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푼젤”, 비쌌지만 디즈니에겐 충분히 값진 성과





상영이 시작되면 디즈니의 상징인 미키마우스의 모습이 나타나고, 이것은 곧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50번째 작품 – <라푼젤>을 소개하는 엠블럼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사실 숫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겠지만 <라푼젤>을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이 엠블럼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자신들의 오랜 역사를 들먹이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CG 애니메이션 기술과 내용 모든 면에서 자신감을 드러낼만 했던 작품이 바로 이번 <라푼젤>이기 때문이다. 



1995년에 픽사의 첫번째 100%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가 만들어진 이후에도 몇 년 간은 등장 인물들의 감정적인 표현에 있어서 만큼은 새로운 기술이 기존의 방식을 넘어서기 어렵다 – 2D 셀 애니메이션이 더 낫다기 보다는 3D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이 이 부분에서는 아직 어색했기 때문 – 는 인식이 강했고, 그런 와중에 디즈니는 전통적인 컨텐츠들을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으로 리메이크하는 쪽에서 강점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고 예전보다 훨씬 강력해진 이미지 처리 컴퓨팅 환경을 바탕으로 3D CG 기술이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면서 CG 애니메이션은 더이상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10년간 픽사와 드림웍스가 CG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양강 구도를 갖추고, 이들에 의해 개발된 기술을 분양받은 유럽계 군소 스튜디오들이 우후죽순처럼 자기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한 와중에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은 마치 아날로그 시대의 영광에 사로잡혀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을 대비하지 못해 사라져버린 많은 기업들처럼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맥락에서 <라푼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잃어버진 지난 10년을 단 한 방에 회복하는 역전 홈런 같은 작품이라 하겠다.










이번 <라푼젤>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2억 6천만불의 막대한 제작비와 그렇게나 많은 돈을 들인 만큼 때깔이 참 좋더라는 얘기일 것이다. 픽사와 드림웍스의 왠만한 대작 애니메이션의 제작비는 대략 1억 5천만불 수준이고, 실사 영화의 경우 최근에 만들어지는 왠만한 초대작 블럭버스터 영화들조차 제작비 규모가 2억불을 쉽게 넘기지 못하는 상황에서 – 참고로 역대 최대는 3억불을 쏟아부은 <캐리비안의 해적 : 세상 끝에서>(2007)였고,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아바타>(2009)는 2억 4천만불 수준이었다.

<라푼젤>은 <월-E>(2008)가 갖고 있던 1억 8천만불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애니메이션 역사상 최대, 실사 영화를 포함해서 4번째로 많은 제작비가 들어간 작품이 됐다 – 애니메이션 한 편 만드는 데에 그 정도로 많은 돈을 들였다는 사실 자체가 화제와 논란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라푼젤>은 보면 과연 훌륭하게 잘 만들었다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보다 훨씬 합리적인 규모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자연스레 가질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미안한 말이지만 작년 9월에 국내 개봉했던 애니메이션 <슈퍼배드>(Despicable Me, 2010)의 총 제작비는 7천만불 수준에 불과했다.

애니메이션의 명가를 재건하고야 말겠다는 사명감과 자신들의 50번째 작품조차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해서는 안된다는 디즈니 의사결정권자들의 위기의식 기타 등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2억 6천만불짜리 애니메이션이라는 건 – 물론 작품의 외연에 불과한 대목이긴 하지만 –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영 찜찜한 대목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뒷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만들어진 결과물은 대단히 훌륭하다. CG 애니메이션이 오랫동안 안고 있었던 숙제 – 동물이나 사물의 의인화가 아니라 사람 캐릭터의 생생한 감점을 어떻게 담아내고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드디어 찾아낸 작품이 바로 <라푼젤>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후로도 더 나은 표현력의 작품들이 계속 나올테지만 <라푼젤>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첫번째 요소로 다른 무엇보다 생생한 인물 묘사와 감정 표현력을 들고 싶은 것이다.



다음으로 같은 그림 형제의 동화집 출신이면서도 백설공주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마이너 취급을 받았던 라푼젤의 다분히 성적 은유가 가득했던 이야기를 가족애 중심의 지극히 대중적인 드라마로 각색해낸 스토리텔링이 꽤 성공적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다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서 잘 다루지 않거나 다루더라도 상식 뒤집기로 접근해왔던 ‘왕자님이나 공주님이 등장하는 전래 동화’를 디즈니는 자신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비중이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라푼젤>의 왕과 왕비는 누군가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하는 모습을 한번도 보이지 않고 오직 부모로서의 모습만이 – 두 사람은 극 중에서 대사조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데 이는 감정을 더욱 증폭시키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 두 사람이 잃어버린 아이를 위해 매년 등불을 하늘 위로 올리는 행사를 갖고, 자신들의 왕과 왕비를 따라 시민들이 함께 수 천 개의 등불을 함께 올리는 장면이 연출되면서 스크린은 온통 애틋한 감정의 폭포수가 되어 객석으로 넘쳐 흐른다.








