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밀리 맨”, 제 2의 길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






대니얼 레빈슨의 책 <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에 의하면,
우리의 인생은 전환기와 안정기의 시소게임이다.

최초의 전환기는 사춘기에 찾아온다.
2차 성징으로 몸이 아이에서 남자 혹은 여자로 바뀌고, 그 결과 매일 보는 거울 속의 내가 어느 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을 보는 관점도 바뀐다. 숨겨진 달의 뒷면을 발견한 천문학자처럼,
이 세상이 내가 예전부터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결국 정체성의 위기가 찾아오면서 모든 것을 재정립하게 된다.
정체성의 정립은 마음을 정리하는 것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무슨 직업을 선택하고 누구와 친구관계를 맺고 얼마나 잘 연애를 하는지로 확인받는 일종의 과제다.

청년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이 시급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취직해서 나름 경력도 쌓고, 친구들도 생기고, 연애도 몇 번 해서 결혼을 하기도 한다.

이제 안정기에 접어드는 것이다.



모든 것이 안정되었으니 정체성이 정립된 것 같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딴생각을 하는 것이 인지상정.
그토록 바라던 안정기에 도달했건만, 사람들은 만족하기는커녕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지금 내가 선택한 것이 정말 최선이었을까? 더 좋은 선택은 없었을까? 내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 30여년 남았는데 그 30년을 지금 하는 이 일을 하면서 보내는 게 맞을까? 내가 평생 저 사람과 같이 살 수 있을까? 그동안 목표 달성하느라 버려두었던 자신의 내면에 눈을 돌리며 갑자기 억눌러두었던 내향성이 치솟아 오른다.

의문은 불안이 되고 불안은 공포로 다가온다.
만약 내가 선택한 이 길이 정답이 아니라면, 과거의 어디에서부터 잘못 접어든 것이었단 말인가? 이제 정녕 돌이킬 수는 없단 말인가? 다행히, 현대인들의 건강상태는 매우 좋기 때문에 우리에겐 제2, 제3의 전환기를 감당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전혀 새로운 일을 하거나, 결혼해서 아이만 키우던 주부가 어느 날 전문인으로 새로운 경력을 만들어가는 일이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누구는 이 시기에 이혼을 하기도 하고, 바람을 피우기도 한다.
역시 잘 봐주자면 대안의 탐색이다. 이런 위기는 그 사람이 지금 현재 얼마나 잘 나가는지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온다. 오히려 확실하게 성공한 사람일수록 더욱 더 딴생각을 많이 할 수도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더 등이 따실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대안을 포기하고 지금 주어진 그 삶을 계속하기로 한다.
약간 불만은 있지만 그건 누구나 겪는 거라고 자위하면서 말이다. 그러면 질문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더 좋을까? 그대로 계속 사는 게 나을까, 아니면 바꿀 수 있을 때 바꾸는 것이 더 나을까?

같은 저자가 쓴 '여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도 있습니다

영화 『패밀리맨』은 바로 이런 대안탐색 시기, 인생의 제 2 전환기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잭(“니콜라스 케이지”)은 13년 전에는 뉴욕근교 소도시에서 지냈지만 기회를 잘 잡은 덕분에 지금은 뉴욕의 잘 나가는 투자전문가가 되어 있다. 물론 독신으로서 환락을 만끽하며 흥청망청 잘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우연히 들른 잡화점에서 그는 예사롭지 않은 강도를 만난다. 그리고는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 다음날부터 그는 13년 전에 기회를 잡지 못하고 소도시에 눌러앉아야 했던 제2의 잭으로 살게 된다. 처음에는 하루하루가 당혹과 좌절의 연속이다. 그는 이미 결혼해서 아이는 벌써 둘이나 있고, 장인의 타이어 가계를 이어받아 나름 안정되었지만 꿈이나 희망도 없는 일상 속에서 서랍 속에 숨겨둔 술이나 홀짝대면서 지내고 있었다.

낮에는 사장님의 인정을 받고,

밤에는 미녀들의 환대를 받으며 살던 사람이...

어느날 깨어 보니 옥닥복닥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어 버렸더란...

