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절 공부는 어따 써먹는 것일까?


 


 

 


 








 



난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개인 시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직업 덕택에 계속해서 이 호사스런 취미를 누릴 수 있었다. 나의 독서취향은 시절에 따라 바뀌어갔다. 10대에는 소설책을, 20대에는 인문학 책을, 30대인 지금은 과학서에 푹 빠져 있다. 특히 과학서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요즘엔 그림은 뒷전에 던져두고 열독하고 있는 중이다.


 


그 결과 과거엔 방문자의 90%가 여성이었던 그림작가의 아기자기한 블로그(http://bung015b.egloos.com/)였지만 지금은 자연과학 전공자의 고비사막 같은 블로그로 전락하였고, 방문자의 90%가 남자라는 씁쓸한 통계가 선물로 주어졌다.


 


그렇게 많이 읽어왔고 또 읽고 있지만 누군가 나에게 유식해졌냐고 묻는다면 난 쥐구멍이 아니라 우주로 도망칠지도 모르겠다. 분명 20대 때부터 지금까지 인문학서나 과학서를 읽은 것은 책을 통해 지식을 쌓으려는 것이었다. 솔직히 다른 사람 앞에서 유식한 말로 잘난 척도 하고 싶었고 누군가 질문을 하면 막힘없이 술술 답해주는 전문가스러운 자태도 뽐내고 싶은 속물적인 욕심도 있었으리라.


 


근데 나이가 들어선지,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아님 그냥 머리가 후져서인지 도무지 여태까지 읽었던 수많은 인문서, 과학서들의 내용 대부분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은 고사하고 혼자 집구석에서 글을 쓸 때도 분명 읽었고 공부했던 내용임에도 또다시 책을 찾아 정리해야만 한다. 그럴때면 정말 짜증스럽지 않을 수 없다.


 


대체 그 오랜 시간 책을 읽어서 얻은 것이 결국 방문자의 90%가 남자라는 통계치 뿐이란 말이던가.


 


 



 


 



이런 망각의 저주(?)는 영혼을 쥐어짜며 공부했던 우리의 순수했던 학창시절마저 무의미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아오지 탄광의 강제노역에 버금가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했지만 그 수많은 지식들은 학교를 졸업하면서 모두 깡그리 휘발되어 날아가 버린다. 왜 우린 어김없이 까먹고 말 것을 알면서 그렇게 애써 공부하는 것인가.


 


가장 큰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함일 것이다. 지금 시대에서 공부의 목적은 대학 진학과 취업의 수단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 학교 당국이 앞장서서 어린 시절부터 ‘공부=대학=성공=돈’이라고 끊임없이 주입시켜주고 있지 않던가. 그 결과 우리는 과정이야 어떻든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10대를 가진 나라가 되었지만 더불어서 가장 책 안 읽는 어른들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공부가 실용적인 목적으로 국한되면서 사람들은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직을 하고 나서는 대부분 책을 놓아 버린다. 우리 출판시장의 판매량은 이러한 세태를 확연히 보여 준다. 유아책에서 성인책으로 올라갈수록 판매량은 뚝뚝 떨어지며 그 중에서도 인문학서와 특히 자연과학서는 고사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인문학서 쪽은 언제나 위기라고 떠들지만 자연과학서 쪽은 위기라고 떠드는 사람조차 없다.)


