 하셨다. (수표를 사용한 사람은 진범인 서모 군의 친구였다. 만일 이 친구를 추적했라면 진범은 쉽게 잡혔을 것이다!)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검사와 판사에 대한 그 분의 회고는 다음과 같다.

그 분: “그런데 말이지 … 이 검사놈들하고 판사놈들이 그 증거를 보지도 않더라고! 근데 더 웃긴 게 뭔줄 아냐? 난 진범이 잡힌 뒤에 이 놈들이 짤릴 줄 알았거든? 근데 나중에 부장검사, 부장판사로 줄줄이 출세를 하더라고, 거 참!”

나 : “세상이 다 그런 거죠, 뭐.”

김순경은 진범이 잡힌 이후에도 보강 수사니 뭐니 하는 이유로 한참 뒤에나 출옥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파면취소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뒤에야 겨우 복직할 수 있었다.

DNA 검사로 강간혐의를 벗고 18년 만에 감옥에서 풀려난 James C. Tillman (2007. 5. 16)

아무튼간에 경찰과 검찰의 무능함과 법정의 게으름은 1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별로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 (‘바보들의 행진’으로 끝난 제과점 납치사건).  그런즉슨 무죄추정의 원칙을 조금 과하게 적용한다고 해서 큰일날 건 없지 않을까.

영진공 DJ 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