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조] 시드니 루멧


시드니 루멧
Sidney Lumet

(1924. 6. 25. ~ 2011. 4. 9.)



고인의 약력

                              * 씨네21 자료
                              * imdb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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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진공 일동


“만추”, 어색함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숑 …





필름이 유실되어 실제로 본 사람은 몇 되지도 않는다는 이만희 감독의 1966년 원작이나 김수용 감독의 1981년 리메이크작, 그리고 이번 김태용 감독의 두번째 리메이크는 모두 감옥에서 잠시 나온 여자와 도망자 신세인 남자의 짧은 사랑 이야기라는 기본 골격을 공유하고 있다.

내가 본 영화는 그 중 세번째인 김태용 감독의 <만추>가 전부라서 세 작품 간의 비교는 불가하다. 설렁 세 작품을 모두 보았다고 한들, 그런 비교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다. 원작이 따로 있었던 리메이크 영화라 해도 지금 내가 본 새 영화가 마음에 쏙 들어서 원작에 대해 특별히 궁금할 일조차 없는 매우 배부른 상태가 되는 편이 누가 뭐래도 최선인 것이 아니겠나.










김태용 감독이 연출한 이번 세번째 <만추>는 짙은 안개가 인상적인 시애틀을 배경으로, 현빈과 탕웨이를 캐스팅한 언어 삼국지 영화로 만들어졌다. 중국계 이민자인 애나(탕웨이)는 가족들과 중국어로 이야기하고, 미국에 온지 2년되었다는 훈(현빈)은 전화를 할 때에는 한국어를 하다가 애나와 이야기할 때는 영어를 사용한다.

기왕이면 영화 속에서도 영어를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만추>의 사실감을 망쳐놓았다고 지적한 달시 파켓의 글을 읽었는데, 일단 탕웨이의 경우 워낙 어린 시절부터 미국에서 자란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중국어와 영어에 모두 자연스러운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현빈이 역시 영어가 아주 유창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전혀 못하는 것도 아닌 “(원래 영어 만큼은 틈틈히 해두었었는데) 미국에 온지도 2년이나 되어 이제 현지인 서비스도 해볼까 생각할 만한” 정도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 두 배우가 구사하는 언어 자체가 특별히 작품의 완성도에 큰 지장을 주었다고 생각하지는 않게 된다.




달시 파켓은 영화 속 두 배우가 구사하는 영어에 관한 문제점 외에도 김태용 감독의 “도가 지나친 창조성”에 대해 지적을 하고 있는데 이 점은 충분히 동의를 할 수가 있는 부분이다. 특히 놀이공원에서의 환상 시퀀스가 지나치게 길게 늘어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을 달기 어려울 만큼 매우 정확한 지적이라 생각한다.

전체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이 차지하는 미학적 중요성이 정말 너무나 크다고 판단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 장면을 찍기 위해 들였던 노력이 너무 험난했기에 냉정하게 끊어내질 못했던 – 연출자들이 편집권까지 갖고 있는 상황에서 쉽게 벌어지는 지극히 초보적인 실수 –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어쨌든 이 부분은 지나치게 길게 늘어진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연출자의 판단 착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정지우 감독의 <사랑니>(2005)에서 여주인공이 남자에게 키스를 하면서 몸이 공중으로 서서히 떠오르던 씨퀀스처럼 너무 길지 않게 처리되었으면 훨씬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고 마는 것이다.




사실 <만추>의 어색함은 비단 놀이공원에서의 환상 씨퀀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현빈이 연기한 훈이라는 캐릭터와 그것을 연기한 현빈의 능력 자체가 어색함의 출발점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추>라는 텍스트를 김태용 감독이 자기화하는 과정에서 취한 전략 중에 하나가 놀이공원에서의 환상 씨퀀스에서 보여지는 창의성 – 매우 멋진 마법의 순간이거나 오히려 보는 이의 속을 느글거리게 만드는 어색함이거나 – 일텐데 이는 현빈에게 맡겨진 훈이라는 캐릭터에도 반영이 되어있다.

