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액트가 사라진다


미디액트가 사라진다.

그곳에 처음 발 들여놓은
날, 이토록 완전한 영화 교육의 장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내심 크게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영원히 곁에
있어 줄 것 같은 친절함 때문이었을까. 이후 겨우 두어 개의 수업을 들었을 뿐인데 어쩌면 이렇게 허망하게 미디액트가 사라진단다.

그랬다. 작년 여름, 미디액트에서 나의 첫 영화를 위해 고민하고 촬영한 1주일동안 고되고 힘들었지만,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당시에도, 지금 돌이켜 보아도 그 터질 것 같은 흥분은 아직도 그대로 심장을 꿈틀인다. 나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정식 영화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저 영화가 좋고 함께 하고픈 예비 영화인에게 두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장비를
대여해주고 유용한 교육 프로그램과 세미나에 참여 가능케 한 곳이 바로 미디액트였다.




이제, 영진위가 선정한 새 사업주체인 (사)시민영상문화기구가 그 곳을 대신 꾸려나갈 것이다. 한오라기의 희망을 저버리긴
싫지만, 그간 미디액트 식구들이 개인의 안위 따위 접어두고 이뤄낸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갖출 것이란 기대가 들지 않는다.

독립영화, 독립영화전용관과 기타 영화제들이 정권이 바뀐 뒤 영진위의 진두지휘 하에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있는 지금, 이
모든 게 시대착오적인 정치 탄압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지난 주 금요일 미디액트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이송희일 감독이 한 말이 두고두고 가슴을 치는 건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철거당한 사람들의 심정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다. 예술영화전용관, 독립영화, 시네마테크, 미디액트처럼 시민과 교감해온 영상운동 등 돈이 안 되는 독립영화들이 하나같이 영화판에서 철거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진공 애플

눈물의 마음


분향소에 향을 꽂는다. 겨울의 한기에 순식간에 얼어버린 향 냄새는 나에게 달하지 않는다. 향을 꽂는 그녀들의 곁에는 고인의 아내로 보이는 유족들이 함께 선다. 함께 묵념을 한다. 주변머리 없는 나는 분향을 할, 혹은 헌화를 할 생각도 못하고 그저 덩그러니 먼 발치에 섰다.

나와 같이 지하철에서 내린 아가씨들이었다. 학생처럼 보였는데 수수한 차림이었고, 눈에 띄지 않았다. 용산 사고 현장 분향소는 우리나라 최고 회계 사무소라는 삼일 회계 법인 바로 몇 미터 뒤에 있었다. 그녀들과 나는 우연히 방향이 같았고, 화재의 흔적 보다 진압의 흔적이 완연한 그곳의 참혹함 앞에서도 나는 참혹해 하지 않았고, 서성거렸고, 그때 그녀들은 분향소에 들어섰다.

동지애를 표시하는 수많은 현수막이 사고 건물 옆으로 붙어 있었다. 시를 이루지 못한 한 시인의 시도 큼직히 걸려 있었다. 전경 버스는 길을 봉쇄하고 있었고, 언론사 기자는 인도에 주차된 취재차량 안에서 선잠을 자고 있었다. 수많은 목소리들이 동시에 요동치는 곳이었지만, 결정적으로 내 귀를 부여잡는 목소리는 없었다.

영하 십도, 매서운 날씨에 그곳을 종일 지켜야 하는 유족들은 눈만 빼고 온 몸을 다 가렸다. 고인의 영정 사진 뒤로, 살아남은 사람은 추위를 느끼는 법이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이곳이 지긋지긋했고, 떠나고 싶었다. 그때 묵념을 하던 한 아가씨가 손을 눈가로 올리더니 눈물을 닦았다.

고인과 친분이 있었던 것도, 관계자도 아닌 게 분명한 그녀를 울리는 그 정서는 무엇일까 멀찍이 서서 생각했다.

사실은 너무나 간단하고 자명하다. 시 외곽에 신도시를 개발하는 것 보다 시 내곽을 개발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개발이익을 남긴다. 집주인들은 평균 5억의 보상을 받았고, 개발사들은 천문학적인 개발이익을 남길 테다. 그 이익의 떡고물 앞에 용역업체가, 구청이, 경찰이, 검찰이 머리를 조아린다. 사라지는 것은 평균 2천만원의 보상을 받고 갈 곳이 없어진 세입자들 뿐이었다. 자본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하는 일은 개발이나 국익이라는 말로 포장되고, 그 과정을 지켜야 할 법은 이미 평등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역시 너무 늦은 자각일지도 모르겠다.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하다는 자명한 원칙은 이미 깨졌고, 세상은 원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강해져야 하고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이미 내면화하고 있다. ‘억울하면 출세해야 하는 것’이 ‘만인 앞에 평등한 법’ 보다 사람들에게 가깝다. 그래서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하지 않은 순간, 다시 말해 이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적인 약속이 깨어지는 순간을 목도한 사람들은 억울하면 출세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신념처럼 떠받든다. 법이 나를 지켜주지 않을 것이니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해선 부자가 되고 힘 센 놈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밖으로 내뱉진 않지만, 마음 속에서 붙들고 있는 이 시대의 진실이다. 하지만 분향소 안의 그녀는 그 순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어쩌면 희망이란 것이 다른 사람들의 노력으로 불 붙기를 기다리는 방관자일 수도 있다. 촛불 집회를 자신들의 영향력으로 연결하려는 여러 정치 세력들의 아우성이 내키지 않았고, 그래봐야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이라고는 투표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가난한 상상을 할 뿐이었다. ‘조국’이나 ‘민족’이란 단어에 일말의 미련도 없는 나는 수시로 이 땅을 떠날 수 있기를 바랐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그녀는 눈물의 마음을 가졌고, 추하고 추한 나는 방관자의 마음을 가졌다. 희망이란 것이 존재해 그것에 불이 붙는다면 그것은 저 눈물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될 것이었다. 희망이란 것이 존재해 그것에 불이 붙길 바라면서도 그러나, 눈물의 마음을 가지지 않은 나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마침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가 내 옆을 지나갔다. 아이가 말했다.

“엄마 화염병 때문에 불이 난 거야?”
“응, 그러니까 불조심해야 해.”

모자는 풍채 좋은 삼일 회계법인 빌딩의 그늘 아래로 멀어져 갔다. 지난 정권 시절 브리핑룸 통폐합이 언론탄압이라고 대통령에게 항의하던 용감한 기자들은 승용차 안에서 선잠을 잔다. 그래서인지 아직 어떤 언론도, 무허가 용역업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개입했는지, 동의 없는 시신 부검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이런 비극을 낳으며 추진한 재개발의 이익은 최종적으로 누가 가져가는지 말하지 않는다. 눈물 흘리지 못하는 마음을 가진 나는 애꿎은 서울의 풍경만 기록한다.

2009년. 1월. 신용산 역 2번 출구 그곳.

영진공 철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