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그리운 나와 그대에게 …

“꿈이 뭐예요?”

“명문대 나와 월급 빵빵한 직장에 들어가야지”
“아니면 연예인이 되어 모두가 나만 쳐다보는 걸 즐기는 거야”
“그리고 벤츠차 굴리면서 강남에서 살아봐야하지 않겠어”

“… 그건 … 꿈이 아니잖아요 …”

명문대 졸업에 억대 연봉을 받는 임원이 되거나 잘 나가는 연예인이 되어 몇 억이 넘는 출연료를 받으며 강남에 큰 아파트 사고 마이바흐 굴리면 그 다음엔 … 또 뭘 사고 뭘 이뤄야하지?

그렇게 자꾸 욕심을 키워가는게, 그렇게 사는게 내 꿈이 될 수 있을까?
내 삶의 목표, 내 커다란 욕구가 될 수야 있겠지만 … 그걸 꿈이라고 할 수 있나?
결코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나만을 위한 무언가를 원한다는 게 꿈이기나 한 걸까?

오늘 내가 왜 무엇을 위해 사는지, 그리고 내일 나는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주는 게 내 꿈이어야하지 않을까 …

그런데 요즘 또 지금 내게는 꿈이 있는가?

그래서 꿈이 그립다.
꿈을 그리며 노래를 들어본다.
꿈이 그리운 사람과 함께 듣고싶다.

John Lennon과 Carole King의 노래를 …

Imagine
By John Lennon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천당이란게 없다고 상상해봐요,
그냥 생각해봐요,
땅 속에는 지옥도 없고,
머리 위에는 하늘만이 있어요,
우리 모두가 보다 나은 오늘을 위해,
살아가는걸 상상해보세요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Nothing to kill or die for
And no religion too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국가라는게 없다고 상상해봐요,
어려워말고 그냥 생각해봐요,
누굴 죽일 필요도 무엇을 위해 죽을 필요도 없죠,
종교도 없다고 상상해봐요,
우리 모두가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걸 상상해보세요,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날 보고 몽상가라 하실 수도 있죠,
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랍니다.
언젠가 그대도 함께 하길 바래요,
그러면 이 세상은 하나가 될 수 있어요.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소유가 없다고 상상해봐요,
그러실 수 있나요?
탐욕도 없고 굶주림도 사라져,
형제애가 넘치는 세상,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함께 나누는 상상을 해보세요,

You may say that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날 보고 몽상가라 하실 수도 있죠,
하지만 난 혼자가 아니랍니다.
언젠가 그대도 함께 하길 바래요,
그러면 이 세상은 하나가 될 수 있어요.

You’ve Got A Friend
By Carole King

When you’re down and troubled
And you need some loving care
And nothing, nothing is going right
Close your eyes and think of me
And soon I will be there
To brighten up even your darkest night

네가 어렵고 힘들 때,
아무 것도 제대로 되는 게 없을 때,
사랑의 손길이 필요할때,
눈을 감고 나를 생각해,
그러면 나 거기 있을테니,
네 가장 어두운 밤을 밝히는 빛이 되려니,

You just call out my name
And you know wherever I am
I’ll come running to see you again
Winter, spring, summer or fall
All you have to do is call
And I’ll be there
You’ve got a friend

그냥 내 이름을 불러,
나 어디에 있든 대답할테니,
널 보기 위해 달려올 거야,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든 나를 부르기만 해,
그러면 나 거기 있을테니,
네겐 친구가 있다는 걸 기억해,

If the sky above you
Grows dark and full of clouds
And that old north wind begins to blow
Keep your head together
And call my name out loud
Soon you’ll hear me knocking at your door

네 머리 위의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었을 때,
거친 북풍이 불어올 때,
고개를 들고,
내 이름을 크게 불러,
그러면 넌 곧 내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을 거야,

You just call out my name
And you know wherever I am
I’ll come running to see you
Winter, spring, summer or fall
All you have to do is call
And I’ll be there
You’ve got a friend

그냥 내 이름을 불러,
나 어디에 있든 대답할테니,
널 보기 위해 달려올 거야,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든 나를 부르기만 해,
그러면 나 거기 있을테니,
네겐 친구가 있다는 걸 기억해,

Ain’t it good to know that you’ve got a friend
When people can be so cold
They’ll hurt you, and desert you
And take your soul if you let them
Oh, but don’t you let them

