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액트가 사라진다


미디액트가 사라진다.

그곳에 처음 발 들여놓은
날, 이토록 완전한 영화 교육의 장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 내심 크게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영원히 곁에
있어 줄 것 같은 친절함 때문이었을까. 이후 겨우 두어 개의 수업을 들었을 뿐인데 어쩌면 이렇게 허망하게 미디액트가 사라진단다.

그랬다. 작년 여름, 미디액트에서 나의 첫 영화를 위해 고민하고 촬영한 1주일동안 고되고 힘들었지만,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당시에도, 지금 돌이켜 보아도 그 터질 것 같은 흥분은 아직도 그대로 심장을 꿈틀인다. 나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정식 영화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저 영화가 좋고 함께 하고픈 예비 영화인에게 두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장비를
대여해주고 유용한 교육 프로그램과 세미나에 참여 가능케 한 곳이 바로 미디액트였다.




이제, 영진위가 선정한 새 사업주체인 (사)시민영상문화기구가 그 곳을 대신 꾸려나갈 것이다. 한오라기의 희망을 저버리긴
싫지만, 그간 미디액트 식구들이 개인의 안위 따위 접어두고 이뤄낸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갖출 것이란 기대가 들지 않는다.

독립영화, 독립영화전용관과 기타 영화제들이 정권이 바뀐 뒤 영진위의 진두지휘 하에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있는 지금, 이
모든 게 시대착오적인 정치 탄압 때문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리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지난 주 금요일 미디액트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이송희일 감독이 한 말이 두고두고 가슴을 치는 건 비단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철거당한 사람들의 심정이 이런 것이겠구나 싶다. 예술영화전용관, 독립영화, 시네마테크, 미디액트처럼 시민과 교감해온 영상운동 등 돈이 안 되는 독립영화들이 하나같이 영화판에서 철거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진공 애플

이송희일: “후회하지 않아”, <산업인력관리공단>, <영진공 66호>

산업인력관리공단
2007년 1월 1일

User inserted image
아프고 처절해도, 그래도 사랑은 찬란합니다.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이 때문에 아프고, 슬프고, 안쓰럽고, 짠하고, 서러워서, 이 영화의 두 남자는 참 많이도 운다.
아마 시퀀스마다 수민(이영훈) 아니면 재민(이한)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장면이 나올 것이다. 그들은 그걸 굳이 강한 남자인
척하며 가리려 하거나 참으려 하지 않는다. 사랑 때문에 그토록 자주 우는 남자들을 영화에서 보는 건, 그리 흔하지 않은
경험이다. 참고참고 또 참다가 한번 우는 남자들만 존재하던 영화들 사이에서, 아플 때마다 울고, 애절하게 울고, 그 눈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 남자들. 그러면서도 찌질한 자기연민으로 오염되지 않은 그들, 그들의 그 당당한 눈물이 아프고 좋았다.

참 쉽게 남발되는 ‘사랑’이라는 것, 이게 사실은 인간의 일생에서 얼마나 큰 것이고, 사실은 얼마나 ‘사기’이냔 말이다. 대부분 우리가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감정들은, 계급이건 뭐건 대체로 안전한 울타리 안
서 상호 쉬운 합의를 통해 ‘모방-연기’되고, 상호 쉬운 합의를 통해 종말을 맺는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것이, 그리고 연애라는
것이 그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 성립하게 될 때, 그 본질이 비로소 드러난다. 아프고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래서 더욱
절박하게 찾아 헤매고 처절하게 집착하는, 사랑. 도저히 쉽게 끊어낼 수도, 그만둘 수도 없는 사랑. ‘존재’의 증명, ‘존재’의
이유가 되는 것. 그렇기에 이렇게 아프느니 차라리 상대를 해치고 싶은 욕구. (나는 변심한 연인을 죽여버리는 살해범들의 심리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 정말 사랑이란 끔찍한 것이지 않는가. 여러 번 해보았다는 사람도 처음 하는 사람도, 그래서
사랑엔 언제나 서투르다. 많은 이들이 ‘진짜 사랑은 평생에 한번뿐’이라 얘기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많은 멜로드라마들이 이
사랑이라는 것의 외연은 그려내지만 그 본질까지 그려내는 데에는 실패한다. (이 지점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상당히 그럴 듯한
근거들을 가지는 것처럼도 보인다.) 멋지고 늘씬한 두 사람이 참으로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합의하고 한동안 들떠서 섹스하다가
끝을 내고 자기 연민의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때로, 꽃노래는 전체의 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는 그 ‘사랑’이라는 놈의 아프고
폭력적이고 유혹적인 내면을 부족하나마 드러내는 영화들이 나온다. 나는 이 영화가 그걸 해냈기에, 참 아프게 영화를 봤다.

