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그 노래] “오블리비언”, A Whiter Shade of Pale

 

 


 


 



 


 


2013년 개봉작 “오블리비언”은 제작, 각색, 감독을 맡은 조셉 코신스키의 자작 동명 그래픽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그리고 오블리비언(Oblivion)은 망각을 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톰 크루즈, 모건 프리먼, 올가 쿠릴렌코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냥 킬링타임용 영화라고 보면 되겠다. 그동안 수도 없이 보아왔던 스토리 라인과 그저 평범한 비쥬얼 그리고 누가 봐도 뻔히 알 수 있는 반전까지 …


 


그래도 나름 시원한 화면과 비행장면의 다이나믹함은 볼만했고, 뻔한 스토리를 매끄럽게 이어나가는 연출력도 괜찮긴 하다.


 


암튼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잭 하퍼와 줄리아가 숲 속 오두막에서 서로의 사랑을 되짚어 나가는 장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있는데, 그 노래가 바로 1967년에 나온 Procol Harum의 “A Whiter Shade of Pale”이다.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오르간과 함께 바하 스타일의 멜로디로 전개되는 이 노래는,


허나 가사를 들여다보면 좀 뜨악해진다. 이게 뭔 소린가 싶어서 … 아마 그래서 이 노래를 삽입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


 


일단 들어나 보자, 그 노래.


 


 



 





 



We skipped the light fandango
turned cartwheels ‘cross the floor
I was feeling kinda seasick
but the crowd called out for more
The room was humming harder
as the ceiling flew away


When we called out for another drink
the waiter brought a tray


팬댕고 커플댄스를 폴짝폴짝 뛰고,


객석을 가로질러 물구나무서서 구르기를 하였네,


배멀미가 느껴졌지만,


관객들은 더하라고 조르네,


천정이 날라가 버릴듯이,


방 안은 웅성거림으로 가득하네,


우리가 술을 더 달라고 하자,


웨이터는 술수레를 끌고 오네,  


 

And so it was that later
as the miller told his tale
that her face, at first just ghostly,
turned a whiter shade of pale


그리고나서 얼마 후,


밀러(옛 이야기에 나오는 주정뱅이)가 설화를 이야기할때,


그녀의 얼굴은 마치 귀신을 보기나 한 것처럼,


창백한 하얀 빛으로 변했지, 


 

She said, ‘There is no reason
and the truth is plain to see.’
But I wandered through my playing cards
and would not let her be
one of sixteen vestal virgins
who were leaving for the coast
and although my eyes were open
they might have just as well’ve been closed


그녀는 말했어,

“이유 따위는 없어, 진실은 보이는 그대로인 거야”

하지만 나는 카드놀이에 빠져서,

그녀가, 바다로 떠나는 열 여섯 베스탈 버진(그리스 신화에 나옴) 처럼,

떠나도록 놔두질 않았지,

내 눈은 크게 뜨여있었지만,

사실 그냥 감겨져있는 거나 다름 없었어,

 

She said, ‘I’m home on shore leave,’
though in truth we were at sea
so I took her by the looking glass
and forced her to agree
saying, ‘You must be the mermaid
who took Neptune for a ride.’
But she smiled at me so sadly
that my anger straightway died


그녀는 또 말했지, “난 상륙허가를 받아서 집에 와 있어”,


하지만 실은 우리 모두 바다에 있었지,


그래서 나는 그녀를 전망경으로 데리고 가서는,


이걸 깨닫도록 했지,


“너는 인어란 말야, 넵튠(바다의 신)이 사랑하는 …”


허나 그녀는 너무도 슬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의 분노는 바로 사그라 들었어,


 


If music be the food of love
then laughter is its queen
and likewise if behind is in front
then dirt in truth is clean
My mouth by then like cardboard
seemed to slip straight through my head
So we crash-dived straightway quickly
and attacked the ocean bed


음악이 사랑의 양식이라면,


웃음은 사랑의 여왕이지,


그런 전차로 뒷쪽이 앞이 되면,


더러움은 사실 청결함이지,


그 무렵 나의 입은 마치 골판지처럼,


내 머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네,


그래서 우리는 급히 탈출 다이빙을 실시하였고,


바다 밑바닥을 공격하였네,


 


 


 


솔직히 뭔 소린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노래의 가사는 영어가 원어인 영국, 미국에서도 … 이게 도대체 뭔 얘기인가 하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 중 다수를 차지하는 의견은 … Lucy in the Sky with Diamond처럼 분명히 약 빤 기분을 의미하는 거다 … 라고들 한다.


 


그게 맞는지 아닌지는 작사가가 알고 있겠지만, 그는 당연히 … 전혀 그런 거 아니다, 그냥 있는대로 받아 들여달라라고만 한다.


 


이 정도에서 오늘의 포스팅을 마무리하면서 A Whiter Shade of Pale 얘기할 때면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바하 옹 최고의 히트곡 중 하나를 들어보도록 하자.