훈이라는 인물은 제임스 딘과 미키 루크의 계보를 이어보겠다는 듯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저 철부지라고 할 수도 있는 일종의 어린왕자 캐릭터인데 이것이 이번 <만추>에서 성공적으로 형상화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훈의 어색함은 곧 애나와의 관계의 어색함으로 연결된다. 귀신에 들린 것 마냥 지나치게 굳은 표정의 탕웨이도 아쉬웠지만 그런 탕웨이의 애나에게 무턱대로 찝적대면서 상당한 호의와 친절을 베풀고 있는 현빈의 훈이 연기는 더더욱 아쉬울 따름이었다. 시애틀을 배경으로 하는 탕웨이 주연의 중국영화 속에 한국의 트렌디 드라마 주인공을 그대로 꽂아놓은 듯한 느낌으로 시종일관했다고 생각한다.




<만추>에 대한 김태용식 재해석은 애초에 원했던 만큼 잘 나와주지는 못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 차라리 재해석을 하지 말고 원전 그대로의 퍽퍽한 느낌을 살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 영화 자체는 그런대로 따라가는 데에 큰 무리는 없는 편이다.

이래저래 어색한 와중에도 현빈이든 탕웨이든, 자신이 쉽게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을 하나를 잘 따라갈 수만 있다면야 나름 흥미를 잃지 않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이유는 충분히 갖춘 작품이라 생각한다.

부산 국제영화제 상영 때의 반응이 워낙 안좋아서 개봉일자를 하염없이 미루고만 있던 상황이이었다는 건 지금에야 알았는데 영화가 또 그렇게까지 괴발개발로 막 만든 건 결코 아니라서 현빈의 주가 급상 덕분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개봉이 되고 또 의외로 많은 관객들이 보러 가는 와중이라는 건 참 다행한 일인 것 같다.



영진공 신어지





 

“유령 여단”(The Ghost Brigades, 2009), 애어른들의 군대 이야기




* 저자: 존 스컬지
* 역자: 이수현
* 펴냄: 샘터

1부 [노인의 전쟁]이 회춘한 노인들의 군대 이야기였다면, 2부 [유령여단]은 애어른들의 군대 이야기다. 1부 끝물에 등장했던 일당백의 살인기계들인 ‘유령여단’의 눈물겨운 활약상이 전작에서 주인공과 이런저런 관계였던 ‘유령여단’ 제인 세이건의 반가운 얼굴과 함께 펼쳐진다.

작가는 ‘유령여단’을 어느 부위인지도 모를 싸구려 대패 삼겹살처럼 여러 사람의 DNA를 모듬한 신체에 의식을 주입해서 만든 인간들로 그리고 있다. 이들의 이런 독특한 제조방법(?)은 그들의 주옥같은 활약과 함께 자연스레 ‘의식’이란 철학적 소재가 따라나오게 만든다.

이런 ‘유령여단’의 대척점에 서있는 존재로 ‘오빈’이란 종족이 등장한다. ‘콘수’라는 초지능종족이 의식을 제거한 체 지성만 주입하여 만든 종족으로 그려지는데 작가는 ‘지능’만 존재하는 종족을 자의식이 없는, 어떤 ‘욕구’가 없는 존재로 묘사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자의식(영혼)이란 ‘창조’며 ‘욕구’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오빈’종족은 똑똑하지만 그 지식을 이용해 다른 것을 창조하지 못하며 무엇에 대한 욕구가 없는 존재다. 즉 일종의 움직이는 컴퓨터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그 덕에 ‘오빈’종족은 작품의 주된 악당중 하나임에도 별다른 존재감이 없는 반면 돌맹이 주제에 의식을 가지고 있는 ‘유령여단’ 소속의 한 군바리들은 짧은 등장에도 많은 대사빨과 함게 자신의 등장을 어필한다.


그러나 작가는 컴퓨터와도 같은 ‘오빈’종족이라 설정했음에도 정작 영혼을 ‘갈망’하고 있는 존재로 그리고 있으니 모순된 설정이 아닌가 싶다.

작품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인류를 외계인 나부랭이에게 팔아먹으려는 과학자 ‘샤를 부탱’으로 인해 좀 매우 많이 곤란해진 우주개척연맹의 처지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샤를 부탱’의 복제된 의식을 DNA모듬신체에 주입하여 만든 ‘재러드 디랙’이란 유령여단 군인을 이용해 ‘샤를 부탱’의 음모를 까발리고 황천길로 보낸다는 줄거리다.

