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밀리 맨”, 제 2의 길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






대니얼 레빈슨의 책 <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에 의하면,
우리의 인생은 전환기와 안정기의 시소게임이다.

최초의 전환기는 사춘기에 찾아온다.
2차 성징으로 몸이 아이에서 남자 혹은 여자로 바뀌고, 그 결과 매일 보는 거울 속의 내가 어느 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을 보는 관점도 바뀐다. 숨겨진 달의 뒷면을 발견한 천문학자처럼,
이 세상이 내가 예전부터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결국 정체성의 위기가 찾아오면서 모든 것을 재정립하게 된다.
정체성의 정립은 마음을 정리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무슨 직업을 선택하고 누구와 친구관계를 맺고 얼마나 잘 연애를 하는지로 확인받는 일종의 과제다.

청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취직해서 나름 경력도 쌓고, 친구들도 생기고, 연애도 몇 번 해서 결혼을 하기도 한다.

이제 안정기에 접어드는 것이다.



모든 것이 안정되었으니 정체성이 정립된 것 같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딴생각을 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토록 바라던 안정기에 도달했건만, 사람들은 만족하기는커녕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선택한 것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더 좋은 선택은 없었을까?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30여년 남았는데 그 30년을 지금 하는 이 일을 하면서 보내는 게 맞을까? 내가 평생 저 사람과 같이 살 수 있을까? 그동안 목표 달성하느라 버려두었던 자신의 내면에 눈을 돌리며 갑자기 억눌러두었던 내향성이 치솟아 오른다.

의문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공포로 다가온다.
만약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정답이 아니라면, 과거의 어디에서부터 잘못 접어든 것이었단 말인가? 이제 정녕 돌이킬 수는 없단 말인가? 다행히, 현대인들의 건강상태는 매우 좋기 때문에 우리에겐 제2, 제3의 전환기를 감당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혀 새로운 일을 하거나, 결혼해서 아이만 키우던 주부가 어느 날 전문인으로 새로운 경력을 만들어가는 일이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누구는 이 시기에 이혼을 하기도 하고,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역시 잘 봐주자면 대안의 탐색이다. 이런 위기는 그 사람이 지금 현재 얼마나 잘 나가는지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온다. 오히려 확실하게 성공한 사람일수록 더욱 더 딴생각을 많이 할 수도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등이 따실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대안을 포기하고 지금 주어진 그 삶을 계속하기로 한다.
약간 불만은 있지만 그건 누구나 겪는 거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질문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좋을까? 그대로 계속 사는 게 나을까, 아니면 바꿀 수 있을 때 바꾸는 것이 더 나을까?

같은 저자가 쓴 '여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도 있습니다

영화 『패밀리맨』은 바로 이런 대안탐색 시기, 인생의 제 2 전환기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잭(“니콜라스 케이지”)은 13년 전에는 뉴욕근교 소도시에서 지냈지만 기회를 잘 잡은 덕분에 지금은 뉴욕의 잘 나가는 투자전문가가 되어 있다. 물론 독신으로서 환락을 만끽하며 흥청망청 잘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우연히 들른 잡화점에서 그는 예사롭지 않은 강도를 만난다. 그리고는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 다음날부터 그는 13년 전에 기회를 잡지 못하고 소도시에 눌러앉아야 했던 제2의 잭으로 살게 된다. 처음에는 하루하루가 당혹과 좌절의 연속이다. 그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는 벌써 둘이나 있고, 장인의 타이어 가계를 이어받아 나름 안정되었지만 꿈이나 희망도 없는 일상 속에서 서랍 속에 숨겨둔 술이나 홀짝대면서 지내고 있었다.

낮에는 사장님의 인정을 받고,

밤에는 미녀들의 환대를 받으며 살던 사람이...

어느날 깨어 보니 옥닥복닥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버렸더란...

그러니까 예쁜 마누라가 다정하게 팔짱을 껴줘도 이렇게 똥 씹은 표정이지...

이렇게 끔찍한 삶이라니… 진저리를 치던 그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기자기한 일상의 가치와 즐거움에 눈을 뜬다. 아내를 아끼는 남편,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의 변신은 처음에 자신을 경계하던 큰 딸의 인증을 받으며 완성된다.




물론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더 알고 싶으면 영화를 보시길 …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제 2의 인생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우화이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은 영화속의 진짜 잭이 아니라 제2의 잭에 더 가까우며, 그들이 꿈꾸는 제2의 인생은 진짜 잭의 인생이라는 점이다(사실, 제2의 잭만 해도 대단한거 아닌가? 작지만 안정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경영자에다가 예쁜 마누라에 귀여운 자식들까지 있는 단란한 가정의 가장 아닌가.)