 


그럼 즐감~ ^^


 


 



영진공 이규훈


 


 


 


 


 


 


 


 


 


 


 


 


 


 


 


 


 


 


 


 


 


 


 


 


 


 


 


 


 



 

“용서받지 못한 자”, 서부극판 수퍼 영웅 진지 버전





클린트 이스트우드, 참 대단한 양반이다. 참으로 오랜 세월 꾸준히 영화에 몸 담은 그는 언제나 일정수준의 완성도를 유지해왔다. 그러다가 남들은 다 은퇴를 생각할 시점인 63세에 첫 아카데미를, 그리고 남들은 요양원을 알아 볼 나이인 76세에 두 번째로 아카데미를 쓸어갔다.

근데 그에 대한 찬사들이 조금은 이상할 때도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모두들 ‘작품’ 으로 인정해마지 않던 그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1992)를 봤을 때부터 였다. 수정주의 서부극이네 새로운 히어로의 탄생이네 등등으로 불리던 이 영화는 내가 봤을 때는 그냥 마블코믹스 같았기 때문이다.

영화 줄거리는 다들 아실 거다. 술도 팔고 몸도 파는 윤락업소에 카우보이 몇이 향락을 즐기러 왔다가 자신의 작은 물건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한 윤락여성에게 분노를 폭발시켜 그만 그 여성의 생활밑천이자 자아개념의 상징이랄 수 있는 얼굴을 망가트리고 마는데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뭐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한 보안관의 조치로 카우보이들은 그냥 풀려나고, 이에 분노한 피해 윤락여성의 동료들이 돈을 모아서 킬러를 고용하기에 이르고. 드디어 은퇴한 왕년의 킬러 이스트우드 아재가 등장한다.

근데 아무리 봐도 빌빌거리는 이 아재는 전혀 킬러 같지가 않다. 소심하기 그지없는 데다 동작은 굼뜨고 총도 제대로 못쏜다. 여차저차 예전 동료 “모건 프리먼”(그러고 보니 이것도 묘한 인연이다. 이 둘이 같이 등장하면 아카데미를 먹는 건가?)과 킬러지망생 한명과 팀을 이루어 카우보이 마을에 잠입하는데, 여전히 빌빌대다 보안관에게 뚜드려 맞고 병을 얻어 드러눕는 등 한심한 꼴은 골고루 보인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 카우보이 둘을 죽이는데는 성공한다만, 그때까지도 이스트우드 아재는 총도 제대로 못 쏘고 빌빌거린다. 그런데 그만 귀환 길에 동료 “모건 프리먼”이 보안관에게 잡혀 죽으면서 갑자기 대반전이 일어난다 ……

동료의 죽음에 열받은 이스트우드 아저씨가 그동안 입에 대지 않던 위스키 병나발을 불어 제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마카로니 웨스턴 시절의 이스트우드로 변신해서 술집에 쳐들어가 보안관일당을 싹쓸이 해버리고 만다.





그가 예전에 킬러로서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웅얼거렸던 것은 진실이었다. 그는 술마시고 필름이 끊겨야 진정한 킬러로 변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는 위스키만 병나발 불면 천하무적으로 변신하는 수퍼 영웅이었던 것이다!!!

이게 수정주의 서부극이라고? 내 보기엔 방사능 대신에 위스키가 그 역할을 하는 서부극판 마블 코믹스 영웅이야기거나, 좀더 잘 봐줘서 M. 나이트 샤말란의 영화 “언브레이커블”처럼 수퍼영웅 만화의 진지한 영화 버전인데?

그의 영화에서 기본 스토리만 떼어놓고 보면 다들 이런 식이다. 아주 단순한 신파이거나, 만화이거나 … 그의 이야기틀은 “더티해리”와 “황야의 무법자”같은 만화와 “건틀렛” 같은 신파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도 줄거리만 보자면 정말 전형적인 신파극이 아니던가 ……

문제는 그 이야기에 독특한 분위기를 입히는 그만의 관록과 아우라이다. 그 아우라는 조금만 도를 넘어 섰다간 유치한 똥폼이 되었을 것이고, 조금만 부족했다간 황당하거나 뻔한 스토리의 골격을 드러내고 말았을텐데, 바로 그 중간지점에서 절묘한 균형을 유지한다.

그런 면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은 관록과 아우라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며, 적절히 사용되었을 때 그것이 발휘하는 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똥폼이 정말 잘 숙성되면 이렇게 대단한 아우라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고 말이다.

여튼 그처럼 늙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



영진공 짱가

“밀리언 달러 베이비”, 꿈이 없는 사람은 꿈을 가진 사람을 알아 본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은 이런 말을 한다. “이제 나는 무슨 낙으로 살죠?”
그래, 인생에 낙이 없으면 뭐하고 살지? 각자의 대답이야 다르겠지만 극 중에서 이우진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예전의 “이산가족 상봉”이나 “꼭 한번 만나고 싶다”를 보다 보면 거기 나오는 어르신들이 이런 말씀을 하신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그런 건가? 더 사시면서 행복을 누리고 싶다고 하는 건 너무 욕심인 건가.

