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죠.

 

많은 사람들에게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은 여전히 생소하다. 그래서 종종 낮선 사람들과의 소개 자리에서 ‘아..그 직업은 뭐하는 거죠?’ 라는 질문을 받아서 대화를 이어가는 좋은 수단이 되곤 한다. 프리랜서라는 것과 ‘일러스트레이터’라는 그럴듯한 직업명 때문에 가끔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뭐 어느 직업이나 그렇듯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애로사항이 꽃피는 건 마찬가지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문화 쪽으로 돈 벌어먹기가 참으로 힘들고 척박한 짓이기에 뭔가 놀면서 돈 벌겠다는 생각으로 이쪽 일을 준비한다면 돈은 커녕 손가락의 깊은 맛만 느끼기 쉽상이다.



귀염둥이 이케와키 치즈루가 나온다!!

도쿄에 사는 4명의 처자들의 홀로서기 고통과 아픔을 그린 일본 영화 ‘스트로베리 쇼트케이크’는 일본판 ‘고양이를 부탁해’로 소개되며 국내에서도 젊은 여성들의 공감과 호응을 이끌어낸 좋은 작품이다. 재밌는건 일러스트레이터로 나오는 ‘토오코’ 역에 본 영화의 원작 만화의 작가인 나나난 키리코가 직접 나와 연기를 펼쳤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종영했던 모 드라마에서의 헐랭이 일러스트레이터완 달리 당 영화 속 일러스트레이터의 모습은 꽤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작곡가나 소설가 등 창작직업이 그러하듯 일러스트 작업도 고독에 익숙해져야 한다.

아이디어는 떠오르지 않는데 마감일 마저 다가오면 정신줄을 놓기 일쑤다.

일을 끝냈는데 그 다음 일이 들어오지 않으면 공황상태에 빠진다.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회사원인 치히로와 프리랜서인 토오코의 관계였다. 쳇바퀴 도는 일상과 비전없는 회사생활에 시달리며 그저 남자 한명 잘 꼬셔서 시집가려는 치히로와 프리랜서이며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토오코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치히로는 그런 토오코를 부러워한다.

“토오코 넌 그래도 좋은 편이야.
돈도 많이 벌지, 이름도 꽤 알려졌지 …
네 의견도 눈치 안보고 말할 수 있고

너는 모를거야. 나 같은 사람이 고생하고 불안하게 사는걸 …

네가 정말 부러워.”



아마 프리랜서를 하는 이들이라면 위와 같은 치히로의 말을 쉽게 들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란게 어딨겠는가. (아. 국개의원 빼고.) 불안정한 수입과 모든 문제를 홀로 헤쳐나가야 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프리랜서들이 행복하고 여유있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회사생활 힘든데 프리랜서나 해볼까?’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난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다.


‘프리랜서로 하려는 일이 정말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시작하세요. 하지만 단지 회사가 싫고 돈을 더 많이 벌 것 같아서 시작하려는 거라면  하지마세요. 다니기 싫은 회사를 다닐 때는 회사만 벗어나면 천국이었지만 하기 싫은 일을 프리랜서로 한다면 일상이 지옥이 될 테니까요.’

영진공 self_fish


“엘리펀트 (Elephant, 2003)”, 그 날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환경과는 다른 곳, 여전히 비행기로 하루의 거리를 날아가야 닿을 수 있는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고는 하지만 두 명의 고등학생이 중화기로 무장을 하고 자기가 다니던 학교 안에서 무고한 다른 이들을 사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TV에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생존자 – 그렇다! 지옥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달아난 생존자 – 들이 울부짖는 인터뷰가 전세계로 전파되었고 그곳의 각급 학교에는 공항에서나 볼 수 있는 검색대가 설치된 모습이 방영되었다. 불가능이 없는 세상에서, 언제 어디서든지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막상 그런 일이 눈 앞에 벌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경악하게 된다. 그건 정말 경악스런 일이었다.