두 젊은 남녀의 멜로 라인 역시 예상했던 이상으로 강력한 편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의 꿈과 생명을 내어주는 일 만큼 강력한 다른 무엇이 어디에 또 있으랴! 라푼젤은 자신의 치유 능력으로 유진 – 플린 라이더의 본명 – 을 살릴 수 있게 해주면 마녀의 곁에 영원히 머물겠다고 약속을 하고, 죽어가던 유진은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를 내던지고 라푼젤에게 자유로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18년간 길러온 라푼젤의 금발머리가 단번에 잘려 짙은 갈색으로 뒤바뀌는 극적인 순간은 특별한 시각 효과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장면에 불과했지만 앞서 보여진 그 어떤 장면들 보다 훨씬 더 스펙타클한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라푼젤>은 감정이 담긴 시각적 스펙타클과 내러티브에 의한 극적인 스펙타클을 모두 훌륭하게 연출해낸 작품이라 할만 하다. 이 작품의 유일한 단점은 100분의 러닝타임이 너무 짧게 느껴져서 아쉽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굉장히 비싼 댓가를 치르고 얻어낸 성과이긴 하지만 <라푼젤>이 보여주는 질감과 특히 등장인물들의 감정 표현은 확실히 이전의 3D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 작품들과는 한 차원 다른 경지를 보여준다. 그 생생함에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도 즐겁고 놀라운 기분이 드는 수준이니 “놀랍고 신기한 볼거리”이었던 영화의 태생적 본질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앞으로 만들어질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분명 <라푼젤>을 통해 드디어 얻어낸 기술적, 예술적 노하우를 활용하게 될테니 관객으로서는 큰 기대를 가져볼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라푼젤>은 디즈니의 50번째 애니메이션일 뿐만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의 작품들로 구분하게 될 확고한 전환점으로 남게 될 작품이다.



영진공 신어지







도착(THE ARRIVAL), 흑백 무성영화처럼 흘러가는 가슴 아련한 동화.


글,그림_숀 탠

펴냄_사계절 출판사




현대 사회에서의 고독한 개인을 그렸던 ‘빨간 나무’나 유럽의 제국주의 혹은 산업화의 횡포를 이야기한 ‘토끼들’에서 어린이 책을 넘어선 주제들을 기발한 아이디어와 그림으로 풀어냄으로 어린이를 비롯 어른들에게까지 큰 감동을 주었던 숀 탠은 이번엔 직접 스토리까지 쓰며 4년간의 노력 끝에 신작 ‘THE ARRIVAL’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번 작품은 여러모로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가 없는데 (물론 그가 발표하는 작품을 접할 때 마다 나는 매번 충격에 휩싸였지만!) 무엇보다 동화책이 아닌 그래픽 노블이라는 점입니다. 동화책이라는 매체의 한계(12~15장)를 벗어나 그는 무려 781컷의 그림을 통해 보다 마음껏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숀탠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보여주는 유려한 그림실력과 기발한 상상력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간과 사회를 이야기하는 주제의식과 자칫 어둡게 빠질 수 있는 이야기를 아름답고 유쾌한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능력에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이민, 난민이라는 인류의 어둡고 슬픈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책은 따스하고 아련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빛바랜 흑백사진과 같은 그림들이 뭉클하고 아련하게 다가온다.


그가 ‘이민, 난민’을 주제로 택한 이유가 그의 아버지가 이민자였다는 개인적 가정사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 살고 있는, 이민자들로 세워진 호주 대륙의 역사 때문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개인과 호주라는 대륙을 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이야기입니다. 책 속에는 가난을 피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떠나야만 했던 부모님 세대, 지금 코리아 드림을 꿈꾸며 하루 12시간 이상을 노동하고 있는 우리 주변 동남아시아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가난과 전쟁, 폭력을 피해 고국을 버리고 낮선 나라에 정책해야만 했던 가슴 아픈 이들의 상처를 저채도의 정성스런 소묘화를 통해 따스한 손길로 그려내었습니다. 물론 그의 기발한 상상력은 이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그의 상상력은 이 어둡고 슬픈, 그래서 딱딱하거나 신파가 될 수 있는 이야기를 부드러운 한편의 동화로 만들어주었습니다. 대사가 없는, 빛바랜 사진처럼 그려진 그림들은 아이들에게도 어른들에게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한 편의 무성영화처럼 흘러갑니다. 



아픈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싹은 언제나 피어난다는 작가의 따스한
시선이 느껴진다.




저는 국내 출판은 어렵지 않을까 해서 원서로 구입하였는데 이번에 사계절 출판사를 통해 국내에서도 정식출판이 되었습니다. 출판사의 좋은 안목으로 국내에서도 많은 이들이 좋은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어 기쁘지만 아쉽게도 동화책으로 분류되어 서점에서는 동화책 코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영진공 self_f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