“매기(Maggie Fitzgerald)”는 서른 두 살이 되었다. 집안이 넉넉하지도 않고 그다지 뛰어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살아온 그녀이지만 그래도 그녀에겐 꿈이 있다.

그래서 그녀는 손님이 남긴 고기를 몰래 집으로 싸가지고 가 허기를 때우면서라도 자기의 꿈을 위해 돈을 모았고, 아무리 무시를 당해도 자기의 꿈을 이루어주리라 믿는 이를 계속 찾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버스 안에서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참으로 해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에디(Eddie “Scrap-Iron” Dupris)”는 퇴물복서다. 한때는 잘 나갔지만 이제는 복서시절의 상처로 한쪽 눈이 먼 채 체육관 청소를 하면서 산다. 잘 곳도 없고 의지할 데도 없어서 체육관 한 켠에서 생활하면서 그렇게 산다. 그에겐 꿈이 없다, 아니 꿈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에겐 낙이 있고 여한도 있다.

그의 낙은 꿈이 있는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고, 그들에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의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겐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마지막 경기를 해보고 싶다는,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한이 있다. 그래서 그는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에디”는 “매기”를 알아본다. 자기에겐 없는 꿈을 가지고 있기에 그는 그녀의 존재감을 금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도움을 주고자 애쓴다. 그게 그의 낙이니까.

“매기”는 그저 앞을 향해 뛰어갈 뿐이다. 꿈을 좇아 뛰는 그녀에겐 그 꿈을 이루고 나면 다시 무엇을 좇아야 하는지, 꿈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떡해야 하는지 등의 고민은 없다. 꿈을 이루려면 뛰어야 하고 그렇게 뛰는 게 즐거울 따름이니까.

그렇게 “매기”는 꿈을 이룬다. 딱히 그녀가 원했던 모든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자기의 삶에 그만큼이라도 찾아와주었다는 것에 감사한다. 하지만 그 꿈은 대가를 요구했고 그녀는 그걸 치러야 했다.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도, 아니 남으로 하여금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면서 그녀의 꿈보다 더 크고 탐스런 걸 얻는 이도 많지만 “매기”는 그런 건 크게 억울해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의 꿈은 내 것이고 나는 그걸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거니까.

“에디”는 “매기”가 꿈을 이뤘다는 걸 안다. 대가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꿈을 못 이룬 그이기에 그녀가 이룬 꿈을 알아본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꿈을 이룬 대가로 더 이상은 꿈을 갖지 못하게 되었기에 “에디”는 그런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할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낙도 없고 여한도 없는 그녀가 어떻게 살아갈지 그는 알아채는 것이다.

지금 당장 누군가가 “당신은 무슨 낙으로 사는가?”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무런 답을 적지 못할 것이다. 언제쯤 그 답을 적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고 나오던 나의 등 뒤에서 어느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정말 재미 없다. 너무 실망이야 …”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한편 그 분이 부럽기도 하였다. 그 분은 아마도 아직 삶 속에서 쓰라린 아픔이나 꿈의 절실함을 경험해 보지 않았으리라 제멋대로 생각하고 그래서 이 영화가 그닥 감동적이지도 재미있지도 않게 느껴졌으리라 내멋대로 해석해서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부러워하면서 걸어 나오던 내 머리 속에는 내내 “매기”가 버스 안에서 짓던 미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꿈을 바라보며 아무런 꾸밈없이 해맑게 웃는 그 미소가.

영진공 이규훈

“밀리언 달러 베이비”와 아이리쉬 코드들




미국에서 소수인종학을 가르치고 있는 일레인 김이라는 훌륭한 학자가 썼던 글이, 나의 뿌리,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서 민족주의로 결론을 맺는 걸 보고 허걱!한 적이 있는데, 생각해 보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그 미국 땅에서 원래부터 기득권인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는 굳이 민족의식, 자신의 뿌리를 얘기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인종과 민족이 섞이고 여러 혈통이 섞인다 해도, 사람 사는 동네라는 게 대체적으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동네를 이루고 결혼하고 사는 경우가 많고, 그 동네별 출신별 특성이란 게 결국 나오는 법이다.
게다가 고난과 차별을 당하고, 한이 많을 수밖에 없고, 그 나라의 가장 밑바닥을 지탱하는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긍지와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뿌리를 찾는 작업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신뢰와 사랑으로 뭉친 유사 가족이 피로 이어진 전통적인 가족을 대체해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절망 속에서도 꿈을 찾는 사람들이 나누는 최고의 우정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도 하다. ‘여성 복싱’이라는 흔치 않은 소재를 진부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플롯에서 풀어내지만, 매끈하게 잘 만든 영화이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노인의 지혜와 따스한 사랑이 곳곳에 배어있을 뿐 아니라 이를 적절하게 표현해내는 훌륭한 테크닉까지.