그러니까 예쁜 마누라가 다정하게 팔짱을 껴줘도 이렇게 똥 씹은 표정이지...

이렇게 끔찍한 삶이라니… 진저리를 치던 그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기자기한 일상의 가치와 즐거움에 눈을 뜬다. 아내를 아끼는 남편, 아이를 사랑하는 아버지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의 변신은 처음에 자신을 경계하던 큰 딸의 인증을 받으며 완성된다.




물론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다. 더 알고 싶으면 영화를 보시길 …

어쨌거나 이 이야기는 제 2의 인생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현대인들을 위한 우화이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은 영화속의 진짜 잭이 아니라 제2의 잭에 더 가까우며, 그들이 꿈꾸는 제2의 인생은 진짜 잭의 인생이라는 점이다(사실, 제2의 잭만 해도 대단한거 아닌가? 작지만 안정된 사업체를 운영하는 경영자에다가 예쁜 마누라에 귀여운 자식들까지 있는 단란한 가정의 가장 아닌가.)

하지만 실상은 그게 이 영화가 존재하는 의미다. 영화는 제2의 평범한 잭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봐. 저렇게 잘나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행복을 모른다고. 만약에 저들이 그걸 알기만 하면 휘황찬란한 자기 삶을 포기하고 우리 같은 삶을 선택할거라니까? 그러니까 딴 생각 하지 말고 지금 주어진 삶에 만족하면서 열심히 살라구.”

굳이 영화의 메시지에 반대할 필요는 느끼지 못한다. 정말 그럴 수도 있으니까.
누구든 남의 떡을 더 크게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평범한 제2의 인생을 부러워할 자격을 갖추려면 휘황찬란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는 역설은 여전히 남는다.

레빈슨의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인생의 제2 전환기에서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주어진 삶을 계속 하는 것이 좋을까?
답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남은 시간이 많고 여력이 많을수록, 다른 길로 과감하게 전환한 사람들이 성공할 가능성이 더 높다. 주어진 삶에 집착하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후회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현대사회가 특히 그렇다.

현대인의 예상 평균수명은 85세 이상이라던데, 계산해보자면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정년퇴직까지 한 다음에도 최소한 30여년을 뭔가 하면서 보내야 한다는 얘기다. 이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는 얘기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텅빈 30년을 견뎌내야 한다는 얘기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삶의 전환도 많이 해본 사람들이 더 잘한다. 그러니 말인데, 『패밀리 맨』 같은 영화나 보면서 위안을 삼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기회가 오면 잡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적어도 당신의 나이가 40 이전이라면 말이다.

“밑져야 본전” 이라는 말을 호기롭게 내뱉을 수 있는 인생의 마지노선이 그쯤일 테니 ……

그나저나 자기만 그러면 되지 왜 잘 나가려는 옛날 여자친구 발목을 잡는거냐?


영진공 짱가

정체감 유형의 차이, 세상의 차이: “친구”와 “말죽거리 잔혹사”


우리에게는 누구나 정체감(Identity)이 있다. 정체감이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남들과 어떻게 다른가? 나는 어디에 속해있는가? 내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가? 같은 질문도 역시 이 정체감에 관한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보통 내 이름은 누구이고, 나는 남자이고, 심리학자이며, 사람 구경하는 것과 만화와 게임과 영화를 좋아하고, 이기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을 싫어한다는 식으로 답한다. 이게 바로 내 정체성이다. 그런데 이 정체성을 찾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James Marcia라는 심리학자는 1969년과 1980년에 미국대학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로 면담을 한 결과, 자기 정체성을 찾는 방법에는 크게 네가지가 있다고 분류했다.

첫 번째 방법은 사회나 주변 사람이 자기에게 부여한 역할이나 가치관을 그냥 그대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릴적부터 부모가 가라는 학교로 진학하고, 부모가 사귀라는 친구를 사귀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부모가 지정하는 직업을 택하고, 부모가 골라주거나 부모의 심사를 통과한 배우자와 사는 사람이다. 물론 그렇게 살면서도 아무런 의심이나 후회가 없어야 한다. 이런 경우를 정체감 유실(Identity forecloser)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 정체감을 형성하기 전에 이미 다 만들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회나 주변에서 원하는 대로 아무 의심이나 후회없이 열심히 살지도 않는 방법이다.

