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의 심리를 분석해보자!

 

 


 


 



 


 


“스파이더맨”은 한 마디로 성장드라마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소위 철없는 청소년이 거대한 힘을 갖게 되었을 때 가질 수 있는 심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스파이더맨은 ‘유전자 변이된 거미’라는 로또 복권에 당첨된 왕따 청소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청소년은 평소에 인기도 없고 집도 가난하고, 좋아하는 여자에게 말도 제대로 붙여본 적 없는 왕따였죠. 그는 그런 자기 모습이 아주 싫었을 겁니다. 그런데 거미에게 물린 덕분에 정말로 그런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행운을 얻은 거예요. 문제는 그 행운이 너무 거대하다는 겁니다. 마치 거액 복권당첨처럼 말이죠. 처음에는 자신의 능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 모릅니다. 로또 당첨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당첨된 사실을 알리자니 그것도 불안하고(여기저기서 도와달라 손을 벌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범죄의 표적이 되기도 하겠지요), 그렇다고 숨기고 있자니 지금 처한 꿀꿀한 상황을 계속 참아내야 하고. 그래서 그는 어떻게 이 힘을 사용해야 할 지 고민에 빠집니다.


 


그런 상황에 놓여진 스파이더맨의 성격은 이상주의와 낙관성인데, 이것 역시 청소년기의 특성입니다. 청소년들은 대부분 마음 한구석에 이 세상에 정의는 살아있으며 모두가 조금씩 노력한다면 세상은 그 정의에 한걸음씩 가까워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론 그런 희망 때문에 그만큼 쉽게 좌절하고 환멸을 느끼기도 하지만요. 개인적으로는 조금 손해 보더라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청소년들은 기부나 자원봉사에 관심이 많고 직접 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모두들 마음속은 스파이더맨과 비슷한 것이죠.


 


 


 



 


 


 


스파이더맨이 처음 접하는 중압감은 막대한 힘에 따르는 책임감이 아닙니다. 우선은 자기에게 생긴 비밀이 주는 부담감이 먼저죠. 그는 부모처럼 지내던 삼촌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자신의 비밀을 밝힐 수 없어요. 그런데 이런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사춘기에 일어나는 신체적인 변화(이차성징)와 호르몬의 균형이 바뀌면서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나 욕망들이 떠오르는데 그런 것을 부모님이나 친구에게 말할 수 없으니 혼자 간직하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서서히 ‘나’라는 개인의 독특성에 대한 자각을 하게 됩니다. 비로소 부모나 친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는 개인으로 태어나는 거죠. 루소가 말한 제2의 탄생이나 청년심리학자 ‘홀링워스’가 말하는 심리적 이유기인 것이죠.


 


그렇다면 심리적인 요인은 능력발휘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요.


 


스트레스는 특히 중추신경계의 작용에 의존하는 여러 가지 섬세한 활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속도를 다루는 수영 경기나 섬세한 호흡에 의존하는 사격, 타이밍이나 타격점에 의해 좌우되는 골프, 야구 같은 경기에서 선수들의 능력도 스트레스에 의해서 오르락 내리락 하지요. 그런데 스트레스가 너무 많아도, 너무 없어도 역시 경기력은 떨어집니다. 적당한 긴장이 필요한 거죠. 그래서 스트레스나 긴장이 경기력(혹은 여러 가지 수행performance)에 미치는 영향은 언제나 역 U자형 그래프를 그리죠. 이를 여키즈-도슨 법칙(Yerkes-Dodson law)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스파이더맨2 편에서 피터가 갑자기 능력을 잃어버리는 장면은 청소년기의 불안정함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청소년기에는 팔다리의 길이나 체중이 갑자기 늘어나기 때문에 예전에는 잘 하던 운동을 갑자기 못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갑자기 키가 커버리면 오르내리던 계단에서 걸려 넘어지거나 굴러 떨어지는 일을 겪게 됩니다. 그제서야 자기가 평소에는 아무생각 없이 숨쉬는 것처럼 하던 일이 의외로 복잡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곤 하지요. 게다가 감정의 변화도 커서 어느 날은 우울하다가 갑자기 활기찬 모습을 보이고 화를 내다가 온순해지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불안정한 것이 청소년기입니다.


 


 


 



 


 


 


[뽀나스]


아이언맨은 우울증환자에 가깝습니다.