하지만 실상은 그게 이 영화가 존재하는 의미다. 영화는 제2의 평범한 잭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봐. 저렇게 잘나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행복을 모른다고. 만약에 저들이 그걸 알기만 하면 휘황찬란한 자기 삶을 포기하고 우리 같은 삶을 선택할거라니까? 그러니까 딴 생각 하지 말고 지금 주어진 삶에 만족하면서 열심히 살라구.”

굳이 영화의 메시지에 반대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정말 그럴 수도 있으니까.
누구든 남의 떡을 더 크게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평범한 제2의 인생을 부러워할 자격을 갖추려면 휘황찬란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는 역설은 여전히 남는다.

레빈슨의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인생의 제2 전환기에서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주어진 삶을 계속 하는 것이 좋을까?
답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남은 시간이 많고 여력이 많을수록, 다른 길로 과감하게 전환한 사람들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 주어진 삶에 집착하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후회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현대사회가 특히 그렇다.

현대인의 예상 평균수명은 85세 이상이라던데, 계산해보자면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정년퇴직까지 한 다음에도 최소한 30여년을 뭔가 하면서 보내야 한다는 얘기다. 이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는 얘기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텅빈 30년을 견뎌내야 한다는 얘기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삶의 전환도 많이 해본 사람들이 더 잘한다. 그러니 말인데, 『패밀리 맨』 같은 영화나 보면서 위안을 삼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기회가 오면 잡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적어도 당신의 나이가 40 이전이라면 말이다.

“밑져야 본전” 이라는 말을 호기롭게 내뱉을 수 있는 인생의 마지노선이 그쯤일 테니 ……

그나저나 자기만 그러면 되지 왜 잘 나가려는 옛날 여자친구 발목을 잡는거냐?


영진공 짱가

“내셔널 트레져”, 그게 왜 니네 나라 보물들이냐고




역사학에 있어 정사는 역사 흐름이 대강 이래왔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것이 정식으로 통용된다, 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에 유용하게 써먹기 위해 공부하는 거고, 실질적으로 흥미로운 자료들은 각종 다양한 야사들과, <음모론>이다.

정사의 모든 역사 기술이 승자와 남성, 권력자들을 중심으로 기술되고, 그들의 공적이 찬양되는 데에 반해, 야사는 이들 역사의 주인공들의 다양한 이면들을, 그리고 특정 역사씬에서 그들만큼이나 중요하나 그들의 그늘에 가려진 다양한 패자와 약자들의 면면을 파악할 수 있다는 데에서 매우 유용하다.

음모론은 그 특유의 재미와 호기심 충족은 물론이고 권력의 다양한 속성들을 엿볼 수 있으며, 때로 야사들도 의도적으로 삭제한 기록들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는 데에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들이라 할 수 있겠다.

음모론을 신봉함에 있어 한 가지 위험한 점이라 한다면 권력 위주의 사고방식인데, 말하자면 정사 중의 정사, 그것도 공식 기록을 왜곡할 정도의 승자 중심 역사관과, 정반대로 패자 중심의 화법을 통해 ‘실질적 권력집단’을 상정하는 것은, 승자 중심 역사관과 너무나 똑같이 소수권력 위주의 사고 패러다임을 공유한다는 것. 그러나 어느 시대에든 음모론이 통용되는 것은… 음모론이 사실로 드러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호사가들의 재미와 호기심은 물론이고 상상력까지 만족시킨다는 점일 터. 나 역시 음모론 신봉자는 아니어도 음모론 enjoyer 정도는 된다.



서구에서 성당기사단, 프리메이슨, 카발라, 그노시즘을 비롯한 각종 은비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런 속성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수구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보수적인 개신교 하에서 지속적으로 ‘사탄숭배주의’로 지탄받는다는 사실(실제로 ‘프리메이슨’으로 구글링을 해보라. 제대로 된 자료들이 아닌, 보수 기독교도의 ‘비난을 위한’ 악의적 자료들이 가장 먼저 튀어나온다.)과, 이러한 소위 ‘이단’ 혹은 ‘사탄숭배주의’라 불리우는 것들에 기독교적 색채가 강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독교가 유럽의 정신세계를 ‘점령’하면서 쫓겨나고 박해받을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고대 지식들과 민간전승 지식들이 기독교적 감수성과 일부 결합하면서 살아남은 것의 흔적, 그리하여 바야흐로 ‘기독교의 세계통일 기도’의 후유증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 또 한편으로 이런 은비학적 전통일 터이다. (그리고 미국과 한국 공히, 유럽의 마녀사냥과 미국 뉴잉글랜드에서의 마녀사냥이 여전히 ‘정말로 마녀가 존재했기에’ 벌어진 일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는 이들이 아직 꽤 남아있을 거라 자신있게 추측할 수 있다.)

