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크레더블”, 멍청하고 게으르고 착한 영화에서 벗어나기


나는 착하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통 우리가 착하게 굴 때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하게 행동하는 경우를 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착하다는 건 멍청하다는 뜻이다.
착하다는 말에는 또 다른 뜻도 있다. 그건 자기와 주변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원칙을 강요한다는 뜻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악당의 간계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장금이에게 남을 탓하지 말고 네가 계속 참고 노력하라는 착한 요구를 하는 연생이 같은 경우다.

이 드라마에서는 연생이의 착한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좋게 받아들여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만약 당신이 부당한 대우에 좌절하고 분노하는데 누가 친구랍시고 그 옆에 들러붙어 이따위 말을 지껄인다면 당신의 기분이 어떨지. 나는 그런 잔소리에 복장 터지느니 차라리 그를 친구로 간주하지 않는 쪽을 택하겠다.

정리하면, 착하다는 것은 세상이 돌아가는 규칙에 대해서 섣부른 지식만이 있는 상태이거나 현실적으로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한 행동규범을 따르려는 것을 말한다. 보통은 이 두 가지 증상이 함께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세상을 잘 모르기 때문에 말도 안 되는 대안이나 규범을 내놓고 그걸 따르려는 거다.

디즈니의 영화들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착하다.

첫째, 이들 영화에서 묘사되는 현실은 아주 단순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세상에 고통받는 무고한 사람들이나 동물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들을 괴롭히는 어떤 악당 때문이다. 혹은 돈이 많고 유능한 사람들은 그뿐만 아니라 착하고 성실하기까지 하고, 그들보다 덜떨어지고 불행한 사람들은 고약하고 게으르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프린세스 다이어리』를 보자. 이 영화 속 세상은 단순무식하기 그지없다. 주인공(“앤 해서웨이”)이 다니는 학교 선생님들은 약간 경박하긴 하지만 순수한 선생님들이고 학생들 역시 눈에 띄지 않던 동료가 공주가 되어도 아무 생각 없는 순수한 학생들이다.

주인공의 친구(“헤더 마타라조”)도 공주가 된 주인공이 자기 프로그램의 출연약속을 어겼을 때 실망하지만, 금방 마음을 풀고 화해하는 순수한 친구이다. 뭐 아버지의 결혼을 반대했다던 여왕(“줄리 앤드루스”) 역시 손녀를 사랑하는 착하고 순수하기 그지없는 할머니라서 손녀의 복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여기에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는 오로지 성질 고약한 친구(“맨디 무어”)와 매스미디어, 그리고 이 미디어를 이용해 잠깐 좀 유명해져 보려던 학교 킹카 뿐이다. 영화에 따르면 그저 저런 잡것들만 없으면 우리의 주인공 공주님은 아무 걱정 없이 공주생활로 입문하실 수 있을 터였다.

순수하고 착하기 그지없는 친구와 미소만 봐도 착하시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는 여왕님, 그리고 그 자태부터 싹수가 노란 맨디무어 ...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성질 고약하게 굴던 친구는 그저 성질이 고약해서 주인공을 괴롭혔을 뿐일까? 주인공이 공주임이 밝혀진 다음 그 고약한 친구의 마음 속에는 아무런 놀라움이나 고민이나 갈등이 없었을까? 공주님의 마음 속에 생겨난 갈등은 그저 유명인으로서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것뿐이었을까? 자기가 공주가 된 다음, 유명인으로서의 권력을 누리고픈 마음은 없었을까?

‘평범한 아이가 공주 되네’ 라는 컨셉 자체를 비난하는 게 아니다. 그건 우리가 가진 어떤 희망의 핵심을 건드리는 아주 좋은 아이디어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발전시켜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착한 것만으론 부족하단 말이다.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똑같은 컨셉을 다룬 1956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영화 『시집가는 날(일명, 맹진사댁 경사)』보다 훨씬 게으르고 무사 안일한 영화였다. 물론 관객들은 이런 게 다 빠졌어도 그저 안경 벗으면 미인 되어버리는 공주 이야기의 환상에 젖어 행복해 했겠지만 말이다.

둘째, 이들 디즈니 영화들은 비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가르치려고 든다.

착하지만은 않으려 노력한, 퀸카로 살아남는 법

영화 『퀸카로 살아남는 법』은 나름대로 이전의 그 단순무지한 세계관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원 제목부터 ‘썅년들(Mean Girls)’ 이라니, 착해지지 않으려고 단단히 마음먹은 제작진의 마음이 보인다. 이를 위해 아프리카 정글의 법칙을 습득했다는 주인공(“린지 로한”)을 등장시켜서 나름대로 미국 고등학교 세계를 생태학적으로 분석해보려고 한다.