남자들은 대개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 동굴로 기어들어가는데 아이언맨 수트는 최첨단 동굴이라고 볼 수 있거든요. 아이언맨이 어떤 상처를 입었냐고요? 토니 스타크의 상징 자체가 뻥뚫린 가슴 아닙니까. 텅빈 가슴을 기계심장으로 채워넣은 남자가 토니죠.


 


어쨌든 다른 수퍼영웅들은 나름의 트라우마가 있던가 태생이 다르던가, 혹은 사고가 있었던가 하는데 토니스타크는 그 좋은 머리와 엄청난 재산을 활용하여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었음에도 굳이 아이언맨을 고집한다는 점에서 병이 매우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진공 짱가


 


 


 


 


 


 


 


 


 


 


 


 


 


 


 


 


 


 


 


 


 


 


 


 


 


 


 


 


 


 


 


 


 


 

“슈퍼맨 리턴즈”, 세상이 슈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







“슈퍼맨 리턴즈”(Superman Returns, 2006)



이 영화에서 로이스 레인이 “세상은 슈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는 칼럼을 쓰는데, 그녀의 기사를 제가 대신 써봤습니다.

이 영화 “슈퍼맨 리턴즈”에서 로이스레인은 ‘세상에 슈퍼맨은 필요없다’ 는 기사로 퓰리쳐상을 타는 것으로 나온다. 그녀는 틀렸다. 세상은 단순히 슈퍼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사실 슈퍼맨은 문제 덩어리다. 그런 의미에서 만화든 영화든 <슈퍼맨>의 세계는 너무나도 순진하고 착하다.

이 세상에 슈퍼맨 같은 존재가 있을 때 벌어질 일은 이전에 재기컴치는 슈퍼히어로물 『인크레더블』이 이미 쫙 리뷰한 바 있다. 세상에는 매순간 사건사고가 벌어진다. 매초마다 범죄에 희생되는 사람이 있다. 슈퍼맨이 그들을 다 구할 수 있겠나. 당연히 선택할 것이고 그러면 그때부터 문제다. 누구는 구하고 누구는 무시하느냐. 이건 정치와 경제와 철학이 얽힌 문제다. 그리고 이런 문제로 싸움이 붙으면 결코 끝장이 안나듯, 슈퍼맨의 선택은 결코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만약 그가 로이스 레인하고 인터뷰(?)하며 둥둥 떠다니는 장면이 사람들에게 목격된다면, 누가 죽어갈 때 슈퍼맨은 한가하게 여자랑 노닥거리고 있었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영화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다. “박물관이 털렸어요. 슈퍼맨이 이 창녀와 노는 동안 말이죠!” 로이스 레인의 대사다)

사실 슈퍼맨은 MMOG에서 운영자와 거의 비슷한 존재다. 운영자가 어디든 순간이동 해서 중재하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 처럼 슈퍼맨도 그렇다. 운영자가 투명인간도 되고 엄청난 파워를 발휘해 게임세계의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것 처럼 슈퍼맨도 그렇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운영자들은 게임이용자들을 위해 일을 하는데, 역시 슈퍼맨도 그렇다. 하지만 MMOG 세계에서 게이머들에게 추앙받는 운영자는 별로 많지 않다. 게이머들에게 ‘영자’ 라고 불리며 하인취급을 받거나, 심지어는 공공의 적 취급을 받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들의 잘못 때문일까? 물론 어떤 운영자는 실제로 잘못을 저지른다. 게임 세계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특정한 팀의 편을 들거나, 심지어 사리사욕을 채우기도 한다. 하지만 운영자가 욕을 먹는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잘못을 해서가 아니다. 그저 그들에게 초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이고, 사람들의 기대를 결코 만족시켜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슈퍼맨이 존재할 때 생기는 가장 심각한 큰 문제는 세상의 규칙이 이 슈퍼맨 때문에 바뀐다는 것이다. 그 어떤 사고도 슈퍼맨은 막을 수 있다면, 사람들의 안전에 대한 개념도 바뀐다. 그 어떤 심각한 범죄도 슈퍼맨이 막을 수 있다면 치안에 관한 시스템이 바뀐다. 그러다보면 또 문제가 생긴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는데 제대로 수습이 안 되면 책임이 슈퍼맨에게 돌아간다. 원래 이 세상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에게 그 책임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이 모든 게 슈퍼맨 때문이다.”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데는 아마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영화에서의 문제의 원인도 따져보면 슈퍼맨 때문이 아니던가. 그가 없었더라면 문제의 ‘슈퍼 수정’도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초반의 재난도 클라이맥스의 재난도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얼마 지나지 않아 안티 슈퍼맨 패거리가 등장하고, 인터넷은 슈퍼맨빠와 슈퍼맨까 들의 전쟁터로 변할 것이다.