 


기껏 공부해도 시간이 지나면 싸그리 까먹게 되고 그나마 취업하고 진급하는데 말고는 필요없는 공부를 우린 왜 해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은 앞으로 내가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나보다 공부할 시간이 더 창창히 남아있는 내 딸을 위해서도 꼭 풀어야만 할 문제다. 나 스스로도 공부를 왜 하는지 모르면서 딸아이에게 공부를 권할 배짱은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본의 수학자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이런 나의 고민을 알았다는 듯 멋진 책을 집필하여 출간하였다. 수학계의 노벨상이라는 필드상을 수상한 저자 히로나카 헤이스케는 그의 저서 ‘학문의 즐거움’에서 공부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싶다. 배워 나가는 과정에서 지혜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지혜가 만들어지는 한, 배운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결코 손해 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일단 잊어버린 것을 필요에 의해 다시 한번 꺼내려고 할 때, 전혀 배워 본 적도 없고 들어 본 경험도 없는 사람과는 달리, 최소한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고, 어느 정도 시간을 들이면 별 고생 없이 그것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혜에는 그런 측면이 있다. 나는 그것을 ‘지혜의 넓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지혜에는 대상을 깊이 살펴보는 ‘깊이’라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결단력을 유도하는 ‘힘’이라는 측면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러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하고 싶다.



 


 


참 좋은 말이다. 내가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것도 앎에서 오는 즐거움을 통해 많은 지식을 쌓고자 함이었지만, 더 나아가서는 그 지식들을 통해 좀 더 현명해지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뭔가 2% 부족함을 느낀다.

 

우리는 지식이 지혜로움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 책 한 권 더 읽었다고 내일부터 책 한 권 분량만큼 더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주위에 널려있는 학력 좋은 바보들이나 책은 많이 읽어 유식한데 언행은 시정잡배와 다름없는 이들을 우린 쉽게 볼 수 있다. 나부터도 그렇게 많은 책들을 읽고 있지만 딸아이의 작은 도발에도 이성을 잃는 저질 인격의 소유자이지 않던가.


 




 


 


2012년 6월 TED강연에서 Margaret Heffernan (http://www.mheffernan.com/biography.shtml) 는 매우 인상깊은 강연을 하였는데 특히 마지막에 언급한 구절은 히로나카 헤이스케가 채워주지 못한 2%를 채워주었다.


 


정보의 개방은 환상적입니다.


오픈 네트워크는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을 이용할 기술과 습관을 익히고 

재능을 계발하며 그리고 도덕적 용기를 내기 전까지는

진실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개방’이 끝은 아닙니다.

그건 ‘시작’입니다.

 


지혜로운 말들은 보편성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 구절에서 몇 단어만 바꾸면 또다른 깨달음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우리가 지식을 이용할 기술과 습관을 익히고 



재능을 계발하며 그리고 도덕적 용기를 내기 전까지는



지식이 우리를 현명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이 끝은 아닙니다.



그건 ‘시작’입니다.


 


 


 


 


영진공 self_fish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결결이 아름다운 첫사랑 이야기


박민규의 책을 재미있게 읽기는 하지만, 썩 박민규의 팬인 것은 아닌지라 사실 살까 말까 몇번 망설였던 책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다. 결론부터 말하지면, 나는 이 책이 박민규 특유의 ‘판타지’책이 아닐까 싶어 사기를 망설였는데, 누군가 ‘연애소설’이라고 알려주어 사게 되었다. 그리고 주말 내내 몇번을 여기 저기 발췌해 읽을 만큼 나는 이 책이 좋았다.

박민규 소설은 약간 나는 선호를 두게 되는게 “카스테라”같이 상징이 강하고 판타지가 가미된 것보다는 “삼미슈퍼스타즈의 (방금 수퍼스타스. 라고 표기했다가 고쳤다) 마지막 팬클럽”같이 땅에 발 붙이고 있는 배경과, 땅에 발 붙이고 있는 상징이 있는 소설이 더 마음에 든다. ‘우주적 농담’은 한 두번은 웃을만 한데, 장편소설의 처음 부터 끝까지 가기에는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암튼, 표지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제목만 보고, 나는 또 ‘우주적이면서 고딕적인’배경의 거대한 농담을 하는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 내용은 그저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실에 있는 그 배경, 제대로 묘사되었다고 믿겨지는 그 시절에 대한 묘사. 그리고 결결이 아름다운 첫사랑 얘기에 그만 확 빠지고 말았다.