주인공의 비주류 친구들이 보여주는 고등학교 학생식당의 자리 배치도는 이런 가상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악당과 싸우다 보니 자기 자신이 바로 그 악당이 되어버리더라 하는 니체의 아이러니도 묘사한다. 악당 역시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지 않고 아주 영악한 복수 방법을 생각해내는 놀라움도 보여준다.

그런데 그 디즈니의 착함은 결국 마무리에 가서 본색을 드러낸다. 주인공과 이전 퀸카 사이의 세력전쟁의 후폭풍으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학교를 다잡기 위해 교장선생님이하 교사들이 선택한 방법은 학생들을 학교체육관에 모아놓고 집단상담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집단상담을 통해서 학생들이 서로 각자 반성하고(!) 그 결과 학교는 다시 평온을 되찾아버린다는 결말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런 혼란이 생기면 결국 각자 반성하고 잘못을 고치도록 노력하면 된다고 가르친 거다.

나름대로 참신했던, 학생식당 생태계

나 역시 심리학자로서 집단상담의 효용성을 부정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어떤 문제는 수퍼울트라 상담가라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다. 사실 심리학적 접근이 종종 비판받는 이유는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환원시켜버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아이가 있다. 그러면 심리학자들은 왕따 당하는 아이에게 문제가 있거나, 왕따시키고 학대하는 가해자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왕따 당하는 아이에게는 왕따 당하지 않는 법(예를 들어, 자기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용기나 기술,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사교기술)을 가르치고, 왕따시킨 아이들에게는 도덕교육이나 공격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감정표현 기술 같은 걸 가르친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거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왕따는 아이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다. 누군가 왕따 당하는 이유는 그 아이가 머리가 나쁘거나 사회성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남들과 지나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어떤 경우에는 지나치게 잘생겼다는 이유로, 어떤경우에는 지나치게 선생님에게 주목받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한다.

이렇게 튀는 아이를 왕따 시킴으로써 뭘 얻을까? 집단적 자기 정체성(이걸 집단정체성:Group Identity이라고 한다)을 확인한다. 쉽게 말해서 왕따 당하는 아이와 나머지 아이들은 명확하게 구분이 된다. 이 명확한 구분을 통해서 나머지 아이들은 자기가 최소한 저 왕따 당하는 애처럼 건방지거나, 분위기 파악 못하거나, 함부로 나대거나, 잘난 척 하는 아이는 아니라는 확인을 받는 거다.

나에 대한 확실한 정의가 부족한 청소년기에는 그런 확인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결국 아이들이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의할 필요를 느끼는 한, 어디에서나 왕따 현상은 나타난다. 집단상담으로 아이들을 모두 착하게 만든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란 거다.

요약하면, 디즈니 영화는 문제의 원인을 선과 악이라는 아주 단순한 이분법으로 보여주고, 그 문제의 해결책도 결국 “악당을 없애고 나머지는 모두 착하게 마음먹으면 된다” 는 아주 단순한 교훈으로 정리한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일단 문제가 단순해서 머릿속이 편하고, 해결책도 단순하면서 깔끔하게 끝나서 마음이 편하니까 좋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영화 속에서 끝날 때만 안전하다. 사실 나는 이 세상을 정말 위험하게 하는 영화가 있다면, 그건 난잡하고 폭력적인 영화가 아니라 바로 이런 착하디 착한 영화일거라고 생각한다.

예전 부시 같은 친구의 사고방식이 바로 이런 이분법이다. 그래서 그 친구와 추종자들은 이 세상의 테러리즘을 뿌리뽑기 위해서는 테러리스트들을 제거하면 된다는 아주 단순 무식한 결론을 철석같이 믿는다. 하지만 그 결과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비참하게 죽이는 전쟁이다.

아, 인크레더블...

그런 면에서 디즈니 영화인 『인크레더블』은 이런 디즈니 영화의 착한 한계를 벗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선의로 똘똘 뭉친 착한 영웅이 있다고 해서 그 결과가 반드시 착하게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사실, 결국 이 복잡하게 물려 돌아가는 현대사회 속에서 수퍼 영웅은 그저 기물을 파괴하고 소송거리를 몰고 다니는 골칫덩이에 불과하다는 현실인식이 있다. 수퍼 영웅은 수퍼 악당이 있어야 그 존재 의미가 있다는 존재의 양면성은 이 현실인식의 덤으로 따라온다.