“브라이언 싱어”는 이번 영화 『슈퍼맨 리턴즈』에서 거의 노골적으로 기독교 구세주를 인용 한다. 슈퍼맨은 예수처럼 고난을 당하다가 옆구리를 찔리고, 지구의 문제거리를 날려버리기 위해 치명적인 크립토나이트에 매달려 죽는다. 마치 인류의 죄를 대신 짋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처럼 말이다.

물론 당연히 그 역시 예수처럼 부활하되 부활의 흔적은 역시 예수처럼 그를 덮었던 침대시트가 치워진 것 뿐이다. 게다가 부활 후 그는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여인에게 제일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낸다.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은 『다빈치코드』의 인용인가?)

그러나 감독은 신약의 구세주 이야기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를 인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예수를 죽인 것은 악당이 아니라 바로 그가 구원하려던 민중이었다는 점이다. 세상은 구세주를 원하지 않는다. 만약 구세주가 등장하면 결국에는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세상은 슈퍼맨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은 틀렸다.

슈퍼맨은 이 세상의 적이다.

영진공 짱가

“인크레더블”, 멍청하고 게으르고 착한 영화에서 벗어나기


나는 착하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통 우리가 착하게 굴 때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하게 행동하는 경우를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착하다는 건 멍청하다는 뜻이다.
착하다는 말에는 또 다른 뜻도 있다. 그건 자기와 주변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원칙을 강요한다는 뜻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악당의 간계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장금이에게 남을 탓하지 말고 네가 계속 참고 노력하라는 착한 요구를 하는 연생이 같은 경우다.

이 드라마에서는 연생이의 착한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좋게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만약 당신이 부당한 대우에 좌절하고 분노하는데 누가 친구랍시고 그 옆에 들러붙어 이따위 말을 지껄인다면 당신의 기분이 어떨지. 나는 그런 잔소리에 복장 터지느니 차라리 그를 친구로 간주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

정리하면, 착하다는 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규칙에 대해서 섣부른 지식만이 있는 상태이거나 현실적으로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한 행동규범을 따르려는 것을 말한다. 보통은 이 두 가지 증상이 함께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대안이나 규범을 내놓고 그걸 따르려는 거다.

디즈니의 영화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착하다.

첫째, 이들 영화에서 묘사되는 현실은 아주 단순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세상에 고통받는 무고한 사람들이나 동물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들을 괴롭히는 어떤 악당 때문이다. 혹은 돈이 많고 유능한 사람들은 그뿐만 아니라 착하고 성실하기까지 하고, 그들보다 덜떨어지고 불행한 사람들은 고약하고 게으르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보자. 이 영화 속 세상은 단순무식하기 그지없다. 주인공(“앤 해서웨이”)이 다니는 학교 선생님들은 약간 경박하긴 하지만 순수한 선생님들이고 학생들 역시 눈에 띄지 않던 동료가 공주가 되어도 아무 생각 없는 순수한 학생들이다.

주인공의 친구(“헤더 마타라조”)도 공주가 된 주인공이 자기 프로그램의 출연약속을 어겼을 때 실망하지만, 금방 마음을 풀고 화해하는 순수한 친구이다. 뭐 아버지의 결혼을 반대했다던 여왕(“줄리 앤드루스”) 역시 손녀를 사랑하는 착하고 순수하기 그지없는 할머니라서 손녀의 복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여기에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는 오로지 성질 고약한 친구(“맨디 무어”)와 매스미디어, 그리고 이 미디어를 이용해 잠깐 좀 유명해져 보려던 학교 킹카 뿐이다. 영화에 따르면 그저 저런 잡것들만 없으면 우리의 주인공 공주님은 아무 걱정 없이 공주생활로 입문하실 수 있을 터였다.

