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겁고 행복한 설 맞이하세요

지금이 비록 혹독한 시절이긴 해도,

명절은 즐겁게 지내자고요,

기쁨과 훈훈함이 가득한 설이 되기를 빌며,

영진공이 세배 올립니다.

새해 많이 받으세요

^.^

“Buck up – never say die!
We’ll get along!”

영진공 일동 올림

“시네도키, 뉴욕” 천재 시나리오 작가의 머리 속으로

찰리 카우프먼의 감독 데뷔작입니다. 원래 스파이크 존즈가 연출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일정이 맞지 않아 찰리 카우프먼이 직접 연출까지 맡게 된 것이라 하네요 – 대신 스파이크 존즈는 제작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긴 합니다. 그런데 혹시 스파이크 존즈나 미셸 공드리가 이 작품을 연출했더라면 어떤 작품이 되었을까요? 좀 더 재미있고 깔끔하게 만들어졌을 수는 있지만 역시나 우울하기는 매한가지였을 겁니다.

<시네도키, 뉴욕>이 우울한 것은 그저 삶 자체가 지독하게 우울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찰리 카우프먼이 발견해낸 삶의 우울이죠. 너도 죽고 나도 죽고,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지만 영화관에서 그런 전제 조건에 충실한 비극적 코미디와 씨름을 하다보면 마음은 어느새 가라앉을 수 밖에 없는 거겠죠. 약간의 위안을 얻을 만한 장면이 있긴 합니다만 분위기를 반전시킬 의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리스 비극의 원리에 충실한 작품으로 남겨두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시나리오 작가 출신으로 감독 데뷔를 하는 경우가 그리 보기 드문 케이스는 아닙니다만 찰리 카우프먼의 <시네도키, 뉴욕>은 마치 평론가 출신의 감독 데뷔작처럼 보일 정도로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인간 실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작품 전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채택된 내러티브의 전개 방식 역시 마치 생쌀을 씹어 넘기는 것 만큼이나 거칠고 난해하게 느껴집니다.

이미 죽은 나와 말년까지 고통받는 나, 나를 대신해서 연기하는 배우와 그 배우를 연기하는 또 다른 배우, 실제를 닮은 연극과 연극처럼 보이는 실제, 극장 안에 뉴욕 전체를 넣고 끊임없이 리허설만 반복하는 초대형 공연 계획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네도키, 뉴욕>을 반드시 봐야 할 이유를 찾는다면, 이제까지 찰리 카우프먼이 시나리오를 제공했던 작품들을 통해 우리가 예전에 보지 못했던 놀라운 상상력과 통찰력을 맛볼 수 있었듯이 이번 감독 데뷔작 역시 다른 어느 곳에서도 그 레퍼러스가 될 만한 작품을 찾기 힘들 정도의 – 영화말고 희곡 작품에서는 좀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 독창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찰리 카우프먼의 영화 속에서 언제 한번 주인공들이 제대로 기를 펴고 살아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이긴 하지만 – 그래서 찰리 카우프먼 영화 속 인물들이 유난히 사랑스러웠던(?) 것인지도 – 이번 <시네도키, 뉴욕>의 연극 연출가 케이든 코타르(필립 세이모어 호프먼)처럼 바닥을 닥닥 긁어대는 경우는 처음이자 마지막이겠지 싶습니다.

그래도 여복은 타고난 것인지 딸 아이를 데리고 독일로 가버린 미술가(캐서린 키너),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주고 격려해주는 꽃다운 여배우(미셸 윌리엄스), 그닥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말년을 함께 해주는 여인(사만다 모튼), 그리고 온 몸에 문신을 한 채 오해와 저주를 끌어안고 숨을 거두는 자신의 딸(로빈 웨이거트)까지 케이든 코타르의 삶은 여인들의 품에 안겨 그 안에서 고통을 받고 희망도 찾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되지요 – 이건 뭐 리어왕과 함께 비극의 전당 최고 상석에 앉을 자격이 충분하지 싶습니다.

네. 솔직히 지금은 <시네도키, 뉴욕>을 통해 찰리 카우프먼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천재 시나리오 작가의 예술적 니힐리즘을 맛본 텁텁함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책맞은 자기 동정으로 관객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 찰리 카우프먼식 유머가 전편에 깔려 있는 데다가 영화의 내용을 해석하는 한 가지 방법을 친절하게 알려주기까지 합니다.