이후로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2002)이 만들어져 그때 사건을 회상하고 설명하고 미국에 대해 주장했다. 어떤 이들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 사건을 알았고 그중에 어떤 이들은 컬럼바인 고등학교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과 미국을 이해하는 새롭고도 매우 설득력있는 시각을 얻을 수 있었다.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2003)는 <볼링 포 콜럼바인>이 보여주지 못했던 그 사건 자체를 그 날의 풍경 속에 담아 고스란히 목격할 수 있게 해준다. 그 날의 하늘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가장 보고 싶어하는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었고 땅에는 푸른 잔디와 붉은 낙옆들이 덮여 있었다. 그런 하늘과 땅 사이에 아직 미래를 알 수 없는 어리고 젊은 삶들이 자기 일상 속에 놓여 있었다. <엘리펀트>는 그런 일상의 순간 순간들을 부분적인 슬로모션으로 처리하며 강조점을 여기저기 찍어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우리가 듣고 어렴풋이 짐작 정도나 하고 있었던 그 사건 자체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준다. 그 사건의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더 계획된 일이었으며 우리가 알고 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탄환이 사용되었으며 (탄환 뿐만이 아니라 미리 설치된 폭탄까지 학교 건물 안에서 터졌던 것이었으며) 학생 식당 같은 하나의 장소에서 마구잡이식 난사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 하나를 정확히 겨냥해 저격하고 사냥함으로써 이루어진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의 가을 하늘은 여전히 높고 푸르기만 했다.

그러나 <엘리펀트>는 그 날의 사건으로 인한 전율과 공포, 충격과 고통까지 전달하려고 애쓰지는 않는다. 그런 일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와 감정을 보여야 좋은지 가르치려고 하지 않고 그런 것들을 애써 자극하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구스 반 산트가 애써 의도했던 바는 이미 일어난 그 일에 대한 하나의 시각과 하나의 반응과 하나의 의견과 하나의 주장을 솜씨 있게 피해나가는 일이었다.

세상 모두가 다 아는, 이미 일어난 사건의 전후 사정에 대해 면밀하게 조사하고 최대한 있었던 그대로를 재연하여 영화화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사건에 대해 자신의 견해와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거나 관객들에게 그 날의 충격과 공포, 고통과 슬픔을 동감하게끔 해주는 일 역시 유능한 작가라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구스 반 산트가 <엘리펀트>를 통해 하고자 했고 결국 해낸 일은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효과를 빚어내는 일이었다. 하나의 견해와 주장으로 인해 관객들이 둘로 셋으로 갈라지지 않도록, 오히려 모든 개개인이 제각각의 시각과 견해를 갖도록, 그리하여 결국엔 하나로 남아있게끔 한다.

충격? 전율? 비극? 모두 <엘리펀트> 앞에서는 홍보 문구일 뿐이다. 그 사건에 대한 표현은 될 수 있겠지만 그 사건을 다룬 이 영화, <엘리펀트>에 대한 표현으로는 걸맞지가 않다. 왜 <엘리펀트>는 스스로의 견해와 표현을 애써 회피하여 했는가? 어떤 이유로 <엘리펀트>는 정치적으로 비난을 받아 마땅한 무비판, 무견해, 무감정의 입장을 스스로 택하게 되었는가? 그러나 이런 질문에 앞서 먼저 답해져야 할 질문이 있다. 모든 사람이 이미 경악했고 누가 보아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는 설명들이 쏟아져 나온 상황에서 또 한편의 영화는 과연 어떤 식으로 만들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물어보나 마나한 ‘눈으로 보는 참조 문헌’의 하나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다시 돌이켜보기도 싫은 충격의 사건을 통해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엔터테인먼트가 되었어야 할 것인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삶에 대한 통찰의 계기를 제공하는 영화를 만들어 볼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누구도 쉽게 해설할 수 없고 오직 개인적인 질문과 답변의 연속만 가능케하는 커다른 의문 부호와 같은 영화를 선보일 수도 있는 건 아닐까.

어떻게 보면 구스 반 산트는 <엘리펀트>를 통해 몹시도 이기적인 선택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모두가 아파하는 그런 이야기를 소재로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이루어내다니! 못된 인간 같으니라구! 그러나 구스 반 산트는 최소한, 멜 깁슨이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통해 얻어낸 그런 식의 이기적인 성취는 아니었다고 본다.

ps. 실제 콜럼바인 고등학교 사건은 99년 4월 20일에 있었다. 청명한 가을 하늘과 낙옆들 위에서 일어난 일은 아니란 얘기다. <엘리펀트>가 다큐멘터리나 논픽션 드라마로 남고자 했었던 건 아니란 얘기다.