순수하고 착하기 그지없는 친구와 미소만 봐도 착하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 여왕님, 그리고 그 자태부터 싹수가 노란 맨디무어 ...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성질 고약하게 굴던 친구는 그저 성질이 고약해서 주인공을 괴롭혔을 뿐일까? 주인공이 공주임이 밝혀진 다음 그 고약한 친구의 마음 속에는 아무런 놀라움이나 고민이나 갈등이 없었을까? 공주님의 마음 속에 생겨난 갈등은 그저 유명인으로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뿐이었을까? 자기가 공주가 된 다음, 유명인으로서의 권력을 누리고픈 마음은 없었을까?

‘평범한 아이가 공주 되네’ 라는 컨셉 자체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그건 우리가 가진 어떤 희망의 핵심을 건드리는 아주 좋은 아이디어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발전시켜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착한 것만으론 부족하단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똑같은 컨셉을 다룬 1956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영화 『시집가는 날(일명, 맹진사댁 경사)』보다 훨씬 게으르고 무사 안일한 영화였다. 물론 관객들은 이런 게 다 빠졌어도 그저 안경 벗으면 미인 되어버리는 공주 이야기의 환상에 젖어 행복해 했겠지만 말이다.

둘째, 이들 디즈니 영화들은 비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가르치려고 든다.

착하지만은 않으려 노력한, 퀸카로 살아남는 법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나름대로 이전의 그 단순무지한 세계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원 제목부터 ‘썅년들(Mean Girls)’ 이라니, 착해지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은 제작진의 마음이 보인다. 이를 위해 아프리카 정글의 법칙을 습득했다는 주인공(“린지 로한”)을 등장시켜서 나름대로 미국 고등학교 세계를 생태학적으로 분석해보려고 한다.

주인공의 비주류 친구들이 보여주는 고등학교 학생식당의 자리 배치도는 이런 가상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악당과 싸우다 보니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악당이 되어버리더라 하는 니체의 아이러니도 묘사한다. 악당 역시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고 아주 영악한 복수 방법을 생각해내는 놀라움도 보여준다.

그런데 그 디즈니의 착함은 결국 마무리에 가서 본색을 드러낸다. 주인공과 이전 퀸카 사이의 세력전쟁의 후폭풍으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학교를 다잡기 위해 교장선생님이하 교사들이 선택한 방법은 학생들을 학교체육관에 모아놓고 집단상담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집단상담을 통해서 학생들이 서로 각자 반성하고(!) 그 결과 학교는 다시 평온을 되찾아버린다는 결말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런 혼란이 생기면 결국 각자 반성하고 잘못을 고치도록 노력하면 된다고 가르친 거다.

나름대로 참신했던, 학생식당 생태계

나 역시 심리학자로서 집단상담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어떤 문제는 수퍼울트라 상담가라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다. 사실 심리학적 접근이 종종 비판받는 이유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켜버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아이가 있다. 그러면 심리학자들은 왕따 당하는 아이에게 문제가 있거나, 왕따시키고 학대하는 가해자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왕따 당하는 아이에게는 왕따 당하지 않는 법(예를 들어, 자기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나 기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사교기술)을 가르치고, 왕따시킨 아이들에게는 도덕교육이나 공격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감정표현 기술 같은 걸 가르친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거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왕따는 아이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누군가 왕따 당하는 이유는 그 아이가 머리가 나쁘거나 사회성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남들과 지나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잘생겼다는 이유로, 어떤경우에는 지나치게 선생님에게 주목받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한다.

이렇게 튀는 아이를 왕따 시킴으로써 뭘 얻을까? 집단적 자기 정체성(이걸 집단정체성:Group Identity이라고 한다)을 확인한다. 쉽게 말해서 왕따 당하는 아이와 나머지 아이들은 명확하게 구분이 된다. 이 명확한 구분을 통해서 나머지 아이들은 자기가 최소한 저 왕따 당하는 애처럼 건방지거나, 분위기 파악 못하거나, 함부로 나대거나, 잘난 척 하는 아이는 아니라는 확인을 받는 거다.

나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부족한 청소년기에는 그런 확인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결국 아이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의할 필요를 느끼는 한, 어디에서나 왕따 현상은 나타난다. 집단상담으로 아이들을 모두 착하게 만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란 거다.