<시네도키, 뉴욕>은 영화의 내용 자체가 현실과 예술 작품 사이의 상호 반영을 다루고 있는 바, 분명 찰리 카우프먼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네도키, 뉴욕>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연출했던 1999년작 <존 말코비치 되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찰리 카우프먼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 잠시 동안 찰리 카우프먼처럼 생각하고 느낄 기회가 있다면 그 경험은 아마도 <시네도키, 뉴욕>에서 본 것들과 무척 비슷하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시네도키, 뉴욕>은 찰리 카우프먼의 영화들을 좋아하는 선을 넘어서 찰리 카우프먼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들이 반드시 통과해야 할 터널과도 같은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영진공 신어지

발꼬락 뜯어먹는데 재밌네? <이웃집 좀비>

개봉을 앞둔 <이웃집 좀비>는 신선한 충격이다.
유독 ‘좀비’ 영화만을 피해온 영화 편식인임에도 이 영화가 좋은 이유는, 영화 안팎으로 포진한 여러 특별함 때문이다.

우선, 2천만원이라는 초저예산으로 완성된 웰메이드라는 점,
홍영두, 장윤정 감독(부부)의 살림집 옥탑방에서 만들어진영리한 ‘하우스무비’라는 점,
충무로 영화현장에서 조감독, 제작팀, 배우, 분장팀으로 만난 네 명의 영화꾼이 의기투합해 이룬 결과물이라는 점이 그렇다.

어느 한국영화에서도 보기 드문 창의적인 제작시스템, 거기에 열정과 우정을 더해 탄생한 이 좀비영화는 좀비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개인적 취향조차도 단숨에 바꿔버렸다.

<이웃집 좀비>의 오영두, 홍영근, 류훈, 장윤정 감독

영화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빽 지르다가도 낄낄 웃게 되고, 어느새 코끝이 찡해 오는 걸 참다가 또다시 괴성을 치게 만든다.
이렇게 감정의 흐름을 타는 게 영화 관람의 키 포인트가 되겠다.

기대보다 개봉관 수가 적지만, 워낭소리가 영화의 힘으로7개에서 300여 개관으로 확대 개봉된 전례에 비춰 볼때, 그 숫자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웃집 좀비>는 2월 18일 개봉한다.


[ 요거슨 예고편 … ]

영진공 애플

[근조] 길창덕 화백

길   창   덕
(1930. 1. 10. ~ 2010. 1. 30.)
”]

한국 만화를 대표하는 선생의 별세 소식을 이제야 접하였습니다.

혹시 선생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은 여기를 참고하세요. [위키백과 한국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진공 일동

애플과 MS, 지향점의 차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파인만이 쓴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라는 자서전이 있다. 거기서 파인만은 다른 동료 물리학자들과 함께 컴퓨터를 처음으로 접했을 때의 일을 언급하며, 동료 중 한 사람이 “컴퓨터를 이용해서 결과를 도출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 자체를 다루는 재미에 빠져 업무를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지금 곁에 책이 없어서 정확한 원문을 언급하긴 어렵지만, 대충 그런 뉘앙스의 말이었다)



그리고 매킨토시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프 래스킨 교수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운영체계에 대한 나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어플리케이션으로 작업하기 위해 거쳐가야 할 것. 운영체계는 자동차 엔진의 피스톤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들여다 보거나 만질 이유가 거의 없는 것처럼요.”



또한, 예전에 내가 번역했던 Usable GUI Design : A Quick Guide(원문 링크는 소실, 번역문 링크로 대체)라는 글에선 첫머리부터 이런 주장을 펼친다.



“사용자는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하려 들지 않는다 … 사용자는 작업을 가능한 빠르고 쉽게 끝내고 싶어하며, 어플리케이션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도구다. 어플리케이션을 배우고 다루는데 들이는 시간만큼, 사용자는 자신의 할 일을 뒤로 미뤄야 할 것이다 …”




여태껏 다른 사람들의 말을 주구장창 늘어 놨는데, 이걸 간단히 요약하자면 “컴퓨터고, OS고, 어플리케이션이고, 도구일 뿐이다. 복잡하게 만들지 마!”로 정리되겠다.