친구가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지 않니?
네 주위의 사람들이 너무나 냉정할 때,
그들이 널 상처내고, 널 황폐화 시킬때,
그들은 네 영혼마저 요구할지도 몰라,
하지만 친구여, 그들에게 영혼까지 내주지는 마,

You just call out my name
And you know wherever I am
I’ll come running to see you again
Winter, spring, summer or fall
All you have to do is call
And I’ll be there
You’ve got a friend

그냥 내 이름을 불러,
나 어디에 있든 대답할테니,
널 보기 위해 달려올 거야,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든 나를 부르기만 해,
그러면 나 거기 있을테니,
네겐 친구가 있다는 걸 기억해,


영진공 이규훈

“잉그리드 버그만”의 후회하지 않는 사랑

오늘 본 히치콕의 영화 <오명 notorious> 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않고 잉그리드 버그만의 옆모습이 나오는 모든 장면을 꼽을 것이다. 1940년대, 헐리우드에서 여신으로 불렸던 스웨덴 출신의 전설적인 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그의 이름을 구글 창에 놓고 두드려봤다. 또로로 올라오는 수 많은 정보 틈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뉴스 하나가 있었다. ’사랑과 불륜의 경계에 선 잉그리드 버그만’

남편과 11살난 딸을 두고 로마로 떠나다..

“만약 당신이 영어를 매우 잘하지만, 이탈리아어는 그저 ‘사랑해 ti amo’ 밖에 모르는 스웨덴 여배우가 필요하다면, 나는 언제든 그곳으로 가서 당신과 영화를 찍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1948년 뉴욕의 맨하튼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 를 본 후, 로셀리니에게 편지를 쓴다. (버그만은 로셀리니의 영화를 본 직후부터 그를 사랑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 뒤 1949년 8월 버그만은 남편과 열한 살의 딸, 그리고 팬들로부터 누렸던 온갖 인기와 애정을 포기하고 이탈리아 로마로 달려간다. 로셀리니와 버그만의 사랑은 이렇게 시작된다. 각자 배우자가 있는 상태였지만, 함께 한 첫 영화 <스트롬볼리>를 촬영하는 동안 두 사람은 아이를 가졌다. 버그만은 미국 팬들에게 타락한 우상이라는 거센 비난을 받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1950년 5월 24일 멕시코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다시 태어나도 같은 길을 가겠다.”

로셀리니는 자신의 아내이자 영감의 원천인 버그만을 데리고 <유로파 51>, <이탈리아 여행>, <공포> 등의 영화를 차례로 완성해간다. 하지만 잇따른 상업적 실패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은 버그만을 지치게 만들었다. 결국 버그만은 로셀리니를 떠나 1956년 장 르누아르의 <엘레나와 남자들>을 찍은 후 할리우드로 돌아갔다. 이후 잉그리드 버그만은 헐리우드에서 성공적으로 재 데뷔 하고, 로셀리니는 인도로 떠난 뒤 영화와 결별하고 다큐멘터리에 몰두한다. 이렇게 이들의 열정적인 사랑은 7년 만에 막을 내리지만, 버그만이 자신의 65살 생일 날 남긴 말은 그들의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내가 불륜을 저지르는게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후회는 없다. 정말 멋진 생을 살았다. 비난이 있었지만,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는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영진공 애플

명박 앙투아네트 ???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면 될거 아니냐” 는 말로 유명합니다.
그 말이 민심에 불을 질러서 결국 프랑스 혁명을 불러일으켰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마리 양은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다죠.

마리 양은 많이 억울할 겁니다.
자기가 하지도 않은 말때문에 혁명에 불싸지른 인간으로 찍힌데다
정말로 혁명이 일어나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나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그녀는 그 소문에 온전히 책임이 없다 할 수가 없습니다.
어쨌거나 민심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딴세계에서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요.

그녀가 했다고 알려진 그 말은 그런 면에서 사실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상징”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왕실과 귀족들이 세상을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의미하는 …
그리고 그 소문이 그렇게 쉽게 확산되고 아직까지도 살아남은 것은
많은 이들이 예나 지금이나 그 상징에 공감한다는 뜻이죠.

