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그 노래] “A Love Idea”,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1978년 당시 그야말로 혜성과 같이 등장했던 그룹 Dire Straits.


데뷔곡 “Sultans of Swing”은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전 세계 챠트를 휩쓸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기타리스트, 마크 노플러 (Mark Knopfler).


1949년 스코틀랜드 출생인 그는 특유의 멜랑콜리한 기타 연주와 중얼대는 보컬로 전 세계 음악팬들의 많은 사랑을 꾸준히 받고있다.


 


 


 



 


 




 


 


 


마크는 그룹과 솔로 활동 이외에도 의외로 꽤나 많은 영화음악을 작업하곤 했는데,


 [마크 노플러의 사운드트랙 목록 보기]


 


그 중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작품 중 하나가,


“브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 (Last Exit to Brooklyn).


 


이 영화는 1989년 개봉작으로 감독은 울리 에델, 그리고 주인공인 트랄라라 역은 제니퍼 제이슨 리가 맡았다. 혼돈과 폭력에 물들어있던 1950년대 미국 브룩클린을 무대로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려 몸부림치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비정한 사회를 묘사했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서 마크 노플러는 영화음악 전곡을 작곡하였다.


 


 


 




 


 


 


영화에 나오는 음악 중 가이 플레쳐가 연주한 “A Love Idea”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이들의 애청곡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 곡을 들어보도록 하자.


 


 


 




 


 




 


 


 


마크 노플러의 영화음악 중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곡을 하나 더 소개하며 포스팅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그 곡은 1984년 개봉작 “칼의 고백” (Cal)에 삽입되어있는 “The Long Road”.


 


 


 




 


 


 


 


 


영진공 이규훈


 


 


 


 


 


 


 


 


 


 


 


 


 


 


 


 


 


 


 


 


 


 


 


 


 


 


 


 


 


 


 


 


 


 


 


 

“머시니스트”, 지금 당신의 잠자리는 편안하신지?


머시니스트” (The Machinist, 2004)

   감독: “브래드 앤더슨”
   주연: “크리스찬 베일”, “제니퍼 제이슨 리”

헉! 그 몸짱 “크리스찬 베일”이 어쩌다 이렇게!! 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올만큼 가벼운(?) 몸을 이끌고 나와 뭇 여성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 영화는 ‘인체의 신비展’에 전시되어 있던 미이라를 대역으로 쓴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인데, 한 작품을 대하는 배우의 열정은 어디까지인가라는 감탄이 튀어 나오게 한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주연 배우의 다이어트 비법 말고는 내세울 것 없는 허접 영화가 아니다. 크리스찬 베일이 무슨 기아체험 100일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는 게 아닌 이상 무모한 영화를 위해 무모하게 살을 빼진 않았을 터. 영화 자체도 꽤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기계공이라는 제목과 주인공의 지독한 불면증을 보여주듯 저채도로 처리한 화면이라던가 몽롱하고 음산한 배경음악은 진짜 불면증을 앓는 듯 핼쓱해진 “크리스찬 베일”의 모습과 상승효과를 일으키며 몰입도를 200%로 상승시켜주고 있다.

이 영화를 한밤중에 혼자서 불끄고 다시 봤는데 엔딩 크레딧 올라가며 나오는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아주 오묘한 분위기가 느껴지는게 극중 주인공의 느낌이 이랬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뭐 최근 영화들의 트렌드에 따라 당 영화도 관객의 ‘뒤통수 가격하기’장르에 한쪽 발을 푸욱 담그고 있지만, 솔직히 이거 영화의 절반 이상 보고 있노라면 눈치빠른 사람이라면 대충 알아챌 수 있다.

일찍이 중국에서 거주하시던 맹자와 순자 할아버지는 인간의 본질을 인수분해 하여 각각 성선설과 성악설이란 이론으로 요점정리 하셨더랬다. 요즘 일부 초딩들의 시공간을 초월한 버르장머리의 기개를 보노라면 순자 할아버지의 팔을 번쩍 들어주고 싶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우리 사회의 개념없는 교육정책과 교육열의 문제이기도 하기에 맹자 할아버지 말도 맞는 듯 하다.

여튼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인간이란 존재는 쉽게 악에 물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그래도 돌아가고 있는 건 우리 가슴 속에 죄책감이라는 것이 조금이나마 존재하기 때문은 아닐까.

영진공 self_fish

“시네도키, 뉴욕” 천재 시나리오 작가의 머리 속으로

찰리 카우프먼의 감독 데뷔작입니다. 원래 스파이크 존즈가 연출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찰리 카우프먼이 직접 연출까지 맡게 된 것이라 하네요 – 대신 스파이크 존즈는 제작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긴 합니다. 그런데 혹시 스파이크 존즈나 미셸 공드리가 이 작품을 연출했더라면 어떤 작품이 되었을까요? 좀 더 재미있고 깔끔하게 만들어졌을 수는 있지만 역시나 우울하기는 매한가지였을 겁니다.