물론 해커라던가, 너드라던가, 파워 유저라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 주장에 찬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컴퓨터로 뭔가 결과를 얻기보다는 컴퓨터 자체를 가지고 노는 재미에 빠진 사람들이니까. 고백하건데, 한때 나도 그랬다.

MS는 해커 – 혹은 파워 유저의 논리에 충실하다. 어쨌든 이거저거 다 조작하고, 변경하고, 바꿀 수 있다. 하다못해 오피스 소프트웨어의 메뉴 위치까지도 옮겨놓을 수 있을 정도다. UI 최적화를 하기보다는 자유롭게 UI를 변경할 수 있도록 하고, 잘못하면 시스템 퍼포먼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까지도 설정할 수 있도록 해서 사용자로 하여금 자신에게 적합한 환경을 스스로 꾸밀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MS의 철학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써드파티 윈도우 어플리케이션 역시 이러한 철학에 충실하다.



하지만 애플은 이와는 다르다. 철저하게 사용자에게 최적화된 작업 환경을 만들어 제공한다. 그걸로 끝. UI 변경? 글쎄, 창닫기 버튼 색깔 정도는 바꿀 수 있겠지만 …… 기능 설정? 멍청한 사용자 주제에 감히 어딜 건드리겠다고, 버럭!




MS의 방식은 개발자에게 적합하다.
골치 아픈 사용성은 나중에 생각하고, 뚝딱뚝딱 만들기 좋다. 같은 개발자라거나 해커, 너드, 파워 유저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다. 그래, 모름지기 컴퓨터라면 이래야지! OS라면 이래야지! 어플리케이션이라면 이래야지! 내 맘대로 확장하고, 바꿀 수 있어야지!



반면, 애플의 방식은 대부분의 덤앤더머 …… 아니, 일반인들에게 적합하다.
OS나 어플리케이션에 익숙해지기까지의 학습 곡선이 상당히 짧다. 어라, 그냥 굴리니까 되네? 어라, 그냥 문지르니까 되네? 그래, 내가 원한 건 이렇게 간단한 거야! 복잡한 건 파워 유저니 뭐니 하면서 잘난 체 하는 피터 파커 같은 안경잽이들이나 쓰라고 해!



이 둘의 지향점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맥용 어플리케이션인 스크라이브너 scrivener(http://www.literatureandlatte.com/scrivener.html )와 윈도우용 어플리케이션인 드림노트( http://ukino.com/?mid=dreamnote)이다.

둘 다 소설가 또는 시나리오 작가가 글을 쓰는 데 최적화된 작가(Writer)용 툴로써, 어느 쪽이건 개발자는 한 명뿐이다. 실질적인 개발 능력에선 별 차이가 없으니만큼 공평한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참고샷 : 스크라이브너 화면



참고샷 : 드림노트 화면




기능을 보면 당연히 드림노트 쪽이 훨씬 많아 보인다. 캐릭터도 따로 관리할 수 있고, 지도도 만들 수 있고, 하여간 이거저거 다 된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직접 써 보면 “도대체 이걸 뭐 어쩌라는 거지?”란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개발자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기능을 분주히 집어넣는 데 몰두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비슷한 인종일 거라고 착각해버린 것이다(주 1). 하지만 작가는 개발자보다는 덤앤더머에 가까운 인종이다(나도 요즘 그렇게 퇴화되어 가고 있다!)



스크라이브너는 이와는 정반대다. 기능은 부족할진 몰라도 우아하고 편안하다. 스크린샷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꼭 필요한 기능을 덤앤더머 …… 아니, 작가들이 쓰기 편하게 배치시켜 놨다. “이런 기능이 있으면 좋겠는데”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저 아쉬움일 뿐이다. 용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여태까지는 MS의 방향이 옳다고 믿어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점차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접하게 되고, 컴퓨팅 환경이 휴대용 기기로 확산되면서부터는 서서히 애플 쪽으로 저울추가 기울고 있다. 어찌 됐건 이 세상엔 개발자나 해커, 파워 유저보다는 일반유저가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그나저나 스크라이브너 2.0은 대체 언제나 나오려나? 이번엔 제발 타임라인 기능이 추가되어 주기를, 제발!




(주1: 드림노트 개발자의 명예를 위해 미리 밝혀두지만, 혼자서 이만한 기능을 갖춘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만일 제대로 된 기획자가 UI를 정비한다면 드림노트도 상당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영진공 DJ 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