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웨이”, 부패와 숙성의 차이





와인의 일생을 생각하곤 해요.

그 포도들이 자라던 해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햇볕은 어땠을까…비는 내렸을까…
포도를 가꾼 사람들… 그 포도를 따서 와인을 담근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그들 중 몇 명은 이미 이 세상에 없고 와인만 남아있겠죠…

와인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이 좋아요
같은 와인이라도 오늘의 맛은 다른 어느 날의 맛과도 다르죠.
왜냐면 와인은 살아있거든요.
병 속에서 와인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숙성되죠
절정에 도달할 때까지…
그러다가 절정이 지나면,
피할 수 없는 타락이 시작되죠
끝내주는 맛을 남겨주고 말예요.

– “사이드웨이” 중에서 –

두남자


여기 두 남자가 있다.

한 남자는 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다.
성인기 초반을 아주 안정된 직장으로 시작했고, 40이 넘어간 지금도 여전히 그 안정된 직장에서 안정된 일을 하고 있다. 몇 년 전 결혼에 실패한 이후 독수공방을 계속하는 그는 조심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소설로 써서 출판을 해보려 하고 있다.

겁쟁이 소심꾼 마일즈


다른 남자는 한때 잘나가던 드라마 배우였다. 하지만 지금은 광고에 목소리 출연이나 하면서 지낸다. 그래도 먹고사는데 지장은 별로 없고, 늘 새로운 여자를 만나 즐기며 살다가 이제 결혼을 해보려 한다.

발랄한 난봉꾼 잭

이 둘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 같다.
교육자와 연예인, 고독한 솔로족과 희희낙락 싱글족, 이혼한 남자와 이제 막 결혼하려는 남자 ……

하지만 이들의 삶은 어떤 면에서 아주 비슷하다. 그것은 이들의 삶이 고여서 썩고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남자에 대해서는 이 말이 맞는 것 같지만, 끊임없이 여자를 갈아치우는 두 번째 남자에게도 같은 얘기를 할 수 있느냐고? 그는 그 갈아치우는 패턴을 바꾸지 못한다는 점에서 고여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똑같이 고여서 썩어가지만 전혀 다른 용어가 사용되는 존재도 등장한다.

바로 와인이다. 예전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와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 적이 있다.

“와인 그거 뭐 결국 썩은 포도주스 잖아?”

무지막지한 표현이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봐서 부패현상이나 발효현상, 숙성현상은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어떤 것은 숙성이라 불리고 어떤 것은 부패라 불린다.

그건 단지 이름의 차이만이 아니다.

어떤 썩은 포도주스는 쓰레기통으로 직행하지만,
다른 것은 오래 썩었다는 이유로 수 십만원에서 수백 수 천만원짜리 물건이 된다.

전자가 풍기는 냄새는 악취고, 후자가 풍기는 냄새는 향기다.

전자는 사람이 먹으면 배탈이 나고 병원신세를 지게 만들지만,
후자는 입맛을 돋워주고 건강에 도움이 되며
심지어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황홀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했다.

변치 않는다는 것이 자랑이 아님을,
늙어가면서 부패가 아니라 숙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 갈림길에서 숙성의 길로 걸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영진공 짱가

“사이드웨이 (Sideways, 2004)”, 최고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영화

영화의 홍보를 위해 동원되는 온갖 미사여구들 가운데 가장 흔해 빠졌던 만큼 이제는 아무도 믿지 않게 된 표현이 바로 ‘최고의…’라는 수식어일 거다. 그런데 <사이드웨이>의 경우는 ‘전세계가 흠뻑 취해버린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포스터의 헤드카피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한 사람의 오랜 영화 관객으로서 <사이드웨이>의 가치를 묘사하기 위한 개인적인 방법을 동원한다면 ‘개봉한지 한참 지나 우연히 비디오로 빌려 보고는 아, 이 영화는 극장에서 꼭 봤어야 했는데!’라며 두고두고 오호통재라 하던 딱 그런 종류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14인치 TV 화면에 비디오로 빌려 본다고 해서 좋은 영화의 가치가 반감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왕이면 다홍치마, 제대로 된 스크린 비율에 가슴 한켠을 울리는 사운드트랙과 제대로 된 화면 색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무래도 더 나은 방법이 아니겠느냐는 얘기다.

주인공들을 따라 함께 떠나는 LA 근교의 와인 여행과 손에 잡힐 듯 선명한 캐릭터의 등장인물들, 그리고 알렉산더 페인의 농익은 연출이 보는 동안 너무너무 즐겁고 보고 난 이후에도 오랫동안 되새김질 하게 만드는 ‘최고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렉스 피켓의 1인칭 소설이 영화의 질 좋은 재료들을 공급한 포도 농장이었다면 그곳에서 가격 대비 성능이 탁월한 2004년산 캘리포니아 와인 같은 영화를 빚어낸 것은 감독과 스텝들, 그리고 배우들의 공로다. 특히 <사이드웨이>는 낯익은 얼굴들이긴 하지만 그 자신들만으로는 관객 동원력은 거의 없다시피한 그간의 조연이나 단역 전문 배우들이 주연으로 나서 탁월한 연기력을 선보인 영화다.

