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과 MS, 지향점의 차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파인만이 쓴 [파인만씨, 농담도 잘 하시네]라는 자서전이 있다. 거기서 파인만은 다른 동료 물리학자들과 함께 컴퓨터를 처음으로 접했을 때의 일을 언급하며, 동료 중 한 사람이 “컴퓨터를 이용해서 결과를 도출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 자체를 다루는 재미에 빠져 업무를 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지금 곁에 책이 없어서 정확한 원문을 언급하긴 어렵지만, 대충 그런 뉘앙스의 말이었다)



그리고 매킨토시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프 래스킨 교수는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운영체계에 대한 나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어플리케이션으로 작업하기 위해 거쳐가야 할 것. 운영체계는 자동차 엔진의 피스톤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들여다 보거나 만질 이유가 거의 없는 것처럼요.”



또한, 예전에 내가 번역했던 Usable GUI Design : A Quick Guide(원문 링크는 소실, 번역문 링크로 대체)라는 글에선 첫머리부터 이런 주장을 펼친다.



“사용자는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하려 들지 않는다 … 사용자는 작업을 가능한 빠르고 쉽게 끝내고 싶어하며, 어플리케이션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도구다. 어플리케이션을 배우고 다루는데 들이는 시간만큼, 사용자는 자신의 할 일을 뒤로 미뤄야 할 것이다 …”




여태껏 다른 사람들의 말을 주구장창 늘어 놨는데, 이걸 간단히 요약하자면 “컴퓨터고, OS고, 어플리케이션이고, 도구일 뿐이다. 복잡하게 만들지 마!”로 정리되겠다.


물론 해커라던가, 너드라던가, 파워 유저라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 주장에 찬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컴퓨터로 뭔가 결과를 얻기보다는 컴퓨터 자체를 가지고 노는 재미에 빠진 사람들이니까. 고백하건데, 한때 나도 그랬다.

MS는 해커 – 혹은 파워 유저의 논리에 충실하다. 어쨌든 이거저거 다 조작하고, 변경하고, 바꿀 수 있다. 하다못해 오피스 소프트웨어의 메뉴 위치까지도 옮겨놓을 수 있을 정도다. UI 최적화를 하기보다는 자유롭게 UI를 변경할 수 있도록 하고, 잘못하면 시스템 퍼포먼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부분까지도 설정할 수 있도록 해서 사용자로 하여금 자신에게 적합한 환경을 스스로 꾸밀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MS의 철학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써드파티 윈도우 어플리케이션 역시 이러한 철학에 충실하다.



하지만 애플은 이와는 다르다. 철저하게 사용자에게 최적화된 작업 환경을 만들어 제공한다. 그걸로 끝. UI 변경? 글쎄, 창닫기 버튼 색깔 정도는 바꿀 수 있겠지만 …… 기능 설정? 멍청한 사용자 주제에 감히 어딜 건드리겠다고, 버럭!




MS의 방식은 개발자에게 적합하다.
골치 아픈 사용성은 나중에 생각하고, 뚝딱뚝딱 만들기 좋다. 같은 개발자라거나 해커, 너드, 파워 유저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다. 그래, 모름지기 컴퓨터라면 이래야지! OS라면 이래야지! 어플리케이션이라면 이래야지! 내 맘대로 확장하고, 바꿀 수 있어야지!



반면, 애플의 방식은 대부분의 덤앤더머 …… 아니, 일반인들에게 적합하다.
OS나 어플리케이션에 익숙해지기까지의 학습 곡선이 상당히 짧다. 어라, 그냥 굴리니까 되네? 어라, 그냥 문지르니까 되네? 그래, 내가 원한 건 이렇게 간단한 거야! 복잡한 건 파워 유저니 뭐니 하면서 잘난 체 하는 피터 파커 같은 안경잽이들이나 쓰라고 해!



이 둘의 지향점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맥용 어플리케이션인 스크라이브너 scrivener(http://www.literatureandlatte.com/scrivener.html )와 윈도우용 어플리케이션인 드림노트( http://ukino.com/?mid=dreamnote)이다.

둘 다 소설가 또는 시나리오 작가가 글을 쓰는 데 최적화된 작가(Writer)용 툴로써, 어느 쪽이건 개발자는 한 명뿐이다. 실질적인 개발 능력에선 별 차이가 없으니만큼 공평한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참고샷 : 스크라이브너 화면



참고샷 : 드림노트 화면




기능을 보면 당연히 드림노트 쪽이 훨씬 많아 보인다. 캐릭터도 따로 관리할 수 있고, 지도도 만들 수 있고, 하여간 이거저거 다 된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직접 써 보면 “도대체 이걸 뭐 어쩌라는 거지?”란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개발자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기능을 분주히 집어넣는 데 몰두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비슷한 인종일 거라고 착각해버린 것이다(주 1). 하지만 작가는 개발자보다는 덤앤더머에 가까운 인종이다(나도 요즘 그렇게 퇴화되어 가고 있다!)