여러분들도 『마징가 제트』나 『에반게리온』을 보면서 왜 저 헬 박사 이하 악당들은 악당 로봇을 한 주에 한 마리씩만 보내는지 의문을 가져본 적 있을 것이다. 한 두 달쯤 모아뒀다가 한꺼번에 보내면 마징가 제트 하나 쯤은 쉽게 박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들이 그래야 하는 이유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아주 간단하다. 매주 한 마리씩 보내야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악당 로봇이 있으니까 마징가제트도 에반겔리온도 존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거대 로봇인 적이 없다면 거대로봇인 우리 편도 애물단지일 뿐이다. 그게 모든 나라의 정보기관이 적국의 힘을 과장하려는 이유이기도 하고, 주적이 있어야 안보가 성립할 것이라는 황당한 믿음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다양한 수퍼 영웅들이 어떻게 협력해야 더 신나는 얘기가 될 지에만 골몰한다. 이 영화의 감독은 수퍼 영웅이라는 단순한 설정을 가지고 뽑아낼 수 있는 가능성들을 아낌없이 뽑아낸다. 엄마가 보트가 되고 아들네미가 모터가 되는 장면 같은 것도 그렇고, 영웅을 위해 존재하는 맨 인 블랙에서부터, 영웅의 옷을 디자인하는 디자이너, 영웅 가족이 있다면 뭐가 문제가 될지 … 같은 기발한 상상은 그래서 나온다.

이렇게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의 기반은 수퍼 영웅이야기의 즐거움이 뭔지 알고 그 즐거움을 더 키우고 싶어하는 순수한 유희정신이다. 사실 앞서 얘기한 나름대로 치밀하게 현실적인 도입부 역시 바로 이 수퍼영웅 이야기의 온갖 가능성을 탐색한 결과에서 얻어진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주인공들은 착한데, 이들이 착한 이유는 원래 수퍼 영웅은 착하기 때문이지 그 이상 그 이하가 아니다.

선의가 반드시 선의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천하무적 수퍼 영웅 가족은 그 나름의 애환이 있다.

수퍼 액션의 조화

수퍼 디자이너...최고!!


인크레더블을 본 어떤 관객들은 이 영화가 뻔한 얘기를 하면서 아무런 결론도 없다는 점이 불만인 거 같다. 하지만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미덕이다. 이 영화는 뻔한 이야기가 가진 가능성을 즐거운 마음으로 탐색하고 발전시켰으며, 뭘 가르치려 들지 않고 오로지 즐기자는 정신에 투철했던 것이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착한 마음보다는 즐기는 마음이 이 세상을 더 밝게 만들며 그리고 착하게 살려는 마음보다는 삶을 즐기려는 태도가 이 세상을 훨씬 현명하게 살게 해준다는 것이다.

영진공 짱가

“라푼젤”, 비쌌지만 디즈니에겐 충분히 값진 성과





상영이 시작되면 디즈니의 상징인 미키마우스의 모습이 나타나고, 이것은 곧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50번째 작품 – <라푼젤>을 소개하는 엠블럼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사실 숫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만 <라푼젤>을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이 엠블럼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자신들의 오랜 역사를 들먹이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CG 애니메이션 기술과 내용 모든 면에서 자신감을 드러낼만 했던 작품이 바로 이번 <라푼젤>이기 때문이다. 



1995년에 픽사의 첫번째 100%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몇 년 간은 등장 인물들의 감정적인 표현에 있어서 만큼은 새로운 기술이 기존의 방식을 넘어서기 어렵다 – 2D 셀 애니메이션이 더 낫다기 보다는 3D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이 이 부분에서는 아직 어색했기 때문 – 는 인식이 강했고, 그런 와중에 디즈니는 전통적인 컨텐츠들을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리메이크하는 쪽에서 강점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고 예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이미지 처리 컴퓨팅 환경을 바탕으로 3D CG 기술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면서 CG 애니메이션은 더이상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픽사와 드림웍스가 CG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양강 구도를 갖추고, 이들에 의해 개발된 기술을 분양받은 유럽계 군소 스튜디오들이 우후죽순처럼 자기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한 와중에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마치 아날로그 시대의 영광에 사로잡혀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을 대비하지 못해 사라져버린 많은 기업들처럼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라푼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잃어버진 지난 10년을 단 한 방에 회복하는 역전 홈런 같은 작품이라 하겠다.










이번 <라푼젤>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2억 6천만불의 막대한 제작비와 그렇게나 많은 돈을 들인 만큼 때깔이 참 좋더라는 얘기일 것이다. 픽사와 드림웍스의 왠만한 대작 애니메이션의 제작비는 대략 1억 5천만불 수준이고, 실사 영화의 경우 최근에 만들어지는 왠만한 초대작 블럭버스터 영화들조차 제작비 규모가 2억불을 쉽게 넘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 참고로 역대 최대는 3억불을 쏟아부은 <캐리비안의 해적 : 세상 끝에서>(2007)였고,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2009)는 2억 4천만불 수준이었다.