<듀엣>(2000)에서 이미 ‘실패한 인생’의 중년 캐릭터로 눈에 익었던 폴 지아매티는 개인적으로 <사이드웨이>를 보기 싫게 만들었던 원인이기도 했었다. 코믹 연기를 잘하는 배우이긴 하지만 그 자체로 너무 우울한 인상이었던 그가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에서 주인공이라니, 어쩌면 <어바웃 슈미트> 만큼이나 꿀꿀하게 진행하다가 꿀꿀하게 끝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사이드웨이>에서 폴 지아매티가 연기한 마일스는 <사이드웨이>가 좋은 영화로서의 영화적 완성도를 갖추는 데에 필요한 거의 절반 이상의 공헌을 해냈다. 폴 지아매티를 캐스팅하고 그의 연기를 조율했던 것은 알렉산더 페인의 선택이었겠지만 <사이드웨이>는 감독보다도 주연이었던 폴 지아매티라는 배우의 영화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어바웃 슈미트>가 꿀꿀이 영화로 남겨진 이유는 어쩌면 잭 니콜슨 한 사람의 영화였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이드웨이>에는 바닥으로 푹푹 내려 앉기만 하는 주인공 마일스 옆에 또 한 명의 주인공 잭이 있음으로 해서 깊이와 재미의 균형을 잘 맞출 수 있었지 않았냐는 얘기다. 토마스 해이든 처치가 연기한 잭의 비중은 폴 지아매티의 마일스 만큼 절대적인 수준은 아니었지만 영화의 사건 사고들을 만들어내는 실질적인 원동력으로서 <사이드웨이>의 이야기 구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있다.

버지니아 매드슨과 산드라 오는 두 명의 여주인공으로서 적절한 수준의 연기를 보여주긴 했지만 스토리 상에서 배역 자체가 워낙 제한적이라 답답한 감이 없지 않다. ‘두 명의’ 여주인공이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사이드웨이>는 두 명의 남자 주인공과 그들의 여자들 다수가 등장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즉, 마일스의 마야와 빅토리아, 그리고 잭의 스테파니와 얼굴도 제대로 안나오는 크리스틴, 심지어는 레스토랑의 뚱보 여종업원 간에 조차도 영화 속 존재감에는 큰 차이가 없다. 이처럼 남자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을 줄곧 견지하면서 나머지 구성 요소들을 재배치하고 있다는 점은 <사이드웨이> 뿐만 아니라 알렉산더 페인의 전작들, <일렉션>과 <어바웃 슈미트>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공통 분모다.

그렇다고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가 보편성을 잃고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알렉산더 페인의 영화들은 인생의 내리막길을 걷거나 막다른 길에 다다른 주인공들을 통해 어느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다가올 절망의 순간들을 묘사함으로써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보편적 진실에 줄곧 접근해왔다. 극장에서 보내는 두 시간의 여흥으로 누구나 바라는 그런 보편적인 즐거움은 아닐테지만 영화관 밖 실제 생활에서는 알렉산더 페인의 주인공들을 쉽게 잊을 수가 없는 것이 그 증거다.

영진공 신어지

<거침없이 쏴라! 슛뎀업>, 거침없이 쏘면서 타란티노를 넘어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수지의 개들>(1992)과 <펄프 픽션>(1994) 이후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는 하나의 새로운 트렌드를 이루었고 이후의 전세계 액션/갱/SF 장르 영화들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영화에서 ‘새로운 트렌드를 이루었다’고 함은 이전의 영화들과는 다른 요소들과 스타일로써 관객들과 대화하는 새 문법을 확립했다는 뜻이고 동시에 이후의 많은 영화들이 그 문법을 따랐다는 이야기입니다. 타란티노의 새 영화 문법에 가장 근접했던 작품은 가이 리치 감독의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스>(1998)와 <스내치>(2000)를 꼽을 수 있을텐데요, 아쉽게도 쿠엔틴 타란티노를 넘어서는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는 못했던 작품들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 자신조차 쉽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이 타란티노 스타일의 본질이란 한마디로 거침이 없다는 점입니다. 주인공들의 지루한 수다와 피칠갑의 총기 액션, 그리고 시간 흐름을 무시한 내러티브의 재조합 등의 개성적인 영화적 취향과 아이디어들이 관객들 앞에 ‘거침없이’ 전시되는 것이 타란티노 영화의 핵심이었습니다.1) 가이 리치의 영화들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이 타란티노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그 아류작들로 분류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타란티노 영화의 요소들을 추종만했지 그 핵심은 놓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기존 장르 문법을 해체하는 통렬함과 일탈의 쾌감을 담아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거침없이 쏴라! 슛뎀업>은 쿠엔틴 타란티노 이후 타란티노 스타일의 본질에 가장 가깝게 다가선 주류 상업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목 만큼이나 말 그대로 거침없이 쏴대는 영화가 <거침없이 쏴라! 슛뎀업>입니다. 이와 같이 거침이 없는 영화는 필연적으로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오류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쏴죽이고 싶은 상대라면 가리지 않고 총질을 해대면서 총기 규제의 이슈를 다루는 뻔뻔함과 남들이 하는 보기싫은 행동들에 대해 질색이라고 나불대지만 그 자신도 누군가에게는 질색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는 모순들로 무장한 영화가 <거침없이 쏴라! 슛뎀업>입니다.2)