주변에서 바라는 대로 살기에는 자기 생각이 너무 많지만, 그렇다고 주변의 기대를 뒤집어 엎고 자기 원하는대로 살기엔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젊은 시절에는 꿈이 있었으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다보니 결국 꿈을 접고 하찮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은 모두 이 유형이다. 이런 경우를 정체감 확산(Identity difused)이라고 부른다. 정체감이 한군데에 정리되어 있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있다는 뜻이다. 즉 자기의 꿈과 실제 삶이 다른 사람들이다.

세 번째 방법은 결정하거나 어디에 속하기를 미루고 이것저것 탐색을 하는 방법이다.

학교를 휴학하고 여행을 간다거나, 여기저기에 파트타임으로만 일을 하고(단 자기가 원해서) 정규직을 갖기를 피한다거나, 연애는 여러번 하는데 누구와 정착하기는 미룬다거나 하는 사람들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이것도 정체감 유형중의 하나로 정체감 유예(Moratorium)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이건 결국 뭐든 일단 미루고 보겠다는 방식이다.

마지막 방법은 사회나 주변사람의 기대를 배신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버리고 스스로 인생의 가치를 찾고 갈 길을 추구하는 유형이다.

이런 유형을 정체감 성취(Identity Achieved)라고 부른다. 가장 이상적인 유형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남들 하지 않는 짓을 하는 모난 돌에 해당하기 때문에 정을 많이 맞는다. 즉 고난이 많다는 거다. 그래서 스트레스도 많고, 알콜중독도 많고 속버리고 심장이 고장난 사람도 많다. 물론 용기와 능력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람도 있다. 이렇게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 성공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이 중 어떤 방법이 정체감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
그 대답은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만약 우리가 사는 사회의 질서와 가치체계가 한동안 계속 유지된다면, 정체감 유실이 최선이다. 부모가 살았던 시대와 내가 살았던 시대가 같은 규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이미 한번 살아본 부모의 말을 듣는게 최선이란 말이다.

뭐, 꼴에 사춘기라고 생각이 너무 많아서 시키는대로 하기엔 마음이 따라주지 못하는 사람은 최소한 정체감 유실이라도 해주는게 편하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더라도 몸은 주어진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의 정체감 성취가 제일 좋을 것 같지만 그건 이론적으로나 그럴 뿐이다.

하지만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서 10년이나 20년 후에는 전혀 다른 식으로 사는 사람이 더 성공한다면, 정체감 유실이나 확산은 최악의 선택이다. 왜냐하면 부모나 선배들의 생각은 가장 현실성이 떨어지게 되니까.

오락실에서만 게임을 할 수 있던 시절을 경험한 부모가 프로게이머 같은 삶을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제작비 1억원 시대의 영화판 만을 경험한 사람들이 평균 제작비 30억원 이상의 영화판의 룰에 적응할 수 있겟는가. 이전과는 다른 룰이 지배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어쨌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남이 하지 않았던 길을 가는 것이 그나마 성공할 확률이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누구에겐가 의지해서 남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고 싶어한다. 나 스스로 독립해서 험난한 삶을 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건 너무 불안하기 때문이다.

영화 『친구』에서 상택이가 선택한 것도 결국 정체감 확산의 삶이었다.

이 영화에서 신기한 건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은 결국 상택(서태화) 이지만, 그 이야기 속에 상택이 자신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준석(유오성)이와 동수(장동건)다.