지금 우리나라 청소년들(이젠 더 이상 청소년들만은 아닌 것 같더군요)이 촛불들고 길거리에 나온 이유가 과학적 사실이 아닌, 비합리적인 두려움(혹은 선동)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길게는 6년, 짧게는 6개월 전에
지금 촛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소리를 해댔다는,
그래서 지금 도는 말들은 애초에 전부 지네들 입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지금 거리에서 촛불을 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결코
“광우병에 대한 두려움” 만은 아니라는 걸 분명히 말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사람들을 움직이는 건 “이명박에 대한 두려움” 입니다.
이 인간이 앞으로 또 뭔 짓을 저지를 지 정말 모르겠다는 두려움 말입니다.

어떻게 된게 이 인간의 말은 시시각각으로 바뀌고,
규칙이나 법을 어긴 적이 부지기수인데다
조금 문제가 되면 다 오해나 거짓말이라고 주장을 하니
앞으로도 무슨 말이나 행동이든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수도 없습니다.

분명히 몇 개월전 기사에 의료보험 당연지정제 폐지안이나
수도공급 민영화를 비롯한 공공기관 민영화에 대한 (유언비어가 아닌) “기사”가
여러번 보도된 바 있음에도 이제와서 그 모든 것이 “괴담” 이라고 하고
한쪽에서는 운하 안판다고, 포기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운하 개발 예정지의 땅값은 요동치고
신도시 개발 안한다면서 시장이 국회의원들 불러다 땅값 운운 하고 있으니 …

저는 사실 광우병은 별로 무섭지 않습니다.
확률적으로도 그렇고 다른 여러가지 면에서 … (저는 살만큼 살았다는 -_-)

하지만 “(비록 수입을 허용해도)민간업자가 수입 안하면 되는 거 아니냐 …” 라든가
“만약에 국민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수입을 중단한다”는
청와대와 대통령의 말을 들으니
안무섭다가도 무서워지는군요.;;;;;

이런 말 속엔 이미 국가의 책임이 뭔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나는데다,
(
가난뱅이님이 지적하셨듯, 그럼 마약도 그냥 수입허용하던지..)
순간을 모면하게 위해선 미국하고 맺은 협의문도
(말로만) 생까는 인간이라는 게 보이니까요.
광우병 문제는 잠복기를 고려하면 문제가 생겨도 임기 이후에나 생길 것인데다
무엇보다 국가 대 국가의 협상이 애들 장난이냐고요.
애초에 협상내용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인데
재협상은 못한다면서 그냥 수입중단?

도대체 “책임”이라는 게 뭔지 알고나 있을까요?

이러니 이들의 뭘 보고 미래를 예측해야 하냐고요.
지금 사람들의 촛불은 미친 운전사가 난폭운전을 하는
택시에 앉은 승객의 심정을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이걸 유언비어나 선동의 결과로 이해하는 그 사고방식은 …
정확히 80년대로의 회귀일 뿐이죠.

이젠 댓글도 통제하라고 했더군요.
(http://media.daum.net/economic/stock/others/view.html?cateid=1006&newsid=20080507161512850&cp=moneytoday)
근데 꼭 지키지 않아도 되는 명령이었다는데, 그게 말이 되냐고 …
이런 식이니 안 무서울 수가 있나요.

영진공 짱가

어버이날 단상

 

어버이날 지나고 내려가기엔 애매한 연휴라 지난 주에 미리 고향에 들렀다.

생활비만 드려왔지 변변한 선물 한 번 해드린 적이 – 물론 부모님 생일 때도 – 없어서 이번에는 맥북 판 돈도 좀 있겠다, 무언가 해드려야겠다 생각했다.

교외로 나가 봉성에 있는 숯불 돼지고기 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었다. 1인분이 500g 인데다가 만원 밖에 안 한다. 더군다나 미리 구워서 나온다. 정말 싸고 맛 좋다.

다시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가면서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영주에 거 마사이 족 신발 파는 데 있냐?”
“오거리에서 가고파 극장 가다가 우측에 있어요.”

유명하긴 유명한가 보다. 중소도시에도 하나 있으니.

아버지는 모터싸이클만 내리 10년 넘게 타셨던 이후로 무릎에 바람이 들어서 사다리 – 아직도 사다리 오르내리는 간판장이시니 – 타면 아프시다 하시고,
어머니는 한번 다치신 이후로 걷기만 하셔도 무릎이 아프시다 하시니 늘상 마음에 걸리던 게 이거였다.