사람마다 감상은 아마 다 다를 것이다. 연애담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자기 연애랑 비슷하면 더 감동받기 마련이고, 더 감정이입 하기 마련이고, 또 그렇게 얼마나 자기의 연애를 소환해 내느냐가 소설의 재미의 대부분을 차지 하니까. 게다가 … 내가 남자들이 쓴 첫사랑이나 연애소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대부분의 남자작가들의 연애담은 소영웅의식이나, 자기연민이나, 모성결핍을 지나치게 벌리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처음 도입부에서 주인공 남녀의 선배인 ‘요한’의 현학적인 잘난척이 장광설로 늘어질때는 아 … 이거 데미안 류의 지루한 성장동화인가.(난 데미안 싫어한다) 하고 의심도 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개똥철학을 엄청 읊어대지만 사랑에 대한 추상적이고 자위적인 성찰에 그치지 않는다. 화자의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고, 또 그것이 화자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부여하고는 있지만 그 연애가 다시 부모에 대한 원망이나, 자기연민이나, 본능에의 천착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담담하게 주변의 상황을 다 설명하면서도 결국은 사람하는 그 사람들끼리의 얘기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이 문단을 다 쓰고 보니, 내가 참 쉬운 얘기를 어렵게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난 대부분 스토리를 즐겨보고, 어떤 묘사나 글귀를 특별히 좋아한다거나, 그 글귀를 옮겨적거나 하지는 않는 편인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는 기억하고 싶은 문구들이 너무 많다. 책을 늘 들고 다닐 수는 없으므로, 좋아하는 글귀들을 여기 블로그에 옮겨놓고 생각날때마다 온라인으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실은 알 수 없었다. 나는 한번도 모리스 라벨과 밥 딜런을 좋아하고, 미셸을 좋아하고, 선인장 꽃과 더스틴 호프만을 좋아하는 여자애들 만난 적이 없었으니까. 오빠. 나 오늘 이뻐? 그래 이뻐. 토요일날 행사장에 와 줄거지? 아니 안가. 흥 나 삐진다. 일이 있단 말이야. 그래도 그날 안 오면 절교야. 한번만 봐줘. 정말 집에 일이 있다니까. 일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 이를 테면. 그녀를 만나기 전의 세계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아는 여자애들의 전부였던 것이었다. (p171)

신의 선물이란

아마도 그런 것일 거라, 지금의 나는 생각한다. 서서히 회전을 멈추던 두 마리 목마와, 땅으로 돌아와 서로의 손을 잡던 두 사람을 잊을 수 없다. 돌아서 한참을 걸을 때까지 서로의 등에 묻어 있던 색색의 불빛도 잊지 못한다. 어두운 세계를 달려갈 버스를 기다리던 순간까지도… 그때의 불빛들이 숨 쉬듯 깜박이며 우리의 몸에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차가운 벤치에 앉아 우리는 한 짝씩 이어폰을 나눠 꽂았다. 딸기밭이여. 영원하리. (p202)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 (p228)

그리고 감사합니다. 당신이 제게 준 빛이 있는 한… 이제 어떤 삶을 살아도 저는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매일 아침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여자에게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실은 이 길을 택함으로써 끝끝내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그러니까 저… 정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 얘기를 꼭 전하고 싶었어요. (p289)

여름이었을 것이다. 샤워를 하다 문득, 이별이 인간을 힘들게 하는 진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사라졌다는 고통보다도, 잠시나마 느껴본 삶의 느낌… 생활이 아닌 그 느낌… 비로소 살아있다는 그 느낌과 헤어진 사실이 실은 괴로운게 아닐까… 생각이 든 것이었다.
생활
생활
생활 (p301)

곳곳에 배경음악에 대한 설명이 있다는 것으로 ‘하루키적’이라는 평도 많이 올라와 있다. 그렇게 배경음악을 지정하기 시작한게 하루키라 하더라도 난 박민규쪽의 선곡이 훨씬 맘에 든다. 마치 내가 이응준의 단편들을 좋아하는 것 처럼. 이응준 소설을 읽으면, 그 소설의 장소묘사와 배경음악묘사가. 가끔은. “이 남자 내가 사귀었던 남자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정도로(소설가 이응준님 용서하세요. 그럴리가) 내 취향과 비슷하고 눈과 귀에 착 감긴다.