영진공 신어지

그랜토리노 (Gran Torino), 진정한 보수의 모습을 보여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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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이번 미국 아카데미 측의 최대 실수는, <그랜 토리노>(2009)를 주요부문에 단 한 개의 후보도 올리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슬럼독 밀리어네어>(2009)의 작품상 수상에 이의 없지만 <그랜 토리노>를 제치고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2009)를 후보에 올린 건 명백한 실수이며 숀 펜(<밀크>(2009))의 남우주연상 수상에 박수를 보내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탈락시키고 브래드 피트에게 후보자격을 준 건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랜 토리노>와 이 영화에서 영감님이 보여준 연기를 ‘찬양’하기 위해 쓰는 것이다.

코왈스키가 타오를 만났을 때

<그랜 토리노>에서 영감님이 맡은 역할은 한국전 참전 경험이 있는 월트 코왈스키로, 해리 칼라한(<더티 해리>(1971))이 나이를 먹으면 됐음직한 인물이다. 첫눈에 봐도 냉혹한 보수주의자의 면모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이다. 예컨대, 손녀의 배꼽티가 맘에 들지 않고 아들이 일본 자동차 회사에 근무하는 것이 불만이며 이웃이 동남아시아 출신 이민족으로 채워지는 것이 못마땅하다. 한마디로 이것이 미국의 ‘변화’된 현재라서 화가 나는 것. 그래서 코왈스키는 목숨을 걸어서라도 자신의 신념만은 지키고 싶은 심정이다. 50년 이상 근무했던 포드社의 1972년형 그랜 토리노를 오랫동안 꼭꼭 숨겨둔 모습은 과거의 미국적 가치를 지키려는 코왈스키의 상징적인 행동에 다름 아니다.

이스트우드는 <그랜 토리노>의 연출 목적에 대해 “코왈스키를 통해 미국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원래 이 영화의 배경은 시나리오 상에서 미네아폴리스였다. 이를 이스트우드가 죽어가는 자동차 산업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디트로이트로 바꿨다. “이는 수십 년 전부터 계속된 사회적 이슈였다. 그래서 영화의 내용과 잘 어울렸다. 경제는 불황을 겪고 있고 실업률은 매우 높으며 갱들은 해악을 끼치고 있다. 그만큼 범죄와 폭력은 일상이다. 그 세계에 씁쓸한 참전 군인이자 포드社 노동자 출신인 코왈스키가 살고 있다는 설정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미국의 현재에 변화를 가져온 범죄와 폭력은 코왈스키에게는 대척점에 서있는 가치다. 그것들이 자꾸 코왈스키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올수록 역설적으로 그는 또 다른 변화, 즉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모색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그 변화가 코왈스키에게 좋았던 시간으로 기억되는 과거로의 퇴행이 아닌 말 그대로 새로운 미래를 향한 전진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그랜 토리노>는 변화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코왈스키가 변화를 위해 지독한 편견을 버리고 대립각을 세우던 이웃과 융화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런데 그 대상이 흥미롭다. 코왈스키가 그렇게 혐오하는 흐멍족 이민자 소년 타오(비 뱅)다. 그가 다른 이민자와 다르다면 ‘소속감’이 부재하다는 점인데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채 부유하는 흐멍족 소년에게서 코왈스키는 올바른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시켜야 할 일종의 책임감을 느낀다. 이는 코왈스키의 보수주의자로서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부분으로 그가 이민자에게 거부감을 갖는 건 백인과는 다른 유색인종이라서가 아니라 도대체가 미국시민으로 융합할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하나의 원, 즉 커뮤니티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코왈스키의 입장이다. 안 그래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자신의 영화에서 보여준 세계는 순환하는 원과 다를 바 없었다. <체인질링>(2008)에서 보여준 1928년 LA 공권력의 거대한 부패는 2009년 현재에도 재현된 역사의 순환이었으며 <아버지의 깃발>(2007)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7)는 미군의 시각과 일본군의 시각이 개별적 존재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영화로 짝패를 이룬 하나의 세계였다. <그랜 토리노> 역시 다르지 않다. ‘구세대’ 코왈스키와 ‘신세대’ 타오가 미국의 새 역사를 모색하기 위해 손을 잡는 말 그대로 순환구조로 이뤄져있다.

