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빅터스”, 내게 정복 당하지 않는 영혼 주셨음을

미국 서부영화를 상징하는 인물에서 이제는 그 존재 자체가 세계 영화사의 한 페이지가 되어버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배우로서나 감독으로서나 미국이라는 물리적, 정서적 영토로부터 크게 벗어나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이력에 비춰볼 때 일본인 배우들이 일본어로 연기했던 2차 대전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2006)는 나름의 큰 파격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같은 해에 만들어진 <아버지의 깃발>(2006)과 함께 묶이게 되면서 그 의미가 다소 퇴색되었던 감이 있습니다. 그렇게 가장 미국적인 배우이자 감독으로 남아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이번엔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를 통해서 확실하게 미국을 벗어난 다른 곳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는 넬슨 만델라가 199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 시점에서 시작되어 스프링복스라고 불리는 국가대표 럭비팀 – 인종차별 정책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 을 통해 용서와 화해, 나아가 사회 통합의 메시지를 이끌어내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만델라가 정치범으로 26년간 수감되었던 일화도 중간에 다뤄지고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특유의 기교를 부리지 않는 담담한 연출이 드라마의 사실성을 부각시키며 묵직한 감동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비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지만 남아프리카에서 있었던 최근의 일을 통해 인류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가져볼 수 있다는 점이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를 감상한 가장 큰 보람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최근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둔 국가대표 선수단과 그 주변의 일들이 겹쳐지면서 영화를 보고난 뒷맛이 그리 깔끔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스포츠를 통해 인종간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정책과 국민들의 사회 정치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하는 우민화 정책은 기껏해야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준 훌륭한 선수들에게는 마땅히 고마워해야 할 일이나 이들의 성과를 마치 자신들이 한 일인양 주둥이를 내미는 위정자들의 모습이 고까워서 영화 속 실화의 감동을 제대로 추스리지 못했다는 것이 제 솔직한 고백입니다. 실제로 올림픽 기간 동안에 이들이 한 일이라곤 “그들의 유산을 인정해주는” 바람직한 방향과는 정반대 편의 일들 뿐이었으니까요.

다른 한 편으로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기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5년 내내 기득권 세력과 불화를 겪었던 일은 결과적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통해 역사의 퇴보라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고야 말았지요.

그런 맥락에서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를 통해 보게된 넬슨 만델라의 사례는 뼈아픈 반성의 계기를 제공해줍니다. 억압과 차별, 비합리와 불평등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는 일과 마침내 새로운 역사의 발걸음을 내딛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았다는 겁니다. 새로운 방향으로 내딛게 된 발걸음이 더 나은 미래로 멀리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의의 회복과 개혁의 바탕 위에 용서와 화해의 정책 또한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정서로는 여전히 비타협입니다. 그들도 함께 가야 할 한 식구라는 의식 보다는 깨끗하게 청산하길 바라는 쪽입니다. 하지만 국가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칼같은 정리 보다는 먼저 포용을 해야만 하는 모양입니다. 영화라서 그렇게 비춰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에서의 넬슨 만델라는 솔직히 사람 같지가 않습니다. 감방에서 보낸 26년의 세월이 그를 살아있는 성인군자로 만들었던 것일까요.

어찌되었거나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는 억압받던 넬슨 만델라가 아닌 권력자가 된 이후의 넬슨 만델라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정치 권력이 지향해야 하는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스포츠를 통해서건 다른 무엇을 통해서건 통합과 번영을 추구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하는 일과 뒤에서 하는 일이 달라서는 결국 다 드러나게 되어 역풍을 맞을 수 밖에 없습니다.