<라푼젤>은 <월-E>(2008)가 갖고 있던 1억 8천만불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대, 실사 영화를 포함해서 4번째로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작품이 됐다 – 애니메이션 한 편 만드는 데에 그 정도로 많은 돈을 들였다는 사실 자체가 화제와 논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라푼젤>은 보면 과연 훌륭하게 잘 만들었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보다 훨씬 합리적인 규모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자연스레 가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작년 9월에 국내 개봉했던 애니메이션 <슈퍼배드>(Despicable Me, 2010)의 총 제작비는 7천만불 수준에 불과했다.

애니메이션의 명가를 재건하고야 말겠다는 사명감과 자신들의 50번째 작품조차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해서는 안된다는 디즈니 의사결정권자들의 위기의식 기타 등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2억 6천만불짜리 애니메이션이라는 건 – 물론 작품의 외연에 불과한 대목이긴 하지만 –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영 찜찜한 대목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뒷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만들어진 결과물은 대단히 훌륭하다. CG 애니메이션이 오랫동안 안고 있었던 숙제 – 동물이나 사물의 의인화가 아니라 사람 캐릭터의 생생한 감점을 어떻게 담아내고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드디어 찾아낸 작품이 바로 <라푼젤>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후로도 더 나은 표현력의 작품들이 계속 나올테지만 <라푼젤>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첫번째 요소로 다른 무엇보다 생생한 인물 묘사와 감정 표현력을 들고 싶은 것이다.



다음으로 같은 그림 형제의 동화집 출신이면서도 백설공주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마이너 취급을 받았던 라푼젤의 다분히 성적 은유가 가득했던 이야기를 가족애 중심의 지극히 대중적인 드라마로 각색해낸 스토리텔링이 꽤 성공적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다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잘 다루지 않거나 다루더라도 상식 뒤집기로 접근해왔던 ‘왕자님이나 공주님이 등장하는 전래 동화’를 디즈니는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비중이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라푼젤>의 왕과 왕비는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하는 모습을 한번도 보이지 않고 오직 부모로서의 모습만이 – 두 사람은 극 중에서 대사조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데 이는 감정을 더욱 증폭시키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 두 사람이 잃어버린 아이를 위해 매년 등불을 하늘 위로 올리는 행사를 갖고, 자신들의 왕과 왕비를 따라 시민들이 함께 수 천 개의 등불을 함께 올리는 장면이 연출되면서 스크린은 온통 애틋한 감정의 폭포수가 되어 객석으로 넘쳐 흐른다.








두 젊은 남녀의 멜로 라인 역시 예상했던 이상으로 강력한 편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꿈과 생명을 내어주는 일 만큼 강력한 다른 무엇이 어디에 또 있으랴! 라푼젤은 자신의 치유 능력으로 유진 – 플린 라이더의 본명 – 을 살릴 수 있게 해주면 마녀의 곁에 영원히 머물겠다고 약속을 하고, 죽어가던 유진은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를 내던지고 라푼젤에게 자유로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18년간 길러온 라푼젤의 금발머리가 단번에 잘려 짙은 갈색으로 뒤바뀌는 극적인 순간은 특별한 시각 효과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장면에 불과했지만 앞서 보여진 그 어떤 장면들 보다 훨씬 더 스펙타클한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라푼젤>은 감정이 담긴 시각적 스펙타클과 내러티브에 의한 극적인 스펙타클을 모두 훌륭하게 연출해낸 작품이라 할만 하다. 이 작품의 유일한 단점은 100분의 러닝타임이 너무 짧게 느껴져서 아쉽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굉장히 비싼 댓가를 치르고 얻어낸 성과이긴 하지만 <라푼젤>이 보여주는 질감과 특히 등장인물들의 감정 표현은 확실히 이전의 3D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 작품들과는 한 차원 다른 경지를 보여준다. 그 생생함에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즐겁고 놀라운 기분이 드는 수준이니 “놀랍고 신기한 볼거리”이었던 영화의 태생적 본질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앞으로 만들어질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분명 <라푼젤>을 통해 드디어 얻어낸 기술적, 예술적 노하우를 활용하게 될테니 관객으로서는 큰 기대를 가져볼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라푼젤>은 디즈니의 50번째 애니메이션일 뿐만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의 작품들로 구분하게 될 확고한 전환점으로 남게 될 작품이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