‘샤를 부탱’의 음모가 밝혀지면서 덩달아 우주개척연맹의 존재와 음모도 조금씩 밝혀지는데 죽기 전에 알을 까는 바퀴벌레마냥 3부에 대한 떡밥을 대량 살포하며 끝을 맺는다. 덕분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밀려오는 것은 뿌듯함과 감동보다는 MBC뉴스의 폭력성 실험장면처럼 ‘앗, 씨발. 3권은 언제 나오는거야!’라며 아쉬움에 울부짓게 만든다.

다행히도 인터넷을 불꽃검색한 결과 번역가가 1월에 초고를 완성했다고 하니 올해 중순에는 3부[Last Colony]의 낯짝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얌전히 밤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스려보자.

출처:유령 여단(The Ghost Brigades, 2009) – 애어른들의 군대 이야기


영진공 self_fish


“더 브레이브(True Grit)”, 코엔 형제의 정통 서부극 리메이크





“진정한 용기”(True Grit)라는 멋진 원제목을 갖고 있는 영화 <더 브레이브>는 법 보다 무력이 위세를 떨치던 시절의 – 안그랬던 시절이 어디 한번이라도 있었느냐만은 – 이야기다.

아버지를 죽이고 인디언 거주지역으로 달아난 범인 톰 채니(조쉬 브롤린)를 잡기 위해 14살 소녀 매티(헤일리 스타인펠드)가 연방 보안관 출신의 백전노장 루스터 코그번(제프 브리지스)를 고용하고, 여기에 톰 채니에게 걸린 다른 현상금을 노리는 텍사스 레인저 출신의 라보프(맷 데이먼)가 가세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정통 서부극에 가까운 작품이 <더 브레이브>다.










코엔 형제 감독의 영화를 놓고 ‘정통 서부극’에 가깝다고 묘사한다는 것은 사실은 코엔 형제 특유의 장르 비틀기나 블랙 코미디의 요소들이 그 만큼 부족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코엔 형제라고 해서 이렇게 다소곳한 표정의 서부극 한 편 만들지 말라는 법은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늘상 기대해왔던 바와는 다른 방식으로 영화가 전개되고 결국 마무리가 되고 나면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더 브레이브>는 한 편의 서부극으로서는 괜찮은 편이고, 코엔 형제의 영화로서는 다소 심심한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 브레이브>는 코엔 형제 최초의 서부극이기도 하지만 두 번째 리메이크 영화이다. 동명의 원작은 1969년작으로 존 웨인이 애꾸눈의 술고래 보안관 루스터 코그번을 연기했었고, 이후 루스터 코그번을 주인공으로 하는 두 편의 영화가 추가로 제작이 되었으니 아마도 코엔 형제와 그 나이 또래의 미국인들에게는 나름 “추억의 캐릭터”와 같은 존재가 바로 루스터 코그번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지 <더 브레이브>에서 루스터 코그번이 처음 등장하는 법정 장면은 어린 매티의 시선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몇 십 년만에 부활한 서부극의 괴짜 캐릭터를 다시 맞이하는 지금의 미국인 관객들의 심정을 고려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원작의 예고편을 찾아보니 <더 브레이브>에서 봤던 씨퀀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코엔 형제는 최대한 원작에 충실한 방식으로 리메이크를 진행했던 것 같으니 <더 브레이브>에서 유난히 정통 서부극의 느낌이 나고 있는 건 어쩌면 대단히 자연스러운 일이란 생각이다.

그렇다면 코엔 형제는 어떤 이유로 유명 서부극의 리메이크 프로젝트에서 각색과 연출을 맡게 된 것일까? 자세한 경위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사실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자로 나선 작품이라는 점, 그리하여 <더 브레이브>는 코엔 형제 영화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내에서 1억불 이상의 흥행 수익을 올린 히트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원작 서부영화의 내러티브를 충실히 따라라고 있는 <더 브레이브>에서 가장 큰 볼거리라면 역시 좋은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을 들 수 있겠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험한 길을 나선 14살 당돌한 소녀 – 이 캐릭터가 미국 사회가 법치주의 국가로서 디딤돌을 놓는 데에 기여해온 유태인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 역할의 헤일리 스타인펠드와 이제는 루스터 코그번 만큼이나 백전노장의 배우가 되신 제프 브리지스, 그리고 비교적 작은 역할이었음에도 각자의 몫을 충실히 해주는 맷 데이먼과 조쉬 브롤린, 그리고 오랜만에 봐서 더욱 반가웠던 배리 페퍼의 연기 모두 보기 좋았다.



