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

재외공관소식
2006년 9월 13일

“지금까지 컴퓨터는 민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민중에게 해를 끼치는데 사용되었다. 민중의 해방이 아니라 민중의 통제를 위해 사용되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변화시킬 때가 되었다.”
– 피플즈 컴퓨터 사의 성명서 (1972년 10월),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 중에서 발췌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차드 파인만 박사의 자서전에는, 동료 물리학자가 복잡한 계산을 하려고 컴퓨터를 배우다가 그만 컴퓨터 자체에 푹 빠져 버려 몇날 며칠 밤을 새면서 컴퓨터를 붙들고 있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파인만 박사는 문제 해결의 수단인 컴퓨터를 목적으로 착각하는 건 대단히 어리석은 짓이란 뉘앙스를 풍겼다.

분명 컴퓨터는 평범한 인간의 두뇌로 처리하기 힘든 복잡한 계산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수학적인 기계에 불과하다. 도구라는 점에 있어서는 낫이나 망치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컴퓨터는 인간의 명령에 반응해서 다양한 결과를 도출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양면에서 끝없는 개선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해커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컴퓨터를 다루는 일로 어떠한 이익을 창출하기보다는 컴퓨터를 다루는 일 자체에서 만족감을 얻었던 사람들, 컴퓨터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 그 중에는 개인적인 자부심을 위해 컴퓨터에 몰두한 이기주의자가 있었고, 컴퓨팅 능력은 정부기관이나 대기업에서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골고루 분배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이상주의자가 있었고, 컴퓨터야말로 하인라인이나 아시모프의 비전을 실현시켜줄 장치로 숭배한 낭만주의자가 있었다.

스티븐 레비의 [해커, 그 광기와 비밀의 기록]은 바로 그런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다. 컴퓨터의 여명기인 50년대 말부터 시작해서 애플 컴퓨터를 시작으로 하는 80년대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MIT의 컴퓨터 연구실에서 홈브루 컴퓨터 클럽과 시에라 온라인을 무대로 삼아 펼쳐진 수많은 해커들의 역사적인 이야기를 꼼꼼하게 기록한 책이다.
‘모든 정보는 공유되어야 한다’는 해커들의 윤리는 70년대 말, 빌 게이츠가 알테어용 베이직을 유료로 판매하면서부터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했다. 워즈니악이 개발한 애플 컴퓨터가 날개돋친 듯이 팔리면서 공학자가 아닌 일반인 중에서도 컴퓨터 해킹에 몰두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 해커였던 캔 윌리엄스는 애플 II용 어드벤쳐 게임을 만들어 대박을 터뜨려 컴퓨터 게임 회사 시에라 온라인을 설립했다. 해커들이 세운 회사는 성장을 거듭하면서 마침내 해커들 자신이 그렇게 증오하던 ‘공룡’ IBM과 마찬가지로 비효율적인 괴물이 되어버렸다.
이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1983년, 해커의 윤리가 사라지는 것을 한탄하며 그 소스부터 결과물까지 완전히 공개된 GNU 유닉스를 개발한 리처드 스톨맨의 이야기이다. 이 책이 나왔을 당시에는 아마도 전통적인 해커의 윤리는 ‘끝장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던 모양이다.

재미있는 것은 20여년이 지난 지금, ‘모든 정보는 공유되어야 한다’는 윤리가 다시금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개 OS인 리눅스를 필두로 하여 다양한 서비스와 API를 무료로 제공하는 인터넷 기업에 이르기까지, 소스와 결과물을 독점적인 판매물로 꽁꽁 묶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공룡’들이나 하는 짓거리로 전락해 버렸다.
21세기에 와서 되살아나는 해커의 윤리, 그것이 전세기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놨는지 알고 싶다면 읽어야 할 책이다. 10년 전인 96년에 나온 책이라 구해보기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재외공관 독서권장위원회
DJ. HAN (djhan@thrune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