하지만 이 영화는 미국 내, 그리고 유럽 전역에서 그토록 오랜 고난과 한을 쌓아온 아일랜드계, 즉 아이리시들의 주체성이나 긍지 같은 걸 확인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글은 이 영화에서 나오는 아이리시 코드를 살펴보고, 우리가 접해온 수많은 다른 영화들의 아이리시 코드를 잠깐 디벼보기 위해 쓰는 글이다.

1.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드러나는 아이리쉬 코드들

먼저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모태가 된 책, “불타는 로프(Rope Burns: Stories from the Corner)”를 쓴 F.X.툴은 아일랜드인이다. 당연히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역할을 맡은 영화의 주인공 프랭키 던 역시 아일랜드 계통. 그는 스크랩(“모건 프리먼”)의 퉁박에도 불구하고 계속 게일어(아일랜드 전통어)를 들여다보고, 게일어로 된 가장 아름다운 시를 쓴 시인 예이츠의 시를 즐겨읽는다.

미국식으로 퓨전화된 레몬파이가 아니라, (정통 아일랜드 식의) ‘수제’ 레몬파이를 먹는 게 인생의 낙이었기도 하고. (매기와 함께 레몬파이를 먹고나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까지 말하는 건 먹는 것 갖고 오버한 거라기보다는 그런 향수를 표현한 것일 게다.) 그리고 … 매기 역시 아이리시다. 미국인 이름들 중 ‘오하라 O’hara’나 ‘맥도날드 McDonald’, ’피츠제럴드 Fitzgerald’처럼 O’나 Mc, Fitz로 시작되는 라스트 네임은 그가 아일랜드 계통임을 보여주는 징표다. (원래 “~의 아들”이란 뜻.)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알다시피, 프랭키가 매기에게 선사하는 ‘모쿠슈라(Mo Cuishle)’라는 말은 게일어, 즉 아일랜드어인데, 이 이름이 새겨진 가운을 처음 입고 등장한 경기 장면에서, 그녀의 등판의 글자를 보고 관객들이 호들갑을 떨며 반응하던 것을 기억하는가? “등판에 글씨 봤어?” 사람들이 이렇게 호들갑을 떨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지 신기하고 특이한 이름이어서가 아니다. 그 이름이 바로, “나는 자랑스러운 아일랜드인”이라는 선언문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녀가 처음 그 이름을 걸고 나선 그 경기가 바로 영국땅에서 벌어진 영국 챔피언과 싸우는 경기였기 때문에 아이리쉬 관중들에겐 더욱 특별한 의미가 됐던 것이다.

아일랜드인 소설 원작자가 굳이 모쿠슈라의 첫 경기장으로 영국을 택한 것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다른 유럽 원정경기를 생략한 채 이 장면을 스크린에 담은 것도,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모쿠슈라의 가운 색, 초록색은 아이리쉬의 최대 명절인 성 패트릭 데이의 상징색이다.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인이며, 그 날을 기념하는 성 패트릭 데이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초록색과 네잎 클로버이다. 그냥 초록색이면 우연한 선택일 수 있지만, 게일어로 된 별명이 새겨진 초록색 가운은, 그냥 초록 가운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아이리시를 상징하는 가운인 것이다.



이후 경기장마다 모쿠슈라를 환호하는 사람들은, 그저 권투 잘 하는 선수 하나를 응원하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랑스러운 아이리쉬의 전통을 내걸고 아이리쉬의 긍지와 주체성을 전면에 표현한 자신들의 대표주자를 응원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헤비급이건 뭐건 미국에서 차례대로 선수들을 이기는 어떤 황인선수가 영어로 된 이름이나 단어가 아닌 한글로 “내 사랑”이라고 쓴, 청색과 붉은 색이 섞인 가운을 입고 매 경기에 출전한다면, 그리하여 첫회 KO승으로 연승을 거둔다면, 미국 내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밑바닥 한국 출신 미국인들에게 과연 어떤 긍지와 자부심을 줄지 말이다.

어쩌면 매기가 웰터급 타이틀전에서 다 이긴 게임에서 결국 상대의 반칙으로 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아일랜드라는 나라의 고단하고 한 많은 역사와 연결지어 생각해 본다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2. 다양한 영화들에서 드러나는 고난과 한의 이름, 아이리쉬

원래 영국 본토에서 살고 있던 토박이들은 켈트인(혹은 셀트인)들이다. 아이리쉬의 선조들. 하지만 이 땅에 앵글로-색슨 족이 들어오면서 땅을 두고 싸우게 되고, 결국 켈트인들은 계속해서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역사적 저항과 반발심이 만들어낸 켈트 영웅이 바로 아더왕이다. 작년에 개봉한 “클라이브 오언”의 『킹 아서』은 바로 이 시기를 신화나 전설이 아닌 역사적인 이야기로 구성해 보여주고 있다. 아더를 비롯해 갤러해드, 랜슬롯 등의 원탁의 기사들과 귀네비어가 모두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은 켈트인들, 그것도 여러 핏줄이 섞이기 이전의 켈트인들이기 때문이다.