은비학의 깊이와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자료들 중 가장 대중적인 것으로는 아무래도 움베르토 에코의 [푸코의 진자]를 꼽을 수밖에 없다. 『내셔널 트레져』의 은비학?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한 영화에서 그런 걸 기대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쯤은 모두 다 충분히 짐작하고 있으리라. 그냥,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두루뭉실하게 알려져있는 은비학의 기본들 중 선정적 호기심의 가장 얄팍한 것들만 모으고 모아 이것저것 비빔잡탕을 해놓을 수밖에 없다.

성당기사단과 십자군전쟁, 프리메이슨 같은 거 하나도 몰라도 이 영화를 보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다. (나도 모른다.) 이건, 그냥 액션 어드벤처 영화니까. 다만 어릴 적 매우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에서 ‘천리안’이나 ‘피라미드’, ‘프리메이슨 기호’ 같은 것들이 모두 사탄숭배를 위한 것이라는 교육을 철두철미하게 받고 난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더할 수 없는 “호러영화”가 될 수는 있겠다.

과거 인디애나 존스가 성가시기만 한 여자, 덜 성가시지만 그래도 보살펴줘야 하는 어린애를 달고 다니며 거의 모든 활약은 혼자 했던 것과 달리, 『내셔널 트레져』에서는 여자도 남자 동행도 나름대로 한몫 한다. 여자동행은 지적인, 역사에 대한 지식 부분을, 남자동행은 그 외의 컴퓨터, 운전, 전기/물리학적 지식 부분을.

아, 악당도 등장해 주셔야지. 이번 악당은 다른 문화권의 나름대로 수호자를 지독한 몰이해와 편견으로 뒤집어씌운 존재가 아닌, 보물에 욕심이 먼 <같은 미국인>이자 <부자>이다. 미워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래도 좋은 배우인 건 변함없는 숀 빈이 기꺼이 출연해 낭비당해 주신다. 비록 각본구조상 악당인 션 빈이 <보물을 볼 수 있는 눈>, 즉 <안경>의 존재에 대해 알래야 알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전화로 <안경도 꼭 갖고 오라>며 협박하는 신통력도 발휘해가면서 말이다.

션 빈이 맡은 ‘이안’이란 캐릭터는 멀리서도 이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는 신통력의 소유자거나, 스크린 안과 밖,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캐릭터인지도 모른다. (대단히 실험적인 영화 캐릭터 창조방식이 아닌가. 영화에 대한 정의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보물을 발견하고서 보니 맨 처음에 딱 눈에 띄이는 게 수많은 이집트 파라오의 미이라들이던데, 그게 왜 미국이라는 나라의 ‘내셔널 트레져'(국보급 보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대사를 통해 이 민망한 제목의 느끼함과 서구유럽의 오랜 역사에 걸친 <약탈>의 민망함을, 조금 걷어내려 노력해 주고 계신다. “세계 모든 사람들의 보물이에요, 세계 모든 박물관에 나눠줘야죠.” 참, 인심 한번 후하게 쓰신다.

화끈한 액션이나 숨죽일 만한 스릴/ 서스펜스도 없고, 추리의 재미도 없고, 그렇다고 배우들이 매력적이지도 않은 (라일리는 쫌 귀여웠다), 있는 매력도 없애버리는 느슨한 이 보물찾기 영화를 보자니, 제리 브룩하이머도 참 많이 늙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존 터틀타웁은 역시 사람과 사람간 잔잔하고 소소한 감정흐름을 따뜻하게 엮어나가는 영화들이 맞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위에서 내가 좀 비아냥대긴 했지만, 우리를 열광시켰던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나 젊은 시절 셜록 홈즈를 등장시킨 『피라미드의 공포』 등의 기존 어드벤처물을 생각해볼 때, 분명 정치적으로 ‘나름대로 겸손해진’ 이데올로기를 발견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그리고 그건 그만큼 발전일 수도 있고, 미국의 위기감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솔직하고 분명하게 말하자면, 영화적 만듦새와 재미는 분명 퇴보했다.

영진공 노바리

“더 락(The Rock)”, 소품의 중요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




영화에는 여러 가지 소품이 등장합니다. 소품은 영화 전체의 맥락과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눈 좋은 관객들도 그걸 알아차립니다. 사실 소품으로 분위기를 내는 건 영화만의 일은 아닙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보면 이 양반은 주인공이 뭘 입고 뭘 신고 뭘 만들어먹는지를 꼼꼼히 서술해 놓고 있죠. 입는 옷이나 가방의 브랜드까지도 써놓습니다. 저 같이 그런 거에 무딘 사람도 그걸 읽으면 이 사람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기술방식이 소설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 놓습니다.