요약하면, 디즈니 영화는 문제의 원인을 선과 악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분법으로 보여주고, 그 문제의 해결책도 결국 “악당을 없애고 나머지는 모두 착하게 마음먹으면 된다” 는 아주 단순한 교훈으로 정리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일단 문제가 단순해서 머릿속이 편하고, 해결책도 단순하면서 깔끔하게 끝나서 마음이 편하니까 좋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영화 속에서 끝날 때만 안전하다. 사실 나는 이 세상을 정말 위험하게 하는 영화가 있다면, 그건 난잡하고 폭력적인 영화가 아니라 바로 이런 착하디 착한 영화일거라고 생각한다.

예전 부시 같은 친구의 사고방식이 바로 이런 이분법이다. 그래서 그 친구와 추종자들은 이 세상의 테러리즘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하면 된다는 아주 단순 무식한 결론을 철석같이 믿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비참하게 죽이는 전쟁이다.

아, 인크레더블...

그런 면에서 디즈니 영화인 『인크레더블』은 이런 디즈니 영화의 착한 한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선의로 똘똘 뭉친 착한 영웅이 있다고 해서 그 결과가 반드시 착하게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 결국 이 복잡하게 물려 돌아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수퍼 영웅은 그저 기물을 파괴하고 소송거리를 몰고 다니는 골칫덩이에 불과하다는 현실인식이 있다. 수퍼 영웅은 수퍼 악당이 있어야 그 존재 의미가 있다는 존재의 양면성은 이 현실인식의 덤으로 따라온다.

여러분들도 『마징가 제트』나 『에반게리온』을 보면서 왜 저 헬 박사 이하 악당들은 악당 로봇을 한 주에 한 마리씩만 보내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 있을 것이다. 한 두 달쯤 모아뒀다가 한꺼번에 보내면 마징가 제트 하나 쯤은 쉽게 박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들이 그래야 하는 이유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아주 간단하다. 매주 한 마리씩 보내야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악당 로봇이 있으니까 마징가제트도 에반겔리온도 존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거대 로봇인 적이 없다면 거대로봇인 우리 편도 애물단지일 뿐이다. 그게 모든 나라의 정보기관이 적국의 힘을 과장하려는 이유이기도 하고, 주적이 있어야 안보가 성립할 것이라는 황당한 믿음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다양한 수퍼 영웅들이 어떻게 협력해야 더 신나는 얘기가 될 지에만 골몰한다. 이 영화의 감독은 수퍼 영웅이라는 단순한 설정을 가지고 뽑아낼 수 있는 가능성들을 아낌없이 뽑아낸다. 엄마가 보트가 되고 아들네미가 모터가 되는 장면 같은 것도 그렇고, 영웅을 위해 존재하는 맨 인 블랙에서부터, 영웅의 옷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 영웅 가족이 있다면 뭐가 문제가 될지 … 같은 기발한 상상은 그래서 나온다.

이렇게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의 기반은 수퍼 영웅이야기의 즐거움이 뭔지 알고 그 즐거움을 더 키우고 싶어하는 순수한 유희정신이다. 사실 앞서 얘기한 나름대로 치밀하게 현실적인 도입부 역시 바로 이 수퍼영웅 이야기의 온갖 가능성을 탐색한 결과에서 얻어진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은 착한데, 이들이 착한 이유는 원래 수퍼 영웅은 착하기 때문이지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니다.

선의가 반드시 선의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천하무적 수퍼 영웅 가족은 그 나름의 애환이 있다.

수퍼 액션의 조화

수퍼 디자이너...최고!!


인크레더블을 본 어떤 관객들은 이 영화가 뻔한 얘기를 하면서 아무런 결론도 없다는 점이 불만인 거 같다. 하지만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미덕이다. 이 영화는 뻔한 이야기가 가진 가능성을 즐거운 마음으로 탐색하고 발전시켰으며, 뭘 가르치려 들지 않고 오로지 즐기자는 정신에 투철했던 것이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착한 마음보다는 즐기는 마음이 이 세상을 더 밝게 만들며 그리고 착하게 살려는 마음보다는 삶을 즐기려는 태도가 이 세상을 훨씬 현명하게 살게 해준다는 것이다.