User inserted image
수민에게 사랑이 쉽지 않은 건, 그의 거처가 자본의 가장 깊은 그늘 속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평론들이 얘기하듯, 이 영화는 6, 70년대의 일명 호스티스 영화의 문법을 되살렸고, 그 안의 신파적 요소를 끝까지
밀고 가고, 그것이 부잣집 남자와 가난한 호스테스 여자가 아닌, 부잣집 남자와 가난한 남자라는 그 차이만으로 새로운 의미를,
새롭고도 섬세한 경지의 효과들을 만들어낸다. (젠더가 갖고 있는 그 수많은 함축된 의미를 굳이 계급의 이름으로 부정하는 이들에게
이 영화는 좋은 반증의 사례가 될 것이다.) 두 신인배우들의 연기는 때로 어색하고, 장면들도 어색한 부분들이 가끔씩 있지만,
이를 모두 능가하는 진심이 배어나온다. 기술적인 약간의 단점을 모두 능가해버리는 강력한 장점이 있을 때, 영화는 약간의 티에도
불구하고 눈부신 빛을 내는 법이다. 예를 들어 수민의 단칸 자취방에서 사랑을 나눈 다음날 아침의 장면을 생각해 보자. 먼저
일어나 있던 수민이 재민의 자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의 귀에 뭐라뭐라 속삭인다. 재민은 밖으로 내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우리는
수민이 뭐라 말을 했을지, 재민의 대답을 통해서 유추할 수 있다. 대강의 내용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지만 그러나 정확한 말을 알
수는 없다. 이들의 다른 정사 장면뿐 아니라 바로 이 장면에서, 나는 사적인, 그러나 사회적인 관계망으로 재구조화되는 – 혹은
실은 사회적인 관계망 속에서 형성되었으나 사적인 영역에서 내밀하게 재구조화될 수밖에 없는 ‘사랑’의 복잡다단한 면이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이다.)

정말 안타까운 건, 그 장점에도 불구하고 때로 몰입을 방해할 정도의 강력한 단점이 튀어나오는 것이 사실인데 그 단점이
대체로 정말로 ‘기술’ 및 예산과 관련된 부분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영화의 시작부터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야외씬으로 시작하고, 이후 수민과 재민이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어서도 야외씬과 풀샷, 롱샷이 굉장히 많이 사용됨에도
영화에 거리 심도가 완전히 지워져 있다. 절절한 감정을 담은 절규의 대사들이 혹은 소근거림의 대사들이 때때로 사운드가 뭉개져
알아들을 수가 없다. 조악한 디지털 화면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나버린. 이송희일 감독이 영화 개봉 전 그토록 ‘겸손’의 말을
반복했던 게, 실은 겸손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에 훨씬 못 미치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절대적인 조건의 한계에 대한 아쉬움과
불만이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나마 환경이 괜찮다는 CGV 압구정에서 봤을 때 이 정도라면, 필름포럼이나 다른 곳에선 과연
어떠했을지. (그러나, 어쩌면 그런 곳이 영화의 분위기와 오히려 더 잘 어울렸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부디 다음번엔
꼭, 필름으로, 원하는 효과를 그려낼 수 있는 제반 조건에서 영화를 찍으실 수 있기를 빈다.