스토리 자체보다도 배경과 음악이 익숙해서도 소설을 좋아할 수 있다는 면을 생각해 보면,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나에게 참 좋은 소설이다.

영진공 라이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미신과 속설은 어떻게 생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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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가 원래 불편부당해야 하는데, 이번에는 제가 참여한 책을 소개합니다.
네, 이 글은 광고입니다. ^_^;;;;;;

사실 제가 이 책의 번역 작업에서 차지하는 부분은 다른 한 명에 비해서 훨씬 작습니다. 그러니 제가 번역자를 대표해서 이 글을 쓰는 것도 바로 그 이유, 즉 제가 번역 과정에서 부족했던 참여를 대신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번역에 참여한 비중은 적지만 저는 이 책의 내용에 절절히 공감합니다.
한때 청소년들의 범죄나 비행이 모두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화의 탓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혐의는 갑자기 만화로 옮겨갔죠. <일진회> 같은 만화 때문에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일진이라는 그룹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수많은 만화가들이 검열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90년대 말이 되자 다시 혐의는 인터넷에게 뒤집어씌워졌습니다. 당시 청소년 범죄와 자살이 증가했던 것은 인터넷 보다는 외환위기로 인한 사회불안의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함에도 사람들은 인터넷을 탓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최근에는 다시 혐의가 컴퓨터 게임으로 집중되기 시작했습니다. 매체와 청소년을 연구주제로 삼은 사람으로서 저는 영화, 만화, 혹은 인터넷이나 게임이 청소년들의 범죄율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설득하고 증명하느라 노력해왔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논증도, 심지어 통계수치나 미국이나 유럽의 연구결과와 같은 명백한 증거들도 대단한 효과는 없었습니다. 그저 시간이 약이었을 뿐입니다. 문제의 그 매체가 너무도 당연해져서 주목을 덜 받게 되면 저절로 이 혐의는 사라지곤 했거든요.

즉, 어떤 매체건 처음에 소개되고 확산되기 시작하는 시기에는 많은 관심과 함께 다양한 혐의가 씌워집니다. 만약 처음에 부여된 혐의가 옳았다면 그 매체가 확산될수록 문제는 더 커져야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매체가 완전히 사회에 뿌리내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알거나 사용하게 되면 그 혐의는 어느새 잊혀집니다. 사람들은 이런 잘못된 고발을 반복하면서도 여전히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면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어리석어서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인간의 “예측하려는 본능” 탓이라고 해야겠죠.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원인’과 ‘결과’로 구분해서 파악하고 이걸 통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과정을 예측하고 통제한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았거든요. 우리는 모두 구름을 보고 비가 올 것을 예측할 줄 알았던 선조의 후손들인 셈 아닙니까. 그러나 이렇게 하나를 보고 열을 알아내는 인간의 위대한 능력이 부적절한 대상에 대해서 발휘 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우리를 지금까지 생존하고 번성해서 만물의 영장으로까지 만들어준 그 본능이 우리로 하여금 혈액형이 성격을 결정짓는다거나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불치병도 낫는다는 등의 바보 같은 미신을 사실로 믿게 만드는 거죠. 이 책의 저자는 그런 오류들이 왜 오류인지를 아주 세세하게 설명해줄 뿐만 아니라 그런 오류에 빠지지 않는 비법도 알려줍니다. 간단히 말해서 역과 대우에 해당하는 경우를 고려해보라는 것인데 책의 후반부에 더 자세한 설명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물론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살아가기에는 이 세상은 너무 빠듯합니다. 그래서 진짜 중요한 판단을 할 때만 그 전략을 사용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면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정말 중요한 판단인지를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사실 저는 이 책을 읽어보기 전부터 이 책에서 지적한 미신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라 미신이라는 주장에 반신반의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고, 심지어는 책을 읽고 나서도 여전히 반신반의할 독자도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잘못된 추론에 대해서 반박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요.