헐리웃 영화에서 뉴욕이나 LA도 하나의 거대한 소품이죠.(다이하드3 에서)

그러니까 영화에 뭐가 등장하는지, 주인공이 뭘 입고 어디서 뭘 먹고 무슨 차를 타는지는 매우 중요한 연출 요소입니다. 액션 영화에서는 총도 바로 그런 중요한 소품 중에 하나죠.

『미션임파서블3』에서도 총이 한 시퀀스에서 꽤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간신히 오웬 데비언을 붙잡아서 호송하던 이단 헌트 일행은 체서피크만의 긴 다리 위에서 데비언 일파가 조종하는 무인기(UAV)의 습격을 받습니다. 무인기에서 발사한 미사일에 맞아 차는 뒤집어지고 아수라장이 벌어진 와중에 오웬데비언은 호송차에서 빠져나와 유유히 헬기에 올라타려 하지요.

그걸 본 이단 헌트는 뒤집어진 자동차에서 총(독일군 제식소총인 G36이죠)이 담긴 가방을 간신히 꺼내는데 열어보니 이 총이 분해된 상태네요 …

이런 무인기 '글로벌 호크' 쯤 되면 그 정도 공습도 가능하겠죠 ...

사실 정밀 저격총도 아니고 G36같은 일반적인 소총을 분해해서 넣고 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PSG1 같은 2만불 짜리 저격총도 전용 가방에 통짜 그대로 들어갑니다. 게다가 이 G36 소총은 개머리판까지 접어지기 때문에 공간절약을 위해서라는 핑계도 안먹히죠.

근데 뭐하러 IMF 애들은 총을 분해해서 넣고 다닌 걸까요? 오로지 아찔아찔함을 연출하기 위해서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안 그래도 일 초가 급박한 상황에 총까지 세 토막 나 있으니 관객들은 더 조마조마합니다. 빨리 조립해야 하는 주인공의 입장에 감정이입 하는 거죠.

갈길이 바쁜데 별게 다 걸리적 거리네 ...

조립 다 했다!!!


영화 『더 록』(The Rock)을 살펴보자면,
저는 이 영화의 매력은 거의 소품 덕이라고 봅니다. 광고감독 출신인 “마이클 베이”의 현란하고 속도감있는 연출도 나쁘진 않았지만, “숀 코너리”와 “에드 해리스”라는 두 중량급 배우가 만드는 무게감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참 어설픈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을 겁니다.

이 영화, 스토리도 빈틈이 많고, 중간에 액션도 적고(의외로 이 영화에 액션장면이 적어요), 감옥 내부 묘사도 상당히 엉성하거든요.


숀 코네리와 에드 해리스, 이 둘은 이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소품 입니다.마이클 베이는 이런 배우 소품이 없으면 참 얄팍해지더라는....

여튼 이 영화에서 허멜 장군 역의 “에드 해리스”는 미국을 위해 죽어간 자기 부하들이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책임감을 느끼고, 군상층부의 반성을 요구하기 위해 신경가스를 탈취해서 미국에 테러위협을 가합니다. 그는 알카트래즈 섬을 점령하고 관광객들을 인질로 삼은 뒤, 전사한 부하들의 명예회복과 응분의 보상금을 주지 않으면 인구밀집지역에 신경가스 미사일을 발사하겠다고 협박하죠.

그래서 감옥에서 수십년 썩은 노친네 “숀 코너리”와 화학자 FBI요원 “니콜라스 케이지”가 특파되고 …… 결국 이들의 활약으로 미사일은 하나하나 제거되는 와중에 허멜은 자신의 협박 앞에 묵묵부답인 미국방성의 반응에 당황하지만, 미사일을 정말 쏴야 한다는 부하들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래서 결국 부하들은 하극상을 일으키는데, 부하들의 반란을 예감한 허멜은 미리 Colt .45를 허리춤 뒤에 감춥니다. 그리고 돈에 눈이 먼 부하들이 허멜에게 신경가스 미사일을 발사하라고 베레타 M92FS 를 겨눌 때, 그들의 미간에다 콜트 .45를 겨누죠.

니들이 감히 하극상을 일으켜?

왜 해리스는 남들이 다 새 권총으로 바꿀 때 여전히 구닥다리 콜트를 계속 가지고 있었을까요? 그냥 구닥다리도 아닙니다. 빤질빤질한게 예전 지급품을 계속 쓴다기 보다는 새로 하나 따로 장만한 모양새죠.