영국 본토에서 주도권을 차지한 앵글로-색슨 족은 일찌감치 왕조를 열었고, 켈트인들은 잉글랜드로 흡수되거나 소규모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되고 또 지금의 아일랜드 지역에 모여살게 되는데, 특히 지금의 아일랜드 지역은 지리적 특성상 자신들의 문화를 강하게 보존해오게 된다. 영국은 잉글랜드를 기반으로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까지 합병해 브리튼 제국을 경영하게 된다. 노르만인이 앵글로-색슨 왕조를 접수한 이후에도, 아일랜드는 영국 왕에 따라 때로는 브리튼 왕의 간섭을 받는 자치 왕(종주왕) 하에 자치를 하기도, 영국 본토의 직접 통치를 받기도 했지만, 결코 독립을 위한 봉기를 멈춰본 적이 없다. 결정적으로, 영국 왕이 국교를 영국 국교로 전환하고 난 후에도 아일랜드인들은 카톨릭을 고수한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영국인 대다수에겐 위대한 왕일지 모르지만, 아일랜드인들에게는 착취와 차별과 직접통치, 그리고 개종을 강요한 왕인 것이다.

1800년에 아일랜드가 법적으로 대영제국에 통합된 이후 아일랜드의 독립운동은 더욱 거세졌으며, 결국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을 이루어내어 아일랜드 공화국(그 이전은 에이레, 수도는 더블린)을 성립하긴 하지만, 이것은 아일랜드 섬의 일부일 뿐이다. 여전히 독립 자치국이 아닌 영국령으로 있던 북아일랜드에는 영국이 잉글랜드의 본토인들을 역사적으로 계속 이주시켜 잉글랜드인과 아일랜드인들이 혼재되어 있었고, 독립을 외치는 아일랜드인과 영국령에 속하기를 원하는 잉글랜드인 사이에 여러 모로 민족 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남-북 아일랜드 통일을 주장하는 무장단체 IRA와 영국 왕실을 지지하는 잉글랜드인들 사이의 반목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아일랜드 분쟁’의 배경인 것이다.

우리가 ‘피의 일요일’이라 알고 있는 사건 – 영화 『블러디 선데이』, U2의 노래 “Sunday Bloody Sunday” 등 – 역시,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아일랜드인들을 향해 영국 군대가 총칼로 진압한 사건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더 복서』 등을 감독한 “짐 쉐리단”의 일련의 작품들이나 “테리 조지” 감독의 『어느 어머니의 아들』은, 바로 이러한 긴장 속에서 아이리시들이 부당하게 받은 탄압을 고발하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형편이니 과연 아일랜드 사람들의 박탈감이 어떻겠는가. 영국 본토에 의해 계속 착취당하고 억압받고, 계속 독립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더욱 영국 본토에서 아무리 개발과 발전이 이루어진다 한들 아일랜드는 여전히 못 살고 가난한 동네에 불과할 뿐이다. 영국 내에서도 변방에 변방일 수밖에 없는. “알란 파커”감독의 전설적인 음악영화 『코미트먼트』의 주인공들은 바로 음악을 통해 삶의 희망을 갖고자 하는 아이리시 청년들이며, 이 영화에서 “아일랜드인은 유럽의 흑인이다”라는 대사까지 나오는 건 이유가 있는 것이다. IRA, 즉 북아일랜드 독립을 위한 무장단체가 무장 투쟁하는 것 역시 (그들의 방식에 대한 찬반은 논외로 치더라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의외로 IRA가 등장하는 굉장히 많은 영화를 보아왔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매기가 아버지와 갔던 곳이라며 프랭키를 데려가는 파이집 이름이 바로 IRA ROADSIDE DINER이다. IRA는 ‘아이라’라는 여성 이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IRA일 수도 있는 것이다. “존 부어맨” 감독의 『제너럴』은 어떨까?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바로 더블린이다. 바로 아일린드 공화국의 수도. 『제너럴』의 영어가 도통 알아먹기 힘든 영어인 것은, 아이리시의 ‘사투리 영어’이기 때문이다. ‘장군’이라 불리던 도둑왕 마틴 카힐이 총을 맞는 것은 IRA한테서인데, 그가 아일랜드의 보물격인 명화들을 바로 왕당파 – 즉 영국 왕실을 지지하는 – 에게 팔아먹었기 때문이다.