코왈스키에게 현재의 그랜 토리노는 주인을 찾지 못해 운행을 중단한 미국(의 가치)이다. 그가 호시탐탐 그랜 토리노를 노리는(?) 친자식들에게, 그리고 이웃의 젊은 갱들에게 차를 넘기지 않는 건, 그러니까 정신 나간 고집쟁이 늙은이 같은 행동을 고수하는 건 그들이 미래의 미국을 이끌어나갈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는 전시물에 불과한 그랜 토리노를 타오에게 유산으로 남기는 건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백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온갖 인종이 들끓는 미국의 미래는 젊은 유색인종들에게 달렸다 해도 틀리지 않다. 하여 나의 조국 미국을 지켜야겠다는 코왈스키의 보수적 신념은 외부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아닌 교화와 융화를 통한 발전적 모색으로 변모한다. 코왈스키에게 열쇠를 물려받은 타오가 그랜 토리노를 운전하는 마지막 장면은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 미국이라는 세계의 마침표이자 출발점인 셈이다. (장례식으로 시작해 디트로이트 중심가 배경으로 영화를 마치는 것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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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가 프랭키를 만났을 때

이처럼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가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다는 의미는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는 영감님의 평소 철학과 정확히 조응한다. 그에게 ‘고전주의자‘라는 명칭이 붙은 건 기교와 감각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이야기로 영화적 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에서 기인한 바 크다. 그의 신작이 항상 전작과 비교해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10년 전, 20년 전의 작품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눈에 띄게 뚜렷해진다.

<그랜 토리노>는 코왈스키의 거친 면모 때문에 한때 <더티 해리> 시리즈의 최종판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영화를 보건데 그렇게 틀린 표현은 아니다. 다만 1970년대를 주름 잡았던 <더티 해리>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2009년 버전 해리 칼라한인 월트 코왈스키는 성난 청년에서 사려 깊은 노인으로 성장한 이른바 ‘어른의 초상’이다. <그랜 토리노>의 까칠한 코왈스키가 보여주는 즉각적이고 마초적인 행동은 그의 전부라고 하기엔 무언가 사연을 감춘 듯한 인상이 짙다. 해리 칼라한이었다면 그런 행동은 오로지 쾌락을 위한 것이지만 코왈스키에게는 이제 반성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는 코왈스키가 한국전 참전 당시 행했던 정당하지 못한 일로 심각한 내적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50여 년간 마음에 심어두었던 반성의 씨앗이 책임감이라는 신념을 통해 숭고한 희생의 열매를 맺으니 이야 말로 어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성찰이라고 할까. 한마디로, 코왈스키는 해리 칼라한이 나이를 먹어 <밀리언 달러 베이비>(2004)의 프랭키로 변모한 인물이다. 권투도장 관장 프랭키는 지금껏 여자는 단원으로 받은 적 없는 지독한 보수주의자다. 하지만 매기(힐러리 스웽크)의 가슴 아픈 가족사에 자신의 사연이 겹치며 책임감을 느껴 그녀와 팀을 이룬다는 점에서 코왈스키와 흡사한 인물인 것이다.

<그랜 토리노>를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비교하면 이 차이는 크지 않지만 <더티 해리>와 비교해 크게 느껴지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만큼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서서히 진화해왔다. 알려진 바대로,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1971)로 감독 데뷔한 그는 20년 만인 1992년 <용서받지 못한 자>로 작가의 위치에 올랐다. 이와 관련, 인상적인 인터뷰 내용이 있다. “장르영화들을 하면서도 특정한 것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낀 시간이 있었다. 나는 장르를 떠난 것이 아니라 인생의 다른 지점마다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갔다.”