언제나 준석이가 뭘 했고, 동수가 뭘 했는지에 대해서만 말한다. 상택이 본인의 이야기는 그 인생을 갈라놓은 극장 사건 빼놓고는 거의 없다. 심지어 자기가 무슨 공부를 하러 유학을 가는지 돌아와서는 어떻게 되었는지 조차도 말하지 않는다.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상택이는 자신의 삶이 아니라 준석이와 동수의 삶을 꿈꾸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범생이 이야기꾼은 오직 마음 속에만 그런 꿈을 담아두고 몸은 부모와 주변에서 기대하는 학삐리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사실, 1960-70년대 당시를 살았던 세대는 거의다 이런 선택을 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저기 먼 곳에 파랑새가 날아다녀도 결국 꿀꿀하고 칙칙한 현실과 살아야 했다.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다른 삶을 살기는 두려웠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택이의 선택이 가장 옳았다. 준석이도 동수도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걸 생각해보라.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가업인 장의사도 버리고 부모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찾아갔던, 정체감 성취에 제일 가까웠던 동수는 수십방의 칼침을 맞고 죽어버린다. “좋건 싫건 시키는 대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크게 고생한다.” 그게 당시의 규칙이었다.

자아감 성취를 향하던 동수

그런데 한 10년 후를 배경으로 한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다른 정체감 유형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주인공인 현수(권상우)는 상택이처럼 우식(이정진)이의 행동을 관찰하고 부러워할 뿐이다. 현수는 반에서 우식이의 위치는 별로 원치 않지만 은주(한가인)를 차지하는 모습만은 뼈저리게 원한다. “내가 아주 힘들게 이루려 했던 걸, 녀석은 너무 쉽게 얻었다.” 라는 말은 현수의 심정을 정확하게 대변한다.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다음에 현수는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변신을 한다. 존재감 없는 범생이에서 학교 사상 최고의 폭력사건의 주인공으로 말이다.

그 변신이 너무 극적이라 설득력이 없다는 평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어쨌건 현수는 운동신경도 좋았고 집요한 열성파였기 때문이다. 그 집요함을 싸움 준비로 방향만 조금 바꾸면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현수의 정체감은 최소한 유실이나 확산의 유형을 벗어나 버렸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정체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반항했다. 그런 면에서 내가 지금까지 본 한국영화의 주인공 중에서 범생이 출신으로 정체감 성취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녀석이 현수다. 나중에 정말 그가 정체감 성취를 이루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근데 현수의 이 반항은 『친구』에서처럼 처절한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저 퇴학을 당하고 재수를 하는 삶이 주어졌을 뿐이다.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인 세상에서 그 정도라면 처벌도 아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겨났을까?

그 이유는 결국 시대의 차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세상이 『친구』 시절보다는 조금 느슨해지고, 이전의 룰이 먹히지 않는 새로운 시대가 찾아왔기 때문에 현수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가야 할 삶인지도 모른다. 무조건 편안히 기댈 대상이나 가치관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삶 말이다. 그건 자유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아주 고달픈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대에도 자유가 무조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자유의 무게를 짊어지고 스스로 노력할 용기가 있는 자들에게만, 그것도 아주 가끔씩만 행복이 찾아올 뿐이다.



영진공 짱가

 

“언 에듀케이션”, 17살 인생 최고의 선물


제니(캐리 멀리건)의 나이는 17살. 한국나이로 치면 18살쯤. 그때 난 즉석떡볶이, 스티커사진, 브래드피트, 스크린,
로드쇼 같은 것에 빠져 살았다. 가끔 일탈을 꿈꿀 때도 있었지만 기껏 점심시간에 학교 담을 넘어 친구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거나
명동에 나가 핸드폰 줄을 사오는 걸로 만족하곤 했다. 제니처럼 친구들과 러시아제 담배를 나눠 태우며 파리의 환상을 노닥거리는
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때 난 남자가 뭔지도 몰랐고, 책을 나눠 읽을 이성 친구 하나 없었다. 헌데 제니는 진짜 남자 데이빗(피터 사스가드)과
대화도 나누고 데이트 날을 잡고 예쁘게 치장하고 꿈같은 파리 여행도 떠난다. 아 물론, 첫날 밤 아닌 첫날 밤도 함께 보낸다.

이 모든 게 너무 너무 부러워 영화를 보는 내내 한 시도 눈을 떼지 못한 것 같다. 제니의 수줍은 미소와 데이빗의 유쾌한
농담으로 점철된 첫 만남 장면에선 거의 넋을 놓았다. 상큼한 제니의 미소가 내 것인 양 시공간을 무시한 채 영화에 푹 빠졌다.
곧 제니가 마주칠 진짜 현실을 까맣게 모르고서.