그 당시에는 이미 군의 제식권총은 베레타 M92F 로 바뀐 다음입니다. 그럼 그는 신형제식 권총이 지급된 다음에 일부러 예전에 쓰던 콜트45를 다시 구입해서 들고다녔다는 얘깁니다. 총알보급도 받기 귀찮은(베레타는 9mm 탄을 쓰고 콜트는 .45 구경탄을 씁니다. 권총이 바뀐 이후 군대 내에서 45구경탄은 사실상 쓸데가 없어졌으니 그만큼 보급도 희귀해지겠죠) 총을 계속 쓰고 있다는 거죠. 뭐 총알보급이야 부관이 좀 고생하면 되고, 하니까 그저 장군의 사치심이 발현된걸까요? 왜 그랬을까요?

이 장면은 총기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그냥 “어, 둘이 쓰는 권총이 다르네?” 혹은 “역시 멋진 주인공은 권총도 뭔가 다르군~” 정도로 넘어갔을 문제입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장면은 총기가 단순한 소품이 아니라, 스토리와 이미지를 결정짓는 역할도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화에 등장하는 사소한 총기류에 대해서도 “많이 알수록 많이 보게 된다”는 경험의 규칙은 예외 없이 들어맞는 것이죠.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많이 앎으로서 영화를 더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고, 엉터리와 진짜를 구분함으로써 뭐가 진품인지 감별할 수 있는 기준을 하나 더 제공하고 싶거든요. 관객들의 눈이 높아지지 않는 한, 우리나라 영화의 총기 고증은 맨날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요.

베레타 ...



베레타는 15연발 탄창과, 각종 안전장치를 장비한데다, 우아한 곡선미까지 가지고 있어 멋과 기능성을 다 가지고 있다고 칭찬받던 총입니다. 적어도 80년대 당시에는 이 총 참 멋졌습니다. 하지만, 이 총은 미국제가 아닙니다. 이탈리아제죠. 더구나 베레타가 사용하는 9mm탄이 뭡니까. 바로 미국의 적이었던 독일군이 루거 권총에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던 파라블럼탄이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콜트 .45는 비록 7발밖에 장전할 수 없고, 안전장치도 부실해서 잘못 다루면 위험한 구닥다리죠. 그러나 이 콜트는 1911년부터 미군제식 권총으로 채용된 이후,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터에서 변함없이 60여년간 미군과 동고동락을 함께 해온, 미군의 역사와 전통을 의미하는 총이죠.

콜트 45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해리스가 든 콜트와 부하들이 든 베레타는 단순한 권총이 아니라 두 집단이 가진 철학을 반영하는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멜 장군은 비록 인질범으로 전락하긴 했지만, 그 바탕에는 미군 본연의 정신에서 벗어나버린 미군에게 반성을 촉구하려는 충성심이 있었다는 거죠. 즉, 허멜은 여전히 미국 군인입니다.

반면에 그의 부하들은 허멜이 내세운 막대한 보상금 때문에 그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미군의 정신 따위는 아무래도 좋습니다. 단지 돈을 벌수 있으니까 뭐든 하는 것이죠.

장군님 돈 줘여 ....


이런 배치를 하려면 소품 담당자가 총기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총기와 군장 관련 고증 수준이 이전의 영화들과 비교할 수 없이 좋습니다. 영화를 보면 초반부에는 주인공들의 군복 색이 제각각입니다. 누런 옷, 국방색 옷 … 철모도 없는 자가 부지기수고 말이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군인들의 복장이 통일되고 제대로 갖추어집니다. 이건 전쟁 초반에 보급품도 제대로 받지 못하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미군과 유엔의 지원을 받아 제모습을 갖춰가던 남한군의 상황을 적절히 반영한 소품 배치죠. 물론 총들도 거의 무리없이 사용되었구요.


군복 뿐만 아니라 자세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숙련도 차이가 보입니다

이렇게 소품활용의 수준이 높아진 배후에는 “김세랑”이라는 군장전문가가 영화의 고증을 담당했던 덕이 큽니다. 처음에는 ‘6.25때 군복이 다 거기서 거기지 …’ 라는 태도를 보이던 영화스탭들에게 당시의 군복이 시기별로 어떻게 달랐는지를 직접 보여주며(그는 온갖 진품 군복을 소장하고 있죠) 설득해서 그런 차이를 만들어냈던 것이죠.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영화에 제작비 투입할때, 스크립트 닥터와 고증 전문가에게 돈 좀 더 쓰시라는 겁니다. 그래야 오랫동안 먹히는 영화가 만들어지니까요.