제가 바라는 것은 그저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이 책의 전략을 고려해보시라는 겁니다.

다른 이유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영진공 짱가

* 제가 많이 하진 않았더라도 이 책의 번역에 대해서는 꽤 자신있습니다.
다른 언어 번역서와의 교차검증까지 거치며 다듬고, 검토 할만큼 한 책입니다.

** 원제보다 번역본의 제목이 더 그럴듯한 책은 보기 드문데, 이 책이 그렇네요. ^_^
원래 제목은
How We Know What Isn’t So 라는, 적확하지만 우리말로는 임팩트가 좀 약한 이름입니다.

“책을 읽는 방법”, 다른 책을 연결해주는 다리 같은 책


 

맨 처음 읽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이 <책을 읽는 방법>이라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원래 이런 종류의 책은 좋아하는 소설가가 썼을 때 사지 않는가? 따지고보면 속독에 관한 책들을 제외한다면, 책을 어떻게 읽느냐에 관한 책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나보다 젊은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가, 나 자신은 책을 잘 읽고 있는지 의문이 들어 다시 한권을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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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 때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게 벌써 12년이 되었고, 그 동안 나름대로 읽는 방법이 정착이 되었다, 이제 와서 책읽는 방법을 바꾼다는 건 말이 안되는 것 같고, 소설가가 추천하는 책읽기는 어떤 것인지 그냥 참고만 하자. 이를테면 난 내 방법을 바꾸지 않겠다고 방어막을 친 거였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저자가 일관되게 권하는 독서방법은 슬로우 리딩, 아주 늦게 읽는 건 아니지만 나 정도면 그래도 천천히 읽는 편이니 말이다. 게다가 난 이상한 강박관념이 있어서 책을 대충 읽는다든지 특정 부분을 건너뛰고 읽는 걸 아주 싫어하며, 책에 찍힌 글자를 다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학생 때 비싸게 산 원서를 다 읽는다고 줄만 벅벅 긋고 그러다 시험을 망친 것도 그런 습관에 기인하는데, 내가 갖고 다니던 병리학 책을 펼쳐본 친구가 “아니 네가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했단 말야? 근데 성적은 왜 그 모냥..?”이라고 놀란 적도 있다. 하지만 그게 놀랄 건 아닌 것이, 답을 쓰려면 최소한 두번은 읽어야 하는데 노트만 읽기도 많은 양을 원서를 읽은데다, 공부한 시간이 남보다 많은 게 아니니 성적이 안좋은 건 당연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책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고 있으며, 내게 슬로우 리딩을 하라는 건 번지수가 틀렸다는 거다.

그렇다고 이 책이 유익하지 않다, 이런 건 아니다. 유명 저자들이 쓴 예문을 가지고 공부를 하면서 국어시간으로 되돌아간 듯해 마음이 편안했고, 거기에 더해 미시마 유키오라든지 나쓰메 소세키, 야스나리 등의 작품에 대해 호기심이 생겼으니 말이다. 그냥 이른 나이에 자살했다는 것만 알 뿐 작품은 하나도 안읽었던 그 작가들의 작품은, 예문에서 읽어보니 하나도 어렵지 않았고, 게다가 재미까지 있었다. 책은 다른 책을 연결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법,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한가지 더. 이 책에 나온 말 중 내가 100% 공감하는 구절이 있다. “블로그에 독서 감상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난 지금 여기다 감상문을 쓰고 있다.


영진공 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