영진공 신어지


 






“로드 오브 워”, 앤드류 니콜 연출의 취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영화


『트루먼 쇼』 각본, 『가타카』와 『시몬』 각본/연출이라는 이력에서 바로 보이듯 “앤드류 니콜”의 각본은 어마어마하게 참신한 아이디어를 탄탄한 이야기로 바꾸어내는 가운데 현대 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담는, 다소 우화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재능은 아무나 부여받지 못한 것, ‘내러티브의 부재’라는 악질 고질병을 전세계 영화계가 겪고있는 가운데 “앤드류 니콜”이 (아무리 자신의 고국에선 베테랑이었다 한들) 미국에서 짧디짧은 경력으로 감독 데뷔를 하고 필모그래피를 이어올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러한 재능 때문이었을 것이다. (『트루먼 쇼』는 연출을 남에게 ‘뺏긴’ 케이스다.) 그리고 나는 “앤드류 니콜”의 영화에 대해 항상 ‘눈알 튀어오는 각본, 거기엔 살짝 미치지 못하는 솜씨의 연출’이라고 생각해 왔다.

『로드 오브 워』는 영화보다 시나리오를 먼저 봤는데,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내내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기존 세 작품과 너무나 이질적인데, 상상의 영역은 빠졌고 대신 발로 뛴 취재가 자리를 메운다. “앤드류 니콜”도 한번쯤은, 가정된 특수 전제 하에서 펼쳐지는 우화같은 영화가 아닌 직설법으로 현실을 다루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의 연출인데, 기존 영화들에서 워낙의 참신한 이야기가 그의 연출의 취약점을 살짝 가려주었다면, 이번 영화에서 그의 취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인상적인 도입부.
바닥 가득 메운 탄피와 검은 연기, 파괴의 흔적 위에 서 있는 ‘비즈니스맨’

『로드 오브 워』의 야심이 그리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종종 망각하긴 하지만 전쟁도 엄연히 ‘산업’에 기반한 일련의 행위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산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전쟁에서 개죽음을 당하는 젊고 어린 청춘들이나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이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사용하는 무기들을 만드는 제조자는 물론 이것을 팔아 먹고사는 (정도가 아니라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걸 국가가 하면 ‘군수산업’이 되고 개인이 하면 ‘무기 암거래상’이 된다. 이러한 무거운 이야기를 한 명의 무기 암거래상을 통해 전개하기 위해, “앤드류 니콜”은 실제 무기 암거래상들을 취재해 이들의 이야기를 녹여내 유리 올로프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자본주의 사회 노동의 핵심인 ‘소외’를 스스로, 적극적으로 체화한 인물이다. 영화는 철저하게 유리 올로프(“니콜라스 케이지”)의 시점으로 진행되면서, 그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덤덤하게 내레이션을 끌어간다. 그의 내레이션, 그의 행위, 그의 말들엔 어떤 인간적인 감정이나 가치판단 같은 것이 들어가지 않는다. 자신의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 앞에서도 그는 묵묵히 ‘사업’을 계속할 뿐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드라이함과 상인으로서 자신이 취급하는 품목에서의 적극적/자발적 소외는 “앤드류 니콜” 특유의 캐릭터라이징 방법을 통해 블랙유머마저 띈다.

문제는 ‘발로 뛴 취재’로 쓴 시나리오가 종종 처하는 함정, 즉 ‘버리기 아깝다보니’ 시나리오에 다 우겨넣고 쳐내질 못하다가 시나리오 전체가 비틀거리는 잘못을 이 영화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고, 유리 올로프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아니면 그를 둘러싼 국제 전쟁 환경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에서 균형이 무너져내렸다는 것이다. 시나리오에서는 보다 인물에 초점이 맞춰졌던 것이, 실제 영화에서는 그 수많은 ‘실제’ 무기들에 영화를 찍는 니콜 자신도 압도를 당해서인지, 무게중심이 많이 이동을 했는데, 그 결과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포지셔닝 속에서 영화가 자주 지루해진다.

게다가 그런 끔찍한 소재는 사실 아무리 극단적으로 물신화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관객들이라 한들, 심정적으로 거부감과 영화에 대한 진입장벽을 느끼기 마련이고, 이는 영화를 찍는 “앤드류 니콜” 자신마저도 그랬던 것같다.