남들처럼 무난해 별 감동도 깨침도 없던 지난날을 비춰보면, 제니의 경험들이 (비록 행복과 불행의 극단을 오갔더라도) 분명 그녀에게
사랑과 욕망 같은 감정을 직시하고 또 견제하는 힘을 얻게 해 줬을 것이다. 오드리 헵번이 보였을 법한 해맑은 웃음을 보이며 모든
걸 포기하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에 주저하지 않은 순수함은 곧 현명함으로 성숙됐을 것이다.
 

나의 과거에게 이 영화를 주고 싶다. 감정의 실타래 속에서 생고생하는 사춘기의 여고생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혹 더러운
경험으로 인생 망쳤다고 생각하는 안타까운 소녀들도 주저 말고 이 영화 꼭 보길 바란다. 실패는 언제나 도약하는 계기를 준다.
제니처럼.


<언 애듀케이션>은 영국의 유명 저널리스트 린 바버의 실화를 닉 혼비가 각색한 작품으로, 3월 18일 정식 개봉한다.


영진공 애플

유승호의 매력은?, Guilty Pleasure & More …


유승호는 처음부터 참 잘생긴 꼬마였다. 영화 <집으로>의 철딱서니 없는 악동으로 등장했을 때부터 그랬다. 그리고 한동안, 우리는 그 꼬마를 잊었다. 내가 그를 다시 발견한 것은 내가 일하는 곳에 붙은 영화 포스터 속에서였다. 영화 정보라면 꽤나 주워섬긴다는 나도 처음 들어본 영화, <서울이 보이냐>의 주인공이었다.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얘가 이런 영화에? 라는 의문이 떠오른 거다. 그렇다. 나도 의식하지 못했지만 유승호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유승호는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누나를 등에 업고서 시청자들에게 유산균식품을 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 나라의 20-30대 여성들은 모두 그 좋아 어쩔 줄 모르는 누나가 되어 버렸다. 이 글은 바로 그 누님들 중 한명의 요청으로 씌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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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그 광고




그럼 이제 유승호의 매력을 정리해봅시다~

매력1.
미학적인 조화

유승호를 말하면서 그의 외모가 제공하는 아름다움을 빼놓을 수는 없다. 눈 주변을 제외하면 맑디맑은 얼굴, 큰 눈동자와 짙은 눈썹, 그 외의 정확하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갸리갸리한 팔다리와 함께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순정만화의 그것에 견줄 만하다. 순정만화의 주인공답게 이 꼬마는 순수하다. 그러나 순수한 미소년이라는 것만으로는 유승호의 매력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유승호에게는 단지 순수하고 예쁘다는 것 말고 다른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어두움이다.


일단 이쁘고 볼 일이다.

매력2.
여리한 어두움-부조화의 매력

유승호는 어리다. 그리고 어린애답게 섬섬하고 여리하다. 하지만 묘하게도 그 얼굴에서는 서글서글한 어두움이 묻어난다. 그래서 그를 ‘리틀 소지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약간 짙은 눈매와 젊은 애 답지 않게 힘없어 보이는 눈빛 탓일지도 모르겠고, 가느다란 팔다리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그가 연달아 맡은 어린 왕 역할이 남겨준 아우라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 꼬마는 귀여운데 귀엽지만은 않다. 우리는 언제나 부조화스런 대상에 눈길을 돌린다. 이것은 인간이 생존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언제나 튀는 존재들은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에게는 위협이지만 눈치가 빠른 자에게는 기회가 된다. 인류의 조상들은 그것을 감별하는 능력을 통해 죽을 자리에서 살아 돌아오곤 했다. 따라서 우리는 뭔가 어긋나는 존재를 감별하는 눈을 가진 이들의 후손들이고 비슷한 능력을 물려받았다.