‘뭐 한 켤레 돈 십만원 하그찌’

가격은 묻지 마시고 마음에 드는 색깔이나 고르시라고 얘기했다.

이것 저것 신어보시고 걸어도 다녀 보시더니 끝내 주인장에게 가격을 물으신다.

“한 켤레에 이십구만칠천원입니다.”

내심 놀란 건 나다.

‘뭔 신발이 왤케 비싸?’

어머니나 아버지나 묵묵히 신발만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아 가격 신경쓰지 마시고 색깔이나 마음에 드는 거 고르시라니께네?”

아버지는 신발 안을 들여다 보면서 ‘Made in China’랑 ‘Made in Vietnam’만 용케 찾아내신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핑크색을, 아버지는 그냥 무난한 회색을 고르시고, 결국 두 분 다 한 켤레씩 구입해서 매장을 나왔다.

두 분 평생 3천원 뺀 30만원짜리 신발은 처음 신어 보신 게다.

형 장가갈 때 형수네서 혼수로 해오는 물품도 서민답게 예의만 갖췄지 비싼 거 아니 원하셨던 분들이시다.

물론 나도 30만원짜리 신발은 커녕 신사화도 제일 좋은 게 군용 에스콰이어 보급 단화가 고작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건 일종의 사치였다. 일상에서 신을 신발도 아니고 – 사실 저 마사이 족 신발은 걷기 운동 외에는 좀 불편해 보인다 – 산책하시고 걷기 운동 하실 때 신으시라고 사드린 ‘레저용 신발’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사거리 신호등에 걸려 멈췄을 때 어머니가 얘기를 꺼내셨다.

“엄마가 너들 메이커 있는 옷도 한 번 못 입혀보고 키우면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아나?”
“아이고 엄마, 다른 애들한테 밑보이지 말라꼬 맨날 깨끗하게 옷 입힐라꼬 고생한 거 내 모르는가? 말이사 바른 말이지, 메이커 한 번 못 입어보고 크는 바람에 나는 ‘메이커’가 뭔지도 모른 채 컸잖는가?”
“그렇나? 엄마도 똑같데이, 엄마도 뭐 메이커를 써 봤어야 메이커를 살 줄 알쟤.”

한바탕 차 안이 웃음으로 가득했다.

사실 그러고 보니 내가 ‘나이키’라는 상표를 인지하기 시작한 건 중학교 들어가고 나서였다. 농구화가 몇 만원 한다는 사실도 내겐 충격이었는데, 우리 엄마는 농구화처럼 생긴 신발을 5천원에 난전에서 구해 오셨기 때문이다.

신발 뿐이던가, 난전표 티셔츠, 난전표 잠바….

집에 돌아와서 참외 하나 깎아 먹고 어머니는 새 신발을 신고 동네 운동을 나가셨다.

그리고 들어오시다가 지퍼가 다 나가 떨어진 내 신발을 보셨다.

“아는 다 떨어진 신발 신기고, 부모란 게 30만원짜리 신발을 사 신네 그려”
“거 2만원짜리 신발 쫌만 신으면 다 닳두만, 올라가서 새로 사 신을 끄여”

오늘도 수업 시간에 ‘브랜드 충성도’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 대고 있는 광경을 보면서 지금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건지, 아니면 이 엿 같은 상황을 무시하고 관조하는 건지, 아니면 어느 새 적응하고 사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여자들끼리 모임에 ‘명품’ 하나 정도 꿰 차고 나가야 쫌 있어 보이는 사회.

남자들 패션에 ‘명품’ 하나 쯤 걸쳐야 ‘패션 감각’이나 ‘센스’가 있어 보이는 사회.

그나마 위안인 것은 내가 ‘부모님께 명품 하나 장만해 드려야지’라는 마음이 아니라 부모님 무릎 아프시고 허리 아프실까 부담 좀 줄여 드리려 ‘기능’으로 신발을 골랐다는 점일 게다. 그렇기에 사실 지불 능력이 있어서 ‘뭔 신발이 이리 비싸’ 생각은 했어도 ‘돈 아깝다’는 생각 따윈 들지도 않았다.

평생 보세는 커녕 시장 난전에 널린 옷 가지나 사 입어 오던 가족.