스크라이브너는 이와는 정반대다. 기능은 부족할진 몰라도 우아하고 편안하다. 스크린샷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꼭 필요한 기능을 덤앤더머 …… 아니, 작가들이 쓰기 편하게 배치시켜 놨다. “이런 기능이 있으면 좋겠는데”라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저 아쉬움일 뿐이다. 용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여태까지는 MS의 방향이 옳다고 믿어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점차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접하게 되고, 컴퓨팅 환경이 휴대용 기기로 확산되면서부터는 서서히 애플 쪽으로 저울추가 기울고 있다. 어찌 됐건 이 세상엔 개발자나 해커, 파워 유저보다는 일반유저가 압도적으로 많으니까.



그나저나 스크라이브너 2.0은 대체 언제나 나오려나? 이번엔 제발 타임라인 기능이 추가되어 주기를, 제발!




(주1: 드림노트 개발자의 명예를 위해 미리 밝혀두지만, 혼자서 이만한 기능을 갖춘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만일 제대로 된 기획자가 UI를 정비한다면 드림노트도 상당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영진공 DJ Han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

재외공관소식
2006년 9월 13일

“지금까지 컴퓨터는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중에게 해를 끼치는데 사용되었다. 민중의 해방이 아니라 민중의 통제를 위해 사용되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때가 되었다.”
– 피플즈 컴퓨터 사의 성명서 (1972년 10월),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 중에서 발췌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차드 파인만 박사의 자서전에는, 동료 물리학자가 복잡한 계산을 하려고 컴퓨터를 배우다가 그만 컴퓨터 자체에 푹 빠져 버려 몇날 며칠 밤을 새면서 컴퓨터를 붙들고 있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파인만 박사는 문제 해결의 수단인 컴퓨터를 목적으로 착각하는 건 대단히 어리석은 짓이란 뉘앙스를 풍겼다.

분명 컴퓨터는 평범한 인간의 두뇌로 처리하기 힘든 복잡한 계산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수학적인 기계에 불과하다. 도구라는 점에 있어서는 낫이나 망치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컴퓨터는 인간의 명령에 반응해서 다양한 결과를 도출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양면에서 끝없는 개선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해커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컴퓨터를 다루는 일로 어떠한 이익을 창출하기보다는 컴퓨터를 다루는 일 자체에서 만족감을 얻었던 사람들, 컴퓨터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 그 중에는 개인적인 자부심을 위해 컴퓨터에 몰두한 이기주의자가 있었고, 컴퓨팅 능력은 정부기관이나 대기업에서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골고루 분배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이상주의자가 있었고, 컴퓨터야말로 하인라인이나 아시모프의 비전을 실현시켜줄 장치로 숭배한 낭만주의자가 있었다.

스티븐 레비의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다. 컴퓨터의 여명기인 50년대 말부터 시작해서 애플 컴퓨터를 시작으로 하는 80년대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MIT의 컴퓨터 연구실에서 홈브루 컴퓨터 클럽과 시에라 온라인을 무대로 삼아 펼쳐진 수많은 해커들의 역사적인 이야기를 꼼꼼하게 기록한 책이다.
‘모든 정보는 공유되어야 한다’는 해커들의 윤리는 70년대 말, 빌 게이츠가 알테어용 베이직을 유료로 판매하면서부터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했다. 워즈니악이 개발한 애플 컴퓨터가 날개돋친 듯이 팔리면서 공학자가 아닌 일반인 중에서도 컴퓨터 해킹에 몰두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 해커였던 캔 윌리엄스는 애플 II용 어드벤쳐 게임을 만들어 대박을 터뜨려 컴퓨터 게임 회사 시에라 온라인을 설립했다. 해커들이 세운 회사는 성장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해커들 자신이 그렇게 증오하던 ‘공룡’ IBM과 마찬가지로 비효율적인 괴물이 되어버렸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1983년, 해커의 윤리가 사라지는 것을 한탄하며 그 소스부터 결과물까지 완전히 공개된 GNU 유닉스를 개발한 리처드 스톨맨의 이야기이다. 이 책이 나왔을 당시에는 아마도 전통적인 해커의 윤리는 ‘끝장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모양이다.

재미있는 것은 20여년이 지난 지금, ‘모든 정보는 공유되어야 한다’는 윤리가 다시금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개 OS인 리눅스를 필두로 하여 다양한 서비스와 API를 무료로 제공하는 인터넷 기업에 이르기까지, 소스와 결과물을 독점적인 판매물로 꽁꽁 묶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공룡’들이나 하는 짓거리로 전락해 버렸다.
21세기에 와서 되살아나는 해커의 윤리, 그것이 전세기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놨는지 알고 싶다면 읽어야 할 책이다. 10년 전인 96년에 나온 책이라 구해보기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재외공관 독서권장위원회
DJ. HAN (djhan@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