군계일학, 닭떼 중에 학 한 마리가 눈길을 끄는 것은 그 학이 나머지 닭들과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여러 얼룩 중에서 어떤 얼룩이 묘하게 움직이고 있다면 그것은 그냥 얼룩이 아니라 호랑이다. 마찬가지로 귀여운 아이가 귀여운 짓을 하고 귀여운 분위기를 풍기는 건 그냥 한번 돌아봐 줄 정도로만 귀여울 뿐이다. 그러나 귀여운 애가 뭔지 모를 우수를 흘리고 다닌다면 이건 걸음을 멈추고 긴장하며 주시해야만 한다. 곧 저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승호는 꼬마 시절부터 그냥 어린애스럽지만은 않았다. 애가 별로 까불지도 않고 뭔가 아는 듯 조용히 남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던 애가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남자가 되어가는 것이다. 아주 그럴듯한 남자가.
 


애가 뭐 이리 어두워 …

매력3.
성공한 성숙

사춘기의 2차 성징은 호르몬의 균형을 뒤집으면서 우리들의 외모도 함께 헤집어 놓는다. 왕자 공주 대접을 받던 우리네 인생이 마당쇠와 무수리로 격하되는 시점이 바로 이때부터다. 나를 볼 때마다 귀여워 어쩔 줄 모르던 어른들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금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대하던 순간을 기억하는가. 바로 그게 그때다. 어떤 여자아이들은 이 전락을 막고자 음식을 거부하기도 하고 심해지면 사춘기 거식증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변하는 몸을 막을 수는 없고 흘러가는 세월을 멈출수 없는 법이다. 사춘기의 혼돈은 아역스타들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그동안 누님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사춘기를 제대로 넘기지 못한 동생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여기서 <해리포터> 시리즈의 ‘다니엘 래드클리프’를 위해 묵념.


아, 해리…

그러나 몇몇은 불공평하게도 사춘기의 나쁜 것은 피하고 좋은 것만 얻어서 돌아온다. 그것은 마치 왕의 귀환과도 같은 일이다. 나는 통과하지 못했던 바로 그 테스트를 통과한 그들에게 우리는 존경을 바치며 더 큰 충성을 맹세한다. 멀리는 같은 해리포터 시리즈에 출연했으나 공주님이 되어버린 ‘엠마 왓슨’이 그렇고, 여기서는 유승호가 그렇다. 그는 한 고비를 넘긴 것이다. 루나Luna는 이를 “훈남이 될 거란 예상을 확인하는 즐거움” 이라 표현했다.

매력4.
금지된 장난-Guilty Pleasure

유승호에게 하악대는 누님들의 호소하는 또 다른 감정은 죄책감이다. 내게 자문을 해준 한 분은 이 감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가 이런 어린애에게 무슨 짓인가,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내 마음,
오히려 죄책감이 더 불을 지르는 이 상태.”

이건 새로운 일도 아니다. 이미 남자들은 오래 전부터 그래왔다. 나보코프가 <롤리타>에서 표현한 것이 그거고, 예전에 ‘SES’와 ‘핑클’이, 지금은 ‘원더걸스’와 ‘소녀시대’가 소구하는 것이 그것이며, 문근영과 김연아의 존재가 바로 그것이다. 단지 여기에 누님들이 가세했을 뿐이다. ‘샤이니’라는 애들이 인기를 얻었을 때부터 이런 조짐은 있었다. 그리고 이제 유승호를 통해 그것이 본격적으로 분출되는 것이다.

남자들이 이미 그랬왔으니 여자들도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원래 이런 거는 오히려 죄책감을 느껴야 더 즐길 수 있다. 롤리타 콤플렉스가 콤플렉스인 이유는 거기에 죄책감이 반드시 끼어들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는 금지된 것을 더 갈망한다. 사실 이것은 더 많은 자유를 원하는 본능의 발현이다. 우리는 누가 나를 금지하기 보다는 내가 남을 금지하기를 원하도록 진화해왔다. 금지를 극복한다면 우리는 한 단계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금지된 대상은 더욱 더 매력적이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그 대상 자체의 매력뿐만 아니라 자유와 권능의 매력까지 담겨있으니까. 유승호를 더 잘 ‘즐기는’ 비결도 여기에 있다.

당신이 죄책감을 느낄수록, 금지를 느낄수록 유승호가 내미는 숟가락은 더 달콤할 것이다.

영진공 짱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