“닐 조단” 감독의 경우,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헌신한 아이리시 영웅 마이클 콜린즈에 관해 만든 영화가 바로 “리암 니슨”이 열연한 『마이클 콜린즈』. 『크라잉 게임』은 좀 별난 로맨스가 아니라, 사실 매우 정치적인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 영화다. 우리의 주인공 스테판 리가 바로 IRA의 일원이며, 그가 억류했던 영국인 병사인 포레스트 휘태커는, 정통 앵글로-색슨인이 아니라 흑인이다. 그리고 그를 통해 만나게 되는 제이드 데이비슨은 흑인 혼혈에 트랜스젠더. 이쯤 되면 이 영화는 결국 정치적인 거대담론 때문에 정작 싸우고 죽이고 죽는 건 소수자들끼리일 수밖에 없는 모순을, 사랑을 통해 화해를 시도하는 영화가 아닌가 해석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 미국으로 가보자. 아일랜드인들이 대거 미국땅에 발을 딛는 건 19세기 발생한 감자기근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아일랜드인들은 미국행을 택하기도, 영국행을 택하기도 했지만, 영국으로 갔던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정부에 의해 미국행을 강요받았다. 이 결과 이 시기에 대규모 아이리시의 미국 이민이 이루어진다. 고국에서 재산깨나 가지고 있었던 이들이야 새로운 신천지 미국땅에서 새로운 농장을 일구며 부를 축적하지만, 대다수의 가난한 이들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건 당연한 일. 아마도 아일랜드 이민사에 대해서는 “톰 크루즈” 주연의 『파 앤 어웨이』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리시들은 미국에 막 이민왔던 당시 ‘흑인 금지’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인 금지’ 팻말의 차별을 당했다고 한다. 인종차별은 언제나 가난과 함께 심화되는 법. 그렇기에 그런 삶은 소방관이나 경찰처럼 말급의 공무원 진출이나 적극적인 정계진출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암흑의 세계에도 빠르게 진출한다. 지금이야 미국 갱영화 하면 『대부』를 비롯한 이탈리아 계통의 마피아를 떠올리지만, 『대부』의 알 카포네가 자기 권력을 확립하면서 축출해낸 이전 갱이 바로 아이리시 갱 두목인 오배니언이었다. 코엔 형제의 걸작 누아르 『밀러스 크로싱』은 바로 아이리시 갱들 사이의 세력다툼에 관한 영화이다. 갱과 노동조합의 결탁을 고발했던 영화들, 예컨대 『워터프론트』 같은 영화는 바로 아이리시 갱과 아이리시 노동조합의 결탁을 고발하는 영화들이다.

미국영화에서 또 재미있는 건 경찰과 소방관들이 대강 아이리시인으로 표현된다는 사실. 지금도 미국 전체 경찰의 1% 이상이 아이리시라 한다.『분노의 역류』에서 소방관들의 장례식에 백파이프가 동원되는 건, 미국의 소방관들의 꽤 많은 퍼센테이지가 아이리시이기 때문이다. (‘백파이프’하면 바로 생각나시리라.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매기가 푸른 곰과 싸우는 웰터급 타이틀 매치를 할 때 프랭키가 “밴드도 불렀다”며 백파이프 연주자들의 뒤를 따라 경기장으로 입장하는 장면을.)

이는 가난하고 전문기술이 없는 밑바닥 사람들이 빠르게 자리를 잡기 위해 선택한 직업들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리고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서부극에서 유난히 아이리시들이 많이 활약하는 현상도 이해가 된다. 대거 이민 당시 벌어진 남북전쟁에 아이리시들이 참전을 많이 했는데, 전쟁이 끝난 후 이들이 서부를 떠돌게 된 것. “존 포드” 감독의 서부극의 영웅 “존 웨인”이 바로 아이리시다.

그뿐 아니라 “존 포드” 그 자신이 아이리시로, 이 사람은 심지어 자기 사촌이 IRA 일원이었고, 아이리시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러한 정체성을 영화 전반에 걸쳐 만들어낸 감독이다. 그의 서부극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전형적인 ‘아이리시 성격’이며, 심지어 서부극이 아닌 “존 포드”의 영화 『분노의 포도』에서 극단의 빈곤으로 이곳저곳을 유랑하고, 그 와중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주인공 역시 아이리시 가정의 아이리시인이다.

원래 아일랜드 공화국에서도 90% 이상이 카톨릭을 믿는다. 주로 미국에서 터를 잡은 대다수의 아일랜드 출신들은 미국에서도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백인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백인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생활공동체의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교회가 아닌 성당인 것. 아이리시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영화들에 성당씬이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도 ‘교회’가 아닌 ‘성당’이, 목사가 아닌 ‘신부’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이리시 계통이기 때문이다.

3. 소중한, 나의,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이렇게 아이리시 코드들을 살펴보면,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프랭키가 매기를 향해 모쿠슈라, 즉 “내 소중한 나의 혈육”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조금 더 다면적으로 다가오고, 또한 사람들이 그토록 ‘모쿠슈라’를 연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조금더 짠하게 다가온다. 혹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매기가 경기를 벌이는 경기장 안에서 그녀를 응원하는 관중들이 심지어 아일랜드 국기를 들고 있기까지 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보수성이 더욱 드러난다.