영진공 짱가

“빌리 엘리어트”, 어른들의 세상과 아이들의 세상




아이들이 부모님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이는 것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의 세상이 어떤 모습일 것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발달심리학에서는 사람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을 4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 부모나 다른 어른들이 부여한 정체성을 그대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정체감 유실(identity forecloser) 유형이다. 이 유형은 부모님의 말씀을 너무나도 잘 들어서 부모님의 가치관을 그대로 닮은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이 확고한데다 별로 고민이나 갈등을 하지 않고 열심히 주어진 길을 간다. 성실한 가장, 참한 주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부모가 부여한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확고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고민하는 정체감 확산(identity diffused) 유형이다. 부모님의 기대만을 따르기엔 뭔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자기 생각을 강력하게 주장하며 자기 길을 갈만한 자신감이나 용기도 없다. 이들은 겉으로는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공부도 하고 시험 준비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꿈과 현실이 다른 곳에 존재하는, 그렇지만 현실에 굴복하여 안주하는 사람들이다. 부모님 말씀만을 따르기엔 너무 생각이 복잡한 지식인들이 보통 이 유형에 해당한다.

세 번째, 일단 부모 말을 따르길 거부하고 보는 유형이다. 하지만 아직 대책은 없다. 단지 지금 당장 뭘 결정하진 않겠다.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주장하는 유형이다. 그래서 정체감 유예(identity moratorium) 유형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최대한 많은 실험과 탐색을 하고 싶어 한다. 이들 중에는 어학연수도 가고, 다른 전공을 부전공으로 이수해보기도 하고, 학교를 휴학하고 임시로 취직해보기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탐색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저 판단을 미루고 칩거하는 경우도 있다.

네 번째로 정체감 성취(identity achieved)가 있다. 이들은 부모나 주변에서 부여한 삶의 목표나 정체성에서 벗어나서 자기만의 삶을 찾아낸 사람들이다. 독자적이면서도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4가지 유형 중에서 어떤 유형이 제일 행복하게 살까?

정체감 성취 유형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960년대 미국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의하면 정체감 성취 유형인 사람들은 물론 아주 크게 성공한 경우도 있었지만, 반대로 세상과 끊임없이 투쟁을 해왔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몸과 마음이 황폐한 경우도 많았다. 우울증이나 약물중독자도 많았고 자살한 경우도 있었다. 가장 무난하게 잘 사는 유형은 정체감 유실이었고 그 다음이 정체감 확산이었다. 이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잘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라고 부모하고 원수지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단지 마음은 정말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고 싶은데 도저히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는 끼를 가지고 태어나서 도저히 사회의 틀에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은 원치 않더라도 정체감 성취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 『빌리 엘리어트』 속의 빌리가 바로 그런 경우다.
영국의 탄광촌에서 태어난 빌리에게 아버지는 광부로서의 인생을 기대한다. 광부들의 남성적인 힘을 키워주기 위해서 권투학원에도 보낸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권투학원에는 마땅히 연습할 곳이 없어 귀퉁이를 빌려 쓰는 발레학원도 있었다. 빌리는 아버지가 바란 권투가 아니라 발레에 빠지고 만다. 착한 빌리는 나름대로 아버지 말씀을 따르고 싶다. 하지만 어쩌랴, 그저 계속 발레에만 눈이 가고 몸은 춤을 추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을 ……

그래 권투는 이 샌드백을 열심히 치는 거지...

하지만 이건 싫어...

이게 좋아~

문제는 그 다음이다.

아버지가 일하던 탄광에 폐쇄 결정이 난 것이다. 만약에 탄광이 앞으로도 계속 운영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아버지는 빌리의 소망을 무시하고 자신의 가치를 강요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자신이 추구해 왔고 빌리에게 물려주고자 했던 삶이 눈앞에서 사라질 지경에 놓이자 그는 빌리의 선택을 실현시켜주기로 결심한다.

그 길은 사내 자식이 계집애처럼 춤을 춘다는 조롱뿐만 아니라, 동료를 배신하고 탄광에 출근한다는 도덕적인 비난을 아우르는 고난의 길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것 밖에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연히, 아들은 결국 아무도 생각지 못한 그 길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영화는 빌리가 남자들만 출연하는 세계적 발레극의 프리마돈나(?)로서 아버지 앞에서 공연을 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저 지원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바짓바람에 가까운 ...


이게 정체감 성취자의 운명이다. 이들은 일종의 도박을 감행한다. 잘되면 대박, 안되면 쪽박일수도 있는 도박이다. 사회가 안정되어 있어서 변화의 가능성이 적은 세상에서는 정체감 성취자들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공은 별로 못하는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사회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경우에는 정 반대다. 오히려 정체감 유실로 살던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낀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고작 그 결과가 이거냐는 울분이 그들의 몫이다. 하지만 자신의 끼를 못 이겨서, 혹은 주변 상황에 떠밀려서 정체감 성취의 길로 들어선 자들에게는 기회가 있다. 밑져야 본전이고 잘하면 대박인 것이다.