User inserted image
마주 잡은 손의 따뜻함이여... 삶의 이유, 존재의 증명. 너는 내 운명.

ps1. 이영훈은 목소리의 음색과 톤이 아주 부드럽고 안정적이고, 온몸으로 특히 눈빛으로 시나리오에 없는 대사들을 속삭이는
것같다. 그런데 ‘말하는’ 대사에 감정을 싣고 빼고 하는 쪽은 이한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둘 다 장점이 다르고 그 장점이
기대 이상이라, 앞으로 행보가 아주 기대된다.

ps2. 아마 격정을 그대로 표현해내는 캐릭터에 대한 내 선호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한의 재민 캐릭터가 (기대도 안
했다가) 너무너무 좋았다. 아마도 그는 가진 자이기에 자신의 욕망을, 사랑을, 그토록 직설적/격정적으로 뿜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주춤거리는 게 없는 이한의 연기가 그래서, 참 좋았다. 맞고 밟히고 끌려나가면서도 절박하게 수민의 이름을 외쳐대는…
그렇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면서 일어나는 사적 관계에서의 권력의 전치. 난 그가 구덩이 안에서 낑낑대다가, 수민의 목 뒤에 삽이
날아들 것 같자 벌써부터 비명을 질러대는 걸 들으며 펑펑 울었다. 그 상황에서도, 자기를 파묻으려 했던 수민을 걱정하는 거…
그래, 저게 사랑이지 싶었다. 사실 이 영화는 감정의 흐름과 러브씬의 연출이 아주 매칭이 잘 돼 있다. 많은 영화들이, 사이드
필드의 표현을 빌자면, 에피소드의 나열이되 플롯이 없지만 이 영화는 플롯, 즉 구조란 것을 가지고 있고 감정과 관계상의 변화의
흐름이 영화적으로 아주 잘 표현돼 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가진 기술적인 한계들이 더욱, 안타깝고 속상하다.

ps3. 평론가 심영섭이 이 영화에, 게이-언니 간 연대가 없는 게 아쉽다고 썼다. 직설화법으로 꼭 보여줘야 알아먹나? 이
영화에서 연애를 하는 두 사람의 방식, 끝없이 서로 속삭이고 매달리고 울고 그러다 복수(?)를 시도하고, 그거 전부, 이제껏
멜러영화에서 ‘여자들’이 했던 방식 아닌가. 게다가 재민이 굳이 김정화에게 고백을 하고 뺨을 후려맞는 씬, 고백하기 전에 굳이
재민이 김정화의 손을 잡는 장면의 클로즈업이 있는데 말이다. 김정화가 뺨을 후려치며 내뱉었던 말, “그딴 식으로 살지 마”가,
외려 재민의 사랑에 대한 격려로 들렸던 건 내가 지나치게 앞서나간 탓이란 말인가.

ps4. 영화에서 마담이 선수들을 ‘이 년, 저 년’으로 호칭하는 걸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더라. 그에 대한 감독의 반응은 이 글
참조하시라. 내 개인적으로는, 불편함은커녕 친근함이 들었다. ‘년’으로 호칭되는 저 선수들이, 아, 겉으로 생긴 건 달라도 속은
나랑 같은 성별이구나, 란 생각이 들어서. 남성에 대한 여성형 욕이 여성비하가 되는 건 맥락 때문인데(감독도 지적했듯 군대에서
하급자를 향한 ‘이 년, 저 년, 씨발년 등의 욕), 나는 이 영화의 경우 맥락이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남성
동성애자들의 사랑을 지켜보는 여성 관객의 입장은 사실, ‘연애라는 사적 관계를 지켜보며 느껴지는 배타되는 느낌, 소외감’을
넘어서는 부분이 분명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얼마 전 J 언니와도 얘기했지만, 아예 여성을 사람 취급 않기에 사랑의 자격도
부여하지 않는 문화가 인류의 역사에 분명 존재했으니까. 이걸 생각해 본다면, 년 타령에 불편해하는 반응은 (감독의 의도와
다르더라도) 분명, 나름 일리가 있는 반응이 아닐까 생각한다.

산업인력관리공단 조사1부 부장
노바리(invinoveritas@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