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과 “플란다스의 개”, 공통된 세계관의 다른 표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그의 첫 번째 상업영화 『플란다스의 개』와 기본적으로 같은 관점, 같은 구조의 영화다. 단지 첫 번째 영화에서 관점을 고르게 배분했던 것과는 달리 신작에서는 한쪽의 관점만을 드러냈고, 사건이 좀 더 극적이 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첫째, 두 영화는 모두 두 개의 사건으로 구성된다.


그 두 사건 중에서 첫 번째는 나머지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결국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은 두 번째 사건이고 첫 번째 사건은 그냥 지워지고 만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첫 번째 사건은 윤주(“이성재”)의 ‘개 유기 및 살해 사건’이다. 이로 인해 이후에 모든 일들이 벌어지지만, 결국 윤주의 이 범행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넘어간다. 『괴물』에서는 미군의관의 ‘포르말린 방류사건’이 여기에 해당한다. 괴물은 이로 인해 탄생하지만 역시 그 사건도 영화에서는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않고 지워지고 만다. (두 번째 사건은 물론 ‘윤주네 개(순이) 납치/도살기도 사건’과 ‘괴물의 출몰사건’이다.)


둘째, 사건이 둘인 만큼 범인도 둘이지만, 이 두 범인에 대한 처분은 극과 극이다.


<플란다스의 개>의 윤주(“이성재”)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교수가 되는 데에 성공하며, 『괴물』의 미군 역시 실질적인 원인제공자이면서도 비난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계기로 생화학전 실험을 하는 기회를 얻는 이득을 본다.

반면에 이들로 인해 발생한 두 번째 사건의 범인은 사람들의 눈에 문제의 핵심으로 부각되고 처벌당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노숙자(“김뢰하”)와 <괴물>에서 괴물이 바로 그 역할이다. 이들은 지극히 단순하고 본능에 충실할 뿐 특별히 악의가 없는 존재라는 점에서도 매우 비슷하다. 즉, 만약 개고기 맛을 볼 기회나 포르말린으로 인한 유전자 변형이라는 사건만 없었더라면 이들은 그저 멍청한 노숙자로서, 한강의 물고기로서 단순한 삶을 마치고 말았을 존재들이다.

당구대에 비교하자면 이들은 적극적인 플레이어가 아니라 누군가가 친 공에 맞아서 그대로 굴러가는 공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어난 모든 문제의 가해자로 지목받고 처벌당한다. 지나친 처벌인 것이다.


세째, 언제나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는 자와 문제를 해결하는 자는 따로 있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 유발자는 많이 배우고 사회적 지위가 높으며 권력을 가진 자이고, 문제
를 해결하는 자는 배운 것 없고 지위도 낮고 권력도 없는 자이다.

심리학 박사인 윤주는 자신이 개를 죽여 놓고서 정작 자기 자신의 개를 납치당하는 아이러니에 빠진다. 미군 역시 포르말린을 방류해 괴물을 만들어 놓고서는 그로 인해 애꿎은 사병 하나가 희생당한다. 그리고 그 이후, 윤주와 미군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제 문제는 이 사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쉽게 말해서 무고한 존재들이 짊어지고 해결하며 그로 인한 피해도 고스란히 그들이 다 뒤집어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공로에 대한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한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그 무고한 인물은 현남(“배두나”)이고, 『괴물』에서는 강두(“송강호”)네 가족이다. 현남은 납치된 개를 찾아서 윤주에게 돌려주었으나 결국 자신은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그토록 원하던 TV출연 마저 이루지 못한다. 강두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괴물을 처치했지만 큰 희생을 치렀을 뿐, 그로 인한 어떤 공치사도 받지 못한다. 뉴스와 신문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일 벌린 넘들은 어디 가고...

덧붙여, 이런 이야기가 유지되기 위해서 영화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자는 언제나 나머지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하고,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만 받는다.

현남은 직장 상사로부터 맨날 할 일을 빼먹고 싸돌아다닌다고 비난받으며, 강두네 가족은 위험한 바이러스에 감염된 채로 도주한 위험인물들로 체포 대상이 된다.

고독한 현남을 응원하는 건 상상의 관중들과

현남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 뿐이다


게다가, 그 와중에 규칙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은 이들의 발목을 잡는다.


현남이 필사적으로 도망칠 때 비상구에 가득 쌓인 물건들과 닫힘 버튼을 눌러도 닫히지 않는 엘리베이터 문이나, 강두네 가족을 바이러스 보균자로 분류해 끌고와서는 아무 대책없이 다른 환자들과 의사들에게 노출시키는 병원시스템이 바로 그런 규칙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이다.

이런 일도 상당히 익숙하다

결국 이 두 영화에서 드러난 감독의 관점은,

이 세상은 사고치는 놈과 해결하는 놈이 따로 있으며, 좀 배우고 권력 있다는 놈 치고 제구실 하는 놈 없고, 오히려 그 빈틈은 못 배우고 권력 없는 민중이 대신 해결해온, 본말전도의 법칙에 따르는 세상이다.