아일랜드 국기

실제 자신의 피를 나눈 딸과 소식이 끊겨버린 그에게 ‘의붓딸’과도 같은 매기는, 아이리시들 특유의 문화습성을 가지고 있긴 해도 특별히 자기 뿌리에 대한 열망은 없다. 그녀는 자신의 팬들이 주로 아이리시라는 사실에 별로 개의치 않고, 병상에 누워서는 프랭키에게 “또 그놈의 잘난 게일 책 봐요?”라고 묻는다. 게일어 책을 노상 들여다보고 예이츠의 시에 심취한 프랭키와는 완전히 다르다. (예이츠의 시는 아일랜드의 전통문화유산을 영국의 문학 전통에서 새로이 정립하고자 했던 흐름에 서 있다.) 이들이 유사 부녀간의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 그리고 마침내 그토록 보수적인 사람으로 하여간 아들래미가 아닌 새로운 딸래미를 훈련시키고, 또 안락사하게 하는 정이란, 시대의 변화를 맞이한 진정한 보수주의자이기에 오히려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엔 아주 흐릿하게, 아이리시로서의 정체성이 놓여있고.

원래 민족주의란 보수적인 것이다. 우리 가족, 우리 민족, ‘우리’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우리’를 만들어가는 테두리를 어떻게 놓을 것이냐에 따라, 유연성있는 보수와 꼴통 보수가 갈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에겐, 제대로된 보수주의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립다. 똥배짱 부리면서 자식들을 쥐어패는 보수주의자 아버지가 아니라, 자식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접고서 자식이 가장 원하는 것을 해줄 수 있는 보수주의자 아버지. 또한 다른 이를 기꺼이, 자신의 가족으로, 혈육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보수주의자 아버지.

“클린트 이스트우드” 식의 보수주의가 놀라운 건, 원래 제대로된 보수주의가 그래야 하듯 넓디넓은 포용력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에 어느 한 구석은 찜찜한 느낌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의 전작인 『미스틱 리버』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나는 두 번 전율했는데, 한 번은 이 영화가 너무나 완성도 높은 걸작이기 때문이었고, 또 한 번은 가족주의와 가장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4. 맺으면서

미국이란 나라는 내가 어느 민족 출신이냐보다 내가 어느 국적의 사람이냐가 더 중요한 나라다. 워낙에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한 나라를 이루고 살려면 그건 당연할 수밖에 없다. 흔히 재미교포 2세, 3세가 한국어도 못한다고 욕하는 한국사람들이 있는데, 과연 그것이 온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자신의 뿌리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많은 미국인들이, 자신의 뿌리를 궁금해하며 아버지와 어머니 양쪽으로 가족나무를 그려나간다. 하지만, 그가 어디에 살고 있는가는 더욱 중요하다. 다양한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미덕, 그것이 특히 눈으로 척 보기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살 수 있는 미국이란 나라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미덕이다.

다양한 문화집단을 이루며 살고 있는 사람들의 특유한 문화습성을 서로 알고 이해하는 것, 그리하여 ‘공존’해 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 살펴본 아이리시 코드는 영화 전체를 관통해서 일관되게 나타나긴 하지만, 아이리쉬가 아닌 이들을 배척한다거나 미국 내 소 아일랜드를 세우자는 식으로 읽을 필요는 없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다른 문화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와중에 자신의 뿌리라는 걸 조금 더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막말로 아이리시가 아니라고 해서 매기의 팬이 못되는 것도,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보며 감동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흑인인 윌리와 스크랩(모건 프리먼)은 얼마든지 그 체육관에, 가족 비슷하게 받아들여졌고 말이다

이 글은, 어차피 한국에서만 살 사람이라면 별로 읽을 필요도 없지만, 미국영화를 조금 더 재미있게 보고자 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며 쓴 글이다. 이런 사족을 덧붙이는 것은 딴 게 아니라, 이 글에서 짚어본 아이리시 코드를 과도하게 배타적인 민족주의로 연결할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 참고서적 :
   박지향, [영국사 – 보수와 개혁의 드라마]

   오치 미치오 외, [마이너리티의 헐리웃]


 


영진공 노바리


 


 

“레드”, 오락 영화의 황금율이란 이런 것





영원한 다이하드 사나이, 브루스 윌리스를 전면에 내세운 <레드>는 주연급 캐스팅의 연령대에 잘 어울리는 은퇴한 CIA 요원들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제목이 된 RED라는 단어 자체가 – 공식적으로 정말 사용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Retired but Extremely Dangerous라는 뜻이더군요.