일단 영화에서 주로 나오는 전쟁들, 즉 유리 올로프가 주로 무기를 팔아먹었던 전쟁의 무대가 되는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등의 그 참혹한 내전들은 국제사회에서도 관심을 덜 받는 곳들일 뿐만 아니라 열 서너살짜리 아이들이 (어설프게) 무장을 하고 또 죽고마는 그 끔찍한 장면들을, 감독은 냉혹한 냉소로 있는 독하게 그대로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역설의, 무언의 강렬한 충격을 안겨주고자 했던 것 같지만, 그런 장면들에서조차 종종 말하자면 ‘감독의 안절부절함’이 느껴지면서 결과적으론 관객들에게 별다른 충격도, 그렇다고 혐오감도 안겨주지 못하는 듯하다.

 
“내 취급품목엔 손대지 않는다”
자발적인 소외는 원래 자본가들의 것이다.


게다가 유리 올로프라는 인물도 별 매력없기는 마찬가지. 미국의 혹자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를 한껏 칭찬했다지만, 내가 보기엔 글쎄올시다다. 유리 올로프는 관객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혐오감을 주면서도 , 현대 관객들마다 가지고 있는 양심과 지책감을 자극하면서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아니 그의 일련의 행위들을 불편한 마음으로 묵인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죄책감 어린 ‘공범체제’를 구축하게 만드는 악당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느물거리는’ 태도는 블랙유머뿐 아니라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해야 했다)

그 면에서 완전히 실패한 듯 보인다. 유리 올로프라는 인물을 보며 ‘그래서 어쩌라고?’와 같은 냉소밖에 안 드는 것, 나아가 그가 내면적으로는 꽤 충격이고 괴로웠으나 그걸 의식의 차원에서 계속 억누르고 계속 두텁게, 두텁게 방어막을 치느라 더욱 드라이해질 수밖에 없는 몇몇 장면들(예컨대 동생의 죽음, 선배 암거래상인 와이즈 살해 등)에서조차 별다른 동정심도, 응당 뿜어져 나와야 할 ‘비극적 인물’의 아우라에 대한 연민도 느껴지지 않는 것은, 각본에서부터 문제가 있었고 연기 측면에서 더욱 문제가 심화됐다.

그러니, 영화 막판에 이르러서, 결국 인터폴 잭 발렌타인의 집념의 성과로 그가 체포된 뒤 ‘전세계 최고의 무기 거래자는 미국 대통령’이라는 덤덤한 사실 진술이나 재판도 없이 풀려나는 장면이 응당 줘야 할 감정적인 클래이맥스는 그저 맥빠지고 심심한 장면들이 되고 만다. 전세계 최고의 전범이 미국 대통령이란 건 누구나 다 아는(그러나 아무도 공식적으로는 말하지 않는) 사실인데, 이것이 거기서 직접적인 대사로 언급되면서 감독이 노렸던 효과, 그 직설법의 대사가 주인공의 입을 통해 ‘공식적으로 선언’되면서 마땅히 가져야 할 울림을 갖는 데에 실패하는 것은, 영화가 계속 갈팡질팡한 결과인 것이다.

시나리오를 먼저 읽고 영화를 본 만큼, 나는 애초에 “앤드류 니콜”이 각본에서 했던 대로 철저히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영화 찍는 도중 갖게 되는 이러저러한 욕심들을 단호하게 자르고 버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쟁의 스펙터클을 소비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개인적으로 그 류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지만) 전쟁의 이면, 그것이 얼마나 철저한 자본주의적 법칙을 따라가는 비즈니스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면, 각종 실제 무기들의 스펙터클에 인물이 눌려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그런 무기들의 스펙터클은 그저 자주 보여준다고 획득되는 것도 아니다. 정말로 보여주고자 하는 ‘스펙터클’의 효과는 오히려 ‘감추는’ 데에 있다.


ps1. 니콜라스 케이지는 정말 무색무취의 배우다.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건 그 인물의 고뇌와 내면의 밀도 같은 게 이젠, 안 느껴진다. 하긴 그 점이 그를 자꾸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으로 끌어당기게 하는 힘이 되는 건지. <아리조나 유괴사건>이나 <광란의 사랑>에서의 니콜라스 케이지는 완전히 죽어버린 것같다.

ps2. 제레드 레토는 언제나 누군가의 동생, 이구나 …

ps3. 우리의 이안 홀름 아저씨는 아무리 카리스마 넘치는 무기상으로 나와도 걍 ‘빌보 배긴스’로 보인다. -_-;;;

영진공 노바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