1년 내내 쇠고기는 커녕 돼지고기 한 번 먹을까 말까 했던 가족.

난 서울 사는 고모네가 우리 가족 올라올 때마다 돼지고기를 구워 주길래 되게 잘 사는 줄 알았다. 물론 우리 집 보다야 잘 살았지만.

서울 와서 벼래 별 짓 다 하면서 부모님 생활비까지 챙겨도 1년은 커녕 1주일에 몇 번씩 고기를 먹게 되는 상황을 보면서 기가 막혔다.

왜 우리나라는 ‘지방’에서 우리 부모님 모시고, 1주일에 한 번 외식도 하고, 고기도 구워먹으면서 여유있게 살기 어려운 걸까?

아니, 왜 그렇게 사는 방법을 억지로라도 막는 걸까?

기회비용이라는 게 있어서, 내가 아직 고향에 살았더라면. 아직까지도 취업은 커녕 공사판에서 노가다나 뛰고 있었을 게다.

서울로 올라와 돈은 조금 더 벌었을 지언정.

부모님께 뭐 제대로 해드린 것 하나 없다.

지방 어딜 가나 듣는 이야기.

‘누구네 아는 서울 가서 돈 잘 벌고 있댜’

도대체 누가 자식키워 서울, 뉴욕 보내려 뒷바라지만 하는 세상을 만든 건가?

기회비용이고 나발이고.

난 우리 부모가 반평생 고생하시며 날 키워주신만큼, 조금 더 편안한 노후를 보내시도록 내가 노력하고 싶다.

그저 1년에 몇 번 고향에 내려가는 게 아닌.

고향에서도 어렵지 않게 취업해, 부모님 옆에서 돌봐드리며 월급 받아 가족이 즐겁게 웃으며 살면 그 보다 더 나은 삶이 어디 있겠는가?

무한 경쟁이니, 시장 원리니.

그토록 자기 가치를 높이는 것과 그 돈으로 명품을 비롯해 자기 치장을 하는 것과.

가족끼리 작은 차에 모여 앉아 웃으며 저녁 나들이 할 수 있는 삶과.

어느 것을 택하겠는가?

극단적인 선택이라고? 마음은 후자가 그립지만 현실은 전자가 아니냐고?

씨바 ‘민주주의’ 사회라면 후자를 이룰 수 있게 대다수가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

비싼 신발을 온천이나 – 내 고향 영주에는 시에서 관리하는 온천이 있다. 목욕탕 정도로 싸다 – 공공장소에 두면 사람들이 가져갈까봐 고민하는 어머니께 결국 한 마디 했다.

“아 잃어버리면 또 사면 되잖는가?”
“그럼 아깝잖냐?”
“아 뭐가 그리 아까운가, 원래부터 없던 건데, 생겨서 잠깐이라도 즐거웠으면 됐지 비싸든 싸든 다 똑같이 발에 신고 다니는 건데, 잃어버렸다고, 누가 훔쳐갔다고 발만 동동 구르면 내 속만 타지 훔쳐간 놈 속이 타는가? 거 엄마가 불공을 그리 들였으면 법정 스님 ‘무소유’ 정도는 생각해야되잖는가?”
“그래도 아들이 사준 건데 아깝지.”
“아 거참 아들이 또 사준다니께네?”

자본주의를 치장하는 것은 욕심에 대한 허용이고.

자본주의의 폐해를 막는 방법은 과욕에 대한 제재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생각있는 사람들의 연대다.


영진공 함장

5월의 첫 촛불, 그날 밤 …

2008년 5월의 첫번째 촛불문화제가 있던 날.
일찌감치 일을 마무리하고 시계가 6시 10분을 알리자 곧바로 책상에서 일어나 재킷을 걸쳤다.

“원래 회사라는 곳이, 6시에 퇴근이라고 애교로 말은 하지만 기본적으로 9시까지는 일을 해 줘야 돈을 받아갈 수 있는 곳이다.”라는 지 혼자만의 커먼 센스를 넓다란 마빡에 붙이고 있는 듯한 표정의,

대머리 지점장의
“일 안하냐.”
라는 지적에
“오늘은 일 안 합니다. 집회 갑니다.”
라고 쏘아줬다. 평소와는 180도 다른,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평생 처음 나가보는 촛불문화제.
미선이 효순이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도,
어이없는 이유로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 탄핵을 당할뻔한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의 비통함에도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건만.