넬슨 만델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 땅 위에도 윌리엄 어네스트 헨리의 시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지옥처럼 캄캄하게
나를 뒤엎은 밤의 어둠 속에서
나는 그 어떤 신이든, 신께 감사하노라
내게 정복당하지 않는 영혼 주셨음을

운명의 몽둥이에 두들겨 맞아
내 머리는 피 흘리지만 굴하지 않노라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영혼의 선장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 모건 프리먼, 맷 데이먼 (왼쪽부터)

영진공 신어지

장,단편을 아우르는 독립영화와의 데이트


#1. 금요단편극장  (4/16)

금요일밤의 짜릿한 데이트 금요단편극장에서는 언제나처럼 단편영화 세편이 상영된다. 이어 감독과의 대화 시간도 진행된다. 이번 주는 ‘新 젊은 날의 초상’ 이란 제목으로 이 시대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들이 상영된다.

옥매트를 들어라

상영작은, <옥매트를 들어라> <무료 항공권> <월세와 보증금>
장소는 낙원동 서울아트시네마, 시간은 저녁 8시, 입장료는 5000원이다.

더 자세한 소식은,

인디스토리 홈페이지
www.indiestory.com

인디스토리 네이버카페
http://cafe.naver.com/indiestory1998.cafe 
에서 확인 할 수 있다.

#2. 독립영화 쇼케이스 (4/19)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주최하는 독립영화 쇼케이스!
매달 정기적으로 열리는 행사로 독립장편영화의 극장 개봉을 실현시키고, 더 나아가 배급 확대와 관객 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이번 달부터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진행된다.
시간은 저녁 8시. 참석을 희망하는 누구든  한국독립영화협회 를 통해 신청이 가능하다.

4월 상영작은 2009년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으로 화제를 모았던 <원 나잇 스탠드> .
민용근, 이유림, 장훈 감독이 각각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밤을 연출했다. 5월 4일 개봉 예정작.

TIP. 무료초대이벤트
금요단편극장과 독립장편영화쇼케이스의 무료 초대 이벤트가 인디스토리 네이버 카페에서 진행 중이다. 마음과 시간이 허락된다면 티켓을 구입해 관람해도 좋고(금요단편극장), 이벤트에 참여해 초대권 받고 관람하는 것도 좋겠다.


영진공 애플

정체감 유형의 차이, 세상의 차이: “친구”와 “말죽거리 잔혹사”


우리에게는 누구나 정체감(Identity)이 있다. 정체감이란 결국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나는 남들과 어떻게 다른가? 나는 어디에 속해있는가? 내 역할은 무엇인가? 나는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가? 같은 질문도 역시 이 정체감에 관한 것이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보통 내 이름은 누구이고, 나는 남자이고, 심리학자이며, 사람 구경하는 것과 만화와 게임과 영화를 좋아하고, 이기적이고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을 싫어한다는 식으로 답한다. 이게 바로 내 정체성이다. 그런데 이 정체성을 찾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James Marcia라는 심리학자는 1969년과 1980년에 미국대학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로 면담을 한 결과, 자기 정체성을 찾는 방법에는 크게 네가지가 있다고 분류했다.

첫 번째 방법은 사회나 주변 사람이 자기에게 부여한 역할이나 가치관을 그냥 그대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릴적부터 부모가 가라는 학교로 진학하고, 부모가 사귀라는 친구를 사귀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부모가 지정하는 직업을 택하고, 부모가 골라주거나 부모의 심사를 통과한 배우자와 사는 사람이다. 물론 그렇게 살면서도 아무런 의심이나 후회가 없어야 한다. 이런 경우를 정체감 유실(Identity forecloser)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스스로 정체감을 형성하기 전에 이미 다 만들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방법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회나 주변에서 원하는 대로 아무 의심이나 후회없이 열심히 살지도 않는 방법이다.

주변에서 바라는 대로 살기에는 자기 생각이 너무 많지만, 그렇다고 주변의 기대를 뒤집어 엎고 자기 원하는대로 살기엔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다. 의외로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 젊은 시절에는 꿈이 있었으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다보니 결국 꿈을 접고 하찮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람들은 모두 이 유형이다. 이런 경우를 정체감 확산(Identity difused)이라고 부른다. 정체감이 한군데에 정리되어 있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있다는 뜻이다. 즉 자기의 꿈과 실제 삶이 다른 사람들이다.