이와 같은 영화는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동네 재개봉관에 다리 뻗고 앉아 팝콘을 스크린을 향해 던지며 보는 B급 영화들과 그 수요 계층의 정서를 가감없이 반영하고 있는 서브컬쳐 영화입니다.3)  또한 <거침없이 쏴라! 슛뎀업>은 영화 팬들을 위한 영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오우삼 영화에서 즐겨 사용되었던 슬로우 모션 총격 액션의 사용은 물론이고 액션 영화들에 대한 등장 인물들의 잦은 언급이나 심지어 여주인공 도나(모니카 벨루치)의 성을 퀸타노(Quintano = Quentin + Tarantino)라고 붙여놓고 영화 속에서는 한번도 언급을 안하다가 엔딩 크리딧에 띄워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영화 팬들을 위한 남다른 서비스 정신을 시종일관 과시합니다.

주연급 배우들의 캐스팅에서도 거침없는 이미지 차용이 돋보입니다. 클라이브 오웬은 <씬 시티>에서의 과묵한 터프가이 이미지와 <칠드런 오브 맨>에서의 생명의 수호자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4) BMW 홍보용 단편영화 시리즈에서 주연을 맡았던 인연 탓인지 줄기차게 BMW만 훔쳐타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여기에 모니카 벨루치는 <말레나>, <매트릭스 2, 3>,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사랑도 흥정이 되나요?> 등에서의 창녀와 모성애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구요.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사이드웨이>나 <아메리칸 스플렌더> 등에서 낙오자의 이미지가 강했던 폴 지아매티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사악하고 과격한 악당 캐릭터를 선보이는데, 이 역시 “찌질이가 총 들고 설쳐대는 꼴은 질색이야”라는 대사를 던지기 위한 최선책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액션 씨퀀스의 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최근 어떤 영화들보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넘쳐 흐릅니다. 각 씨퀀스를 가능케 하는 논리적인 개연성을 면밀히 구축하기 보다는 반짝반짝 하는 아이디어들을 거침없이 살려내는 데에 역점을 두고 있는 영화입니다. 손가락이 다 부러진 상태에서 식당에 쳐들어온 3인조 총기 강도들을 무찌는 방법이 궁금하십니까? 이 영화를 보시면 됩니다. 이런 영화 싫다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 대신 좋다는 사람들에게는 보고 또 봐도 끊임없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작품으로 남게되리라 생각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타 잡담들>

1) 그런 점에서 타란티노 영화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작품은 <저수지의 개들>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데쓰 프루프>는 타란티노가 자기 영화의 본류를 향해 다시 찾아들어간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비록 총기 액션이나 시간 순서를 뒤바꾼 에피소드의 배열 등 타란티노 영화의 인장과도 같은 요소들은 없었지만 이들은 영화의 구성 요소들일 뿐 그 핵심은 아니었다고 생각됩니다.

2) 콜롬바인 고교 사건과 9.11 테러 이후 한동안 자제되어왔던 과도한 폭력과 인명 살상(?) 영화가 드디어 다시 등장했다고 할 수 있을텐데요, 최근 부시 대통령과 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율이 땅바닥을 닥닥 긁어대면서 그 동안 미국 시민사회를 사로잡아왔던 지나친 엄숙주의의 망령이 드디어 해체되기 시작했다는 신호탄로 해석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3) 그렇기 때문에 장르 문법과 플롯 구성의 개연성을 시종일관 무시하며 기존 유사 장르의 영화들을 마음껏 오마쥬하는 자유분방하면서도 거침이 없는 표현 방식이 가능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상업 영화들은 흥행에 대한 부담 때문에 기득권층이나 다수 대중들의 취향과 통념을 의식하게 되고 그 결과로 스스로의 표현 방식에 제약을 가하게 됩니다.

4) 당근을 먹다가 그것을 무기로도 사용하는 주인공 스미스(클라이브 오웬)의 캐릭터는 일견 <에이스 벤츄라>(1994)에서 짐 캐리가 보여준 황당하고 거침없는 캐릭터를 연상케합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저 역할을 짐 캐리가 했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