영진공 짱가

“로드 오브 워”, 앤드류 니콜 연출의 취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영화


『트루먼 쇼』 각본, 『가타카』와 『시몬』 각본/연출이라는 이력에서 바로 보이듯 “앤드류 니콜”의 각본은 어마어마하게 참신한 아이디어를 탄탄한 이야기로 바꾸어내는 가운데 현대 사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담는, 다소 우화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재능은 아무나 부여받지 못한 것, ‘내러티브의 부재’라는 악질 고질병을 전세계 영화계가 겪고있는 가운데 “앤드류 니콜”이 (아무리 자신의 고국에선 베테랑이었다 한들) 미국에서 짧디짧은 경력으로 감독 데뷔를 하고 필모그래피를 이어올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러한 재능 때문이었을 것이다. (『트루먼 쇼』는 연출을 남에게 ‘뺏긴’ 케이스다.) 그리고 나는 “앤드류 니콜”의 영화에 대해 항상 ‘눈알 튀어오는 각본, 거기엔 살짝 미치지 못하는 솜씨의 연출’이라고 생각해 왔다.

『로드 오브 워』는 영화보다 시나리오를 먼저 봤는데,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내내 고개를 갸웃했다. 일단 기존 세 작품과 너무나 이질적인데, 상상의 영역은 빠졌고 대신 발로 뛴 취재가 자리를 메운다. “앤드류 니콜”도 한번쯤은, 가정된 특수 전제 하에서 펼쳐지는 우화같은 영화가 아닌 직설법으로 현실을 다루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의 연출인데, 기존 영화들에서 워낙의 참신한 이야기가 그의 연출의 취약점을 살짝 가려주었다면, 이번 영화에서 그의 취약점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인상적인 도입부.
바닥 가득 메운 탄피와 검은 연기, 파괴의 흔적 위에 서 있는 ‘비즈니스맨’

『로드 오브 워』의 야심이 그리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종종 망각하긴 하지만 전쟁도 엄연히 ‘산업’에 기반한 일련의 행위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산업’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전쟁에서 개죽음을 당하는 젊고 어린 청춘들이나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이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사용하는 무기들을 만드는 제조자는 물론 이것을 팔아 먹고사는 (정도가 아니라 부를 축적하는) 사람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걸 국가가 하면 ‘군수산업’이 되고 개인이 하면 ‘무기 암거래상’이 된다. 이러한 무거운 이야기를 한 명의 무기 암거래상을 통해 전개하기 위해, “앤드류 니콜”은 실제 무기 암거래상들을 취재해 이들의 이야기를 녹여내 유리 올로프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자본주의 사회 노동의 핵심인 ‘소외’를 스스로, 적극적으로 체화한 인물이다. 영화는 철저하게 유리 올로프(“니콜라스 케이지”)의 시점으로 진행되면서, 그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덤덤하게 내레이션을 끌어간다. 그의 내레이션, 그의 행위, 그의 말들엔 어떤 인간적인 감정이나 가치판단 같은 것이 들어가지 않는다. 자신의 사랑하는 동생의 죽음 앞에서도 그는 묵묵히 ‘사업’을 계속할 뿐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드라이함과 상인으로서 자신이 취급하는 품목에서의 적극적/자발적 소외는 “앤드류 니콜” 특유의 캐릭터라이징 방법을 통해 블랙유머마저 띈다.

문제는 ‘발로 뛴 취재’로 쓴 시나리오가 종종 처하는 함정, 즉 ‘버리기 아깝다보니’ 시나리오에 다 우겨넣고 쳐내질 못하다가 시나리오 전체가 비틀거리는 잘못을 이 영화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고, 유리 올로프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아니면 그를 둘러싼 국제 전쟁 환경에 초점을 맞출 것인가, 에서 균형이 무너져내렸다는 것이다. 시나리오에서는 보다 인물에 초점이 맞춰졌던 것이, 실제 영화에서는 그 수많은 ‘실제’ 무기들에 영화를 찍는 니콜 자신도 압도를 당해서인지, 무게중심이 많이 이동을 했는데, 그 결과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포지셔닝 속에서 영화가 자주 지루해진다.

게다가 그런 끔찍한 소재는 사실 아무리 극단적으로 물신화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관객들이라 한들, 심정적으로 거부감과 영화에 대한 진입장벽을 느끼기 마련이고, 이는 영화를 찍는 “앤드류 니콜” 자신마저도 그랬던 것같다.

일단 영화에서 주로 나오는 전쟁들, 즉 유리 올로프가 주로 무기를 팔아먹었던 전쟁의 무대가 되는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등의 그 참혹한 내전들은 국제사회에서도 관심을 덜 받는 곳들일 뿐만 아니라 열 서너살짜리 아이들이 (어설프게) 무장을 하고 또 죽고마는 그 끔찍한 장면들을, 감독은 냉혹한 냉소로 있는 독하게 그대로 보여주면서 관객에게 역설의, 무언의 강렬한 충격을 안겨주고자 했던 것 같지만, 그런 장면들에서조차 종종 말하자면 ‘감독의 안절부절함’이 느껴지면서 결과적으론 관객들에게 별다른 충격도, 그렇다고 혐오감도 안겨주지 못하는 듯하다.