세 번째 방법은 결정하거나 어디에 속하기를 미루고 이것저것 탐색을 하는 방법이다.

학교를 휴학하고 여행을 간다거나, 여기저기에 파트타임으로만 일을 하고(단 자기가 원해서) 정규직을 갖기를 피한다거나, 연애는 여러번 하는데 누구와 정착하기는 미룬다거나 하는 사람들이다. 믿을 수 없겠지만 이것도 정체감 유형중의 하나로 정체감 유예(Moratorium)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이건 결국 뭐든 일단 미루고 보겠다는 방식이다.

마지막 방법은 사회나 주변사람의 기대를 배신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버리고 스스로 인생의 가치를 찾고 갈 길을 추구하는 유형이다.

이런 유형을 정체감 성취(Identity Achieved)라고 부른다. 가장 이상적인 유형 같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렇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남들 하지 않는 짓을 하는 모난 돌에 해당하기 때문에 정을 많이 맞는다. 즉 고난이 많다는 거다. 그래서 스트레스도 많고, 알콜중독도 많고 속버리고 심장이 고장난 사람도 많다. 물론 용기와 능력을 바탕으로 성공한 사람도 있다. 이렇게 성공한 사람들은 스스로 성공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이 중 어떤 방법이 정체감을 찾는 가장 좋은 방법일까?
그 대답은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만약 우리가 사는 사회의 질서와 가치체계가 한동안 계속 유지된다면, 정체감 유실이 최선이다. 부모가 살았던 시대와 내가 살았던 시대가 같은 규칙에 의해서 움직인다면, 이미 한번 살아본 부모의 말을 듣는게 최선이란 말이다.

뭐, 꼴에 사춘기라고 생각이 너무 많아서 시키는대로 하기엔 마음이 따라주지 못하는 사람은 최소한 정체감 유실이라도 해주는게 편하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더라도 몸은 주어진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의 정체감 성취가 제일 좋을 것 같지만 그건 이론적으로나 그럴 뿐이다.

하지만 세상이 조금씩 바뀌고 있어서 10년이나 20년 후에는 전혀 다른 식으로 사는 사람이 더 성공한다면, 정체감 유실이나 확산은 최악의 선택이다. 왜냐하면 부모나 선배들의 생각은 가장 현실성이 떨어지게 되니까.

오락실에서만 게임을 할 수 있던 시절을 경험한 부모가 프로게이머 같은 삶을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제작비 1억원 시대의 영화판 만을 경험한 사람들이 평균 제작비 30억원 이상의 영화판의 룰에 적응할 수 있겟는가. 이전과는 다른 룰이 지배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어쨌든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남이 하지 않았던 길을 가는 것이 그나마 성공할 확률이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누구에겐가 의지해서 남의 가치관을 따라서 살고 싶어한다. 나 스스로 독립해서 험난한 삶을 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건 너무 불안하기 때문이다.

영화 『친구』에서 상택이가 선택한 것도 결국 정체감 확산의 삶이었다.

이 영화에서 신기한 건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은 결국 상택(서태화) 이지만, 그 이야기 속에 상택이 자신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준석(유오성)이와 동수(장동건)다.

언제나 준석이가 뭘 했고, 동수가 뭘 했는지에 대해서만 말한다. 상택이 본인의 이야기는 그 인생을 갈라놓은 극장 사건 빼놓고는 거의 없다. 심지어 자기가 무슨 공부를 하러 유학을 가는지 돌아와서는 어떻게 되었는지 조차도 말하지 않는다.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상택이는 자신의 삶이 아니라 준석이와 동수의 삶을 꿈꾸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범생이 이야기꾼은 오직 마음 속에만 그런 꿈을 담아두고 몸은 부모와 주변에서 기대하는 학삐리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사실, 1960-70년대 당시를 살았던 세대는 거의다 이런 선택을 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저기 먼 곳에 파랑새가 날아다녀도 결국 꿀꿀하고 칙칙한 현실과 살아야 했다.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 다른 삶을 살기는 두려웠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택이의 선택이 가장 옳았다. 준석이도 동수도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걸 생각해보라.