영화 괴물에서 반미의식이 드러난다고 하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그의 관점은 반미라기 보다는 반권력, 반시스템, 반지식인 이다. 윗대가리들만 제대로 하면 벌어지지 않을 사건들로 인해서 무고한 시민들만 죽어나간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관점이 지나치지 않을까? 너무 비관적이고 급진적이지 않을까?
글쎄 … 경제위기, 4대강, 용산참사, 외환위기, 삼풍백화점 붕괴, 성수대교 붕괴, 대구지하철 가스폭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등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위기와 참사들을 생각해봐도 이런 관점이 비현실적이라는 말은 하기 어려울 것이다.

언제나 윗대가리들이 제대로 일을 했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사건이고, 결국 그로 인한 피해는 무고한 민중들이 뒤집어써야 하지 않았던가. 경제위기, 외환위기 때 금융시스템을 비판하고 고치기는 커녕 엉뚱한 정책으로 일관하는 실제 정부의 행태나, 정작 괴물에는 신경쓰지 않고 엉뚱한 바이러스 공포만 퍼트리는 영화속 정부의 행태가 크게 다른가?

어쨌든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같은 정서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한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다른 영화는 한국영화사의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이다.



 

영진공 짱가

슬픈 동화 “공기인형”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 바라는 바가 있었다. 더 과감하게 현실을 그려주기를.
<아무도 모른다>에서처럼 섬뜩한 신음소리가 심장을 타고 흐르더라도 한발 먼저 개인화되고 비극이 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그런 면에서 공기인형은 애초부터 나의 바램을 빗겨간다. 주인공부터가 존재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인형 이니까. 하지만 공기인형(섹스 돌)에게 마음(고코로)가 생긴다는 영화의 시작은 충분히 눈길을 사로잡았다.

영화에서 러닝타임이 흐를수록 후에 일어날 비극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감독의 전작에 비추어 봐도 그렇다. 그는 헛되이 희망을 주지 않는다. 더구나 공기인형은 막 갖기 시작한 마음을 남용해 사랑도 하려 든다. 배꼽에 공기를 불어넣어 주지 않으면 타지 않는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설레어 한다. 머지않아 인형은 마음을 다칠 것이다.

영화는 잔인한 구석이 있다. 세상을 하나 둘 알아가며 하늘, 물방울, 바다, 죽음, 나이 듦을 긍정하는 공기인형에게 파멸의 기운을 드리우니 말이다. 그건 마치 마음을 저버리라는 메시지 같기도 해서 말이다.

마음이 귀찮아서 널 택한건데 …
왜 마음을 가졌니 …
그냥 예전으로 돌아와 주면 안 되니. 인형이었던 그때로 말이야.

아프고 괴롭고 슬프고 징글징글한 것, 이 모든 게 지겨워서 마음을 주자 말자고 다짐해 본 적이 있다. 사랑마저도 그렇게 해보자 한 적이 있다. 상처받기 두려웠고 다치는 게 싫었다. 지금은 어떠냐하면 …

모든 게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세상사는 데에 굳이 마음이 동원되지 않는 것같다.
외롭지 않냐고? … 그러게.. 공기인형은 마음을 동하게 하는 슬픈 동화다.

영진공 애플

린다 린다 린다 (リンダ リンダ リンダ,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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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성장의 고통, 아니면 기성 세대와의 커뮤니케이션 단절은 십대 청소년기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가? <린다 린다 린다>는 그런 극적인 갈등 요소들을 억지로 끌어당기지 않더라도 충분히 기억될 만한 멋진 영화 한편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물들은 드러내놓고 화를 내거나 싸우지 않고 좋아하는 상대방에게 결국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한다. 3일 남은 시간 동안 학교 축제에서 공연할 노래를 밤 새워 연습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에 “별 의미는 없어”라고 대답한다. 인내심이 많은 카메라는 시종일관 주인공들을 따라다니며 말 없이 지켜만 보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시작된 공연. 마치 이 순간만을 위해 모든 것을 기다렸다는 듯 강렬한 전기 충격이 전달된다. 그 사이 카메라는 비 내리는 축제 마지막날의 학교 구석구석을 필름 위에 기록한다.

야구치 시노부의 <스윙 걸즈>가 한 잔의 청량음료 같이 개운한 영화였다면 <린다 린다 린다>는 비 오는 날 오후 잘 우려낸 ‘녹차의 맛’ 같은 작품이다. 음악을 연주하고 싶은 마음을 전달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한번쯤을 있었을 나의 십대 시절을 회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런 건 뭐하러 하나 싶은 일들로 가득했던 지루한 시간들이기도 했지만 지나고 나면 누구나 그때 만큼 좋았던 시절도 없었다고들 하지 않나. 오히려 좀 더 열심히 하고 싶었던 일을 많이 하면서 보내지 못한게 아쉬울 따름이다.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시선에는 바로 그런 속 깊은 성찰과 애정이 담겨있다. 그러면서도 함부로 개입하려 들지 않는 자세는 <린다 린다 린다>의 미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플란다스의 개>, <고양이를 부탁해>, <복수는 나의 것>,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 이후 주춤했던 배두나의 필모그래피에도 멋진 작품이 하나 추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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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진공 신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