 
“내 취급품목엔 손대지 않는다”
자발적인 소외는 원래 자본가들의 것이다.


게다가 유리 올로프라는 인물도 별 매력없기는 마찬가지. 미국의 혹자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를 한껏 칭찬했다지만, 내가 보기엔 글쎄올시다다. 유리 올로프는 관객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혐오감을 주면서도 , 현대 관객들마다 가지고 있는 양심과 지책감을 자극하면서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아니 그의 일련의 행위들을 불편한 마음으로 묵인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죄책감 어린 ‘공범체제’를 구축하게 만드는 악당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느물거리는’ 태도는 블랙유머뿐 아니라 바로 이 지점을 공략해야 했다)

그 면에서 완전히 실패한 듯 보인다. 유리 올로프라는 인물을 보며 ‘그래서 어쩌라고?’와 같은 냉소밖에 안 드는 것, 나아가 그가 내면적으로는 꽤 충격이고 괴로웠으나 그걸 의식의 차원에서 계속 억누르고 계속 두텁게, 두텁게 방어막을 치느라 더욱 드라이해질 수밖에 없는 몇몇 장면들(예컨대 동생의 죽음, 선배 암거래상인 와이즈 살해 등)에서조차 별다른 동정심도, 응당 뿜어져 나와야 할 ‘비극적 인물’의 아우라에 대한 연민도 느껴지지 않는 것은, 각본에서부터 문제가 있었고 연기 측면에서 더욱 문제가 심화됐다.

그러니, 영화 막판에 이르러서, 결국 인터폴 잭 발렌타인의 집념의 성과로 그가 체포된 뒤 ‘전세계 최고의 무기 거래자는 미국 대통령’이라는 덤덤한 사실 진술이나 재판도 없이 풀려나는 장면이 응당 줘야 할 감정적인 클래이맥스는 그저 맥빠지고 심심한 장면들이 되고 만다. 전세계 최고의 전범이 미국 대통령이란 건 누구나 다 아는(그러나 아무도 공식적으로는 말하지 않는) 사실인데, 이것이 거기서 직접적인 대사로 언급되면서 감독이 노렸던 효과, 그 직설법의 대사가 주인공의 입을 통해 ‘공식적으로 선언’되면서 마땅히 가져야 할 울림을 갖는 데에 실패하는 것은, 영화가 계속 갈팡질팡한 결과인 것이다.

시나리오를 먼저 읽고 영화를 본 만큼, 나는 애초에 “앤드류 니콜”이 각본에서 했던 대로 철저히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영화 찍는 도중 갖게 되는 이러저러한 욕심들을 단호하게 자르고 버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쟁의 스펙터클을 소비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개인적으로 그 류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지만) 전쟁의 이면, 그것이 얼마나 철저한 자본주의적 법칙을 따라가는 비즈니스인지를 보여주고자 했다면, 각종 실제 무기들의 스펙터클에 인물이 눌려서는 안 되었다.

게다가 그런 무기들의 스펙터클은 그저 자주 보여준다고 획득되는 것도 아니다. 정말로 보여주고자 하는 ‘스펙터클’의 효과는 오히려 ‘감추는’ 데에 있다.


ps1. 니콜라스 케이지는 정말 무색무취의 배우다.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건 그 인물의 고뇌와 내면의 밀도 같은 게 이젠, 안 느껴진다. 하긴 그 점이 그를 자꾸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으로 끌어당기게 하는 힘이 되는 건지. <아리조나 유괴사건>이나 <광란의 사랑>에서의 니콜라스 케이지는 완전히 죽어버린 것같다.

ps2. 제레드 레토는 언제나 누군가의 동생, 이구나 …

ps3. 우리의 이안 홀름 아저씨는 아무리 카리스마 넘치는 무기상으로 나와도 걍 ‘빌보 배긴스’로 보인다. -_-;;;

영진공 노바리



“킥 애스”, 수퍼히어로 탄생의 진짜 조건들






연소자 관람가 수퍼히어로물처럼 생겨먹은 외양 – 제목과 포스터 이미지, 그리고 예고편을 통해 파악된 느낌 – 과 달리 의외로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고 상영을 시작하길래 겉보기와는 다른 영화인가 보다 생각하긴 했었습니다. 역시나 <킥 애스>는 피칠갑 액션 장면이 대거 등장하는 성인용 액션 영화더군요.