오히려 자기에게 주어진 가업인 장의사도 버리고 부모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찾아갔던, 정체감 성취에 제일 가까웠던 동수는 수십방의 칼침을 맞고 죽어버린다. “좋건 싫건 시키는 대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크게 고생한다.” 그게 당시의 규칙이었다.

자아감 성취를 향하던 동수

그런데 한 10년 후를 배경으로 한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는 다른 정체감 유형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주인공인 현수(권상우)는 상택이처럼 우식(이정진)이의 행동을 관찰하고 부러워할 뿐이다. 현수는 반에서 우식이의 위치는 별로 원치 않지만 은주(한가인)를 차지하는 모습만은 뼈저리게 원한다. “내가 아주 힘들게 이루려 했던 걸, 녀석은 너무 쉽게 얻었다.” 라는 말은 현수의 심정을 정확하게 대변한다.

그런데 영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다음에 현수는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변신을 한다. 존재감 없는 범생이에서 학교 사상 최고의 폭력사건의 주인공으로 말이다.

그 변신이 너무 극적이라 설득력이 없다는 평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니다. 어쨌건 현수는 운동신경도 좋았고 집요한 열성파였기 때문이다. 그 집요함을 싸움 준비로 방향만 조금 바꾸면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현수의 정체감은 최소한 유실이나 확산의 유형을 벗어나 버렸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정체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반항했다. 그런 면에서 내가 지금까지 본 한국영화의 주인공 중에서 범생이 출신으로 정체감 성취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녀석이 현수다. 나중에 정말 그가 정체감 성취를 이루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근데 현수의 이 반항은 『친구』에서처럼 처절한 처벌을 받지는 않는다. 그저 퇴학을 당하고 재수를 하는 삶이 주어졌을 뿐이다.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인 세상에서 그 정도라면 처벌도 아니다.

어떻게 이런 차이가 생겨났을까?

그 이유는 결국 시대의 차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세상이 『친구』 시절보다는 조금 느슨해지고, 이전의 룰이 먹히지 않는 새로운 시대가 찾아왔기 때문에 현수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어쩌면 지금 우리가 가야 할 삶인지도 모른다. 무조건 편안히 기댈 대상이나 가치관이 사라지고 모든 것을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삶 말이다. 그건 자유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아주 고달픈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시대에도 자유가 무조건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자유의 무게를 짊어지고 스스로 노력할 용기가 있는 자들에게만, 그것도 아주 가끔씩만 행복이 찾아올 뿐이다.



영진공 짱가

 

“크레이지 하트”, 음악은 드라마의 디테일을 채워준다


제프 브리지스에게 올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석권하게 해준 작품. 그간의 연기와 비교할 때 특별히 <크레이지 하트>에서의 연기가 아주 각별했다기 보다는 연기자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연기자의 삶을 살아온 공로상의 의미가 덧붙여진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기존의 작품들에서와 달리 제프 브리지스가 직접 컨트리 음악을 노래하고 기타 연주까지 해내고 있는 부분은 그간에 보여준 연기의 지평을 한 단계 넘어선 것이 맞긴 하다. <사랑의 행로>(1989)에 서 재즈 피아니스트로 등장해 음악적 재능을 보여준 일이 있긴 하지만 이번 <크레이지 하트>는 영화 시작부터 거의 깜놀 수준의 연주 실력을 자랑한다. 후배 가수로 출연하는 콜린 파렐 만큼은 립싱크겠거니 했는데 확인해보니 브리지스와 마찬가지로 직접 부른 노래란다.