부모들의 세상이 자녀들의 세상으로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청소년 자녀에게 부모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요구해도 된다. 그게 그들을 위하는 길이다. 하지만 우리 세상이 10년 후에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면, 자녀의 바람과 엉뚱한 소망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자녀들 하자는 대로 따르란 얘긴 아니다. 부모 세대의 지혜는 언제나 유효하니 말이다. 빌리 엘리엇이 성공한 이유는 결국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선택했기 때문인데, 그건 “능력있는 자는 노력하는 자를 당하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좋아하는 자를 당하지 못하며,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당하지 못한다”는 옛 말씀에서 하나도 어긋남이 없는 결말 아닌가.

영진공 짱가

“주성치”, 비관과 낙관 사이의 아슬아슬한 곡예




한 손에는 비정함을, 다른 손에는 로맨스를 ...



배트맨은 부르스 웨인이 변장한 캐릭터고, 스파이더맨은 피터 파커가 변장한 캐릭터야. 하지만 수퍼맨은 달라. 수퍼맨이 안경을 쓰고 정장을 입어 변장한 캐릭터가 클라크 켄트지. 그런 면에서 수퍼맨은 아주 독특하지.
– 영화 “킬빌” 중에서

주성치 대인의 영화 “쿵푸 허슬”. 영화 … 끝내준다. 그는 이야기의 완급조절, 액션의 밀도와 상상력에 있어서 진정 본좌다. 근데 영화만큼 재미있었던 건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영화 초반부에 도끼파가 쏘아 올린 폭죽이 도끼모양으로 하늘을 수놓는 것 같은 아기자기한 연출들을 보며 지나치게 낄낄거리던 내 주변 관객들은 오히려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조용해졌다. 영화가 끝난 후, 그 초반에 즐거워하던 관객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다. “이게 뭐야, 너무 잔인하고 무서워서 재미없어…”

오해의 시작, 소림축구


그의 전작 『소림축구』를 통해서만 주성치를 아는 사람들이 그의 영화에 대해 갖는 큰 오해 중에 하나는 그가 코미디 배우이고 그의 영화가 코미디라는 생각이다. 그건 사실 채플린의 영화를 코미디로 착각하는 것만큼이나 하기 쉬운 오해지만, 그 오해 때문에 치러야 하는 댓가의 크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채플린의 영화는 코미디로 봐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 하지만 주성치의 영화를 코미디로 오해하면 뜻밖의 충격을 받게 된다. 앞서의 그 관객들도 이런 오해의 희생자다. 이 댓가는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를 “금발미녀 공금횡령 도주사건 이야기”로 착각하고 보던 관객들이 샤워실 살인 장면에서 받았던 충격만큼이나 크고, 놀러 갔다가 매맞고 돌아온 아이들의 심정만큼이나 억울하다.

하지만 그가 이전에 만든 영화 『희극지왕』이 전혀 희극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오해는 진작에 접었어야 할 일이다.
 

희극은 커녕, 비극이더구만 ...


그는 『도신』을 패러디한 『도성』에서 인간슬로모션으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그의 황당한 상상력은 단순히 웃기는 쪽으로만 뻗어나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구품지마관』 같은 영화에서는 고관대작에 잘못 걸려 누명을 뒤집쓴 임신부가 항의하다가 입에 곤장을 맞고, 배를 짓밟혀서 유산(!)을 하고 질질 끌려가는데 이건 결코 코미디가 아니다. 물론 그 뒤에 말발로 폭포를 이겨내는 장면으로 이 비장/애통이 커버되긴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앞서의 비장/애통이나 폭포수와 싸워 이기는 말발은 모두 같은 황당함이다.

『홍콩 레옹』에 나오는 귀신들의 사연도, 그 귀신들에 엮여서 목이 잘리고 배가 갈라지는 인물들의 모습도 역시 코미디가 아니다. 그보다는 하드고어 호러에 가깝다. 그는 사람들이 짓밟히고, 마구 죽어나가는 장면을 의외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식신』에서 잘나가다 배신당해 비참한 처지에 몰린 주성치가 비루하게 굴다가 더 심하게 짓밟히는 장면도, 『서유기 – 월광보합』에서 도적들이 여자주인공 언니의 칼에 맞아 순식간에 황천가는 장면들도 모두 당연한 일인 듯, 무덤덤하게 연출된다.