더군다나 11살 밖에 안된 소녀가 살인병기로 등장해서 못된 아저씨들을 난도질하며 돌아다고 있으니 이제껏 보아온 액션물들과는 또 다른 경지를 개척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수퍼히어로가 되고 싶어했던 소년의 좌충우돌 코믹 액션 정도로 진행되던 영화는 의외로 비장미가 넘치는 80년대 홍콩 느와르의 분위기로 마무리됩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장쾌한 스펙타클은 별로 없지만 비교적 저렴했던 제작비(2천 8백만불) 수준을 감안한다면 비교적 잘 짜여진 내러티브와 액션 장면들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비교적 현실적인 맥락에서의 수퍼히어로 또는 자경단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는 <킥 애스>는 단순히 현실 속에 존재하는 악당들을 혼내주고 싶다는 낭만적인 의협심만으로는 결코 수퍼히어로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데이브(아론 존슨)가 킥 애스 복장을 하고 해낼 수 있었던 것은 기껏해야 편의점 앞에서 목숨을 걸고 난투극을 벌인 끝에 유투브 스타가 되는 것에 불과했고 우연한 기회에 마주치게 된 진정한 폭력의 현실 앞에서는 더이상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말지요. 데이브와 다른 한 편에 있었던 데이먼(니콜라스 케이지)와 민디(클로이 모레츠) 부녀는 그 자체로 이미 비현실적인 수퍼히어로의 능력을 갖춘 인물들이긴 하지만 방사능 거미에 물리거나 애초에 태어나기를 외계인 신분이셨던 것이 아닌 일반적인 상황에서 가능한 ‘수퍼히어로 탄생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모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데이먼을 수퍼히어로로 만들어준 것은 다름아닌 광기나 다름없는 복수심이었던 거죠. 바램과 망상만으로 영웅이 탄생할 수 없다는 건 사실 어떤 분야에서든 마찬가지인 것이 현실이긴 합니다.



브루스 웨인이나 토니 스타크와 같은 억대 갑부가 아닌 조건 하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수퍼히어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데이먼이라는 캐릭터는 의미가 있고 또한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배트맨> 시리즈에서는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검은 투구 밑의 눈 주변에 검은색 메이크업을 셀프로 처리하는 장면도 데이먼 – 빅 대디가 작품 속에서 의미하는 바를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반면에 데이먼과 같은 인물을 아버지로 둔 민디 – 힛 걸은 아무리 어려서부터 살인병기로서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지만 그 자체로 이미 현실성이 없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킥 애스>라는 작품 자체가 진지한 사실주의로 남기 보다 오락성을 강조한 액션물의 하나로서 마무리되기로 한 이상 민디 – 힛 걸과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에게까지 현실성을 강요할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은 곧 <킥 애스>의 작품성에 있어서 한계점으로 작용하는 요소가 되기도 하는 것이지만요.











<킥 애스>는 <원티드>(2008)의 원작자 마크 밀러(글)와 존 로미타 주니어(그림)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매튜 본 감독은 <레이어 케이크>(2004)와 <스타더스트>(2007)를 연출했었는데 수익성 면에서는 이번 <킥 애스>가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남게 될 것 같네요.



출연진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역시 화려한 액션의 중심이 되는 민디 – 힛 걸을 연기한 클로이 모레츠라 하겠습니다. <500일의 썸머>(2009)에서 톰(조셉 고든 레빗)의 여동생으로 출연했었는데 이번 <킥 애스>로 확실한 인상을 심어주었네요. <렛 미 인>(2008)의 리메이크 프로젝트에 주연으로 출연했으니 조만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습니다. 배우로서 그간의 활동을 평가절하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만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 이후 가장 설득력있는 캐릭터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니콜라스 케이지가 매우 잘나고 영웅적인 이미지의 배우였다고 생각하셨던 관객이라면 <킥 애스>에서의 모습이 약간 의외로 받아들여질 가능성도 없진 않겠지만요.











그외 아론 존슨, 마크 스트롱, 크리스토퍼 민츠-프래지 등의 앙상블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특히 마크 스트롱은 여러 작품 속에서 악역으로 매우 강한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는데 아랍계나 이탈리아계까지 모두 소화할 수가 있는 외모라서 앞으로도 자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최근작인 <셜록 홈즈>(2009)에서의 싸이코 연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은 배역이긴 했지만 <바디 오브 라이즈>(2008)의 요르단 정보국장 역으로 보여주었던 세련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가 훨씬 인상적이었습니다.



<킥 애스>의 마지막 장면은 속편의 제작을 암시하는 듯 하긴 했는데 만약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는 별 매력을 느끼기 힘든 작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피아 두목 프랭크(마크 스트롱)와 데이먼 – 빅 대디(니콜라스 케이지)가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만의 게임으로 진행된다면 그야말로 피칠갑 액션 밖에 남지 않은 악취미 영화가 되는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킥 애스>의 시점에서 최소한 10 여 년이 지난 후에 킥 애스 – 힛 걸 – 레드 미스트의 성인 버전으로 만들어지게 된다면 좀 더 다양한 상상이 가미될 수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