듣던대로 <더 레슬러>(2008)와 비슷한 점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프로 레슬러와 컨트리 가수라는 차이가 있을 뿐, 인생 내리막길을 내려가던 중에 마지막 전환점을 맞이한다는 설정은 거의 판박이에 가깝다. 하지만 <더 레슬러>가 그 전환점에서 자기 존재 증명을 위해 몸을 날리며 마무리되었던 것과 달리 – 전환점이라기 보다는 막다른 길로 묘사된 쪽에 가깝긴 하지만 – <크레이지 하트>는 좀 더 현실적인 계기를 통해 갱생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사실 드라마의 극적인 구성이나 확장 해석을 가능케 하는 상징성을 따지자면 <더 레슬러>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1995) 에 비해 밋밋한 편이지만 그 대신 <크레이지 하트>는 드라마의 디테일을 상당 부분 음악으로 대신 채워넣으며 명실공히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음악 영화로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 첫 장면에서 덥수룩한 수염과 머리를 기르고 너부대대해진 몸집으로 볼링장에 들어서는 제프 브리지스는 <위대한 레보스키>(1998)에서의 “더 듀드”를 연상케 한다. 코엔 형제의 필모에서나 제프 브리지스의 연기 이력에서 모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

– 화려하진 못해도 오직 음악만으로도 그럭저럭 생계 유지가 가능한 미국은 역시 부러운 나라다. 물론 극중의 배드 블레이크(제프 브리지스)는 그 이상의 재능을 가진 뮤지션으로 나온다.

– 매기 질렌할은 이제껏 본 중에 가장 풍성한 매력을 과시한다. 질렌할에게는 까칠한 성격의 히피 말고도 얼마든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작품.

영진공 신어지

이창동과 윤정희, 거장의 필체와 선택

이창동 감독과 윤정희 그리고 ‘시’ . 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다.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이창동감독 작품에 대한
무한 신뢰가 바탕이 되었겠지만 웬일인지 1960년대 대활약 한, 이제는 노인이 된 배우 윤정희에게도 깊은 호감이 간다.

윤정희는 배우로서의 자긍심과 학업에 대한 열정으로 지적이고 성실한 배우의 지위를 구축했다.
<안개> <분례기> <석화촌> 등 작품 선정에도 워낙 신중하여 그녀의 출연작은 한국영화의 맥을
잇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 1970년대 초반까지 활동을 유지하던 윤정희는 1973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영화사
‘196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 중에)

여배우의 삶을 쉽사리 논할 순 없겠다. 다만 여성으로서 자신의 분야에 자긍심을 갖고 한결 몰입하는 것이 특히 이 땅에서
얼마나 힘든 일인가 대충 가늠해 본다.

대중의 인기(인정)를 한 몸에 받는 위치에서 학업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는데 또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녀 스스로
어떤 그릇이 되고자 큰 줄기의 빛이 반짝였을 그때에 감히 유학길에 올랐을까. 그리고 <시>로 다시 펼쳐 보이는 연기는
어떤 색일까.

나는 윤정희라는 배우가 실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내가 알 수 있는 건 <시>를 통해 볼 그녀의
연기, 눈빛, 어쩌면 연륜까지가 전부 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에게 내 미래를 비춰보고자 함은 <시>의 기회가 비단
거저 온 것은 아닐 거라는 예감 때문이다. 누구보다 깊게 자신을 들여다보고 비우고 채우는 삶이 있진 않았을까. 자신의 분야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숨은 노력을
깃들이진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노년에 더욱 빛나는 여성의 모습을 <시>를 통해 입증해 주진 않을까.

<시>의 정갈한 타이틀 로고는 이창동감독의 필체다. 아직 못 봤지만 웬일인지 영화와 꼭 맞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더해 주인공 윤정희의 캐스팅 또한 이창동 감독의 탁월한 선택이기를 바라본다.

영진공 애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