물론 현장에서 물러나 조용히 살고 있던 이들을 극히 위험스러운 존재로 만드는 이유는 따로 있는 것이죠. 은퇴한 CIA 요원들을 갑자기 살해하려고 달려드는 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왜 죽이려고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부여잡고 정신없이 달려나가는 – 미국 전역을 돌아다닙니다 – 전형적인 액션 영화의 내러티브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 <레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형적인 줄거리이지만 그것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연출의 몫이죠. <레드>는 무엇보다 코미디 영화의 기조를 시종일관 유지합니다. 코미디가 중심이 되면 허풍스러운 전개나 액션도 너그럽게 봐줄 수가 있게 되고 심각함에 몸을 긴장시키기 보다는 안락의자에 편히 기대어 누운 듯이 편안하게 감상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레드>는 코믹함을 기반으로 과장된 액션과 중년의 로맨스를 조화롭게 버무린 데다가 화려한 스타 캐스팅까지 더해지면서 오락 영화로서는 이 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요즘은 확실히 압도적으로 우세한 능력을 보여주는 액션 캐릭터가 대세인 것 같습니다. 이런 흐름을 만들어낸 것은 다름아닌 맷 데이먼 주연의 제이슨 본 3부작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여기에 사실적인 긴장감이 더해지면 금상첨화입니다.

<레드>의 주인공 프랭크 모스(브루스 윌리스)와 그의 옛 동료들 역시 CIA로 부터 ‘RED’ 인증을 받을 만큼 압도적인 능력의 소유자들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영화의 분위기가 보는 이들을 긴장시키는 서스펜스나 스릴러에 있지 않고 잔뜩 이완된 분위기의 성인용 코미디가 주조이기 때문에 남녀노소 모든 관객들을 다 만족시킬 수는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반면에 일단 이 영화가 자기 취향과 잘 맞는다고 생각하는 관객은 상당한 호평과 함께 반복된 관람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장르적 쾌감의 수위가 상당한 편이라 하겠습니다.




뉴질랜드 출신의 칼 어반과 좁은 사무실에서의 열혈 액션을 보여주는 브루스 윌리스의 노익장도 멋지고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신 헬렌 미렌의 ‘파티 드레스 입은 채로 중화기’ 액션 역시 너무나 근사했습니다만 <레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헬렌 미렌과 짝을 이룬 브라이언 콕스의 로맨스 그레이였다고 생각합니다.

<레드>는 프랭크 모스를 중심으로 불의한 시스템과 맞서 싸우는 동시에 새로운 인생과 사랑을 지켜낸다는 줄거리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이제 막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프랭크와 사라(메리-루이스 파커) 커플 보다 이반(브라이언 콕스)과 빅토리아(헬렌 미렌)의 오랜 세월 끝에 되찾는 사랑이 좀 더 보기 좋았습니다.

러시아의 이중 스파이였던 이반은 빅토리아와의 사랑으로 인해 조직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처지였지만 영화 속의 사건을 계기로 옛사랑을 다시 찾게 되는 인물인데요, 굉장히 많은 작품들 속에서 대체로 악역만 도맡아 해왔던 브라이언 콕스의 코믹 연기였기에 더욱 호감이 갔던 것 같습니다.




위험에 빠진 전직 CIA 요원 프랭크와 평범한 노처녀 사라의 로맨틱 액션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레드>는 톰 크루즈와 카메론 디아즈 주연의 <나잇 & 데이>(2010)와 매우 유사한 컨셉의 작품이라고 볼 수도 있을텐데요, 굳이 두 작품을 비교한다면 단연 <레드>의 압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레드>는 결과적으로 프랭크와 사라의 로맨스 비중이 적게 다뤄질 수 밖에 없었을 만큼 앞에서 언급한 이반과 빅토리아의 또 다른 로맨스가 있는가 하면 존 말코비치와 모건 프리먼의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 훌륭한 조연 연기까지 포진해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브루스 윌리스와 몸싸움까지 하게 되는 현직 CIA 요원 윌리엄(칼 어반)이나 최종적으로 ‘악의 축’ 역할을 하게 되는 군수회사의 CEO 알렉산더(리차드 드레이퍼스)마저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으니 한참 재미있게 달리다가도 결국 끝나고 나면 허전한 장르 영화로서의 한계가 있긴 하지만 이만하면 영화적 포만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하다고 하겠습니다.




칼 어반과 브라이언 콕스는 모두 제이슨 본 3부작에 출연했던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레드>는 드디어 노년의 나이에 접어든 제이슨 본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잘 유지해온 브루스 윌리스의 독특한 액션 캐릭터를 활용하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영화 초반에 보여주는 독거노인 프랭크 모스의 집 안 모습은 <다이 하드>의 존 맥클레인 형사이기 이전에 브루스 윌리스의 첫 출세작이 되었던 TV 시리즈 <블루문 특급>(Moonlighting, 1985)에서 침대 하나와 큰 여행 가방이 전부였던 데이빗 에디슨의 아파트를 연상케 합니다.

절대무공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코미디와 로맨스가 조합된 독특한 브루스 윌리스만의 이미지는 지금도 여전히 관객들에게 편안한 즐거움을 선사합니다.





영진공 신어지