이는 이스트우드의 영화 뿐 아니라 그의 캐릭터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영감님의 영화처럼 이스트우드의 캐릭터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월이라는 지혜가 쌓여갈수록 서서히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장황한 설명 필요 없이, <그랜 토리노>의 코왈스키에게는 평상시 욕을 섞어가며 허물없이 지내는 이발소 친구 마틴(존 캐롤 린치)이 등장하는데 그는 <더티 해리>에서 조디악 킬러를 연기한 인물이기도 하다. (데이빗 핀처의 <조디악>에서도 주요한 용의자로 등장하기도 했다!) 형사와 범인의 관계였던 코왈스키와 마틴이 <그랜 토리노>를 통해 죽마고우로 등장한다는 설정은 노인이 된 이들이 지금 서로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상대방에게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사려 깊은 위치에 섰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트우드 영화의 백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세월이 힘이 느껴진다는 것. <더티 해리>가 폭주하는 청년의 영화(캐릭터)였다면 <그랜 토리노>는 한발자국 물러설 줄 아는 어른의 영화(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완성형의 영화라고 말하기 꺼려지는 것은 세월이 쌓여갈수록 늘어나는 나이테의 지혜가 영감님의 영화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930년생인 그의 나이 올해로 79세. 배우로써는 은퇴일지도 모를 <그랜 토리노>지만 그는 현재 넬슨 만델라를 다룬 차기작 <휴먼 팩터>의 촬영에 들어갔다. “은퇴는 견딜 수 없습니다. 난 그저 영화를 만드는 것이 즐겁습니다. 영화를 그만 두고자 했다면 벌써 그랬겠죠. 어머니는 2년 전 97살의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만약에 내가 어머니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면 여전히 20년 가까운 창작력이 남아 있겠죠.” <그랜 토리노>는 영화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세계지만 여전히 영감님의 세계는 ‘어떤’ 완성을 향해 진화하는 중이다. <그랜 토리노>를 지금 막 보고서도 여전히 그의 차기작이 기대되는 이유다.

* 본문에 인용된 클린트 이스트우드 인터뷰는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 온라인판에 등록된 글의 일부로, <듀나의 영화게시판>에 올라온 srv님의 번역문을 부분,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영진공 나뭉

김연아, 진정한 챔피언으로 우뚝 서다.

우리에게 있어 김연아 선수는 오래 전부터 이미 챔피언이었습니만,
그녀는 오늘 있었던 세계선수권을 통해 이를 당당하고 월등하게 증명해 냈지요.

오늘 하루종일 괜히 좋아서 히히 웃다가 그냥 아무 이유없이 과연 세계의 시선은 어떨가가 궁금해졌고 그래서 미국의 중계방송을 찾아서 보았습니다.

아래 동영상은 미국 NBC에서 중계한 피겨스케이팅 월드 챔피언십 김연아 경기입니다.
여성 해설자가 예전에 5회 우승에 빛나는 미셸 콴 (Michelle Kwan)이고 남자 해설자는 Dick이라는 분인데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Dick은 연아 연기를 보면서 거의 숨이 넘어갑니다.
글고 미셸도 연아에 대해서 매우 놀라워하지요.


[ 출처: Youtube.com, http://www.youtube.com/watch?v=_-xwx-Z3ijc ]

중간에 나오는 미셸 콴의 코멘트입니다.

“She is doning so much more than she even needs to.”
“(챔피언)이 되기에 필요한 것 이상을 보여주네요 …” 라고 합니다.

그리고 말미에 나오는 코멘트 …

“To perform like that, knowing you don’t really have to, knowing you have an incredible lead, but still giving the audience … the performance.”
(미셸 콴) “저렇게 멋진 연기를 한다는 건 … 그러니까 굳이 그렇게 열심히 안해도 되는 걸 알면서, 엄청난 점수 차로 앞서고 있다는 걸 알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중들에게 최고의 연기를 제공하는 (연아입니다.)”

“Well, That’s the definiton of the champion, isn’t it?”
(캐스터) “그게 바로 진정한 챔피언의 자세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면 적어도 미국에서 연아의 입지는 이번 대회를 기점으로 명실상부한 챔피언으로서 자리잡겠네요.

그리고 오늘 경기 중계 하기 직전에 해설하는 걸 보면,
“Many of you may not seen or heard from us about Kim Yuna …”라고 소개를 하거든요.
그러니까 오늘 경기 이전에는 윤아가 자주 언급되지 않았다는 분위기를 풍기죠.

그러면서 윤아에 대해 평가를 하는데,

미셸 콴에 따르면 윤아는 세 개의 Wow-Factor(놀라운 재능)를 가지고 있다고 하네요.
1. Speed(속도) 2. Drop(점프) 3. Musical Interpretation(음악 해석력)



그리고 Dick 아저씨는 미국의 어린 스케이터들이 윤아의 점프를 보고 배워야 한다네요.

이후 모든 경기가 끝나고 결과가 나왔을 때, 현장 캐스터의 코멘트 …

“Nobody is ever seen one better …”

뭐 최상의 칭찬이죠.

그 화면도 보시죠 ^.^


[ 출처: Youtube.com, http://www.youtube.com/watch?v=f-Ear77bTOY ]
영진공 이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