<시네도키, 뉴욕>이 우울한 것은 그저 삶 자체가 지독하게 우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찰리 카우프먼이 발견해낸 삶의 우울이죠.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지만 영화관에서 그런 전제 조건에 충실한 비극적 코미디와 씨름을 하다보면 마음은 어느새 가라앉을 수 밖에 없는 거겠죠. 약간의 위안을 얻을 만한 장면이 있긴 합니다만 분위기를 반전시킬 의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리스 비극의 원리에 충실한 작품으로 남겨두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시나리오 작가 출신으로 감독 데뷔를 하는 경우가 그리 보기 드문 케이스는 아닙니다만 찰리 카우프먼의 <시네도키, 뉴욕>은 마치 평론가 출신의 감독 데뷔작처럼 보일 정도로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채택된 내러티브의 전개 방식 역시 마치 생쌀을 씹어 넘기는 것 만큼이나 거칠고 난해하게 느껴집니다.

이미 죽은 나와 말년까지 고통받는 나, 나를 대신해서 연기하는 배우와 그 배우를 연기하는 또 다른 배우, 실제를 닮은 연극과 연극처럼 보이는 실제, 극장 안에 뉴욕 전체를 넣고 끊임없이 리허설만 반복하는 초대형 공연 계획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네도키, 뉴욕>을 반드시 봐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이제까지 찰리 카우프먼이 시나리오를 제공했던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예전에 보지 못했던 놀라운 상상력과 통찰력을 맛볼 수 있었듯이 이번 감독 데뷔작 역시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 레퍼러스가 될 만한 작품을 찾기 힘들 정도의 – 영화말고 희곡 작품에서는 좀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찰리 카우프먼의 영화 속에서 언제 한번 주인공들이 제대로 기를 펴고 살아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이긴 하지만 – 그래서 찰리 카우프먼 영화 속 인물들이 유난히 사랑스러웠던(?) 것인지도 – 이번 <시네도키, 뉴욕>의 연극 연출가 케이든 코타르(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처럼 바닥을 닥닥 긁어대는 경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싶습니다.

그래도 여복은 타고난 것인지 딸 아이를 데리고 독일로 가버린 미술가(캐서린 키너),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격려해주는 꽃다운 여배우(미셸 윌리엄스), 그닥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말년을 함께 해주는 여인(사만다 모튼), 그리고 온 몸에 문신을 한 채 오해와 저주를 끌어안고 숨을 거두는 자신의 딸(로빈 웨이거트)까지 케이든 코타르의 삶은 여인들의 품에 안겨 그 안에서 고통을 받고 희망도 찾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되지요 – 이건 뭐 리어왕과 함께 비극의 전당 최고 상석에 앉을 자격이 충분하지 싶습니다.

네. 솔직히 지금은 <시네도키, 뉴욕>을 통해 찰리 카우프먼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천재 시나리오 작가의 예술적 니힐리즘을 맛본 텁텁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책맞은 자기 동정으로 관객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 찰리 카우프먼식 유머가 전편에 깔려 있는 데다가 영화의 내용을 해석하는 한 가지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합니다.

<시네도키, 뉴욕>은 영화의 내용 자체가 현실과 예술 작품 사이의 상호 반영을 다루고 있는 바, 분명 찰리 카우프먼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네도키, 뉴욕>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연출했던 1999년작 <존 말코비치 되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찰리 카우프먼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 잠시 동안 찰리 카우프먼처럼 생각하고 느낄 기회가 있다면 그 경험은 아마도 <시네도키, 뉴욕>에서 본 것들과 무척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시네도키, 뉴욕>은 찰리 카우프먼의 영화들을 좋아하는 선을 넘어서 찰리 카우프먼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터널과도 같은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머시니스트 (El Maquinista, 2000), “크리스챤 베일의 모습 자체로도 충격적인 영화.”


흑백에 가까운 칙칙한 색감과 주인공의 과거를 되집어 나가는 형식이라는 점에서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2002)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감추어진 과거의 기억이 수많은 데자뷰를 통해 단절적으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머시니스트>는 좀 더 난해한 공포물의 느낌을 준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주인공이 겪은 1년 간의 불면증과 결벽증, 심각한 수준의 체중 감소, 그리고 여러 정신 착란 증세들의 근본 원인이 속시원히 밝혀지지만 그것은 이제껏 보지 못한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무엇이라기 보다는 한 인간에 대한 깊은 연민과 위안으로 자리 잡는다.

사실 <머시니스트>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부분은 다름 아닌 이 영화를 위해 30kg을 감량했다는 크리스챤 베일의 모습 그 자체다. 한 편의 영화를 위해서, 그리고 그 안의 인물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이쯤되면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우리의 고정 관념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예전에 <정사>(Intimacy, 2000)에서 케리 폭스의 연기를 봤을 때에도 새삼스레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해보는 계기가 되었었는데, 일반적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수준을 뛰어넘어 그 이상의 것들을 보여주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배우도 엄연한 예술가로서의 지위를 인정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자연인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선 크리스챤 베일의 성취와 연기에 힘입어 <머시니스트>는 보기 드문 강한 설득력으로 무장한 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시작된 주인공의 길고 긴 내면적 고통의 깊이가 관객들에게 이토록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배우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마침내 되찾은 영혼의 안식이란 과연 어떠한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체감할 수 있게 해주는 <머시니스트>의 에필로그는 바로 이러한 부분의 정점이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