『소림 축구』에서는 수위를 아주 낮췄지만, 여전히 그 잔인 무도함은 남아있다. 라이벌의 계략에 말려 무릎이 박살나서 절름발이가 되고, 그렇게 당하고 나서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 때문에 끝없이 비굴하게 굽신대야 하는 오맹달의 처지는 결코 코미디용 설정이 아니다.

이러니 『쿵푸허슬』에서도 천연덕스럽게 뽑은 칼을 다시 그 상처에 꽂아 넣고, 그 칼을 사이드 미러로 쓰며, 어린아이가 오줌 세례를 맞고, 일가족이 휘발유를 뒤집어쓰며, 아무렇지도 않게 죄 없는 새끼고양이를 반동강이 낼 수 있는 것이다.

웃기되, 그냥 웃을 수 만은 없는 그의 영화들 ...


평범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그 평범함을 뛰어넘고 남의 눈에 띄기 위해서 기발해지고 창의적이 되어보려 노력을 한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기발함을 감추고 평범한 척, 상식적인 척해야 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 마치 클라크 켄트라는 변장으로 자신의 본질을 감춰야 하는 수퍼맨처럼 말이다.

창의성에 대한 연구들에 의하면, 창의성이란 훈련이나 노력을 통해서 키워질 수 있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애초부터 갖고 태어나는 독특성의 문제다. 어떤 생각이 창의적이라는 말은 그 생각이 그만큼 비정상적이라는 뜻이며, 기발한 상상력은 규범을 벗어난 일탈적인 생각을 뜻한다.

『쿵푸허슬』에 보면 정신병원이 등장하는데 이 병원의 제목은 ‘정신병원’이 아니라 ‘비정상자 수용소’ 비슷한 이름이었다. 사실 정신병은 상식을 심하게 벗어난 사람들, 정상범위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붙이는 의학적 죄명인데 그런 면에서 주성치 역시 바로 그 병원에 수감되어야 하는 존재에 가깝다.

주성치는 『킬빌』에서 얘기한 수퍼맨처럼 세상이 자신의 본색을 이해해주기는 포기하고, 세상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다. 그렇게 변장을 하고 자신의 본질을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애초부터 비정상적이던 그의 본색은 영화의 곳곳에 드러난다. 그것이 그의 영화들 전체를 아우르는 개성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그의 관점, 그의 본색은?

그가 보는 세상은 무자비하다. 『소림축구』에서 양아치들과 축구를 하려다가 집단 린치를 당하던 주성치가 오맹달에게 항의한다. “이게 무슨 축구예요! 싸움이죠.” 그러자 오맹달이 화를 내며 대답한다. “축구는 원래 전쟁이야!!” 이건 그가 축구 이전에 인생 자체에 대해 하고싶었던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함부로 노닥거릴 수 있는 동네가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눈뜨고 코 베어가고, 그런 꼴을 당해도 동정은커녕 코가 잘려진 병신이라고 더 짓밟아버리는 무자비한 생존경쟁의 지옥도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가 패배자들의 비루함에 대해서 그렇게 절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들 모두가 잠재적인 패배자이기 때문이다. 지옥에서는 어느 누구도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 단지 패배를 미루어 둘 뿐이다.
 

『서유기 - 선리기연』의 이 장면, 주성치식 로맨스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가 우리를 감동하게 만드는 건, 그 지옥을 지옥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 삐딱함 때문이다. 그의 영화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구라와 로맨스는 바로 거기서 나온다. 세상이 그렇게 무자비한 지옥일지라도,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지라도, 그 와중에 로맨스를 꿈꾼다는 것이 그의 영화가 가진 미학이고 그의 영화가 주는 긴장감의 근원이다.

역시 『쿵푸허슬』에서도 재연되는 주성치식 로맨스 ...


한 손에는 비정함을 다른 손에는 로맨스를 들고,
비관과 낙관 사이에서 벌이는 아슬아슬한 곡예가 그의 본색이며 그의 영화는 점점 이 본색을 드러낸다. 관객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그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고 있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