그날은 달랐다.
맞붙어 싸우기보단 뒤에서 비웃기를 좋아하던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와 그다지 크게 다르지도 않을 터인데.

하루 하루 살아가기가 물 없이 건빵 먹기보다 더 퍽퍽한,
당장 정시에 퇴근하려고 해도 당장에 프리미어 리그급 백태클이 날아오는 현실 속에,

언제나 총대를 매고 앞에 나서는 이에게만 총알을 쏟아붓는,
그래서 어린시절부터 입 닥치고 중간에만 있으란 교훈을 사방팔방에서 5.1 채널 돌비 서라운드로 듣고 살아왔던 우리들 중,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일에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용기를 보여줄까.

그래서 그날 나의 발걸음은 어쩌면,
참여하겠다는 목적보단 내 눈으로 그 숫자를 확인하고 싶다는,
비겁에 가까운 생각으로 움직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난,
당장의 현실이 어떻게 바뀌리라는 희망보단,
욕이라도 한번 해주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심정을 더하여,
그렇게 모임장소로 향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부인할 수 없는 “우리 손으로 뽑아 놓은 대통령”의 두 달 동안,
그 버라이어티한 삽질들은 모든 쇼프로그램의 시청을 자제하고 시사뉴스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게 해주었다.

블록버스터가 터지면 소규모 영화들은 살아남기 힘든 법.
연일 억장이 무너지는 빅재미(?)를 선사해주시는 우리 장로 나으리의 오랄개그 앞에,
나의 완전소중 거성 형님의 몸개그도 맥을 추지 못했다.

나는 그저, 연일 쏟아지는 엄청난 뉴스 앞에 망연자실 하거나,
혹은 대한민국의 30%들을 향해 허공에 욕설을 띄워 보내다가,
에라,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비겁한 자위로 눈을 감아버렸다.

그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곧 입대를 앞두고 있는 내 사촌 동생들과,
매일 학교에서 급식하는 밥을 꾸역꾸역 받아 먹을 내 조카들 보기에 쪽팔려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전까진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속으로 ‘이 정도 모였으면 정말 많이 왔다.’라고 생각하고 난 후에도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모여드는 이들 중엔 … 어잌후. 내 조카들이다. 내 사촌 동생들이다.

아직 태어났을 적에 가지고 왔던 것이 분명한 피부결을 가진, 여고생이고 여중생이었다.
그들이 외쳤다.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을 것이요, 누가 이끌지도 않았을 그들이 외쳤다.

살고 싶다고.
대학에 가고 싶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싶다고,
가정을 갖고 싶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꿀 수 있는 분에 맞는 행복을 누려보고 싶다고,

새벽부터 이어지는 수업과 자습,
식사시간이나 되어야 허리 한 번 펼 수 있는 그들이,
차가운 돌바닥에 앉아 자기의 ‘살’권리를 주장하고, 세상이 바뀌길 바라고,
우리가 너무나 쉽게 내팽개친 것을 붙잡아서 소리치고 있었다. 희망, 희망을

그 외침의 울림이 내게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아저씨는 뭐하고 계시나요?”라는 응시로 쏟아졌다.

그렇게 내가 만난 오월의 대한민국은 엄연히 살아, 소리치고 있었다.
가슴과 가슴에 촛불로 너울대는 희망을 품고, 꿈틀거리는 빛의 물결처럼 살아서,
이보다 더한 고난, 이보다 더한 역경, 이보다 더한 절망 모두 이기고 살아 왔음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이곳에 뿌리박고 살아 나갈 것이라고.
“살” 것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시나브로 나도 외치고 있었다.
우두커니 서서 우리를 내려 보며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이 않는 듯 조소하고 있는,
섬기고 듣겠다면서도 마치 소음이 삑삑댄다는 듯이 귀를 막고있는 것들의,
눈이 번쩍 뜨이고 귀가 뻥 뚫릴 때까지 울려 퍼질 그 함성에 내 작은 목소리를 보태고 있었다.

아, 대한민국, 어째도 내 나라.  질경이처럼 질긴 연이여.
이 멍청한 사람들아.  이 못난 사람들아.  이 바보 같은 사람들아.

사랑합니다.


영진공 巨衣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